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여성과 폭력 그리고 불교

1. 들어가는 말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의 시작은 어디인가? 폭력의 범위를 우리는 어떻게 규정하는가? 그리고 폭력은 여성차별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 논문에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주제들을 나열해 보았다. 이 문제를 우리는 불교와 데리다 철학의 비교철학적 관점에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불교의 근본 세계관

1) 비본질론적 철학으로서 불교

대승경전 중 하나인 《능가경(楞伽經, Laṅkâvatāra-sūtra)》에서 붓다는 철학자들은 세계의 근원에 영원불변한 존재자 혹은 본질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세계를 본다고 비판한다. 붓다는 또한 철학자들은 자아에 갇혀서 세계를 자아와 타자를 구별하는 이원론에 근거해서 세상을 본다고 비판한다.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가 산스크리트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능가경》에서 ‘철학자’들이란 당시 붓다 사상의 상대자였던 브라만들을 말한다고 했다. 한역에서는 외도행(外道行)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러한 붓다의 철학자에 대한 비판을 불교는 철학에는 관심이 없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붓다가 비판한 것은 자신의 가르침은 철학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불교는 본질론적이고, 이원론적인 철학과는 다른 세계관을 제시한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초기불교의 주요 경전인 아함경에서 붓다는 자신의 철학을 ‘중도’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붓다는 그의 제자와의 대화에서 “사람들은 세계를 두 극단으로 이해한다. ‘이것이 존재한다’하는 것은 한 극단적인 이해이고,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또 다른 극단이다.”라고 말하며 붓다는 이 두 극단을 넘어서 ‘중도(中道)’를 가르친다고 한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을 넘어선 중간의 존재자는 무엇일까? ‘중도’는 초기불교의 주요한 사상이고, 이는 불교의 주요 개념인 연기(緣起), 무아(無我), 공(空)과 연결되는 개념이다.

붓다의 세계관은 본질론적 사고에 반대하는 비본질론적 철학이다. 즉 존재자는 그 존재가 가지고 있는 고정분별의 본질에 의해 존재하고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와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인(因)과 연(緣)에 의해 존재하고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사상이 현상계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잘 밝혀주는 불교철학 중 하나가 화엄불교다.

2) 화엄불교

화엄불교는 동아시아 불교 사상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한국불교를 이해하는 데에서도 화엄 사상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중국 화엄의 시조로 알려진 두순(杜順, 557~640)은 그의 《화엄오교지관(華嚴五教止觀)》에서 화엄불교가 이해하는 존재의 모습을 인드라망, 혹은 제석천의 그물로 알려진 이미지를 통해 설명한다. 우주를 덮을 만큼 커다란 그물이 하늘에 걸려 있다고 하자. 그 그물의 마디마디에는 투명한 보석이 박혀 있다. 그 보석 하나하나가 존재자 하나하나라고 생각해 보자. 이때 그 보석의 존재는 어떻게 해석되는가? 각 보석은 보석이 반영하는 그물의 다른 모든 존재자의 모습이다. 각각의 보석은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영원한 본질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물 안에 반영된 다른 보석과의 관계가 각 보석의 존재 모습이 되는 것이다.

중국 화엄의 3대 조사로 불리고 있는 법장(Fazang, 法藏, 643~ 712)은 그의 《화엄오교장(華嚴五教章)》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화엄 세계관이 가지고 있는 개별자와 전체에 대해서 논의한다. 법장은 불교에서 개별체의 정체성을 상즉(相卽)과 상입(相入)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예를 들어 1에서 10까지의 열 개 숫자가 세상에 있는 숫자 전체를 나타낸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이 각각의 숫자가 어떻게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 생각해보자. 3을 예로 든다면, 3은 2가 아니고 4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3은 나머지 아홉 숫자와 다른 개별자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3이 3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3이라는 숫자만의 고정불변하는 3이라는 본체가 존재해서가 아니라, 3이 아닌 다른 아홉 숫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3은 3이면서 동시에 3 안에는 다른 아홉 숫자가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한국 화엄의 시조로 알려진 의상(義湘, 625~702)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에서 이를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로 표현한다. ‘개별체가 전체이고 전체는 개별체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 사상을 더 진전시키면 화엄철학의 극치인 ‘먼지 터럭 하나에도 전 세계가 들어 있다.’는 ‘일미진중 함시방(一微塵中 含十方)’이라는 사상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붓다가 왜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중간인 중도를 자신의 가르침의 근본이라고 말했는지 알 수 있다. 3이라는 하나는 3이 아닌 다른 숫자에 의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3은 존재하지만 또한 3은 3이 아니다. 《금강경(金剛經)》에서는 이러한 불교의 논리를 ‘A는 A가 아니다, 따라서 A는 A다’라는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친숙한 상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논리로 존재자의 정체성을 설명한다.

