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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미황사, 앞선 콘텐츠로 불교의 미래를 열다 / 이학종
[71호] 2017년 09월 01일 (금) 이학종 urubella@hanmail.net

한국불교의 현실

통계청 조사결과 지난 10년간 한국의 불교 인구는 300만 명이 줄어든 761만 9천 명으로 집계됐다. 1,058만 8천 명에서 매년 평균 30만 명의 신도가 줄어든 셈이다. 30만 명은 ‘자족도시’의 격을 갖춘 대형 도시를 구성하는 숫자로, 10년 동안 양산시 인구(30만 명)의 10배가 되는 불교 인구가 감소한 것이니 그 충격이 시쳇말로 ‘어마무시’하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형식적 호들갑이라도 떨어야 할 한국불교계(더 정확히는 한국불교를 이끄는 장자종단 조계종의 대표자나 주요 종무행정 기관 책임자들)는 조용하기만 하다는 것이다. 참담한 상황이 초래된 원인을 분석하며, 대책을 마련하고, 책임을 물을 것은 묻는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할 일련의 과정으로 분주해도 모자랄 이들이, 마치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는 식의 생뚱맞은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한국사회 제2종교 전락’이라는 엄중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책임 있는 당사자들이 보이는 대담함과 당당함은 도대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일까. 또 이런 현실을 침묵으로 방관하는 한국불교계 전반의 무기력함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언제까지나 한숨을 쉬거나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현실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암울한 현실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적확한 처방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한국불교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희망이 살아 꿈틀거리는 현장을 찾아가 노하우를 공유하고, 심기일전해 불교중흥의 기틀을 차근차근 다져나가는 일이 아닐까.

 
   

지금, 왜 미황사를 말하는가

지난 10년간, 한국불교가 끝없이 추락하는 가운데에서도, 한국불교가 나아갈 바람직한 길과 바람직한 모습을 제시하며 한 가닥 희망을 보여준 곳으로 해남 미황사를 꼽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드물 것이다.
미황사는 전라남도 해남 땅끝마을이라는 (포교에) 불리한 지리적 조건에도, 또 불교 교세가 국내에서 가장 약한 호남지역에 자리하고 있다는 종교환경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알토란 같은 수행 및 포교 프로그램을 개발해 성공적 포교성과를 이룩해왔다. 20년 가까이 해남 미황사가 보여준 활발발한 활동과 혁혁한 성과들은 지역과 종교의 차이를 넘어 세간의 칭송과 존경을 받았고, 미황사 대중과 불자는 물론 일반 국민의 귀의처로 자리매김했다.

미황사의 이런 배경에는 전각(殿閣, 사찰의 건물) 불사라는 ‘하드웨어’의 완성과 함께, 20여 채가 넘는 전각들이 어느 곳 하나 쉴 틈 없이 수행 및 신행 프로그램으로 돌아가는 ‘소프트웨어’가 이상적으로 적용되는 시스템이 자리하고 있다.

전각 불사, 즉 미황사의 하드웨어를 이끈 현공 스님(전 미황사 주지)은 오늘의 대찰 미황사의 사격을 주도한 스님이라고 할 수 있다. 현공 스님은 전통 가람의 사격을 최대한 해치지 않으면서도 현대적으로 매우 유용한 시설을 갖춘 불사를 이뤄내는 데 성공했다. 대웅전과 응진전 등 3, 4개 정도만이 남아 있던 쇠락한 고찰이 23개 동의 각종 전각을 갖춘 대가람으로 훌륭하게 중창될 수 있었던 데는 불사에 대한 현공 스님의 탁월한 안목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하드웨어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미황사보다 더 규모도 크고, 화려하게 중창된 사찰들은 얼마든지 많다. 중요한 것은 힘들여 구축해놓은 하드웨어를 팽팽 돌아가게 하는 소프트웨어, 즉 불교 콘텐츠이다. 이것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훌륭하게 지어진 대찰이라고 하더라도 말 그대로 ‘속 빈 강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수한 명산대찰들 가운데 덩그러니 집만 지어놓고 활용을 하지 않은 채 비워놓거나 창고용으로 방치된 전각들이 없지 않은 것은 바로 소프트웨어의 부재 탓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문제를 미황사는 주지 금강 스님의 빛나는 아이디어와 원력에 힘입어 다양하고 효율적이며, 시대를 앞서가는 프로그램 개발로 훌륭하게 해결했고, 이를 실천해냄으로써 한국불교의 희망으로 그 위상을 단단히 했다.

