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불교평론과 경희대 비폭력연구소가 주관하는 열린논단(2017년 2월 16일)에서 발제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이 발제문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 〈草衣와 利休의 禪茶文化 비교 연구〉(동국대학교, 2012)와 《한국불교학》(한국불교학회, 2017) 제81집에 게재된 〈와비차(侘び茶)의 禪세계 고찰〉의 일부 내용이 수정 보완되어 함께 수록되었다.

1. 들어가는 말

한국과 일본의 차문화(茶文化)는 다르다. 그러나 한편으로 초기의 차문화는 비슷한 전개양상을 보였으며, 오늘날에도 비슷하게 전개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쩌면 지리적으로 근접한 거리에 있고, 역사적으로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밀접한 관계에 있는 양국의 ‘문화’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비슷하다’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양국의 차문화가 서로 ‘다르다’라는 인식은 16세기를 전후로 하는 양국의 차문화의 현실에서 비롯된 듯하다. 좀 더 넓게 기간을 잡아보자면 14세기 후반, 조선의 건국을 기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다.

한국의 입장에서 살펴보자면, 이 무렵 차문화는 침체기로 들어섰으며 이후 일제 식민지하와 6 · 25 등의 암울한 민족의 역사와 함께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조선 후기 초의선사(草衣禪師)에 의해 차문화의 중흥을 이루기도 했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고, 1970년대에 들어서야 서서히 활성화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일본의 경우, 14세기는 가마쿠라 막부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문화와 종교의 요구로 차문화와 선종(禪宗)이 급속도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차 공급량의 증가와 함께 대중화가 이루어졌고, 16세기에는 ‘와비차(侘び茶)’라는 독특한 문화가 완성되었다. 이 무렵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시기이다. 조선으로 보자면 큰 전란으로 인해 차문화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쇠멸했지만, 임진왜란이 ‘도자기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본의 경우는 최고의 융성기였다.

이러한 상반된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한국과 일본의 차문화는 극명하게 다른 양상을 보여 왔다. 이 발제문에서는 이러한 양국 차문화의 흐름을 시대적, 문화적 배경 속에서의 먼저 살피고, 차문화의 중심에 있는 두 인물, 초의(草衣)와 리큐(利休)를 통해 양국의 차 정신과 문화의 차이를 엿보고자 한다. 또한 그들의 차 정신과 연결되는 민족 정서, 다시 말해 양국의 차문화에서 강조되는 정서적 특징을 찾아보고자 한다.


2. 한국과 일본의 차문화 전개

1) 한국 차문화의 흥망성쇠

한국에 차문화가 유입된 것은 사료에 의한 기록으로 보자면 7세기 무렵이다. 《삼국사기》 흥덕왕 3년(828)에 당(唐)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大廉)이 귀국길에 차 종자를 가져왔는데, 이를 왕명으로 지리산에 심었다는 내용과 더불어, 차가 이미 선덕여왕(재위 632~646) 때부터 있었으나 이때 이르러 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7세기 선덕여왕 재위 시에 이미 차가 유입되어 있었고, 9세기에 이르러서는 왕명으로 차밭을 만들 정도로 차에 대한 인식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역사에서 차문화의 융성기는 고려시대(918~1392)이다. 삼국의 차문화는 그대로 고려로 이어져 더욱 발전하였다. 각종 국가 행사의 일환으로 차 의례가 시행되는가 하면, 차와 관련한 일들이 제도적으로도 완비되었다. 왕실에서는 왕의 하사품으로 차가 사용되었고, 태자 탄생 의례, 태자 책봉 의례, 혼인례 등의 각종 왕실 의례와 팔관회, 연등회와 같은 국가적 불교 행사, 사신 맞이 의례에서도 차는 중요한 물품이었다. 또한 죄의 형을 선고하고 왕의 재가를 구하는 ‘중형주대의(重刑奏對儀)’를 행할 때도 사용되었다. 왕실과 관련된 차를 전담하는 곳으로 다방(茶房)이라는 관청을 두었고, 다방에는 다군사(茶軍士)라고 하여 다구와 짐을 나르는 군인이 별도로 있어 왕이 행차할 때 함께 수행하였다. 사헌부에서는 ‘다시(茶時)’를 마련하여 정기적으로 매일 차를 마셨는데, 이는 정신을 맑게 하는 차의 효능에 주목하여 정확하고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 위함이었다. 이는 차의 성질을 실생활에 활용했다는 점에서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차가 수행에 도움을 주는 음료로 인식되면서 차와 불교는 서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역사 속에서 함께 등장하고 있다. 고려는 불교국가로 불교가 흥할수록 차 역시 성행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 승려들을 중심으로 차와 샘물을 품평하는 명전(茗戰)이 행해졌으며, 다촌(茶村)이라는 사찰 주변의 차농사 지역이 있어 승려들의 차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했다. 또한 승려들과 문인들은 차와 시로 서로 교유하며 차문화를 더욱 발전시켰다. 고려시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문인들의 시를 통해 차생활 및 문화를 엿볼 수 있을 정도로 문인들은 차를 마시며 시심을 돋우었고, 차 맛을 찬탄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당시의 세태를 비판하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백성들에게도 차가 대중화되었다. 서민들 역시 다점(茶店)을 통해 차를 마시거나 구매할 수 있었으며, 제사에 차를 올리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차문화가 발전할수록 차의 고급화를 추구하는 경향과 사치 풍조가 더욱 만연하면서, 그 폐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으로 돌아왔다. 이규보(1168~1241)는 이러한 세태를 한탄하면서 “화계에서 차 따던 일 논하였으니/ 관에서 감독하여 늙은이와 어린아이까지 징발하였네/ 머나먼 서울에 등짐 져 날랐네/ 이는 백성의 애끓는 고혈이니/ 수많은 사람의 피땀으로 얻은 것이라네”고 하며 당시의 세태를 비판하기도 했다.

