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현대불교의 이상주의자들

1. 광덕의 자전적 고통과 시대적 고뇌

1) 약력

광덕
(光德, 1927〜1999)
비구 금하당(金河堂) 광덕(光德, 1927〜1999)

- 1927년 음력 3월 3일, 경기도 화성군 오산읍 내리. 부친 고준학(高準學), 모친 김동랑(金東浪)의
  2남 3녀 중 넷째로 출생. 속명 고병완(高秉完).
- 1942년(16세) 오산초등학교 졸업. 통신강좌로 중학교 졸업자격 취득. 서울 영등포의 일본인 회사
  고바이시광업사무소 취업.
- 1947년(21세) 한국대학(4년제 야간대학으로 ‘국제대학’으로 재건되었다가 현재는 서경대학교) 법정
  학부 입학. 박종홍 등으로부터 배움.
- 1950년(24세) 폐결핵 요양차 6 · 25동란 중 부산 범어사 입산. 동산 스님 만남.
- 1951년(25세) 동산 스님으로부터 오계 수계, 고(高) 처사로 수행정진. 동란 중 소천 스님의 ‘금강경
  독송 구국원력대’ 동참.
- 1960년(34세)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으로부터 사미계, 비구계 수지.
- 1974년(48세) 11월, 월간 《불광(佛光)》 창간. 〈한마음 헌장〉 선포.
- 1975년(49세) 서울 종로 대각사에서 ‘불광법회’ 창립.
- 1982년(56세) 서울 잠실 석촌호숫가에 ‘불광사’ 창립.
- 1992년(66세)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국악교성곡 〈보현행원송〉(박범훈 작곡, 지휘) 초연.
- 1999년 2월 27일 신병으로 입적. 세수 73세, 법랍 40세.

2) 자전적 고통 속에서

광덕 스님(이하 존칭 생략)의 사촌 누이 고병정은 광덕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화성에서 국민학교 졸업 무렵까지 동생과 아래윗집에 살았습니다. 동생은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효성스러웠고, 짓궂게 장난하거나 속 썩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조용하고 착하고 준수한 소년이었으나, 병약해서 자주 배가 아팠습니다. ……뒷산에 올라가 자주 노래를 불렀고, 작문을 잘해서 총독상도 받은 적이 있답니다. 공부를 워낙 잘해서, 처음에는 동네에서 3km 떨어진 광성국민학교에 3학년까지 다니다가, 오산국민학교 5학년에 월반해서 전학을 갔습니다. 당시로써는 쉬운 일이 아니었지요.

영특하고 조용하고 노래와 글짓기를 좋아하고……. 그러나 소년 광덕의 성장 과정은 그렇게 조용하고 안락한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의 성장 과정은 매우 곤궁하고 암울했던 것으로 회고되고 있다. 그는 빈농(貧農) 집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형편으로 중학교로 진학하지 못한 채, 형의 도움으로 통신강좌를 이수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던 중 태평양전쟁이 일어났고, 1942년 열여섯 살 때, 형이 죽고 곧이어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1947년, 스물한 살 때, 그가 가장 믿고 의지했던, 또 효성을 다했던 어머니마저 저세상으로 떠났다. 이 해 광덕은 폐결핵에 걸렸다. 1949년 어머니를 대신하던 둘째 누님이 죽고 곧 자형도 사망했다. 둘째 누님을 산에 묻고 내려오면서 그는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을 쏟아냈다. 가난과 사랑하는 가족들의 죽음, 폐결핵……. 이 중첩된 고통과 암울한 좌절은 어린 광덕, 청년 광덕의 감성에 깊은 그림자를 남겼고, 이 우울한 그림자는 출가 이후의 삶에서도 그대로 영향을 끼쳤다.

