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현대불교의 이상주의자들

1. 경전 읽고 번역하던 운허 법사

운허
(耘虛, 1892. 2. 25~1980. 10. 15)

여기에 소개하는 운허(耘虛, 1892. 2. 25~1980. 10. 15, 음력)는 경기도 남양주 소재 봉선사의 스님이다. 그는 한글은 물론 한문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줄도 알고 또 남의 생각을 읽을 줄도 안다. ‘읽기’와 ‘쓰기’가 평생 몸에 밴 사람이다. 그것도 품격 있고 전고 있는 아당한 문체로 말이다.

그는 세월 속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도 적잖이 남겼다. 남에게 보이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기 위한 쪽지 메모들이다. 1959년 1월 1일부터 1979년 5월 30일까지 매일 쓴 그의 〈탁상일기〉도 그런 유이다. 하루 한 장씩 넘기는 탁상용 달력 앞뒤 여백에 쓴 것이다. 6 · 25 이전에도 일기를 썼지만 1 · 4 후퇴 때 아군의 소이탄으로 봉선사가 불타서 그 많던 역사와 함께 사라졌다.

작성 연대는 불분명하지만 작은 노트에 쓴 〈회고록〉(총 13쪽)도 있다. 자신의 출생 시기와 장소 및 가계에 대한 기록에서 시작하여, 통도사에 주석하던 단기 4292년(서기 1959) 10월 4일 월운(1928년~ , 봉선사 주석)에게 전강(傳講)하여 강사로 취임토록 하고 자신은 패엽실로 옮겼다는 기록과, 10월 19일 봉선사 주지 인수인계로 끝난다. 이 〈회고록〉은 운허의 제자로서 봉선사가 세운 광동중학교에서 뒷날 교장을 지낸 혜원당 김지복 스님의 우연한 질문으로 집필되었다. 원체 과묵한 운허가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은 것으로, 일제 강점 전후의 사정을 비롯하여 만주 등지에서의 독립운동과 교육활동, 광복 전후의 일들이 적혀 있다. 6 · 25 이전의 운허 행방을 알 수 있는 ‘특별한’ 자료이다. 6 · 25 이후는 월운이 소상하게 기억하고 기록해두었지만, 그 이전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1949년 6월 1일(단오날) 월운은 당시 21세로 운허를 은사로 사미승이 되는데, 이때부터 운허의 이름은 월운의 기억과 일기 속에 남는다. 월운의 일기는 1968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6 · 25로 봉선사가 전소된 뒤 운허는 범어사, 동학사, 해인사, 선학원, 통도사 등지로 옮겨가며 학인들을 가르쳤다. 〈동학사 주석기〉도 이런 처지에서 남긴 1952년 11월 14일부터 1953년 11월 1일까지의 기록이다. 그가 동학사로 가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1952년 범어사에서의 일로, 당시 운허는 ‘《능엄경》 강의’를 했는데 전 대중이 이 강의에 쏠리자, 이를 불편해한 동산 큰스님이 하안거 해제 며칠을 남겨두고 행방을 감추었다. 온 절이 술렁거렸다. 결국 운허도 짐을 싸서 어디론지 떠났는데 그곳이 바로 동학사였다. 당시 사정은 월운의 일기 1952년 음력 7월 13~17일에 보인다. 1년을 동학사에 살면서 또 학인들 교육하면서 보냈다. 그 일기의 끝은 “11월 11일(음 9월 25일) 자운 스님의 청에 의하여 통도사로 옮김”이다. 당시 일기에는 뒷날 비구니 강사가 된 묘엄이란 법명이 몇 번이고 등장한다.

또 기록 일시가 불분명한 〈나의 과거〉(총 17쪽)라는 문서도 있다. 속표지는 ‘나의 지내온 자취’라고 제목을 쓰고 있다. 1982년(출생)부터 1969년(78세)까지 연도별로 기록하고 있다. 1984(3세) 때의 기록은 “청일전쟁 발발.”이다. 그다음은 1897년(6세)의 기록은 “한글을 깨치다.”이고, 마지막 기록인 1969년(78세)에는 “동국역경원장 명의로만 가지고, 강석주 스님을 부원장으로 하여 실무를 보게 하다.”이다.

노년에 운허는 〈촉문(囑文)〉을 지어 죽음 뒤의 일을 당부하기도 했는데, 이 유언장에서 그가 자신의 일생을 어떻게 규정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촉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후신(後身)의 일을 아래와 같이 부탁한다.
(1) 문도장으로 봉선사 화장장에 다비하라. (2) 초종범절은 극히 검약하게 하라. (3) 화환, 금만을 사절하라. (4) 습골 시에 사리를 주우려 하지 마라. (5) 대종사라 칭하지 말고 법사라고 쓰라. (6) 사십구제도 간소하게 하라. (7) 소장한 고려대장경, 한글대장경, 화엄경은 봉선사에 납부하라. (8) 마음 속이는 중노릇하지 마라. (9) 문도 간에 화목하고 파벌 짓지 말라. (10) 문집을 간행하지 말라.

