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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산, 세계일화의 원력으로 세상에 나아가다
특집 | 현대불교의 이상주의자들
[73호] 2018년 03월 15일 (목) 최용운 yuchoe@hanmail.net

1. 머리말

   

숭산행원
(崇山行願, 1927~2004)

일반적으로 이상주의와 상반되는 개념으로 현실주의가 사용되지만, 이 두 가지의 복합적 개념으로 ‘현실적 이상주의’ 혹은 ‘이상적 현실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이는 양 측면을 모두 갖추고 있거나, 상호 균형을 추구한 경우 사용되는데, 그런 관점에서 필자는 숭산행원(崇山行願, 1927~2004) 선사(이하 ‘숭산 선사’로 약칭함)를 ‘현실적 이상주의자’로 분류하고자 한다. 선사의 행적을 보건대, 원대한 이상을 항상 가슴에 품고 살았지만, 그 이상이 결코 이상으로만 머무르지 않도록 항상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 속에서 놀라운 적응력과 집중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상을 성취해가며 살았기 때문이다.

하기야 원래부터 선은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는 것이었으니, 수행자로서 숭산 선사의 자세는 선의 본래 모습을 추구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 수행의 목적이 깨달음 자체에 있는 것이라기보다 깨달음은 오히려 불교의 시작일 뿐 깨달은 내용을 실천해야 할진대, 선사는 현실 속에서 깨달음 실천의 중요성을 자신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생전에 이미 세계 4대 생불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던 숭산 선사에게는 선가(禪家)에서 추구하는바, “구할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無所求, 無所得)”는 대자유의 경지가 어울릴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선사의 생애와 사상에 천착해온 연구자로서, 그리고 현실 속에 발을 딛고 사는 세속인의 입장에서 선사의 꿈과 이상은 무엇이었을까 고찰해보고자 한다.

2. 연보와 행장

숭산 선사는 1927년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읍의 기독교 집안에서 출생하였으며, 속명은 이덕인(李德仁)이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막바지로 치달아 가던 1944년 선사가 평안공업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지하 독립운동단체 활동에 가담하기도 하였으나, 몇 달 지나지 않아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심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동국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좌우익 사상투쟁으로 남한 정치는 극도로 불안하였고, 동족 간의 살상마저 자행되던 당시 시대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결국 인간 본연의 마음자리를 찾기 위해 입산수도를 단행했다.

처음 몇 달간 선사는 유교의 주요 경전을 탐독하였으나 만족하지 못하던 차에, 작은 암자의 승려였던 친구가 전해 준 《금강경》을 접하면서 불교 경전에 강한 이끌림을 받아 여러 권의 경전을 독파한 후 출가를 결심하고 1947년 10월 공주 마곡사에서 계를 받았다. 이후 수행의 필요성을 절감한 선사는 원각산 부용암에서 100일 기도에 돌입하였는데, 말린 솔잎가루로 연명하며 하루에도 수차례 얼음물로 몸을 씻는 등, 극한의 고행으로 용맹정진하며 99일째 되던 날,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의 구별을 초월한 본각진성(本覺眞性)의 참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선사는 한 행객이 배낭을 메고 산을 오르는데, 갑자기 한 무리의 까마귀 떼가 나무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선사는 확철대오(廓徹大悟) 하였고,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읊었다.

圓覺山下非今路 원각산 밑 오솔길은 지금 길이 아니고,
背囊行客非古人 등짐 지고 오르는 이, 옛사람이 아니로다.
濯濯履聲貫古今 뚜벅뚜벅 발소리 옛날과 지금을 꿰뚫는데,
可可鳥聲飛上樹 까악, 까악, 까악 까마귀는 나무 위를 나네.

