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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 이상적 승가 구현을 꿈꾸다*
특집 | 현대불교의 이상주의자들
[73호] 2018년 03월 15일 (목) 최원섭 kosa21@daum.net

1. 이찬호, 순호 그리고 청담

   
청담(靑潭)

청담(靑潭)은 190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이찬호(李讚浩)이다. 늦은 나이에 진주 제일보통학교(현재 진주 중안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진주 공립농업학교(현재 경남과학기술대학교)에 입학했다. 언제부터 불교에 관심을 가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무렵 감화를 받고 출가를 결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농업학교에 입학한 해에 결혼한 이찬호는 해인사나 백양사 등에서 결혼을 이유로 출가 허락을 받지 못했다. 1923년 부친이 별세하고 나서 일본으로 건너가 행자 생활을 시작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한국으로 돌아와 1926년 고향 근처의 고성 옥천사(玉泉寺)로 출가했다.

출가하여 받은 법명은 ‘순호(淳浩)’이다. 순호의 삶은 찬호의 삶보다 훨씬 역동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직 불교를 바로 세우는 일에 방향이 맞추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개운사 강원에서 공부하던 1928년, 조선불교학인대회를 주도하면서 항일불교의 선봉으로 부상했다. 이후 비구승이 한국불교의 독립성을 수호하기 위해 설립한 선학원의 이사를 맡으면서 젊은 수행자들의 기수가 됐다. 불교정화를 총체적으로 기획한 것도 이 무렵부터라는 평가를 받는다. 불교를 바로 세우려는 노력은 1947년 봉암사 결사로 이어졌다. 널리 알려진 대로 봉암사 결사는 철저히 계율을 지키고 참선하며 부처님 당시의 승가를 재현한 수행공동체였으며, 수행 방식뿐만 아니라 승가의 의식주 전반에 개혁을 단행하면서 오늘날 종단 제도의 모태가 되었다.

1954년은 조계종단의 역사에서 의미가 깊은 해이다.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왜곡된 불교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한 ‘정화운동’이 시작된 해이자, 현대 불교사에서 ‘대한불교조계종’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해이기 때문이다. 1954년 8월 24일과 25일 선학원에서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가 열려 교단 정화, 도제양성, 총림 창설을 결의하고 종헌제정위원 9인과 대책위원 15명을 선정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정화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9월 28일과 29일에 열린 제2회 전국비구승대회와 30일의 제1회 임시종회를 통해 종헌을 채택하고 종정을 비롯한 종단 구성원을 선정하여 비구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이 성립하였다.

청담은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에서 종헌제정위원과 대책위원에 모두 포함되었으며, 제1회 임시종회에서 도총섭으로 선출되어 정화운동과 조계종의 성립을 추진해나갔다. 특히 청담은 이때부터 ‘순호’라는 법명 대신 ‘청담’이라는 법호를 쓰기 시작하였다. 청담이라는 인물이 한국불교의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이자 정화를 향한 청담의 결의를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1960년 11월 대법원이 비구 측을 부정하는 판결을 내리자 청담은 ‘6비구’의 순교단을 꾸려 판결일 다음 날, 대법원 청사에서 할복을 감행하는 대법원 난입사건을 벌여 상황을 반전시켰다. 이후 대처승은 원칙적으로 스님이 아니라는 종헌 개정과 비구승의 주도권을 인정한 통합종단을 출범시키고, 통합종단의 초대 후반기 중앙종회의장을 맡아 신생 종단의 기반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1966년 11월 제2대 종정에 추대된 청담은 1967년 전국불교도대표자대회에서 역경(譯經) · 포교(布敎) · 도제양성(徒弟養成)의 3대 사업을 포함해 의식의 현대화와 군승제의 촉구, 신도 조직 강화,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및 불교회관 건립 등 6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와 함께 포교의 현대화, 활성화를 위해 각 사찰에서 매주 1회 정기법회를 개최할 것과 불교방송국 설립 및 승가대학 신설을 목표로 제시했다. 이 대회에서 제기된 사업들이 여러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결국 종단에서 완성한 것을 보면 현재 조계종의 많은 일들이 당시의 상황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청담은 1971년 원적에 들 때까지도 매일같이 군법당 준공식, 대학 강연, 신도법회 등 포교현장을 누볐다. 출가하여 50년 가까이 불교를 바로 세우고 제대로 된 종단을 만드는 일에 한결같이 매진할 수 있게 한 청담의 원동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2. 영산도(靈山圖)의 꿈

