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촛불 이후, 한국사회와 불교

1. 들어가는 말

애공(哀公) 치하 노(魯)나라의 실권자였던 계강자(季康子)가 공자에게 정치가 무엇이냐고 물었다(季康子問政於孔子). 공자는 바르게 하는 것[政者正也]이 정치라고 대답하였다. 정치에 대한 공자의 이 정의에 의하면, 바르게 하는 데 사용해야 할 힘을 바르지 않게 혹은 바르지 않은 일에 사용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정치를 파괴하는 행위가 된다.

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은 정치를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authoritative allocation of social values)’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권위적(authoritative)’이라는 개념은 공자의 ‘바르다[正]’는 개념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 것이다. 국정농단, 대통령 탄핵, 적폐청산의 요구 등 오늘날 한국의 정치적 과제들을 앞에 놓고 정치에 대한 이러한 개념규정들을 대하면, 무엇이 바른 것인가 혹은 권위가 무엇이며, 희소한 사회적 가치를 누가 어떻게 배분할 때 그것을 권위적 배분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권위(Authority)라는 용어는 권력(power)에 정당성(legitimacy)이 더해진 개념이다. 권력이 권위를 갖기 위해서는 정해진 규칙과 절차에 따라 그것을 획득하고, 피치자의 동의에 의하여 주어진 범주 내에서 그것이 행사되어야 한다. 정당성이 높은 권력일수록 피치자의 자발적 복종과 충성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권력의 안정성도 높아진다. 권력의 정당성은 권력의 효율성을 높이고 통치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해주는 이점이 있다. 그래서 모든 통치자는 자신의 권력이 권위적인 권력이 되기를 원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적 시 · 공간을 설계하고 조직하는 규칙과 절차를 제시함으로써 권력의 정당성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 역할을 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이다. 따라서 다른 이데올로기를 채택한 국가들 간에는 권력의 정당성과 그것을 확보하는 근거와 방식이 달라진다. 이러한 이유로 복수의 이데올로기가 존재할 경우 그것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우월성 경쟁은 불가피한 것이고, 역사상 이 경쟁이 가장 첨예했던 시기가 바로 냉전 시기였다.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자유민주주의가 이 마지막 우월성 경쟁에서 최종적 승자라고 규정하였다.

그랬던 후쿠야마가 2014년의 저서에서는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민주주의가 쇠퇴하고 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념 대결의 최종승자로 더 이상 대안이 없다고 보았던 민주주의가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과 한국에서 일어난 촛불 혁명 사이에는 모종의 내적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촛불은 더 민주적인 민주주의, 더 깊고 실질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바르지 않게 행사되는 권력, 권위를 상실한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 촛불은 과격하지도 폭력적이지도 않았지만, 어떤 저항보다 치열하게 진행되었고, 결국은 현직 대통령을 탄핵하는 계기를 만들어 냄으로써, 반정치적으로 사용된 권력의 정치파괴 행위를 중지시켰다.

이 글은 민주주의 쇠퇴를 시대적 경향과 내재적 결함이라는 두 측면에서 살펴보고, 그것이 한국의 촛불혁명을 유발한 계기와 어떤 논리적 연관성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더하여 그 관련성이 혹종(或種)의 역사적 방향성을 내포한 것인지를 검토해 보고, 이 두 측면이 가진 의미를 불교적 관점에서는 어떻게 파악하고 대처해야 할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민주주의의 쇠퇴

