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현대불교의 이상주의자들

1. 서언

지효
(智曉, 1909~1989)

1960년대 범어사에는 이상주의자로 불렸던 3인의 중견 승려가 있었다. 그 세 명의 승려는 지효(智曉, 1909~1989), 능가(1923~ ), 광덕(1927~1999)이었다. 이들은 각기, 당시 불교의 현실을 개혁하여, 자신들이 꿈꾸던 미래지향적 불교를 이룩하려는 의지가 확고했다. 지효는 수행도량인 총림(叢林) 건설을, 능가는 세계적인 불교단체의 건설과 종교 통합을, 광덕은 새 불교운동으로서 현대적인 도회지 포교의 원을 세웠다.

 이들은 탁마에 열중하며 자신들의 꿈을 키워 갔다. 당시 이들은 삼총사로 불렸다.

세월은 흘러, 그들 중 두 스님(지효, 광덕)은 입적하였고, 연로한 능가(2018년 현재 96세)는 자신의 이상세계를 아직도 조망하고 있다. 광덕은 허허벌판이었던 서울 잠실에 불광사를 세우고 불광운동을 추진하여 도회지 포교를 개척하였다. 그래서 그의 꿈은 실현되었고, 현재도 계승되고 있다. 그렇지만 지효는 자신의 이상인 자급자족하는 수행 도량인 총림 건설을 위해 노력했으나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총림 건설의 꿈을 실현하고자 분투하였던 지효가 입적한(1989. 9. 28) 지 어언 30년이 다 되어간다.

이 글에서는 지효의 생애와 이상, 실천적 행보, 그가 남긴 업적 등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는 수년 전부터 지효의 행적과 지향에 대하여 적지 않은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에 대한 간략한 글을 쓰고, 자료를 모아 왔다. 이런 관심은 지효의 은사인 동산(東山, 1890~1965)에 대한 증언 자료집을 발간하였던 것이 인연이 되었다. 이번 기회에 지효의 꿈이었던 총림 건설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의 이 글이 후학들이 그에 관한 연구를 이어가는 디딤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 지효의 삶과 수행

지효는 1909년 5월 8일, 평안남도 안주군 신안주면 운흥리 179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속명은 김병수(金炳秀)였는데, 유년 시절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20대 후반에는 만주에서 일본 군무원으로, 30대 초반에는 사업을 하면서 삶의 오욕(汚辱)을 겪었다. 그는 34세 때 생사 문제를 고민하다가 발심하여, 1943년 11월 15일 범어사에서 출가했다. 범어사 선원의 조실인 동산을 은사로 삼고, 지효(智曉)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는 입산한 다음 해부터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수행하였고, 1946년에 비구계를 받았다. 1947년 범어사 강원의 대교과를 졸업하고 이후에는 해인사, 통도사, 성주사, 다보사 등지에서 참선 수행을 하였다. 그는 1954년 5월부터 시작된 불교정화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는 그의 은사(동산)가 비구 측 종단의 종정으로 정화운동을 최일선에서 진두지휘한 연고와 더불어 불교를 정화해야 한다는 그의 소신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1954년 8월 24~25일 선학원에서 열린 비구승대표자대회에 참가하였는데, 이 대회는 정화운동이 본격화된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정화운동의 최일선에 나섰다. 비구승대회에서 종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1955.9.28), 개운사 대처 측 불법 회합의 저지 모임(1955.1.7), 정화 정신을 호소하러 간 문교부 방문단(1955.1.27), 경무대 방문단(1955.8.5) 등에도 그의 이름이 전한다.