1954년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를 전하는 기록에 흥미로운 것이 보인다. 8월 24일 “이순호 선사께서 영산도(靈山圖) 설명도 있었다”는 것이다. 종단의 새로운 면모를 마련하려고 종헌 등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청담이 영산도를 설명했다는 사실은 영산도가 종단과 정화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또 1954년 무렵 청담이 남긴 메모에 “대규모 총림 건설: 영산도”나 “포교사업, 도제교양, 교육사업→영산도”가 보인다.

   
〈그림 1〉 영산도

청담의 영산도는 단순히 부처님이 설법하는 영산회상을 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부처님 당시와 같이 살아보려는 구상에서 기획된 총림체제 구상도이자 포교와 교육을 펼치려는 종단 계획안이다. 청담의 영산도를 언급할 때 흔히 회자되는 ‘부처님 당시와 같이 살아본다’는 취지는 광복 이후 불교개혁의 일종의 표어가 되어 봉암사 결사의 형태로 구현되기도 하였고 해인총림의 모습으로 구체화되기도 하였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 왜곡된 불교의 모습을 바로잡는 지향점을 부처님의 정신을 되살리는 데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산도는 총림체제 구상도에 머물지 않고 불교정화의 이상적인 대안인 조계종의 구상도 역할을 하였다.

영산도는 조직 체계를 그림으로 표시한 ‘영산도’(〈그림 1〉) 부분과, 27개 항목으로 조직의 역할과 소임자의 임기 등을 설명한 ‘영산도 해설’(〈그림 2〉)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 2〉 영산도 해설

‘영산도’가 제시하고 있는 종단의 조직은 ‘출가부’와 ‘재가부’로 크게 나뉜다.

출가부에는 ‘증명단(證明團)’ 밑으로 ‘종정(宗正)’을 두고 종정 아래 ‘율원(律院)’과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의 기구를 둔다. 율원에는 ‘전계(傳戒)’ ‘갈마(羯磨)’ ‘포살(布薩)’ ‘찰중(察衆)’의 소임이 있고, 내원에는 ‘참선(參禪)’ ‘식망(息忘)’ ‘성적(惺寂)’ ‘원돈(圓頓)’ ‘진언(眞言)’ ‘염불(念佛)’ ‘송경(誦經)’의 소임이 있다. 외원은 ‘교수(敎授)’ ‘통리(統理)’ ‘자호(慈護)’의 구분을 두고 다시 교수에는 ‘사섭(四攝)’과 ‘교육(敎育)’, 통리에는 ‘내섭(內攝)’과 ‘외호(外護)’, 자호에는 ‘양로(養老)’와 ‘간병(看病)’을 둔다. 자호의 양로 소임은 ‘공수(供需)’와 ‘의복(衣服)’, 자호의 간병 소임은 ‘의약(醫藥)’과 ‘공수(供需)’와 ‘의복(衣服)’을 두고, 통리의 내섭 소임은 ‘입승(立繩)’ ‘지전(持殿)’ ‘경책(警策)’ ‘서사(書司)’, 통리의 외호 소임은 ‘유나(維那)’ ‘감원(監院)’ ‘서사(書司)’ ‘지객(知客)’ ‘가람(伽藍)’ ‘공수(供需)’ ‘원두(園頭)’ ‘영림(營林)’을 두었다. 또 교수의 교육 소임은 ‘포교사(布敎師)’ ‘전도사(傳道士)’ ‘속수(速修)’ ‘행자’ ‘사미’ ‘연구’를 길러내며, 마지막으로 교수의 사섭 소임은 재가부의 중앙조직인 ‘중앙호정원(中央護正院)’을 관장한다.