그 후 선사는 고봉 선사로부터 인가를 받고 수덕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경허성우(鏡虛惺牛, 1849~1912), 만공월면(滿空月面, 1871~1946), 고봉경욱(古峰景昱, 1890~1961) 선사로 이어지는 덕숭 법맥의 명실상부한 계승자가 되었다. 1952년 육군에 입대하여 1957년 중위로 전역한 다음 해 선사는 화계사 주지로 취임했다. 한편 효봉 스님, 동산 스님, 청담 스님, 경산 스님 등과 함께 불교정화운동을 추진했는데, 1962년 비구 · 대처 통합종단 비상종회 의장으로 피선되어 활약했다. 이 외에도 조계종총무원 총무부장(1961), 재무부장(1962), 초대 감찰부장(1962) 등, 전환기에 중책을 역임하며 종단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불교 언론계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는데, 청담 스님과 함께 〈불교신문〉의 전신(前身)인 〈대한불교〉의 창간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창간 7개월 후 신문사 제3대 사장에 취임했다.
1966년에는 종단의 요청으로 재일홍법원 설립을 통하여 해외 포교 행보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일본에서의 활약에 그치지 않고 1969년에는 그 지경을 홍콩으로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72년에는 미국에서도 홍법원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전 세계 30여 개국에 120여 개 이상의 지부를 둔 세계적 선 수행단체인 관음선종(The Kwan Um School of Zen)으로 성장했다. 선사는 국내에서도 1984년과 2000년에 각각 화계사와 계룡산에 국제선원을 설립함으로써 한국을 국제포교의 중심지로 만드는 작업에도 열정을 쏟았으며, 화계사 조실로 있던 중 2004년 입적하니 법랍 57세, 세수 77세였다.

3. 숭산 선사의 꿈과 이상

한국 근현대사에서 초지일관 변함없이 간절한 꿈과 이상을 가지고 그것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던 역사적 인물 한 사람을 선정하라면 필자는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 선생을 택하고자 한다. 아마 필자 이외에도 다수의 사람이 같은 의견을 갖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 이유는 바로 많은 한국인에게 익숙한 그의 글 〈나의 소원〉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의 자서전인 《백범일지》 상 · 하권 뒤에 추가된 〈나의 소원〉은 해방 후 선생이 국내에서 기술한 것으로서, 대한의 자주독립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이 번영함으로 말미암아 세계평화에 크게 기여하는 국가가 되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숭산 선사의 꿈과 이상을 서술하는 부분에서 뜬금없이 김구 선생의 소원을 이야기하느냐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겠으나, 선사의 생애는 오직 전 세계 많은 중생을 제도하고 이를 통해 세계평화에 기여하기 위해 바쳤던 인생이었기에 그 간절한 염원이 김구 선생의 소원과 일부분이라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김구 선생과 숭산 선사는 공주 마곡사에서 출가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젊은 시절 김구 선생이, 소위 ‘치하포 사건’이라 하여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인 밀정을 죽여 투옥되었는데, 이후 탈옥을 감행하여 피신하며 방랑하던 시기에 마곡사에서 출가하여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동학농민운동에 열성적으로 가담하여 접주로서 크게 활약했다는 사실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1년 만에 환속하였고, 그 후 대부분의 삶을 독립운동과 정치에 투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중생제도를 향한 숭산 선사의 한결같은 일념을 알 수 있는 한 일화가 있다. 선사가 입적하기 1년 전쯤 병세가 심각하여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시기에 하루는 선사가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게 되었는데, 그 고통을 보다 못한 어느 외국인 제자가 그 고통을 돈으로 살 수만 있다면 홍콩의 선원을 팔아서라도 선사에게 드리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선사는 그 돈을 받으면 다시 새로운 선원을 세워서 중생을 제도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선사의 모습에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은 그저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중생제도란 대승불교 출가승뿐 아니라 모든 불자가 지켜야 할 으뜸의 도리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니, 그런 기본적인 것 이외에 숭산 선사만이 가졌던 고유한 꿈과 이상은 무엇인가 하는 반문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으뜸의 도리를 등한시한 채 아무리 원대한 발원을 한다고 한들 그것은 허망한 울림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숭산 선사의 꿈과 이상은 가장 으뜸이요 기본인 중생제도를 중심으로 하되, 이를 선사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접근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중생제도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숭산 선사의 시도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국가나 민족의 경계를 넘어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하는 중생제도이며, 둘째 중생제도라는 불교의 본질적인 가치를 위해 시대적 · 문화적 여건에 따른 적절한 변용을 시도하고 있으며, 그리고 셋째 그것이 세계평화에 대한 기여로 이어지는 중생제도라는 점이다. 이 같은 세 가지 특징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자.