한국 차문화 역사의 침체기는 조선시대(1392~1910)를 들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음다(飮茶) 풍속이 어느 정도 이어지기도 했으나, 쇠퇴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하였다. 왕실 행사에 차가 사용되었던 것이 점차 줄어들고, 차 대신 술이 사용되었으며 다방, 다시 등도 존재하기는 했으나 이름만 남았을 뿐 실제로 차가 사용되지는 않았고 형식적으로 변했다. 조선 후기 초의(草衣, 1786~1866)를 중심으로 중흥기를 맞이하기는 했지만, 그 역시 오래가지는 못했다.

조선시대 차문화가 퇴조한 원인을 살펴보면 첫째, 배불숭유(排佛崇儒) 정책을 들 수 있다. 조선은 유학을 정치 이념으로 하면서 불교를 배척하였다. 조선왕조의 억불정책으로 수많은 사찰이 통폐합되었고 승려들은 환속 당했으며 그나마 존속한 사찰과 승려들은 양반관료제 사회에서 온갖 수탈을 겪어야 했다. 한때 보우(普雨, 1505~1565)의 노력으로 승과가 부활되고 선교양종 체제를 재확립하는 등 일시적 중흥을 보이기도 했으나, 문정왕후 사후 보우가 유배되고 선교양종은 폐지되는 등 다시 불교탄압이 지속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차문화는 곧 불교를 중심으로 꽃피운 문화이다. 불교와 차문화는 운명공동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국가주도하에 의도적으로 불교적 색채를 배제시키는 상황에서 차 역시 쇠퇴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둘째로 언급되는 이유로 과도한 차 세금과 차 공납이다. 고려 말의 차 고급화와 사치풍조 폐단은 그대로 조선으로 이어졌고 백성들은 더욱 세금 압박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실제 차밭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기록에 의해 차세가 부과되기도 했다. 이는 김종직(金宗直, 1431~1491)이 “나라에 바치는 차가 본 군에서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런데 해마다 백성들에게 이를 부과한다. 백성들은 값을 가지고 전라도에서 사오는데, 대략 쌀 한 말에 차 한 홉을 얻는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김종직은 그러한 폐단을 알고 군에서 자체적으로 차를 사서 공물로 바치는가 하면, 차나무를 찾아내어 차밭을 일구는 등 세금에 따른 폐단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셋째, 임진왜란 이후 정치적, 경제적으로 피폐한 상황은 백성들을 더욱 궁핍하게 했고 당연히 차를 마실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못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밖의 이유로 우수한 한국 물의 품질이 언급되기도 한다.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수질이 뛰어나기에 굳이 차를 마실 필요가 없는 자연적 여건 역시 차문화 발전을 저해했다는 것이다. 또한 일상생활의 긴장감과 연관시켜 살피는 견해도 있다. 일본의 경우 차가 크게 유행한 것은 전국시대에 이어 절대정권이 들어설 무렵의 무사사회로, 사회 전반적으로 극도의 긴장감이 만연한 시기였기에 긴장완화를 위해 차문화의 보급이 더욱 요구되었던 반면, 농업 중심의 전통사회였던 한국에서는 차보다 곡주가 더 유행했다는 지적이다.

여하튼 조선시대에 들어 점차 퇴조한 차문화는 중기 무렵이 되면 음다풍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조선왕조실록》 선조 31년(1541) 6월 23일의 기록이다. 중국 사신 양 대인이 남원(南原)에서 생산되는 차(작설차)의 품질을 높이 평가하며 왜 조선인들은 차를 마시지 않느냐고 묻자, 선조는 “우리나라는 풍속이 차를 마시지 않소.”라고 응대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불교를 이단시하고 배척하는 경향이 다소 완화되면서 차문화 역시 서서히 살아나는 경향을 보였다. 배불의 경향이 다소 완화된 것은 중기 이후 조선은 이미 제반 분야에서 성리학의 가치가 불교를 압도하여 더 이상 경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한편으론 서학(西學, 천주교)의 확산으로 공동 대응이라는 의식이 작용한 측면도 있었다. 물론 거센 억불정책으로 존망의 위기에서 살아남고자 한 불교계의 노력 역시 주요하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초의가 선사로서 차(茶), 시(詩), 서(書), 화(畵)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며 유학자들과 교유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고, 차문화의 중흥을 이끌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러한 양상은 후대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2) 와비차(侘び茶)의 형성과 전개