서기 1972년 1월 9일

耘虛 囑累
徒弟들에게/ 茶經室遺囑

이렇게 1월에 써 두었던 유촉문을 운허는 그해 초겨울 자신의 사부이신 경송은천 화상의 기제사 날(음, 11월 23일) 문도들에게 보이면서 ‘강의’했다. 제자 월운은 녹음을 했고, 이것은 다시 《운허선사어문집》에 풀어 옮겨져 세상에 전했다. 위에 인용한 (5)번의 조항을 그는 이렇게 ‘강의’했다. “이전에 노스님 열반하시고 대종사라고 썼는데 지나치지 않나 했습니다. 그러니 그 백 분의 일도 못 되는 내게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면 뭐라고 해야 되겠는가 생각해 봤습니다. 그냥 법사라고만 썼으면 좋겠습니다. 명정에는 ‘경전 읽고 번역하던 운허당 법사의 관’이라 쓰면 될 것 같습니다. 한문으로 쓸 필요도 없고 이 몇 자가 그 생애를 다 표현한 것이니 그것으로 된 거지요.” 이렇게 운허는 살았다.

2. 나라에 충성하고 부처를 섬긴 세월

운허는 문학성도 뛰어났다. 그의 8촌 형이었던 춘원 이광수도 그렇듯이 글을 읽던 집안이었다. 춘원은 그를 이렇게 기억한다. “내 삼종제(이학수)와 함께 노래와 구풍 한시 짓기를 내기했으나 언제나 내가 졌다. 그는 무엇이나 나보다 재주가 승하였다. 그러나 내가 백(伯)을 대할 때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구겨짐 없이 쭉 펴인 천진난만한 성품이었다.” ‘이학수’는 운허의 속명이다. 이런 품성은 그의 문장 속에도 잘 드러난다. 6 · 25전쟁 중에 피난처에서 회갑을 맞이하여 〈회갑일 자부(回甲日 自賦)〉 2수를 남기는데, 그의 인생이 ‘나라’와 ‘부처’, 두 축으로 점철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두 번째 수의 앞부분이다.

落魄踽凉萍水客 빈털터리 처량하게 떠도는 나그네
感君爲設晬解淸 조촐한 환갑상을 차려주니 그대 고맙구려.
效忠初志便成夢 충성을 다하자던 처음의 뜻, 꿈결로 돌아갔는데
學佛半生空負名 부처를 섬기려던 반평생도 헛이름만 빚졌네.

번역은 월운이 했는데, 위의 자부에서 보이듯이 그의 일생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서른 살 이전은 ‘나라 섬기기’였고 그 이후는 ‘부처 섬기기’이다. 1921년(30세)에 금강산 봉일사 출가 전후로 그의 삶은 큰 변화가 생겼다.

6 · 25 피난길에서 회갑날 쓴 〈자부〉

1913년(22세)에 만주로 가서 ‘대동청년당’에 가입하여 이시열(李時說)로 개명하여 활동하고, 그해 또 ‘대종교’에 귀의하여 단총(檀叢)이라는 호로 활동하면서 그의 구국 독립활동이 시작되었다. 1915년에는 가족들을 모두 봉천성 신빈현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흥동학교’를 세워 아동 교육에 힘썼다. 1918년에는 다시 아동교육기관 ‘동창학교’를 설립했다. 본격적인 독립운동은 기미독립선언 이후에 시작되었다. 〈경종(警鐘)〉이라는 독립운동 소식지를 발간하는 동시에 ‘군정부’(뒷날 ‘서로군정서’로 개편)에 가담하고 그 기관지 〈한족신보〉(후에 〈새배달〉로 개명)의 주필과 사장으로 활동했다.

1920년에는 ‘광한단’(일명 ‘의흥단’)을 결성하여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와 연락을 하면서 이 시기에 ‘흥사단’에 가입했다. 1921년 서울로 입국했다. 입국 이래 사용하던 가명 ‘조우석’을 버리고 ‘김종봉’으로 바꾸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박명하’란 가명으로 활동했다. 압록강을 건너는 길이 막혀 다시 ‘박용하’라는 가명으로 봉일사에 숨었다가 그 길로 승려가 되었다.

1929년, 10년 만에 다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갔다. 그곳 교포들이 세운 ‘보성학교’ 교장이 되었다. 그해 겨울 ‘조선혁명당’에 가입했다. 1932년 만주에서 ‘조선혁명당’과 ‘국민부’ 연합으로 왜경과 전투를 벌이다 전세가 기울자 가족들을 고향 땅 평안도 정주로 이사시키고 자신은 봉선사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봉선사로 통하는 큰 길목마다 왜놈들이 주재소를 세워 운허를 감시했다. 그 후에도 그의 독립운동은 계속되었고, 1945년 8월 조국이 광복되자 만주에서 활동하던 동지들을 규합하여 ‘조선혁명당’을 재건하여 정당 활동을 시작했다. 1946년 ‘조선혁명당’이 ‘신진당’으로 개편되면서부터 그는 정당 활동에서는 손을 뗐다. 이런 그의 활동으로, 대한민국은 그에게 1962년에는 ‘문화훈장’으로, 1963년에는 ‘표창장’으로, 다시 사후인 1991년에는 ‘건국애국훈장’으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상으로 위의 〈자부〉 한편에서 그의 표현대로 ‘효충초지(效忠初志)’의 편린들을 적어보았다. 이하에는 ‘학불반생(學佛半生)’을 알아보자. 운허는 일곱 살에 고향에 있는 한문서당 ‘회보재(會輔齋)’에 입학하여 17세까지 유가 글을 공부했다. 그가 배우던 서당의 이름을 보니 아마도 《논어》에 나오는 “이문회우(以文會友), 이우보인(以友輔仁)”에 유래한 듯하다. 유가의 고전을 연찬하는 일을 매개로 벗들과 만나고, 그렇게 만난 벗들과 힘을 합쳐 유가의 궁극적 가치인 인(仁)을 펼치자는 것이 그 학교의 설립 정신이리라. 신학문으로는 측량학교와 대성중학교를 다녔다.

