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단에 전방위로 배어든 불교

정통 서정과 진보, 실험파의 대부 서정주와 김수영, 김춘수

2007년 한국현대시 100주년을 맞아 많은 문학단체가 기념행사와 함께 좋고 시사적 의미가 있는 시를 선정, 100주년 기념 시선집을 엮어 펴냈다. 필자도 우리 100년의 시사 중 100편을 선정, 우리 현대 명화와 함께 기념 시화선집 《꽃 필 차례가 그대 앞에 있다》를 펴낸 적이 있다.

시적 경향이나 사심 없이 100편의 시를 고르며 1908년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에서 비롯된 한국 현대시 100년은 국권 상실과 분단, 그리고 독재 등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극복하기 위해 시가 계몽과 현실참여에 징집된 아픈 역사임을 절감했다. 그런 우리 현대시의 공과 과를 간략히 따져보기에 앞서 다음 시 두 편을 감상해보자.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내게는, 아무 것, 두려움 없어,/ 육상에서, 아무런, 힘과 권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서는./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삶과 죽음 갈림길/ 여기 있음에 두려워하여/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 이르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같은 나뭇가지에 나고서도/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아! 극락세계에서 만나 볼 나는/ 도(道) 닦아서 기다리겠다

전자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부분이고 후자는 신라 경덕왕 때의 승려 월명사의 〈제망매가(祭亡妹歌)〉 전문이다. 위 두 시 중 어떤 시가 더 시답고 감동적이신가? 두 시 사이 천년의 세월을 훌쩍 넘음에도 답은 우리에게 익숙하게,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시다운 시로 모일 것이다.

최남선이 위 시를 1908년 11월에 발표, 그걸 기점으로 해서 우리 시는 향가로부터 시조로 이어져 내려오던 고전시와 현대시로 갈리고 있다. 그런 때문에 이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현대적 특성을 살펴보면 우리 현대시의 공과 허물이 대략 밝혀질 것이다.

우선 형태 면에서 시조 같은 정형시(定型詩)에서는 완전히 벗어났고 정형에서 비롯되는 율격도 어지간히 깨지면서 운문에서 산문에 가까운 자유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런 형태보다 중요한 시의 의도나 내용 면에서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소위 계몽하고자 한다. 제목처럼 바다, 즉 서쪽의 바다에서 소년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그러나 시는 가르치려는 말보다는 감동과 감응이 본령이다. 우주와 나, 너와 나는 살아 있는 하나라는 가슴 떨리는 감동의 언어가 시 아니겠는가. 우리 민족의 마음자리가 그대로 노래가 되고 문자화된 우리 시에는 위 〈제망매가〉에서 보듯 신라시대 정형시인 향가에서부터 불교가 자리 잡아 감동의 깊이를 더해왔다.
그럼에도 일제하의 카프 시와 분단 후의 북한 시, 1960년대 이후의 참여시와 민중시 등이 모두 다 크게 보면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계몽, 가르침을 잇고 있는 시들이다. 이런 시가 1960년대, 특히 4 · 19 이후 시단의 전면에서 평가를 받으며 주류를 이뤄온 것이 우리 현대시사이다. 근현대 민족사와 함께한 이런 우리 현대시 역사는 민족사적, 독립지사적, 민주화 투사적으로는 영광일지 모르겠으나, 시 본령에서 볼 때는 비극인지도 모르겠다.

해방 이후 우리 현대시사의 지형도는 서정주를 중심으로 그 한쪽에는 김수영을 아버지로 삼은 참여와 진보, 그리고 지성의 시단이 있다. 또 다른 쪽에는 김춘수를 아버지로 삼은, 그러나 제 아비도 부정해버리는 실험과 해체의 전위시단이 놓여 있다.

동서고금 가릴 것 없이 시의 한가운데를 흘러내리고 있는 시의 강심수(江心水)로서 서정주와 서정시 계열은 낡았다든가 개성이 없다며 무시당하고 있다. 대신 김수영과 김춘수 쪽만이 현대시의 비조(鼻祖) 격으로 평가되며 진보와 전위적인 시들이 득세해온 것이 4 · 19 이후 우리 시단의 흐름이다.