재가부인 중앙호정원 아래는 ‘갈마(羯磨)’와 ‘통서(統庶)’로 구분하고, 갈마에 ‘전계부(傳戒部)’ ‘갈마부(羯磨部)’ ‘포살부(布薩部)’ ‘찰중부(察衆部)’를 두며, 통서에 ‘총무부(總務部)’ ‘교무부(敎務部)’ ‘정재부(淨財部)’ ‘선전부(宣傳部)’ ‘조직부(組織部)’ ‘시설부(施設部)’ ‘구료부(救療部)’ ‘청소부(淸掃部)’ ‘인사부(人事部)’ ‘녹화부(綠化部)’ ‘석복부(惜福部)’ ‘지도부(指導部)’ ‘미풍부(美風部)’ ‘방생부(放生部)’를 두었다. 또한 중앙호정원 아래로 각 지방의 행정 단위별 조직을 두는데, 도에는 ‘정화원(淨化院)’, 군에는 ‘호세원(護世院)’, 면에는 ‘포덕원(布德院)’, 동에는 ‘광명원(光明園)’을 두었다.

이처럼 구체적으로 조직을 구상하고 있는 영산도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부처님의 눈에서 퍼져나오는 ‘자비광명’이 출가부와 재가부를 긴밀하게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처님의 자비광명은 출가부에는 ‘감시선’의 역할을 하고 재가부에는 ‘출세도중(出世度衆)’의 역할을 하면서 하나로 연결시키고 있다. 또한 이 연결선은, 영산도 전체 구성의 ‘폐장(肺臟)’ 역할을 하는 내원에서 출발하는 ‘동맥(動脈)’으로 작용하여 출가부와 재가부의 ‘외호선’이 된다. 내원은 10년간 의무 좌선을 해야 한다는 규정을 붙여놓은 것도, 영산도 전체에서 내원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것과 반대 방향이 되어 ‘입산수도’의 과정으로 표현되는 ‘정맥(靜脈)’이 작용하여 재가부 쪽에서 출가부의 내원으로 흐르고, 다시 내원에서 출발하는 ‘동맥’으로 이어지는 순환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정맥’을 통해 재가자가 출가할 경우 어떤 과정을 거쳐 승계가 높아지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그렇게 입산수도한 수행력으로 중생교화를 펼치는 과정을 ‘동맥’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결국 청담사의 영산도는 출가자 중심으로 종단을 구상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출가자의 수행력과 교화력을 재가자에게 발휘하여 교육과 포교 활동을 펼치고, 그런 교화를 받은 재가자가 다시 출가의 구성원이 되는 구조를 밝힘으로써 출가와 재가를 모두 아우르는 진정한 의미의 사부대중 승가를 구현하려 한 것이다.

3. 영산도와 조계종의 전통

청담의 영산도가 구현하려는 조계종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이어져 온 불교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시대에 맞는 인재를 길러내는 조직으로 구상되었다. 그렇다면 영산도가 인식하고 있는 불교의 전통은 무엇일까?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부처님 당시의 불교를 시작으로 중국을 거쳐 한국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공간을 거치며 다양해진 불교 중에서 대표적인 면을 수용하여 전통으로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 당시의 불교에서는 율장이라는 승가의 기본적인 생활 체제를, 중국불교에서는 총림이라는 승가의 구성 체제를, 마지막으로 한국불교에서는 선교일치(禪敎一致)라는 사상을 채용하여 불교의 전통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각각 율원(律院), 외원(外院), 내원(內院)의 특징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영산도가 드러내고 있는 이 세 가지 전통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청담의 영산도가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불교를 전통으로 인식하고 있음은 ‘영산도(靈山圖)’라는 이름 자체에서 드러난다. ‘영산’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부처님의 행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마가다국의 왕사성 ‘기자쿠타(Gijjha-kūṭa)’를 가리킨다. 중국불교 이래로 한자문화권에서는 이 ‘기자쿠타’를 ‘기사굴산(耆闍崛山)’으로 음역하였고, 번역하여 취두(鷲頭), 취봉(鷲峯), 영취산(靈鷲山)이라고 하였다. 영산은 사위성의 기원정사 등과 함께 석가모니 부처님이 경전을 설한 주요 설법지였기 때문에 ‘영산’ 또는 ‘영산에서 법석을 펼친 자리’ 즉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는 말은 부처님 당시에 직접 설한 장소라는 의미를 강조하는 데 관용적으로 쓰여왔다. 부처님 당시와 상당한 시간적 차이를 두고 있는 대승경전 《법화경》이 스스로 설법처를 기사굴산 즉 영산으로 하고 있는 것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으며, 심지어 중국에서 형성된 선종에서는 부처님이 영산회상에서 대중에게 꽃을 들어 보이셨을 때 가섭만이 미소를 지음으로써 처음으로 부처님의 심법(心法)이 이어지는 시초가 되는 장소라고까지 한다.