정화운동 당시 지효의 명성이 널리 알려진 것은 조계사에서의 할복(割腹)이었다. 당시 비구승들은 조계사에서 단식을 하며 정화운동의 당위성을 호소하였다. 그러자 정화운동을 반대한 대처 측은 1955년 6월 10일 새벽 조계사에 난입하여, 정진 중이던 비구승들을 대웅전에서 내몰았다. 대웅전은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현장의 연로한 큰스님들(효봉, 동산 등)이 대처 측에게 구타를 당하는 모습에 분노한 지효는 자신의 복부를 자해함으로써 저항하였다. 당시 그를 지켜본 도광은 자신의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이날 최후 순교의 꽃으로 化할 瑞祥은 대처배들의 폭악무도한 습격으로 무수 亂打를 당한 金智曉 禪師께서는 평소에도 殉敎情神이 철저하였지만 이번에 帶妻俗漢 손에 맞아 죽기보다는 차라리 내 손으로 割腹하여 죽어버리겠다고 지니고 있던 4촌가량 되는 短刀로 자기 배를 세 번이나 찔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뱃가죽이 갈라져서 창자가 주먹만큼 나왔고 유혈 낭자해서 비린내가 近方에 진동하였다. 이것을 본 인간으로 누가 落淚치 않겠나. 복부의 옷을 열고 본 민도광 수좌가 “김지효 스님 죽는다”라고 외쳤다. 이 소리를 들은 대중은 哭聲이 진동하였다. 경찰들이 몰려들어 병원으로 이동하려고 시작하는 순간 김지효사는 혼미한 중에도 정신이 살아서 입원을 전적 거부하는 말이 “내가 살려고 이런 줄 아느냐?”고 하니 경찰서장이 때마침 달려들어 부하에게 명령하여 강제로 “자동차에 실어라”고 호령하는 소리에 김지효사는 재차 일어나 “지금 법당에서 대처배들이 목탁을 치는 소리가 들리니 나를 법당에 운반해주면 거기서 죽을 터이니 조속히 帶妻 惡徒輩들을 추방하고, 나를 法堂으로 옮겨 주시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고 나서 다시 쓰러져서 아무것도 모르고 영원의 길을 밟은 것 같았다. 김지효 스님의 정신은 천만년에 썩지 않을 氣魂, 李儁 · 安重根 열사 의기에 지지 않을 것이다.

대처승 습격 현장에서 할복으로 정화정신을 구현한 그는 피비린내가 나는 배를 부여잡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는 할복한 상흔으로 말년까지 고생하였다. 이런 정화현장의 일화로 인해 ‘김할복’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비구승이 주도한 정화운동은 1955년 8월 12~13일, 조계사에서 열린 전국승려대회를 기점으로 일단락되었다. 공권력과 일반 신도들이 비구 측을 지지했고 종권과 사찰 관리권이 비구 측에 인계되었다. 곧바로 조계종단의 종헌이 제정되고 집행부도 다시 선출되었다. 이때 종정으로 선출된 고승은 설석우(동화사)였는데, 지효는 종회의원 및 감찰원의 부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교무부장, 재무부장을 거쳐 석굴암 주지(1960), 불국사 주지(1963)를 역임하였다. 1962년 1월 15일, 은사인 동산으로부터 전법 건당을 하여 성운(聖雲)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그 이후에는 정화정신 계승을 모색하면서 범어사 주지(1965~ 1966)를 맡았다. 주지 소임을 마친 그는 1966년 봉은사를 거쳐, 천축사로 갔다. 당시 천축사에는 무문관이 설립되어 있었다. 그는 수행에 동참하여 5년간 동구불출, 폐관으로 참선 정진하였다. 1972년, 무문관 1차 수행에 이어, 2차 정진(6년)도 주관하였다. 무문관 수행은 제원 · 정영 수좌가 출발시켰지만, 본격적으로 이끌었던 주역은 지효였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정화불사가 마무리되었음에도 종단이 분규의 길을 걷자, 1972~1977년에는 감찰원장을 맡아 종단 안정을 위해 진력했다. 이 무렵 법흥사(영월)를 재건하고자 주지를 맡았다. 1978년에는 원로의원이 되었으나, 동화사(1979~1980)와 해인사(1980~1982)에서 안거 수행을 하였다. 노년인 1982년부터 1986년까지 범어사 주지를 다시 맡기도 했는데, 10 · 27 법난 직후 범어사의 우환(문도 분열, 재산 매각 등)을 해소하고자 함이었다. 이때는 행정적인 소임을 맡기보다는 범어사 극락암에 머물면서 수행하였고, 종신 수도원을 휴휴정사에 세웠다. 치열하게 정진하던 그는 1989년 9월 28일 입적하였다. 세납 81세, 법랍 47세였다.

그의 영결식과 다비식은 원로회의장으로 10월 2일, 범어사에서 거행되었다. 영결식은 성철 종정의 법어, 원로회의장 월산의 영결사, 석주(원로의원)와 의현(총무원장)의 조사, 추도사(이윤근 부산신도회장), 문도 대표 인사 등으로 이어졌다.