정치제도나 그 제도를 성립시킨 총체적인 조건들은 끊임없이 유동한다. 역사를 이념의 투쟁 과정으로 파악했던 후쿠야마는 소련의 해체와 동구의 몰락으로 마지막 이념투쟁이 종료되었고, 이는 역사의 추진 동력이 소진되었다는 의미로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다. 그러한 그가 《정치적 질서와 정치적 쇠퇴(Political Order and Political Decay)》라는 저서를 통하여 미국 민주주의가 쇠퇴하고 있다는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그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무리 더 이상 대안이 없는 승리를 한 이념일지라도 ‘계속적인 자기경신을 하지 못한다면 결국은 쇠퇴 · 자멸’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지금까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의 롤모델 역할을 해온 미국의 정치 질서가 심각한 쇠퇴 국면에 놓여 있다고 주장하였다. 후쿠야마의 이러한 상황인식은 “민주주의는 생활방식이지 젤리처럼 가공해서 보존해야 할 공식이 아니다. ……역동적 민주주의가 아니라면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솔 알린스키(Saul Alinsky, 1909~1972)의 말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반복하는 일이라는 고병권의 주장도 동일한 의미가 있는 논지라고 생각된다.

후쿠야마의 관점 변화는 《역사의 종언》을 저술할 당시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의 변화, 즉 미국의 정치적 지반에 변화가 일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념 대결의 최종승자인 민주주의’도 끊임없이 변해가는 조건의 흐름에 맞게 자기갱신을 하지 못하면 결국은 쇠퇴 · 자멸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보이는 박제된 동물처럼 정치사상이나 제도가 그렇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다. 정치이념이나 제도가 최종형으로 고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내포된 이 경고가 세상과 사물을 지속적인 변화와 흐름으로 인식하기를 요구하는 중도의 설법으로 들리는 것이 결코 아전인수는 아닐 것이다.

민주주의가 쇠퇴하는 또 하나의 원인으로 ‘정치와 반정치를 같은 범주로 보는 오류’를 지적할 수 있다. 정치의 존재 이유는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데 있다. 따라서 그것이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즉, ‘바르게 하는[正]’ 힘이 되려면 반드시 공공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공공성을 결여한 채 정치라는 이름으로 행사되는 힘의 배후에는 대개의 경우 상업주의와 배금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공공성이 확보되지 못한 정책 결정과 집행은 정치가 아니라 반(反)정치이다. 통치자의 권력이 반정치적, 즉 정의롭지 못하게 행사되면 그것은 도적의 두목이 행사하는 폭력과 차이가 없는 것임은 이미 아우구스티누스(A. Augustinus)의 《신국론》에서도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행위와 해적질을 동일 범주로 보는 비유를 통해서 지적된 것이다.

지금 세계 도처에서 횡행하는 금권정치와 과두지배는 공존질서를 구축하는 공공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지만,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허울 아래서 행해지는 일이기 때문에 민주적인 정치 행위로 분식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선거를 하고 투표를 한다 하더라도 상황이 개선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인류의 사유는 이미 배금주의와 상업주의 논리에 지배당하고 있고, 이러한 세계적 흐름은 당분간 무엇으로도 제어하기 힘들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후쿠야마 역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외부의 충격 등으로 진정한 개혁을 강제할 요인이 없는 한 미국 민주주의의 민주성 회복은 기대하기 힘들다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의민주주의 과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주객전도 현상을 또 하나의 민주주의 쇠퇴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오늘날의 대의제는 국민이 대표자를 선출하여 자신들을 대표하게 한다는 원론적인 관점을 벗어나 점점 전문가들을 위한 제도로 바뀌어 가고 있다. 주권자의 주권 행사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정치적 의례가 주권자 자신들을 점점 주권으로부터 소외시키고, 무력하게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현대 대의민주주의가 만들어 내는 기묘한 역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대중을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주의로 흐르게 하고, 엘리트 중심의 권력 카르텔을 더욱 강화하여 대의기관 내의 과두화를 한층 촉진시키게 된다. 그것은 결국 선출된 자가 선출한 자들을 지배하고, 위임받은 자가 위임한 자들을 지배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대의제의 본의를 왜곡시키게 된다.