그렇다면 서정주와 함께 우리 현대시사의 지형도를 가르고 있는 김춘수와 김수영의 시 세계는 어떠했는가. 왜 전위와 진보를 택할 수밖에 없었는가. 앞서 살펴본 서정주는 물론이고 이 두 시인의 시 세계에도 역시 불교적 영향이 짙게 배어 있음을 그들의 시와 시론은 말해주고 있다.

 김춘수-해탈을 향한 전위적인 시적 실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김춘수 〈꽃〉

가을에서 텅 빈 겨울로 넘어가던 2004년 11월 하순, 분당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김춘수 시인을 마지막으로 찾아갔다. 한여름 더위로 기진한 몸에 먹은 죽이 식도가 아닌 기도로 들어가 막혀 입원한 시인은 의식이 마비된 채 넉 달 가까이 산소호흡기로 연명하고 있었다. 병상 앞에는 쾌유를 빌며 간호사들이 걸어놓은 위 시 〈꽃〉이 큼지막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 병원 간호사들뿐 아니라 우리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시가 〈꽃〉이다.

일단은 ‘서로에게 잊힐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간절하면서도 지성적이고 품위 있는 연애시로 읽혀 대중이 좋아할 시이다. 그러면서 모든 것은 마음이 창조했다, 내 마음속에 들어와야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불교 인식론이 깊이 있게 내장된 시이다.

김춘수 시인(1922∼2004)이야말로 한 몸으로 우리 현대시의 모든 양상을 다 보여준 시인이다. 초기의 감상적 서정시로 출발해 이미지즘, 관념시, 존재론적인 시, 사물시, 무의미시 등 시로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다 보여주며 시 자체를 통해 해탈에 이르려 했으니.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어느 하나를 떼어놓고 바라보아도 언어가 발 디딜 틈은 없다. (중략) 우리는 결국 신(神)을 말 속에서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 된다. 그것은 결국 하나의 사물도 말 속에서는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 된다. 그런 안타까운 표정이 곧 말일는지도 모른다. 시는 그런 표정의 정수(精粹)일는지도 모른다. 누가 시를 산문을 쓰듯, 자연과학의 논문을 쓰듯 쓰고 있는가? 시는 이리하여 영원한 설레임이요, 섬세한 애매함이 된다.

김 시인이 그의 역저 《시론(詩論)》에서 선(禪)에 기대어 언어와 시를 규정한 말이다. 서양의 현대 문예이론가 필립 휠라이트는 “실재(實在, Existence)는 언어의 능력 밖에 있다”고 했다. 일찍이 동양에서는 노자가 “말로 전할 수 있는 도는 불변의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고 설파했다. 그래 선도 묵언정진(黙言精進)이요 이심전심(以心傳心) 아니던가.

언어가 생긴 이래 언어를 통해서만 세계, 대상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실재(實在)와 인간을 차단해 버렸다. 어느 대상과의 접촉도 인류의 유산이 켜켜이 쌓인 언어, 의미를 통해서만 가능하므로 이제 세계와의 만남은 그런 의미에 의해 가공, 조작된 세계일 뿐 원초적인 생생한 접촉이 될 수 없다. 해서 ‘실재, 도(道)며 본질은 언어의 능력 밖에 있다’는 단정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시(詩)는 언어로 지은 절집이라 어떻게든 그런 불구의 언어로라도 실재나 도를 전하고 돌려주어야 하기에 안타까운 표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중략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꽃을 위한 서시〉 부분)에서처럼 ‘나의 신부’, 대상은 위험한 짐승 같은 언어에 얼굴, 본질이 가려져 있다. 그러면 시에서 신부의 민얼굴, 세상의 본질은 어떻게 보고 보여주어야 할 것인가.
이 땅에 불교가 전래한 이래 처음으로 몸소 불교 대중화에 앞장섰던 원효대사는 모든 불법을 누구에게나 실어 나르는 큰 수레, ‘대승(大乘)’을 풀이한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서 언어와 진여(眞如)에 관계에 대해 이렇게 설파했다. “진리는 말을 떠나 있는 것이지만 말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離言眞如 依言眞如)”라고.

진여, 실체의 그림자밖에 전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알리기 위해 언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대승다운 말이다. 시 또한 그러하기에 김춘수 시인도 ‘안타까운 표정’이라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김춘수 시인은 ‘승속일여(僧俗一如)’라는 원효의 대승적 자세를 버리고 소승적(小乘的) 해탈의 시 세계로 나갔다.

