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비교종교학 교수

들어가면서

필자가 불교인들과 그리스도교인들의 상호 이해와 협력을 더욱 증진하는데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불교 이야기』 형식의 책을 써서 그 원고를 고려대학교 철학과 조성택 교수에게 보내 일독을 부탁하고 그의 조언을 청한 적이 있다. 조성택 교수는 그 원고를 보고 필자에게 이번에는 ‘불교인을 위한 그리스도교 이야기’ 형식의 글을 써서 『불교평론』에 연재하라고 부탁해 왔다. 조성택 교수나 필자나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도의 길을 함께 가는 길벗으로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는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같이 하는 처지라 그가 특별히 생각하고 부탁한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필자는 여기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불자들을 머리에 상정하고 그런 불자들을 위해 그리스도교의 발생과 그 역사적 전개 과정, 그리고 중요한 가르침을 차근차근 소개할 계획이다. 그러나 이런 객관적 그리스도교 교회사나 교리사를 서술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으려고 한다.

필자가 『그리스도인을 위한 불교 이야기』에서 불교사나 불교사상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불교사 전반을 살펴 가면서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상통할 것 같거나 서로 보완적일 것 같은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곁들인 것처럼, 여기서도 객관적 그리스도교사의 기술에 그치지 않고, 필자 자신이 불교를 공부하면서 새로이 발견하게 된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면목, 더 깊은 차원도 함께 소개함으로써 불자들이 그리스도교를 새롭게 발견하고, 나아가 그리스도교에 대해 더욱 큰 친근감 내지 동류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 방향으로 전재하려 한다.

필자는 어려서 어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고, 그런 인연이 계속되어 대학으로 진학할 때 그 당시 한국에 유일하게 존재하던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만 해도 어릴 때 받았던 보수주의적 그리스도교 배경의 영향 때문에 불교나 다른 이웃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그렇게 주장했다. 물론 어머님이 다니시던 그 교회 교인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극히 배타적인 생각을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리스도교가 아니면 희망이 없다고 하는데 대해서는 심각하게 이의를 제기해보지 못한 상태였다.

전공으로 종교학을 택한 것도 인간이 왜 종교를 갖게 되고 종교가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던가 등의 문제를 여러 종교 현상을 섭렵하고 비교해서 알아보려는 종교학의 기본 목적보다는 필자가 신봉하던 그리스도교를 좀 더 학문적으로 깊이 이해하려는 데 주목적이 있었던 셈이다. 내 종교만 알기도 벅찬데 남의 종교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무엇인가 하는 태도였다. 종교학의 창시자 막스 뮐러가 “한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고 한 말의 뜻을 깊이 실감하지 못한 상태였다.

한국에서 종교학과 학사, 석사과정을 마치고 1971년 초 박사과정 공부를 위해 캐나다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 당시 캐나다나 미국의 종교학과에서는 서양종교와 동양종교를 함께 가르쳤다. 그러나 특히 동양종교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과 열기는 대단했다. 필자도 한국에서 개론 정도로 그친 동양종교에 대한 지식으로는 비교종교학을 올바로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동양 종교를 한 번 본격적으로 공부하겠다고 마음먹고 동양종교 과목을 택했다.

처음 택한 것이 중국인 교수가 가르치는 『법화경』 강의와 인도인 교수가 가르치는 『중관론』, 또 다른 인도인 교수가 가르치는 베단타 사상에 대한 강의였다. 이어서 도가사상, 선사상 등에도 접하면서,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종교적 세계가 눈앞에 새로이 전개되는 것을 보게 되고, 필자가 종래까지 가지고 있던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도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런 경험 일단을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 쓴 책이 필자가 30대 말에 쓴 『길벗들의 대화』와 50대 말에 쓴 『예수는 없다』였다.

앞으로 여기 연재할 글은 결국 필자가 이런 이웃 종교들, 특히 불교를 공부하면서, 그리고 25년 가까이 이곳 캐나다 학생들에게 불교를 가르치면서 새로이 이해된 대로의 그리스도교를 불자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전개하는 그리스도교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물론 불자들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길거리 전도자나 광신적인 주말 부흥사나 이웃의 열성당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들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그리스도교나 그 배경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겠지만, 그보다는 그리스도교의 더욱 깊은 내면적 메시지가 무엇이고 그런 메시지가 세계종교사의 입장에서, 혹은 불교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를 살피는데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왜 그리스도교를 알아야 할까?