3. 대의민주주의의 한계와 그 대안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극우 파시스트들이나 강한 권력욕을 가진 도출형 정치가들이 지도자로 등장하는 일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는 다수의 주권자가 배제된 엘리트 중심의 정치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과 선거라는 제도가 본래부터 갖고 있던 한계가 결합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민주주의의 정체성에 대한 플라톤의 조롱은 논외로 하더라도 적어도 대의민주주의 실현의 필수요소인 선거라는 제도 자체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선거가 ‘과두지배(Iron Law of Oligarchy)’를 더 강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도 간과하기 어려운 약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두지배는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원리들과는 역방향으로 움직이는 상수에 가까운 힘이라는 점에서 지속적 주의를 요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1) 선거제도의 결함과 현능주의

선거제도에 내재된 문제의 본질은 ‘선출될 수 있는 능력’과 ‘선출되어서 그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범주가 다른 능력이지만, 유권자들이 이를 구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거에서 당선될 수 있는 능력과 그 직책을 맡아서 직무를 잘[正, authoritative]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별개의 일인데, 선거라는 제도 자체만으로는 후보자가 ‘당선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물인지, 아니면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물인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작동이 원활하지 못한 근본적인 원인은 이 제도가 가진 원초적인 한계와 권력추구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결합된 결과이다. 촛불혁명을 초래한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태는 선거에 내재된 통치자 선정 방식의 허술함과 대의제의 한계, 그리고 공공성을 상실한 권력 행사가 초래하는 후폭풍을 총체적으로 보여준 극명한 사례이다. 광장의 촛불은 민주주의의 정상적 작동을 방해한 국정농단 세력과 그들만으로 형성된 카르텔을 해체 혹은 견제하고 진정한 민주주의에 한 발 더 다가가자고 하는 요구였다. 그 혁명의 주체는 지금까지 요식 절차에 따라 주권을 위임하는 수동적인 참여행위에만 익숙한 우리 사회의 ‘을’들이었다. 그들은 역사에서 전례를 찾기가 쉽지 않은 방식으로 자신들이 주권자임을 선언하고 그 주권을 행사하는 길을 연 것이었다.

선거와 대의민주제의 한계는 선거에 이길 수만 있다면, 양심의 가책이나 일말의 윤리적 고려도 없이 어떤 것도 스스럼없이 할 수밖에 없는 정치문화와 인간의 탐욕이 상호작용하는 것을 막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는 선거가 과두지배를 은폐하는 수단으로 활용된 경우를 익히 경험해 왔다. 촛불혁명이 역설적으로 보여준 것은 선거로 선출된 통치자의 노출되지 않은 결함과 그동안 우리 정치가 얼마나 반정치적으로 오작동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다니엘 벨(Daniel A. Bell)이 《차이나 모델(The China Model)》에서 지적한 선거의 취약점이 현실적인 것임을 보여준 것이었다.

선거제도의 원천적 결함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최근 중국식 지도자 선출 방식인 현능주의(賢能主義)를 제창한 다니엘 벨의 주장은 주목해볼 만하다고 생각된다. 그는 《차이나 모델》에서 사용한 ‘Meritocracy’란 개념을 ‘공산당이 품성과 능력이 뛰어난 지도자를 선발하는 독특한 제도’라고 정의하였다. 이 책은 《차이나 모델, 중국의 정치지도자들은 왜 유능한가》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는데, 역자는 Meritocracy를 현능주의라고 번역하였다.

그는 선거민주주의의 취약점으로 ‘다수의 전횡’ ‘소수의 전횡’ ‘투표 집단의 전횡’ ‘경쟁적 개인주의자의 전횡’을 들었다. 그는 지난 30년간 중국에서 최고 지도자를 선발하는 방식은 선거가 아니라 ‘현능주의’에 의한 것이었고, 그 기간 중국은 현능주의라는 독특한 정치체제를 형성해 왔다고 보았다. 그가 말하는 현능주의는 국가 최고 지도자의 선발을 오르지 선거에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능력주의 혹은 실력주의에 경쟁력까지 고려한 개념이다. 그는 현능주의가 선거를 통하여 통치자를 선출하는 것보다 선출 대상자들이 가진 노출되지 않은 결함을 더 잘 걸러낼 수 있다고 보고, 선거의 결과에 내재될 수 있는 위험 요인을 감소시키는 데 이 제도를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차이나 모델’은 바닥은 민주주의, 꼭대기는 현능주의, 그리고 그 사이는 실험 공간으로 이루어지는 체제라면서 중국에서 빚어져 온 민주적 현능주의 체제가 도덕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2) 대의제의 한계와 촛불혁명 그리고 숙의민주주의