이렇듯, 범어사에서 입산하여 범어사에서 입적한 그의 생애는 범어사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3. 지효의 이상과 실천

서두에서 밝혔듯 지효의 꿈은 총림(叢林) 건설이었다. 총림은 수행자들이 자급자족하면서 참선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사찰을 뜻한다. 지효가 이 같은 이상적인 수행공동체를 꿈꾸었을 때는 총림을 표방한 사찰이 없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총림 사찰이 등장하여 조계종단의 총림 본사는 8개소가 되었지만, 이는 종합 수도도량의 성격이다. 선원, 강원, 율원 등을 갖춘 본사이다. 요컨대 지효가 의도한 선농불교, 즉 자급자족하며 깨달음 성취에 전념하는 도량과는 성격이 같지 않다. 지효가 염원했던 범어사 총림이 최근 등장했지만, 이 역시 그가 꿈꾸었던 총림의 모습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지효는 왜 1960년대 초반에 총림 건설의 원을 세웠는가? 그것은 불교정화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식민지 불교의 극복과 잔재 해소, 청정 비구승의 배출, 수행풍토 조성 등을 목표로 1954년에 시작된 불교정화운동은 1962년 통합종단의 출범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정화운동의 추진부터 문제점이 등장하였다. 그중에서 제일 문제가 된 것은 부적격자의 승단 유입이었다. 발심 부재, 자질 미흡 등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들의 승려 행세는 불교정화운동의 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부적격자의 승단 유입으로 주지 쟁탈전, 승가 재산의 매각, 권력 추구 등 여러 문제가 동시에 발생했다. 이런 문제를 직시한 청담을 비롯한 정화운동 주체들은 1950년대 중반, 정화운동을 추진할 때부터 영산도 건설, 총림 운영을 생각하면서 승려의 재교육, 교육에 의한 승려 배출을 염두에 두었다. 정화운동의 최일선에 있었던 지효도 뜻을 같이하였는데, 일제 강점하에서 선농불교를 주창했던 백용성의 실천적 행보도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격변으로 치달았던 정화운동의 성격상, 운동의 중도에 수행도량(총림)의 건설과 운영은 추진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그러자 지효는 1962년 4월부터 총림 건설을 꿈꾸고, 이의 구체적 실현을 위한 구상을 시작했다.

1) 문경 조령 일대 총림 구상

지효가 자신의 구상인 총림 건설을 최초로 추진한 시점은 1963년이었다. 그 대상처로 정한 곳은 경상북도 문경의 조령 일대였다. 이에 대한 사정은 〈대한불교〉 1963년도 3월 1일 자 보도에 전한다. 전문을 살펴보자.

再建叢林會 設立
模範的인 現代叢林으로 불교재건을 목적으로 하는 叢林이 여러 스님들의 노력으로 설립된다고 한다. 百丈淸規를 현대에 살려서 위축된 禪風을 거양하고 불교 중흥을 기하고저 하는 모임이 그동안 석굴암 주지 金智曉 스님에 의해 추진되어 왔는데 지난 二月 七日 총무원에서는 大韓佛敎 再建 叢林會의 정관을 인정하였다. 사업계획의 내용을 보며는 년차 五個年 계획으로 1963년부터 시작하여 완성 단계인 1967년에는 황무지 이천여 町步와 藥草 표고 栽培 植樹 등으로 개간될 것이며 僧侶 五百餘 名을 收容할 수 있는 石造建物과 外國僧侶도 收容할 수 있는 現代式 建物과 圖書館도 건립될 것이라고 한다. 이 會에서는 계속하여 佛敎的 社會事業 奉事會도 설립하여 慈善事業도 竝行할 것이라고 하는데 叢林再建을 위한 예산은 政府當局의後援과 全國四部大衆의 喜捨金 및 在日僑胞佛敎徒의 獻金으로 充當할 것이라고 한다. 현재 叢林 雄立의 台地는 鳥嶺一帶의 未開墾 山野이며 이 會의 臨時 事務所는 市內 돈암동에 있고 임명된 理事는 다음과 같다.
이사장 金智曉, 이사 및 회장 文圭熙, 이사 및 부회장 겸임 총무부장 李圭松, 감사 徐敎鎭, 감사 및 재정부장 겸임 사업부장 金思義, 감사 및 사회봉사사업회장 李能嘉

위의 기사에 의하면 ‘대한불교 재건총림회’라는 법인체가 지효의 주도로 5년간(1963~1967)의 활동을 계획하며 출범했다. 총림회는 백장청규를 현대적으로 계승하여 선풍 진작과 불교 재건을 목표로 하며, 조계종의 승인하에 추진되며, 장소는 조령 일대(예천)이다. 2천여 정보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약초와 버섯을 재배하며, 승려 500여 명과 외국 승려가 수행할 수 있는 현대식 건물을 건립하고 사회사업도 병행하며, 정부 · 신도 · 재일교포 등의 후원금으로 운영하는 방안 등이 마련되었다. 이 사업의 추진을 위해 종단 외곽에 사무소까지 두었다.