첫째,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하는 중생제도’와 관련하여 볼 때, 많은 불자가 중생제도를 말하지만, 그 대상을 전 세계인으로 두는 경우는 흔하지 않으며, 나아가 그것을 한평생을 통해 실천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 측면에서 숭산 선사가 추구한 중생제도야말로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한 중생제도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숭산 선사가 실천하는 중생제도는 선사만의 고유한 사상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통불교를 표방하는 한국불교의 기본적 특징을 토대로 하는 동시에, 중생제도라는 불교의 본질적인 가치를 위해 시대적 · 문화적 여건에 따른 적절한 변용을 추구하였다. 가령 승가 내에서 남녀차별이나 출 · 재가자의 구분과 같은 관습적 요소를 과감히 변화시킴으로써 시대적 요청에 맞는 승가공동체 구현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중생을 제도함에서 숭산 선사가 강조했던 또 하나의 특징은 화합과 협력을 통해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중생제도라는 점이다. 단순히 선사의 조국인 한국만을 위한, 그리고 선사의 종교인 불교만을 위한 중생제도가 아니라, 전 세계인을 위하고 모든 종교 간 평화에 기여하는 중생제도를 설파하였다. 후술하겠지만, 1987년 선사가 추진한 세계일화대회의 사상적 지향점을 통해서도 그 정신을 짐작할 수 있다.

4. 구체적인 실천과 성과

1) 〈불교신문〉의 토대 확립

국내 불교계 언론은 ‘근대불교의 여명기’라고도 불리는 1900년대 들어 태동하였다. 1902년에 창간된 《동양교보》라는 월간지가 국내 불교 언론의 시초라 할 수 있지만, 일본 정토종파가 일본불교의 국내 확산을 위해 발행한 것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불교계에서 창간한 진정한 의미의 국내 불교 언론의 효시는 원종(圓宗) 총무원에서 발간한 《원종》이라는 잡지이다.

이후 《해동불보》 《불교진흥원보》 《조선불교계》 《유심》 등의 잡지가 발간되었으나, 영세한 자본력과 일제의 극심한 단속과 압박 등의 이유로 1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폐간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1919년 3 · 1운동 이후에는 조선을 통치할 일제의 또 다른 고도의 통치전략인 문화정치 도입으로 언론과 출판 활동이 어느 정도 허용됨에 따라 《불교》 《불교시보》 등이 불교계 언론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해방과 6 · 25를 겪으며 20세기 중반 한국사회는 국내 거의 모든 분야에서 혼란과 혼돈의 상황을 겪게 되었고, 불교계 역시 정화운동에 따른 비구와 대처 간의 대립으로 인해 심각한 분쟁과 혼란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1959년 대처 측에서 자신들의 기관지 〈현대불교〉를 창간하여 대처 측을 옹호하고 비구 측을 비난하는 기사를 다수 게재함에 따라, 정화운동을 이끌던 당시 총무원장 청담 스님은 정화운동의 이념을 설파할 비구 측 언론의 설립을 간절히 희망하게 되었다. 마침내 1960년 1월 1일 〈대한불교〉라는 제호로 한국불교계 최초의 현대적 신문이 창간되기에 이르렀다. 〈불교신문〉의 전신인 〈대한불교〉는 창간 이후 1980년 11월 30일 자 제586호까지 20년 11개월 동안 ‘대한불교’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으며, 1980년 10 · 27 법난을 전후하여 〈불교신문〉으로 개명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한불교〉는 창간 이후 4년 9개월 동안은 월간으로 발행되었다가, 그 후 ‘주간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는데, 월간으로 발행되던 초기 4년 동안은 총무원 측 인사들의 잦은 교체로 인해 사장과 발행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유독 한 스님만이 예외적으로 창간 당시뿐 아니라, 월간에서 주간으로 전환된 이후에도 줄곧 막중한 역할을 유지하며 〈대한불교〉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는데, 그가 바로 숭산 선사였다.