일본 다도를 일컫는 용어로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가장 많이 사용되며 그 성격을 잘 나타내는 것이 와비차(侘び茶)이다. 와비(侘, 侘び)란 다도의 근본 이념이자 미의식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이는 비단 차문화뿐만 아니라 다른 예능 분야에서도 공통으로 적용된다. 다도에 사용되기 이전의 와비의 의미는 ‘외롭다’ ‘쓸쓸하다’ ‘초라하다’ 등의 부정적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였다. 그러나 차문화에 사용되면서 ‘와비’라는 용어는 그 뜻의 대변혁을 가져왔다.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하지만 ‘외롭게 느끼지 않고’ ‘쓸쓸하게 느끼지 않고’ ‘초라하게 느끼지 않는’ 의식의 세계로 그 의미가 변화된 것이다. 부족하지만 부족한 그대로 완벽함을 아는 것, 소박하지만 소박함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것, 불완전하지만 그 자체로 완전하게 바라보는 안목을 의미하는 것이 바로 와비의 뜻이다. 와비의 의미는 다도에서 비롯되어 도자기, 꽃꽂이, 요리 등의 여타 일본문화 속으로 침투되어 갔다.

일본의 차문화가 ‘와비차’라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한 데에는 불교의 여러 종파 중에서도 특히 선종의 영향이 컸다. 일본의 차와 선(禪)에서 에이사이(榮西, 1141~1215) 선사는 중요한 인물이다. 차는 견당사(遣唐使)에 의해서 전래되었으나, 견당사 제도가 폐지되면서 문물의 유입 역시 단절되었다. 이후 12세기 말 가마쿠라(鎌倉, 1192~1333) 시대에 에이사이가 입송(入宋) 후 임제종 황룡파의 법맥을 계승하고 귀국하면서 차 종자를 가져왔다. 에이사이가 귀국할 당시는 정치적으로는 가마쿠라 초기의 무사정권이 개막되던 불안정한 시기였으며, 종교적으로도 기존 불교계의 부패 등으로 새로운 사상이 요구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때 차와 선종은 무사 계급의 비호를 받으면서 급속하게 성장해 갔다.

무로마치(室町, 1336~1573) 막부가 들어서고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차는 약용에서 기호음료로 변화되었다. 이때의 차문화는 ‘투차(鬪茶)’라는 새로운 형식의 문화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투차는 일종의 투기성 놀이문화로, 상당한 고가의 당물(唐物)이 상품으로 배정되는 등 사치와 화려함의 극을 이루었다. 투차와 더불어 성행한 귀족들의 차문화를 서원차(書院茶)라고 한다. 서원차는 서원 양식의 저택에서 즐기는 유희풍의 차문화로, 서원은 원래 책을 보관하고 공부하기 위한 공간이었지만, 고가의 미술품 등을 장식하고 회의나 화려한 연회 등을 즐기던 사교 모임 공간으로 변모되었다. 사교 모임을 위해 당물 중심의 화려한 다도구 등을 갖추어 놓고 차를 즐긴 것이었다.

이 무렵 등장하는 인물이 와비차의 시조로 불리는 무라타 슈코(村田珠光, 1423~1502)이다. 그는 11세 무렵 나라(奈良) 칭명사에서 출가하였으나, 지나치게 차에 몰두하여 쫓겨났다고 한다. 이후 슈코는 잇큐(一休, 1394~1481) 선사와의 만남으로 차문화에 선 정신을 도입하게 되었다. 슈코는 차를 통한 심신 수련을 강조하였고, 차를 행할 때의 마음으로 ‘히에카루루(冷え枯るる)’ 할 것을 주장했다. ‘히에카루루’란 냉정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연희풍의 차를 즐기던 정서에서 차분하고 간소한 마음가짐으로 한층 와비의 의미에 다가섰다고 할 수 있다. 무라타 슈코 이후 다케노 조오(武野紹鷗, 1502~1555)에 의해 와비차는 한층 더 발전하였다. 조오는 〈와비의 글(侘びの文)〉에서 와비를 “가깝게는 정직하고 조심스럽게 여기며 자만하지 않는 모습”이라고 정의하면서 와비차의 외형적 틀을 갖추어 갔다.

