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세계화 앞장선 ‘박사’스님

1. 머리말

일붕(一鵬) 서경보(徐京保, 1914~1996) 박사는 한국 승려박사 1호, 세계 최다 박사학위 소유자, 세계 최다 저술가로 《기네스 월드 레코드(Guinness World Record)》(이하 《기네스북》으로 표기함)에 등재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국내 불교계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보다는 부정적 시각이 더 많았다.

특히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그의 이름을 거명(擧名)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조계종을 떠나 1988년 ‘대한불교일붕선교종(大韓佛敎一鵬禪敎宗)’을 창종(創宗)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그의 제자나 추종자들은 그의 이름 앞뒤에 ‘법왕(法王)’이나 ‘존자(尊者)’라는 극존칭을 붙이고,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린 분’ 혹은 ‘남북통일과 세계평화에 기여한 분’ 등으로 극찬하고 있다. 어쨌든 그의 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화려하다.

그 때문에 불교계 안팎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서경보 박사의 사후에 나온 평가는 긍정적이지 않은 면도 많다. 이 글에서는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학문적 업적을 중심으로 일붕 서경보 박사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기획은 ‘현대한국의 불교학자’들의 학문적 업적을 조명하기 위해 마련된 지면이기 때문이다.

2. 서경보 박사의 생애

일붕 서경보 박사는 1914년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한학을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할아버지의 강요로 16세 때인 1929년 결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세속 생활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19세 때인 1932년, 제주도 남제주군 산방굴사(山房窟寺)로 출가하여 강혜월(姜慧月) 화상을 은사로 득도(得度)했다. 이때 받은 법명은 회암(悔巖)이었다. 그는 약 1년간 제주도에서 수행하고, 1933년(20세) 화엄사의 진진응(陳震應, 1873~1942) 강백을 찾아가 수학했다. 1935년 진진응 강백이 완주 위봉사(威鳳寺) 강원으로 자리를 옮기자 그도 함께 따라가 그곳에서 사미과와 사집과를 졸업했다. 이때 위봉사의 주지로 있던 춘담(春潭) 스님이 그를 법제자로 삼았으며, ‘일붕(一鵬)’이라는 법호를 지어 주었다.

재정 형편상 위봉사 강원이 문을 닫게 되자, 춘담 스님의 권유로 서울 개운사(開運寺) 대원암으로 가서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1870~1948) 강백의 문하에서 3년 6개월 동안 수학하며 사교과와 대교과를 졸업했다. 그 뒤에는 박한영 강백의 추천으로 월정사 강원의 강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4년(31세) 그는 일본 유학의 길에 올랐다. 그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 계기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당시 월정사에 출강하던 김태흡(金泰洽, 1899~1989) 스님의 적극적 권유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월정사 주지 이종욱(李鍾郁, 1884~1969) 스님의 권유와 도움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다.

아무튼, 일본 유학을 떠난 서경보 스님은 1944년(31세)부터 1946년(33세)까지 일본 교토(京都) 임제종 묘심사 경내에 있던 임제전문학교(臨濟專門學校)에서 수학하며 전문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1946년(33세) 귀국하여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입학, 1950년(37세) 졸업했다. 그는 동국대학교 졸업 후, 원광대학교와 전북대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서경보 스님은 1953년(40세)부터 1956년(43세)까지 해인사에서 설립한 해인대학교(당시 진주 소재, 지금의 경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했고, 1956년(43세)부터 1962년(49세)까지 동아대학교 철학과 주임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1958년(45세) 태국 방콕에서 개최된 제5차 세계불교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이 대회는 세계불교도우의회(WFB)에서 주최한 국제행사로 한국불교를 대표하여 하동산(조계종 종정), 이청담(조계종 총무원장), 서경보, 심인불교(현재의 진각종) 회당 손규상 외 1명, 원불교 박길진 등 총 6명이 참석했다. 이때부터 서경보 스님은 세계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서경보 스님은 1962년(49세)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교수에 취임했다. 1963년(50세)에는 경주 불국사 주지에 취임했다. 1964년(51세)에는 컬럼비아대학교, 워싱턴대학교, 하와이대학교의 객원연구원(visiting scholar)으로 미국을 처음 방문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랜트 S. 리(Grant S. Lee)는 〈미국에 있어 한국불교의 장래〉에서 “1964년 나는 필라델피아의 템플대학교(Temple University)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고, 이듬해(1965년) 조계종의 서경보 스님이 한국에서 박사과정을 위해 도착했다.”고 했다. 삼우 스님은 “그가 필라델피아의 템플대학교 박사과정에 입학하기 위해 1966년 미국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두 사람의 진술을 종합해보면, 그는 1965년 미국에 와서 필라델피아의 템플대학교를 방문하여 박사과정 입학 절차 등에 대해 알아본 다음, 한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1966년 박사과정에 입학하기 위해 미국에 왔던 것 같다.