숭산 선사는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청담 스님과 함께 사실상 〈대한불교〉의 창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 창간 7개월 만에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월간 시대에서 주간 시대로 넘어간 이후에도 역시 편집인 겸 인쇄인으로서 역할을 계속해 나가며 장장 13년 가까운 기간 동안 〈대한불교〉와 동고동락을 함께했다. 불교신문사가 펴낸 《불교신문 50년사: 한 장의 불교신문, 한 사람의 포교사》에도 숭산 선사는 “대한불교를 키운 종단의 제일 공로자”이며, “행원 스님이 없는 불교신문, 즉 대한불교는 존재할 수 없을 만큼 그 역할이 컸다.”고 너무도 분명한 표현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숭산 선사가 〈대한불교〉의 창간과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실로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대중포교 현장에서 불교계 신문이나 불교계 방송이 갖는 역할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최근에는 비록 짧은 역사에도 불교계 TV와 라디오 방송이 중요성을 날로 더해가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대중매체로서 불교계 신문 역시 그 역사나 중요성 측면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역할을 해왔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숭산 선사가 한국불교의 대중포교에 실로 지대한 공헌을 했음은 결코 과언이 아니라 하겠다.

2) 국경을 초월한 전법활동
숭산 선사 하면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해외포교 활동과 수많은 벽안의 제자들이 연상된다. 전술한 바와 같이 1966년 일본 도쿄 홍법원 개설을 시작으로, 1969년 홍콩 홍법원 개설에 이어 1972년에는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도 선원을 개설했다. 미국 북동부 대서양 연안의 로드아일랜드(Rhode Island) 주에 자리한 프로비던스(Providence) 홍법원이 그것인데, 이 선원이 오늘날 관음선종의 시초가 되었다.

관음선종은 전 세계 30여 개국에 120여 개의 선원이 연합한 조직으로 성장했다는 것은 한국불교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숭산 선사가 국경을 초월한 전법활동의 상징적인 존재로 여겨지게 된 최초의 발단은 한 우연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1960년대 중반 초동에 자리 잡고 있던 일본 서본원사 별원은 동국대학교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것을 헐고 새 건물을 짓고자 공사를 하던 중 지하실에서 4천여 구나 되는 일본군 유골이 발견되었다. 학교 측 의견이 그 유골들을 없애는 쪽으로 모아져 가던 중에 당시 동국대 상무이사와 조계종 총무부장직을 겸하고 있던 숭산 선사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선사는 비록 그 유골이 일제의 식민통치를 자행했던 장본인들의 것이라 할지라도, 훗날 한일 간 교류가 왕성해지고 그 후손들이 조상의 유골을 찾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출가자로서 도리가 아니므로 다른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마침내 선사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그 유골들은 화계사 명부전에 안치되었는데, 그 일이 있고 난 뒤 반년 만에 선사의 혜안은 빛을 발하게 되었다. 1965년 한일 간 국교 정상화가 성사되고, 일본의 기시 수상이 방한했는데, 수행단 일원으로 함께 방한한 일본의 정치인들과 주요 신문사 기자들에게 화계사에 안치된 일본군 유골에 대한 소식이 전해짐으로써 그 사실이 대서특필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공식적인 유골 인수를 요청했고, 일본에 산재해있던 한국인들의 유골도 찾아오게 되는 계기까지 마련되었다.

이 일로 숭산 선사는 양국 간 긴장 완화 및 화해촉진의 상징적인 인물과도 같이 되었고, 재일동포 불자들을 위한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는 적임자로서 이미지도 얻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타니 요시오라는 일본 국회의원이 서신을 통해 수차례에 걸쳐 재일 한국인들을 위한 전법활동을 요청해왔을 뿐 아니라, 한국 정부와 종단으로부터도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해줄 것을 권유받았다는 사실이 이것을 잘 증명한다고 하겠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이 추진 중이던 재일 한국인 북송작업을 막고자 고심하며 그 소임을 감당할 일꾼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학식과 설법에도 뛰어난 숭산 선사를 적임자로 보고 전적인 지원을 약속하며 일본행을 요청했던 것이다.