승려가 되어서는 1924년부터 약 4년간 본격적으로 전통강원의 교학을 연마했다. 당시 스승으로 두 분을 모셨으니 한 분은 화엄사의 진진응(1873~1941) 강백이고, 또 한 분은 구암사 사문 영호당 석전 박한영(1870~1948)이다.

석전은 법물(法物)로 운허에게 추사 대감 김정희가 쓴 ‘석전(石顚)’이라는 족자를 건넸다. 여기에는 내력이 있다. 백양사 운문암 강백 백파긍선과 추사 대감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추사 대감이 ‘석전(石顚)’과 ‘만암(曼庵)’이라는 글을 지어 써주면서 “훗날 백파 화상 그대처럼 시문(詩文)도 잘하고 경학(經學)에도 밝은 제자가 나오면 이것으로 ‘호’를 삼아주면 영광이겠습니다.”라고 했다. 그것이 대를 물려 내려오다가, 마침내 영호 스님이 ‘석전’이란 호를 받게 되었다. ‘만암’ 족자와 호는, 광복 후 한암(1876~1951) 선사를 이어 1951년 3월 제3세 조선불교 교정(지금의 종정)으로 추대된 백양사의 종헌(1876~1956) 스님 차지가 되었다. 운허가 백파의 문손임을 익히 아는 영호 강백이 그 족자를 운허에게 물린 것이다.

그 후 1936년 봉선사에 ‘홍법강원’이 개설되자 그 첫 강사로 부임하니 세속 나이 45세였다. 이곳에서의 교육은 1943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되기까지 계속되었다. 1945년 광복 후에는 다시 홍법강원에 착좌했다. 6 · 25로 봉선사가 전소되자, 1952년에는 범어사에서, 1952~1953년에는 동학사에서, 1954년에는 통도사에서, 1955~1957년에는 해인사에서, 다시 1957~1959년에는 통도사에서, 1960년에는 선학원에서, 1961년에는 다시 통도사와 해인사에서, 1962년에는 다시 선학원으로 옮겨 가면서 승려교육을 했다. 이러는 동안 여러 불경을 한글로 번역해내기도 했다.

마침내 그의 출가 젊은 시절부터 소원이었던 ‘동국역경원’이 1964년에 개원되고 그는 초대 원장에 취임했다. 출가한 지 6년째가 되던 1926년 가을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35세였는데 금강산 유점사 반야암에서 ‘동국경원(東國經院)’을 세우고 경전을 연찬한 적이 있다. 그러다 1927년에는 ‘동국경원’을 유점사의 연화사(蓮華社)로 이전하고 그곳에서 원생 20명과 더불어 《대승기신론》과 《능엄경》을 연독하였다. 이것이 아마도 최초의 역경사(譯經士) 양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경전 번역에 대한 운허의 원력은 매우 일찍부터였음을 알 수 있다. 운허의 동국역경원 설립과 ‘한글대장경’ 간행은 너무도 유명하여 이곳에서는 생략한다. 인터넷 검색창에 ‘한글대장경’을 입력하여 검색하면 그 전모와 내력을 쉽게 알 수 있다.

승려가 된 후에도 운허는 만주에서처럼 문서를 통한 사상 보급에 노력했다. 불교 서적 출간 연도와 서명의 대략을 적어 그가 걸어온 길 자취의 한 부분을 보고자 한다.

《수능엄경》(안성 청룡사, 1952년 프린트본/통도사 1959년 재판/동국역경원, 1972년), 《사미율의요략》(경남: 해인사 천화율원, 1956/1959 개정판), 《무량수경》(경남: 해인사 천화율원, 1956), 《범망경》(경남: 해인사 천화율원, 1957), 《사분계본》(경남: 해인사 천화율원, 1957), 《신산정(新刪定) 사분승계본》(경남: 해인사 천화율원, 1957), 《한글금강경》(경남: 통도사, 1958), 《정토삼부경》(부산: 정토문화사, 1958), 《사분비구니계본》(경남: 해인사 천화율원, 1959), 〈보현행원품〉(서울: 동국역경원, 1959년 재판), 《유마힐경》(서울: 선학원, 1960), 《부모은중경》(미상, 1961), 《목련경》(미상, 1961), 《우란분경》(미상, 1961), 《승만경 · 금강명경》(서울: 법보원, 1962), 《자비수참》(미상, 1964), 《40권본 화엄경》(서울: 동국역경원, 1964), 《범망경》(서울: 법보원, 1965), 《사미율의》(청룡사, 1965), 《열반경》(서울: 법보원, 1965), 《80권본 화엄경》(서울: 동국역경원, 1966), 《무구정광대다라니》(미상, 1966), 《문수보살영험록》(경기도: 봉선사, 1967), 《문수사리발원경》(봉선사, 1967), 《금강반야바라밀경》(서울: 홍법원, 1970), 《정토심요》(서울: 대각회출판부, 1971 초판, 1983 3판), 《묘법연화경》 2책(법보원, 1971/아성출판사, 1979), 《수능엄경주해》(서울: 동국역경원, 1974), 《60권본 화엄경》(서울: 동국역경원, 1974), 《자비도량참법》(대각회출판부, 1978), 《능엄경강화》 3책(운허 강화, 월운 녹취, 서울: 동국역경원, 1993년). 이 중 맨 마지막 책인 《능엄경강화》(3책)는 운허가 1974년 봄부터 가을까지 역경 수련생을 대상으로 강의한 것을 녹음한 테이프가 있었는데, 그의 제자 월운이 풀어 출판한 것이다.