언제나 과두화되는 경향이 있는 인간 집단의 지배양식은 대의제의 본래 취지와 양립이 어려운 속성을 가졌다. 민주주의 실현에 필요한 법과 제도들이 아무리 완비된 국가라도 사실상의 독재체제 혹은 소수 기득권층에 의한 과두지배체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 발전과정에서 이미 경험으로 확인된 일이다. 이 때문에 정기적으로 선거가 실시되고, 선거를 통한 정권 획득 경쟁을 하는 복수의 정당들이 존재하며, 보통선거를 통해 구성된 의회의 존재라는 형식 요건을 갖추는 것을 민주주의의 실현으로 보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원론적이고 초보적인 수준의 이해에 불과한 것이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서 각종 제도가 작동하는 양태를 면밀히 관찰해보면, 평범한 시민들의 요구는 무시당하고, 국가기구를 사익추구의 도구로 전락시키며, 기득권층의 이익을 충실히 관철시키는 반민주적인 방향으로 작동하는 사례를 확인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굳이 밀즈(C. Wright Mills)의 《권력 엘리트(Power Eilite)》를 원용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사실은 민주주의의 모범국가라고 하는 미국사회도 마찬가지여서 무늬만 민주주의인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고 비판받는 실정이다.

민주주의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한다. 민주주의 실현에 대한 이러한 수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민주주의는 피라는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지켜야 할 만한 가치를 가진 정치제도라는 의미이고, 둘째는 민주주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공동체 의식을 공유한 시민계층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민주주의가 먹고 자라는 피는 바로 시민들의 목숨을 건 감시와 저항을 의미한다. 그들은 권력이 반민주적으로 사용되거나 그러한 징후가 보이면 권력에 저항한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원래의 목적과 설계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과두지배나 독재를 저지하기 위한 지속적인 감시와 저항이 요구되는 그러한 정치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촛불혁명은 이 감시와 저항을 성공적으로 이끈 새로운 방식으로 지금까지 민주주의 발전과정에서 보아 온 다양한 종류의 저항방식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 혁명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시민들은 시종일관 촛불을 들었을 뿐, 극히 평화적으로 투쟁하였다. 그들은 그저 촛불을 들고 공공성이 없는 통치에 대하여 ‘이게 나라야?’라는 조롱성 질문을 하면서, 그들의 지향점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구호로 표명했던 것이다.

서로 다른 관심사를 가진 대중이 참가하는 집회에서 요구사항을 표출하는 구호가 한 가지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참가 시민들이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높은 수준의 정치의식을 소유한 개인들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참가자 개개인 모두가 자신들이 가진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요구들이 아무리 절박한 것일지라도, 그 모든 것들은 민주정부가 들어서야만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명실상부한 민주정부를 세우는 것보다 더 긴급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그 인식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구호 속에 집중적으로 담았던 것이다.

대의민주주의의 취약성을 보완할 수 있는 대안의 하나로 제시된 것이 숙의민주주의이다. 숙의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한 유형으로서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 사이에 공개적인 논증과 토론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를 국가권력의 잠정적 의사 결정 과정에 반영하도록 함으로써 정책 결정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민주적 통치 방식의 하나이다. 이는 국민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간접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보완조치라고 할 수 있다.