1966년 마침내 숭산 선사의 일본행이 성사됨으로써 도쿄에 재일홍법원이 개설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순조로울 것 같았던 출발이 상당한 난관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한국 정부에서 약속한 지원금이 늦어지는 바람에 사찰로 사용할 집을 구입하는 대신 셋집을 얻게 됨으로써 아주 궁핍한 여건에서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선사는 참여하는 신도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매주 법회를 열며 포교의 집념을 더욱 불태웠다. 뿐만 아니라 한국대사관과도 공조하며 조총련계 불교 신도들의 공작, 즉 불교교육 과정을 활용하여 신입 불자들을 세뇌 교육함으로써 북송하는 작업을 저지하는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러한 모든 노력이 열매를 맺어 재일동포나 일본인 가릴 것 없이 선사가 이끄는 법회와 참선교육에 참여하는 숫자가 점점 늘어났고, 신도들의 보시로 셋방에서 시작했던 법당을 벗어나 더 큰 사찰로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홍법원의 성공적인 정착은 1969년 홍콩 홍법원 개설로 이어졌으며 그 지경을 넓혀가던 중 마침내 1972년에는 전 세계 정치 · 경제 · 문화의 중심지 미국에도 홍법원을 개설하게 되었다. 선사의 미국행도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되었는데, 바로 선사의 동국대학교 동창이자 재미 사업가로 활동하던 유영수 선생이 매개체 역할을 한 것이다. 그가 동경을 방문한 길에 선사를 만나 미국 포교의 시급함을 강조하며 미국행을 종용하였으나, 선사는 일본과 홍콩에서의 포교활동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국행을 미루었다. 그런데도 유영수 선생은 무작정 선사에게 초청장과 비행기 탑승권을 보내왔다.

항공권까지 보내온 동창의 요청에 응하여 선사는 미국행을 감행하기는 하였으나, 당초 계획은 단지 3개월 정도 머물면서 견문을 넓히려는 것이었을 뿐, 장기적인 포교계획을 갖추고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숭산 선사로 하여금 미국에서 장기적인 전법활동을 감행하도록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했던 것일까? 미국 방문 길에 재미교포 불자들의 안내를 받으며 여러 지역을 둘러보던 중 뉴욕에서 일본 승려들이 운영하는 선방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곳에서 미국인들에게 참선을 가르치고 있는 일본 승려들을 보고 선사는 큰 자극을 받았다. 평소에도 어느 누구 못지않게 한국선의 정통성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선사에게 세계 최고의 대국 미국에서 참선을 지도하는 일본 승려들의 모습은 큰 충격이었고, 마침내 미국에서 선사가 직접 한국선을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이다. 마땅한 방도를 찾아 고심하던 선사는 미국으로 오던 비행기에서 만났던 김정선 교수(로드아일랜드 주립대)에게 연락하였고, 그가 미국 대학생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함으로써 선사의 첫 설법이 시작되었다.

프로비던스 변두리에 작은 아파트를 얻어 막상 시작은 하였으나, 미국에서 포교하는 일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경제적인 것이었고, 언어 문제도 큰 장벽이 되었다. 다행히 일본어가 유창한 브라운대학의 프루덴(Pruden) 교수가 동참하여, 선사가 일본어로 설법하면 그가 영어로 통역하는 식으로 진행하였고, 선사도 꾸준히 영어를 배워나갔다. 경제적인 부분은 선사를 비롯하여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조금씩 회비를 갹출함으로 해결해나갔다. 이때 선사가 세탁소에서 기계 수리를 하며 돈을 벌었던 일화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기도 했다. 모임의 규모는 꾸준히 증가하였고 마침내 돈을 모아 4층집을 얻어 본격적인 법당을 꾸몄는데, 이 모임이 현재 프로비던스 선 센터의 전신이 되었다. 그리고 전 세계 30여 개국에 120여 개의 선원이 결합된 관음선종이라는 조직으로 성장한 것이다.