3) 시대적 아픔을 몸소 아파하면서

일제강점, 해방, 좌우 분열, 민족분단과 한국전쟁, 이승만 독재, 4 · 19혁명, 5 · 16과 유신, 민주화운동……
광덕이 소년기와 청년기를 살았던 1930년〜1960년대의 이 시기는 우리 동포들이 겪었던 암담하고 격동적인 시대적 상황과 일치한다. 이러한 시대적 어둠과 고통이 청년 광덕의 인생관 형성에서 또 하나의 큰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일제 말기, 1942년경, 10대 후반의 광덕은 통신강좌를 통하여 5년제 중학교 과정을 이수하고, 그 학력으로 서울 영등포에 있는 일본인 경영의 고바야시광업사무소의 정식 사원으로 취직하여 기숙사에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생활에 만족할 수 없었다. 글 읽기를 유난히 좋아하고 감수성이 예민했던 광덕은 망국민의 비애와 전쟁으로 인한 인간파괴에 대하여 매우 괴로워하였다. ‘조선 사람으로서 자신을 가지고 자립해서 사는 길은 없을까?’ 이것이 젊은 광덕의 화두였다. 그는 시대적 고뇌를 안고 그 출구를 찾아서 친구들과 밤새워 토론하고, 도서실에서 독서에 몰두하였다. 그러면서 ‘인생의 끝이 어디인가?’ 하고 고뇌하였다.

이러한 광덕의 시대적 고뇌는 출가 이후의 삶에서도 지속되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라 없는 시절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나라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뼈에 사무치게 알리라. 그러기에 나라를 위해서라면, 재산 명예는 고사하고, 목숨마저 버릴 각오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

4) 종단의 부흥을 위하여 목숨 걸고

비구 · 대처 간의 분쟁은 사찰쟁탈전, 법정투쟁의 반복, 6비구의 할복자살 기도 등을 낳았다. 이런 와중에서 사찰은 황폐화되고 불교의 권위는 대단히 실추되었다.

이것이 입산을 전후한 20대의 청년 광덕이 마주쳤던 종단의 현실, 한국불교의 현실이었다.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의 소위 ‘정화유시’로 시작된 비구 · 대처의 종권 투쟁을 계기로, 폭력적 갈등구조가 한국불교의 고질적 체질로 심화되면서, 불교적 열정에 불탔던 입산구도자 광덕은 이러한 종단의 황폐상을 참을 수 없는 고뇌로 괴로워했고, 그만큼 한국불교의 위신력을 회복하려는 열망 또한 더욱 강렬하게 불태우고 있었다. 광덕의 이런 열망은 이후 줄기찬 종단 사랑과 실제적 역할로 현실화되었다. 1975년 많은 이들의 고심참담한 노력 끝에 초파일이 법정 공휴일로 제정되었을 때, 광덕은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이번 부처님오신날의 법정 공휴일 제정은 그 의의가 막대하다. 그 하나는 조선조 이래, 박해를 받아온 불교가 해방 이후에는 영미 풍조에 밀려 또 차별을 받아오더니, 이제 차별이 철폐되고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국민을 키우는 대종교로서 긍정을 받은 것이다. ……불교는 어느 때나 진실한 생명 구호자가 되고, 역사와 사회에 진정한 인간승리를 기록한 향도적인 창조세력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목숨으로 지키고 연구 실천하여, 부단한 연구와 정진으로 전진하는 세대에 새로운 광명을 창출해야 한다.

2. 광덕의 사상적 기조와 맥락

1) 붓다의 가르침 위에 서서

‘광덕’ 하면 ‘반야바라밀’이고, ‘광덕’ 하면 ‘보현행원’이다. 따라서 광덕의 사상적 기초는 ‘반야행원’으로 요약될 수 있다.

