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하동 평사리문학관 레지던스 입주작가로 들어와 있다. 종일 책 읽고 글 쓰고 산책하는 것이 일이다. 창문 열면 지리산이 푸르게 들어온다. 지리산은 육산(肉山)이다. 바위가 아닌 흙으로 이루어진 산. 어머니의 산이라고 한다. 능선은 뾰족하지 않고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전부터 사회에서 핍박받고 쫓겨난 사람들이 숨어들곤 했고, 지리산은 그런 사람들을 어머니와 같이 품어주었다. 나도 어머니의 품에 든 듯 선물처럼 주어진 이곳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해야 할 일은 많고 두고 온 일도 수시로 날아들어 하나하나 추스르다 보면 하루가 간다. 사이사이 시간이 날 때마다 지리산 깊고 넓은 품에 자리 잡은 절을 찾는다.

우리는 왜 절을 찾는가. 여행 대부분이 그 지역의 절을 찾는 일. 의도치 않아도 풍경 좋고 고즈넉한 산사로 접어드는 경우가 많다. 절은 지금 여기에서 먼 곳, 멀어서 가고 싶은 곳이다. 세상에 없는 무엇이 있을 것만 같으니 잠시라도 머물러 보는 것이다.

가을볕 유순한 오후, 쌍계사 가는 길은 평일이라서 사람도 많지 않고 호젓하다. 단풍이 드는 나뭇잎에 내려앉은 빛도 은은하다. 감태나무 두릅나무 왕대, 나무들의 이름을 부르며 일주문을 지나고 금강문을 지나고 천왕문을 지난다. 이 문들은 세속과 부처의 세계를 가르는 입구이자 출구이다. 수행자로 들어서든 불자로 들어서든 여행자로 들어서든 이 문들을 들어서면 몸과 마음을 숙연하게 정돈하는 자세가 된다. 신발을 끌지 않고 걸음은 조용조용, 목소리 낮추고 말씀은 가만가만 듣게 된다. 그런데 오늘은 일주문 지나며 합장하는 걸 잊었다. 불자 아닌 티가 여기서 난다. 하지만 가장 먼저 대웅전을 찾아 절 올리는 일은 잊지 않는다. 나는 절하는 게 좋다. 그냥 좋다. 정신 사나운 일이 생기면 마음을 가다듬는 차원에서 또 운동 삼아 종종 백팔 배를 한다. 몸과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데는 절만 한 게 없다는 생각이다.

법당에 들어가면 눕고 싶다. 산사에 오르며 온몸이 후끈해지는 여름철이면 더하고 그 계절이 아니더라도 부처님께 절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슬그머니 눕고 싶어진다. 높은 천장과 바닥 마루의 선선함, 향 냄새 밴 단청이며 탱화들, 그윽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석가모니불. 힘들게 걸어왔구나, 뭔지 모르게 등을 토닥거려주는 위로의 눈빛을 받는다. 긴장이 풀리고 마음 은은해지면서 그 안에 편안하게 누워 ‘쉼’을 얻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만약 내가 까짓것, 법당에 벌렁 드러누웠다고 하자.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할까. 스님은 또 어떤 표정이실까. 템플스테이를 가면 수행자의 예법을 엄격하게 가르치는 처사님이나 보살님들이 스님보다 더 어려웠으니 아마도 나의 행동에 대한 꾸지람도 그분들이 더 클 것 같다. 부처님은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풀지 않으실 테고. 이런 충동이 일 때마다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오래전에 읽은 숭산 스님의 저서 《부처님 손바닥에 재를 털면》에 나오는 이야기다.

한 남자가 담배를 피우면서 선원(禪院)에 들어와 부처님의 얼굴에 연기를 불어 대고, 부처님의 손바닥에 재를 털었다. 주지 스님이 들어와서 그 모양을 보고 “당신 미쳤소? 왜 부처님께 재를 털고 있소?” 하고 꾸짖었다. 이에 남자가 “우주 모든 것이 부처인데 그러면 어디에 재를 털겠습니까?” 하니 주지 스님은 대답을 못 하고 나가 버렸다. 이에 ‘주지 스님은 어떻게 그 남자를 가르쳐야 옳았을까요?’ 하는 물음이다.

만일 자신이 그 주지 스님이었다면 즉시 그 객을 한대 후려쳤을 것이라는 이도 있다. 보통 그럴 것이다. 그 버르장머리 없는 짓을 보고만 있겠는가. 그러나 답은 아무 말 말고 재떨이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는 것이 올바른 용심(用心)이 아니라는 것. 담뱃재는 재떨이에 떨어야 한다는 걸 말없이 보여주라고 한다.

마음 마음 하니까 모든 것을 마음에만 돌리려고 하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 공(空)에 떨어진다. 일어나는 일은 순간이지만 찰나에 바른 관계를 맺어야만 영원히 인연이 지속될 수 있다는 이 가르침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누구나 제 딴에는 자기가 최고다. 그것은 독선으로 혹은 자존감으로 치환된다. 어느 것이 바른 관계 맺기에 바람직한지는 자명하다. 우리의 끊임없는 질문들, 삶의 의미와 진실은 이해되거나 말해질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해도, 인간이 인간을 갈망하고 이 불투명한 세계를 이해하려는 열망은 식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우연과 필연으로 서로 연결되고 연대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공감하고 배려하는 자세를 지향하는 이유이다. 마음과 말과 행동이 거슬리지 않고 여여(如如)하게 흘러가야 한다. 그러므로 담뱃재는 재떨이에 떨어야 하듯 법당에서는 함부로 드러눕지 않아야 하는 것. 매번 마음으로만 대자로 누워보는 것인데 바람이 흘러온다. 흘러간다. 허공을 채우는 풍경 소리 청아하다.

오늘은 금당 가는 문이 열려 있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수행자들의 하안거로 닫혀 있어 보지 못했는데 반가운 마음으로 108계단을 오른다. 앞서가는 스님의 뒷모습. 가을빛이다. 빛이 머문 시간을 가사 안으로 여미고 담백하게 걸어가신다. 험난한 구도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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