이러한 중도의 사상을 개인의 정체성에 적용하면, 무아(無我)라는 불교의 자아관을 만난다. 자아가 무아라는 것은 물론 각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존재는 각자의 고정불변의 본질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라고 생각하지 않는 많은 요소의 연기적 만남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전혀 다르지만,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철학 세계는 불교적 세계와 맞물려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3. 데리다 철학의 기본 구조

1) 삶의 경험과 철학하기

데리다의 철학은 많은 사람에게 난해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데리다의 철학을 읽으면, 그의 철저한 원문 분석에 그의 창조적 독해력이 가미되어 있는 데리다 특유의 해석을 우리는 만나게 되고, 그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난해한 철학이 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철학을 좀 더 근본적이고 이해될 수도 있는 방법으로 접근해보자. 불교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붓다가 어떻게 왕자의 삶을 살다가 존재에 대한 회의를 통해 궁을 떠나 결국은 깨침을 얻었는지 말한다. 그 깨침의 근본에 고타마 싯다르타가 철저하게 느꼈던 존재함이라는 고통[苦]이 자리하고 있었다. 붓다의 삶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는 단지 그의 전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철학하기는 언제나 우리의 삶의 경험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난해한 철학도 그의 삶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가선다면 우리는 그의 사상을 더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1942년 데리다가 열두 살이던 해에 시작된다. 데리다는 1930년 프랑스령 알제리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어느 날 그는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너는 집에 가거라. 집에 가면 부모님이 설명해 줄 거다.”라는 영문 모를 말을 듣고 학교에서 퇴교를 당하고 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날 그처럼 학교에서 쫓겨난 아이는 데리다만이 아니었다. 그 지역의 유대인 학생들은 모두 쫓겨났다. 설상가상, 그들을 학교에서 쫓아낸 것은 독일의 나치가 아니었다. 자신의 조국인 프랑스 비시정부의 반유대주의에 따라 그들은 학교에서 쫓겨난 것이다.

이 경우에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 문제는 조금 더 복잡하다. 나의 적이 나를 거부한다면 이는 당연한 일이고 그 적과 싸워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를 보호해야 하고 나의 편이 되어야 할 나의 사회가, 나의 조국이 나를 거부한다면, 이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맞서야 하는 것일까?

나중에 데리다는 말했다. 12세 아이가 반유대주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부재이다. 그러나 어른이 된 우리는 우리의 사회가 반유대주의와 같은 차별을 왜 허용하고 있는지, 우리 사회의 무엇이 이러한 배타적인 구조를 정당화하고 있는지 아는가? 데리다는 유대인으로서 학교에서 쫓겨난 12세 때의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철학적 구조를 만들어야 했다고 한다. 그것이 후에 데리다의 해체철학으로 나타난다.