서경보 스님은 1966년(53세) 미국 필라델피아의 템플대학교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1969년(56세) 〈조당집을 통한 한국 선불교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동아시아 선불교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인 《조당집(祖堂集)》을 통해 한국의 선불교를 처음으로 서양학계에 소개한 것으로 지금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서경보 스님은 1969년(56세) 템플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곧바로 귀국하여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장에 취임했다. 그가 미국을 방문한 목적은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미국에 머물면서 포교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1970년(57세)부터 1988년(75세)까지 국내외에서 포교활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여러 대학교로부터 다양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그는 대한불교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을 역임했다.

서경보 박사는 1988년(75세) ‘대한불교일붕선교종(大韓佛敎一鵬禪敎宗)’을 창종하여, 초대 종정에 추대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입적할 때까지 조계종 승려가 아닌 군소 종단의 종정으로 활동했다. 그 후 그는 1992년(79세) 미국, 일본, 미얀마, 스리랑카 등 157개국 5,000여 불교단체를 규합하여 ‘세계불교법왕청(世界佛敎法王廳)’을 설립하여,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초대 법왕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그를 “1993년 현재, 저서 733권, 박사학위 73개, 통일기원비 건립 751개, 선필 50만 장 등 4개 부문에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이와 같은 파격적인 행동으로 불교계에서 ‘돈키호테’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서경보 스님은 1994년(81세) 스리랑카 캔디 시에서 개최된 세계불교법왕청 제2차 총회에서 20여 개국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매년 음력 4월 15일을 ‘세계불교 평화의 날’로 제정하기도 했다. 그는 1995년(82세)부터 입적 때까지 유엔 NGO 전권대사로 활동했다. 이러한 서경보 스님의 독특하고 정열적인 포교와 평화에 대한 염원을 인정받아, 1995년(82세)과 1996년(83세) 두 차례 유엔본부 세계평화교육자국제연합(UN IAEWP)에서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그러나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지는 못했다.

서경보 스님은 1996년(83세) 6월 25일 오전 11시 40분,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했다. 스님의 세납은 83세, 법랍은 64세였다. 그가 남긴 임종게는 다음과 같다.

蛇化登龍一角生 뱀이 화(化)하여 용이 되어 뿔이 하나가 났는데,
松潭風雨萬人驚 송담에는 풍우(風雨)가 크게 일어 만인이 놀랐다.
南城春至魔雲盡 남쪽 성(城)에 새봄이 오니 마운(魔雲)이 다 없어지고,
北嶺夜來禪月明 북쪽 영(嶺)에 밤이 오니 선월(禪月)이 밝아온다.


서경보 스님의 영결식은 1996년 7월 1일 그가 한때 교수와 불교대학장으로 재직했던 동국대 대운동장에서 봉행됐으며, 다비식은 이날 저녁 경남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 소재 일붕사(一鵬寺)에서 치러졌다. 다비 후 사리 83과를 수습했다.