그러나 이 사업은 결과적으로 기획 단계에서 중단되고 말았다. 중단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종단 내부에서부터 반대가 적지 않았다. 여기에서 지효와 함께 총림 건설을 추진했던 추진한 능가(범어사)의 증언을 참고하자.

그 후에 여러 검토를 해서 종단에서 총림회의 정관도 만들고 하였지만 그렇게 꿈만 컸지, 그 사업은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어. 그렇게 안 된 이유가 또 있어. 청담 스님이 그것을 추진하자고 하는데, 나는 이해가 되고 그 생각, 사업은 평가를 하였는데 다른 중들은 다, 전부 반대야. 반대를 하는 주동자가 월하 스님이었고, 서운 스님도 반대했어. 그러나 나는 다른 중보다는 교육적인 사고방식, 감각을 갖고 있었고, 민감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는 적극 찬성했어요. 그래서 정관도 만들고 그랬지.

그때 대처승하고 합동종단을 한 것은 군사정권이 개입해서 되었던 것이지, 나는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 그래 자연적으로 실패할 때를 대비해야 한다고 보았지. 막상 실패하게 되면, 또다시 비구승과 대처승들이 쌈질이나 하는 방향과 제도로 나가게 되면 불교가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다고 본 것이지. 그래서 그 대책을 강구해 보니, 도제양성밖에 없어. 그런데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거점 사찰이 있어야 하는데 어디 안정된 사찰이 없어. 해인사도 그렇고 통도사와 범어사도 전부 대처승들이 한 가닥을 깔고 있었거든. 그러니 안정 사찰이 하나도 없어.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다, 이것은 해야 한다, 그러면 어디에 할 것인가를 궁리하였지. 이것은 예전에 청담스님이 이야기하던 영산회상도를 모델로 해서 어디 한 곳에 잡아야 돼. 이렇게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지. 총림은 이래서 출발이 되었지.

이렇게 지효가 종단을 배경으로 한 것은 종단의 상징인 청담의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중견 승려들의 반대가 심해 기존 사찰과는 무관한 예천의 조령 일대 황무지에 총림 건설을 추진하였다. 그래서 정관, 조직체, 예산을 검토하여 입안하였다. 그러나 후원을 하기로 한 재일교포와 종단 직원 간에 갈등이 노정되자 중도에 하차했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좌절한 것이다.

2) 범어사 총림 재추진

종단의 허가를 득하여 조령 일대에서 추진하고자 했던 총림 건설은 실패하였다. 그러자 지효와 능가는 자신들의 출신 사찰인 범어사에서 재추진을 모색하였다. 당시 범어사 주지는 그들의 은사인 동산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도제양성 차원에서 범어사에서라도 총림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을 개진하여 동산의 동의를 받았다. 그 사정은 능가의 증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때 그 재일교포 승려를 노장님에게도 인사를 시키고, 총림이 출범하면 노장님을 총책임자로 하기로 하고 그랬지. 그런데 개인감정 문제로 한발도 나가지 못하고 주춤거리게 되었어. 그 무렵 중앙은 대처승하고 아주 가열되었어. 굉장했어. 2, 3년간을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어. 이런 것은 내 생각하고 같은 결과였어. 그러니 종단 차원에서는 안 되게 되었으니, 범어사 중심으로 하자, 범어사에서라도 해야지 않느냐고 한 것이지. 그것을 지효 스님이 동산 스님에게 가서 보고하지는 않았고, 내가 보고를 하였지. 동산 스님하고 지효 스님하고는 잘 안 통했어. 그때는 우리 스님도 한국불교와 종단이 잘될 줄 알았는데, 점점 못되는 것을 보고서는 우리 스님은 열정적인 분이었기에 그냥 화가 머리끝까지 차 있었거든. 그래서 ‘저 청담이가 전부 망쳐 놓았다’고 하면서. 이런 과정에서 나는 대비를 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총림을 범어사에서라도 해야지 않겠습니까?” 하고 동산 스님께 말씀드렸어. 그랬더니, 동산 스님은 “그거 좋다, 그 방법밖에 없다”고 하셨어.

