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하듯 불교미술사 연구에 매진하다

나암(羅庵) 장충식(張忠植) (1941~2005)

나암 장충식(羅庵 張忠植) 선생은 정년을 1년 남기고 2005년 4월 30일 불과 65세에 이승을 떠나셨다. 선생은 투병 중에도 강의를 계속하셨고 마지막까지 몸가짐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던 범상치 않은 수행자와 같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선생과 가까이 있던 분이 고인을 추모하면 남긴 글이 여전히 생소하지만 이미 12년이란 세월이 흘러버렸다.

갑작스런 부음이어서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하지만 이렇게 헤어질 수 있는가. 고인은 후덕한 성품과 성실한 생활태도로 칭송의 대상이었다. 그의 삶 속에서 수행승과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만큼 그의 삶은 절제의 표본으로 과욕은 남의 동네 이야기였다. 학문하는 자세를 온몸으로 증거했던 것이다. 평생 연마한 학문의 빛나는 결실들이 한참 쏟아져 나오던 때여서 후학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한다. 그는 사문(沙門)의 경험을 갖고 평생 불교미술사 연구에 매진했다. 참으로 외로운 길이었다. 정말 허망한 세상이다.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바뀌는 그의 법체(法體)를 보고 나는 고개를 떨구었을 따름이다. 삼가 고인의 극락왕생을 빈다.

선생은 벽안(碧眼) 스님의 상좌이자 제자로 법명을 지연(志淵), 함월(含月)이라 했다. 승문(僧門)에서 장 교수는 항상 너그럽고 인자한 마음으로 동료나 후배들을 대하는 자세가 강원생들의 모범이었다. 선생은 1962년경 통도사 강원을 졸업하고 1964년 종비 1기생으로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에 입학하였다. 1968, 69년에는 군종법사로 월남전에 참여하여 치열한 전쟁터에서 병사들 정신적 지주로 타국에서의 불안한 마음을 위로해 주기도 하였다.

선생은 대학 재학 중에 서산 마애불상과 꼭 닮은 황수영 선생과의 만남으로 인생의 행로를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1967년 봄에는 황수영 선생의 조사에 편승하여 대왕암 발견이라는 역사의 현장에도 참여하는 행운을 누렸다.

선생은 ‘학문을 통해 알았다는 것은 바닷가의 수많은 모래알 가운데 몇 알을 주운 것에 불과하다’는 황수영 선생의 말씀에서 학문에 대한 겸양을 배웠다. 그의 선적(禪的) 사고는 대면할 때마다 전율을 느낄 정도로 강렬했던 경봉(鏡峰) 노사(老師)의 섬광과 같은 눈빛에서 얻어진 것이며, 도덕적 기준은 동국대학교 이사장을 지내신 벽안 은사의 “언제라도 경우를 잃지 말라.”는 평범한 말씀이 큰 본보기가 되었다. 또한 선생은 이기영, 서경수 두 분 학자의 애정 어린 지도를 받았고, 불교서지학을 일러주셨던 조명기 전 동국대학교 총장의 큰사랑을 잊을 수 없으며, 사원경제를 강의하시던 이재창 선생님의 열정과 감동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하였다. 선생은 천성이 그러셨는지, 역시 배움을 주신 분들처럼 천천히, 신중하게, 기본에 충실한, 후대에도 귀감이 되는, 번잡스럽지 않은, 연구자세를 끝까지 견지하였다. 선생은 짐작하건대, 그분들에 대한 감사의 보답, 나아가 출가 본사인 통도사와 스승인 벽안 큰스님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겠다는 일념으로 최선을 다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선생은 그다지 길다고는 할 수 없는 학문 활동 기간에 100여 편에 이르는 불교미술에 관련된 글들을 남겼다. 선생은 불교미술이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고 사회, 경제, 정치 그리고 사상 등 당시의 모든 상황이 만들어낸 시대적 산물이며, 특히 불교교리의 이해가 필수적이라 인식하였다. 따라서 선생은 제작의 근본을 이루는 불교의 교리적 배경과 영향 그리고 교리에 따른 도상과 양식의 변화에 구체적이고 객관성을 담보하고자 노력하였다.