해체철학의 근본에서 우리는 인간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배제의 논리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본다. 데리다의 경우, 그는 프랑스 국민이면서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국민으로서 받아야 할 마땅한 권리에서 배제되었다. 배제의 논리는 한 사회를 중심인과 주변인으로 가르고, 중심인은 자신의 힘을 이용해 주변인으로부터 사회 구성원의 권리를 박탈한다. 데리다는 이를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도 말한다. 프랑스인인 그의 모국어는 물론 프랑스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프랑스어는 진정한 프랑스어로 인정받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은 알제리에서 프랑스어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배제의 원리를 순종하는 사회에서 진정한 프랑스어는 프랑스에서 사용하는 프랑스어도 아니고, 파리에서 사용하는 프랑스어, 즉, 중심인이 사용하는 프랑스어여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모든 구성원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을 수도 있다. 아니면 권리는 차별적으로 행사되지만, 언어는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배제 논리의 깊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숙이 우리의 삶과 생각을 지배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자립성을 확립하기가 힘든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가부장제 사회는 이미 오랫동안 그 사회의 중심인으로 자리를 잡아 온 남성들 중심으로 언어를 사용해왔다. 남녀평등의 이러저러한 법칙과 규칙들이 제정되고 시행된다고 해도, 남성 위주로 형성되어 온 언어 습관, 언어 개념들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인도 출신 학자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되찾았다고 해도, 자신들의 삶의 경험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그들의 삶이 이미 식민지화에 의해 변질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언어문화적 식민지 해방이 식민지 해방이라는 정치 역사적 사건과 동시에 일어날 수 없듯이,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의 해방도 법칙과 규칙의 제정만으로 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가부장적 언어에서 여성의 언어가 새롭게 태어나는 일은 하루 이틀에 이루지는 일일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데리다가 말한 배제의 원리는 유대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배제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논리,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을 배제하고 정당화하는 논리, 백인우월주의 세계가 비(非)백인을 배제하고 정당화하는 논리, 서구 중심의 세계에서 서구사회가 동양을 배제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논리. 배제의 논리는 이처럼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차별과 불평등을 정당화하며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학교에서 쫓겨난 한 아이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 현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불평등의 근원을 말해주는 한 징표가 된다.

2) 차연에 대하여

배제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철학적 근간을 데리다는 서구사회의 현존의 형이상학(la métaphysique de la présence)이라고 부른다. 현존의 형이상학이란 존재하는 것(현존)은 영구불변하고 고정적인 본질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사고를 바탕으로 한다. 붓다가 세계의 기원에 무엇인가 영구불변하는 본질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서 세계를 보는 것을 비판했듯이, 데리다는 서구의 형이상학은 존재자에게 불변의 본질을 부여함으로써 형성되고 유지되어 왔다고 말한다. A라는 것이 세계의 근원에 존재했고, 그리고 A는 A라는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이 가치는 A가 아닌 것과는 전혀 다르며, A가 아닌 것과는 연관되어 있지 않다는 현존의 형이상학은 배제의 논리를 가능하게 하는 이원론을 정당화한다.

데리다는 존재는 고정불변의 정체성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다름(la différence)과 흔적(la trace)의 결과물로 우리가 의미와 가치를 창출한다고 말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데리다는 차연(差延, la différance 혹은 差移라고도 번역)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차연은 불어에서 다름(차이성)과 지연(시간적)을 합해서 만든 용어이다.

예를 들어 서구 철학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있다’라는 개념을 생각해 보자. ‘있다’는 것은 ‘없다’라는 개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안과 밖, 흑과 백도 그렇다. 이원론을 구성하는 양극단은 각각이 독립된 개별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 의해서 의미를 갖게 된다. ‘안’이라는 개념 안에는 이미 ‘밖’이라는 개념이 ‘흔적’으로 남아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데리다의 차연이 불교의 연기와 화엄불교의 상즉/상입의 원리와 맞물려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내가 아님’의 원소들이 내 안에 들어옴으로써 나와 내가 아니라고 믿었던 타자가 서로의 정체성이 성립한다.

화엄불교의 인드라망 비유가 개개 존재의 정체성은 그 개별자가 가지고 있는 영구불변의 성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인연과 원인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하듯, 데리다 역시 서구 철학의 근거였던 존재자가 가지고 있는 고정불변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의미는 이미 다양한 컨텍스트에 의해 형성된다고 말한다.
인드라망의 망은 우리가 존재하는 환경이다. 데리다는 이 존재의 환경을 텍스트라고 말한다. 혹자는 이 텍스트를 단지 우리가 읽는 책이라고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데리다의 텍스트는 단지 책이 아니다. 그의 첫 번째 저서 《그라마톨로지(De la grammatologie)》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에서 데리다는 말한다. “텍스트의 밖은 없다/텍스트 밖에 있는 것은 없다.(Il n’y a pas de hors-texte)” 즉, 모든 존재자와 의미는 (컨)텍스트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컨)텍스트 밖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텍스트의 밖이란 없다. 어떤 존재도 환경과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화엄불교가 말하는 존재의 그물이다. 존재는 이미 연기적으로 존재하며, 이 연기적 세계관의 밖이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데리다는 또한, 존재를 말하기 전에 우리는 흔적부터 말해야 한다고 한다. 데리다의 흔적, 혹은 불교의 연기는 형이상학적 근간처럼 존재자와 결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는 이미 연기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 데리다와 불교: 폭력과 고(苦)