지효와 능가는 동산의 승인을 받아 범어사에서 총림 건설을 추진했다. 그런데 당시 범어사에서 추진한 총림의 개요와 내용을 전하는 문건은 찾지 못했다. 이것도 능가의 증언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 구상은 기본적인 것은 내가 구상했어. 그러나 나는 총무원에 있었기에 계획만 해 주고, 총림을 추진하는 범어사 현장을 주관하는 것은 지효 스님이 맡아서 했어. 지효 스님의 옆에는 문현구가 있었고. 그래서 문현구가 실무를 하고 도지사, 구청장 등을 만나고 서류를 제출하는 것을 하였고 그이가 그런 일을 잘하고 다니고 그랬어. 그 구상에는 범어사 화장실에서부터 시작하여, 내원암 근처에 철조망을 칠 작정이었는데, 그 대상 부지가 당초에는 20만 평이나 되었지. 그리고 총림의 문에는 공부하기 위해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써 붙이고, 그 안에서는 농사를 짓고, 채소 등의 일체를 생산하여 자급자족하기로 정하였지. 그리고 내원암은 조실채로 하였는데, 그것은 본래 내원이 옛날부터 조실채였기에 그리하였지. 청련암은 총림의 원주채로 하기로 했어. 이런 구도를 갖고 3만 평을 개간했어. 그리고 개간한 그 위의 2만 평에는 선방을 짓고, 그 밑으로 해서 양쪽에는 단계적으로 승려들이 사는 요사채를 군데군데 짓기로 하고, 전체에다가 철조망을 쳐서 담을 만들어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였지. 또한 청련암 근처에 큰 은행나무 있는 곳에 총림 출입문을 세워서 그곳에는 한번 들어가면 못 나온다고 붙이려고 시작한 것이지.

능가의 증언에 나오는 총림의 개요는 조령에서의 구상과 비슷하다. 범어사 뒷산 20만 평을 부지로 선방 건립(2만 평), 자급자족 농지 개간(3만 평), 동구불출, 보조 시설(조실채, 요사채 등)을 고려한 도제양성을 위한 총림이었다. 범어사 총림은 실질적으로 어떻게 추진되었는가? 능가에 의하면 종단의 후원은 없었다. 범어사 현지에서 총림 건설을 추동한 인물은 지효였고, 그를 옆에서 보좌한 인물은 청담의 상좌인 문현구였다.
그런데 당시 범어사에는 지효가 의도한 ‘총림’ 이외에 선찰(禪刹) 대본산인 범어사의 전통을 회복하고자 동산이 추진한 총림 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동산의 구상에서 나온 정황은 아래의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나라 선풍(禪風)의 발원지로 내외에 널리 알려진 이곳 梵魚寺는 숙원이던 총림(梵魚叢林)을 五백七십여만을 투입하여 완성하고 명실공한 선도량(禪道場)으로서 면목을 갖추었다. (중략) 이 나라 선풍의 대본산이라는 역사와 전통에 범어사는 2개의 보통선원과 하나의 특별선원, 비구니(比丘尼) 선원, 연구원 등 5개의 선원과 보수가 진행 중인 또 하나의 선원을 합하면 6개의 말쑥하고 웅장한 선원을 가지게 된다. 1백5십여 명에 달하는 대중은 종립 중앙총림의 方丈화상이신 東山大宗師의 영도하에 선풍진작을 위해 꾸준한 정진을 하고 있다.

1964년의 정황을 전하는 위의 기사에는 6개의 선원 건립을 목표로, 미래지향적인 현대선학연구소의 운영을 구상하고 있다. 그런데 기존 범어사 선원은 참선만 하는 공간으로 설정되었기에 선농불교, 자급자족과는 무관했다. 그 때문에 지효가 구상한 선농일치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만 하면 기존 동산의 기획과도 조화될 수 있었다. 그래서 동산도 동의하였고, 지효는 범어사 내원암 위의 산 중턱을 개간하여 농지조성을 추진하였다. 지효가 추진한 농지 개간은 동산이 입적(1965년)하기 이전에도 일부 성사되었다. 개간에 참여한 당사자인 선과의 회고를 들어보자.