필자는 선생의 본래의 뜻을 올바로 이해, 전달하기에는 능력이 형편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간단하게나마 선생의 연구자세와 성과를 소개하는 이유는 부끄럽게도 선생이 영면에 들기 전까지는 연구 성과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선생의 심오한 불교적 인식 세계를 전혀 알지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필자 자신에 대한 회한과 선생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기도 하다.


1. 수행자-깨달음의 길

장충식 선생은 필자의 기억으로는 출가와 수행자로서의 생활 더구나 불교에 대한 해박한 식견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면서 선생의 불교적 인식을 엿보게 되었고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놀라울 만큼 선생의 불교적 식견이 뛰어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저작인 《피안으로 가는 길》(홍법원, 1971)과 《녹야원의 빛》(불서보급사, 1979)만을 대상으로 선생의 불교관에 대하여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전자는 지난 어린 시절 무척 불교를 알고 싶어 했으나 마땅히 읽을 만한 책이 없어 안타까워했던 옛 기억을 더듬고, 군법사 시절 종종 질문받았던 불교교리를 나름대로 정리해 본 기본 입문서라 하였다. 후자는 심오한 경전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일반인에게 전달해 주고자 하는 목적에서 썼으나 이 글의 내용이 어쩌면 자신의 불교관이라 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선생은 불교란 간단히 말하기는 참으로 어려운데, 글자 그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했다. 부처가 깨달았다는 건 우주와 인생의 참모습을 깨우쳤다는 것, 즉 진리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참모습을 알기 전에는 항상 탐욕과 어리석음과 분노의 여울 속에서 헤매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편은 수행과 실천뿐이라 하였다. 또한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로 인본주의와 인과원칙을 종지로 하며 최종의 목적은 각자(覺者)의 지위에 도달함이라고 했다. 각자 즉 부처가 된다는 것은 참다운 사람, 즉 완전한 인격이 되는 것으로 오직 자신만이 자신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이다.

불성(佛性)에 대한 선생의 인식은 명쾌하다. 부처님의 성품이란 모든 번뇌와 망상이 없는 청정무구한 마음이다. 번뇌와 망상이 없다는 것은 지혜로운 마음 즉 일체의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은 부처님만 소유한 것이 아니라 일체중생 모두가 가지고 있다. 다만 중생이 번뇌의 속박에서 헤매는 것은 생명의 참모습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 친구가 넣어준 값진 보주를 옷 가운데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가난한 생활을 한 친구야말로 불성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법화경》 내용을 통하여 알기 쉽게 설명하였다.

선생은 우주의 현상과 본체를 불교에서는 연기와 실상이라 하며 현상을 현상(現象)하는 근본을 본체라 하는데, 인연이란 본체인 실상의 세계를 근본으로 하는 현상인 연기의 세계를 현현(顯現)하는 것이라 하였다. 불교에서 설법이 많은 이유는 중생의 근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며 그 근기에 맞추어 많은 법문이 생긴 것이다. 즉, 불법(佛法) 속에 지혜가 있고, 인생의 내면적 세계를 파헤치는 선(禪)의 철학이 있고, 우리의 관계를 말하는 인과의 교설이 있고, 만물의 생성변화를 설명하는 연기법칙이 있다 하였다.

선생은 ‘인간이 왜 깨닫지 못하는가?’라는 문제에 관하여도 불교관에 입각하여 명쾌한 해석을 제시하였다. 인간은 오온(色, 受, 相, 行, 識) 즉 정신과 물질을 결합시키는 힘이 있으나 그 힘이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업(業)으로 윤회한다. 인간은 결국 지혜롭지 못한 무명심, 망상 속의 허덕임, 심신의 부조화로 인하여 탐욕과 갈애의 노예로 스스로 예속시키기 때문에 생멸을 계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선생은 보다 구체적인 사례로 《전유경(箭喩經)》의 내용을 언급하며 중생이 법신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번뇌와 집착이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또한 선생은 무상(無常)을 인간 본성의 슬픔, 어두움, 괴로움의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주(常住)하지 않는다는 뜻이라 정의하였다. 즉, 불교에 대한 인식은 무상에서 시작하며 육체, 정신, 삼라만상 등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없고 쉬지 않고 움직인다. 이처럼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변하며 흘러가는 존재가 곧 무상하다는 뜻이고 육도윤회도 무상의 결과라는 것이다.

