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촛불 이후, 한국사회와 불교

‐ 한국 특유의 불평등 현상에 초점을 맞추어

1. 들어가는 말

《불교평론》 편집진으로부터 원고청탁 전화를 받았다. 대주제는 ‘촛불 이후, 한국사회와 불교’이고 내가 감당해야 할 소주제는 ‘불교 평등론적 시각에서 본 촛불 이후 한국사회의 불평등 문제와 그 대안’이란다. 순간, 조금 망설였다. 불평등 문제를 촛불 전후로 나누어 실증할 경우, 거기에 전제된 역사적 시간의 길이가 너무 짧아 유의미한 비교 연구를 수행할 수 없음이 자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이 ‘유의미한 변화를 관찰할 수 없다는 생각’에 미치는 순간, 새로운 착상이 떠올랐다. 이론적 차원에서 볼 때 변화를 상징하는 불꽃은 항상 구조를 상징하는 나무와 연동될 수밖에 없는바, 촛불이 가져온 변화 정도(혹은 한계)는 현 단계 한국사회 특유의 구조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그렇다면 촛불의 변화 요구에도 꿋꿋하게(?) 버티는 구조적 요인 및 그와 연동된 마음의 습속(한국 특유의 정경유착과 그 마음의 습속)을 밝혀보고, 바로 그 지점에서 불교의 개입 여지를 탐색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다. 이런 추론 혹은 가설을 바탕으로 원고청탁을 최종적으로 수용했다.

매우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바로 그 찰나부터 ‘어떻게?’라는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촛불과 사회변동의 관계를 해명해야 한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이미 최근의 다른 논문을 통해 한국사회 특유의 불의(不義)의 마음문화와 촛불 사이의 관계를 실증한 바 있기 때문에 이 과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을 듯했다. 문제는 촛불과 한국 특유의 불의 사이의 구조적 관계나 공진화의 정도를 실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시 두 가지 단계 즉 촛불 이전 한국사회의 불의한 불평등구조를 살펴본 다음 그것이 촛불 이후 어떠한 변화(혹은 변화의 압력)을 겪었는지를 실증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실증 작업도 의외로 쉽게 해결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우선 필자는 촛불 이전 한국의 사회 불평등 문제를 실증적으로 연구한 바 있기 때문에 별도의 실증작업이 필요 없기도 하거니와 촛불 이후의 변화를 예측해 볼 수 있는 일종의 사건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예정되어 있었던 사건이란 이재용의 재판을 가리키는데, 그 재판에서는 한국 특유의 정경유착 구조와 그 마음의 습성에 대한 사법적 판단이 수반될 것이고, 그 사건이 촛불의 아킬레스건이라는 사실 때문에 언론은 그 판결 전후를 대서특필할 것이었다. 또 정치권이나 시민사회는 이를 둘러싸고 찬반 논쟁을 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사실들만으로도 실증에 필요한 자료는 충분한 데다가 자료수집의 수고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남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이상과 같은 나의 예상이 적중했음을 잘 입증하는 것 바로 그것뿐이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 입증의 성공 여부에 관한 판단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리라.


2. 한국 특유의 부정의(unjustice)와 촛불

한국사회 특유의 부정의와 촛불의 구조적 연동을 살펴보기 위해 이 글에서는, 우선 2016년 촛불집회를 둘러싸고 등장한 주요 키워드(마음, 촛불, 태극기)의 사용 추이를 비교함으로써 마음과 정치 현실 사이의 연관성을 살펴보고, 시국선언문의 내용분석을 통해 ‘의/불의’ 코드와 저항적 사회운동의 관계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

〈그림 1〉은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2016년 12월 9일부터 2017년 2월 5일까지 구글 트렌드 서비스를 이용해 ‘마음’ ‘촛불’ ‘태극기’라는 세 단어의 검색 빈도 추이를 도표로 나타낸 것이다.