와비차는 조오의 제자 센 리큐(千利休, 1522~1591)에 의해 완성되었다. 슈코와 조오가 다소 은둔적 생활을 하며 와비차를 구현했다면, 리큐는 보다 적극적이며 왕성한 사회활동으로 와비차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리큐는 “와비의 본뜻은 청정무구한 불(佛) 세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중략) 이것은 곧 불심을 여실히 드러내는 바이다.”라고 정의하였다. 부정적 의미가 강했던 와비는 슈코, 조오를 거치면서 소박하고 자연적이며 은둔적인 의미로 바뀌었고, 리큐에 의해 깨달음의 선(禪) 세계이자 불심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으로 또 한 번의 대변혁을 이룬 것이다.

무로마치 중기 무렵 발생한 오닌의 난(応仁の亂)을 계기로, 일본은 100여 년간 내란에 휩싸이게 되는데, 이 시기를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한다. 전국시대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434~1582)의 전국 제패가 달성될 무렵 서서히 막을 내리는 듯하지만, 노부나가가 암살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가 뒤를 이어 중앙집권화를 이루는 동안 계속 이어졌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30여 년 동안의 집권기를 아즈치 · 모모야마(安土桃山, 1573~1600) 시대라고 하는데, 리큐는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다두(茶頭, 茶匠) 역할을 하면서 차와 관련된 모든 일을 총괄했다.

무로마치 시대 중후반에서 아즈치 · 모모야마 시대에 이르는 이 시기는 극심한 혼란기였던 반면, 문화적으로는 대단히 융성하였는데, 수도인 교토(京都)와 사카이(界)를 중심으로 와비차 역시 완성되었다. 사카이는 일본 최대의 무역 자치도시로 무기, 특히 유럽에서 수입된 조총을 취급하는 주요 상인들이 모인 곳이었다.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자유도시였던 사카이는 상인들을 중심으로 예술문화를 항유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 조오나 리큐 역시 사카이의 상인(町人) 출신이다.

노부나가는 권력의 정점에 오르자 사카이를 차지하기 위해 정치적 자유를 보장해 주는 조건으로 군사비를 부담시키면서 직할지로 삼았다. 노부나가는 개인적 취향으로 다도를 즐기는 한편, 전쟁에 공훈을 세운 무사들에게 자신이 사용한 차 도구를 하사하는 등 무사들을 장악하고 중앙집권화를 이루는 데 활용했다. 노부나가는 차 도구를 재화로 인식하여 적극적으로 수집하였는데, 권력을 바탕으로 강제매수하거나 혹은 자진해서 진상하도록 유도하는 방법 등을 사용하였다.

노부나가가 암살된 이후 히데요시는 여러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며 세력을 확장하였고, 10월 15일 임제종 대덕사(大德寺)에서 진행된 노부나가의 장례식을 주관하며 ‘차노유(茶の湯)는 곧 정치의 도(御茶湯御政道)’라고 하며 노부나가가 자신에게 차를 하도록 허락한 것은 곧 정치를 하도록 허락한 것이었다고 천명했다. 이를 통해 자신이 노부나가의 후계자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히데요시 역시 차에 심취해 차 도구를 수집하고 측근들을 중심으로 다회(茶會)를 열며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했다. 특히나 자신의 관백(關白) 취임에 대해 감사하는 금리다회(禁裏茶會), 실질적으로 전국 통일을 이룬 후 기념한 북야대다회(北野大茶會) 등 대규모의 다회를 개최하여 자신의 위상과 권력을 과시하는 측면이 강했다. 히데요시가 차를 통해 점점 더 화려함을 추구하고 극도의 사치로 치달을수록 리큐가 추구하는 선풍(禪風)의 와비차와 현격한 차이를 보였고, 이에 따라 리큐와의 관계는 점점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

와비차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 속에서 발전하였으며, 일본의 전통문화이자 생활문화로 자리매김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무사정권의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사카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町人)들의 문화로, 그리고 선종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된 것이 와비차라고 할 수 있다. 평화를 추구하고 구현하고자 한 와비차는 역설적으로 전쟁과 폭력이 난무했던 시기에 성행하였고, 무력과 전쟁을 업으로 하는 무사들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대표적인 무사문화로 대두하였다.

3. 한국의 초의(草衣)와 일본의 리큐(利休)

1) 한국 차의 중흥조 초의

한국 차문화에서 대표적 차인을 들자면 단연 초의 선사이다. 초의는 사라져간 한국의 차문화를 다시 일으켰으며, 그나마 남아 있던 차의 흔적을 정리하고 개발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게 했다. 선사가 남긴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은 차문화가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다. 초의가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한국 차문화는 더욱 암중모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초의의 문집이나 시집에는 유학자들과 주고받은 시와 편지, 서문 등이 수록되어 있어 그들과의 두터운 친분을 엿볼 수 있다. 초의는 정약용에게 시와 유서(儒書)를 배우고, 김정희(金正喜)와는 평생의 지기로 함께 하면서 차와 시, 그리고 불교에 대해 담론하곤 했다. 특히 초의의 차가 확산되는 데는 김정희와 신위의 역할이 컸다. 그들은 자신의 주변 인사들과 초의가 교유할 수 있도록 해 추사의 제자들 및 다산의 자제들, 홍현주와 그 형제들, 신위, 박영보 등 많은 사대부들이 초의의 차를 애호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만들어 주었다. 《동다송》 역시 홍현주의 부탁으로 저술된 것이었다.