지금까지 우리는 데리다와 불교 사상의 유사한 세계관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붓다는 고정불변의 정체성에 근거한 이원론적 철학을 거부하고, 중도와 연기에 의해 세계를 이해하고, 따라서 자아를 무아로 해석했다. 데리다 역시, 2000년 서구 철학의 근본인 본질론적 형이상학의 한계를 밝히고, 존재와 의미는 차연에 의해 형성되며 고정불변의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고정불변적 정체성이 아닌 연기적 정체성을 주장하는 것이 왜 그리 중요한 것일까? 또한 데리다에게 차연적으로 세계를 보는 것은 왜 중요한가?

데리다 철학의 중심에 배제의 논리가 있다고 우리는 말했다. 배제의 논리는 존재를 위계질서로만 본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갑, 을이라는 개념을 종종 접한다. 갑이 소위 ‘갑질’을 할 때, 갑은 을과 관계를 단지 위계질서로만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갑은 자기보다 위계질서의 하위에 있다고 믿는 을을 자신의 마음대로 휘둘러도 된다고 생각한다. 갑인 나는 나보다 하위에 있는 을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위계질서는 고정불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이라는 숫자가 3 자신이 충족해서 3이라고 생각하고 나머지 숫자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때, 3은 자신의 가치에서 나머지 9개 숫자를 제외, 배제한다. 데리다가 문제 삼고 있는 현존의 형이상학이라는 것이 이처럼 배제의 논리에 의하여 형성된 세계 보기이며 철학이다. 데리다는 배제의 논리의 성격을 폭력이라고 규정한다.

데리다는 앞에서 언급한 책 《그라마톨로지》에서 폭력을 세 단계로 나누어서 말한 바 있다. 첫 단계의 폭력은 언어체계가 포함하고 있는 폭력이다. 그다음 단계는 도덕체계 그리고 법이라는 폭력이다. 그리고 세 번째 단계에 가서야 우리가 흔히 폭력이라고 생각하는 폭행, 겁탈, 전쟁 등 직접적, 물리적 폭력이 나타난다.

언어체계가 폭력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욕설을 하거나 남을 헐뜯는 말을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욕설, 비방 역시 폭력인 것은 분명하다. 최근 인터넷상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는 언어폭력은 분명 데리다가 생각한 언어폭력 중 일부의 더욱 구체적인 모습일 것이다. 데리다는 언어폭력을 가장 원초적 폭력(archi-violence)이라고 말한다. 언어체계 자체가 이미 우리가 현실을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기본 기능은 분리하는 것이다. ‘좋다’와 ‘나쁘다’는 다른 두 단어이다. ‘있다’와 ‘없다’ 역시 서로 다른 두 단어이다. 이 둘을 분리하지 않는다면 언어는 그 작용을 할 수 없다. 문제는 언어의 표현이란 현실의 언어화라는 것을 대부분 우리는 잊고서 언어를 본질화하고, 나아가 언어에 위계적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라는 단어 역시 그렇다. 남자와 여자는 두 다른 단어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단순히 남성과 여성을 지칭하는 표현기호로만 사용되지는 않는다. ‘남자’ 혹은 ‘여자’라는 표현과 더불어 우리는 여자라는 언어기호를 통해 지칭되는 존재자가 가지고 있고,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 속성과 가치관을 동반시킨다. 따라서 한 존재자가 ‘여자’라는 언어 표현을 통해 지칭될 때, 사회적 폭력은 이미 시작된다. ‘여자’라는 표현의 존재자는 정숙하고, 부드럽고, 모성적이어야 하고, 순종적이어야 하고, 남성보다 하위에 있으며, 남성이 자신의 성적 대상으로 축소시킬 수 있는 그런 존재자가 되는 것이다. 한 존재자는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위의 성격만을 가질 수도 없고, 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개인의 존재는 간단히 나열할 수 있는 언어 표현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다중적인 존재의 깊이를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존재의 깊이를 거부하는 이원론적 논리에 근거한 사고방식의 언어체계가 폭력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언어의 폭력은 ‘여자’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남자’라는 언어 기호 역시 위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언어폭력에 드러나 있다. 남자와 여자라는 언어 기호의 폭력의 다른 점은 남자는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중심에 있고 여성은 주변인으로 밀려나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주변인으로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크기는 중심인인 남성에게 가해지는 폭력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언어의 문제는 초기부터 계속적으로 언급되어 왔다. 붓다는 초기 경전에서 언어로는 법(法) 즉, 불교의 가르침, 그리고 현실을 말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언어의 속성은 개별체를 보여주는 것이고, 불교가 말하는 현실은 개별체는 현상적으로만 보면 개별체이지만, 실제로는 모두 맞물려 있는 존재라고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두 번째 폭력의 단계를 데리다는 도덕체계, 법이라고 말한다. 도덕도 법도 모두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를 만든 주체가 있고, 주관은 항상 주관을 주관적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배제의 논리는 생산된 도덕과 법의 근간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원론적 배제의 논리는 우리의 현실에서 폭행, 강간, 전쟁 등 현실적, 구체적 폭력으로 나타난다.