〈그림 1〉 ‘마음’ ‘촛불’ ‘태극기’의 검색 트렌드 추이
‘마음’과 ‘촛불’(위), ‘마음’과 ‘태극기’(아래)라는 단어의 검색 추이를 살펴보면, ‘마음’과 ‘촛불’이라는 단어가 유사한 시계열적 흐름을 보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촛불’과 ‘태극기’ 사이에는 일정한 연관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한편 〈표 1〉은 세 단어 사이의 상관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촛불’과 ‘마음’의 상관계수는 0.77로 높은 편이고, 통계적으로도 유의미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마음’과 ‘태극기’, ‘촛불’과 ‘태극기’ 사이의 통계적인 상관관계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림 1〉과 〈표 1〉은 모두 촛불집회라는 정치적 성격의 사회운동과 마음이 상당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통치자 혹은 통치자의 정치 위에는 국민 혹은 백성의 민심이 자리하고 있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저항적 민심이 한국의 정치사회질서 변동을 추동하는 에너지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것을 한국사회운동 특유의 ‘불의의 프레임(injustice frame)’이라 명명한다.

그러면 이러한 불의의 프레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실증해 보자. 이를 실증하기 위해 여기서는 중대한 사회 위기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긴급한 조치(대통령 탄핵이나 하야 등)를 촉구하는 시국선언문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분석에 사용한 자료는 2016년 10월 26일부터 11월 3일까지 현대 한국사회의 사회적 동원 능력을 갖춘 조직이나 단체, 즉 노조, 종교단체, 학생회, 교수회, 각종 직능단체, 정치사회단체, 사회원로 등이 발표한 89건의 시국선언문이다.

첫째, 글의 구조는 대체로 박근혜 게이트에 대해 부끄러움과 참담한 심정을 토로하고, 이어서 구체적인 불의를 나열하면서 비판한 다음, 자신들의 결의를 표현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 온 국민이 수치스러움에 떨고 있다. ……공직자도 아닌 최순실이 통일과 안보, 외교 등 중요한 정책에도 영향력을 행사해 국가의 안위를 위태롭게 했을 뿐 아니라 청와대와 정부 주요 부처의 인사까지 개입한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제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이자 민주시민의 일원으로 헌법이 부여한 우리의 주권을 되찾는 행동에 나서고자 한다. 박근혜 퇴진은 그 출발이다(박근혜 퇴진을 위한 의정부 시민 공동행동, 2016).

둘째, 시국선언문에 등장하는 표현 중에서 마음을 직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언어가 풍부하게 등장함을 알 수 있다.

온 국민은 이 믿기 힘든 처참한 현실에 분노하고 좌절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미 국민이 마음에서 지워버린 대통령이다. ……국민 분노에 기름을 붓더니…… 마지막 남은 연민마저 지워버렸다. ……재벌 대기업과 최순실의 합작품이라는 사실에 분노를 참을 수 없다.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지금 당장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 국민에 대한 마지막 예의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 그것이 국민의 참담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 온 국민 마음속 비통함과 좌절감을 희망으로 바꿔내는 길에 함께할 것이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2016, 강조는 필자).

셋째, 시국선언문에는 거의 예외 없이 불의한 현실에 분노하는 불의의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다.

반도체 공장에서 노동자가 백혈병으로 죽어가고, 메틸알코올에 시력을 잃고 있을 때도, 조선소 하청 노동자가 목숨을 건 노동을 하고 있을 때도 그들은 수백억의 기부와 그 대가에 주판알을 튕기고 있었다(한국노동조합총연맹, 2016년).

대한민국의 대학생인 우리는 앞선 정유라 특혜 의혹에 분개한다. …… 대한민국의 수많은 대학생이 각고의 노력으로 입시경쟁의 문턱을 넘어 대학에 입학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입학하는 특혜를 누렸다. 고등학교 시절 130일 넘게 결석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업 수준 미달에도 부당하게 학점을 취득하였으며, 이를 위해 대학본부와 교수, 교육부까지 동원하였다.(서울과학기술대학교 총학생회, 2016년).

마지막으로, 시국선언문에는 민심이 정치 현실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몇 가지 예를 보자.

그 결과 국가의 품격과 국민의 자부심은 심각한 손상을 입었습니다. 국민들의 불신과 분노, 배신감과 절망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같은 국민의 절망과 민심의 동요, 국정의 혼란이 계속된다면 대한민국은 표류하고 말 것입니다(국가안보와 민생안정을 바라는 종교 · 사회 · 정치계 원로 22인, 2016).
민주주의를 파탄 낸 박근혜 정부는 성난 민심이 두렵지 아니한가?(고려대학교 총학생회, 2016)

이렇듯 탄핵 시국을 견인한 시국선언문에는 한국인의 마음이 성성하게 작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의의 프레임도 빠짐없이 작동하고 있다. 이는 현대 한국사회의 집합행동 혹은 사회운동에 한국 특유의 마음문화가 스며들어 있음을 의미하며, 나아가 옳지 않은 정치현실을 지각하는 불의의 프레임과 연동되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의한 정치현실과 마음의 의/불의 코드의 연동은 저항적 민심으로 쉽게 휘발하고, 그러한 민심이 정치변동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다. 촛불은 그 사회적 결과일 뿐이다.