선사는 손수 만든 차를 지인들과 나누며 차를 보급하고 제다법을 정리하였는데, 김명희(金命喜)가 초의가 직접 만든 차를 받고 “죽순 껍질로 싼 응조차(鷹爪茶) 손수 열어보았네. (중략) 이 비법 5백 년 만에 비로소 헤쳐 내었으니”라고 언급한 것에서 잎차[散茶: 葉茶] 제다법이 초의에 의해 정리되고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완성된 초의의 차가 “초의 차가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마치 금루옥대처럼 귀하게 대접받은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는 박영보의 글에서 이미 많은 이들에게 명차로 알려졌음을 알 수 있고, “요즘 들어 차가 나는 산지의 사람들이 차를 따다가 끓여 마신다.”고 한 신위의 구절에서 차문화가 조금씩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의는 다도를 정의하기를, “채다(採茶) 시에는 묘(妙)를 다하고, 조다(造茶) 시에는 정성[精]을 다하며, 물은 참된 것[眞水]을 얻고, 포다(泡茶) 시에 중(中)을 이루면 체(體)와 신(神)이 서로 조화롭고 건(健)과 영(靈)이 함께 아우른다. 이 경지에 이르면 다도를 이룬 것”이라고 했다. 초의는 ‘채다’ ‘조다’ ‘물[眞水]’ ‘포다’로 나누고 그 각각에서 참된 것을 이루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채다에서부터 포다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모든 과정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초의가 말하는 다도는 채다에서 포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음다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서 참됨을 이루어야 궁극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각각의 상황, 처처(處處)에서 최선을 다해 올바르게 하지 않으면 다도라고 할 수 없다.
여기서 초의가 차를 우려낼 때(포다 시에) ‘중(中)’을 내세운 점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이 ‘중’과 관련해 《동다송》의 각 번역서 및 논문에서 인용되어 번역된 것을 살펴보면 ‘중’을 ‘중정(中正)’ 또는 ‘중도(中道)’로 번역하고 있다. 초의는 중을 다시 설명하기를, “중에 현묘함[妙]이 있으나 드러내기 어려우니, 참된 정기는 체와 신을 분리하지 않음이네.”라고 하여 ‘중’에 바로 차의 묘를 드러내는 방법으로 체와 신을 분리시키지 않는 것[無分離: 不二]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체와 신의 무분리(無分離)로 차의 묘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 초의의 방법론이고 곧 ‘중’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다. 이는 체와 신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분리되지 않은 것이며 동시에 진다(眞茶)와 진수(眞水), 체와 신의 각각의 성질이 확연히 나타난 상태를 의미한다. 체와 신의 불이(不二, 不異, 不離) 가운에 진다와 진수의 성(性)이 확연해질 때 차의 묘가 드러난다. 이러한 차의 묘는 곧 “알가[茶]의 참된 체의 묘한 근원을 궁구하면, 묘한 근원은 집착 없는 바라밀이로다.”라고 했다.

초의가 말하는 다도는 체와 신, 건과 영이 모두 중정(中正)으로 불이(不二)에 이른 것이다. 불이는 곧 일미(一味)이고 중정이고 중도이자 중이다. 이러한 다도의 세계는 처처에서 참됨을 실천하고자 한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삶이 그대로 구현되는 것과 동일하다. 잎을 따고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끓여 마시는 마지막까지 중정의 현현이 있을 때 다도가 되며, 이것은 곧 수처작주의 선적(禪的)인 삶이다.

한국의 차 정신은 ‘중정’으로 대표되고 있는데, 이는 위 글귀 중 ‘중’에 근거한 것이다. 현재까지 연구된 초의의 차 정신은 크게 ‘다선일미’와 ‘중정’으로 정리되고 있다. 다선일미는 초의의 선사상에 내포되 불이의 선관에서 비롯된 것이고, 중정은 초의가 직접 저술한 《동다송》에 나타난 용어이다. 이 중 ‘중정’의 의미를 불교의 중도와 유교의 관점으로 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또한 유교의 중도로 해석하는 한국의 차인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중정에는 양쪽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다고도 볼 수 있고 그런 여지 또한 충분하다. 그러나 초의가 말한 ‘중’은 다도에 이르는 법칙이자 다도의 지극한 경지이고 바라밀이다. 여기에는 ‘다선일미’의 중(中)의 원리와 ‘수처작주’의 정(正)의 실천이 모두 내재되어 있다.