   
해남 땅끝마을에 자리한 미황사(美黃寺) 전경.


2000년, 미황사에서 불교의 희망이 싹트다

미황사를 한국불교의 희망으로 이끈 주역은 지난 17년 동안 미황사 주지로 있는 금강 스님이다. 금강 스님이 땅끝마을의 쇠락한 고찰 해남 미황사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 가장 가보고 싶은 절로 만들었다는 데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사람들은 곧잘 금강 스님을 미황 스님으로 부르기도 하고, 미황사를 금강사로 부르기도 한다. 미황사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금강 스님과 미황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금강 스님은 ‘새천년의 시작’이라며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2000년에 미황사에 왔다. 중앙승가대학을 졸업하고, 백양사에서 참사람 운동 관련 소임을 맡은 후 운문암 선방에서 동안거를 마치고 2000년 2월 미황사에 바랑을 풀었다. 그러자 당시 미황사 주지였던 현공 스님은 금강 스님에게 절을 맡겨 놓고는 자신의 거처를 산내 암자로 옮기고 절 살림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미황사의 중창을 위해 금강 스님이 책임자가 되어야 한다는 현공 스님의 예지력에 따른 결단이었다. 졸지에 절 운영의 책임을 떠맡게 된 금강 스님은 1년 동안 주지직을 대행하며 절을 관리했고, 이듬해 2001년 2월 3일 정식으로 미황사 주지 임명장을 받았다.
당시 미황사의 여건은 매우 어려웠다. 여느 지방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신도도 많지 않았고 재정도 턱없이 부족했다. 국토 최남단 땅끝마을에 자리한 까닭에 무엇이든 잘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심을 거듭한 금강 스님은 사찰 홈페이지를 만들기로 했다. 조계사, 송광사 등 한두 대찰에서나 홈페이지에 관심을 가졌던, 따라서 한 손에 꼽아도 충분할 만큼 사찰 홈페이지가 없었던 시절에 지방의 쇠락한 고찰에서 홈페이지를 만든다는 것은 일종의 사건이었다.

   
미황사 주지 금강 스님.
그러나 금강 스님은 시간과 공간의 차별이 없는 사이버공간의 특성을 사찰 경영에 활용해야 한다는 소신과 아이디어로 어려운 재정에도 무릅쓰고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금강 스님의 생각은 주효했다. 홈페이지를 통해 많은 사람이 미황사를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 멀어서 평생 한 번 찾아가기도 어려운 거리에 있는 절이지만, 홈페이지 개설 이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미황사 홈페이지를 들락거렸다.

초창기인데도 하루 평균 700여 명이 접속했을 정도였다. 물론 이들이 지속적으로 미황사 홈페이지를 찾도록 유도하고, 더 많은 새로운 사람들이 홈페이지를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은 금강 스님의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스님은 당시의 상황을 “참 열심히 했다. 방문자가 남긴 글에 일일이 답변을 달고, 미황사를 담은 사진도 열심히 찍어서 올렸다. 밤을 지새운 적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니 방문자도 늘어나고, 이 방문자들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오프라인으로, 즉 실제로 미황사를 찾아오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 미황사가 세상에 그 모습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어린이 한문학당, 그 뜨거운 반응

홈페이지가 하루가 다르게 활성화되자 금강 스님은 조금씩 자신감이 생겼다. 첫 포교 프로그램으로 ‘어린이 한문학당’을 개설하기로 하고, 초등학생에게 맞는 최적의 한문학당 프로그램을 완성한 후 미황사 홈페이지를 통해 참가자를 모집했다. 예상보다 훨씬 반응이 뜨거웠다. 전국에서 신청자들이 몰려왔다. 이렇게 해서 2000년 여름 미황사 ‘어린이 한문학당’의 역사적인 첫 번째 행사가 시작됐다.