현재 세계에서 신도수가 가장 많은 종교는 그리스도교이다. 대략 세계 인구의 30%를 차지한다고 본다. 참고로 세계적으로 불교 인구는 약 6퍼센트로 추정한다. 한국에서는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과 한국 갤럽이 공동으로 2004년 말 조사하여 보고한 바에 의하면, 한국의 종교 인구 57% 중, 불교인이 전체인구의 26.7%이고, 개신교(21.5%)와 가톨릭(8.2%)이 합해서 29.7%를 차지한다.

한국에서는 ‘기독교’라고 하면 개신교(프로테스탄트)를 의미하고, 이를 가톨릭과 구별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 둘이 모두 그리스도교, 혹은 기독교에 속한다. ‘기독(基督)’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중국말로 음역한 것이다. 한국에서 점점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라는 말을 많이 쓴다. ‘기독인’이라는 말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더욱 자연스럽듯, ‘기독교’ 보다는 ‘그리스도교’가 더 듣기 좋아서일까? 아무튼 ‘그리스도교’라고 하면 개신교뿐만 아니라 가톨릭, 나아가 동방정교회까지를 모두 통틀어서 하는 말이라 보아야 한다.(주: 금장태, 길희성 편집, 『경전으로 본 세계종교』(정통문화연구회, 2001)에서도 ‘기독교’라는 말 대신에 ‘그리스도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의 종교 인구 통계가 보여주는 사실은 한국에서 가톨릭과 개신교를 합한 그리스도교인 숫자가 불교인의 수와 엇비슷하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의 전통 종교는 불교와 유교, 도교, 무속 등이지만 200여 년 전에 들어온 가톨릭, 그리고 100여 년 전에 들어온 개신교로 이루어진 그리스도교는 현 한국 사회의 종교 지형에서 불교와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큰 줄기 중 하나라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실적으로 한국에서 그리스도교는 이제 소수인의 외래 종교가 아니라 한국인들 속에 뿌리내린 한국인의 종교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앞으로 이야기하면서 밝혀지겠지만, 그리스도교는 아시아의 한 부분인 현재의 팔레스타인에서 발생하였기에 발생지를 두고 따지면 ‘동양종교’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초기부터 주로 서양으로 전파되어 여러 세기 동안 서양의 주요 종교 내지 거의 유일한 종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서양종교’로 분류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유럽으로부터, 그리고 19세기 이후 미국으로부터의 활발한 선교활동에 힘입어 그리스도교는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여러 지역에 두루 퍼졌다. 특히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그리스도교 교세가 급속도로 팽창해, 20세기 말부터 현재 이런 지역의 그리스도교 신자수가 유럽 그리스도교 신자수를 능가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신도수 분포 면에서 보면 현재 그리스도교는 사실 서양의 종교라 하기보다 차라리 비서양 문화권 혹은 제3세계의 종교라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다.

이제 교통 통신의 발달로 세계는 점점 좁아져 지구촌 혹은 지구 공동체가 출현하고 있다. 새로운 지구촌 혹은 지구 공동체로 서로 오순도순 살아야 하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왜 세계에는 아직 평화가 없는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 한스 큉은 “종교 간의 대화가 없이는 종교 간의 평화가 있을 수 없고, 종교 간의 평화가 없이는 세계의 평화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지금 세계에서 일어나는 분쟁이나 전쟁의 대부분이, 물론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 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 종교적 요인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아 틀릴 것이 없다. 가장 단적인 예가 9·11 사태와 지금도 그치지 않는 이라크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이럴 때일수록 종교 간의 대화와 상호 이해를 깊이 할 필요를 절감하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사실 서양 신학자들 중 상당수는 현재 열심히 불교를 연구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과정신학의 대가인 미국 신학자 존 캅(John B. Cobb, Jr.)은 서양 신학이 불교와 대화하며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고 하고,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대화를 통해 ‘상호 변혁(mutual transformation)’을 이루어 갈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주: Paul O. Ingram and Frederick J. Streng, eds. Buddhist-Christian Dialogue: Mutual Renewal and Transformation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6), p. 231. “Christian theology is deeply affected by the encounter with Buddhism…….” 그의 책 Beyond Dialogue: Toward a Mutual Transformation of Christianity and Buddhism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2)도 참조.)