이상의 번역서 이외에 운허의 저술로는 《대교지문(大敎指文)》(봉선사 홍법강원, 1920), 《한국독립운동사》(발행처 불명, 1956), 《조계종강요》(발행처 불명, 1958), 《불교사전》(법보원, 1961), 《증편 법수(增編 法數)》(발행처 불명, 1961), 《불교의 자비》(동국역경원, 1964), 《우리말 팔만대장경》(편찬책임, 홍법원, 1962), 《불교의 깨묵》(동국역경원, 1972), 《여인성불》(불광출판부, 1991 재판), 《방생의식; 불교의 자비와 방생의 이야기》(동국역경원, 2001 재판)가 있고, 현토한 것으로 《법계도기총수록》(동방원, 1988 재판) 등이 있다.

운허의 생애 반은 ‘나라 섬기기’였고 나머지 반은 ‘부처 섬기기’였다고 위에서 말했는데, 그의 생애 전후를 거쳐 관통했던 일대사가 있다면, 그것은 ‘교육’이다. 1913년 그의 나이 22세 되던 해에 만주 봉천성 환인현의 ‘동창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이래, 마을에서 산속에서 그의 후진 양성은 계속되었다. 산속에서의 교육은 위에서 보았으니 이제는 마을에서의 교육을 보기로 한다.

광복이 되자, 25일 후인 1945년 9월 10일 그는 불교도 새 나라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며, 봉선사와 20여 개의 말사로부터 출자를 받아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약 농지 45만 평, 임야 약 1,400여 정보를 기금으로 학교 설립을 준비했다. 이듬해 1946년 2월 21일 개교하고, 1947년 9월 12일 재단설립인가를 미군 군정청으로부터 받았다. 당시 문교부장은 유억겸이었는데, 그는 유길준의 차남으로 〈독립신문〉(1919년 11월 1일 자) 기사를 통해 그의 애국적 글쓰기를 알고 있었다. 재단설립과 학교인가 관청업무가 지지부진했는데, 운허가 군정청에 얼굴을 비치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학교법인 광동학원’과 ‘광동초급중학교’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광동’의 ‘광’은 빛 광(光) 자이고, ‘동’은 동녘 동(東) 자이다. 운허의 정신이 배어 있다. 현재는 광동중학교, 광동고등학교, 광동여고, 이렇게 세 개의 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3. 운허가 이루려 한 일, 이룩한 일

이상의 행적을 필자는 다음의 열 방면으로 요약한 바 있다.

(1)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서 운허. (2) 언론 출판인으로서 운허. (3) 학교 설립 운영자 및 민중 교육자로서 운허. (4) 불교 경학자로서 운허. (5) 정치 지식인으로서 운허. (6) 문학 작가로서 운허. (7) 승려 교육자로서 운허. (8) 불경 번역가로서 운허. (9) 배달 민족공동체 운동가로서 운허. (10) 한글 운동가로서 운허.

이 중에서 (6) 문학 작가로서 운허에 대해서는 약간 설명이 필요하다. 운허의 한글 사랑은 남달랐다. 일찍이 ‘한글학회’에서 활동도 했다. 이런 정신은 《운허선사어문집》(208-210쪽)에 실린 〈이산선사 발원문〉을 보면 잘 드러난다. 이 번역문은 1970년 10월 15일 쓴 것으로 봉선사에서 아침 예불 때에 사용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후 여러 절에 퍼져 애용되고 있다. 그 유려함은 불자들은 다 알 것이다.

또, 운허는 불교 경전을 형식상에서는 일종의 ‘문예작품’으로 이해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교의 교리는 엄청나게 광대하여 그 중심을 붙잡기가 어렵다. 그 표현되어 있는 경전의 형식은 하나의 문예작품으로 볼 수 있으나 그 사상 내용은 철학이요, 종교이니 이 철학이며 종교의 내용이 매우 복잡하다.” 경전을 ‘문예작품’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운허의 인식은 ‘한글대장경’의 번역 문체에서도 여실하게 반영되었다. 운허의 번역은 단어의 배열은 물론 글자 수를 맞추고 읽는 운율도 고려한다. 이런 그의 입장은 역경사(譯經士) 양성을 위해 직접 강의한 《능엄경 강화》(전 3책)의 곳곳에도 나타난다.
또 배달 민족공동체 운동가로서 운허에 대해서도 설명을 보충할 필요가 있겠다. 그는 배달민족을 하나의 공동체로 하여 만주 일대와 한반도에 사는 민족공동체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1909년에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에 귀의한 바 있었고, 스스로 호를 단총(檀叢)이라 칭한 적도 있음은 위에서 소개한 대로이다.
이상에서 필자가 (1)에서 (10)까지 영역화한 운허의 삶은 그가 태어나던 당시와 지금을 비교하면 많은 성취가 있었다. (1)의 경우는 비록 남북분단의 극복이라는 과제도 남았고 잃어버린 만주 찾기도 남았다. 그런 면에서 (9)는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2)의 경우도 많은 진전이 있지만 계속 분발해야 할 것이다. (3)의 경우는 그의 유지를 받들어 현재 광동학원의 이사장인 일면 스님을 중심으로 더욱 왕성하게 번창하고 있다. (5)의 경우는 광복 이후 일찍이 운허는 손을 떼었다. 이 방면은 운허의 법형제인 운암 김성숙(1898~1969)이 이었다고 할 수는 있겠다.