지효 스님이 총림을 한다고 해서 논 개간을 할 때 우리가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조실스님 계실 적인데 행자들하고 같이 했어요. 그것은 박대월이라고 수덕사 문중인데 후에는 진흥이라고 이름을 바꾼 스님이 그것을 맡아서 했지요. 그 스님 소임이 원두, 요샛말로 농감이었는데, 그런 것을 좋아했고요. 우리 스님도 그곳에 가보고 좋다고 해서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하여간 지효 스님은 이상론자입니다. 그래서 따라붙는 사람이 많았어요. 제가 그것을 추진한 계획은 잘 모르고, 노장님은 항상 승려를 교육시켜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고, 교육을 현대적으로 해야 한다, 심지어는 영어를 공부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지효가 총림 건설을 위해 범어사 내원암 위에서 개간을 시작하던 무렵인 1965년 봄, 범어사 주지인 동산이 입적하였다. 동산 입적 후, 지효는 범어사 주지가 되었다. 이제 그는 자신이 구상한 총림 건설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정황은 〈대한불교〉 1966년 6월 26일 자 기사에 나온다.

본래 범어사의 계획은 5만 평의 개간을 목표로 했었으나 우선 1차로 3만 평의 개간을 마치고 이 농원을 중심으로 한 수도원을 창설할 것을 아울러 추진 중이다. 추진되고 있는 선원은 농원의 경작을 중심으로 ‘一日不作 一日不食’의 百丈淸規를 ‘모토’로 완전한 자급자족의 수도원 생활을 구상하고 있다. 이 선원은 자급자족의 원칙으로 하며 외부와의 일체의 교류가 차단되고 범어사 뒷산 전역이 선원에 들어가 일반의 출입도 금지될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원 경제의 확립과 百丈淸規에 의한 선원은 한국불교 중흥에 한 모범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동산의 입적 1년이 지난 정황이 위의 내용에 범어사 뒷산에 농지 3만평을 개간하였고, 이 농원을 중심으로 수도원의 건립이 계획되었음이 나온다. 이는 상당한 진척이었다. 일일부작, 일일불식이라는 백장청규의 이념에서 범어사의 총림 건설은 지효가 조령에서 추진하려 했던 사업과 본질이 같다. 요컨대 1966년 6월 무렵 범어사 총림 건설을 위한 개간사업의 1단계는 완료되었다.

그러나 지효가 추진한 범어사에서의 총림 건설은 결과적으로 성사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그 원인을 필자의 관점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효는 자신의 구상을 범어사 대중에게 동의를 받지 않고 추진하였다. 그래서 선방 수좌, 동산 문도, 신도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둘째, 총림 추진의 재원을 범어사 인근의 범어사 토지(2만 평)를 팔고, 그 재원으로 추진한다는 기획이 문제였다. 사찰 농지의 매각은 종단과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아야 가능한데, 이는 법적으로 불가했다. 셋째, 이와 같은 모든 기획이 공개되지 않았고, 일부 기획자(지효, 문현구)의 결단으로 비밀리에 추진되어 공적 사업이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대중의 이의가 제기되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공적 논리가 부재하였다.

그래서 지효는 대중들의 반발을 이겨내지 못하고, 주지 소임을 중도에 그만두고 범어사를 떠났다. 그는 뒤처리를 그의 사제인 현욱에게 맡기고 범어사를 떠나 봉은사에 머물렀다. 범어사의 총무 겸 주지 직무대행을 맡은 현욱은 지효와 그 사업의 재원 제공자이면서 개간을 추진한 민간 사업자인 이용범이 맺은 계약을 무효화시켰다. 당시 지효의 부탁을 받고 뒤처리를 한 현욱은 지효의 총림 건설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지효 스님이 그간 범어사에서 잊히고, 방치된 감이 있지만, 그 스님의 의도, 도인을 양성하겠다는 각오, 정화 시에 배를 갈랐던 정의감 등은 반드시 기억해주어야 합니다. 그 스님은 절대 수좌입니다. 그런 일념이 있었기에 수도원을 만들려고 한 것이지요. 지금 종단을 지키려고 창자를 꺼냈던 지효 스님의 행적과 정신을 재부각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지효가 추진한 범어사의 총림 건설, 도제양성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필요함이 드러난다.