3. 촛불과 불평등구조

1) 촛불 이전 한국사회의 불평등 현상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 경제질서가 확립되기 시작하여 약 30여 년간 그 맹위를 떨쳐 왔다. 이러한 변화는 늦어도 1960년대 이후 국가를 중심으로 한 동원적 발전국가모델을 하나의 이념형으로 상정하여 국부와 시장을 인위적으로 키워왔던 한국의 경제모델에는 매우 낯선 경제체제였다. 소위 ‘1987년 체제’의 등장과 함께 시장의 자율성과 정치의 민주화가 양립할 수 있다는 인식과 경험이 조금씩 확산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시장의 자율성은 국가에 의해서 제한되었으며, 분배의 문제는 강력한 임금 및 물가 억제정책 등으로 인해 은폐되어 있었다.

그러나 1997/98년 외환위기의 발발과 함께 IMF에 의해 강제된 구조조정은 비로소 국내에서 시장의 자율성에 기초한 소득의 불평등이 오히려 시장경쟁력의 중요한 원천으로 작동한다는 신자유주의적 공리가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는 자못 혹독하여 GDP 2만 달러와 교역량 기준으로 세계 10대 경제대국인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양극화는 오늘날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촛불 이전 한국사회의 불평등구조가 이명박 정권의 비즈니스 프렌들리(Business friendly) 정책과 박근혜 정부의 계승으로 이어졌다. 이는 촛불 이전 한국사회 내부의 불평등구조가 지속적으로 심화하여 왔음을 의미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면 아래와 같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 제일성은 ‘비즈니스 프렌들리’였다. 한나라당은 집권 이전의 국민 · 참여정부를 좌파 정권으로 규정하고 이를 ‘잃어버린 10년’으로 자주 묘사하였던바, 집권과 동시에 정부는 그 상실의 대상이 결국 대기업과 부유층이었다고 명료하게 공표한 셈이다. 따라서 지난 2년간의 정부 정책은 운명적으로 계층 간의 이익을 양극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태생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경제를 제대로 살려보겠다는 정부의 정책적 디딤돌은 기업과 자산자본가 친화적 정책이 사회 전반적인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를 가져오리라는 터무니없는 낙관주의에 기초한 규제 완화와 감세였다. 이러한 정책적 기조는 이미 2008년에 발발한 세계경제 위기로 인해 그 실효성이 부정된 신자유주의 핵심 공리였으나, 정부의 정책적 방향은 자신이 표방한 실용주의와는 무관하게 이 공리를 이념적으로 계승하였다.

대기업을 위한 규제 완화는 무엇보다 공정거래법 개정 시도, 금융지주회사법, 자본시장통합법 등으로 압축된다. 우선 공정거래법 개정은 1997년 경제위기의 주범이었던 재벌의 문어발식 경영과 총수 일가의 지배구조를 제한해왔던 출자총액제한 제도를 실질적으로 폐지하고, 지주회사에 대한 규제를 완화함으로써 대기업의 지배구조를 강화하는 것을 지향한다. 정부는 법 개정의 명분으로 경제활성화를 내세웠지만, 순환출자가 기업투자로 이어지지 않으며, 이는 과거에도 보았듯 지배주주의 지배력 강화에만 기여할 것이 자명하다. 특히 지주회사의 부채비율을 200% 이내로 제한하고, 지주회사가 비계열사 주식을 5% 초과해서 보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도 폐지함으로써 재벌기업의 경제력 집중이 심화할 소지가 더욱 커졌다.