후쿠야마는 쇠퇴하고 있는 미국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덴마크’를 제시하였다. 그가 ‘덴마크’를 모범적인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모델로 본 이유는 숙의적인 공론화 방식의 활성화와 관련이 있다. 덴마크는 실재하는 덴마크라는 국가의 운영방식과 그가 생각하는 새로운 국가 운영방향 사이에 있는 유사성의 결합 가능성에서 찾은 이상적인 국가의 모델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숙의민주주의는 이미지나 이념 등을 중심으로 대중을 조작하고 선동하며 이를 여론화하여 권력 행위를 합리화하는 현대 민주정치의 병폐를 방지하는 한편, 시민의 정치참여를 확대하고 정치적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숙의민주주의라는 말은 ‘deliberative democracy’의 번역어로 베셋(Joseph M. Bessette)이 《숙의민주주의: 공화 정부에서 다수 원리(Deliberative Democracy: The Majority Principle in Republican Government)》(1980)라는 저서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이것은 합의적 의사 결정과 다수결의 원리도 일정 부분 반영하는 것이다. 숙의민주주의의 기본적인 관점은 민주적 결정이 적법하기 위해서는, 단지 투표에서 나타나는 선호도의 총합이 아니라 실제적인 숙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에 있다. 그리하여 참여자들이 합의에 도달하면 최상이고, 만약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경우에는 투표를 통해 결정하는 방식이 공론화 절차가 된다.

국가 중대사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상충하는 사안을 추첨으로 뽑힌 시민대표들의 결정에 전적으로 맡긴다는 것은 전문가들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모험임이 분명하다. 선거는 평범한 시민보다는 사회적 인지도가 높은 명망가나 부자들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제도이고, 이러한 양상이 반복되면 선거는 특권층이 자기들끼리 권력을 주고받는 요식행위로 굳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민주적 토양을 이용하여 권력자로 등극한 나폴레옹이나 히틀러 그리고 20세기 중반의 신생국 통치자들에게 선거는 독재자가 되는 경로를 제공한 것이었다.

숙의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 모두와 양립할 수 있다. 숙의와 토론이 실질적으로 가능한 소규모 회의체의 구성원이 되는 시민배심원들은 일반 시민들 중에서 무작위 추첨을 통하여 구성된다. 시민배심원들은 지금까지의 정치과정에서 투표 이외에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주권을 행사하는 데 특별한 역할이 없었던, 권력 관계에서는 ‘을’의 위치에 있던 시민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들로 구성된 시민배심원단은 지금 세계 곳곳에서 쇠퇴일로에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결함을 보완하고, 민주주의를 재생시킬 수 있는 희망으로 주목받고 있다.

촛불혁명은 대한민국에도 숙의를 도입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문재인 정부는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방식을 전환하는 획기적인 실험을 감행하였다. 그것은 신고리 원전 5 · 6호기의 향배에 관한 것으로, 진행 중인 공사를 일단 중단시키고 향후 공사 재개 여부를 시민배심원단의 결정에 맡기겠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아무리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일지라도 그 최종 결정은 집권자가 자신의 정치적 유불리(有不利)를 저울질한 후, 자신의 의도와 맞는 관료들의 행정적 뒷받침과 친정부적인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결정해 왔다.

지난 10월 20일 공개된 이 건에 대한 시민배심원단의 결론은 정부의 애당초 공약과는 다르게 나왔지만, 정부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인다고 선언하였다. 신고리 원전 5 · 6호기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숙의를 통한 공론화 과정은 서로 다른 배경과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도 사회적 유대를 증진시킬 수 있는 민주적 의사 결정을 위한 공론화의 첫걸음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민주주의의 쇠퇴, 촛불혁명 그리고 불교의 정치론

