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살 때부터 스물두 살 때까지, 2년 동안 나는 일요일마다 절에 갔다. 일요일마다, 라는 표현이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절에 가지 않은 일요일보다 절에 간 일요일이 더 많았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절은 집에서 거의 두 시간 거리에 있었다. 제시간에 도착하려면 늦어도 6시 반에는 집을 나서야 했다.

여름의 오전 6시 반은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믿을 수 없이 이미 환했고, 겨울의 오전 6시 반은 새벽이 끝났을 시간인데도 믿을 수 없이 깜깜했다. 날마다 아침이 오는 시간(혹은 밤이 오는 시간)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 매우 신기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 자체가 매우 신성한 ‘어떤 것’으로 여겨지던 그런 시절. 시간의 축을 누군가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옮겨 놓는 것.

처음, 그 절을 가게 된 건, 순전히 어머니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나름 독실한 불자셨고, 내가 종교적인 종류의 어떤 마음을 배우기를 원하셨던 것 같다. “너는 불심이 강해서 일요일마다 부처님 곁에서 봉사하면 좋아.” 지금 생각해보면 저런 식의 주장-너무 독특하고 약간은 어이없는-에 어떻게 스물한 살짜리 여자애가 홀라당 넘어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너무 오만한 말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설령 그게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그 시절을 통해 종교적인 어떤 마음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물론 무보수는 아니었지만, 나는 절에 가는 게 싫었다. 내가 불심이 강했든 어쨌든, 보수가 있든 없든, 나는 절에 가는 게 싫었다. 절은 너무 멀었고, 가봤자 모르는 사람뿐일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어두운 길을 혼자 걸어, 지하철역까지 가는 것이 싫었다.

그 시절 자주 듣던 음악이 있다. 기돈 크레머가 연주하는 〈피아졸라〉였다. 그걸 들으면 여전히 그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스물한 살의 나, 스물두 살의 나. 이상한 건, 언제나 겨울의 내가 떠오른다는 점이다. 사위는 깜깜하고, 내가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빈 버스가 지나간다. 날카로운 새벽 겨울의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가끔씩은 조깅하는 사람들이 건강한 걸음걸이로 나를 지나가곤 했다. 나는 대개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5분 정도의 시간 내내 풀이 죽어 있었다.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탄 후에 버스를 탔다. 절은 산 중턱에 있었기 때문에 버스에서 내린 후에는 절에서 운행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또다시 기다려야 했다. 나는 이어폰을 낀 채로, 신도들 틈에 끼어서 줄을 섰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버스 정류장(이라고 불러도 될까?) 앞쪽에는 기다란 목조 구조물이 서 있었다. (그리고 이건 거의 정확한 기억인데) 어째서인지 그곳에 걸려 있던 디지털 시계가 여전히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7:10이라고 적힌 빨간 숫자가 미세하게 깜박거리고 있었는데, 내 귀에서는 여전히 기돈 크레머의 피아졸라가 웅웅거리고 있었고, 뿌옇게 어두운 하늘에 비둘기들이 날아올랐고, 한 초췌한 남자가 비닐봉지를 들고 신도들에게 구걸하고 있었다. 불자들이 구걸하는 남자에게 좀 더 너그러웠던가?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기 때문에 나는 일요일마다 항상 구걸하는 남자를 거기서 본 것이었리라. 정말로 추운 날에는 절로 올라가는 버스의 창문을 통해 얼어버린 계곡물을 볼 수 있었다. 흐르던 물이 모양 그대로 얼어 있었다. 바위와 바위 사이에 물기둥이 허옇게 얼어붙어 있었다. 무엇을 저렇게 ‘흐르던 그대로’ 멈추게 할 수 있을까? 그러면 적어도 ‘끝’은 오지 않을 텐데. 스물한 살의 나는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나는 거의 2년 동안 그 절에 갔다. 그런 식으로 나를 움직이게 만든 게 무엇이었을까? 나를 거기에 가게 만든 힘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역시 시간은 많은 것을 해결해주었다. 나중에는 절에 가는 게-일찍 일어나는 것만 빼면- 그리 싫은 일만은 아니게 되었다. 보살님이라는 단어와 처사님이라는 단어가 익숙해졌고, 절에서 먹는 맛없는 밥에도 익숙해졌다.

행정실에서 근무하던 나보다 한두 살 어린 여자애들과도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그 애들은 그곳에서 생활하고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집에 간다고 했다. 번 돈은 모두 저축해둔다고도 했다. 그 애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니는 우리보다도 세상 물정을 몰라.” 나중에 거기 더 이상 가지 않기로 했을 때,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절에 간 날 나는 그 여자애들에게 피자를 사주었다. 우리는 절에서 내려와 버스를 타고 시내에 있는 피자헛에 갔다. 그 애들은 나에게 가끔 절에 놀러 오라고 말했지만, 그 절에 다시는 가보지 못했다.

한 가지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언젠가, 아주 늦은 시간까지 절에 남아 있었던 적이 있다. 왜였을까? 기억은 나지 않는다. 혼자였던가? 누군가와 함께였던가? 역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고요한 어둠 속에서 걸어 올라가던 계단이 떠오른다. 그때의 나는 이어폰을 끼고 있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가다 보니 대웅전 뒤편으로 커다란 마애상이 눈에 들어왔다. 늦은 시간인데도 절을 하며 기도를 올리는 신도들이 몇 명 있었다. 마치 세상에서 외따로 떨어져 나온 사람들처럼 그들은 기도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저 늦은 시간까지 기도를 올리고 있는 걸까? 나도 기도를 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창피한 마음이 들었다. 몇 번이나 시도를 했지만, 역시 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나는 그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러다 마애상을 한번 올려다보고,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그러니까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올라왔던 길을 다시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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