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평래 충남대 철학과 교수

문제 제기

불교에서 가장 많이 쓰는 용어 가운데에 니르와나(nirva)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을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는 “니르와나”라고, 중학교 교과서에서는 “니르바나”라고,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닐바나”라고, 대학교 교과서에서는 “열반”이라고 써서 가르치면 어떻게 될까.

우리나라에서는 똑 같은 불교용어 하나를 놓고서도, 실제로는 표준화가 되어 있지 않아, 이렇게 여러 가지로 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 대승불교도가 가장 많이 독송하는 경전의 하나인 쁘라갸빠라미따심경의 만뜨라를 하나 더 들어보기로 한다.

한 글“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쌍가떼 보디 쓰와하”
“Gate Gate Pragate Prasagate Bodhi Svh”
한 자“揭帝 揭帝 般羅揭帝 般羅僧揭帝 菩提 僧莎訶”
(게제 게제 반라게 제반라승게 제보 제승사가)

나는 마음의 고요와 평화를 얻으려고 자주 불교음악을 듣는다. 데와 쁘레멀(Deva Premal)의 가떼 가떼(Gate Gate)를 아주 좋아 한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쁘라갸빠라미따심경(Prajn-Pramit-Hd- raya Stram, 般若心經)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만뜨라(mantra)를 데와 쁘레멀이 노래로 부른 것이다. 그녀의 고운 목소리로 귓전에 울려오는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쌍가떼 보디 스와하(Gate Gate Prag- ate Prasagate Bodhi Svh)”는 나의 잠자는 넋을 일깨우는 영혼의 소리로 느낀다.

쁘라갸빠라미따심경은 아리야왈로끼떼슈와라(ryvalokitevara-bodhisattva, 觀自在) 보디뜨와가 샤끼야무니 붓다님(Sakyamuni Bu-ddha)의 위대한 열 분 제자 가운데의 한 분인 지혜제일(智慧第一) 샤리뿌뜨라(riputra, 舍利弗)에게 실체가 없음(nyat, 空性)을 일깨워서 지혜를 완성하도록 하려는 가르침이다. 사람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panca skandha, 五蘊)에는 실체가 없다(空性)는 앎을 얻어서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라고 어정쩡하게 독송하는 것일까. 중국 사람들이 중국 글자로 표기하여 놓은 것에 그대로 오래 동안 길들여진 습관 때문이다. 한번 길들여진 습관은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쉽게 바꾸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빨리 바꾸어야 한다. 젊은 후세들을 위해서도 우리의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 된다고 본다.

이것은 온전한 싼쓰끄리뜨 발음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자 그대로 읽는 방식도 아니다. 중국 사람이 싼쓰끄리뜨 경전을 중국의 소리 값으로 묘사하여 놓은 것을, 우리는 변함없이 짜깁기하여 우리식으로 읽어야 하는가. 지금 우리는 외국어 하나를 배우면서도 원어민을 모셔다가 원어민의 말과 소리의 감정을 들으며 외국어를 바르게 익히려고 하면서도, 왜 불교용어에 대한 인식은 바뀌면 안 되는지, 왜 못 바꾸는지를 생각해 보자.

이제는 우리도 교육을 받았고 외국어에 대한 인식도 달라져 있다. 그럼에도 불교계는 중국으로부터 전해져온 한문경전에 빠져 중국식 용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계화 속의 불교, 삼계의 대도사이신 붓다님의 말씀을 우리가 바르게 알고 정확하게 사용하여,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글을 빌려 쓴 과보

우리는 이와 같이 중국글로 표기하여 놓은 것을 빌려다가 중국어가 아니라 한자음으로 읽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오래 동안 우리말은 있어도 우리글이 없었기 때문에 한자를 빌려서 생활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우리 조상들은 그들 나름대로 우리말로 적어보려고 노력한 것도 사실이다. 이두가 그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애초부터 우리글이 아닌 중국글자의 음만을 따가지고 우리말로 표기하려고 한 것이기 때문에 한계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거대한 아시아의 한 귀퉁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듯 한 조그만 반도의 나라는 중국글자를 자기 나라의 글자처럼 쓰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렸다. 더 나아가 조선시대에는 우리가 우리글인 훈민정음을 만들어 놓고도 스스로가 홀대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렀다. 중국글자인 한자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글을 홀대하는 선풍(禪風)

불교는 해탈을 목표로 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문자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중국글자를 빌려서 우리글처럼 써 왔기 때문에, 개념을 파악할 수 있고, 의사를 전달만 하면 되는 것이지 굳이 한글로 바꿀 필요가 있느냐고 하는 견해도 있다.