제1회 어린이 한문학당에 참가한 초등학교 4, 5, 6학년 아이들 31명의 호응은 뜨거웠다. 7박 8일이라는 짧지 않은 교육과정을 이수한 아이들은 겨울방학에도 한문학당을 개설해줄 것을 이구동성으로 요청했다. 아이들의 요청으로 겨울에 개설한 두 번째 어린이 한문학당에는 외국에 나간 학생 2명을 제외한 29명의 학생이 참석했다. 그 이후 18년이 지난 현재까지 ‘어린이 한문학당’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모집 때마다 신청자가 넘쳐 애초 여름방학에만 개설된 계획을 겨울방학에 하는 것으로 늘렸지만, 그것도 부족해 여름방학에는 어린이 한문학당을 2차례씩 시행했다. 마감하고 나면 유명한 큰스님이나 금강 스님과 친분이 있는 스님들을 통해 추가로 참가시켜 달라는 ‘로비’가 치열할 정도로 어린이 한문학당의 인기는 폭발적이다. 물론 어느 누구의 로비든 단 한 차례도 통하지 않았지만.

‘어린이 한문학당’ 출신 학생들은 과정을 마친 이후에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들이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스스로 뜻을 모아 중학생을 위한 한문학당 프로그램을 운영해달라고 사찰에 요구하는 경우도 많았다. 지속적인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이런 학생들의 요청에 의해 ‘중학생을 위한 문화학당’이라는 특별 프로그램이 10여 차례 개설돼 진행되기도 했다.

올해(2017년) 여름 열린 제47회 어린이 한문학당에는 무려 49명이 참가했다. 한문학당 출신으로 대학생이 된 청년들이 8명이나 찾아와 자원봉사해 준 덕택에 정원을 훌쩍 초과한 인원인데도 원만하게 회향할 수 있었다. 2000년부터 2017년 현재까지 어린이 한문학당 프로그램에 참여한 초등학생 수는 2,000여 명을 훌쩍 넘어섰다.

   
여름방학을 이용해 어린이 한문학당에 참가한 어린이들.

금강 스님은 미황사 한문학당에서 진행 중인 프로그램을 현재 이명호 박사와 함께 매뉴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매뉴얼이 완성되면 전국 사찰에 배포해 프로그램을 공유할 생각에서다. 매뉴얼은 올겨울쯤 책자로 만들어진다.

금강 스님은 미황사 어린이 한문학당의 매뉴얼을 참고로 해서 내년 여름부터는 더 많은 사찰에서 한문학당이 개설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미황사 프로그램을 그대로 적용해도 좋고, 각 사찰에 맞게 응용해서 시행해도 좋다는 바람이다. 다만 될 수 있으면 몸과 마음의 변화가 될 수 있는 1주일 이상(7박 8일) 프로그램으로 시행해줄 것을 권한다. 2박 3일 프로그램으로는 몸과 마음에 프로그램이 체화되는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금강 스님에 따르면 한문학당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8일 동안 절에 머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에 변화가 생긴다.

적어도 이 정도의 기간이 되어야 집 생각, 부모 생각, 친구 생각을 접고 비로소 절의 환경과 프로그램에 전념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기간에는 부모와 연락도 할 수 없고 부모 등 가족의 자원봉사도 금지된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태어나 처음으로 가족에 의지하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생활하면서 스스로 몸과 마음에 큰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많은 학생이 중학교 진학 후 겪게 되는, 그러나 혼자의 힘으로 헤쳐 나가야 하는 어려움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온다고 금강 스님은 말한다.

“미황사 한문학당의 효과가 아주 큽니다. 아이들이 달라져요. 이번 여름방학에 열린 한문학당에 한 중앙일간지 문화부장의 딸이 참가했는데, 그 아이가 한문학당을 마친 후 서울로 돌아가 귀가하면서 엄마에게 ‘겨울에도 미황사 보내주세요. 중학생이 되면 자원봉사도 할 거예요’라고 문자를 보냈더라고 아이의 엄마가 전해왔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예요. 대부분 겨울에 또 오겠다고 합니다. 여름방학에는 부모님들이 사정해서 아이들을 보내는데, 겨울방학에는 아이들이 원해서 절에 오는 것이지요. 부모들이 왜 또 미황사냐고 물으면 ‘다른 캠프는 시시하다’고 한답니다. 한문 공부 프로그램도 좋지만, 넓은 마당에서 함께하는 공동체 프로그램(멍석 깔고 별 보기 등) 등 자연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에도 아이들이 크게 감동하는 것 같아요. 정말 아름다운 별을 미황사 하늘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하면서 저마다 좋다고 합니다. 그림 속에서 뛰어놀다가 가는 것 같다면서요.”(금강 스님)