2) 와비차의 완성자 리큐(利休)

리큐는 오랜 기간 임제종 대덕사에서 수행하며 “작은 다실에서의 다탕(茶湯)은 불법의 수행득도가 제일의 목적”이라고 하며 와비차의 목적과 방향을 분명히 제시했다. 그리고 “그 법식들을 출발 단계로 해서, 지금보다 좀 더 높은 깨달음에 이르고자 뜻을 두고 대덕사, 남종사(南宗寺) 등의 화상들에게 열심히 배우고 아침저녁으로 선림(禪林)의 청규를 바탕으로 정진하였다.”고 자신의 수행을 소회했다. 와비차는 그렇게 형태를 갖추어 갔다.

리큐는 스승인 쇼레이 화상으로부터 자신이 고안한 여러 가지 차와 관련한 작법들이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하지만 그 역시 한 변에 떨어진 것임을 지적받고 깨달음에 이르렀다. 자신이 혼신의 노력으로 고안하여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규칙-차를 타는 행위, 차 도구의 모양, 차 도구를 놓는 위치, 손님의 차제(次第), 물과 불의 사용법 등-은 곧 수행이라는 이름의 상(相)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규칙들은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고, 고정불변의 틀이 되어서도 안 되며, 오직 이 ‘한마음에 상응하여 작용’해야 진정한 차가 되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었다. 여기에서의 마음은 일체유심조의 마음이며, 일체만물의 자성(自性)이자, 마조가 무조작 · 무시비․무취사 · 무범성 등으로 다만 오염만 되지 않으면 평상심이 도라고 한 바로 그 마음이다. ‘한마음에 상응하여 작용한다’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마음 작용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에 계합(卽)하여 일어나는 그 마음에는 시비, 분별, 조작, 취사, 단상 등의 오염이 침범할 틈이 없다. 오직 처처에서 마음에 상응한 작용의 차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순간의 차는 곧 무분별의 차, 무조작의 차, 무범성의 차가 되며, 《선다록(禪茶錄)》에서 리큐의 차를 평한 것처럼 “무빈주(無賓主)의 차노유”가 되는 것이다. 이로써 리큐가 와비를 가리켜 ‘깨달음의 불(佛)세계를 나타내고 불심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 의미는 성립된다.

선은 일체만물에 대한 절대적 평등의 입장에 있다. 일체만물은 불이적(不二的) 관계로 존재하며 그 각각의 본성은 한마음(一心)으로 동등하기 때문이다. 일심과 일미는 다르지 않다. 일심으로 평등하기 때문에 일미, 즉 다선일미가 성립된다. 와비차의 모든 구성요소 손님, 주인, 각각의 도구들은 일심의 본질 세계이자 일심의 형상물이다. 그렇기에 작은 찻잔에조차 최고의 존경을 표할 수 있다. 리큐는 “차노유(茶湯)라는 명칭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차와 탕의 상응이 가장 중요하다. (중략) 다탕(茶湯)이라는 명칭이 깊고 깊은 도리를 담고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고 했다. 리큐가 말하고자 하는 차와 탕의 상응의 도리란 차와 탕의 불이적 관계 속에서 한마음에 상응하여 작용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응의 관계는 차와 탕이 각각의 본질이 일심으로 평등한 것이며,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적 경계를 초월하여 경계가 허물어진 화(和)이며, 진정한 평화를 의미한다.

당시는 오랜 전란으로 인해 무사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모든 이들이 극도의 긴장감과 피로감에 휩싸여 서로에 대한 불신이 만연했던 시대였다. 리큐는 그러한 인간 내면에 와비차를 통해 진정한 평화의 뜻을 심어주고자 했다. 선을 바탕으로 완성된 와비의 정신은 다시 평등 · 평화 정신으로 와비차의 구성요소에 투영되었다. 초암다실(草庵茶室), 노지(露地)정원, 다실로 들어가는 문인 니지리구치(躙口), 다실 내의 장식물 등의 유형적 요소뿐만이 아니라 주인과 손님의 관계, 손님과 손님의 관계, 사람과 도구의 관계 등 일련의 모든 것들이 평등과 평화, 화(和)의 정신이 유형, 무형의 선문화로 창조되었다.

리큐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하에서 신분의 타파, 일체 존재의 평등한 관계 구현을 와비차라는 문화적 접근을 통해 이루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리큐가 고안한 초암다실, 노지정원이라는 공간은 비일상적 공간으로 청정한 불세계를 나타내는 곳을 의미한다. 그러한 깨달음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불성을 가지고 있는 평등한 존재가 된다. 그러한 곳에서 신분의 고하는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리큐는 그러한 평등한 관계를 실현시키기 위해 신분이 높은 사람(貴人)과 하급무사(下人)들이 각각 별도로 사용하도록 구분된 기닌구치(貴人口)와 니지리구치(躙口)를 하나로 통일시켜 동일하게 사용하도록 하였다. 더욱이 낮은 계급이 사용하는 작은 출입문인 니지리구치로 통일시킴으로써 하심과 겸손을 배우도록 했다. 또한 작은 문을 통해 다실에 들어갈 수밖에 없으므로 무사들은 자연스럽게 칼을 풀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다실은 평등과 평화의 공간으로 재창조되었다. 당시는 100여 년 이상의 오랜 전란에 휩싸였던 시기라는 점, 그러므로 무사들의 권력이 최고조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평등, 평화의 시공간을 연출하고 따르도록 했다는 것은 쉽게 간과할 수 없는 리큐의 업적이다. 더구나 리큐는 상인의 신분이었다. 리큐는 선풍의 와비차를 통해 자신의 평등, 평화의 사상을 아무런 마찰 없이 관철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4. 한국과 일본의 정서와 차