“시는 해탈이라서/ 심상의 가장 은은한 가지 끝에/ 빛나는 금속성의 음향과 같은/ 음향을 들으며/ 잠시 자불음에 겨운 눈을 붙인다.”(〈나목과 시〉 끝부분)에서와 같이 해탈에 이르기 위해, 언어에서 의미를 버리고 소리로서만 순수시 세계로 나간 시인이 김춘수이다.

불러다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 말더듬이 일자무식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 불러다오./ 멕시코 옥수수는 어디 있는가,

1960년대 후반부터 25년간 매달린 장편 연작시 〈처용단장〉 일부이다. 의미를 철저히 차단해 음향만 남게 한 무의미시의 본보기이다. ‘사바다’는 무엇이고 어떻다는 의미와 형상이 있어야 하는데 ‘사바다는 사바다’라는 동어반복으로 문맥을 차단하고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이미지 생성도 차단해 오직 음향만 남은 시이다.

“말을 부수고 의미의 분말을 어디론가 날려버리고 이미지를 응고되는 순간 처단해 버린 시” “완전을 꿈꾸고, 영원을 꿈꾸고, 불완전과 역사를 아주 아프게 무시해버린 시”가 무의미시라고 김춘수 시인은 밝혔다. 그런 시를 통해 선적인 해탈을 꿈꾼 것이다. 대신 소통이 안 돼 대중 독자들을 잃어야만 했다.

뻔한 소리는 하지 말게./ 차라리 우물 보고 숭늉 달라고 하게./ 뭉개고 으깨고 짓이기는 그런/ 떡치는 짓거리는 이제 그만 두게./ 훌쩍 뛰어 넘게/ 모르는 척/ 시치미를 딱 떼게./ 한여름 대낮의 산그늘처럼/ 품을 줄이게/ 시는 침묵으로 가는 울림이요/ 그 자국이니까

김 시인이 말년에 쓴 〈품을 줄이게〉 전문이다. 요즘의 말 많은 후배 시인들을 경계하기 위해 지은 이 시는 알기 쉽게 풀이한 선문답처럼 들린다. 김춘수 시인의 전위적인 시적 실험에는 이렇게 본질세계로 직관(直觀), 직격(直擊)해 들어가 해탈하려는 선의 요체가 가부좌 틀고 있다.

김수영-온몸으로 직격해 들어간 부정과 직관의 시학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隱密)도 심오(深奧)도 학구(學究)도 체면도 인습(因習)도 치안국(治安局)으로 가라/ (중략) / 일본영사관, 대한민국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反動)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중략) /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1964년 시 〈거대한 뿌리〉에서 김수영 시인(1921∼1968)은 취한 듯 이렇게 후련하게 부르짖었다. 이 속되고 거친 직설화법의 시어는 한국의 기존 시단에 대한 전례 없는 불온한 반동이면서 시사적으로 볼 때 이 자체로 새로운 시학, 즉 ‘반시(反詩)’ 탄생이 역설적으로 선언됐다. 그러면서 주체적이고 본질적인 깨달음으로 해탈을 이루려는 선가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시이다.

고등학교 시절 시를 배우고 습작하던 때 제일 먼저 내가 주체적으로 사 본 시집이 《거대한 뿌리》였다. 김수영은 그렇게 1970년대부터 이미 우리 시단에 거대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진보적 이념과 자유, 참여와 지성을 내세운 4 · 19 세대 문인들이 그때부터 김수영을 최고의 시인으로 재평가하며 그들의 문학권력을 공고히 해나갔다.

서울 종로에서 유복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수영은 1947년 〈묘정의 노래〉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49년 김경린, 박인환 등과 함께 펴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란 제목에도 잘 드러나듯 새로운 도시문명과 시민의식을 모던하게, 현대적으로 드러냈다.