‘반야’ ‘반야바라밀’이 광덕 사상의 키워드(key-word)이고 불광운동의 상징적 표어다. 이것은 불광 대중들이 ‘마하반야바라밀’을 일상적 인사말로 삼고 ‘바라밀염송’을 조석일과로 수행하고 있는 사실을 통해서도 잘 알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반야 사상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대승불교의 전유물도 아니고 광덕의 창안도 아니다. 위 인용문에서도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붓다 석가모니의 대각(大覺), 정각(正覺)의 핵심이 바로 ‘반야(般若, paññā)’다. ‘반야’란 용어 자체가 초기 경전의 paññā를 발음대로 옮긴 것이다. 우리 불교도들이 흔히 쓰는 ‘지혜’가 곧 ‘반야’다. 붓다의 가르침, 그 정수는 곧 ‘연민(karuṅā)과 지혜(paññā/般若)’다. 학승 W. 라훌라(Walpola Rahula)는 What the Buddha taught에서 이렇게 논하고 있다.

완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들이 계발시켜야 할 두 가지 자질이 있다. 하나는 연민(憐愍, Compassion, karuṅā/까루나)이고 다른 하나는 지혜(智慧, Wisd-om, paññā/般若)다. 연민은 사랑, 자애, 친절, 관용과 같은 사람들의 고매한 정서적 자질, 또는 심리적 자질이고, 한편 지혜(반야)는 사람들의 지적인 자질, 정신적 자질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완성을 위해서 사람들은 두 가지 자질을 계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불교도가 추구하는 삶의 목표이다. 이 삶 속에서는 지혜와 연민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반야’는 무슨 특정 집단이나 유파(流派)의 독점적 사상이 아니다. ‘바라밀’이라고 해서 달라지는 것 없다. 그런 의미에서 광덕의 ’반야바라밀‘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는 붓다의 가르침, 그 기초 위에 굳건히 입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반야바라밀’을 과도하게 신비화하고 만병통치인 것처럼 절대화하는 경향은 마땅히 경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반야’는 많은 붓다의 가르침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2) 반야 사상의 근대적 맥락

근대 한국불교에서 ‘반야바라밀’을 크게 선양하고 구국구세 운동으로 전개한 것은 소천(韶天, 1897〜1978)의 역할로 평가되고 있다. 소천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금강경》을 반야 사상으로 상징화하면서 반야바라밀화를 구성하였다’. 소천은 이에 근거하여 ‘금강구국운동 금강구세운동’을 제창하고, 6 · 25 동란의 민족적 위기상황에서 몸을 던져 ‘금강경 독송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51년 동란 중, 광덕은 범어사에서 소천을 처음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광덕의 사상 형성과정에서 하나의 결정적 전기가 되었다. 광덕은 소천이 머물던 범어사 산내 금강암에서 그와 함께 수행하며 많은 영향을 받게 되고, 몸소 소천의 ‘금강경 독송 구국대’에 동참하여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광덕 스스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6 · 25가 일어난 지 3년 뒤 1953년 무렵에 신소천(申韶天) 큰스님을 모시고 《금강경》을 번역해서 널리 퍼뜨리고 독송하는 불사를 했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번역된 《금강경》이 없었습니다. 경을 번역한다고 하면, ‘경도 번역하느냐’고 반문하던가, 또는 ‘번역하면 경의 존엄성이 깨진다’든가, ‘뜻이 바뀐다’든가 하면서 이해하지 않던 시절입니다. 그러나 그때 제가 모시고 배운 소천 큰스님께서는 “나라와 세계평화를 위해서 《금강경》을 독송하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의 선덕암입니다만, 그 당시에 마산 추산동에 있는 선도장이라 하는 곳에서 일주일 동안 번역을 하여 《한글금강경》 5만 권을 만들었습니다. 그 후 목욕탕집 이 층의 넓은 공간에 모여서 《금강경》 법문을 설하고, 《금강경》 독송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금강경》을 독송해서 나라를 구하는 원을 세워 《금강경》을 읽고 배우고 가르침을 행하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그 독송회의 이름이 ‘금강경 독송 구국원력대’였습니다. ‘금강경의 진리를 굴리는 대불사를 하자. 이 땅에 평화가 오고 전쟁이 종식되도록 기도하자. 정말 번영된 국토를 만들자.’는 원을 세웠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소천의 ‘금강반야바라밀’이 광덕의 ‘마하반야바라밀’로 계승되고, 소천의 ‘금강구국구세’가 광덕의 ‘대각행원 구국구세’로 확장된 것이다. 적어도 ‘반야바라밀-구국구세 사상’에서는 광덕은 소천의 충실한 계승자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광덕이 후일 《반야심경강의》에서 ‘반야바라밀’의 기본 경전인 《반야심경》을 강하면서 소천의 한글번역본을 거의 그대로, 몇몇 단어풀이를 보태는 정도로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새삼 확인되고 있다.