불교는 정치사회 사상이 아니고, 불교의 교단인 상가(Sangha)는 정치조직이 아니다. 그러나 불교가 지향하는 해탈이라는 최고의 가치는 자유민주주의가 지향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들을 포용할 수 있는 상위개념 역할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용량을 가졌다. 또한 상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수행자들의 해탈을 향한 도정은 계율의 길이다. 이 길은 일체 존재의 생명을 최대한으로 존중하고, 상대방을 나와 동등한 존재로 배려하는 가장 고귀하고도 절제된 인간의 행위 양식을 규정한 금도의 상징이며, 율은 생명을 존중하고, 상대방을 고귀한 존재로 배려하는 삶이 가능하도록 설계된 상가 공동체의 운영방식을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불교의 교리는 자유와 평등, 인간에 대한 신뢰 등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가치와 상충하지 않고, 교단의 운영은 종교집단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공화제 친화적인 방식을 택하고 있다. 실제로 경전에 등장하는 국가의 기원, 통치자의 출현 과정, 그 직무 등에 관한 설명은 사회계약론에 가까운 논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러한 경전의 내용은 상가의 운영방식과 연계되어 불교의 정치사상을 ‘기원전의 민주주의’라고 평가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그리고 만약 민주주의가 쇠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원인인 자기변신의 실패, 공공성의 상실, 정치적 무관심으로 인한 자기소외 등은 불교적 사유와는 역방향으로 구축된, 즉 반연기론적인 세계관의 토대 위에 구축된 가치들이 상호 충돌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원자론적이고 이원론적 철학을 바탕으로 구성된 자유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자유와 평등의 갈등 관계는 연기론적인 세계관에서 도출되는 상위개념의 자유와 평등으로 치유가 가능한 그런 성격의 갈등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다.

민주적인 공동체를 원하면서도 공동체 유지의 근본적인 동력을 탐 · 진 · 치라는 3독의 개발과 확대 재생산에서 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3독은 인간의 이기심, 경쟁심, 끝이 없는 탐욕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3독을 개발하여 탐욕을 부추기는 사회가 배금주의와 물신주의로 흐르지 않으면 그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배금주의와 물신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필연적으로 권력을 탐욕의 충족 수단으로 사용하게 하는 강한 유혹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게 나라냐’는 질문을 빙자한 조롱과 폄하가 만연하는 상황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미국 민주주의가 심각한 쇠퇴 국면을 맞이했다는 것은 불교적 관점에서는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다. 불교의 출발점인 연기법은 어떤 측면에서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보편타당성을 인정할 수 없는 조망을 제공한다. 이념이나 제도들은 정치적 조건과 환경에 의하여 형성된 것들이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유동체 그 자체로 존속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자유민주의의 승리를 선언한 후쿠야마의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 “체제사회주의의 몰락을 주의 깊게 관찰해보면, 그것은 후쿠야마의 주장처럼 양 진영 간의 이데올로기적 대결에서 난 승부가 아니라, 자기진화를 거부한 체제사회주의의 교조적 경직성이 부른 자멸의 성격이 더 짙어 보인다.”고 했다. 여하튼 민주주의 쇠퇴에 대한 후쿠야마의 인식이 무상의 세계관에 근접하고 있음은 평가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대의제 자체의 한계에 대한 보완책으로 제시된 숙의민주주의에 대한 불교적 시각은 우호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상가는 원칙적으로 주인 혹은 지도자가 없는 전 구성원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참여하는 완전한 자치 공동체를 지향해 왔다. 이러한 상가의 특징은 스스로 교단의 주인이나 지도자임을 거부한 붓다의 선언으로부터 유래된 전통이다. 상가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출가는 전 카스트에 개방되어 있었다. 이는 비록 불교교단에서 적용된 것이기는 해도 당시 인도사회를 유지하는 불평등 구조의 기본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은 조치였다. 이는 출신성분에 구애되지 않은 인간 평등의 선언이었다.