그렇게 모더니스트로 출발한 김수영은 1960년 4 · 19 혁명이 일어나자 현실과 정치를 직시하고 적극적인 태도로 시와 시론, 시평 등을 잡지, 신문 등에 발표하며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다 1968년 6월 15일 늦은 밤 귀가하다 버스에 치여 47세의 이른 나이로 타계했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중략) 중요한 것은 시의 예술성은 무의식적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자기가 시인이라는 것을 모른다. 자기가 시의 기교에 정통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시의 기교라는 것이 그것을 의식할 때는 진정한 기교가 못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김수영이 시론이랄 수 있는 〈시(詩)여 침을 뱉어라〉에서 한 말이다. 김수영에 이르러 한국시는 1930년대 초현실주의의 의식의 조작이 아니라 뚜렷한 의식과 명징한 사유가 거친 생활 언어로 시적인 언어로 ‘초월’하는 역설적인 경험을 하게 됐다. 김수영은 머리나 심장으로 시를 쓰는 어떤 사조나 이즘이 아니라 자신이 세운 위 같은 ‘온몸의 시학’으로 밀고 나간 시인이다. 어떤 파당을 이끌거나 거기에 속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김수영은 지금 진보적이고 지성적인 파당의 아버지, 현대시의 비조 격으로 추앙되고 있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을 뒤집어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김수영의 시 세계가 곧이곧대로 드러난 시 〈폭포〉 전문이다. 이 시에서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는 대목을 언제까지 4 · 19 세대 의식으로 민중적, 저항적 시각에서만 봐야 할 것인가. 문사철(文史哲)이 겸비된 동양정신과 특히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 모든 것을 사상(捨象)시키고 본질로 직격해 들어가려 용맹정진하는 모습이 폭포에 드러나지 않는가.

“성속(聖俗)이 같다는 원효대사가/ 텔레비에 텔레비에 들어오고 말았다/ 배우 이름은 모르지만 대사(大師)는/ 대사보다도 배우에 가까웠다”

〈원효대사-텔레비전을 보면서〉 앞부분이다. 말년에 쓴 이 시는 부제대로 원효대사의 삶을 다룬 TV 연속극을 보며 쓴 시다.

김수영이 불교를 소재나 주제로 쓴 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의 시의식은 선적 직관과 해탈을 지향하고 있음이 적잖은 시편들에서 드러난다. 김수영 시에 드러나는 불굴의 자유의지는 속세의 현실적 자유이면서 선가의 해탈을 향한 자유의지였음이 말년에 3편까지 연작으로 써 내려가던 〈꽃잎〉에서도 잘 드러난다.

어린 너는 나의 전모를 알고 있는 듯/ 야아 순자야 깜찍하고나/ 너 혼자서 깜찍하고나// 네가 물리친 썩은 문명의 두께/ 멀고도 가까운 그 어마어마한 낭비/ 그 낭비에 대항한다고 소모한/ 그 몇 갑절의 공허한 투자/ 대한민국의 전 재산인 나의 온 정신을/ 너는 비웃는다// 너는 열네 살 우리 집에 고용을 살러 온 지/ 삼 일이 되는지 오 일이 되는지 그러나 너와 내가/ 정한 시간은 단 몇 분이 안 되지 그런데/ 어떻게 알았느냐 나의 방대한 낭비와 난센스와/ 허위를/ 나의 못 보는 눈을 나의 둔감한 영혼을/ 나의 애인 없는 더러운 고독을/ 나의 대대로 물려받은 음탕한 전통을

그리 짧지 않은 세 편의 연작시 중 〈꽃잎 3〉 중간 부분이다. 집일 하는 소녀와 자신을 그린 대목이다. 시 앞부분에 나오는 “소녀는 나이를 초월한 것임을” 등과 “어린 너는 나의 전모를 알고 있는 듯” 등으로 보아 순자는 이 시에서 관음보살이나 혹은 불법(佛法) 등의 현현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순자에 비하면 자신이 부정하고 거부해왔던 모든 것들은 다 낭비요 난센스였음을 깨닫고 있는 시이다.

그래 김수영은 마지막 유작으로 모든 것에 순응하며 포괄하는 우주 운항의 도(道)요 불법(佛法) 같은 시 〈풀〉을 남겨놓고 떠났을 것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이형기-백척간두에서 일군 공(空)과 적멸(寂滅)의 시학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이형기 시인(1933~2005)의 시 〈낙화〉 전반부이다. 1950년 나이 17세로 등단, 최연소 등단의 시재(詩才)를 자랑했던 그가 20대 초반에 쓴 이 시는 우리 현대시 110년사에서 절창으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시이다. 지금도 권력이나 뭐에 집착해 못 떠나는 꼴불견들을 두고 자주 인용되는 시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의 아픔을 단호한 결별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연애시로도 읽히는 이 시에는 불교철학이 내장돼 있다. 대학에서 불교학을 전공한 이형기 시인의 시에는 공(空)과 적멸의 미학이 담겨 있다. 그리고 거기에 이르려는 치밀하고 단호한 부정의 방법론이 담겨 있다.