그러고 보면 각별하게 불교계가 계속 이어가야 할 부분은 (4) 경학연구, (7) 승려교육, (8) 불경번역으로 요약된다. (6)의 문학 방면과 (10)의 한글 운동은 (8)의 불경번역과 연결되어 있다. 한글에 보인 운허의 열정은 대단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연세대학교 언어정보연구원’과 ‘한국선학회’가 2016년 공동 주최한 ‘불교와 한글, 한국어’ 세미나에서 집중적으로 검토되고 평가되었다. 당시의 연구 성과는 《불교와 한글, 한국어》(서상규 편저, 한국문화사, 2017)에 소개되었다. 이하에서는 경학연구, 불경번역, 승려교육에 초점을 맞추어 운허의 꿈이 무엇이었고,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1) 경학연구 방면

경학(經學)이라 하면, 불교의 사상을 담고 있는 경전을 비롯하여 선어록 등 소위 문헌을 매개로 연구하는 일체의 학문과 수행을 지칭한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불교에 입문한 뒤 운허는 당시의 전통 강원에서 ‘이력’을 학습했다. 운허의 경학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력과정’의 내용을 보아야 한다. ‘이력과정’이란, 승려가 강당에서 경론을 공부하는 것을 ‘이력을 본다’ 하는데, 그 과정은 ①사미과: 조석송주, 《사미율의》 《반야심경》 《예참》 《초발심자경문》 《치문경훈》 ②사집과: 《서장》 《도서》 《선요》 《절요》 ③사교과: 《능엄경》 《기신론》 《금강경》 《원각경》 ④대교과: 《화엄경》 《선문염송집》 《경덕전등록》이다.

이 교과과정 중의 핵심은 ③사교과와 ④대교과이다. 이 과정에서 학습하는 교재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역대 고승들의 주석서와, 또 조선에 활동하던 고승들의 주석서들이 산처럼 많다. 뛰어난 학승들은 그것을 다 열람한다. 운허도 그런 학승이다. 이렇게 학승을 배출하는 교육 전통은 조선 중기 이후 확립되었는데, 운허의 경학 정신도 역시 그런 전통에서 만들어졌고, 운허도 그런 전통을 후진들에게 교육했다. 그 전통을 만들어간 인물들의 간단한 갈래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이력과정이 언제부터 비롯하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벽계정심(1416~ ?)으로부터, 백암성총(1631~1700)까지에 걸쳐 점차로 완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력과정은 양대 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화엄교학과 남종선이다. 이 중에서 화엄교학은 현수법장-청량징관-규봉종밀 등 당나라 시대의 화엄교가의 철학이 중심을 이룬다. 이들의 철학 사상은 송나라 시대 절강 지역의 장수자선(965~1038)과 진수정원(1011~1088)에게 전수되었다. 고려 때는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송나라로 유학해서 이 사상을 보급했고, 조선 건국 초에는 선교양종 체제로 정비되는 과정에서 교종으로는 화엄종이 유일하게 맥을 이어갔다. 한편, 서해 임자도에 대장경을 실은 배가 난파되어 들어옴에 따라 소위 ‘화엄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되었다. 순천 선암사의 백암성총이 그 중심에 서 있다.

그 후 묵암최눌을 비롯하여 침명한성, 함명태선, 경붕익운으로 이어지는 선암사의 강맥이 드날렸고, 한편 고창 선운사와 순창 구암사, 해남 대흥사 등지에서는 인악의첨, 설파상언, 연담유일, 백파긍선, 설두유형, 상월새봉 등이 날렸다. 이런 전통이 구한말 일제강점기에는 선암사 대승암의 경운원기(1852~1936)로 모였다. 경운의 문하에서 석전 박한영과 혜찬 진진응이 나왔고, 이 두 강백을 법사로 운허의 경학이 형성된 것이다.
이런 운허의 경학사상에 대해 필자는 〈겸손한 화엄 학승: 운허용하〉(《한국 근현대 불교사상 탐구》 새문사, 2012, 240-272쪽)에서 연구 분석했는데, 그 요점을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불경의 언어나 문자에 대한 그의 입장이다. 석가모니와 수많은 불교 수행자의 생각을 알기 위해서는 그 언어와 문자를 해독해야만 한다는 것이 운허의 생각이었다. 그것도 “부처님의 본의(本意)”대로, 더 나아가 아름다운 문장으로 우리말로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운허의 나라말과 글에 대한 남다른 사랑이 깔려 있다. 그리고 “최후신(最後身)으로 법을 말씀한 유교(遺敎)”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철학이 들어 있다.