1) 일본문화 속의 와비차와 ‘화(和)’

평등과 평화의 리큐의 차 세계는 다선일미, 화경청적(和敬淸寂)의 차 정신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일본 다도의 차 정신으로 표방되고 있다. 다선일미와 화경청적은 ‘화(和)’라는 키워드로 일본문화와 연결된다.
‘화’라는 단어는 조화, 화합을 뜻하는 사전적 의미를 지니지만, ‘일본’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는 일식을 ‘화식(和食)’, 일본 과자를 ‘화과자(和菓子)’, 일본 옷을 ‘화복(和服)’, 일본풍을 ‘화풍(和風)’ 등으로 표현한 용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또한 ‘대화(大和)’라는 단어는 일본 정신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고 있다. 이 ‘화’ 정신의 기원은 6세기 쇼토쿠(聖德) 태자의 17조 헌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쇼토쿠 태자는 일본불교를 중흥시키고 관료제를 정착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로, 불교가 일본에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7조 헌법의 제1조는 ‘화를 귀하게 여길 것’, 제2조는 ‘불교를 숭상할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쇼토쿠 태자가 화를 제1조로 내세우며 강조한 것은 당시 불교의 유입을 두고 숭불파와 배불파의 오랜 정쟁 때문으로, 화합을 중시하여 명기했다고 한다. 불교가 일본에 전래되면서 신도(神道)와의 마찰이 있었고 이는 신불(神佛) 습합의 과정을 거치며 일본의 종교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습합 사상의 밑바탕에는 쇼토쿠 태자의 ‘화’의 정신이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화’란 화합을 의미하는 용어이자, 외래문물을 받아들여 일본화하는 원리이며, 그 자체로 일본, 일본의 정신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화’라는 용어는 와비차의 태동을 알린 무라타 슈코의 〈마음의 글(心の文)〉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 글은 최초의 다도론으로 여겨지며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그 가운데 차 도구와 관련한 내용으로 ‘화(和)와 한(漢)의 경계를 허물어 조화롭게 사용하라’고 한 부분을 볼 수 있다. 이는 당시 귀족풍의 화려한 서원차에서 중국의 차 도구(唐物)만을 귀한 것으로 여기던 경향을 경계한 것으로, 슈코는 중국(漢)의 차 도구와 일본(和)의 차 도구를 잘 조화시켜 사용해야 올바른 와비차가 된다고 한 것이다. 이는 와비차가 내적으로는 마음의 수행을 중시하고, 외적으로는 중국 일변도의 차 도구에서 일본의 것과 조화를 강조하면서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독창적 일본 차문화, 와비차가 탄생되었다. 슈코의 글을 통해서도 화는 일본을 지칭하는 용어이자, 조화(和)를 통한 차문화의 일본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슈코가 화와 한의 차 도구의 조화를 강조하면서 차의 일본화를 열었다면, 리큐는 와비차에 화의 마음, 화의 정신을 심어놓으며 사상적 깊이를 더했다. 리큐의 화는 화합, 조화의 화이자 일체만물의 평등에 입각한 일심의 화를 의미하는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리큐의 화의 마음은 다선일미, 화경청적의 차 정신으로 연결되며, 일본문화를 관통하는 ‘화’의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와비차는 일본의 차문화이다. 와비차가 완성되어가는 과정은 곧 일본이 중국의 문화, 조선의 문화, 선종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일본화하는 과정이다. 그러한 과정 속에 ‘화’의 마음, ‘화’의 정신이 뒷받침하고 있다.

2) 한국 차문화 속의 ‘정(正)’

조선 후기에 서서히 되살아난 음다 풍습은 일제 강점기에 다시 침체되었다. 일부 일본인들에 의해 차의 생산과 보급 등 한국 차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이는 식민지배를 위한 수단이었고 일제의 국익을 위함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한국 차의 확산과 보급, 그리고 차문화 부흥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차문화의 중요성에 주목한 차인들은 특히 초의가 거주했던 일지암(一枝庵)을 복원하면서 도약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였고, 초의의 차 문헌에서 비롯된 ‘중정(中正)’을 한국 차의 정신으로 규정하여 차문화 발전의 기틀을 세웠다.