20세기 최고의 사상가로 꼽히는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도 그리스도교가 시작할 때 동방에서 선물이 왔듯이, 20세기가 지난 지금 그리스도교가 새로운 활력을 되찾으려면 동방에서 다시 선물이 와야 한다고 하고, 그 선물이 바로 동양의 정신적 유산, 특히 선불교 정신이라고 하면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에 적극적이었다 .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도 후대 역사가들이 20세기에 일어난 일 중에서 무엇을 가장 의미 있는 일로 여길까를 가상하면서, 그것이 우주선이나 컴퓨터 같은 과학 기술적 발달이나 공산주의의 흥기와 몰락 같은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처음으로 의미 있게 만난 것을 지적하리라고 할 정도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만남을 중요시했다.

그 외에 현재 불교와의 관계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을 대폭 수정하는 신학자도 많고, 서양 철학자 중에서도 쇼펜하우어, 니체, 바그너, 하이데거 등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 데리다, 푸코 등도 불교에 접한 사상가들이다. (주: 서양 사상이 동양 사상에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를 명쾌하게 보여 주는 책으로 J. J. Clarke, Oriental Enlightenment: The Encounter Between Asian and Western Thought (London: Routledge, 1997)와 Alexander Lyon Macfie, ed., Eastern Influence on Western Philosophy: A Reader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을 참조.)

현재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와 협력을 강조하고 이에 적극적인 사람들은 어느 면에서 아시아 불교권의 학자들보다 서양 신학자들 사이에서 더욱 많이 발견되는 것이 현실이다.(주: 서양에서의 불교 현황을 알려면 최근에 나온 책 Charles S. Prebish and Martin Baumann ed., Westward Dharma: Buddhism beyond Asia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2), James William Colemann, The New Buddhism: The Western Transformation of an Ancient Tradi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Joseph Goldstein, One Dharma: Emerging Western Buddhism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2002) 등과 한국에서 번역 소개된 프레드릭 르누아르, 양영란 옮김, 『불교와 서양의 만남』(세종서적, 2002) 참조.)

사실 현재 그리스도교를 알고 있는 불자나 불교학자들보다는 불교를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나 학자들이 비교적으로 훨씬 많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양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그리스도-불교 간의 대화에도 그리스도 쪽의 참석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실정이다.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할 때 이 두 종교가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는 관계를 유지한다고 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불가결한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재 한국에서는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상호 이해와 협력 관계를 이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가 없는 형편이다.

최근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이런 노력이 산발적으로나마 보이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두 종교는 대화나 협력 관계보다는 혼자만의 독백으로 치닫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관찰일 수 있다. 심지어 서로 무관심한 독백적 태도보다 더욱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서로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공격하는 자세로 일관하는 경우다. 특히 일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불교를 오해하고 마치 불교는 구시대의 유물로, 혹은 이 땅에서 없어져야 할 미신이라 믿고, 이 근거 없는 믿음에 따라 불교를 박멸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이는 사례까지 발생한다고 하는 것은 어느 면에서 불길한 전조 같아 극히 염려스러울 정도이기도 하다.

“종교 간의 평화가 없이 사회에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은 이제 한국 사회에 가장 절실하게 적용될 수 있는 말로 들리게 되었다. 한국에서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상호 이해와 협력은 한국 사회의 계속적인 안정과 번영을 위해 추구해야 할 필요조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와 상호 이해가 절실히 요구되는마당에 이런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방 종교에 대해 어느 정도 바로 알고 있어야 한다. 물론 대화를 진행해 가면서 점진적으로 상대방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더욱 효과적으로 협력해 갈 수도 있겠지만, 처음부터 서로 상대방을 전혀 모르고서는 그야말로 이야기가 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적어도 상대방 종교의 역사와 기본 가르침을 아는 것이 필수적이다. 물론 불교인들의 경우 그리스도인들과 대화하고 협력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최소한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가를 대강이라도 살펴보는 것이다.