붓다의 ‘반야(般若, paññā)-통찰지’에 입각하고, 용성(龍城) · 소천(韶天) 등 선사의 ‘반야바라밀-구국구세’를 이어받고……. 이렇게 광덕은 충실한 계승자로서, 붓다와 스승들의 훈도에 충실했다. 바로 이 점이 광덕의 건강한 품성과 사상성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그는 ‘반야종’을 표방한 것도 아니고 ‘구국구세파’를 추구한 것도 아니다. 근대의 많은 걸출한 인물들이 종(宗)을 세우고 파(派) 운동을 벌임으로써 자신들의 입지를 드러내는 데 골몰하였다. 그러나 광덕은 한결같이 ‘조계종을 가장 사랑한 한 사람의 출가승’으로서 공만심(公慢心)을 가지고, 뿌리 깊은 나무의 줄기처럼 선대들의 혈맥과 법맥을 이어받아 꽃피우면서,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광덕을 유례없는 사상운동의 개창자나 한 종파의 종주(宗主)처럼 과도하게 숭배하려 한다면, 이것은 광덕의 본의에 어긋나는 것이고, 도리어 ‘충실한 계승자’로서 고매한 위상을 손상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광덕은 얼굴 가득 따뜻한 미소로 언제까지나 한 사람의 충실한 스승으로, 형제로 우리 곁에 머물기를 원하고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일찍이 광덕 평전(評傳)에서 이렇게 썼다.

용성(龍城) 선사, 동산(東山) 선사, 소천(韶天) 선사. 이 뛰어난 가문의 정맥을 이어 광덕 스님은 태어난 것이다. 용성 선사로부터 혈맥(血脈)을 이어받고, 동산 선사로부터 몸을 지어 받고, 소천 선사로부터 안정(眼精)을 밝혀 받아, 광덕 스님은 이 세상에 몸을 나툰 것이다.

3) ‘보현’과의 만남

그러나 광덕은 단순히 전통의 수동적 계승자가 아니다. 반야바라밀–구국구세운동의 계승자로되, 그 입론과 전개 방식이 새롭고 독창적이다. 무엇이 새롭고 독창적인 것인가? 다분히 논리적이고 관념적인 반야사상을 즉시 행동하고 창조하는 행위로, 곧 반야대행(般若大行)으로 점화시켜낸 것이 바로 그것이다. 광덕은 반야를 머리에서 끌어내 몸으로, 손발로, 구체적 삶으로 전환시켜 내고 있다. 건조한 ‘반야’를 열정이 솟구치는 뜨거운 ‘바라밀의 대행’ ‘바라밀의 열정’으로 살려내고 있다. 광덕은 《반야심경강의》에서 이렇게 논하고 있다.