3. 서경보 박사의 교화 활동

머리말에서 일붕 서경보 박사는 “한국 승려박사 1호, 세계 최다 박사학위 소유자, 세계 최다 저술가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인물로 알려져 있다.”고 보도한 기사를 인용했다. 다른 언론에서는 서경보 박사가 “1993년[현재] 저서 733권, 박사학위 73개, 통일기원비 건립 751개, 선필 50만 장 등 4개 부문에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 이러한 보도가 사실인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명법 스님은 〈미국불교사〉에서 “미국에 온 첫 번째 한국 승려는 서경보 스님(1914~1996)이다.”라고 기술했다. 그러나 미국을 방문한 최초의 한국 승려는 서경보 스님이 아니다. 서경보 스님보다 훨씬 이전인 1930년 7월 도진호(都鎭鎬, 1889~1986?) 스님이 조선불교청년회 대표로 최초로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범태평양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이듬해 8월에는 호놀룰루로 되돌아가서 고려선사(Koryŏ Sŏn-sa, 高麗禪寺)를 창건하고, 그곳에서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법보신문〉에서는 미국 필라델피아 템플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서경보 스님이 한국 승려 박사 1호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한국불교 승려로서 최초로 서양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스님은 백성욱(白性郁, 1897~1981)이다. 백성욱 스님은 1925년 10월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에서 〈불교순전철학(Buddhistische Metaphysik)〉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나중에 환속했기 때문에 ‘국내외 대학 박사학위 취득 스님들 목록’에서 제외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박사학위를 받을 당시의 신분이 판단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삼우 스님은 “그는 다작가로 1993년까지 500권 이상의 책을 저술했다. 분명히 그는 명예박사 학위를 좋아했고 1993년경 67개를 받았다.”고 전제하고, “서 박사가 수많은 책을 저술했고 수많은 명예학위를 받았음이 알려졌을 때, 한국의 신문들은 《기네스북》 등재는 거의 확실하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1996년판에 의하면, 서 박사는 다작가로서도 가장 많은 명예학위 취득자로서도 등재돼 있지 않았다. 최다 명예학위 세계 기록은 130개를 받은 인디애나 주 노트르담대학의 전임 총장인 시어도어 헤스버그 신부(Rev. Father Theodore M. Hesburgh)가 보유하고 있다.”고 증거를 제시했다. 또한 삼우 스님은 서경보 박사가 이처럼 명예를 추구하는 이유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1994년 뉴욕의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직함 추구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서 박사는 “이것은 내가 명성을 구하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한국인이면서 불교도인데, 한국과 불교는 더 잘 알려질 필요가 있고 세상의 주목을 받을 만하다. 내가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다면, 내가 《기네스북》에 등재될 수 있다면, 내 조국과 불교는 그로부터 덕을 볼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서경보 박사의 변명에 대해 삼우 스님은 “한국 불교계에서는 그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 이유의 일부는 전통적으로 불교도들이 금욕, 은둔, 자기 참회의 가치체계에 익숙한데, 서 박사가 행한 것은 거의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서 박사가 현대불교 가치 체계로서 비금욕과 자기광고를 실행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서산대사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은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편안과 한가함을 구해서가 아니며,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고 한 것도 아니며, 명예와 지위 혹은 재물을 구해서도 아니다.”라고 했다. 또한 법정(法頂, 1932~2010) 스님은 “진정한 수행자는 세속적인 명예나 지위에 연연하지 않는다. 안으로도 구할 것이 없고 밖으로도 구할 것이 없어, 마음은 진리에도 매이지 않아야 한다.”라고 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서경보 박사는 분명히 전통적인 출가자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가 미국에서 펼친 교화 활동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서경보 박사는 템플대학교 박사과정 동안(1966~1969)에도 한국의 선불교를 가르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랜트 S. 리는 “나는 그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몇 사람에게 참선을 가르쳤다고 들었다. 이것이 한국불교가 미국에 첫발을 내디딘 계기였다.”고 했다. 삼우 스님도 “서 박사가 필라델피아에서 미국인 소집단에 한국의 선을 가르치기 시작했던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고 했다.

삼우 스님에 의하면, 1969년 5월 서 박사의 한국인 제자 신일권(나중에 고성)이 스승의 초청으로 미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1970년 피셔 대령 부부(Col. and Mrs. Thell H. Fisher)가 기부한 버지니아 주 뉴포트 인근 90에이커의 땅 위에 세계선원을 건립했다. 세계선원에 영감을 준 인물은 “그의 활력과 밝은 웃음이 온 산을 밝히며, 일상생활의 무언의 가르침을 통해 제자들이 자아실현에 이르도록 이끄는 대한불교조계종의 학승이며 선사(禪師)인 고승 서경보 박사”였다. 이 선원의 첫 겨울에 열 명이 하루에 여덟 시간씩 100일의 동안거 좌선을 했다고 한다.