금강 스님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교육은 바로 효과가 나타나는 것보다는 일생 동안 꺼내 쓰는, 평생효과를 거두게 하는 특징이 있다고 설명한다. 초등학생 시절 배운 교육은 평생 늘 가슴에 간직하고 마음의 고향으로 느끼는 교육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황사 한문학당 프로그램이 바로 그런 교육입니다. 그러다 보니 한문학당을 거쳐 간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어 찾아오고, 특별한 일을 앞두고 기도해달라고 전화를 하고, 답답할 때는 찾아와서 힘을 얻어가고, 군대에 가기 전에 찾아와 부처님께 참배하기도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부모님이나 친구들을 데리고 절을 찾아오는 경우도 많습니다.”(금강 스님)

금강 스님은 며칠 전 결혼을 한다며 남편이 될 사람을 데리고 와서 인사를 시킨 한 여학생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 맺은 인연이 이렇게 끈끈하게 계속 이어지는 경우를 맞을 때마다 보람이 크다는 것이다.

“한문학당 출신 어린이들이 미황사를 마음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성장하면서 찾아오는 것을 보면서, 내가 참 잘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한 것 같아요.”(금강 스님)

   
템플스테이 이벤트의 하나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열리는 괘불제.


템플스테이, 세계가 주목한 프로그램

미황사 템플스테이는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월드컵이 열렸던 해인 2002년부터 시행됐다. 현재 한국불교계가 운영 중인 가장 성공적인 프로그램으로 꼽히는 템플스테이를 대표하는 절이 미황사다. 미황사 템플스테이를 거쳐 간 외국인 숫자는 연간 500명에 이른다. 국내인은 약 3,500명에서 4,000명 정도가 매년 미황사를 찾는다. 2002년부터 현재까지 약 15년 동안 미황사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숫자는 매년 평균 3,000명, 총 5만여 명에 이른다.

미황사 템플스테이는 2002년 월드컵 때부터 템플스테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 역사는 조금 더 빠르다. 절이 있는 곳이 한반도 최남단 땅끝마을인 까닭에 무전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하룻밤 재워달라며 찾아오는 경우가 많아, 이들을 절에 머물게 하며 예불도 시키고 울력도 시켰는데, 어쩌면 이것이 미황사 템플스테이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험의 축적이 바탕이 되어 2002년 월드컵 당시 조계종 포교원에서 템플스테이 사찰을 모집했을 때, 미황사는 자신 있게 템플스테이 사찰 지정 신청을 할 수 있었다. 이때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겠다고 신청한 사찰은 대부분 월드컵 경기장 주변에 있는 대찰이나, 교구본사 등이었다. 축구 경기장도 멀리 떨어져 있고, 교통도 불편한 사찰 가운데 템플스테이를 신청한 곳은 미황사가 유일했다.

그 이후 조계종에 문화사업단이 만들어지고, 여기에서 전체적인 템플스테이 홍보를 해주면서 미황사 템플스테이는 더 큰 시너지 효과를 얻게 됐다. 정성을 다해 열심히 운영하다 보니 미황사가 템플스테이를 가장 잘하는 절로 꼽히게 되었고, 금강 스님은 스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에 템플스테이 운영 성공사례를 발표하는 강사 역할까지 심심치 않게 맡아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미황사 템플스테이의 성공비결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부족한 시설이지만 깨끗하게 관리하고, 정갈하고 맛깔스럽게 음식을 제공하며, 주변 자연환경과 문화 환경을 활용한 프로그램 등 절에서 일상으로 하는 일과들을 프로그램화해 템플스테이에 적용한 것 등이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일상을 프로그램화한 것이 참가자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것 같다고 금강 스님은 분석했다.

금강 스님은 특히 미황사가 가진 지리적으로 멀리 있다는 단점을 장점으로 돌리는 것에 주목했다. 미황사를 ‘무조건 하룻밤은 머물고 가야 하는 절’로 인식시켰고, 이런 인식이 확산하면서 먼 곳에 있는 사찰은 오히려 템플스테이를 하기에 더 좋은 조건을 가진 절로 자리매김해갔다.