원래 행은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며 역사적 현실을 움직이는 실질인 동시에 동력(動力)이다. 그러므로 행은 역사성, 사회성과 직결된다. 행이 없다는 것은 곧 역사의식의 결여를 의미한다. 대개 역사의식, 사회의식이 없는 종교는 그 사회를 번영으로 이끌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힘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반야의 참뜻을 바로 알아 ‘바라밀’의 대행을 전개할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건조한 ‘반야’를 역동적인 ‘반야대행’으로 전환시켜 낸 기제는 무엇인가? 그는 《보현성전》에서 이렇게 논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행히 ‘보현’을 만났다. 우리는 보현보살을 배워서 자신을 회복하고 인간 복권을 성취해야 하겠다. 그리하여 역사와 운명에 인간의 길을 부여하고 인간 진실을 개현하여, 인간 권위를 회복하고, 무한창조의 평원을 열어가야 하겠다. 필자는 불법이 인간을 그의 실존 차원에서 확립시키고 무한한 긍정의 평원으로 해방시키는 지혜이며 힘이라고 믿고 있다. 그것은 마하반야바라밀이라는 무상법(無上法)의 현전에 대한 믿음에서 온 결론이다. 그리고 ‘보현’이야말로 마하반야바라밀의 개현자이며 실천자인 것이다.

“‘보현’이야말로 마하반야바라밀의 개현자이며 실천자인 것이다.” 이 일구(一句)는 실로 명쾌하고 획기적이다. 여기서 광덕의 사상적 기조가 ‘반야행원’이라는 사실이 온전히 드러나고 있다. ‘마하반야바라밀’이라는 무상법이 ‘보현보살’ ‘보현행원’을 통하여 온전히 개현되고 실천되는 광덕의 실천적 사상체계가 명료하게 표명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광덕의 사상체계가 완성되고 있다. ‘반야바라밀’ ‘구국구세’가 선대들의 전승이라면, ‘보현행원’은 용성 · 동산 · 소천 등 선대들도 미치지 못하는 광덕의 독창이라고 할 것이다.

불광운동의 거점 잠실 불광사


4) 불광(佛光), 광명 찬란한 생명의 빛

‘보현행원’ ‘보현보살’. 돌이켜보면, ‘보현’이라고 해서 새로울 것이 없다. 한국불교에서 《화엄경》은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전으로 전승되어 왔고, ‘보현보살’ ‘보현행원’ 또한 한국불교도들에게 친숙한 명칭이고 독송경이다. 그들은 아침마다 ‘대행보현보살’을 찾으며 예경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광덕이 이 오랜 명칭과 구송(口誦)에 활기 넘치는 창조적 생명력을 불어넣음으로써 전혀 새로운 ‘보현’으로 일으켜 세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1992년(66세)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처음 연주된 국악교성곡 〈보현행원송〉(박범훈 작곡, 지휘)에서 광덕은 이렇게 결구를 노래하고 있다.

내 이제 목숨 바쳐 서원하오니
삼보자존이시여 증명하소서.
보현행원을 수행하오리.
보현행원으로 불국 이루리.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나무 대행 보현보살마하살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우리는 여기서 2,700년 불교사의 한 감동적 절정을 보고 있다. 세계불교는 오랜 세월 ‘아라한’ ‘성불’ ‘도인’의 허상을 좇으며 아비달마적 경전 해석, 교리 분석에 매몰돼왔다. ‘무아 · 공 · 자성/마음’을 찾는다며 눈감고 혹은 눈뜨고 앉아서 폐쇄적 수행에 함몰돼왔다. 암울한 퇴행의 긴 터널에 갇혀, 단순명료하고 역동적인 붓다의 삶을 잃고, 열정 넘치는 민중들의 창조적 생명 에너지를 사장시켜 왔다. 이것이 2,700년 불교사의 치명적 병폐로서 비판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지금 세계불교-한국불교는 경쟁력을 잃고 무력한 주변적 종교로 전락해가고 있다. 이것은 무슨 이론의 문제가 아니다. 눈앞의 문명사적 현실이다.