1990년 이후 데리다는 배제의 논리의 폭력성을 《마르크스의 유령들(Spectres de Marx)》 《법의 힘(Force de loi)》 《사형 선고(Le peine de mort)》 등에서 정치 철학적 문제, 법과 폭력의 문제, 그리고 생명의 문제 등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과 동물의 차이, 동물권에 대한 문제를 《야수와 군주(La bête et le souverain)》에서 다루면서 이원론적 세계관의 문제를 확장해 갔다.

데리다의 철학이 배제의 논리와 존재의 맞물림을 통해 분명하게 사회 · 정치 문제를 다루는 데 반해, 불교는 데리다 철학과 세계관이 같으면서도 사회참여에 그리 적극적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2,500년의 역사를 가진 철학이면서 불교는 사회 · 정치 사상 면에서는 많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붓다는 처음부터 자신의 가르침 목적을 분명히 시사한 바 있다. 즉 고통의 해결이다.

데리다는 존재를 자족적인 단위로 이해하는 이원론적 사고와 그 사고의 근간인 배제 논리의 폭력성을 철저히 분석하고 첨예하게 설명함으로써 우리에게 이를 인식시킨다면, 불교는 그 폭력으로 인해 야기되는 ‘고통’과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수행과 자비심을 역설한다.

불교의 가르침의 근본이 되는 사성제(四聖諦)는 고통의 일어남[苦], 고통의 원인[集], 고통의 소멸[滅] 그리고 고통의 소멸을 위한 바른길[道]을 주장한다. 고통의 원인으로 되어 있는 집착은 연기적 세계관을 보지 못하고 붓다가 말한 대로 고정불변의 근본을 상정하고, 이에서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발전시킴으로써 고통을 유발한다. 고통의 소멸을 위한 방법은 불교사를 통해 다양한 양상으로 제시되어 왔다.

데리다 철학은 어떻게 불교적 세계관이 조금 더 첨예하게, 고통의 원인을 일으키는 삶의 구조와 존재의 구조를 밝히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본보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불교철학은 또한 데리다 자신이 밝힌 폭력의 구조에서 어떻게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제시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교철학적 논의는 여성문제에 대한 불교의 위치를 생각할 때 역시 도움이 된다.


