몇 년 전 하던 일에서 물러나 쉬고 있을 때였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여행을 하고 싶어 여행지를 물색하다가 중국 구화산을 떠올렸다. 언젠가 아내와 TV로 〈등신불〉이라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아내가 등신불의 시발지인 중국 구화산 지장도량을 한번 가봤으면 좋겠다고 한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는 당장 짐을 꾸렸다. 평생 고생만 한 아내가 같이 가자고 하면 얼마나 좋아할까 생각하면서.

아내는 절집 마당에서 자라다시피 한 불자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약혼도 절에서 했고 결혼식 주례도 스님께서 해주셨다. 그런 것을 보면 내가 아내를 무척 좋아했었나 보다. 그걸 다 받아주었으니 말이다.

여행의 첫 도착지는 상해였다. 중국어는 겨우 차표 정도 끊을 정도의 맹랑한 실력이었지만 자신만만하게 시작한 여행은 첫날부터 실수 연발이었다. 상해를 거쳐 항주, 황산 그리고 지장도량 구화산 입구에 도착하기까지 약 일주일간의 여정은 풍광을 즐기는 즐거움보다는 어디 가서 제대로 밥을 먹을 수 있을까, 차는 제대로 타고 가는 것인지, 잠은 제대로 된 곳을 찾아 들어간 것인지도 모를 정도로 긴장의 연속이어서 아내와 나는 일주일 만에 이미 지쳐 있었다.

구화산은 산속 깊은 곳이라 그런지 산장이라는 간판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이왕 산에 왔으니 호텔보다는 산장이 나을 것 같아 산장으로 가서 가격을 흥정했다. 아내는 산장 안을 둘러보더니 호텔로 가자고 했다. ‘이곳에서는 자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호텔은 1박에 400위안, 산장은 200위안으로 2배의 차이가 났다. 내가 보기에는 시설 차이가 별로 안 나는 것 같아서, 잠자는 것은 똑같으니 시설은 조금 열악해도 산장에서 묵고 남는 비용으로 더 많은 곳을 여행 다니자며 설득했다.

그러나 아내는 이미 지친 상태라 편히 쉬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는지, 너그러운 보살심은 어디로 보내고 죽어도 산장에서 못 자겠다고 고집부렸다.

일순 나도 모르게 화가 벌컥 났다. 지난 일주일 동안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차표 끊느라 고생한 일, 밥 먹으러 들어갔다가 먹지도 못할 음식을 시켜 돈만 낭비한 일, 또 황산에 올라 하산 길을 잃고 헤맬까 노심초사하던 일 등 나름 쌓인 스트레스가 폭발한 것이다. 나는 ‘지금 내가 말도 잘 안 통하고 해서 행여 잘못될까 봐 얼마나 긴장하며 가이드하고 있는데 위로는 못할망정 잠자는 일로 그리 고집을 부리냐’고 하면서 산장에다 짐을 풀어 버렸다. 방을 둘러보니 곰팡이도 피어 있고 쾌적한 편은 못 되었다. 그래도 고집을 부리고 들어온 터여서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곳 구화산이 어떤 곳인가. 지장보살의 화신이 된 김교각 스님이 지옥에 있는 모든 중생이 구제될 때까지 불을 밝히고 있겠다는 성지다. 김교각 스님은 서기 721년, 24세의 나이로 신라를 떠나 당나라에서 출가한 이후 이곳 구화산에 자리를 잡고, 75년을 수행했다. 99세에 열반할 때까지 “중생을 제도한 뒤에야 보살과를 이루고, 지옥이 비지 않는 한 성불하지 않으리(度盡衆生, 方證普提; 地獄未空, 誓不成佛)”라는 맹세를 하며 보살행을 펼쳤다.

스님의 일화는 참으로 많다. 가사를 던지니 구화산을 다 덮었다는 것이나, 동물을 잡으려고 파놓은 웅덩이에 빠진 장사꾼을 구했다는 보살행 등 많은 일화가 구화산 곳곳에 서려 있다. 스님의 기록을 적어놓은 〈화성사기〉에는 스님이 입적할 때 “종을 쳐도 소리가 나지 않고 땅에 굴러떨어졌으며 산이 울리고 뭇짐승과 새들도 슬피 울었다.”고 전하고 있다. 열반한 스님을 함(函)에 넣어 모셨는데 3년 후에 열고 보니 얼굴색이 변하지 않아 등신불인 지장보살로 모시게 되면서 이곳은 더욱 유명한 성지가 되었다.

시성 이백은 시 한 편으로 지장보살의 보살행 은덕을 이렇게 읊고 있다.

대웅(大雄)의 비침이 가리니 해와 달도 붕락(崩落)하는데
오직 부처님의 지혜만이 생과 사의 빛을 씻는다네
널리 자비의 힘을 입고 빌어 능히 가없는 고통을 구제하네
홀로 억겁에 나와 횡류(橫流)를 열어서 인도하니
곧 지장보살의 사랑이 있음이어라
— 이백 〈지장보살찬〉

이렇게 성스러운 곳에서 첫 일정을 싸움으로 시작하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중생이 우리 부부였다. 보살행을 해도 시원찮은 곳에서 아귀다툼이라니, 이곳 지장보살 도량은 뭐하러 왔는가. 에잇! 기분 참 그렇다 하면서 나는 아내가 들어오건 말건 침대에 쓰러졌다.

잠시 피로를 푼다는 게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눈을 떠보니 저녁때가 다 되었는데 아내가 방에 없다. 카메라만 챙겨 들고 거리로 나서니 여러 사람이 지나가는 행렬이 보였다. 오체투지로 삼보일배하는 행렬이었다. 추측건대 산 아래 주차장에서부터 계속 부처님께 삼보일배하며 올라오는 사람들 같았다. 아내는 아직 화가 안 풀린 얼굴로 그걸 쳐다보고 있었다.

오체투지 하는 사람들을 보는 순간 사진 찍을 요량으로 나도 모르게 아내에게 “저 뒤에 서서 같이 걸어와. 사진 찍게.” 하며 말을 걸고 말았다. 사진 욕심에 엉겁결에 아내에게 말을 한 것이다. 아내는 나를 힐끗 돌아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갑자기 행렬에 들어가 함께 삼보일배를 했다.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데 이건 또 무슨 깨달음인지 갑자기 내가 미안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내는 그동안 얼마나 속이 상했겠는가. 중국말도 못하면서 배낭을 메고 이리저리 헤매는 모습을 보며 아내인들 맘이 편했을 리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큰소리를 낸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아내가 고마워졌다. 저 지극한 오체투지의 삼보일배가 나의 마음을 순화시켜준 것이다. 모난 돌이 수없이 많은 파도에 의해 몽돌이 되는 억겁의 시간이 한순간에 지나가고 있었다.

행렬은 등신불이 봉안된 육신보전으로 올라갔다. 그 일행을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묵언 수행하듯 합장한 채 따라갔다. 나는 그만 밥 먹으러 가자는 말도 못 하고 엉거주춤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행렬이 육신보전에 이르렀다. 마지막 예불 행사까지 마친 아내가 환한 얼굴로 내게 걸어왔다. 언제 싸웠냐는 듯 팔짱을 끼며 “나 배고파. 우리 밥 먹으러 가자.” 한다.

갑자기 경내에 가득 퍼진 은은한 향기가 느껴졌다. 마치 연꽃 속을 거니는 것처럼 내 몸에서도 향내가 나는 것 같았다. 과연 구화산은 모든 중생을 지옥에서 건져내는 지장보살 도량이었다.

towoo54@hanmail.net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