“내 이제 목숨 바쳐 서원하오니/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이 일구는 실로 깊은 밤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생명의 빛으로서, 이 땅의 많은 사람에게 충격적 감동으로 받아들여졌다. 수많은 대중이 대각사 법당과 잠실 불광사 보광전으로 넘치도록 몰려든 것은 바로 광덕이 내뿜는 이 찬란한 생명의 빛, 곧 불광(佛光) 때문이다. 광덕은 1974년 월간 《불광》 창간호에서 이렇게 이 생명의 빛을 노래하고 있다.

아침 해
바다를 솟아오른 찬란
억겁의 암흑이 찰나에 무너지고
광명 찬란
광명 찬란
광명만이 눈부시게 부셔지는 광명만의 세계-

이것이 광덕의 열정이며 행원이다. 이것이 새 생명, 새 역사의 문을 여는 불광운동의 정서며 에너지다. 이것이 한국불교의 신천지며 새로운 평원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불교는 관념적 수행의 허상을 박차고 달려 나와 역사와 민중을 향도하는 창조적 동력으로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실로 개벽(開闢)이라 할 것이다.

3. 광덕의 사회적 문제의식

1) 살아남기 위하여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불교계 전체가 무기력한 퇴행적 풍토에 침잠해있던 암울한 시기, 광덕의 ‘광명 찬란’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반야심경강의》에서 돌연 등장하는 생소한 ‘역사의식’ ‘사회의식’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모두에서 이미 관찰한 바 있는 광덕의 성장 과정과 시대적 상황을 새삼 주목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한 논문에서 이렇게 논의한 바 있다.

가난한 살림, 고향 떠남, 진학 좌절, 형과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죽음, 누님의 죽음, 폐결핵, 폐 절제, 위장 수술…… 일제강점, 전쟁, 해방, 좌우 분열과 민족분단, 한국전쟁, 이승만 독재, 군사혁명과 유신, 정화불사 이후의 한국불교의 처참한 몰락상…… 광덕이 겪어왔던 삶의 궤적들을 관찰할 때, 광덕은 이런 암울한 개인적 고통과 시대적 아픔을 짊어지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혼신의 힘으로 고뇌하고 도전하였다. 폐를 잘라내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생명을 찾고 절망의 어둠 속에서 밝은 광명을 찾아서 헤매고 부딪쳤다. 입산 후, 그는 병든 몸으로 목숨을 돌보지 않고 독서하고 참선하고 기도하는 치열하고 처절한 몸부림으로 이 역경을 겪어냈다. 이러한 몸부림은 한갓 철학적 고뇌를 넘어서는 생존적인 차원의 절박한 것이었다. “사는가, 죽는가?” 하는 문제로서 제기되고 있었다. 그는 관념적 공안으로서가 아니라 대사일번의 막다른 삶을 현실(現實)로서, 현장(現場)으로서 직면하고 있었다.……

“사는가, 죽는가?” 이렇게 광덕은 살아남기 위하여 온몸 가득 부딪치며 구원의 출구를 찾고 있었다. 특히 감수성 예민한 성장기에 내몰렸던 사랑하는 가족들의 죽음, 자신의 신병, 여기서 오는 죽음의 공포는 광덕의 깊은 마음에서 끊임없이 작동하며 그의 정서와 사유를 결정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자전적(自傳的, personal) 고통이 광덕의 사상 형성과정에서 가장 강력한 심리적 요인으로 작동한 것이다. 광덕은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불문(佛門)에 들어온 뒤에도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형과 아버지의 죽음이 떠올랐다. 인생, 누구나 죽음으로 부모 형제를 잃은 슬픔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그때, 왜 나만이 그런 슬픔을 안겨 주면서 죽는가, 하는 의문이 가슴을 짓눌렀다. 바윗덩어리마냥 나를 짓누르는 의문과 슬픔은 차라리 절망이었고 어둠이었다.