3) 세계일화 사상의 실천

주지하듯이 세계일화라는 개념은 당대(唐代) 시인 왕유(王維)가 쓴 〈육조혜능선사비명(六祖慧能禪師碑銘)〉에서 유래되었다. “세계일화 조종육엽(世界一花 祖宗六葉)” 즉 “세계는 하나의 꽃이요, 조사의 종풍은 여섯 꽃잎이라”라는 의미로 초조 달마대사로부터 육조혜능에까지 이르는 선종의 전등(傳燈)을 묘사한 글귀이다. 이 말이 만공 선사의 법문에 담기며 오늘날 한국불교계에 널리 회자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16일 예산 수덕사 작은 암자에 머물던 만공 선사가 조국이 일제 치하에서 해방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하루 늦게 접하고서 내려오는 길에 길가에 핀 무궁화 몇 송이를 따서는 그 꽃으로 “세계일화”라는 글귀를 쓰고 다음과 같은 법문을 남겼다고 한다.

세계는 한 송이 꽃이니,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산천초목이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 ……중략…… 그래서 세계일화의 참뜻을 펴려면, 지렁이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참새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심지어 저 미웠던 원수들마저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요, 다른 교를 믿는 사람들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니, 그리하면 세상 모두가 편안할 것이라.

만공 선사의 세계일화 가르침은 그 법어로 끝나지 않고, 제자 고봉 선사를 거쳐 손제자 숭산 선사에게 이어졌다. 1949년 1월 25일, 선사는 고봉 선사로부터 법을 전수받았는데, 이것이 고봉 선사의 유일한 전법이었다. 건당식 후 고봉 선사는 숭산 선사에게 “네 법이 세계에 퍼질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봉 선사의 선견지명은 적중하여 만공 선사의 세계일화 사상은 숭산 선사 대에 와서 이 땅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전술한 바와 같이 프로비던스 홍법원을 시작으로 해서 전 세계 30여 개국에 120여 개의 선원이 결합된 관음선종이라는 세계적 조직으로 성장시킨 숭산 선사의 헌신과 노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세계일화의 가르침을 실현해가는 과정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그러나 선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세계일화대회(The Whole World Is a Single Flower Conference)를 추진했는데, 1987년 수덕사 제1회 대회를 시작으로 세계일화대회는 3년마다 전 세계를 돌며 개최되고 있다.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이 꽃을 들었을 때 천이백 대중은 무슨 뜻인지 모르는데, 그때 가섭 존자만이 빙그레 웃으셨거든.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내게 있는 미묘법을 너에게 전하노라’ 한 것이야. 세계일화는 바로 거기에서부터 출발된 것이야. 그러한 불조의 법맥을 계승해 오다가 맥이 끊어진 것을 만공 스님께서 무궁화 꽃을 들고 이 덕숭산에서 세계일화의 꽃을 피울 것이라고 함으로써 다시 이어졌고 그 이후 나는 만공 스님의 뜻을 받들어 세계일화운동을 전개했거든.

위와 같이 숭산 선사가 직접 밝힌 바처럼, 만공 선사의 세계일화 사상을 직접 실천에 옮기고자 세계일화대회를 추진했다. 이것은 “중생구제를 위해 절대 진리를 추구했던 초발심의 각오를 회향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절대평화의 연꽃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십우도의 마지막 단계인 입전수수의 길로 나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다른 국가에도 세계 여러 나라의 불자들이 모이는 큰 행사가 있지만, 이 대회는 오늘날까지 꾸준히 지속되며 전 세계 불자들이 함께 모여 세계일화 사상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고,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된 이 세계를 하나로 조화롭게 화합하는 장 역할을 하고 있다.

5. 현대불교에 끼친 영향

1) 한국불교 세계화의 가능성 증명 및 자신감 고취

숭산 선사가 일본행을 단행했던 1966년은 근현대 한국불교사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종단 차원에서 해외 전법활동의 공식적인 첫 관문을 열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일본에서의 성공적인 안착은 홍콩으로 그 지경을 확장하고, 1972년에는 미국에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럼에도, 그 당시 한국불교의 해외 진출은 아시아 여러 나라의 사례에 비해 볼 때 그다지 두드러진 행보라고 평가할 수 없었으며, 특히 이웃 나라 일본보다는 상당히 뒤처진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숭유억불의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기는 하였으나, 그 원인이 된 일제에 의해 한반도는 다시 수십 년간의 식민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그 기간 일제는 사찰령을 제정 · 반포하여 불교계를 통제함과 동시에 정책적으로 왜색불교화를 자행하였다. 마침내 해방을 맞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발한 민족 간의 전쟁으로 또다시 혼란의 시기에 진입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격동의 근현대사를 보내며 한국불교가 새로운 기틀을 갖출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기는 어려운 시대적 상황이었다.