이처럼 ‘영산도’라는 이름을 통해 부처님 당시의 불교를 전통으로 인식하고 있는 청담의 영산도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부처님 당시의 불교는, 율원의 소임으로 갈마, 포살, 전계 등을 제시하고 영산도 해설에서 율원을 “사부중(四部衆)의 행해(行解)를 갈마하며 전계 및 포살을 행한다.”고 규정하듯이 율장의 계율을 강조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영산도가 부처님 당시 불교의 특징으로 계율을 강조하는 것은 왜색화된 불교의 모습을 복구하려는 정화운동이라는 당시의 사정을 고려하면, 독신인 비구(니)로 이루어진 종단을 구성해야 한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출가자에게 결혼이 허용되는가의 여부는 음행(淫行)이 허용되는 계율을 수지하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음행을 바라이(波羅夷)로 규정하여 승단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은 구족계이다. 재가자의 5계에 포함되는 음계(淫戒)는 모든 음행이 아니라 사음(邪淫)만을 금지하고 있으며, 사미(니)의 10계는 일반적으로 재가자 5계의 확장으로 생각하여 사음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음행을 금지한다. 따라서 재가자가 아닌 출가자라면 사미(니)계 또는 구족계를 수지하므로 출가자에게는 절대로 결혼이 허용될 수 없다.

그러나 영산도가 계율을 중시한다는 사실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청담이 구상하는 종단은 기본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계율 정신을 따르는 종단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환기시키는 영산도라는 이름을 쓰면서도 청담의 영산도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담았다고 알려진 아함경에 대한 언급이 없다. 청담이 생각하는 ‘부처님 당시’ 또는 ‘부처님 법’이란 경(經)이 아니라 계율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계율이야말로 ‘부처님 법대로 산다’는 기치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산도’는 청담이 구상하는 종단의 외형을 구성하는 측면에서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불교가 시작된 모습 그대로를 유지해야 함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중국불교의 모습은 총림(叢林)의 형태로 드러난다. 청담의 영산도는 기본적으로 총림 건설을 위한 구상도이다. 그러므로 영산도에서 구체적으로 표시하고 있는 종단 조직은 기본적으로 총림의 방함록(芳啣錄) 형태를 확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주로 외원의 구성에서 보이는 ‘외호(外護)’ ‘입승(立繩)’ ‘지전(持殿)’ ‘유나(維那)’ ‘감원(監院)’ ‘지객(知客)’ ‘원두(園頭)’ ‘유나(維那)’ 등의 소임 명칭에서 이러한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청담은 부처님 당시를 염두에 둔 ‘영산도’라는 이름을 쓰면서 정작 실제 구성은 왜 중국의 총림을 따르는 것일까? 이것은 인도 당시의 생활양식보다는 한국과 사정이 비슷한 중국의 실제적인 생활양식을 차용하는 것이 현실성 있는 대안이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부처님 당시의 생활 모습은 계율이라는 큰 틀에서 수용하고 구체적인 외형은 모습은 중국 총림 방식을 따른 것이다. 또한 지난 세월 동안 한국불교만의 생활 모습을 복구할 수 있는 모델이 사라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국불교의 생활방식을 따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런 사정은 또 다른 형태의 불교회복운동으로 볼 수 있는 봉암사 결사의 ‘공주규약(共住規約)(〈그림 3〉)이나 도선사의 ‘실달학원시행요강(悉達學園施行要綱)(〈그림 4〉)’ 등에서 구체적인 생활 규범으로 제시되는 능엄주와 참회법이 중국 총림의 《선문일송(禪門日誦)》에 근거하여 마련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영산도는 중국 총림의 체제를 수용하여 수행 중심의 새로운 총림을 마련하면서도, 율원과 내원과 외원이라는 현대적인 조직 구성을 새롭게 마련하여 단순히 총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종단을 구성하기 위한 설계도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림 3〉 공주규약(1947)