“말이나 글을 벗어난 깨달음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하는 것이지, 글로 써서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以心傳心 不立文字)”라는 선종에서의 문자를 경시하는 풍조도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달을 봐버린 사람에게 손가락이 필요가 없듯이, 깨달음을 얻은 사람에게는 글자고 뭐고 하는 방편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라는 것이다. 글자를 경시하는 풍조는 개념어의 정립과 논리의 발달을 저해하며, 그 나라 사람들을 미개문화로 끌어내린다.

“달과 손가락”이란 비유로 보면 글자는 손가락에 해당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달을 가리키기 위해서는 손가락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할 것도 아니고 부정할 수도 없다. 개념에 관한 인식이 없이는 우리가 세상을 살 수 없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정확한 개념의 전달을 위해서는 말과 글의 기능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선사(禪師)들이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외치면서도, 그렇게 많은 글을 쓴 것은 왜 일까.

중화주의에 대한 향수

자기 나라의 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나라의 글이 없는 나라는 문화적인 발전은 말할 것도 없고, 더 나아가 자기 나라의 정체성을 보존하지 못하는 것을 많이 본다. 우리나라가 일본이나 티베트처럼 보다 일찍부터 우리글을 만들어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글 속에 순수한 우리 정서가 많이 살아있을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중국에 의존하여 왔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배할 때까지 우리는 중국을 천자의 나라로 섬겼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쓰고 있는 용어가 거의 한자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한자를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한문경전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아주 특수한 부류에 속하는 극히 일부의 사람이란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화는 모방이며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도는 불교와 인연을 맺자마자 바로 한문경전과 만나게 된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이 자기들이 읽으려고 중국글자로 표기하여 놓은 한문경전을 바로 외우기 시작한다. 이 때 한자로 형성된 용어가 저절로 몸에 배어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도들이 제일 많이 쓰는 불교용어 가운데에서 보살(菩薩)이나 열반(涅槃)을 보자.

이 보살의 원어는 bodhisattva이다. 한글로는 “보디뜨와”라고 소리 값 그대로 표기하면 된다. 그런데 중국 글자인 한자는 외국어를 소리 값으로 표기하는 것이 아주 불완전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소리 값으로 적어야 함으로 보리살타(菩提薩)라고 표기하고, 또 다시 줄여서 보살(菩薩)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디뜨와”가 원음에 가까운가, 아니면 “보리살타(菩提薩)ㆍ보살(菩薩)”이 원음에 가까운가.

또한 열반의 원어는 nirva이며, 한글로는 “니르와나”라고 소리 값 그대로 표기하면 된다. 중국 사람은 이것을 뜻글자를 가지고 억지로 표기해야 하므로 열반(涅槃) 또는 니원(泥洹)이라고 표기하고, 멸(滅) 또는 멸도(滅度)라고 의역한 것이다. 요즘 우리는 nirva를 니르와나·나르바나·열반 등 제멋대로 쓰고 있다. 그러나 싼쓰그리뜨의 발음체계를 따르면 “니르와나”이다. 틀린 것을 바르게 고쳐 읽으려는 마음만 먹으면 바로 고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삶에서 늘 합리적으로 사유하고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버릇이 요구된다. 이와 같은 좋은 버릇을 가진 사람은 바로 이것을 고칠 것이다. 그렇지만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한글경전보다는 한문경전으로 읽어야 맛이 난다느니 또는 이해가 잘 된다고 하는, 중화주의(中華主義)에 빠진 사람은 고쳐서 읽기를 거부할 뿐 아니라 저항하기까지 한다는 점이다.

선도자이어야 할 불교

불교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이 세상을 더 좋은 그래서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세상으로 만드는 데에 있다.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말이다. 불교와 세상이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불교는 그 존재성을 상실한다. 현미경으로 사물을 들여다보듯, 불교는 세상을 훤히 들여다 보아야 한다. 그래야 때와 곳에 맞는 처방전을 내놓을 수 있는 선도자가 될 수 있다.