열반 직전까지 범어사에 주석, 수행에 몰두하던 지효


3) 법흥사 선원 복원 추진

범어사에서 총림 건설을 추진하다 좌절을 겪은 지효는 거처를 봉은사에 정하고 머물렀다. 그는 봉은사에서 그의 꿈을 펼쳐보려고, 당시 봉은사 주지인 광덕에게 자신의 포부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광덕은 그에 동의하고, 흔쾌히 봉은사를 떠났다.

그러나 지효는 봉은사에서 총림 건설의 꿈을 펼치지 않고, 1967년경 북한산 천축사로 떠났다. 추측하건대 자신의 수행을 우선 고려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1967년 동안거 때는 해인사에서 ‘백일법문’ 강의를 청취하면서 정진했으나 성철의 일부 발언에 분노했다. 당시 천축사에서는 6년간 폐문을 하고 수행하는 무문관(無門關)이 설립되어 수좌들이 정진하고 있었다. 지효도 약간 늦게 입방하여 1972년 회향까지 수행하였다.
그가 총림 건설의 꿈을 다시 들고나온 시점은 1973년 8월이었다. 지효는 1972년부터 종단 감찰원장의 소임을 맡고 있었다. 그는 선종 구산선문의 대상지였으며, 오지에 자리한 영월의 법흥사(法興寺)를 무대로 자신의 꿈을 다시 구현하고자 했다. 그가 법흥사를 대상으로 삼은 것은 오지에 위치한 그곳에 조계종의 특별하고 유일한 ‘일입불출(一入不出) 선원’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는 1973년 8월 7일에 법흥사 주지가 되었다. 이때부터 법흥사 흥련선원의 복원 중창을 발기하여, 1974년 3월 29일에는 복원불사 추진위원회(위원장 장승태)를 발족시켰다. 당시 종단 기관지인 〈대한불교〉(1974.3.24)에 법흥사 흥련선원 복원 추진 내용이 보도되었는데, 이와 함께 지효의 이름으로 발기문과 추진위원장 이름으로 복원 설계 현상모집 광고가 실렸다. 그리고 1974년 5월부터 복원공사가 착수되었다.

이 문건의 내용에서 지효의 의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지효는 법흥사 복원 중창문에서 불법 구현은 오직 본분 납자의 전법륜(傳法輪), 활안종사의 사명감에서 나온다고 밝혔다.

본인은 이번에 중창되는 흥령선원으로 하여금 한국불교의 법통을 전승할 근본도량의 재현을 기약한다. 동시에 근래 多岐的 敎義에 의하여 해이해진 한국불교의 법통을 전통적인 修道 典範의 재확립을 기한다.

즉, 그는 한국불교의 전통적인 수도 전범의 재건을 의도한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된 전범은 투철한 수행자의 배출을 의미한다. 지효의 구상은 〈사자산 법흥사 복원불사 및 운영계획서〉(42면)의 입안 기획서(근본 이념)에도 나타난다.

때문에 老衲은 여기 지리적 자연적 조건과 역사적 필연성을 갖는 법흥사에 전국 殊一의 修行道場과 祈禱道場을 만들어 한국불교의 새로운 발상지는 물론이려니와 萬民이 다 평등하고 인류가 모두 福을 누리는 大根本道場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수도처가 없어 방황하는 衲子와 불국정토의 구현을 위해 대원력을 갖고 수행 기원하고자 하는 이들이 다 찾을 수 있는 도량을 만들어 한국불교가 이곳에서 움터 나오고 새로운 불교문화가 이 땅에 다시 찬란하게 발현되도록 최대한의 뒷받침을 하고 싶다.

이처럼 지효는 법흥사를 수행도량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는 이전부터 구상한 총림 건설과 맥을 같이한다. 그가 법흥사에서 구현하려 한 실천 요강은 다음과 같다.