비록 서경보 박사는 한국에 있었지만 자주 외국에 여행했고 입적 때까지 거의 매년 여름 미국을 방문했다. 서경보 박사의 교화 스타일은 자발적이고 즉흥적이었다. 예를 들면 “1960년대 후반 무르시드(Murshid)가 한국의 선사 서경보 스님을 만났을 때, 즉각적인 인정이 있었다. 그는 서경보를 ‘나의 현재 선사’로 받아들였고, 요청을 받자 그에게 게송을 전했다. 서경보 스님은 그에게 곧바로 선시(禪詩)로 계를 내리고 법명 혜광(慧光?)을 주었다.” 도널드 길버트(Donald Gilbert)는 1972년 캘리포니아에서 한국의 선사 일붕 서경보를 만났다. 그는 서경보 선사와 공부하기 시작했고 미국에서 그의 전법제자로서 권한을 부여받았다.

또한 삼우 스님은 “1975년까지 서 박사의 속성(速成) 참선 제자들이 운영하는 다섯 개의 선원(禪院)이 미국 전역에 생겨났다. 세계선원 외에 펜실베이니아 주 이스턴의 혜능선사(慧能禪寺)와 도널드 길버트 스님과 에드워드 윌킨슨(Edward Wilkinson) 스님이 1974년 11월에 설립한 샌프란시스코의 일붕선원, 게리 브라운(Gary Brown)이 운영한 뉴멕시코 주 산타페이의 조계선원, 그리고 앨라배마 주 헌츠빌의 일붕선원이 있었다.”고 했다.

삼우 스님은 “그의 두 미국인 전법자, 성령헌(Sŏng-Ryong Hearn)과 대혜(大慧?) 도널드 길버트, 그리고 서 박사로부터 즉각적인 인정과 수계를 받은 무르시드 왈리 알리(Murshid Wali Ali)와 로버트 메이틀랜드(Robert Maitland, 1922~ )는 모두 원숙했고, 불교와 동양철학에 정통했고, 정신적으로 성숙했다.”고 했다. 특히 성령헌과 도널드 길버트는 일붕 서경보의 전법 계보, 즉 법맥을 이어 받았다. 이처럼 그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미국에 한국의 선불교를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편 서경보 박사는 승려 신분으로 정치활동에도 참여했다. 그는 제4공화국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과 제5공화국의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위원으로 활동했다. 이 때문인지 그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받았다.

 



4. 서경보 박사의 학문 활동

학자에 대한 학문적 평가는 그가 남긴 저서와 논문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언론에서는 서경보 박사가 세계 최다 저술가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고 보도했다. 삼우 스님은 “그는 다작가로 1993년까지 500권 이상의 책을 저술했다.”고 말했다. 당시 언론 보도에 의하면, 1993년까지 서경보 스님의 저서는 733권이었다고 한다. 고려대장경연구소에서 2002년 발행한 《한국불교 관계 논저 종합목록》에 수록된 서경보 박사의 논저는 총 738편이다. 이 중에서 단행본은 694권이고, 논문은 8편, 논설문은 38편이다. 이 목록에 누락된 단행본도 다수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목록은 78개의 주제별로 분류되어 있다. 이 목록에 수록된 단행본 694권은 대략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논집/전집 34권, 교리-일반 81권, 석존/붓다 15권, 인물(전기) 38권, 경전(불교성전) 18권, 아함부(초기경전) 4권, 반야부(금강경과 반야심경) 30권, 법화부(관음경) 55권, 경집부(지장경) 17권, 포교 41권, 의식(法要集) 35권, 회화(禪筆集) 73권, 문학(禪詩集) 177권, 불교 역사 7권, 선종(선사상) 44권, 비교종교 7권, 기타 18권.