둘째, 운허는 최근의 한국불교의 법맥은 오직 도의 국사 후손인 선종만이 남았다고 이해했다. 그래서 자신도 태고보우의 법손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비록 이렇게 승려가 되는 과정에서 사승관계로 맺어지는 생리적 계보는 선종이지만, 이념적 계보는 경학을 업으로 하는 전통도 있고, 염불이나 정토를 업으로 하는 전통도 있고, 간화선을 업으로 하는 전통도 생겼다. 운허는 그중에서도 화엄의 교학을 전통적인 강사들로부터 전수받았고, 또 그것을 후학들에게 전수하였다. 뿐만 아니라 운허는 교판적으로는 성종(性宗)이야말로 불교의 최고의 진리를 설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또 그렇게 가르쳤다.

셋째, 운허는 부처님의 법신은 상주하고 항상 중생들을 교화한다는 불타관을 가졌다. 이런 법신은 보살 내지는 여러 가지의 사물로 항상 나타나시어 중생을 교화한다는 불-보살관을 가진 운허는 사바세계에는 ‘가르침의 주인이신[敎主]’ 부처는 석가모니불 한 분뿐이지만, 보살은 무수하게 많다는 대승의 보살사상을 믿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보살 중에는 ‘재가’도 있고 ‘출가’도 있다는 입장에 의해 승속 일체의 보살도 사상을 구현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성불할 때까지 쉼 없이 보살도를 실천할 것을 제안하고, 그 자신도 그렇게 살았다.

넷째, 운허는 유식에서 말하는 지혜를 통하여 시방에 상주하는 진여법계와 하나가 되는 형이상학적 진리관을 가졌다. 이것을 그는 ‘이지명합(理智冥合)’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의 ‘이(理)’는 진여법계를 말하고, ‘지(智)’는 대원경지를 말한다. 이렇게 대원경지로 ‘4 방면의 법계’를 관찰하는 공부를 해야만 비로소 진리가 된다고 한다. 이런 경지가 바로 부처의 경지이고 이를 두고 구경각이라고 한다. 중생들이 충만한 법계 속에 살면서도 그것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런 ‘지(智)’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섯째, 수행에 관해서 운허는 여느 화엄종사와 마찬가지로 관법(觀法)을 제시했다. 그는 ‘마음을 관(觀)하는 수행 방법’을 통해서 ‘진심’을 체험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진심’이란 ‘동교(同敎)’나 ‘돈교(頓敎)’에서 말하는 의미의 ‘진심’인데, 운허는 이를 ‘나’라는 말로 표현했다. ‘나’란 무언인가? 운허의 말에 따르면 “영원한 마음이 무상한 몸과 부즉불리(不卽不離)한 것을 우리는 ‘나’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이런 ‘나’의 체험은 “관찰하는 공부가 성숙하여 최후의 일념에 투철하게 되면” 그것이 가능해진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연’의 범주에도 ‘자연’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다. 운허는 이것을 《화엄경》 〈십지품〉의 ‘일심(一心)’ 사상으로 설명하고, 특히 《능엄경 정맥소》에 입각하여 ‘본연청정(本然淸淨)’설로 귀결시켰다.

운허의 필생 원력으로 결실을 본 한글대장경 간행

2) 불경번역 방면

이상과 같은 경학연구 방면에 나타나는 운허가 평생 꾸린 살림의 특징은 이하에서 검토할 ‘불경번역 방면’과도 상호 관련이 깊다. 필자는 〈불경의 한글 번역을 통해 본 한국불교의 정체성〉(《한국근현대 불교사상 탐구》 새문사, 2012, 94-127쪽)에서 운허의 불경번역에 나타난 경향성을 크게 세 방면으로 조망한 적이 있다. 이하에 그것을 요약 인용해 본다.

첫째, 대상으로 삼은 경전들의 교상(敎相)에 나타난 특징.

‘동국역경원’이 설립된 1964년 4월 이전에는 (1) 계율 관계 서적 (2) 정토 관계 서적 (3) 효행 관계 서적 (4) 《능엄경》과 《금강경》 《법화경》 등 조선 초기에도 일찍이 언해된 불경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1964년 ‘동국역경원’이 설립된 이후는 그 이전의 경향이 유지되면서, 전통적인 화엄강사답게 (5) 《화엄경》 관계 불서가 더해졌다. 이와 더불어 (6) 《승만경》이나 《유마경》 등, 굳이 표현하면 ‘재가불자’에게 친밀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불서를 번역했다. 또 (7) 《문수보살영험록》이나 《문수사리발원경》이나 《자비수참》 등과 같은 신앙적인 서적이다.

둘째, 번역하여 책으로 묶는 형태에 나타난 특징.

《한글금강경》이나 《수능엄경주해》에서 나타나듯이, (8) 경의 본문을 번역하면서 과목(科目)을 치고 주해를 붙였다. 예컨대 《한글 금강경》의 경우는 ‘전통 수용’의 차원에서 세친의 ‘27단의설’과 소명 태자의 ‘32분설’을 병용하지만 《수능엄경주해》의 경우는 ‘전통을 살리되 새롭게’ 과목을 붙였다.

셋째, 번역 속에 보여준 교학사상적 특징.