5. 데리다, 불교, 여성 그리고 폭력

남녀평등의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흔히 이 문제는 여성에 국한되는 문제라고 묵시적으로 동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성문제를 폭력, 특히 위에서 논의된 광의적 의미의 폭력과 연결시킬 때 우리는 여성문제, 여성과 폭력의 문제가 단지 성(性)에만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소수자의 문제이며, 또한 소수자를 소수자로 만드는 인간 사회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또한 폭력의 결과인 고통[苦]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는 가장 밑바탕에서 보면 고통을 없애고자 하는 종교다. 그리고 고통은 젠더, 사회계급, 권력 유무에 차별 없이 존재한다. 불교가 인간존재의 현실적 위치와 관계없이 고통을 존재의 근본적 문제로 보았다면 불교사에서 역시 남녀차별은 없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는 이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세계의 모든 주요 종교는 가부장적 역사를 유지해 왔다. 그리고 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불교는 존재하는 어느 것에도 고정불변의 본질은 없으며, 모든 것은 연기적으로 생성된다는 것을 근본 가르침으로 삼고 있지만, 불교사의 시작에서부터 불교는 남성 중심주의를 지향해왔다. 비구니들의 승가에서 위치를 오늘 갓 출가한 비구보다도 낮게 보는 비구니들에게만 적용되는 팔경계법(八警戒法)을 만들고 나서야 비구니 승가가 가능했다는 불교사는 불교에서 남녀 불평등의 대표적 예의 하나로 오늘까지 그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불교학자 리타 그로스(Rita Gross)가 그녀의 저서 《가부장제 이후의 불교(Buddhism after Patriarchy)》(1983)에서 말하듯, 어떠한 종교도 구제할 수 없을 만큼 여성차별적일 수는 없다. 우리가 한 종교의 근본 가르침을 직시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이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가르침이 역사 안에서 전개될 때 가부장적으로 변화되었을지라도, 우리는 각 종교의 근본 가르침을 통해 가부장적 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 역시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 불교는 가부장제적 사회제도에 순응해 왔다. 그러나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삶을 사는 모든 존재자의 고통의 원인을 지적해 주고, 그 원인을 제거하는 수행을 통해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데리다와 불교의 비교철학적 관점은 남녀차별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구조의 폭력성을 좀 더 근본적인 뿌리에서부터 살펴볼 수 있게 한다. 남편이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가정폭력은 한 남자의 문제일 뿐 아니라, 나아가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치의 문제이다. 이런 의미에서 남녀차별의 문제는 단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로 국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가 배제의 논리에 의해 사회의 주변인에게 휘두르는 폭력의 모습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소수자의 연대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모두 삶의 어느 한 부분에서는 소수자의 입장에 서 있다. 세계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소수자이다. 자본주의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부의 불균형은 ‘1% 대 99%’라는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을 일으켰다. 상위 1%의 부, 권력, 영향력의 폭력으로 인해 삶을 좌지우지 당하는 99%는 자본주의 중심의 미국 사회가 형성해놓은 소수자이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로 힘의 불균형이 초래하는 폭력은 갑의 을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난다.
힘과 부의 불균형이 야기하는 폭력성만큼 중요한 문제는 우리 개개인이 자신의 소수자 입장에서는 눈을 돌리고, 자신에게 허용되었다고 믿는 미약한 힘을 그러안고 자신보다 힘없는 사람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삶의 형태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상위 1%의 부를 가진 사람 중에도 여성이 있다. 그들 중에도 성적 소수자이거나, 자녀가 성적 소수자인 사람이 있다. 혹은 그들 중에도 백인 중심사회에서 유색인종으로 소수자인 사람이 있다. 권력과 힘을 지향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일 수도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대부분 우리가 소수자의 입장에 있는 위치는 망각하려 하고, 혹은 덮어버리고, 자신이 힘의 중심에 있는 입장만을 강조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당하는 소수인으로서의 불평등과 고통을 자신이 중심에 서 있는 그룹의 다른 소수인에게 힘과 권력의 폭력을 적용함으로써, 힘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하려고 한다.