대기업 프렌들리 정책의 다른 한 축은 금산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의 경계를 허무는 금융지주회사법이다. 이로써 산업자본이 은행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증권 및 보험사 등 비은행지주회사가 제조업체를 자회사로 거느릴 수 있게 되었다. 결국 금산분리의 경계가 허물어져 재벌에 의한 은행의 사금고화와 경제력 집중 등의 부작용이 우려된다. 자본시장통합법은 증권, 자산운용, 선물, 신탁업 등으로 나뉘었던 자본시장을 하나로 통합하고, 금융업종 간 구분과 각종 금융규제를 풀어서 금융투자회사가 은행과 보험업을 제외한 자본시장 내 모든 업종을 겸업할 수 있게 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 법은 자본시장의 신자유주의적 특성을 보다 공격적인 방식으로 특화한 것으로, 정부의 법안으로 인해 금융시장의 안정성(투자자 보호장치의 부실)을 훼손할 위험이 증가하였다.

한편, 고소득층과 자산자본가들을 위한 감세 조치는 파격적으로 이루어졌다. 2008년 세제개편안에 의하면 종합소득세와 상속세 등 대부분의 부유층이 내는 세금과 대기업이 주로 부담하는 법인세를 중심으로 2012년까지 5년간 26조 4천억 원에 이르는 대규모 세금감면을 핵심으로 하고 있었다.

 세제개편안은 특히 소득세 2%p, 양도세 3%p, 법인세 최대 5%p, 상속세 최대 17%p 인하를 담고 있는데, 실질적인 혜택은 연소득 1억 원 이상, 상속재산 30억 원 이상의 부유층(0.7%의 최상위층 국민)과 0.126%의 대기업에만 혜택이 돌아가는 종합선물세트에 불과하였다. 물가상승과 경기침체로 고통받고 있는 진짜 서민과 중소기업, 자영업자를 위한 정책적 대안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정책이었다. 2009년 세제개편안은 2008년 추진된 부자감세 결손분 90조 원(국회예산정책처 ‘2008년 이후 세제개편의 세수효과’ 보고서)에 대한 아무런 재고 없이 임시방편적인 대안을 내놓았다. 이 같은 두 차례에 걸친 세제개편안은 감세정책이 투자로 이어지는 선순환 효과가 날 것이라는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이념을 답습한 것으로 경기진작 효과보다는 재정만 축내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강부자(강남 부동산 부자) 내각이라는 비난이 허명이 아니듯 이명박 정부는 28만 명의 부자(2008년 국토해양부 자료에 의하면 6억 원 초과 주택보유자는 총 28만 6,343가구)를 위해 종부세 과세기준을 6억 원 초과에서 9억 원 초과로 상향 조정하고, 종부세율도 0.5%~1%로 대폭 낮추었다.
이와 같은 기업 친화적 정책에 반해 ‘용산 참사’는 반서민 정책의 극단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영세한 원주민의 낙후된 주거환경개선’보다는 건설업체의 이익과 부동산 투자자들의 이익 극대화에 초점을 맞춘 재개발-뉴타운 개발사업이 결국 ‘용산 참사’를 불러왔으며, 세입자들의 저항에 대한 정부의 폭력적 진압은 정부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와 관심마저 없음을 극명하게 드러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직전인 2008년 2월 인수위원회에서 ‘능동적 복지’라는 국정과제를 제시하였으나, 전반적으로 중산층과 서민들에 대한 사회정책은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의 대척점에 서 있다.

무엇보다 실질복지비용 지출이 이전 노무현 정부보다 늘어나지 않았다. 2009년 3월을 기준으로 할 때 2008년의 67조 6,500여억 원에 비해 73조 7천여억 원으로 9%가량 증가하였으나(동일 시기 정부 전체 지출규모는 6.5% 증가), 복지비용 증가분에서 국민연금, 노령연금 등 자연증가분(4조 5천여억 원)을 제외하고 나면 실제 증가액은 1조 786억 원으로 전년 대비 1.6% 증가한 것에 그치고 있다. 그나마도 신규 복지사업 증가분의 대부분은 경제위기에 따른 긴급지원사업에 불과하였다. 특히 빈곤층을 지원하는 예산과 최저생계비의 실질적인 감소가 두드러졌다. 일례로 2009년 4월 국회의 추가경정예산안 심의과정에서 보건복지부가 제출한 1조 4,401억 원 추경안 중 1,200억여 원 삭감됨에 따라 기초생활수급자 지원과 긴급복지 예산이 각각 3분의 1씩 줄어들게 되었으며, 2010년 최저생계비 심의과정에서 4인 기준 최저생계비를 1,363,091원으로 정해 물가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2.75%만 인상되었을 뿐이었다.