이형기 시인은 항상 ‘부정하라, 전복하라’를 강조했다. “시란 본질적으로 구축해놓은 가치를 허무화시키는 작업이며 시에 절대적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척간두진일보 시방세계현전신(百尺竿頭 進一步 十方世界現全身)”. 당나라 장사 스님의 게송으로 목숨 건 수행을 독려하기 위해 선가에서 하는 말이다. 일반에서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이 시인이야말로 6 · 25의 폐허에서, 아니 우리네 실존의 늪에서 항상 백척간두에 올라서 모든 걸 부정하며 자신과 세계의 본질, 불도(佛道)와 한 몸이 되려 한 시인이다.

아무도 가까이 오지 말라/ 높게/ 날카롭게/ 완강하게 버텨 서 있는 것// 아스라한 그 정수리에선/ 몸을 던질밖에 다른 길이 없는/ 냉혹함으로/ 거기 그렇게 고립해 있고나// 아아 절벽!

뇌졸중으로 투병하던 말기에 쓴 〈절벽〉 전문이다. 실존의 결단이 육화되어 감동이 온몸의 전율로 오는 시이다. 이 시를 표제로 한 시집 서문에서 이형기 시인은 “모든 존재는 필경 티끌로 돌아간다. 이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영광스럽게 노래하는 존재는 시인이다”고 했다.

티끌로 돌아가는 유한성을 백척간두에 서서 ‘영광스럽게’ 노래할 수 있는 시인에게 유한과 무한, 유와 무, 색과 공 등의 분간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백척간두 절벽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방세계와 한 몸이 되어 간 시인이 이형기이다.

박희진-부처님의 뜻을 시로 모신 시보살(詩菩薩)

석련(石蓮)이라/ 시들 수도 없는 꽃잎을 밟으시고/ 환히 이승의 시간을 초월하신 당신이옵기/ 아 이렇게 가까우면서/ 아슬히 먼 자리에 계심이여

박희진 시인(1931∼2015)의 1955년 등단작 〈관세음상(觀世音像)에게〉 첫 연이다. 세상에 뜻을 세울 스무 살에 한국전쟁의 살육과 공포와 절망을 겪고 모든 걸 상실한 텅 빈 인간이 됐을 때, 석굴암 대불 뒤편 십일면관세음보살을 보고 오도송(悟道頌)처럼 터져 나왔다고 밝힌 시이다.

그래서인가, “가까우면서도/ 아슬히 먼 자리”가 그리움이며, 도며, 지고지순 등 본질을 향한 궁극의 둔중한 울림을 준다. 고은 시인이 6 · 25의 폐허, 영점에서 산문으로 출가했다면 박희진 시인은 시로 출가해 평생 불교시를 쓰고 시 낭송의 대부로서 낭송으로 널리 알리다 가서 시의 보살로 불리는 시인이다.

저 아름다운 연꽃못 뵈시겠지/ 드높이 솟아 정토에 열려 있지/ 그 뿌리는 지옥에 박혔어도/ 연꽃잎이야 한없이 청정해도/ 어리석은 자에겐 돌로 뵌다면서?/ 이 몸은 어둡기 돌보다 더하면서/ 정토에 원왕생(願往生) 원왕생하여/ 이 몸의 업장을 맑히길 소원하여/ 저 연꽃못 둘레를 돌고 돌아/ 일곱 날 일곱 밤을 돌고 돌아/ 지치어 쓰러지면 이슬로 녹아질까/ 연꽃못 채우는 이슬로 스러질까

속리산 법주사에 있는, 커다란 돌을 깎아 반쯤 핀 연꽃으로 만든 석련지(石蓮池)를 보고 쓴 〈석련지 환상〉 전문이다. 박희진 시인은 이처럼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사찰은 물론 고승대덕 등을 시화해 나가며 불교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쉽게 대중에게 전했다.