1. 祈願: 법흥사 적멸보궁의 정신 계승-호국신앙, 업장 소멸/ 불국토 건설을 위한 祈願大齋 구현
2. 修道: 흥령선원 중창-조계종 선맥 계승/ 인재 양성/ 특별선원(종신 수행), 일반 선원(승려, 재가자 등) 운영
3. 奉仕: 지방 불우아동 교육-무료교육(초, 중, 고)/ 장학금 지급

이처럼 지효는 법흥사의 이념을 기원, 수도, 봉사라는 3대 실천으로 제창하였다. 그런데 관건은 지효의 구상 실현을 위해 필요한 막대한 예산이었다. 기획서에 제시된 예산은 3억 2천6백만 원이었다. 이 재원은 현재의 가치로 보면 100억 원가량이다. 지효는 이런 막대한 재원을 조달할 여건이 여의치 않았다. 그는 법흥사가 소유한 산내 산림 자원을 효율적으로 개발하여 거기에서 나온 수익을 활용하고자 했다. 그래서 1975년 7월 2일, 종단에 관련 사업 신청 공문을 접수했다. 그 공문에는 사업기획서(안), 계약재배 약정(안), 사업승인 확인서가 첨부되었다. 필자가 입수한 ‘산지자원 개발 계약서(안)’는 갑(甲)을 법흥사 주지 김지효로 하고, 을(乙)은 개발 계약인이지만 공란으로 되어 있고, 기간은 1975년 8월부터 10년간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지효는 자신의 구상을 실천에 옮겼는가? 당시 지효와 구체적인 대화를 나눈 현욱은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법흥사 적멸보궁 위치는 그대로 놔두고 한 2㎞ 산골짜기에 도인을 양성하는 수도원과 국제적 학자들의 명상센터를 건립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시고, 300만 평 임야를 수종 개량하고, 수익성이 있는 나무로 대체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미 옻나무 심기를 시작했는데 묘목을 원주에서 20만 주를 확보하고, 매년 5년을 심으면 100만 그루가 되는데 7년 차부터는 옻칠 수확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일본 수출이 가능하고, 그 수익은 논 몇십만 평 수확보다 낫다는 계획서도 만들었어요. 이러한 모든 것이 사형님께서 정화 선봉에서 활약하였던 회향을 후배 양성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위의 증언에서 나오듯, 지효는 기획에 의거하여 일부 추진은 하였다. 그러나 지효는 추진력 미흡, 재원 부족으로 그가 의도한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지는 못했다. 그는 법흥사에서 퇴진했다. 지효는 1976년 3월 24일 자로 주지에서 물러나고 후임 주지로 윤지원이 부임했다.

이처럼 지효는 법흥사에서도 총림 건설을 1973년부터 추진하였지만, 중도 하차했다. 그가 꿈꾸었던 총림 건설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역사의 기록으로 남았고, 그의 염원은 후학들의 몫이 되었다.


4. 결어

지금껏 범어사 출신으로 정화운동에 헌신한 수좌 지효의 총림 건설에 담긴 꿈과 실천적 행보를 살펴보았다. 자급자족, 도제 양성, 참선수행을 지향한 총림 건설의 핵심적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화운동의 현장에서 총림 건설이 논의, 대두되었다. 이를 접하였던 지효는 정화운동의 이념 계승, 도제양성 차원에서 1960년대 초반, 총림 건설을 모색하였다.

둘째, 지효의 구상은 청담, 능가 등의 지원을 받아 조계종단 차원에서 추진되었다. 그 추진을 위한 법인체가 1963년에 설립되고, 재일교포의 후원을 받아 조령에서의 구현이 입안되었으나 추진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셋째, 종단 차원의 조령 총림 기획이 무산되자 지효와 능가는 범어사에서 추진을 모색하였다. 주지인 동산의 동의를 얻어 범어사 구내 산 중턱에 5만 평의 개간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동산 사후, 지효가 추진한 총림 사업은 대중들의 반대로 인해 중단되었다.

넷째, 범어사에서 실패한 지효는 1973년 법흥사 주지가 되어, 법흥사 흥령선원 재건을 기하면서 총림 건설을 시도하였다. 일련의 기획을 입안하고, 종단의 허가까지 득하였지만 추진력과 재원 부족으로 실패하였다.
이처럼 지효는 조령, 범어사, 법흥사에서 지속적으로 총림 건설을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말년에 근거 사찰인 범어사에 종신 선원(휴휴정사)을 설립하고 정진하다가 입적했다. 그의 입적과 함께 총림 건설의 꿈은 후배 수행자들의 몫으로 남았다. ■

 

김광식 / 동국대학교 특임교수. 건국대 사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원, 대각사상연구원 연구부장, 만해사상실천선양회 학술부장, 조계종 불교사 연구위원 등 역임. 주요 저서로 《한국 근대불교사연구》 《민족불교의 이상과 현실》 《불교 근대화의 이상과 현실》 등 저서 40여 권. 유심작품상(학술부문), 불교평론학술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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