이명박 정부 복지정책의 큰 특색은 소위 복지의 ‘산업화’ 전략으로 정부의 경제살리기 전략에 복지부처가 동원되어 화장품산업 선진화, 의료기기산업 선진화, 해외환자유치 선진화, 첨단의료복합산업 추진 등을 추진하고, 오히려 주 업무인 공공복지, 사회서비스 제공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복지의 산업화 전략은 국민연금의 시장화, 의료영리화 정책 등에서 그보다 노골화되었다. 국민연금은 2008년 경제위기로 무너진 주식시장을 되살리기 위해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었으며(2008년만 19조 원의 손실 기록), 시민생활의 노후를 일부 기업 및 주식투자자들의 이익과 맞바꾸는 위험한 도박이 지속되었다. 한편, 의료영리화 정책 추진(외국인 환자유치, 의료법인 간 합병절차 신설, 부대사업 범위의 보건복지가족부령 위임조항 등)은 의료의 공공성을 무시하는 정책이다. 이 법안에 포함된 ‘누구든지’ 유인 · 알선행위를 할 수 있다는 조항에 따라 보험업자가 이 같은 행위를 하게 될 경우에 추후 ‘국내의료기관-민영보험회사’의 조합(영리추구의 심화)이 등장할 우려가 있으며, 의료법인 합병절차는 자본을 소유한 대형병원에 의한 소형병원의 몰락, 병원의 대형화로 이어져 의료의 접근성 저하와 건강보험 재정악화가 예상된다.

전반적으로 경제제일주의의 기치 아래 시행된 이명박 정부의 경제 및 사회정책은 계층 간의 이익 양극화를 확대 ·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2년간 정부의 각종 세제개편안과 복지정책을 비교해 보면 한편으로는 부자들과 대기업을 위한 감세정책,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부 서민계층만을 위한 선별주의적 복지정책과 복지의 산업화를 특징으로 하였다.

촛불은 이러한 정책 기조의 변화를 예고하는 일종의 사회적 사건이다. 그러나 촛불만으로 기존의 사회구조가 쉽사리 바뀌지는 않는다. 오히려 촛불이 몰고 오는 변화의 에너지(혹은 사회적 압력)와 기존 구조에서 솟아 나오는 저항의 에너지가 날카롭게 충돌할 것이라는 관측이 현실적이다. 이에 아래에서는 이재용 재판의 사례를 통해 이를 생생하게 확인해 보고자 한다.

2) 이재용 재판을 통해 본 촛불의 영향력

2017년 8월 25일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준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징역 5년이 선고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김진동 부장판사)는 이 부회장에게 적용된 5개 혐의 모두 유죄로 인정했다.

이와 관련하여 진보 저널을 대표하는 신문 〈한겨레〉의 사설은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사필귀정이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 아무리 돈이 많고 힘이 센 재벌 총수라도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 무엇보다 이번 판결은 한국사회의 고질인 정경유착에 사법부가 최초로 철퇴를 가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경제 위기설 등을 들고나온 재계와 보수언론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재판부가 법과 양심에 의거해 판단한 결과라고 본다. 재판부는 이 부회장 사건의 본질을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부도덕한 밀착’이라고 규정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자본권력은 최고 정치권력에 뇌물을 줘서라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이나 행정을 이끌어 내겠다고 생각하고, 정치권력은 이를 이용해 사익을 취하는 정경유착의 민낯이 드러난 것이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국가권력이 자본권력에 의해 동원되는 불행한 사태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http://news.khan.co.kr).

위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한겨레〉 사설이 가장 강조한 사실은 정경유착과 그 관행이다. 그리고 그 관행에 철퇴를 가한 것은 사법정의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 한국의 보수 저널을 대표하는 〈조선일보〉는 정반대 논조의 사설을 실었는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재판부는 이에 대해 독대에서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에게 명시적(明示的)으로 청탁한 사실은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 부회장에게는 경영권 승계라는 현안이 있었고, 이 부회장은 승마 지원이 최순실에 대한 지원이며 그것은 곧 대통령에 대한 금품 제공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두 사람 사이에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묵시적(默示的) 부정청탁’을 주고받은 사실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이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 사이에 경영권 승계에 관한 말이 오가지는 않았지만, 이 부회장은 박 전 대통령이 도와줄 거로 기대하고 승마 지원을 했고 박 전 대통령은 다양한 방법으로 경영권 승계를 도왔다는 것이다.