일본불교의 경우 이미 19세기 말 시카고에서 세계박람회와 함께 열렸던 세계종교의회(1893년)에 불교계 대표단을 파송한 것을 시작으로, 20세기 중반에는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라는 걸출한 학자에 의해 미국 사회에서 일본 선의 가치가 집중적으로 부각되었다. 당시 스즈키는 미국 사회의 유명인사였는데, 그와의 인터뷰가 TV에 방송되었고, The New Yorker와 Vogue에까지 그의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비록 그에 대한 비판적 시각들이 적지 않게 존재하기는 하지만, 선 수행 경험도 일천한 한 사람의 선학자가 끼친 영향은 실로 유례를 찾기 힘든 것이었다. 특히 일본 선불교만을 놓고 보았을 때 그 가치를 서양에 뚜렷이 인식시키는 데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미국 사회에 수행으로서 선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50년대 후반으로, 일본 조동종 선사로 1958년 도미하여 샌프란시스코 선원을 건립한 스즈키 순류(鈴木俊降, 1904~1971)가 자체 농장과 수행처를 갖추고 본격적인 선수행을 선양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해외포교 측면에서는 후발주자였던 한국불교가 서양사회에 뿌리내리는 데에 숭산 선사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바탕으로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선사의 활약상은 한국불교 세계화의 가능성을 실제 포교현장에서 증명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한국 불자들 모두에게 자신감을 고취해 준 것이라 하겠다.

19세기 이후 유럽의 학자들로부터 시작된 불교에 대한 관심과 연구의 열정은 점차 대중에게까지 확산하게 되었다. 이후 이론적 영역을 넘어 종교로서 불교에 심취하는 서구인들이 점차 증가했고, 20세기 중반 미국에서는 소위 젠붐(Zen Boom)이라고 칭할 수 있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국불교는 그런 흐름에 별다른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숭산 선사가 멀리 타국 땅에서 홀로-물론 많은 도움의 손길이 있었지만-이루어낸 성과는 국내 불자들뿐 아니라, 많은 국민에게 상당한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외국인 제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생전의 숭산(뒷줄 가운데)