나아가 무상의 인식은 자기 성장에 필요하며 우주와 인생의 올바른 인식 없이 개아의 성장은 없다면서, 인생무상의 참다운 도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취생몽사하는 인간 무상의 이치를 깨우쳐주는 《비유경》의 ‘흑백이서(黑白二鼠)’의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은 유한 속에 놓여 있는 짧은 시간과 자기에 집착하지 말고 영원히 살아서 움직이는 무한한 참생명을 이 무상의 원리 속에서 발견하기를 강조하는 것이라 하였다.

선생은 《화엄경》의 “약인욕요지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若人欲了知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라는 구절을 곧잘 말씀하셨다. 온갖 사물의 인식, 판단은 주관적일 뿐 객관적인 보편성을 띠지 않는다. 따라서 동일한 사실에 대하여 누구는 고통, 누구는 안락이라 느끼는데, 이는 오직 마음의 조작, 즉 ‘일체유심조’이며 이를 다스리기 위하여 적극 자신을 수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선생이 다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한숨에 달려가 뵈었는데, 믿어지지 않을 만큼 초췌해진 모습에서 이미 회복이 어렵다는 걸 직감했고 그간 무심했던 죄책감에 선생을 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때 선생은 혼미한 의식 속에서도 무언가 말씀을 하셨다. 온전한 언어체계는 아니었지만 ‘우주’ ‘인류’ ‘공동’ ‘합일’이라는 단어만은 또렷하게 말씀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말씀은 놀랍게도 ‘열반은 단순한 육체의 괴멸이 아니고 우주의 본체인 법신, 즉 진리의 체성(體性)과의 합일이다’라는 선생의 인식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일주일 후에 ‘피안으로 간다는 것은 미혹한 중생이 부처님과 같은 각자(覺者)가 된다는 뜻’이라는 당신 스스로의 말씀처럼 열반에 드셨다.


2. 선각자-홀로 가는 길

선생은 인간의 창의적 노력이란 경우에 따라 상상의 한계를 초월한다고 했다. 이는 종교의 세계에서만의 일은 결코 아니라 오관(五官)으로서의 인식은 매우 제한된 것이며,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제어한다. 특히 조형 작품의 경우 우리는 육안으로 확인된 것만을 믿고 그렇지 않은 것은 모두 부정하기 쉽다는 미술사관을 선생은 가지고 있었다.

1) 탑파미술

장충식 선생의 불교미술은 탑파미술 연구에서 시작하였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은 불교미술은 그 예배 대상인 불탑과 불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인식 아래, 석탑 자체를 유형과 양식 즉 물질로서의 조형물로만 보지 않고 조형원리라 할 수 있는 경전적 배경과 신앙, 사회 현상 등 포괄적 접근 방법을 적용한 최초의 연구자였다.

선생은 《신라 석탑 연구》에서 지금까지 신라 석탑에 대한 조사연구는 형식, 양식, 가람 배치에 따른 탑파의 위치, 고고학적 발굴 등 여러 시점에서 고찰되어 왔으나 사상적, 즉 근본적인 건립 배경에는 여전히 의구심이 남는다 하였다. 선생은 신라 탑파 건립의 사상적 근거 즉, 조탑경(造塔經)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분석하여, 사리장엄의 공덕 개념과 현세이익적 사상이 신라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밝혀내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선생은 우리나라 탑이 3층, 5층 등 홀수라는 점에 주목하여, 이는 탑파의 무한공덕에 순응하는 개념으로 종교적 영원성을 추구하는 공덕장엄의 의미가 있어 음수적(陰數的)인 개념인 짝수보다 합리적이라 하였다.

2) 사리, 장엄구

장충식 선생은 탑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사리장엄구가 당대 최고 수준의 공예 미술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인식 아래 그 개념과 형상에 관한 연구 성과를 지속적으로 발표하였다.

〈신라불사리 신앙과 그 장엄〉은 통도사 금강계단을 대상으로 하여 불사리와 문헌 기록, 계단과 사리신앙, 사리장엄의 실재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글이다.