바로 이 사설 중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묵시적 부정청탁’이다. 따라서 〈조선일보〉 사설은 재판부의 ‘묵시적 부정청탁’이란 표현 중에서 ‘묵시적’을 ‘마음속’으로 바꾸고 ‘부정청탁’을 그냥 ‘청탁’으로 세탁함으로써, 그래서 재판부의 선고 이유를 ‘마음속 청탁’으로 재규정함으로써, 재판부의 판결을 잘못된 것으로 해석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묵시적’이란 말과 ‘마음속’이란 말은 치환 가능한 동일 표현이 아니다. ‘묵시적 표현’이란 ‘현시적 표현’의 반대말로서 소통의 맥락을 감안할 때 충분히 소통 가능한 경우에 주로 사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묵시적’ 소통의 경우 맥락을 고려하면 충분히 납득이 가능하다. 반면에 법적 차원에서 보면 ‘마음속 생각’은 당사자 이외에는 알 수 없는 일종의 블랙박스이기 때문에 당연히 법적 증거로서 효력을 갖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소통 방식에서 이심전심의 방법이 불가능하거나 존재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묵시적 청탁’도 청탁의 한 방법이다. 오히려 필자가 보기에 ‘묵시적 청탁법’이야말로 고단수의 세련된 방법이다.

그럼에도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박 전 대통령과 이 전 부회장이 서로 마음속으로 청탁을 주고받았는지는 이들 마음속에 들어가 보지 않는 이상 확인할 수 없다. 두 사람이 이심전심 청탁을 주고받았을 수도 있고, 반대로 박 전 대통령의 요구에 이 부회장이 어쩔 수 없이 응한 것일 수도 있다. 이쪽이면 유죄고 다른 쪽이면 무죄다. 이는 증거가 아니라 판사의 판단에 달린 문제다. 형사재판은 민사재판과 달리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는 재판이다. 그래서 형사재판의 대원칙은 합리적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혐의가 입증될 때 유죄를 선고한다. ‘두 사람이 말은 안 했어도 마음속으로 청탁을 주고받지 않았느냐’는 추정은 과연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인가. 형사재판에서 양쪽 가능성이 다 있다면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법률을 적용하는 것도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번 경우엔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법률을 적용했다.(http://news.chosun.com)

이러한 해설에 따르면 ‘마음속 의도’는 정확하게 밝힐 수 없는 ‘애매한 것’으로 처리되고 있다. 그리고 그렇듯 이유가 애매할 경우에는 피고인에게 유리한 것을 적용하는 것이 판례인 양 우긴다. 게다가 ‘부정청탁’의 어감과 세탁된 ‘청탁’의 어감도 천양지차다.

이렇게 볼 때, 촛불로 인하여 기업 친화 일변도의 정책에 다소의 제동이 걸리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한국사회의 불평등구조를 완화하는 결과로 곧바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한국인들의 마음의 습속이 유지되는 한 한국사회의 불평등구조가 획기적으로 개선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4. 불평등에 대한 불교적 레시피

1) 불평등에 대한 정책적 개입

흔히 사람들은 불교가 경제정책과 같은 대안을 제시하지 않은 것처럼 인식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초기경전에서 빈곤을 최소화하기 위해 왕(최고 통치자)이 어떤 정책을 채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가를 논의하고 있는 부분을 살펴보자.

과거 한때 어떤 왕은 거대한 희생제의를 통해 나라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생각했다. 그때 그 왕의 현명한 고문 한 사람이 왕에게 그러한 계획에 의지하지 말 것을 충고하였다. ……그 왕이 선택한 또 다른 전략은 그들에게 생필품을 충분히 살 수 있을 정도의 부를 주고, 여유로운 삶을 살도록 인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도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 왕이 채택한 세 번째 전략은 처벌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은 통치자나 국가가 국민들에게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된다는 점에서 채택할 수 없다. ……그러한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 올바른 전략은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물질적 자원과 정신적 자원에 정당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한 나라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분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국가는 어떤 사람들이 그러한 자원을 독점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착취할 수 있는 지위에 놓이게 하지 않으면서, 모든 사람이 그러한 자원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어야 한다.(Ratnapala, 1992)

위의 인용문을 보면, 붓다는 국가가 경제정책을 통해 분배의 정의를 이룸으로써 사회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다고 판단했음이 잘 나타난다. 결국 국가가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물질적 자원이나 정신적 자원에 정당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야말로 빈곤을 최소화하는 마지막 방법이자 올바른 방법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은 조치가 필요하다.