대부분의 사찰은 토 · 일요일 등 사람이 많을 때 템플스테이 참가자도 몰리는 경향이 있지만, 미황사는 ‘1박 이상은 머물러야 하는 절’로 인식된 이후 365일 언제나 요일과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절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시기와 기간에 구애됨이 없이 다양한 프로그램을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게 되었고, 참가자들의 만족도도 더불어 높아졌다. 언제든 참가가 가능한 템플스테이 시스템은 자연히 템플스테이 프로그램 종류도 다양하게 만들었다. 한 사람이 참여할 수도 있고, 가족이나, 단체가 참여할 수도 있는 프로그램이 상시로 진행되고 있다. 중고교 동창들이 함께 참여하거나 직장 등 단체로 오기도 하고, 고등학생 수학여행을 템플스테이에 참가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하고, 인근 중고등학교 출신들이 고향 절에서 템플스테이를 한다며 찾아오기도 하는데, 어떤 경우에도 수용이 가능해진 것이다.

계절의 특성에 맞춰 여는 이벤트성 템플스테이 인기도 높다. 동백꽃, 화전놀이, 초파일, 괘불재, 가을 트레킹 템플스테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돼 운영되고 있다. 완전하게 열려 있는 것이다.

“1994년 종단개혁 불사 이후 저는 이제는 한국불교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얀마의 마하시 선원처럼 전 세계 사람들이 언제든지 수행할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었지요. 또 서옹 스님께서 주창하셨던 참사람 운동을 사찰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템플스테이 사찰을 월드컵 기간 중에 모집한다고 해서 신청을 한 것이지요.”(금강 스님)

금강 스님은 미황사를 전 세계인에게 개방하고 누구나 수행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평소 원력을 템플스테이를 통해 이루어보겠다고 결심했다. 사실 템플스테이가 시작되기 이전에도 전 세계에 있는 대표적인 수행센터를 많이 방문해 경험하기도 했다. 이유는 미황사를 전 세계인이 언제든 머물며 수행할 수 있는 열린 수행처로 만들기 위한 안목을 기르기 위해였다.

“월드컵 기간이 끝나고 난 뒤에도 미황사는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운영했습니다. 365일 국내인들도 환영한다는 쪽으로 방향으로 바꿔서 홍보도 하고 프로그램도 다듬었지요. 처음에는 하루에 1명도 오고, 한 달에 5명 정도가 오기도 했지만, 이 숫자가 축적되면서 입소문도 나고 찾는 분들이 급증하면서 미황사가 템플스테이 대표사찰이 된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미황사 홈페이지가 아주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인터넷 활용은 각 사찰에서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매우 중요한 방편입니다.”(금강 스님)

간화선 프로그램 ‘참사람의 향기’

   
간화선 프로그램 참사랑의 향기.
어느 것 하나 의미가 덜하고 중요하지 않은 프로그램이 없겠지만, 미황사의 대표 프로그램을 꼽는다면 간화선 수행을 바탕으로 한 ‘참사람의 향기’일 것이다. 7박 8일 일정으로 매월 한 차례 열리는 ‘참사람의 향기’ 수행프로그램은 지난 2005년부터 시작됐다.

템플스테이를 운영하면서 이들을 불교로 끌어들이기 위해 ‘수행형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이 반드시 필요했기도 했지만, 사실 이 프로그램은 금강 스님이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빠짐 없이 숙명처럼, 또 초인처럼 ‘참사람의 향기’ 수행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것은 스님의 이런 각별한 원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참사람의 향기’는 매월 3번째 토요일부터 4번째 토요일까지 7박 8일 일정으로 진행된다. 평균 한 해 참여 인원은 20명 안팎이고, 지금(2017년 8월 현재)까지 무려 104회나 진행해왔다. 신참자(처음 프로그램 참가자)를 위한 프로그램은 연 10차례 실시하는데 참가인은 연간 150~200명 정도가 된다. 구참자(1회 이상 참가자)를 위한 프로그램은 연 3차례 진행되는데, 20명 안팎으로 참가인은 연간 50명 내외에 이른다. 이 프로그램에는 외국인들도 종종 참가한다. 그동안 프랑스, 브라질, 러시아, 미국, 독일인 등이 ‘참사람의 향기’ 수행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미황사는 외국인 참가자를 위해 영어, 독어,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통역자를 배치해놓고 있다.

‘참사람의 향기’ 수행프로그램의 명성이 알려지면서 금강 스님의 중앙승가대 후배 학인 스님들도 참여를 신청해오고 있다. 이에 따라 ‘중앙승가대 학인 스님을 위한 참사람의 향기’ 프로그램이 10여 차례 진행됐다.