종교 간 대화의 문제

철수네는 밥 먹기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음식에는 단백질이 얼마나 들어 있고, 저 음식에는 비타민이나 철분이 얼마나 들어 있다는 것을 계산하면서 건강하기 위해 밥을 먹었다. 철수네는 ‘밥 먹기=영양 섭취’라는 공식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다.

어느 날 철수는 친구 영이의 초대를 받았다. 영이네 집에서 저녁을 먹는데, 그 집의 밥 먹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양섭취가 아니라, 화기애애한 가족 간의 대화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날 직장에서 겪은 일을, 아이들은 그날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면서, 서로 깊은 사랑과 관심을 표현했다. 말하자면 영이네는 ‘밥 먹기=사귐’이었다. 이 일은 철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친 김에 철수는 영수네 집에도 가 보았다. 영수네 밥상에서는 자세를 바로 해라, 입에 밥을 넣고 이야기하지 마라, 언제나 남을 배려하며 밥을 먹어라는 등 식사 예절뿐만 아니라 살아가면서 남을 어떻게 배려하고 대해야 하는가를 배우는 것이 중요했다. 영수네는 ‘밥 먹기=예의범절’인 셈이다. 이 일도 철수에게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한참 뒤 철수는 순이 집에도 갔다. 순이네는 특별했다. 밥을 먹을 때, 이 밥이 상에 오르도록 도움을 준 하늘과 사람,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을 생각하고 고마움을 느끼며 먹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밥 한 톨 한 톨에 우주가 들었음을 기억하고, 심지어 밥이 하늘이고 밥을 먹는 우리도 하늘이라서 우리가 밥을 먹는 것은 하늘이 하늘을 먹고 사는 이치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순이네의 ‘밥 먹기=고마워하기’였다.

철수가 여러 집을 방문한 것은 그 집에 양자로 들어가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 집의 아이를 양자로 데려오기 위해서도 아니다. 누구의 밥 먹기가 더 훌륭한가를 가늠하며 우열을 따지려는 것도 물론 아니다. 서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고 분석하려는 것도 주목적은 아니다. 이왕 한평생 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 삶에서 남의 밥 먹는 법에서 무언가를 배워 나의 밥 먹기를 더욱 풍요롭게 하려는 것이다. 철수도 자신이 갖고 있는 영양에 관한 지식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의 밥 먹기가 더욱 풍요롭도록 도와줄 수도 있다.

한 가지 더욱 놀라운 것은 철수가 영이와 영수, 순이의 집을 다녀온 다음 혹시나 하고 자기 집안의 ‘밥 먹기’ 내력을 살펴보았더니 오래 전에 자기 집안도 밥 먹는 것을 사귐이나 예의범절, 고마워함과 관계시켜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근래에 들어 밥 먹는 것이 주로 영양을 위한 것이라고 믿고 주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철수는 다른 아이들의 집에서 배운 것으로 자신의 밥 먹기를 풍요롭게 했을 뿐 아니라 자기 집에서 잃어버리거나 등한시 했던 집안의 전통을 다시 찾아 볼 수도 있었다. 생각지 못한 수확이었다.

이웃 종교들에 대한 태도

이 이야기를 좀 더 전문적인 용어를 써서 이야기해 보자. 그리스도교 신학자들 사이에는 현재 이웃 종교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여야 할까를 놓고 몇 가지 뚜렷이 대조되는 태도들을 보이고 있다. 이런 강이한 태도들을 분류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일반적인 분류법은 배타주의, 포용주의, 다원주의로 나누는 것이다. 배타주의는 나의 종교가 아니면 안 된다는 입장이고, 포용주의는 너의 종교도 어느 정도 좋지만 결국은 내 종교에서만 참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태도이고, 다원주의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대화해서 서로 배우고 서로 변해 가자는 자세라 할 수 있다.