셋째, 한국불교의 전통은 내원의 구성을 통해 사상적인 면으로 드러난다. 전체 영산도에서 ‘폐장(肺臟)’이라고 표현할 만큼 가장 핵심적인 내원에 포함되는 ‘성적(惺寂)’ ‘원돈(圓頓)’ ‘참선(參禪)’은 그대로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의 3문 수행으로 일컬어지는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경절문(徑截門)에 해당한다. 보조지눌의 3문 수행에 대해 비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문을 여는 데에 세 가지가 있었는데,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경절문(徑截門)이라 하였으니, 이것에 의해 수행하여 믿어 들어가는 사람이 많았다. 선학의 융성함이 옛날에나 근래에나 비교할 수 없었다.

   
〈그림 4〉 실달학원시행요강(1964)


이처럼 청담의 영산도는 사상적으로 보조지눌을 부각시키고 있다. 지눌을 부각시킨다는 사실은 지눌을 둘러싼 종조 논쟁을 논외로 하고 순전히 종단 이름으로만 생각하자면 조계종이라는 종단의 명칭에 걸맞은 인물을 상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비문에서는 지눌의 생애와 관련된 문헌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사람들에게 외워 지니게 권하기는 늘 《금강경》으로 하였고, 법을 세우고 교의를 연설할 때에는 의미를 반드시 《육조단경》으로 하였으며, 펼치는 데에는 이통현의 《화엄론》과 《대혜어록》으로 함께 날개를 삼았다.

《금강경》은 물론 《육조단경》 《대혜어록》 《화엄론》 등 현재 조계종의 소의경전을 포함하여 한국불교에서 일반적으로 중요시되어 애용되는 문헌들이 모두 등장하고 있다. 비문은 다시 이러한 문헌이 지눌의 생애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25세 때인 대정(大定) 22년(1182) 임인에 승과[僧選]에 합격하고, 얼마 후에 남쪽으로 유행하여 창평 청원사에 머물렀다. 어느 날 처소에서 《육조단경》을 보다가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니 육근이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알지만 온갖 경계에 물들지 않고 진성은 항상 자재하다”라고 한 데 이르러 매우 기뻐하며 미증유를 얻고, 일어나 불전(佛殿)을 돌면서 그것을 외우고 생각하며 의미를 스스로 터득하였다. 이로부터 마음은 명리를 싫어하고, 항상 깊은 숲 속에 숨어 간절하고 고요히 그 도를 구하고자 하여 잠깐이라도 반드시 이렇게 하였다.

대정 25년(1185) 을사에 하가산 보문사에 머물며 대장경을 읽다가 이장자(李長者)의 《화엄경합론》을 얻어 더욱 신심을 내었다. [이치를] 찾아내 드러내고 숨은 것을 찾아 [그 의미를] 씹고 씹어 정수를 맛보아 이전의 앎이 점점 밝아졌다. 이에 마음을 원돈(圓頓)의 관문(觀門)에 두었으며, 또한 말학(末學)들의 미혹함을 인도하여 못을 제거하고 쐐기를 뽑아주고자 하였다. ……

스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셨다.