평등한 개인들로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수행 공동체인 상가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토대는 구성원 간의 화합이다. 그래서 율장에는 승가의 화합을 위하여 쟁사(諍事)의 종류에 따라 그것을 처리하는 다양한 절차들이 규정되어 있는데, 어떤 경우든 내부 구성원 특히 당사자 간의 소통을 가장 높은 비중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 소통 제일의 원칙은 나라가 쇠퇴하지 않는 법에 대한 가르침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붓다는 공화제의 나라가 쇠퇴하지 않을 수 있는 조건으로 7불퇴법을 설했는데, 그 첫 조항이 “자주 회의를 열고 회의에 많은 사람이 참석하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소통을 통한 공감과 인식의 공유를 강조하였다.
이 가르침은 강력한 군주국의 군사적 침략 위험에 처한 밧찌(Va-jji)라는 약소 공화국의 생존전략에 관한 것이었지만, 군사력이나 군비의 증강에 대한 내용은 없이 구성원 간의 소통 폭을 넓히는 토론과 공감을 위한 의견교환의 장(場)이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인상적인 가르침이다. 그리고 군주국에 대해서는 국왕이 갖추어야 할 열 가지 착한 덕[十善德]을 가르쳤는데, 그중 두 개의 항목 즉, 두 번째 덕과 아홉 번째 덕이 국왕과 신하들 간의 원활한 소통을 권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불교적 공동생활의 원칙과 지혜들은 한국불교의 전통 속에도 아직까지 살아 있다. 그것은 시민배심원단의 숙의와 아주 유사하게 공론을 모으는 절차인 ‘산중공의’ ‘대중공사’ ‘무차대회’와 같은 전통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속된 말로 계급장 뗀 끝장토론으로 만장일치의 결론을 내는 불교적 공론화 방식이다. 구성원 사이의 철저한 평등과 자유 보장을 전제로 하는 숙의민주주의는 불교 전통 속에서 너무나 오래전부터 실천되어 오고 있던 미래형 민주주의의 맹아였던 것이다.


5. 나가면서

한국은 제도와 절차 면에서는 민주주의가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었던 반면에, 시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체감은 그에 비례하지 못했음을 역대 대통령들의 실패가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5년을 주기로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정치적 파란의 핵심쟁점으로 대두됐고, 그 구체적인 내용도 언제나 권력의 사적 남용, 투명하지 못한 정책 결정, 부정부패와 뇌물 스캔들 등의 반복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일상에서 체화되지 못한 반민주적 관행들이 정치에까지 연장된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촛불혁명은 우리 사회의 밑바닥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비민주적 관행들을 청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현능주의적 통치자 선출방식은 이론적인 차원에서는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우리나라 대통령 선출방식으로 도입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숙의민주주의의 도입은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필자는 좀 더 행복한 삶을 담보해 줄 수 있는 민주주의의 진화를 위하여 불교와 불교도가 기여할 부분은 다른 측면에 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현대사회는 탐 · 진 · 치를 확대 재생산하는 시스템으로 유지되는,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사회이다. 필자는 이 비윤리적 사회구조의 확대 재생산을 조금이라도 완화하려는 노력이 어디선가는 시도되어야 할 것이고, 이 일을 할 수 있는 적임자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지계의 삶을 통하여 3독의 제거를 서원하는 불교도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교도들의 노력으로 비윤리적인 사회구조가 완화되면 권력의 타락 정도는 그만큼 줄어들 것이고, 더불어 5년마다 반복되는 같은 화살에 맞는 집단적 어리석음의 소용돌이도 그만큼 멀어질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불교적으로 보는 정치 혹은 통치의 존재 이유인 정토 건설 즉, ‘도덕적 사회의 건설’에 근접해 갈 수 있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태국의 현 라마 왕조 여섯 번째 왕이었던 와치라웃 왕(Wachirawut, 1910~1925 재위)의 말을 우리 정치가들과 정치 지망생들에게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도덕적 행위에는 유행이 없다. 국내외를 불문하고 사람들이 타인에게 의존하여 생존하는 한 정직, 신뢰, 명예로운 행위 등은 항상 고결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태국인은 불교의 오랜 가르침을 확고히 신봉해야 한다. 국제 사회의 존경을 얻을 수 있고 진실한 문명에 이를 수 있는 길은 법의 길이다. ■

 

 

윤세원 
인천대학교 윤리교육학과 교수.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정치학박사). 주요 논문으로 〈진흥왕과 전륜성왕 사상-아쇼카 ‘따라 하기’와 ‘넘어서기’를 중심으로〉 〈선출공직 진출후보자 선택의 불교적 기준〉 〈현대사회의 병리적 작동원리와 불교의 역할〉 등이 있고, 저서로 《중국적 사유와 삶》 《백범 김구》 공저로 《사회학적 관심의 동양사상적 지평》 등이 있다. 한국동양정치사상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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