이웃 종교에 대한 태도를 나누는 또 다른 분류법은 대체론(Replace- ment model), 충족론(Fulfillment model), 상호론(Mutuality model), 수용론(Acceptance model)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대체론이란 너의 종교로는 안 되니까 그것 대신 내 종교로 대체하겠다는 태도다. 여기에는 완전 대체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부분 대체를 주장하는 사람들 두 종류가 있다. 충족론이란 너의 종교도 일정 부분 좋은 점이 있지만, 그것으로는 아직 모자라니 나의 종교로 그 모자람을 채워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상호론은 각 종교에서 서로의 공통점을 찾아내고 이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수용론은 각 종교가 가지고 있는 서로의 차이를 그대로 인정할 뿐 아니라 이를 아름답게 생각하고 그 아름다운 차이에서 서로 배우자고 하는 주장이다. (주: Paul F. Knitter, Introducing Theologies of Religions (Maryknoll: Orbis Books, 2002) 참조.)

위에서 말한 철수가 영이나 영수나 순이의 집을 방문하면서 가지게 되는 태도는 위의 분류법을 따른다면 다원주의의 태도, 상호주의 내지 수용주의에 해당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철수가 그리스도인 가정의 아이라 해도 좋고 불교인 가정의 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불교인도 철수처럼 다른 종교를 알아봄으로써 내 종교를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고, 또 내 종교 속에 다른 종교의 특성들에 맞먹는 요소들이 있음을 새롭게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웃집을 방문한 철수가 이웃집의 밥 먹는 경험을 통해 자기 자신의 밥 먹기 경험을 풍요롭게 했다는 다원주의적, 혹은 수용론적 태도를 놓고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할 수도 있다. 개방적인 태도로 임하는 종교 간의 대화란 첫째, 우리의 종교적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종교 간의 대화는 그저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의 안일한 대화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껏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신앙 체계가 도전받을 수 있을 정도로 진지하고 심각하다는 것이다. 이런 대화를 통해 지금까지 당연한 것으로 품어오던 생각에 의문을 가질 수 있고 이를 통해 우리의 종교적 생각이 더욱 다양해지고 더욱 정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이런 종교 간의 대화를 통해 상호 변혁(mutual transformation)이 일어날 수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집 밥 먹기 교리는 절대적이므로 어느 경우에도 변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미 형성된 고정관념을 공고히 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것을 바꿀 수 없다는 전제를 가지고 대화에 임하면 처음부터 대화가 성립될 수 없다. 넷째, 철수가 여러 집 밥 먹기를 관찰하므로 자기의 밥 먹는 경험을 풍요롭게 하고, 궁극적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방향으로 나가듯, 종교 간의 참된 대화는 나의 종교적 삶이 궁극적으로 변화를 입어 참된 종교적 청복을 누리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교도 여러 가지

우선 불교인으로서 알아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교가 획일적이나 균질적인 단일 종교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모두 한 가지 생각, 한 가지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오로지 한 가지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모두 다 잘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에도 어떻게 분류하느냐에 따라 수백 개 내지 수천 개의 교파가 있다. 11세기 동방정교와 로마 가톨릭이 갈라지고, 16세기 초 로마 가톨릭에서 개신교가 갈라져 나왔다. 개신교에도 루터교, 장로교, 성공회 등이 있고, 그 후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등이 등장했다. 한국의 경우 해방 전까지 하나이던 장로교가 해방 후 기독교 장로교(기장)와 예수교 장로교(예장)로 갈라지고, 다시 예장이 수없이 갈라져 예장 계통의 교파만 현재 수백 개에 이르고 있다.

물론 이런 외형적인 교파별 분류에 따라 각기 나름대로 특유의 교리나 관행 등이 따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교파별 분류보다도 그리스도교를 크게 나누어 이른바 진보적 성향의 그리스도교와 보수적 경향의 그리스도교로 분류하는 것이다.