위에 열거한 단행본 중에서 의식(법요집) 35권, 회화(선필집) 73권, 문학(선시집) 177권은 학문 활동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특히 제목만 바꾼 법요집을 많이 출판한 것을 학문적 업적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 법요집은 한 권이면 충분하다.

서경보 박사가 저술한 단행본 694권 중에는 이중(二重) 삼중(三重)으로 중복출판한 책들이 너무나 많다. ‘중복출판’이란 한 권의 책을 제목이나 출판사를 바꾸어 다시 출판한 것을 말한다. 그가 이렇게 중복출판을 무릅쓴 것은 요즘 기준으로 보면 자기표절에 해당한다. 또 노년에 이르기까지 중복출판을 계속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러나 뒷날의 이런 일들을 논외로 한다면 장년 시절의 활발한 저술 활동은 비교적 평가할 만한 것으로 보인다. 중복출판한 저술과는 달리 유의미한 저술들도 다수 눈에 띄기 때문이다. 서경보 박사의 대표적인 저서는 《불교사상교양전집(佛敎思想敎養全集)》(昌震社, 1974) 10권, 《현대인의 종교강좌》(昌震社, 1975) 10권, 《서경보 인생론 전집》(瑞音出版社, 1984) 10권이다. 이 전집 30권은 서경보 박사의 사상을 대표하는 명저(名著)라고 할 수 있다. 전집 외에도 서경보 박사의 훌륭한 저서들이 많이 있다.

서경보 박사는 전통 교육과정인 대교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인 1943년(30세)에 이미 불교학 저술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나옹왕사(懶翁王師)의 진적(眞蹟) 상, 하〉를 《불교》 신44호(佛敎社, 1943. 1)부터 신45호(불교사, 1943. 2)까지 연재했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기고문으로 추정된다. 이어서 그는 〈자장율사〉를 《불교》 신48호(불교사, 1943. 05)부터 신52호(불교사, 1943. 09)까지 4회에 걸쳐 연재했고 〈함허화상(涵虛和尙)의 행장〉을 《불교》 신53호(불교사, 1943. 10)에 게재했다.

이 외에도 1940년대에 획기적인 저서들을 다수 발행했다. 《불교입문강화》(호국역경원, 1948), 《불교개설》(호국역경원, 1949), 《불교철학개론》(호국역경원, 1949), 《석가여래와 그 제자전》(호국역경원, 1949) 등이다. 사실 1940년대는 해방 이후 국내는 물론 불교계 내부에서도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시기에 신학문의 방법론을 동원하여 책을 저술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1950년대는 서경보 박사가 해인대학과 동아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저술한 《불교순교사(佛敎殉敎史)》(영남문학회, 1955)는 귀중한 책이다. 그는 이 시기에 불교성전 편찬에 심혈을 기울인 것 같다. 그는 《대한불교성전》(영남문학회, 1954)을 시작으로 《불교성전》(해동불교역경원, 1959), 《(대장경 축역)불교성전》(해동불교역경원, 1959)을 출판했다. 이를 계기로 불교성전은 불교도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한편 그는 1958년(45세) 세계불교도대회에 참석한 후, 초기경전에 속하는 《선생경(善生經) 강의》(해동불교역경원, 1959)를 출판했다. 《선생경》은 불교사회사상의 토대가 되는 매우 중요한 경전으로, 이 경전을 출판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는 1950년대에 《예수교와 불교》(영남문학회, 1955), 《유불선 삼도의 진리》(영남문학회, 1957), 《서산대사》(국제신문사출판국, 1958) 등을 저술했고 〈석가의 문학관〉을 《자유문학》(1959. 3)에 발표했다.

1960년대는 박사학위 논문 집필에 전념한 탓인지 주목할 만한 책이 많지 않다. 다만 〈종교란 무엇인가〉를 《불교사상》 제11호(1962. 9)와 제12호(1962. 11)에 〈불교와 기독교〉를 《법시(法施)》 제25호(1969. 10)에 〈한국의 젊은 세대와 종교〉를 《석림(釋林)》 제3호(1969. 11)에 게재했다. 다른 종교에 관한 그의 관심은 《세계의 종교》(을유문화사, 1969)로 출판되었다.