계단과 불사리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그것은 불사리의 신성과 계단의 종교적 권위가 합일되어 가장 강력한 신앙 행위를 유도한 결과 탄생한 사리 신앙의 한 형태라 하였다. 즉, 선생은 통도사의 경우처럼 계단에 불사리를 봉안하는 것은 불사리가 곧 계단의 계체(戒體)가 되는 것이므로 계단 자체가 일명 사리탑이란 별칭으로 오늘날까지 불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보았다.

〈도리사 사리탑의 조사〉는, 도리사 금동육각사리구에 관한 최초 조사 보고서이면서 그에 관한 유일한 연구 논문이다. 이 사리탑의 표면의 사천왕상의 지물은 보탑, 칼, 삼기창, 범협(梵莢)이다. 이들 가운데 지물로 보면 북방 다문천왕(보탑), 남방 증장천왕(칼)은 어느 정도 확정할 수 있으나 삼지창이나 범협(花葉形의 연봉)을 가진 천왕은 동방 지국천, 또는 서방 광목천이어야 하나 아직 단정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한편 현재까지 발견된 사리구는 6각으로, 9세기의 선종(禪宗) 발생과 함께 성행하는 8각 원당형(圓堂形) 부도와 대비되는 특수 형식이라 보았다.

3) 불교조각

 

장충식 선생의 〈연가칠년명금동불상 재고(延嘉七年銘金銅佛像 再考)〉는 한국 조각사 연구 방법의 반성 또는 새로운 시각의 해석을 제시한 기념비적인 논문이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삼국시대 기년명 작품으로 고대 조각의 편년은 물론 양식사 연구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 그러나 광배에 4행으로 음각된 조상명의 해석에 따른 견해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는지 불상이 발견된 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불상에 대하여 여전히 왈가왈부하고 있다.

선생은 이 불상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은 광배의 명문 즉 조상명의 잘못된 해석, 나아가 그 해석을 근거로 한 무리한 양식 도출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하였다. 특히 연가7년명 불상의 광배 뒷면 명문은 한자 또는 한문 나아가 불교에 관한 지식이 그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는지 참으로 잘못 해석한 부분이 많다고 하였다. 특히 천불을 직접 만들었느냐 하는 문제는 속단하기 어렵지만 불상의 존명(尊名)은 ‘현세불(現歲佛)’이 아니고 ‘인현의불(因現義佛)’ 인데 지금도 일부 연구자가 여전히 잘못 해독한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아쉬워하였다.

선생의 주목되는 두 번째 조각사 논문은 〈토함산 석굴의 점정(點定)과 그 배경〉으로, 고대 문화유산이란 그 문화재가 위치한 지리적 점정과 함께, 발생 배경의 고찰이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에서 쓰인 글이다.
현재도 석굴암 본존의 대좌 밑으로 상당량의 물이 흐르고 있다. 선생은 단지 석굴 뒤에서 흘러들어 아래로 흐르는 지하수로만 여기는 단순한 공학적 사고에서 벗어나 필시 석굴암이 지닌 특수한 종교적 현상이라 판단하고 주목하여왔다고 한다. 즉, 오랫동안 선생의 최대 관심사는 토함산 석굴의 위치였으며 더불어 토함산 산신이 된 석탈해와 요내정(遙乃井)의 설화였다고 한다. 토함산 석굴암은 인공의 석굴로, 그 입지는 다분히 의도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째서 바위 속에서 흘러나오는 석간수를 피하지 않고 그 장소에 그대로 석굴을 축조했을까.

선생은 종교는 일면 관념의 세계요, 신념의 세계다. 요내정의 감로수는 석굴암 불상의 히에로파니(Hierophany, 聖化)의 관념적 세계를 신앙적 주체로서 형상화하기에 충분한 종교적 의미를 지닌다고 글을 마무리하였다.

4) 불교회화

장충식 선생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불교회화 역시 교리적 바탕에 입각해 그간의 오류를 지적하고 올바른 도상 해석을 시도하였다. 즉 선생은 불화에 대한 기초학적 결함이 한국불화 연구에 큰 장애 요인이었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으며,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경전 도는 기록에 의거한 교학적 접근을 시도하고자 노력했다.