‘참사람의 향기’는 앞서 언급한 대로 간화선 수행프로그램이다. 간화선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는 프로그램. 수식관을 통해서 번뇌를 없애는 수행, 집중하는 습관 등을 익힌 다음에 직관수행으로 들어간다.

간화선 수행을 위주로 하면서 일대일 면담, 수행지도 및 면담(점검), 다도 시간, 요가, 수행론 강의, 선의 역사 강의, 육조단경 강의, 좌선의 강의 등이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다.

사실 잘 설계된 프로그램만큼 중요한 것이 이것을 수행할 인력 문제인데, 미황사는 전문인력 양성을 위해 넉넉하지 않은 재정에도 불구하고 사람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금강 스님은 처음 주지를 맡았을 때부터, 하고 싶고 해야 할 것을 위해서는 재정상황을 생각하기 전에 사람의 역할을 먼저 생각했다. 필요한 인력들을 최우선으로 구축하고, 나머지 부분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까 재정 문제도 저절로 해결되었다. 즉 ‘재정보다 일(역할)을 먼저 생각하라’는 철칙이 스님에게는 몸에 배어 있다.

부처님의 일이란 원력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 금강 스님의 신념이다. 첫 주지를 맡고 4년 임기 동안 사찰을 운영하면서, 설사 손해가 난다고 하더라도 인력은 충분히 쓰고 하고 싶은 것을 최선을 다해 하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실천에 나서보았더니 다 이루어졌다.
금강 스님은 원력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불사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고 믿는다. 원력이 수행자나 소임자에게 첫 번째가 되어야 신념이며, 환경적인 문제는 원력 다음의 문제라는 확신이 오늘의 ‘참사람의 향기’를 성공적인 간화선 수행프로그램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참사람의 향기는 정말로 꼭 하고 싶었던 프로그램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수행프로그램을 하고 싶었거든요.”(금강 스님)

금강 스님은 IMF 외환위기 당시 백양사에서 자살 직전에 있거나 사실상 삶을 포기했던 실직자들을 위한 단기출가 수행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때 스님은 정말로 많은 경험을 했고, 금생에 해야 할 일의 방향이 정해졌다고 했다.

이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 금강 스님은 이런 원력을 보다 세밀하고 정교하게 설계하기 위해 전 세계의 이름 있는 명상센터를 찾아 그곳을 프로그램들을 직접 체험했다. 미얀마의 마하시 선원, 쉐우민 선센터, 파욱 센터, 인도의 고엔카, 라즈니쉬 아쉬람, 간디 아쉬람, 오르빌 공동체, 프랑스의 플럼빌리지, 테제공동체, 대만의 불광산사, 법고산사, 일본의 천태종 연력사, 조동종 영평사, 고야산 금강봉사, 미국의 MRO선센터(조동종), 숭산 스님이 세운 프로비던스 선센터, IMS선센터(보스턴) 등을 찾아다니며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리고 장단점을 점검하며 오늘의 7박 8일 간화선 수행 프로그램 ‘참사람의 향기’를 완성했다.

“어제도 독일 부부와 오스트리아 부부가 지내고 갔고, 일반인들도 어제저녁만 해도 30명 정도가 머물다 갔어요. 전 세계에서 찾아오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도 많은 분이 절의 문을 두드립니다. 최근에는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한 주부가 집에서 술 먹고 스스로 자학하며 시달리다가 거의 피폐해져서 미황사에 찾아왔습니다. 그분은 ‘살고 싶다, 새로워지고 싶다, 한 달 동안만 이곳에 머물다 가고 싶다’고 사정을 했습니다. 이분은 참사람의 향기 수행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이후에도 틈만 나면 108배와 산책을 하면서 놀라울 정도로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온 20대 초반 젊은이가 미황사에 두 달간 머물면서 불교를 배우고 수행을 하며 심신이 밝아진 일도 있습니다. 이런 사례는 수없이 많지요.”(금강 스님)

세계의 유명 수행공동체와 어깨를 견줄 만큼 해남 미황사를 한국을 대표하는 수행센터로 이끈 금강 스님은 대부분 수도권에 살고 있는 구참자들이 주말마다 찾아와 참사람의 향기 수행을 할 수 있도록 서산에 ‘참사람의 향기 서산 수행센터’를 시작하고 있기도 하다. 아직은 기존에 있던 가건물을 리모델링해 운영하는 수준이지만 차츰 수도권에 사는 불자와 국민을 위한 수행센터로 발전시켜나갈 예정이다.