2) 치열한 사회적 문제의식

‘살아남기 위하여, 바윗덩어리같이 짓누르는 절망과 어둠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여기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광덕의 이 처절한 생존투쟁이 단순히 혼자 살아남으려는 개체적 자전적 욕구를 넘어서, 많은 사람들, 동포 형제들, 인류를 절망과 죽음의 어둠 속에서 구출하려는 초자전적(超自傳的, trans-personal)인 구국구세의 열망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덕은 월간 《불광》 창간호의 〈순수불교선언〉에서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헌데, 오늘날 우리의 世態는 그렇지만은 않다. 원래로 이같이도 밝고 따사로운 햇빛인데, 인류의 앞길에는 첩첩이 不安의 구름이 가려 보이는 것이다. 자원고갈, 환경파괴, 인구폭발, 異常氣象, 기아만연, 전쟁위기- 게다가 극도로 거칠어진 無道德의 물결은 우리 주변 어느 한구석도 안전지대로 남겨두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세계적 소용돌이 속에서 이제 새 역사를 이룩하기 위하여 꿋꿋하게 일어서서 벅찬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그중에서 우리의 주위에는 感覺과 物質爲主-유물주의의 亡靈이 폭풍처럼 우리의 視界를 흐리게 하고 知性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가치의 겁탈이며, 행복의 포기이며, 人間의 自己否定과 통한다.

우리는 여기서 광덕의 치열한 사회적 역사적 문제의식을 발견한다. 광덕이 문제 삼는 ‘절망과 어둠’은 상투적인 관념적 번뇌가 아니다. 광덕이 추구하는 ‘아침 해, 광명 찬란’은 환상적 신비적인 깨달음의 경지가 아니다. 그는 지금 이렇게 ‘현장(現場)’에 서 있다. ‘현실(現實)’에 서 있다. 그가 직면하고 있는 개인적 자전적 고통의 현장 현실을 넘어, 아니 그 속에서, 자신의 고통과 절망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 동포들, 인류의 고통과 절망을 보고,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찬란한 아침 햇빛, 불광을 열고 있다. 광덕이 추구했던 이러한 현장 중심의 치열한 역사적 사회적 문제의식이 그의 사상 형성에서 결정적인 내면적 심리적 동기로 작동하고 있다.

광덕은 불교 속에서 중생구원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불교 이전의 세속에서, 이 어두운 현장 현실을 부딪치며 고뇌하고 목숨 걸고 생명의 빛을 찾고 있다. 그 과정에서 반야바라밀을 만나고 보현을 보게 된 것이다. 이것은 광덕이 역경 속에서도 야간대학 법정학부에서 공부하고, 수행 이전 20대의 청년으로 소천의 구국원력대에 뛰어들고, 고(高) 처사로서 부산 좌천동 가정법회를 연 이력으로도 입증되고 있다.

4. 불광운동의 역사적 의의

‘광덕’ 하면 ‘반야바라밀’이고, ‘광덕’ 하면 ‘불광’이다.

이렇게 불광법회를 중심으로 하는 ‘불광운동’은 광덕사상의 실체이고 반야행원의 구현이다. 불광법회-불광운동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광덕 사상도 한갓 화려한 수사나 관념으로 표류했을 것이다. 불광운동의 구체적 전개과정은 이미 많이 규명되고 발표되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상론하지 않지만, 불광운동의 불교사적 의미는 실로 큰 것이다. 1974년 11월 월간 《불광》을 창간함으로써 불광운동은 점화되고, 1975년 열다섯 명이 둘러앉아 소천의 《금강경》을 공부하는 작은 모임으로부터 불광법회는 닻을 올렸다. 이후 40여 년, 잠실 석촌 불광사 중창에 이르기까지, 불광법회는 실로 많은 일을 해오고 있다. 광덕은 불광법회의 이념적 목표를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부처님이 보신 바에는, 인간은 어느 누구나 被造物이거나 相關的 존재가 아니다. 사람의 참모습은 절대의 自存者며 무한자며 창조자다. 잎에 신성과 존엄과 가치와 권위는 그로부터 由因한다. 그것은 인간이란 구극의 진리인 佛性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절대의 자존자, 무한자, 창조자, 구극의 진리인 불성의 실현, 반야광명, 본래청정, 자성광명, 사바 곧 정토-’
이것은 새로울 것이 없는 용어들이고 생각들이다. 대승불교-반야사상이 주창하는 이상들이고, ‘내가 곧 부처’라는 선종(禪宗)의 장담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2,700년 불교사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때, 이런 용어들은 관념적 구호로서, 상투적인 허상으로서 일컬어져 온 것이다. 실제로 행동하지 않으면서, 피땀 흘리며 이 세상을 정토로 변혁해내지 못하면서, 화려한 관념으로, 수사로 자기도취에 빠져, 현실을 외면할 뿐 아니라 왜곡하고 있다. ‘본래청정이다, 어둠 없다, 죽음 없다, 고통 없다-’, 이렇게 외친다고 도처에 가득한 이 엄혹한 동포들의 어두운 고통이 없는 것이 되는가? 눈앞의 이 ‘현장’ 떠난 ‘본래’는 본래 없는 것 아닌가? 이 현장 현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반야’ 아닌가?