정치형태·경제상황·문화의 향유방식·전통파괴·관습철폐·교육제도·새로운 질서 확립·가치관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는 진보세대의 동향과 같은 것을 빨리 파악해야 한다. 변화하는 세상은 불교를 기다리지 않는다. 불교의 구세정신(救世精神)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민중의 삶에 직접적으로 활력소를 주지 못하면 진흙에 묻힌 구슬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다 요즘 첨단산업기술의 급속한 성장은 놀라운 속도로 세상을 빨리 변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선진국들은 IT·BT·NT를 장악하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리고 있다. 우리나라도 해외의 우수한 R&D Centre를 유치하기 위한 촉진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의 국가경쟁력은 IT·BT·NT를 얼마만큼 개발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최근의 IT의 발달은 이제까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불가사의한 일을 만들어 내고 있다. 국경과 이념을 무너뜨리고, 남성과 여성을 가리지 않으며, 인종을 초월하여 단숨에 교감할 수 있는 Cyberspace를 창조한 것이다. 공간개념과 시간개념의 장벽을 무너뜨린 커다란 변혁을 일으킨 것이다.

UbiCom(Ubiquitous Computing)의 개발은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물리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에 컴퓨팅과 통신능력을 갖는”Ubiquitous Chip”을 심고 서로 네트워크로 연결하여 전자공간과 융합되어진 Ubiquitous Space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붓다님이 말씀하신 연기론의 원리를 그대로 실증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젊은이를 섬겨야 할 불교

예나 제나 시대의 주인공은 젊은이들이며, 특히 오늘날은 그들이 사회의 주도권을 쥐고, 세상의 흐름을 바꾸어 가고 있다. 8ㆍ15해방이후 한자교육이 점차로 쇠퇴하여 온 결과, 오늘날 한자를 모르는 민중이 다수이다. 하물며 불교한자를 어떻게 척척 읽어내겠는가. 한문세대가 아니라 한글세대라는 인식의 전환이 절실한 때이다.

그러므로 불교계로서는 불교한자를 읽을 수 없는 민중이 절대다수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경전을 갖추어주어야 한다. 한문경전을 한글경전으로 바꾸려면, 먼저 젊은 세대의 감각에 맞는 불교용어를 개발하는 수순을 밟는 것이 필요하다. 한글경전을 편찬하는 데에 그 기준이 될 불교학술용어는 필요·충분조건이다.

만일 이것을 정비하여 불교용어 표준안을 만들어 놓지 않는다면 실제로 원전(原典)을 번역할 때 엄청난 혼란을 초래할 것임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다. 더 나아가 초·중·고의 교과서를 비롯하여 신문·방송이나 예술가의 저술활동 또는 학자들이 논문을 쓸 때 제멋대로 표기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독자들은 어떻게 될까.

우리나라의 불교계는 너무나도 오래도록 한문경전에 젖어버려 그런 것은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 불교계는 한글경전을 보급하려는 의지가 얼마나 있는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한자는 한자로서의 문화적인 가치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절대다수의 민중이 한자를 모른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사상은 말과 글로 나타내며 말과 글로 전하여 진다. 붓다님의 가르침도 말과 글로 전하여 지고 있는 이상, 그 가르침은 그것을 표현하는 말과 글의 저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 그 자체에 들어 있는 것이다. 말과 글을 빌려 전달하려는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고서는 그 내용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한역불전처럼 난해한 것을 아무 생각 없이 지상제일로 섬겨, 한국의 불교를 이끌어가려고 한다면, 불교는 더욱 민중으로부터 멀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역불전은 벌써 중국에서조차 고어가 되어버려, 중국 사람조차 잘 읽지를 못한다. 한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한글용어로 바꾸어 주는 운동을 실천하여야 한다. 그래야 쉽게 그리고 빨리 개념을 익힐 수 있다. 쉽게 빨리 읽을수록 불교는 널리 퍼져 민중 속에 깊숙이 파고들 것이라는 신념이 요구된다.

늘 새로워져야 할 불교

불교용어를 표준화하는 작업은 일부 불교학자들만의 몫은 아니다. 사실 탐·진·치 삼독을 소멸한 사람이라면 불교·종교라는 것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중생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처럼 번뇌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므로 종교가 존재할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전달하는 수단과 방법은 다양할 수밖에 없고 시대를 따라서 변화할 수밖에 없다. 옛날처럼 한역불전에 이두나 구결을 붙여서 읽어 내리는 시대는 끝나고 이제는 한글로 풀어쓰는 세대가 되었음을 깊이 인식할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불교계는 한글을 창제한 정신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아쉬움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떻게 하면 다양한 문화와 취미 그리고 소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동기를 유발시킬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늘 새로워져야 하고 젊은 불교가 되어야 한다. 불교용어의 정비와 표준화라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고려되는 하나의 방편이다.