(1) 경제적 생산, 특히 농업이나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씨앗, 가축, 비료, 토지, 물, 관개시설 등-을 제공받아야 한다. 사실상, 국가가 그러한 것들을 지원해 준다면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된다. (2) 국가는 무역이나 상업을 장려해야 하는바, 국가는 필수적인 자본을 제공해 주고 그러한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예우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또한 국가는 그러한 무역과 상업을 감독해야 하고, 노동자들이나 소비자들이 어떤 조건하에서도 무역인이나 상업인들에게 착취당하지 않도록 감시해야 한다. 은행 등으로부터 대부 받은 돈의 이자율이 지나치지 않도록 규제해야 한다. (3) 국가 공무원이나 전문가들에게는 만족스러운 급료, 승진, 휴가, 그리고 다양한 인센티브들 및 다른 특권들을 제공해 줌으로써 그들 자신의 일자리에 만족하도록 해 주어야 하고 뇌물이나 부패에 의해 유혹되지 않도록 해 주어야 하며, 자신의 일로부터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해 주어야 한다. (4) 국가는 정신적 발달과 관련된 영역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에게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Ratnapala, 1992)

그렇다면 국가로 하여금 이러한 경제정책을 강제하게 할 수 있게 하는 재원은 무엇인가? 바로 세금정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국가는 부자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서 그러한 세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지원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지탱해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금이 국가의 부문에 지나치게 지출되어서는 안 된다. 앞에서 살펴본 예에서, 왕의 참모는 거대한 희생제의나 의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국민에게 세금을 걷지 말도록 충고하였다.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마치 꽃에 해를 입히지 않으면서 꽃가루를 나르는 꿀벌의 행위에 비유될 수 있다. 그 밖에도 국가가 장려하거나 촉진해야 하는 조치로는, 왕이나 부유한 귀족으로 하여금 보시하도록 하는 것이다. 왕은 음식, 의복 그리고 기타 다른 생필품을 그것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분배해야 한다. 왕은 도시의 입구에 보시물 분배소를 설립하여 음식, 음료, 의복 그리고 기타 다른 생필품을 나누어주어야 한다.

이상의 논의를 볼 때, 사회 불평등을 해결하려는 불교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즉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경제활동의 우선성은 이윤추구의 극대화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의 만족에 놓여 있어야 하기 때문에 생산활동(의 목적)도 거기에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재화의 생산 과정 그 자체도 다른 사람에게 (심지어는 동물이나 식물의 생명에게까지)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소비활동도 모든 사람의 총복지에도 공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적 경제 논리가 사적 소유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인간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개인적 자유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인간에게는 다른 존재에게 궁극적인 손해를 유발할 수 있도록 하는 지위를 허락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불교적 관점이다.

2) 마음까지 불평등한 것은 아니다

앞에서는 불평등에 대한 정책적 개입과 관련된 불교의 입장을 살펴보았지만, 불평등에 대한 불교적 처방전의 방점은 행위자의 마음가짐이나 마음의 습속에 놓여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오히려 경전은 행위자 자신의 마음가짐 혹은 마음의 습속에 따라 부자가 가난해지기도 하고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기도 함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실제로 초기경전에 따르면, 붓다는 파세나디 왕에게 궁극적으로 네 가지 계급의 사람들 즉 첫 번째 부류는 어둠 속에 있으면서 어둠 속으로 움직이는 사람, 두 번째는 어둠 속에 있으면서 밝은 곳으로 움직이는 사람, 세 번째는 밝은 곳에 있으면서 어두움 속으로 움직이는 사람, 네 번째는 밝은 곳에 있으면서 밝은 곳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첫 번째 유형은 낮은 지위의 수평적 이동을 의미하고 두 번째는 상향이동을, 세 번째는 하향이동을, 네 번째는 높은 지위의 수평적 이동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적 이동을 낳은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행위자 자신의 업 즉 마음과 실천의 결과이다.
실제로 중아함에는 젊은 브라만인 슈바(Subha)의 불평등 관련 질문에 대한 붓다의 대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고 있다.