〈무위사 벽화 백의관음고(無爲寺 壁畫 白衣觀音考)〉는 의상의 낙산관음 설화를 형상화한 한국 수월관음도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무위사 극락전 후불벽 뒷면 관음보살도를 면밀하게 분석한 글이다. 특히 이 논문은 그림에 먹으로 쓰여 있는 게찬(偈讚)과 후불벽화인 아미타삼존도의 화기 분석을 통하여 보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해석을 시도하였다.

선생은 이 그림의 도상학적 근거는 《화엄경》의 〈입법계품〉이지만 그림의 우측에 기록된 묵서 게찬은 물론 구슬, 노비구와 그의 등에 앉아 있는 듯 표현된 청조(靑鳥) 등은 고려 및 조선의 선행하는 관음도상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모티프라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노비구는 《삼국유사》 낙산설화의 주인공으로 동해 낙산관음을 친견하는 의상대사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하였다.

선생의 〈한국불화 사천왕의 배치형식〉은 우리나라 사천왕 도상이 시대에 따른 변화나 화원의 착오로 사천왕의 명칭을 잘못 기재하는 경우 등으로 인해 존명과 형상에 일관성이 없으며, 나아가 현대 불교조각이나 불화의 제작에도 오류와 혼란을 야기하는 경우가 있다는 취지의 글이다.

5) 사경, 사경변상도

장충식 선생은 불교미술에 대한 폭넓은 시야는 물론 경전과 교의의 해석과 이해 그리고 한문해독 능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사경 또는 사경변상도의 연구에도 매우 힘을 쏟았다.

선생은 이미 《고려 화엄판화의 세계》(1982)를 비롯하여 많은 연구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글이 〈신라 백지묵서(白紙墨書) 화엄경 경제필사자(經題筆師者) 문제〉이다. 이 사경은 80권본 《화엄경》을 각 10권씩 8축으로 나누어 제작한 권자본(卷子本)인데 그 가운데 두 축만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각 축의 말미에 장문의 발문이 있어 사경사 및 불교, 사회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즉, 이 발문에는 제작 연대, 발원자와 사경지(寫經紙) 제작을 위한 닥나무의 재배 방법, 사경을 위한 수칙과 의식, 나아가 사경에 참여한 인물의 직책 및 관등과 함께 거주지를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경문에는 당(唐) 측천무후의 제자(制字)가 상당히 사용되고 있어 무후자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발문에 보이는 ‘경필사(經筆師)’는 그야말로 본문을 쓰는 인물을, ‘경제필사(經題筆師)’는 사경이 완성된 이후 경의 제목을 쓰는 인물의 역할을 지칭하는 용어로 그가 사경 제작의 최고 책임자라고 짐작하였다. 선생은 이 사경 제작의 주체자는 연기법사이고, 그 이외 주요인물이 모두 경주 거주자인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제작지는 경주의 황룡사로 짐작된다고 하였다.

〈원차출 사경승(元借出 寫經僧) 작품의 추정〉은 고려에서 원(元)으로 차출되었던 사경승들의 상황과 그 작품들에 관하여 심도 있게 살펴본 논문으로, 고려의 대원 관계와 사경승, 작품의 현상과 발문, 사경의 형식 등에 관하여 고찰하였다. 원은 고려에 수시로 사경지(寫經紙)를 요청하였으며, 많게는 100여 명의 사경승을 징발해 갔는데, 이는 고려 불교문화의 오랜 전통과 원의 열등감에 기인한 것으로 보았다.

선생은 이 글을 통하여 지금까지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원나라 차출 고려 사경승 작품의 현황을 파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들 사경이 금자경 위주이면서 《화엄경》이 주종을 이루었던 점이 특이한데, 이는 당시 원의 경제력이나 몽골의 정복정책과도 연관될 것으로 짐작된다고 하였다. 또한 이 연구는 고려 사경의 대외 영향관계나 당시 동북아에서 고려 사경의 국제성을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고 자평하였다.

 

조선불화초본전 개막식에서. 왼쪽부터 병진 스님, 나암 선생, 키스윌슨(전시 담당), 필자.