〈한마음 헌장〉 이래 수많은 광덕의 언어에서도 이런 경향이 다분히 발견되고 있다. 화려한 언사(言辭)들과 추상적 관념들이 많고,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것을 보라’는 붓다의 표준과는 달리, 과도하게 ‘마음’을 관념화하고 ‘반야’를 절대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덕의 언어가 많은 사람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은 곧 이 말씀이 광덕이 고통과 구도의 현장에서 외치는 아픔 가득한 체험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 이 세상을 바꾸고 동포들을 구원하려는 절박한 사회적 문제의식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언어들이 말로,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적 현장에서 삶으로, 행위로 열렬히 실천되고 있기 때문이다.

‘월간 《불광》 발간’ ‘법등’ ‘호법발원’ ‘포살법회’ ‘포교사 교육’ ‘불광유치원’ ‘불광연구원’ ‘합창단’ ‘연화회’ ‘구호기관’…….

불광이 개척해온 이러한 다양한 활동들은 단순히 전법운동-도심포교운동이 아니다. 이것은 반야행원을 역사적 사회적 현장에서 구현해가는 시민불교운동으로서 추구되고 있다. 뿌리 깊이 온존되어 온 ‘출가우월주의’ ‘선민주의(選民主義)’의 낡은 허상을 반야의 빛으로 조파(照破)하고, 행원의 열정으로 실체적 시민불교운동을 일상의 현장에서 개척해내고 있다. 이렇게 해서 광덕의 사상은 화려한 관념-수사를 뛰어넘어 ‘순수불교운동’이라는 이름의 ‘시민불교운동’으로 실체화되고 있다. 우리 불교에서 거의 최초로 ‘법등’을 통하여 다양한 종류의 일반 시민들이 불교운동의 주체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광덕-불광이 현장의 대중적 시민적 실천을 통하여 오랜 고질 ‘관념불교’를 실체적 ‘시민운동’으로 극복해냈다는 데 불광운동의 역사적 의의가 빛나고, 또 이것은 불광운동, 우리 불교운동의 미래 과제로서 엄중히 제기되고 있다. 불광운동이 한 사찰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광덕의 불광운동이 아닐 것이다.

‘민중적 시민적 현장 없으면 불교 없다. 목숨 걸고 피땀 흘리는 시민적 현장 없으면 반야바라밀 없다.’

이것이 광덕-불광운동의 마지막 메시지일지 모른다. ■

 

김재영 / 동방불교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석사),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불교학 박사)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 동덕여자고등학교 교사 역임. 1970년 이래 현재까지 동덕 청보리회 지도법사를 맡고 있으며 빠리사학교 주임 강사이다. 저서에 《룸비니에서 구시나가라까지》 《초기불교개척사》 《초기불교의 사회적 실천》(박사학위 논문) 《화엄코리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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