앞서 살펴보았듯, 한국 차의 정신으로 선포한 ‘중정’은 초의가 내세운 다도의 정의이고 처처에서 참됨[眞]의 구현을 의미했다. 초의가 말한 중, 중정은 중도이자 정도(正道)이다. 다시 말해 중(中)은 올바름[正]이자 참됨[眞]을 뜻하는 것이다. ‘차’의 기원과 관련된 설화 중 대표적인 하나는 달마가 수마(睡魔)를 쫓기 위해 눈꺼풀을 떼어 던졌더니 그 자리에 차나무가 자랐다고 하는 설이다. 이 설화를 통해 차가 수마를 쫓아준다는 각성의 효능을 짐작게 한다. 이러한 효능으로 차는 전통적으로 수행에 도움을 주고 정신을 맑게 해주는 음료로 인식되어 왔다. 그리고 한국의 차는 선사들의 수행에 도움을 주는 음료로, 또한 문인들의 기호에 알맞은 음료로 자리 잡아 왔다. 한국의 차인들은 차의 맑고 곧은 성질에 주목했으며, 그러한 차에 대해 바른 성품, 올곧은 기질을 가졌다며 칭송하는 시를 지었다. 또한 그러한 차의 효능에 주시하여 고려시대 중형주대의(重刑奏對儀)의 의식차로 사용하였고, 다시(茶時)를 통해 공정하고 공평한 판결을 내리기 위한 중요한 매개체로 활용하였다.

역사적으로 강조해 온 차의 효능, 정신을 맑게 하고, 깨어 있게 하며,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참됨을 구현하고자 하는 ‘정(正)’의 실천은 오늘날 한국 차문화에서 주목해야 할 가치이다. 바름, 정, 참됨을 한국 차문화 속에 녹여내고 살리는 것은 차문화를 통해 보급해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5. 나가는 말

연구자가 처음 차를 접했던 시기만 해도 중국의 차는 예(藝)를 중시하여 다예(茶藝)라고 하고, 한국의 차는 예(禮)를 중시하여 다례(茶禮)라 지칭하고, 일본의 경우는 도(道)를 중시하여 다도(茶道)라고 한다고 구분하여 명명했다. 또한 각각의 특성을 살려, 중국의 차는 향(香)을 중요하게 여기고, 한국의 차는 맛[味]을 중시하며, 일본의 차는 색(色)을 중시한다고 각국의 특징을 내세웠다. 그러나 오늘날의 차문화는 그러한 분류가 무색하리만큼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한국의 차문화에서도 초의가 다도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초의보다 앞서 이규보는 시에서 ‘한 잔의 차는 곧 선(禪)’이라고 했으며, 여타의 여러 시, 특히 고려시대의 시 중에는 차와 선을 연결시키는 구절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일본의 차문화에서도 다례의 모습은 헤이안 시대부터 보인다. 궁중에서는 염불하는 승려들에게 인다(引茶)라고 하여 차를 대접하는 의례가 있었으며, 선원에서는 《영평청규》를 바탕으로 하여 선원다례가 행해졌다. 또한 오늘날까지도 국빈을 맞이하는 정부의 의례로 와비차가 행해지는 것을 보면 꼭 다례가 한국 차문화의 특색을 나타낸다고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차가 전래된 직후는 그 약용성에 주목하였고, 이후 의례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은 양국의 차문화의 공통된 전개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의 차문화에서 서로 다른 양상을 극명하게 보이는 것은 16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이는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의 경우, 불교와 더불어 차문화가 융성하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 점차 침체의 길을 걸었다. 이는 국가의 억불정책으로 불교와 명운을 함께한 것이 큰 이유겠으나, 그 외에도 과도한 차 세금과 공납으로 인한 폐해가 컸고, 또한 임진왜란 이후에 더욱 궁핍해진 당시의 생활상으로 인해 차문화는 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에 이른 것이었다. 조선 후기 초의선사에 의해 차문화는 일시적으로 중흥의 모습을 띠기도 하지만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리큐(利休)에 의해 완성된 일본의 차문화는 막부의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더욱 성행하였고 선종의 영향으로 한층 깊이를 더하며 성장하였다. 리큐는 오랜 전란 속에서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평화의 마음을 심어주고자 했다.

평화를 추구하고 구현하고자 한 와비차는 역설적으로 전쟁과 폭력이 난무했던 시기에 성행하였고, 무력과 전쟁을 업으로 하는 무사들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대표적 무사문화로 대두되었다. 반면 한국의 차문화는 문인들의 문화로 일본의 무사문화와 대비될 수 있다. 일본의 차는 전란 속에서 화합과 평등, 평화를 열망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면, 한국의 차는 선승들의 수행을 위한 음료이자 시와 더불어 향유된 문인들의 문화로, 정신을 맑게 하여 올바른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이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정영희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동국대학교 대학원 선학과 졸업(철학박사). 日本茶道 裏千家 전임강사. 주요 논문으로 〈草衣와 利休의 禪茶文化 비교 연구〉 〈대학생의 올바른 목적의식 정립을 위한 선(禪)수행 프로그램 개발 연구〉 〈와비차(侘び茶)의 禪세계 고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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