“미황사 ‘참사람의 향기’ 간화선 수행프로그램의 운영 매뉴얼을 2년 전에 이미 만들었습니다.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의 지원을 받았지요. 올해는 이것을 더 보완할 생각입니다. 중앙승가대 상담심리학과 교수 등 전문가들과 함께 더 깊이 있는 검토를 하고, 설문도 더 상세히 받고 내용을 더 충실하게 할 예정입니다. 물론 완성되면 종단을 통해 전국 사찰과 공유해야겠지요.”(금강 스님)

우전국에서 꽃핀 대승불교, 해남으로

숙종 18년(1692년)에 지은 ‘미황사 사적비’에 따르면, 미황사의 역사는 신라 경덕왕 때인 74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적비의 내용을 풀면 이렇다.

어느 날 돌로 만든 배가 달마산 아래 포구에 닿았다. 배 안에서 범패 소리가 들려 어부가 살피려 다가갔지만 배는 번번이 멀어져 갔다. 이 말을 들은 의조 화상이 정갈하게 목욕을 하고 스님들과 동네 사람 100여 명을 이끌고 포구로 나갔다. 그러자 배가 바닷가에 다다랐는데 금인(金人)이 노를 젓고 있었다. 배 안에는 《화엄경》 80권, 《법화경》 7권,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40성중(聖衆), 16나한, 그리고 탱화, 금환(金環) 검은 돌들이 실려 있었다. 사람들이 불상과 경전 모실 곳에 대해 의논하는데 검은 돌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왔다. 소는 순식간에 커다란 소로 변했다. 그날 밤 의조 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이 “나는 본래 우전국 왕인데 여러 나라를 다니며 부처님 보실 곳을 구하였소. 이곳에 이르러 달마산 꼭대기를 바라보니 1만불이 나타나므로 여기에 부처님을 모시려 하오.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 소가 누웠다가 일어나지 않거든 그 자리에 모시도록 하시오.” 하는 것이었다.

의조 화상이 소를 앞세우고 가는데 소가 한 번 땅바닥에 눕더니 일어났다. 그러더니 산골짜기에 이르러 이내 쓰러져 일어나지 않았다.

의조 화상은 소가 처음 누웠던 자리에 통교사(通敎寺)를 짓고 마지막 머문 자리에는 미황사(美黃寺)를 창건했다. 미황사의 ‘미’는 소의 울음소리가 하도 아름다워서 따온 것이고, ‘황’은 금인의 황홀한 색에서 따와 붙였다.

미황사가 세워지게 된 인연은 이렇듯 대승불교를 신봉했던 옛 불교국 우전국 왕의 해외포교 원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우전국은 실제 존재했던 중앙아시아 인근의 불교국으로 특히 《화엄경》을 편집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우전국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당나라 이연수가 지은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 위(魏) · 제(齊) · 주(周) · 수(隋)의 역사를 다룬 책 《북사(北史)》 제97의 〈서역전(西域傳)〉에 따르면, 우전에서는 모든 백성이 불법(佛法)을 소중히 여겼으며 사찰과 탑과 승려들이 대단히 많았다. 특히 왕은 불교를 신봉하여 육재일(六齋日)을 지키고 제단에 바칠 곡물이나 과일을 손수 씻었다고 한다.

우전국에 대한 기록은 법현이 지은 《법현전》에도 나온다. 《법현전》은 400년 전후의 우전의 불교를 소상히 알려 주고 있다. 《법현전》에 의하면 우전은 부유한 나라로서, 국민은 불법을 신봉하고 수만 명의 승려가 대승불교를 배우고 있었다. 선선국이나 오이국보다 열 배 더 큰 대국이었다. 사람들의 집 앞에는 높이가 6m 정도 되는 작은 탑이 무수히 세워져 있었으며, 여행하는 승려들을 위한 승방도 마련되어 있었다. 법현 일행이 온 것을 알게 된 우전의 국왕은 일행을 ‘구마제사’라는 사찰로 초청하여 머물게 하였다. 이 사찰은 3천 명의 승려가 거주하는 대승불교 사찰이었다. 식사도 계율에 정해진 대로 행하였기 때문에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식기 소리도 나지 않게 조용히 하였으므로 이것을 본 법현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혜경 등 다른 세 명은 먼저 갈차국으로 출발했지만, 법현은 이 나라의 불교의례에 큰 매력을 느껴 얼마 동안 더 머물렀다. 이유는 행상의 축제를 보기 위해서였다. 행상이란 꽃이나 보석으로 장식한 수레에 불상을 싣고 성안을 천천히 행진하는 것을 말하는데, 석가여래의 탄생을 축하하는 행사의 하나이다. 이 행사는 인도, 서역, 중국으로 전해졌으며, 4월 8일을 중심으로 거행되었다. 우전국에서는 4월 1일부터 성안의 도로를 청소하고 거리를 장식하였으며, 왕과 왕비, 시녀들이 앉을 성문 위는 큰 막을 쳐서 장엄하였다.