“내가 보문사에서 지낸 이후 10여 년이 되었다. 비록 뜻을 얻어 부지런히 닦아 헛되이 시간을 보낸 적은 없으나 아직 情見을 버리지 못하여, 마치 어떤 물건이 가슴에 걸려 있어 원수가 있는 곳과 같았다. 지리산에 머물 때에 《대혜보각선사어록》을 얻었는데, ‘선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또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마다 반연에 응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먼저 고요한 곳이나 시끄러운 곳이나 날마다 반연에 응하는 곳이나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지 않고 참구하여야 홀연히 눈이 열려서 비로소 그것이 집안일임을 알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여기에서 뜻이 딱 들어맞아 자연히 물건이 가슴에 걸리지 않고 원수도 같은 자리에 있지 않아 당장에 편안하고 즐거웠다.”

이로 말미암아 지혜와 앎이 점점 높아져 대중들이 스님을 우러르게 되었다.

이처럼 《육조단경》을 통해 처음으로 깨달음을 체험한 지눌은 《화엄론》을 통해 《화엄경》의 교설이 《육조단경》의 가르침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세존이 입으로 설한 것은 곧 교(敎)가 되고, 조사가 마음으로 전한 것은 곧 선(禪)이 된다. 부처님과 조사의 마음과 입이 반드시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어찌 근원을 궁구하지 않고 각자 익힌 바에 안주해서 망령되게 쟁론을 일으키며 헛되게 세월만 죽이겠는가.” 하고 탄식한다. 흔히 한불교의 사상적 특징으로 거론하는 선교일치(禪敎一致)가 등장하는 대목이다.
이후 지눌은 이와 같은 체험을 바탕으로 3문을 열어서 수행을 지도하였다.

그러므로 지눌의 생애에서 깨달음의 계기로 등장하는 문헌과 3문 수행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그러한 관련 속에서 지눌의 사상적 특징이자 한국불교의 특징으로 일컬어지는 정혜쌍수(定慧雙修), 선교일치(禪敎一致), 간화선(看話禪) 등이 등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청담의 영산도가 ‘성적(惺寂)’ ‘원돈(圓頓)’ ‘참선(參禪)’이라는 명칭을 통해 지눌을 강조하는 것은 간화선의 입장에서 교학을 포용하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복원하여 본격적으로 종단 차원으로 확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선교일치가 종단의 사상적 원리로 설정되면 다양한 교학적 사상과 경론을 선교일치의 틀 속에 포함시킬 수 있으므로 종파적 성향을 띠는 불교가 아니라 다양한 불교 사상을 포섭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진언(眞言)’과 ‘염불(念佛)’ 등의 내원을 구성하는 나머지 명칭 역시 지눌을 강조하여 한국불교의 전통을 강조하면서도 그 전통에 어긋나지 않는 통합적인 사상 구조를 밝히고 있다.

영산도가 구상하는 종단은 계율을 바탕으로 하는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기본적인 생활지침과, 총림으로 대표되는 중국불교의 생활방식이라는 외형에, 선교일치라는 한국불교의 전통 사상을 내용으로 했음을 보았다. 그리고 이처럼 역사와 지역을 따라 변화한 불교 중에서 중요한 불교 전통의 요소를 바탕으로 현시대 한국에 맞는 새로운 종단을 구상하려고 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4. 청담의 영산도 이후

청담의 영산도가 구현하려고 한 종단의 모습은 과연 실제 조계종에 구현되었을까? 우선 총림 구현을 위한 설계도라는 기본적인 영산도의 성격에 초점을 맞추면, 영산도 이후에 해인총림(해인사) · 조계총림(송광사) · 영축총림(통도사) · 덕숭총림(수덕사) · 고불총림(백양사)이 설치되었고 최근에 동화사 · 쌍계사 · 범어사에 추가로 설치되어 모두 8개의 총림이 존재하므로 영산도는 실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현재 조계종이 총무원 · 교육원 · 포교원의 3원 체제를 갖추고 있고 다양한 전문교육기관이 설립되어 있으므로 체제 면에서는 분명히 영산도의 의도가 구현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더 넓은 의미로 영산도를 이해하여 내용 면을 들여다보면 아쉬운 점은 있다. 1954년에 출범한 대한불교조계종이나 1962년의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 종헌에는 “본종은 승려(비구 · 비구니)와 신도(우바새 · 우바이)로써 구성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영산도에 표현되어 있는, 출가가 재가를 향해서 어떻게 포교하고 교육할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현재 조계종에 포교원이 구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영산도에 보이는 것처럼 출가와 재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중앙 조직 차원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는 않다.