 


6) 문헌, 금석문

 

장충식 선생은 이미 언급하였듯이 해박한 불교 지식과 한문 해독 능력을 바탕으로 미술사 연구자들이 접근조차 꺼리는 문헌 및 금석문에 관한 적지 않은 성과를 남겼다. 그 가운데 하나가 〈신라 법화경 석경의 복원〉으로 이와 같은 작업은 선생 이외의 누구도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선생의 말씀대로 창림사의 법화경 석경은 1960년대 이후 파손된 채로 발견되었으나 그간 3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이에 대한 분석적인 고찰이 전혀 없었다.

선생은 법화경 석경이 총 19매의 판석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체제는 오늘날 사용되는 전 7권의 권차식(卷次式)이 아니라 각 품(品)을 위주로 구성하고 있어 당시의 경전 체제가 오늘날과 다르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 또한 서지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정보임에 틀림이 없다고 지적하였다.

〈김천 미륵암 시장군비(柴將軍碑)의 조사〉는 장충식 선생의 금석문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한문 해독 능력과 역사의식을 잘 보여주는 논문이다. 주된 내용은 삼국 통일전쟁 시 신라에 파견되었던 당나라 장수 시장군(柴將軍)의 역할과 고구려 및 백제 정벌과 관계된 것으로 선생은 이의 정확한 판독을 위하여 무척 고심했다고 한다. 그는 백제 침공 시에는 ‘가림도행총군’이었으나 고구려 정벌 시에는 ‘함자도행군총관(含資道行軍總管)’이 되었으며, ‘정사초당(精舍草堂)’이라는 사찰을 건립하였다 한다. 선생은 이 ‘정사초당’을 비편이 출토된 미륵암일 것으로 짐작하였고, 그가 이국땅에 사찰을 건립한 동기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매우 흥미를 느꼈다. 다만 전쟁의 와중에 불력(佛力)에 의한 종교적 가피를 입었거나 또는 알 수 없는 신이(神異)를 경험하여 사찰을 건립한 것으로 짐작은 되지만, 이 단편(斷片)의 내용만으로는 구체적 사항을 알 수 없는 것이 아쉽다고 하였다.

선생은 작은 비편 하나에도 심혈을 기울여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난해한 작업을 통하여 아주 중요한 역사 사실을 복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료에 대한 지견이 부족한 나로서 지난 수개월 간 매달려온 자구(字句)의 해석이 지엽에 천착한 나머지 오히려 혼란을 가져오지나 않았는지 걱정이 앞선다’는 겸양의 자세를 보였다.

선생은 문헌 가운데 특히 《삼국유사》에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불교미술사 연구를 위한 기본적인 자료이며 이를 능가할 수 있는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단언하였다. 이 책은 불교의 사상과 종교적 내실 구현을 기본 취지로 하고 있기 때문에 미술사 관련 자료는 여러 기술 속에 응축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현장의 유적과 유물의 상호 관련성에서 찾을 수 있어 마치 현장의 조사 노트와도 같은 정확성을 지니기도 있다고 보았다.

일연 스님은 물질적 존상(尊像)이 초자연적 영이(靈異)를 통하여 종교미술로서의 생명력을 부여받으며, 동시에 이를 통하여 진정한 가치를 부각시키고 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인식이 종교미술로서의 불교미술이 지닌 하나의 특색이기도 하겠지만, 불교미술사관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3. 열정과 헌신의 길

 

 

《녹야원의 빛》(1979)

장충식 선생은 우리 민족이 낳은 미술을 보다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민족의 정체성 확립에 일조하고 미술사학계의 자양분이 되고자 하는 목적에서 1999년 동악미술사학회(東岳美術史學會)를 창립하였다. 선생은 동악미술사학회를 애정과 열정으로 발전시켰으며 지금도 선생의 기대에 부응하여 적어도 불교미술 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학회와 학술지가 되었다. 또한 선생은 가르침을 천직으로 생각해야 하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행복으로 느껴야 한다며 늘 진솔한 자세로 충실하게 강의하였고 학과 정기답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하여 미술사 현장에서의 마음 자세를 가르쳐주었다.