오늘날은 사람의 이름과 곳의 이름(地名)과 같은 고유명사를 그 나라 사람들의 발음대로 불러주려는 것이 보편화되어 가는 추세이다. 물론 한문경전을 보더라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소리글자가 아니고 발음체계가 많이 틀리기 때문에 우리식으로 읽으면 원음에서 멀어져버리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독자가 실감할 수 있도록 몇 가지 보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먼저 붓다님을 길러주신 어머니이며 불교쌍가의 첫 번째 빅쿠니(bhikkhun, 比丘尼)인 마하빠자빠띠(Pli. Mahpajpat)/마하쁘라자빠띠(Skt. Mahpajpat)를 중국글로 어떻게 옮겨놓았는가를 보자.

중국 사람은 Mahpajpat를 마하파사파제(摩訶波波提)·마하비야화제(摩訶卑耶和題라고, 그리고 Mahpajpat를 마하파라사발제(摩訶邏鉢提)·마하발랄사발저(摩訶鉢剌鉢底)라고 소리 값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줄여서 파사파제(波波提)·발랄사발저(鉢剌鉢底)·발라사발저(鉢喇鉢底)라고 소리 값으로 표기하고, 대세주(大世主)·대애도(大愛道)·대애(大愛)·애도(愛道)·세주(世主)·대승생주(大勝生主)라고 의역하며, 고따마(Gotama)의 어머니라는 의미로 구담미(俱曇彌)·구담미(瞿曇彌)·교담미(曇彌)라는 별명을 쓰고 있다.

다음에는 우리가 그렇게 간절하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붓다님인 마이뜨레야(Maitreya)를 알아보기로 한다. Maitreya를 미륵(彌勒)·미제예(彌帝隸)·매달리(每)·매달리야(昧野)라고 소리 값으로 표기하고, 자씨(慈氏)라고 의역하고 있다.

또 다음에는 곳의 이름을 보기로 들어보자. 거룩하신 붓다님은 붓다가야(Buddhagay)에서 깨달음을 이루고난 다음에, 어디서 설법을 시작할 것인가를 물색한다. 초전법륜(初轉法輪)을 하신 곳을 말한다. 그 곳에서 다섯 빅쿠(bhikkhu, 比丘)를 상대로 하여 처음으로 법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초전법륜을 하신 곳이라고 한다. 그 곳이 바로 와라나씨(Vras)이다. 내가 인디아에서 직접 겪은 일이지만, 현지에서 사는 사람들은 와라나씨라고 부르고,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못 알아듣는다. 와라나씨(Vras)를 바라나(波羅捺)·바라나(婆羅捺)·바라나(波羅奈)·바라지(波羅脂)·바라(婆羅)·벌라날사(筏羅斯)·바라날사(婆羅斯)·바라날사(波羅捺斯)·바라나(婆羅奈)라고 소리 값으로 표기하고, 구요(丘繞)라고 의역한다.

사람의 이름이나 곳의 이름은 고유명사이므로 의역해서는 인되며, 반드시 원음으로 불러야 한다. 왜냐 하면, 고유명사이기 때문이고, 현지에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고 있으며, 세계의 학계에서도 모두 소리 값으로 표기하기로 약속하고 있으므로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

불교는 인디아의 사유체계에 의하여 창안된 것이기 때문에, 바탕에 인디아문화를 깔고 있으며, 인디아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중국으로 유입되었을 때, 중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도록 중국글로 번역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중국글로 번역하는 데에는 문화의 차이, 언어구조의 차이 그리고 종교체험의 차이 등 많은 어려움에 부딪치게 된 것이다. 한글로는 마하빠자빠띠·마하쁘라자빠띠, 마이뜨레야 그리고 와라나씨라고 쉽고 편리하며 명쾌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중국 사람들은 언어의 구조상 애를 먹은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글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불행하게도 훈민정음을 만들기 전까지는 우리글이 없었기에 중국 사람들이 소리 값으로 표기하여 놓은 것을 한자음으로 읽거나 아니면 약간 변형시켜서 읽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 이 용어를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좋을까라는 것이 문제이다. 인명이나 지명이지만 글을 쓸 때는 불교학술용어의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옛날처럼 빨리어나 싼쓰끄리뜨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때와는 달리 이제는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고, 교육수준이 향상된 데다, 해외여행이 자유롭고, 또 유학생활까지 한 사람이 급증한 상태여서 원어에 능통한 사람도 많을 뿐 아니라, 원어로부터 더욱 빨리 언어감각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인명과 지명이 아닌 보통명사를 보기로 들어보자. 우리나라의 불교도가 제일 많이 독송하는 경전은 무엇인가? 쁘라갸빠라미따심경(Prajn-Pramit-Hdraya Stram, 반야바라밀다심경)과 천수경이라는 데에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경전을 독송할 때, 많은 것을 지적할 수 있지만 지면 관계상 몇 가지만을 살펴보려고 한다.