2) 서구문화에 적합한 한국불교의 변용 시도

숭산 선사는 한국불교 전통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선사가 미국에서 한국불교 전통을 토대로 중생제도를 펼쳐나가는 과정에서는 사상적 · 문화적 측면에서 상당한 차이와 이로 인한 장벽을 경험했다. 결국 선사는 가장 중요한 것은 중생제도라는 본질적인 가치이며, 이것을 위해 기존에 존재하던 한국불교의 전통적 관행을 서구문화에 적합하도록 변용하는 작업을 필요성을 인식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한국불교 전통 속에 존재하는 남녀차별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가령 관음선종에서는 비구니가 지도법사가 되어 비구들 앞에서도 당당히 법문한다. 이것은 관음선종이 성립될 당시뿐 아니라 오늘날 한국불교계에서조차 쉽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숭산 선사는 과감하게 남녀차별적인 한국불교의 관행을 개선함으로써 서양인들이 불교를 수용하기 용이하게 만들었다. 만약 성차별적 요소를 개선하지 않았더라면, 관음선종의 오늘날과 같은 발전은 기대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숭산 선사의 대표적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현각 스님이 주장하듯이, 숭산 선사가 미국포교를 시작하던 1970년대 당시 미국 사회는 이미 ‘성의 혁명’을 겪은 뒤였기 때문에, 급격히 향상된 여성의 지위로 말미암아 여성을 성별과 무관하게 한 사람의 동등한 인간으로 대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폭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숭산 선사도 처음에는 한국불교의 전통적 방식대로 비구와 비구니를 구분하였지만, 상당한 반발에 부딪힘에 따라 현지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미국적 상황에 맞게 계율을 수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녀차별적 요소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계율을 수정하는 행위를 숭산 선사가 처음으로 시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티베트 출신의 달라이 라마나 초걈 트룽파를 비롯하여 일본 출신의 승려 스즈키 로슈, 사사키 로슈, 마에즈미 로슈 등과 같이 미국에서 포교활동을 했던 불교 선사들 모두 승가공동체 내에서 성차별적 요소를 없애고자 노력하였다. 즉 전법활동을 펼치기 위해 미국에 갔던 대부분의 동양 승려가 현지문화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하지만 숭산 선사가 미국 포교를 위해서 부득불 방편적 측면에서만 여성차별적 요소를 제거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비록 승가공동체 계율 내에 존재하는 남녀차별적 요소를 배제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한 각성의 계기는 미국 포교 과정에서 얻었다 할지라도, 그 이후 지속적으로 숭산 선사는 남녀의 차별 없이 제자들을 대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숭산 선사는 관음선종 내부 조직을 남녀와 출 · 재가의 구분 없이 법사, 선도법사, 지도법사, 선사라는 네 단계로 구성하는 혁신적인 시도를 하였다. 이것은 앞서 서술한 남녀차별적 요소 이외에 출 · 재가의 차별까지 철폐하는 시도를 한 것이며, 이 역시 서구문화에 적응하기 위한 또 하나의 시도였다고 하겠다. 다만 이 또한 숭산 선사보다 먼저 미국에서 포교활동을 펼쳤던 일본의 삼보교단(三寶敎團)에서 시도했던 것과 유사한 형태이므로, 관음선종만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게다가 출 · 재가의 구분을 없애는 것은 남녀차별적 요소를 철폐하는 것만큼 범세계적인 중요성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그럼에도 남녀차별적인 요소의 철폐와 함께 출 · 재가의 구분을 없애는 시도가 서구에 불교를 전파하는 데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6. 맺음말

숭산 선사의 생애와 사상에 천착해 온 연구자로서, 선사의 ‘꿈과 이상’을 주제로 이 글을 작성하면서 그동안 해왔던 학문적 접근 이외에 또 다른 한 가지 작업을 시도해보았다. 그것은 선사에 관한 기존의 기록물이나 연구물에 대한 고찰 이외에, 선사의 마음을 읽어내기 위해 생전의 그의 삶 전체를 다시금 상상하며, 그 속으로 진입해가는 것이었는데, 마치 새로운 화두 하나를 참구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비록 필자의 수준에서 선사의 마음의 깊이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마는, 그런 과정에서 다시금 깊이 인식한 것은, 중생제도를 향한 선사의 일념이 얼마나 폭이 넓으면서도 유연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중생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선사의 지혜와 노력의 깊이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선사의 중생제도는 세계인들을 대상으로 세계평화를 지향하는 큰 폭을 가진 것이었으며, 불교의 본질을 유지하면서도 지역과 문화에 따라 적절하게 변용시키는 유연성을 가지는 것이었다. 또한 선사는 소통의 가치를 누구보다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불교신문〉의 전신인 〈대한불교〉 시절부터 장장 13년 가까운 기간 동안 편집인 겸 인쇄인으로서 묵묵히 대중과 소통하는 자리를 지켰던 점과, 국내 간화선 수행 현장에서 사라져 가는 입실참문의 전통을 부활시켜 수행 과정의 제자들과 끊임없는 소통을 해나갔던 행적 등이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숭산 선사의 행적이 오늘날 한국불교계에 제시하는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

최용운 / 서강대학교 강사.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졸업(문학박사). 주요 논문으로〈한국 간화선의 세계화를 위한 제안: 유럽의 불교 수용 맥락에서〉 “The Dilemma of the “Supreme” Zen Meditation Method in Korea and Rethinking the Zen Master Seungsahn” 등이 있으며, 저서로 《숭산행원의 생애와 사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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