재가를 향한 포교와 교육의 관점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참회이다. 그러나 현행 종헌 제110조에 “본종은 수행기관으로 염불원과 참회원 및 기타 수행기관을 둘 수 있다.”고 하고 있음에도 아직까지 참회원은 종단에 실현되지 못하였다. 다만 《예불대참회문》을 중심으로 한 신도 개인의 신행 차원으로 참회가 이해되는 실정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한국불교의 수행 문화에서 참회에 대한 평가는 인색한 편이다.

청담은 도선사에 호국참회원을 건립할 만큼 참회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렇다면 청담의 참회법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한 단초를 청담과 깊은 관련이 있는 봉은사 대학생수도원에서 찾을 수 있다. 봉은사 대학생수도원의 지도법사는 광덕 스님이고 조실이 바로 청담이었다. 또한 봉은 수련생들은 전국의 큰스님을 찾아 법을 묻는 구도행각 중에 김룡사의 성철 스님을 만나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러므로 봉은사 대학생수도원은 청담 · 성철 · 광덕이라는 시대를 대표하는 선지식과의 관계 속에 있었다.

이 무렵 광덕 스님은 성철 스님과 합심하여 《예불대참회문》을 만들어 보급했는데, 이 내용이 실제로는 보현행원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또한 봉은사 대학생수도원의 기본 이념이 바로 보현행원이었다. 청담의 참회법 역시 보현행원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단순히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108배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예불대참회문》의 참회법이 보현행원의 ‘참죄업장원(懺罪業障願)’의 구체적인 실천이라는 점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만일 《예불대참회문》의 이런 성격이 제대로 드러나 참회법에 대한 평가가 지금과 달랐다면 종단 구성원의 교육과 포교의 방향을 보현행원으로 정립하여 내용 면에서 청담의 영산도 정신을 구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아쉬움이 남는다.

1954년에 정화운동이 시작되고 대한불교조계종이 등장하는 속에서 청담은 그 두 가지 중대한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1920년대부터 불교개혁을 모색하던 청담에게 그러한 개혁의 구체적인 계획은 영산도였고 가야총림, 봉암사 결사, 정화운동, 실달학원, 해인총림 등으로 이어지는 종단의 개혁적인 사안마다 영산도를 실현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청담의 영산도가 구상하는 종단은 계율을 바탕으로 하는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기본적인 생활지침과, 총림으로 대표되는 중국불교의 생활방식이라는 외형에, 선교일치라는 한국불교의 전통 사상을 내용으로 하고 있으므로 전체 불교를 아우르면서도 한국불교의 특성이 드러난 것이었다. 또한 출가와 재가를 아우르면서 철저하게 포교와 교육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조계종의 3대 지표인 ‘역경(譯經)’과 ‘포교(布敎)’와 ‘도제양성(徒弟養成)’에 잘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영산도가 구현하려고 한 제도적인 면은 어느 정도 조계종에 실현되었지만, 내용 면에서 출가와 재가의 기밀한 관계 정립이나 보현행원을 바탕으로 한 참회법이 구현되지 못한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

최원섭 / 위덕대학교 밀교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영상미디어의 불교 주제 구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불교적 대중문화비평에 관한 연구를 했다. 주요 논문으로 〈불교 소재 영화와 불교적 영화〉 〈백일법문에 보이는 퇴옹 성철의 불교 인식과 근대불교학 활용〉 〈방송 매개 전법을 위한 불교 콘텐츠 구성 방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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