흙탕물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꽃은 세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연꽃. 보기만 해도 마음이 절로 환해지는 연꽃. 하여 불가에서 가장 성스럽게 여겨 부처님 앉을 자리로 만들거나 부처님께 바치는 연꽃이 이 시에서는 부처님 자체로 드러나고 있다. 도 닦으며 이슬로 스러져 연못 그 정토에 이슬 한 방울이라도 보태고 싶은 시인의 심정이 잘 드러난 시이다.

흥천사(興天寺) 극락전 섬돌 위에 드디어 나비는 숨지고 있었다. 두 날개를 하나로 합쳐 꼿꼿이 세운 채……/ 마치 시간에서 무시간(無時間)에로 출항하기 직전의 돛폭인양 손길이 닿자마자 나비는 홀연 자취를 감췄다

평생 북한산 자락에서 홀로 수도승처럼 살았던 박희진 시인이 인근 흥천사를 오가며 본 대로 쓴 시 〈무제(無題)〉 전문이다. 긴 시간 관찰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는데도 오묘하기 그지없는 시이다. 구체적 묘사가 아닌 단 한 구절의 관념적 진술 “시간에서 무시간에로 출항” 대목이 나비를 아연 도며 해탈이며 궁극의 뭐로 보이게도 해 제목도 ‘무제’라 했을 것. 시보살 박희진 시인은 그렇게 나비가 되어 무시간 속으로 날아갔다.

고은-무주열반(無住涅槃)의 삶과 시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설악산 백담사에 시비(詩碑)로 서 있는 고은 시인(1933∼  )의 시 〈그 꽃〉 전문이다. 용대리에서 백담계곡을 한 시간가량 걸어올라 이 짧은 시를 보았을 땐 별 감흥이 없었다. 백담계곡에 이어진 수렴동 계곡을 거쳐 산속의 또 산들을 한나절 오르내리며 봉정암에 올랐다 내려와 다시 본 이 시는 아, 그게 아니었다. 고단위 관념, 선이나 추상이 아니라 육감(肉感)이며 실감이었다.

역시 고은 시인과 그의 시가 맞았다. 사랑도 그리움도 혁명도 우주도 넓고도 좁은 그와 그의 시가 맞았다. 영원도 한순간도 한 몸에 다 붙어살며 육감으로 토해 내는 삶과 시. 그래 자신이 겪은 만큼, 아는 만큼 이 시는 각자에 그만큼 한 감흥을 주고 있는 것이다.

고은 시인은 불교적 세례를 직접 받지 않은 김춘수, 김수영 시인과는 달리 한창때 10여 년간 불가에 몸담아 용맹정진했던 승려 출신이다. 전북 군산에서 태어난 시인은 18세에 출가, ‘일초(一超)’라는 법명으로 수행했다. 일초는 단번에 뛰어넘어 부처의 지경에 이른다[一超直入如來地]는 말이다. 그런 법명답게 고은 시인은 한 시도 머무름 없이 활동하고 시를 써, 시집도 시인 자신마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고은 시인의 시는 양도 양이려니와 시 세계가 넓고도 넓어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입만 열면 그대로 시가 되는 것 같이 그의 시는 거침없이 호방해 리얼리즘이니 서정이니, 선시니 민중시니 따지는 것을 하찮은 소인배 짓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그 넓고 깊은 시 세계를 호방하게 묶고 있는 것은 불교적 세계관이다. 고은 시인도 “불교는 내 삶의 자양분이 되어 지금도 창작 활동을 돕고 있다”고 밝히고 있으니.

“나에게는 오로지 현재가 내 꿈의 장소이다. 하나 현재란, 꿈이란 얼마나 천년의 가설인가.” 팔순(八旬)을 맞으며 시선집 《마치 잔칫날처럼》을 펴내며 한 말이다. 현재가 꿈의 장소라면서도 그것마저 부정해버리고 끊임없이 부정형으로 움직이며 다른 무엇이 돼가고 있는 시인이 고은이다.

디오니소스와 이백의 친구였다며 전생은 물론 저 창세기에서부터 후생의 또 창세기까지가 한순간에 함께 익어 터지는 ‘오로지 현재’의 시인. 그러나 불교적 부정법으로 끊임없이 그런 현재도 부정하며 해탈의 길을 걷고 있다.