쁘라갸빠라미따(Prajn-Pramit)를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라고 소리 값으로 표기하고, 혜도(慧度)라고 의역하고 있다. 쁘라갸(Prajn)를 반야(般若) 또는 파야(波若)라고 소리 값으로 표기하고, 지혜(智慧) 또는 혜(慧)라고 의역하며, Pramit를 바라밀다(波羅蜜多)라고 소리 값으로 표기하고, 도피안(到彼岸)이라고 의역한다. 현대의 학자들은 “완성”이라고 번역하여 쓰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이다.

다음에는 보디 쓰와하(bodhi svh·菩提 僧莎訶)에 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보디bodhi를 보디(菩提) 또는 모지(冒地)라고 소리 값으로 표기하고, 각(覺), 오(悟), 도(道) 또는 오도(悟道)라고 의역하고 있다. 훈민정음으로 언해한 불교경전에서는 “보디”로 음사하여 제대로 표기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해방 이후에 한글학자들이 구개음화의 법칙을 적용하여 “보디”를 “보지”로 바꾸려고 한 것이다.

그렇게 되고 보니 여성의 성기와 같은 동음이의어로 된 것이다. 성스러운 붓다님의 말씀을 그렇게 쓰는 것은 세속적이라고 생각하여, 여기서 “보디”를 구개음화시키는 대신 연음으로 바꾸어 “보리”로 읽은 것이다. 신묘장구대다라니에서는 “보디”를 모지(冒地)라고 소리 값으로 표기하고 있다. 쓰와하svh는 승사하(僧莎訶)·사바하(裟婆訶)·사바하(娑縛賀)라고 소리 값으로 표기는 하되, 의역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현장이 svh를 승사하(僧莎訶)라고 소리 값으로 표기한 것은 잘못 적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쁘라갸빠라미따심경의 만뜨라에서 이것들을 조합하여 “모지사바하”로 읽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것을 근거로 하여 결론을 내리자면, “보디 쓰와하(bodhi svh)”를 “모지사바하”라는 소리 값으로 표준화할 수 없다는 것에 누구나 동의할 것이라고 본다.

한국불교를 지극히 흠모하고 숭상하는 외국 사람이 한국의 불교도가 독송하고 있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한국식으로 외웠다가 뒤에 싼쓰끄리뜨 원문을 보았다고 가정해 보자. 얼마나 황당하다고 생각하겠는가. 지면 관계상, 신묘장구대다라니의 첫 부분만을 소개하면서, 그 실례를 들어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할 기회를 주려고 한다. 싼쓰끄리뜨경전을 한글정독(正讀)·로마글자·한글오독(誤讀)·한자로 표기하여 비교하면 아래와 같다.

정독“나모: 라뜨나 뜨라야:야/”
“namo ratna­trayya/”
오독“나모라 다나 다라야야/”
한자“謨 夜野”(낭모 라달낭 달라야야)

정독“나마허 아:리야:왈로:끼떼:슈와라:야 보:디뜨와:야/”
“nama ryvalokitevarya bodhisattvya/”
오독“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야”
한자“莫 也縛路枳諦濕縛野 冒地薩縛野”
(낭막 아리야박로기제습박라야 모지살 달박야)

정독“마하:뜨와:야 마하:까:루니까:야/”
로마자“mahsattvya mahkruikya/
오독 “마하 사다바야 마하가로 니가야/”
한자 “摩賀薩縛野 摩賀迦迦野”
(마하살달박야 마하가로니가야)

우리는 지금 다라니를 바르게 독송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고쳐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고치지 못하는가. 그것은 과거에 대한 집착과 스스로를 정화하고 개혁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날마다 자기의 잘못을 뜯어고치는 것이 수행이다. 잘못을 뜯어고치는 것을 게을리 하면 지옥에 간다. 중국글자만 의존하고 숭상하던 시대에서 벗어나 세계에서 제일 과학적인 한글을 애용하는 선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불교용어의 표준화는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우리가 원음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을 스스로 포기 하고, “나모라 다나 다라야야 /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아야 마하 사다바야 마하가로 니가야…”를 고집하면 한국불교의 미래는 청신호를 기대할 수 없다. 원문과 얼마나 동떨어진 채로 독송하고 있는가를 스스로 판단하기 바란다. 그리고 스스로 불교용어의 표준화운동에 동참하여 실천하길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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