어떤 부류의 사람은 추하고 흉하며 사회적 지위가 낮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은 추하고 흉하나 부유하다.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아름다우나 가난하고 사회적 지위가 낮다. 마지막 부류의 사람들은 모든 것(아름다움, 부, 높은 사회적 지위 등)을 소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증오심이 많고 잘 흥분하는 기질 나쁜 사람은 그 과보로 내생에 추하게 될 것이다. 전생에서 질투심이 많고 너무 구두쇠로 살았던 사람들은 현생에서 가난하고 사회적 지위도 낮게 될 것이다. 전생에서 나쁜 기질과 증오의 본성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조차도 전생에서 용서와 관용의 삶을 살았다면 현생에서 부유하게 될 수 있다. 전생에서 선한 기질과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현생에서 잘생기고 많은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렇듯 잘생기고 사랑받는 사람이 전생에서 관대하게 살지 않았다면 그는 현생에서 가난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생에서 선한 기질과 온화한 태도를 가졌고 증오심도 없는 삶을 살았다면, 현생에서 그는 매혹적이고 부유하며 사회적 지위도 높게 될 것이다.

이상의 내용은 붓다가 인간 불평등을 설명하는 방법으로 널리 인용되는 내용인데, 여기에서 전생과 현생의 관계를 숙명론적으로 독해하지 않고 사건의 전후나 시간의 선후로 이해한다면, 불교적 불평등이론으로 손색이 없다. 그리고 여기에는 인간의 마음은 결코 불평등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래서 인간은 본원적으로 평등한 존재라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또한, 인간 자신의 업을 결정하는 마음가짐이나 마음의 습속 그리고 그에 따른 실천이 사회적 지위와 사회적 이동의 결정적인 변수임이 잘 나타나 있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바꾸어 나가는 존재임을 의미함과 동시에 마음의 무한한 가능성을 시사한다.


5. 좌측 깜빡이를 켜놓고 우회전?

지금까지 이 글이 애초에 의도했던 것을 거의 다 논의했다. 촛불이 한국사회의 구조적 불평등과 불의에 대한 민심을 상징함을 살펴보았고, 더불어 촛불 이전 한국사회의 불평등구조 및 그 심화된 정도를 실증하였다. 그렇다면 촛불 이후 한국사회가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와 관련하여 이 글에서는 일종의 준거를 마련하기 위해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불교적 레시피를 일별하였는바, 제도적 노력도 필요하지만 행위자의 마음을 선하고 자비롭게 만드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 그 요체였다. 바로 이러한 기준에서 볼 때 한국사회의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문재인 정부의 과제도 역시 제도적 차원과 구성원의 마음이란 차원으로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문재인 정부는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줄일 수 있는 법제적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2012년 대선 당시 후보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차별금지법을 약속한 바도 있지만,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과제에서는 차별금지법을 누락시킴으로써 법 제정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러한 처사는 마치 좌측 깜빡이를 켜놓고 우회전을 하는 것처럼 국민을 당혹스럽고 실망스럽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사회의 부정의에 저항하였던 촛불의 의미와 염원에도 반하는 처사다. 이렇게 볼 때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것이야말로 문재인 정부가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해결하는 법제적 노력을 가름하는 가늠자일 수밖에 없다.

또 하나, 불교의 입장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한국사회에 만연해 있는 갑질문화의 사회심리적 근원을 밝히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마음문화를 좀 더 풍요롭게 가꾸어가도록 하는 데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주기를 요구한다. 특히 평등과 평화의 사상을 내면화하는 것이야말로, 제도와 비교해 볼 때, 적은 비용을 지불하고도 상대적으로 큰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효율적인 방안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

유승무 
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회학부 교수. 한양대학교 사회학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석사), 한양대 대학원 사회학과(박사) 졸업. 저서로 《불교사회학》이 있으며, 공저로 《오늘의 사회이론가들》 《사회학적 관심의 동양사상적 지평》 《현대사회와 베버 패러다임》 《유교적 사회질서와 문화, 민주주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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