다 무엇이 되어가고 있다/ 이때가/ 가장 한심하여라/ 칼로 쳐라// 다 무엇이 되어가고 있다/ 소가 소고기가 되는 동안
— 고은 〈소고기〉 전문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칼로 쳐 죽이고 새로운 길로 들어서듯 머물러 무엇이 되려 하지 않고 바람처럼 떠돌고 있다.

“존재란 없어. 행(行)이 있을 뿐이지. 내 생이 동사(動詞)이듯이 내 죽음도 동사일 거야. 요컨대 이 세상의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이 떠돌고 흐르고 돌고 돌지. 무엇이 무엇이 되고 또 무엇이 되지.”

동사의 삶이고 동사의 시인이다. 머묾도 떠남도 생사도 없는, 윤회를 완전히 벗어난 ‘무여열반(無如涅槃)’이 아니라 머무름 없이 떠나고 또 떠나는 ‘무주열반(無住涅槃)’을 꿈꾼다. 무엇이 무엇이 되고 또 무엇이 되는 전화(轉化)로서의 행이 삶과 우주의 본질 아니겠는가.

내가 강가에 있기 때문에/ 강은 흘러오며 흘러간다/ 내가 여기 없다면/ 어이하여 강이 흐르겠는가/ 저 혼자서는 강도 없고 흐르는 것도 없다/ 저녁 때/ 내 발을 강물에 씻으려다 만다/ 저만큼 한 또래의 중송아지들이 있다// 누구는 이런 하루를 성자(聖者)라 하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시인이 돼 산문을 나와 쓴 초기 시 〈저녁 강가에서〉 전문이다. 석가모니 탄생설화에 나오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혹은 ‘일체유심조’를 대뜸 떠오르게 하는 시이다.

그러다 마지막에서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하고 있다. 강물을 흐르게 한 나도 없다는 것이다. 무아(無我)지경에서 오로지 무엇이 되고 또 다른 무엇이 되어가려 ‘행할’ 뿐이다.

가리라/ 시뻘건 대대 육친같이/ 가리라/ 시꺼먼 대대 원수같이/ 눈 부릅뜬 혁명 앞두고/ 한밤중 화들짝 깨어난 봉홧불로/ 가리라/ 저 봉우리/ 저 봉우리 건너/ 저 봉우리/ 저 봉우리 건너/ 저 봉우리/ 저 봉우리의 칠흑 속 건너/ 가리라/ 동트기 전/ 천리 밖 역모/ 기어이 관악 봉수대 이르기까지/ 숨지며/턱밑 칼끝의 목멱산 봉수대까지/ 가리라/ 가서/ 한 생애 멸하리라// 내 심장의 백만 전사들 먼동 트리라

팔순을 앞두고 발표한 〈봉화(烽火)〉 전문이다. “가리라”와 “저 봉우리 건너”가 반복되며 칠흑 속을 밝히며 숨 가쁘게 내닫고 있는 시이다. “눈 부릅뜬 혁명”에서는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현실참여 시로 읽을 수 있다. “한밤중 화들짝 깨어난 봉홧불”에서는 돈오적(頓悟的) 각성을 읽을 수 있다. “내 심장의 백만 전사들 먼동 트리라”에서는 화엄세상을 이루려는 대승적 자세를 읽을 수 있다.

문학평론가 백낙청 씨가 고은의 시 세계를 선시와 리얼리즘 시각에서 살폈듯 불교적 세계관에 입각해 현실참여 시단을 이끌고 있는 시인이 고은이다. 항상 떠나고 있어 또 어느 봉우리로 갈지 모르지만, 소승적 깨달음과 대승적 실천,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이 분간 없이 어우러지고 있는 세계가 고은 시인의 시 세계이다.

황동규-길을 떠돌다 도에 이른 운수납자(雲水衲子)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잃고 헤맬 때/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에 기어 올라갔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를/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내림 줄 쳐진 시간 본 적 있는가?

황동규 시인(1938∼  )의 〈쨍한 사랑노래〉 전문이다. 영국 유학 시절 템스강변이든지, 저 남쪽 섬진강변이든지 강변에 앉아 마음자리를 찾고 있는 시이다. “마음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길 잃고 헤맬 때”에도 잘 드러나듯 살며 이래저래 얽힌 상념들, 마음을 풀고 있는 시이다.