서경보 박사는 1970년대에 훌륭한 책을 많이 저술했다. 1970년대에 발행된 저서 중에서 눈에 띄는 책은 《불교포교전도법개론(佛敎布敎傳道法槪論)》(홍법원, 1970)이다. 이 책은 오늘날의 포교학 혹은 전법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 이전에는 불교포교론에 관한 책이 발행된 적이 없다. 이처럼 그는 다른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분야, 즉 불교를 어떻게 포교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학문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또한 그는 실제로 《서경보 박사 설교자료집》(보련각, 1973)을 세상에 내놓기도 했다. 그가 1970년대에 저술한 《동양불교문화사》(명문당, 1972)와 《불교문화와 그 종맥(宗脈)》(博友社, 1972) 등은 주목할 만한 책이다.

서경보 박사는 1971년부터 1980년대 전반까지 다양한 주제의 논설문을 여러 매체에 발표했다. 그는 〈선문(禪門)의 전등(傳燈)〉을 《법시》 제75호(1971. 07)와 제76호(1971. 08)에 연재했고 〈이조시대 선사들의 선풍(禪風)〉을 《법시》 제78호(1971. 10)에 게재했으며 〈태고보우: 한국 조계종의 종조〉를 《한국인물대계》(博友社, 1972)에 게재했다.

또한 그는 세계평화교수협의회에서 발행한 《광장》에 여러 편의 논설문을 발표했다. 그중에서 〈세계평화와 선〉(《광장》 제42호, 1976년 11월), 〈선의 현대의 자각적 의의〉(《광장》 제64호, 1978년 9월), 〈인간 형성의 길〉(《광장》 제73호, 1979년 6월) 등은 매우 훌륭한 글이다.

서경보 박사는 선(禪)과 선학(禪學)에 관한 많은 책을 1970년부터 저술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선학개론》(고시원, 1971)을 비롯하여 《선과 인류평화》(일붕선종회, 1976), 《현대인과 선》(일붕삼장원, 1979), 《선과 지혜》(일붕삼장원, 1979) 등이다. 그는 1980년대에도 선에 관한 책을 꾸준히 저술했다. 대표적인 저서는 《선이란 무엇인가》(명문당, 1980), 《교양인을 위한 선》(일붕삼장원, 1981), 《불교와 선》(호암문화사, 1982), 《선학과 선리》(권상로와 공저, 선문출판사, 1983), 《선과 건강요법》(홍법원, 1985), 《선의 인간상》(홍법원, 1986) 등이다. 이러한 책들은 선과 선학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매우 중요한 책들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서경보 박사는 선학의 개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이 서경보 박사의 저서 중에는 훌륭한 책들이 많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책에 묻혀 그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4. 맺음말

서경보 박사는 단순히 지적유희(知的遊戲)나 지식의 축적을 위해 학문을 한 것은 아닌 듯하다. 그는 학문의 목표를 ‘인격완성(人格完成)’에 두었던 것 같다. 그는 〈인간 형성의 길〉에서 “내가 수행하고 가르치고 있는 선교(禪敎) 역시 인간의 본질이나 자연을 벗어나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간이 인격적으로 된다는 것은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 문턱에 설 수 있는 것이며, 종교를 수행함은 자기 자신의 근원을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 글을 통해 그의 선교관(禪敎觀) · 자연관 · 교육관 · 종교관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종교의 목적이 ‘자기 자신의 근원을 바라보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내가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인격을 쌓아 올려야 한다는 점이다. 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인격을 벗어난 인간행동은 용납되지 않는 점을 미루어 인격형성의 길을 위해서 스스로 자기가 자기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고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은 정신으로 그는 전 세계를 다니며 불법 홍포에 매진했던 것이다.

끝으로 언론에서 서경보 박사의 화려한 업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니거나 과장된 것이 많다. 그러나 그가 불교계 안팎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목표를 향해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후학들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다. ■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에서 〈삼법인설의 기원과 전개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저서로 〈마음비움에 대한 사색〉 등이 있으며, 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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