보수적 성향의 그리스도교 중에서도 더욱 보수적인 그리스도교를 ‘근본주의(Fundamentalist)’ 그리스도교 혹은 ‘복음주의(Evangelical)’ 그리스도교 라고 하는데, 이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성경에 쓰인 모든 것이 문자적으로 사실이라 믿는 ‘문자주의’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이 없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모든 종교는 결국 인간들이 저지르는 안타까운 헛수고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배타주의’ 내지 ‘대체주의’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근본주의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유럽에는 거의 없는 형편이고, 서양에서 가장 보수적인 그리스도교 국가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도 미국 인구의 25% 내지 30% 정도라고 본다.(주: Paul Knitter, Introducing the Theologies of Religions (Maryknoll, NY: Orbis Books, 2002), p. 22.) 그런데 한국의 경우, 현재 한국 프로테스탄트(개신교) 그리스도인 중 90% 이상이 이런 근본주의 혹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라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따라서 한국 그리스도교를 보고 세계 그리스도교도 같은 교리, 생각, 태도 등을 가지고 있다고 단정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말하자면 한국 그리스도교는 이른바 주류(Mainline) 그리스도교와 달리 일종의 별종 그리스도교라 보아도 무방하다. 특히 한국 그리스도인들 중 불교를 박멸하자고 나서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도 바로 근본주의 그리스도교가 지배적인 한국적 특수 사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앞으로 소개할 그리스도교는 이런 근본주의가 어디서 왔는가 하는 등 근본주의나 보수주의 교리나 신학도 소개하지만, 진보적 신학에서 새로이 가르치는 것이 무엇이고 이런 가르침이 불교의 가르침과 어떤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더욱 큰 관심을 가지고 살펴볼 것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바라는 것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여기 연재할 글에서는 불교나 그리스도교 중 어느 한 종교를 선전하거나 폄하하려는 목적이 전혀 없다. 독자에게 불교인이 되거나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권유하려는 것도 절대 아니다. 두 종교 중 어느 것이 진리고 어느 것이 거짓이라든가, 어느 것이 더 낫고 못하든가, 진위나 우열을 따지는 것은 더더구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어떤 점이 같다, 비슷하다, 혹은 다르다만을 따지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함께 이야기할 때 주로 세 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완전히 다르다고 보는 입장(discontinuity), 두 종교는 본질적으로 같다는 입장(essential identity), 두 종교가 대조적이지만 상호보완적이라는 입장(contrast but complementarity) 등이다. 여기서는 주로 세번째 입장에 서서 불교인으로서 알아두어야 할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가르침을 살필 것이다.

어느 면에서 두 종교 간의 대화는 서로 상대에게 ‘거울을 들어 주는 것’과 같다. 불교인과 그리스도인이 대화를 할 경우, 그리스도인은 불교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만약 불교인 역시 그리스도교에 비친 자신의 모습 일부를 볼 수 있다. 바라는 것은 ‘불교인들을 위한 그리스도교 이야기’에서 불자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킴과 동시에 불교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도 더욱 확실해지게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들어 준 거울을 보면서 불교인이 가장 먼저 할 일은, 그리스도교를 통해 내가 모르던 나의 모습을 재발견, 재확인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우리를 위해 ‘상기시키는 무엇(reminder)’, 혹은 ‘촉발시키는 무엇(trigger)’의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불자로서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당연시 여기던 것, 이제껏 등한시 한 것을 새로이 인식하거나 상기하고, 그 중요성을 되새겨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거울에 비친 불교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새롭게 깨닫는 일이다. 필자가 즐겨 쓰는 좀 거창한 용어로 말하면, 그리스도교를 읽고 내 속에 있는 무언가를 촉발시키는 ‘환기식 독법(evocative reading)’으로 그리스도교를 읽어 보자는 것이다.

지금부터 종교간, 특히 그리스교와 불교 간의 대화와 화합, 나아가 호혜와 상호 변혁을 위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이 어떻게 발전했는가 하는 문제를 차근차근 짚어보기로 한다.

다음 회에 나사렛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를 할 예정이지만, 이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 일종의 예습으로 그리스도교 역사에 대한 전체적 지식과 특히 새로이 출연하는 그리스도교 형태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읽으면 좋을 책 몇 권을 소개한다.

  • Borg, Marcus J. The Heart of Christianity: Rediscovering a Life of Faith.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2004.
  • Kung, Hans. On Being a Christian. London: Collins, 1977.
  • Christianity: Essence, History, and Future. New York: Continuum, 1998.
  • Spong, John Shellby. Why Christianity Must Change or Die.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1998. 한국말 번역 김준우 옮김,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한국기독교연구소, 2001.
  • Knitter, Paul F. No Other Name? Maryknoll, N.Y.: Orbis Books, 1985. 한국말 번역, 『오직 예수 이름만으로?』, 한국신학연구소, 1987.
  • Walker, Williston et al.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4th ed.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85. 한국말 번역 류형기 역편, 『기독교회사』, 한국기독교문화원,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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