마음 한번 잡기 위해서, 아니 마음 한번 비우기 위하여 우린 때때로 얼마나 힘들었던가. 마음을 먹으세요, 마음을 내려놓으세요 등 많은 말들을 듣고 그렇게 행하길 얼마나 노력해도 계속 엉키기만 하는 마음. 해서 마음을 비워야지 하는 마음만 또 아집처럼 짐이 되는 마음.

그런 마음을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 해탈 아니겠는가. 황동규 시인은 여행하며 길 위에서 언제든 마음을 내려놓을 준비가 된 시인이다. 다른 시인들과 도반(道伴)이 되어 떠나는 그 길에 필자도 취재차 몇 번 따라나선 적이 있다. 그래 황 시인은 불가에서 말하는 ‘운수납자(雲水衲子)’ 시인이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참나의 마음자리를 찾아 모든 걸 초개같이 벗어던지고 구름처럼 물처럼 흘러 다니며 구도행각을 벌이는 모습이 황 시인 시 세계 바탕에는 흐르고 있다.

길 위에 멈추지 말라./ 사람들의 눈을 적시지 말라./ 그냥 길이 아닌/ 가는 길이 돼라./ 어눌하게나마 홀로움을 즐길 수 있다면,/ 길이란 낡음도 늙음도 낙담(落膽)도 없는 곳./ 스스로 길이 되어 굽이를 돌면/ 지척에서 싱그런 임제의 할이 들릴 것이다.

비교적 긴 시 〈풀이 무성한 좁은 길에서〉 부분이다. 길 위에서 구도행각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길 자체가 돼가고 있다. “낡음도 늙음도 낙담도 없는 곳”, 그곳은 곧 해탈의 경지 아니겠는가. 중국 당나라 고승이며 임제종을 개종한 임제 선사의 할, 꾸짖음도 아랑곳없이 홀로움으로 스스로 해탈해가고 있는 시이다.

내 세상 뜨면 풍장 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중략) //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1982년부터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 14년 만에 70편으로 완성한 연작시 〈풍장(風葬)〉 첫 번째 편의 처음과 끝부분이다. 이 연작시에서 황 시인은 “바람과 놀게 해다오”라며 가지고 놀 듯 죽음에 대해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치고 있다.

해탈도 없이, 시작도 끝도 없이 햇살과 바람에 자연스레 탈골돼가는 풍장처럼 삶과 죽음 넘어서도 해탈을 즐기고 있다. “지금 처한 곳의 주인이면 그곳이 다 진리인 것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는 임제 선사의 어록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피고 지는 요즘 꽃들보다는/ 그 꽃들을 찾아 떠도는 벌 나비보다는 /비 맞고 그냥 몸을 터는 산이 분명히 좋다./ (중략) / 이제야 간신히/ 무엇에 기대지 않고 기댈 수 있는 자가 되었지 싶다.

비교적 근작시인 〈산돌림〉 처음과 마지막 부분이다. “무엇에 기대지 않고 기댈 수 있는 자”로서의 시인과 시를 선언하고 있다. 그 무엇에도 흔들림 없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 자아, 일희일비(一喜一悲)의 인간사에서 벗어난 우주적 주체로서.

황 시인은 불자는 아니다. 영문학을 전공해 영국에 유학도 갔다 오고 서울대 영문과 교수로 정년퇴직한, 감성보다는 이성을 중시한 학자이다. 그러면서도 19세 때에 많은 사람이 애송하는 〈즐거운 편지〉를 쓴 천재 시인이기도 하다. 이성으로 감성을 억제해 분명한 시를 써 1960년대 만개할 신서정을 예비한 황 시인의 시 세계에도 이렇게 불교적 세계가 깊이 있게 흐르고 있다. ■
 

 

 

이경철 / 문학평론가 · 시인. 동국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2010년 《시와시학》(시) 등단. 저서로 《천상병, 박용래 시 연구》 《미당 서정주 평전》 등과 시집 《그리움 베리에이션》이 있다. 현대불교문학상(평론 부문), 질마재문학상 등 수상. 현재 동국대 대학원 문창과 겸임교수.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