 

 

선생은 연구 활동 이외에도 교무처장, 학장, 박물관장 등 학교 내 보직뿐 만 아니라 경상북도 문화재위원(1988~1999), 경기도 문화재위원(1999~2001) 등 지역사회를 위한 활동에도 적극이었다. 또한 그간의 업적을 인정받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2003~2005)이 되어 국가 문화재의 지정, 보존, 선양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선생은 해마다 학계의 주목받는 특별전을 개최하여 동국대박물관의 위상을 높였으며, 체제 정비를 통해 내실을 다져 나아갔다.

그 가운데에서도 각별하게 기억이 남는 전시는 LACMA(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에서 열린 조선불화초본전(Drawing on Faith Ink Paintings for Korean Buddhist Icons, 2003.10.21~2004.1.11)이다.

이 전시는 선생이 추진한 동국대박물관 유일의 해외전시로, 불화 초본을 처음 접하는 미국인들에게 불화 제작 과정의 어려움과 전통성을 알려주어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필자는 전시 준비부터 진열 그리고 회수까지의 전 과정에 참여하였는데, 개막식에 오신 선생께서 평소와 달리 힘들어하셨는데 그저 시차에서 오는 피로로만 여겼던 것이 지금도 후회막급이다.

또한 선생은 해인사 성보박물관 개관(2002), 은해사 성보박물관 개관(2005), 도선사 청담기념관 개관(2005) 등 불교미술과 관련된 곳이면 만사를 제쳐놓고 온 힘을 다하여 기대에 부응하셨다.

선생은 남에게 드러나지 않는 연구자세로 일관하였지만, 연구 성과만큼은 늘 주목의 대상이었다. 한국 최초의 미학자이자 미술사학자인 고유섭(高裕燮) 선생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우현학술상(1987년)을 받았고, 경주 지역 향토문화 창달과 지역사회 개발에 기여한 공로로 경주시문화상(1992)과 경상북도문화상(1994), 김동화 박사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교계 유일의 학술상인 뇌허학술상(1995)을 수상하였다. 특히 선생은 역저인 《한국 불교미술 연구》로 미술사 최고 권위라고 할 수 있는 김세중미술상(2004)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다.

 

 

《녹야원의 빛》(1979)

장충식 선생은 법제자이면서 미술사 연구자였다. 양식의 발생과 전개 과정은 필연적으로 일정한 형식을 요구받게 되며 그 형식은 바로 일정한 틀, 즉 규범을 수반한다. 이것이 종교미술인 경우 모든 조형품에는 교의(敎義)에 따른 규범이 필연적으로 적용된다. 따라서 교의나 규범의 파악은 종교미술을 이해, 연구하는 데 기본임과 동시에 필수이다. 따라서 한국 불교미술의 이해는 불교 자체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이 시도되어야 하며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사상적 배경, 교리적 접근에 관심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선생은 미처 영문도 모른 채 시작한 미술사 연구라 하였지만, 이미 1970년대에 한국 사찰 연구에 관한 한 고전이라 할 수 있는 《한국의 사찰》 전 18권의 간행에 참여하여 미술사 연구의 기초를 다졌으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불교에 대한 지식과 한문 능력을 바탕으로, 나를 포함한 미술사 연구자 대부분이 회피 또는 외면하는,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에 매진해 온 유일한 연구자였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선생의 글은 읽기가 쉽지는 않지만 불교미술을 연구를 위한 필독서들이다. 선생은 각 글이 집필 당시에는 각각의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으나 이제는 별개가 아니라 모두 하나의 연관 속에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불교미술이 지닌 융합성에서 이해될 것이라 하였다.

선생은 성품이 그러하였듯이 연구 성과를 자랑하거나 과대포장하지도 않았다. 화려함을 거부한 진정한 연구자였다. 선생은 당신이 늘 말씀하시던 《잡보장경》의 “태산과 같은 자부심을 갖되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라는 말을 마지막까지 실천한 영원한 수행자이다. ■



정우택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일본 규슈대학교 문학박사(불교회화사). 한국미술사학회 회장, 문화재위원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韓国仏画の古典 · 高麗仏画-中国仏画との比較から〉 〈朝鮮王朝時代 前期 宮廷畵風 佛畵의 硏究〉 등과 저서로 《고려시대의 불화》(공저), 《高麗時代阿彌陀畵像の硏究》 등이 있다.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장, 동악미술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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