대승불교를 배우고 있는 구마제사의 승려들은 왕으로부터 깊은 존경심을 받고 있었으므로 행렬의 제일 선두에 서서 걸었다. 행상의 수레는 성에서 3, 4리쯤 떨어진 곳에서 제작되었다. 수레는 바퀴는 4개, 높이가 9m 정도로서 왕이 사는 궁전처럼 크고, 칠보로 장식한 깃발을 드리웠다. 수레의 한가운데는 불상을 싣고 그 양 옆에는 보살상 2구를 배치하였으며, 부처와 보살을 보좌하기 위해 금은으로 만든 비천상을 궁중에 매달았다.

행상의 수레가 성문으로 100보 정도 가까이 오면 왕은 왕관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후, 맨발로 꽃과 향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성문을 나가 행상을 맞이하여, 머리를 불상의 대고 예배하고 꽃을 뿌리며 향을 피웠다. 행상이 성안으로 들어오면 성문의 누각에 있던 왕비와 시녀들은 많은 꽃을 뿌렸는데, 그 흩날림은 마치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당시 우전에는 14개의 대사찰이 있었으며, 한 사찰을 행상하는 데 하루가 걸렸다. 그러므로 모두 14개 사찰의 행상이 끝나는 것은 4월 14일이었다. 이 14일 동안 성안은 석가의 탄생을 축하하는 행상의 행렬로 붐볐다.

《법현전》은 우전의 또 하나의 사찰인 왕신사에 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왕신사는 성의 서쪽으로 7, 8리 되는 곳에 있으며, 창건한 지 이미 80년이 되었다고 전한다. 3대의 왕에 걸쳐 건립된 이 사찰 탑의 높이는 75m로 그 규모가 대단히 컸다. 건물은 금은으로 칠해져 있고 여러 가지 보물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탑 뒤쪽에는 불당이 있는데, 그 기둥과 창문도 모두 금으로 칠해져 있었다. 또한 아름답게 장식된 승방도 있었다. 이런 기록으로 5세기 초에 번성했던 우전국의 불교가 얼마나 발전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미황사, 현대 사찰의 새로운 모델

대승불교가 한껏 꽃폈던 나라, 대승경전의 최고봉인 《화엄경》이 편찬된 나라. 5세기경 대표적인 불국이었던 우전국 왕의 원력이 고스란히 전해진 미황사. 어쩌면 오늘의 미황사는 우전국 왕의 원력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양한 수행프로그램, 아름다운 경관, 존경받는 스님들의 헌신적인 지도, 전국에서 수천의 인파가 몰려와 펼치는 가을 괘불재, 음악회, 그리고 폐교 직전의 서정분교를 살리고 키운 사찰과 주민들의 공동체 형성 등 21세기의 미황사는, 금강 스님의 말씀처럼 한국불교가 추구해야 할 새로운 모델로 우뚝 섰다.

또한 신심 깊은 우전의 왕이 그들 나라의 불교를 이웃 나라에 전했던 것처럼 오늘의 미황사를 일군 금강 스님도 동아시아불교를 대표하는 수행법인 간화선을 현대화해 국내는 물론 전 세계로 전하고 있다. 어쩌면 금강 스님이 불교일화를 꿈꾸며 경전을 싣고 배에 올랐던 옛 우전국 왕의 후신일지도 모르겠다. ■

이학종
시인, 전 미디어붓다 대표. 동국대 불교대학원 불교학과 석사과정 수료. 불교 언론에서 30여 년간 일하고 있으며, 저서로 《선을 찾아서》 《돌에 새긴 희망》 《인도에 가면 누구나 붓다가 된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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