운허는 전통적인 화엄 5조, 그중에서도 현수법장과 청량징관, 그중에서도 청량의 교상(敎相)과 판석(判釋)을 중심으로 삼고 있다. 그는 또 금강산 출가수행 시절부터 《법화경》을 즐겨 읽었고, 또 그것을 남들에게 ‘재미있게’ 강의했으며, 그 경의 ‘구원실성’ 사상을 믿었다. 또 그는 《열반경》의 ‘법신상주’와 ‘모든 중생의 성불’과 ‘열반의 4덕’ 사상을 수용했고 《능엄경》의 ‘원묘명심(圓妙明心)’ 등을 믿었다. 이런 점에서 (9) 운허는 성종(性宗)의 철학으로 자신의 교학사상을 정비했다. 이렇게 하여 필자는 불경의 번역과 저술에 나타난 운허의 특징을 아홉 갈래로 정리하여, 그 각각을 (1)-(9)로 번호를 붙여보았다.

3) 승려교육 방면

승려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 중의 하나가 강원의 이력과정이다. 운허가 활동하던 당시는 강원이력을 마친 뒤에 선원에서 수행하는 것이 일반 추세였다. 그러나 이것도 명목일 뿐 실제 강당의 현장에서는 다양한 승려들이 존재했다. 비록 이력을 마쳤다 하더라도 한문 경전이나 어록을 제대로 읽어 인생살이에 활용하는 승려는 많지 않았다. 강원의 형편이나 그곳에 모인 학생들의 수준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소위 표준화되지 못했다. 현실은 그랬어도 출가자들의 머릿속에는 그래도 이력을 마치고 선원에 가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고, 말로도 ‘사교입선(捨敎入禪)’을 운운했다. 누구도 강원의 이력과정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시절 불교계에 근대식 학교 제도가 도입되면서 새로운 교육과정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강원은 강원대로 전통적인 교육과정을 이어갔고, 근대적 교육기관 즉 지금의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1930~1940)의 교과과정은 새롭게 만들어 운영해갔다. 소위 ‘신-구 병행’이었다.

강원의 이력과정에 대해서는 위에서도 간단하게 언급했다. 이제부터는 이력을 보는 사례를 간단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대교과정’에서 공부하는 《화엄경》에 한정해서 소개하기로 한다. 경운-석전-운허-월운, 이들이 교재로 삼는 대본은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이다. 이 책의 앞부분 총 8책을 〈현담〉이라고 하는데, 이 〈현담〉에 대한 주석인 〈화엄현담회현기〉도 함께 열람한다. 이상의 두 교재는 중국에서 집필된 것이다. 이 두 책에 대한 조선인의 주석서도 있다. 그것을 ‘사기(私記)’라 하는데, 그 양도 방대하고 게다가 초서로 허름한 한지에 갈겨 써서 읽을 수가 없다.

월운이 이 ‘사기’를 정서하고 현토해서 ‘봉선사능엄학림’에서 간행한 바 있다. 그것을 토대로 소개한다. 우선 〈현담〉의 ‘사기’로 〈유망기〉와 〈발병〉과 〈현담기〉가 있고, 〈3현〉의 ‘사기’로 〈잡화〉와 〈유망〉이 있고, 〈10지〉의 ‘사기’로 〈잡화기〉와 〈잡화부〉와 〈유망기〉가 있고, 다시 〈십지 · 후삼분〉의 ‘사기’로 〈잡화기〉와 〈잡화부〉와 〈유망기〉가 있다. 이 ‘사기’는 설파상언, 연담유일, 인악의첨 등 학승들이 저술한 것으로 임란 이후 조선의 강원에 유통되었다. 월운은 1957년 통도사 강원에 강사로 학인을 가르치면서 이런 자료들을 정서하여 ‘가리방(줄판)’에 긁어 등사하여 교재로 쓰기도 했다.

그 후 40년 세월이 지난 1996년, 봉선사에 ‘봉선사능엄학림’을 설립하고 《화엄경소초과도집》을 출간하면서 위에 열거한 방대한 ‘사기’를 재정비해서 세상에 내놓았다. 대교에서 《화엄경》 하나 공부하는 데 읽어야 할 책만 쌓아 올리더라도 필자의 키를 넘는다. 경운-석전-운허-월운, 이들은 이런 책들을 떡 주무르듯이 한다.

이력과정에 들어 있는 교재 하나하나가 모두 방대한 주석서들을 권속으로 두고 있다. 이런 책들에 박혀 있는 글자 한 자 한 자를 진흙 이기듯이 ‘밟아 지나[履歷]’야 제대로 된 강사가 탄생하는 것이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세월 속에서 말이다. 조선의 강원에서도 그랬고, 일제 강점기 세월 속에서도 그랬고, 광복 후 소위 조계종의 1994년 ‘개혁종단’ 출범 이전까지는 그랬다. ‘개혁종단’ 이전에는 ‘개머루 먹듯이’라도 형편 따라 이력을 보았다. ‘개혁’한답시고 교육목표와 교과과정의 전통을 다 흔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출가 승려가 준다는 이유로 그나마도 개편하려고 한다. 무엇을 위한 개혁이고 어디로 향하는 개편이 될까?

4. 운허의 공덕과 후학들의 과제

나라를 위해선 애국인, 후배를 위해선 교육인, 자신을 위해선 수행인, 고금을 통한 지식인, 실로 우러르면 더욱 높고 두드리면 더욱 깊으신 그 인품의 임종은 분명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뿌듯이 안겨 주는 장엄한 낙조와 같았다.

