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절을 가보았지만, 그중 특별히 마음속에 남아 있는 곳이 있다. 웅장한 곳보다는 작은 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오래된 절, 또는 이야기가 있는 절이 오래오래 마음을 차지한다.

전북 완주 경천면에 있는 화암사는 금산사 말사로, 한적한 마을 길을 지나 호젓한 오솔길과 산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야 만나게 되는 조그만 절이다. 산속에 꼭꼭 숨겨져 있어 마치 길이라도 잃어야 우연히 마주칠 것만 같은 곳으로, 신라 진성여왕 3년(694)에 창건하였고 세종 7년(1425)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원효 스님과 의상 스님이 머물렀으며 설총도 한때 이곳에서 공부하였다고 전한다. 화암사 중창비에는 “바위벼랑의 허리에 너비 한 자 정도의 가느다란 길이 있어 그 벼랑을 타고 들어가면 이 절에 이른다. 골짜기는 가히 만 마리 말을 갈무리할 만큼 넓고 바위가 기묘하고 나무는 늙어 깊고도 깊은 성[深廓]이다. 참으로 하늘이 만든 것이요, 땅이 감추어둔 도인의 복된 땅”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주차장에서 절에 오르는 20분 남짓한 동안, 우거진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맑은 계곡에는 작은 폭포들도 여럿 있다. 새순이 올라오고 복수초, 노루귀, 얼레지, 현호색 등 야생화가 만발하는 봄과 단풍 고운 늦가을 정취가 빼어나다. 힘들게 올라온 끝에 작은 다리를 건너 한숨 돌리고 나면 누군가가 숨겨놓은 애인 같은, 민낯의 청순한 화암사가 수줍은 듯 빼꼼히 얼굴을 보여준다. 옛 모습과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화암사는 단청도 퇴색하여 화려하지 않으니 마치 자연과 한 몸처럼 조화롭게 어울린다.

왼쪽으로 돌계단 위의 작은 출입문을 옆에 끼고 꽃비 흩날리는 누각이라는, 어여쁜 이름의 ‘우화루(雨花樓)’가 오래된 절 바깥을 지키고 있다가 맨발로 손님을 마중한다. 우화루는 밖에서 보면 2층이고 안쪽에서 보면 1층으로, 비탈의 자연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건축한 선인들의 세심한 마음 씀씀이를 엿볼 수 있다. 화암사는 가파른 능선이 갑자기 완만해지면서 만들어진 800여 평의 바위 위에 터를 잡았다. 중심은 전면 우화루와 맞은편에는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처마가 긴 하앙식(下昻式) 구조의 극락전, 서쪽의 적묵당, 동쪽의 불명당으로 이루어진 口 자형 작은 중정 구조로 되어 있다.

절 뒤편의 산에 올라 내려다보면 절은 마치 꽃잎의 형상을 띠고 있으니, 화암사는 절 이름에도 꽃이 있고, 꽃비 내리는 우화루가 있어 가히 ‘꽃밭’이라 불러도 좋겠다. 절 마당에서 올려다보면 푸른 하늘만 빼곡하다. 화암사는 일주문도 사천왕문도 없고 찾는 이가 적다 보니 한없이 고적하기만 하다. 고요를 즐기는 이들에게는 이만한 곳이 또 있을까. 고요 속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본래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절까지 이르는 가파른 길은 철재 계단이 놓여 있지만, 옛날엔 난간도 없이 위태롭게 바위벼랑을 타고 올랐다고 한다. 불심 지극한 보살이 공양미 한두 되쯤을 이고 지고 벼랑길을 기어올랐을 텐데. 마음 눈 밝은 이에겐 발자국으로 만든 벼랑길도 환했으리라. 화암사를 아끼는 이들이라면 편리함보다는 불편함 끝에 닿기를 바라며, 또 분단장하지 않은 수더분한 얼굴 그대로를 사랑한다. 기품 있게 나이 들어가는 화암사, 아무에게도 들키지 말라고 이정표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놓고 싶다.

오래전, 처음 수덕사에 갔을 때, 아무런 정보도 없이 갔다가 수덕사와 그 앞 수덕여관을 보고 넋을 잃고 말았다. 절 코앞에 여관이라니. 여관 앞쪽으로는 여인숙도 있었다. 여관은 물론 여인숙도 문을 닫은 지 오래였지만, 온양온천과 더불어 수덕사가 신혼여행지였던 시절이 있었고,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수덕여관에서 묵기도 했다고 한다. 또 한때는 산채정식을 파는 식당으로 사용된 적도 있다고 한다. 세월의 풍상을 다 겪고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숲 속의 여관이라. 뒷마당의 꽃밭을 중심으로 ㄷ 자형의 여관 어느 방에 머물러도, 밤이 되면 수많은 별이 월담하듯 창을 넘어들어올 것만 같다. 그 별들과 만리장성을 쌓을 것만도 같은 낭만적인 곳에서 딱 하룻밤, 아름다운 외박을 꿈꾼다.

수덕여관은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다. 개화기 여성문학가 김일엽이 이혼 후, 만공 스님 문하에서 출가하여 열반할 때까지 수덕사에서 수도승으로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로 신여성의 상징인 나혜석 또한, 이 절을 찾았다. 그녀는 이혼한 후 여성에게만 정조관념을 요구하는 조선 남성들의 사상을 통렬히 비판하고 그림에 몰두했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고, 몸도 마음도 병든 채 전국을 유람하다가 도쿄 유학 시절 인연이 있었던 김일엽을 찾아 수덕사에 오게 되었다. 김일엽을 따라 출가를 원하였으나 만공 스님은 중노릇할 사람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이에 나혜석은 수덕여관에 머물면서 5년 동안 시위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즈음 이응로는 선배이자 스승이며 자유분방한 그녀의 영향을 받아 수덕여관을 자주 찾으며 프랑스 화단에 대한 동경을 키웠다. 그 후 나혜석은 1944년 출가를 포기하고 수덕여관을 떠났고, 이응로는 수덕여관을 사들여 부인 박귀희에게 운영을 맡겼다. 그리고 이응로는 제자 박인경과 함께 파리로 떠났고 1967년 동백림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10년 동안 옥고를 치렀지만, 옥바라지를 했던 박귀희를 두고 다시 프랑스로 떠나 망명했다. 남편의 들고남과 상관없이 제자리를 지키던 박귀희는 2001년 사망할 때까지 여관을 운영했으나, 그가 세상을 떠나자 여관은 영혼이 빠져나간 몸처럼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이응로가 출옥 후 수덕여관에서 잠시 몸을 추스르던 때, 너럭바위에 추상화 기법으로 암각한 작품만이 오롯이 역사의 산증인이 되어 집을 지키고 있다.

큰길보다는 골목길이 더 마음과 발길을 잡아끈다. 사람들은 편리함을 찾아 골목을 버리고 떠났지만, 삶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인 곳, 직선이 아닌 곡선 구석구석엔 사람 냄새가 향기롭다. 시간의 흔적을 더듬거리다 보면 보이는 것 뒤편이 궁금해지고 드러난 이야기의 속편을 상상하게 된다. 화암사도 수덕사도 수덕여관도 오래된 골목 같다. 이름만 들어도 반갑고 안부가 궁금해진다. 내가 짝사랑하는 마음속 절, 그곳에 가면 오래된 시간이 말없이 반기며 그동안 쌓인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 보여줄 것만 같다.


시인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