이상은 그가 임종하던 해인 〈불교신문〉(1980. 12. 21)에 실린 제자 월운의 추모이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법복을 입혀 달라 하고 좌정하여 삼매에 든 스승 면전에 월운은 두 무릎을 꿇었다. 사부가 생전 좋아하시던 《능엄경》을 읽어드리면서 증명하시라, 제자는 청했다. ‘칠처증심’ 첫 부분 독경이 마칠 무렵 운허는 88세로 눈을 감았다. 5일 뒤에 정육면체 관에 담긴 운허의 육신은 봉선사에서 화장되었고, 이듬해 그가 제일 좋아하는 8월 15일 광복절 날, 봉선사 동록 비전의 석종(石鐘)에 장지(藏之)되었다.

이제 운허가 세상을 뜬 지 30년하고도 8년이 지나고 있다. 많은 사람의 기억에 희미해져 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팔만대장경을 한글로 번역하던 역경승의 이미지는 남아 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그의 제자 월운이 스승이 못다 마친 ‘한글대장경’ 출간을 완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승가대학에서 제자를 길러내는 강사들 중에는 자신이 운허에게 배운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고, 또 후진을 양성하면서 다시 그 강사의 전통을 전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나라 사랑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드물다. 게다가 그의 수행, 그의 지식,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만 안다.

이하에는 후배들에게 남겨진, 아니 후학들로서 이어 계승했으면 하는 그의 살림살이 중에서 승려교육, 불경번역, 경학연구 순으로 범위를 좁혀서 이야기를 맺고자 한다. 이 세 부분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운허는 《불광》(1978년 1월호)에 〈내생에도 역경사업을〉이라는 글을 썼다. 첫 문장은 “평생에 가장 기뻤던 일은 8 · 15 해방이 되었을 때인데 30이 넘도록 한 것이 독립운동뿐인 사람이어서일 것이다.”로 시작된다. 물론 끝은 “한국에 태어나고 남자가 되어서 한 20세까지 글을 배운 뒤에 중이 되어, 역경사업을 또 하고 싶다.”로 맺는다. 중간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중은 본래 참말 발심이 되어서 되어야겠는데 예전부터 그런 사람은 그리 많은 것이 아니다. 그저 어쩌다가 중이 되거나 또는 제각기 사정에 의해서 중이 되었다가 나중에 중노릇 잘한 사람이 더러 있다. 예전에도 요즘보다 비교적 좀 더 많았다뿐이지 중이 된다고 다 중노릇 잘한 것은 아니고, 그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유촉〉에서 밝힌 “8. 마음 속이는 중노릇 하지 마라”는 유언과 상응하는 바가 있다. 제 마음 제대로 알기 위해, 제 마음 제대로 쓰기 위해, 제 마음으로 제 인생 잘 살기 위해, 그것이 운허가 남쪽 통도사로 북쪽 봉선사로 오가면 가는 곳마다 승려들을 가르쳤던 목표가 아닌가 생각한다.

“마음 속이는 중노릇 하지 마라”를 목표로 바른 승려상을 세워 교육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가 아닌가 한다.

불경번역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을 수 있겠으나 중요한 것 한 가지만 말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제일 화급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운허는 공동체 속에서 번역하기를 좋아한 사람이다. 그가 〈역경예규〉를 만든 것이며, ‘번역용어심의위원회’를 둔 것이 필자를 그렇게 생각하게 한다. ‘한글대장경’ 번역사업을 시작하면서 맨 먼저 한 것이 번역에 필요한 최소한의 규칙을 공론화하는 것이었다. 역경사 교육과 연수를 통해서 이런 그의 뜻을 구현하고자 했다. 현재로 역경사업을 선도하는 기관이 ‘동국대학교’와 ‘대한불교조계종’이니 이 두 기관만이라도 역경 과정에서 생기는 최소한의 규칙을 심의하고 활용했으면 좋겠다. 이것이 현재 우리 불교계에 남겨진 과제가 아닌가 한다.

끝으로 경학연구인데, 조선시대 이래 한국의 불교전통은 분명한 경향이 있다. 보통 대승의 경학을 ‘공종’ ‘상종’ ‘성종’ 셋으로 나누는데, 우리의 경학 전통은 ‘성종’이다. 법성교학이 우리의 전통이다. 이런 전통을 잘 계승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좋은 전통이 있는데 굳이 이것을 단절시키면서 새 불교 운동을 할 필요는 없다. ‘새 밭’은 ‘새 밭’대로 개간하고, ‘묵은 밭’은 ‘묵은 밭’대로 기름지게 해야 할 것이다. “주수구방(周雖舊邦)이나,기명유신(其命維新)이라”는 말이 어찌 빈말만이겠는가. ■


신규탁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교수. 동경대학 대학원 중국철학과 문학박사. 《화엄의 법성철학》 《규봉종밀과 법성교학》 《원각경 · 현담》 등의 저서와 한국 근현대 관련 저술로 《한국 근현대 불교사상 탐구》 《화엄종주 경운원기 대선사 산고집》(편역) 등이 있다. 불교평론 학술상, 연세대 공헌교수상 수상. 현재 한국동양철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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