물론 폭력의 모습은 다양하다. 그리고 그 폭력이 여성에게 가해지는 양상도 다르다. 세계보건기구 조사에 따르면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의 3분의 1이 남편이나 남자친구처럼 친밀한 관계에 있는 남성이 가한 폭력이라고 한다. 이러한 폭력의 모습은 독일계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의 주장을 상기시킨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 of Totalitarianism)》에서 폭력과 권력은 반비례한다고 말한다. 권력을 가진 자가 폭력을 휘두를 것이라는 상식과 달리, 아렌트는 정부 혹은 단체가 붕괴하기 시작하면 그 정부, 단체는 사회 구성원의 일상사에 미치는 힘이 약화되고, 이를 만회하려는 행위가 폭력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남성의 여성에 대한 폭력 또한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는 모습을 띨 수 있다.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성들은 자신의 힘과 권위의 약화를 위장하고 만회하려는 행위로 폭력을 사용한다. 폭력은 힘의 표현인 만큼, 또한 권력 약화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만일 가부장제가 정당한 제도였다면 그 제도는 폭력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부장제의 부당성은 그 사회구조와 사회의 가치관이 여성에게 폭력을 가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여기서 폭력이란 구타와 같은 신체적 폭력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성은 집 밖에 나서지 말고, 사회 정치에 참여할 능력이 없다는 전통적 관념, 그 사고 자체가 여성의 삶을 규제하는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여성을 남성의 성적, 혹은 기쁨을 위한 대상으로 보는 발언에 의한 성희롱적 표현 역시 언어를 통한 폭력일 수밖에 없다. 불교에서는 마음으로, 입으로 그리고 몸으로 업을 짓는다고 말해왔다. 폭력 역시 그러하다. 데리다가 말한 세 단계의 폭력은 그대로 입, 마음/생각, 그리고 몸/신체적 업 짓기와 연결된다.

한국 불교계는 불교적 가르침을 가지고 얼마나 첨예하게 여성문제를 생각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불교 근대화는 19세기 말 이후 한국이 근대화의 길을 시작하면서 한국불교의 거대한 화두였다. 불교계는 승가에 새로운 교육체제의 도입, 도심에 포교당 세우기 등을 통해 새로운 사회에서 불교의 역할을 외쳤다. 한국 불교계의 21세기의 화두는 새로운 서양식 교육의 도입이나 도심 포교당 설립으로 그칠 수 없을 것이다. 현재의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다민족의 다양한 사회, 전 세계가 외치고 있는 다양성을 끌어안는 일을 한국 불교계는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

여성과 폭력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한국 불교계가 현재 한국 사회 그리고 세계가 처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얼마나 절실하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좋은 예라고도 할 수 있다. 아무리 오래된 전통이라도, 팔경계와 같은 차별적 계율은 폭력이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제거되어야 한다. 비구와 비구니 사이의 차별적 대우 역시 폭력이고 수정되어야 할 문제다. 그런 현실적 시정으로부터, 불교계는 또한 2,000년 이상이나 된 불교의 가르침이 어떻게 오늘날 여성과 폭력 문제를 좀 더 근본적인 면에서 바라보게 해주는지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비록 팔경계를 유지해 왔지만, 기원전 5세기의 인류의 삶을 생각한다면, 여성에게 가정에서 해방되어서 종교적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은 여성의 삶에 대한 불교의 획기적인 공헌이었다. 21세기의 불교계는 이와 같은 획기적인 안을 비구니 사회에, 여성 불자들에게, 그리고 우리 사회에 보여줄 수 있는가? 아니면, 가부장제가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의 폭력성을 그대로 방관만 하고 있을 것인가?

불교철학과 서구 철학을 비교 분석한 한국 현대 불교철학자의 한 사람인 백성욱(白性郁, 1897~1981)은 불교철학과 자연과학의 양립성을 주장한 바 있다. 그는 〈큰 것이 작은 것에 들어가는 이치(大入小의 一理)〉(1926)라는 논문에서 불교의 화엄적 사상과 당시 원자물리학 및 천문학의 관련성을 들어 불교와 과학의 상관성을 논의했다. 이러한 사상을 사회사상으로 발전시키며 그는 인간 사회와 개인의 삶은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정신생활(精神生活) 경제생활(經濟生活) 그리고 법률생활(法律生活)이다. 그는 경제생활과 법률생활이 방향감각을 잃으면 물론 사회에 혼돈이 온다. 그러나 정신생활이 방향감각을 잃으면 이는 사회적 억압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 억압의 대표적 양상이 동서양에서 만연한 여성의 억압이라고 주장했다. 정신적 생활의 예로 백성욱은 학문, 예술 그리고 종교를 들고 있다. 즉 법적 폭력, 경제적 폭력에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학문적, 예술적 그리고 종교적 힘을 불교는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1970년대 민중불교가 한국 사회의 경제 · 정치적 현실에서 직접적인 고통의 원인을 보고, 불교의 사회참여의 수위를 높였던 것처럼, 오늘날의 한국불교 역시, 소수자들의 고통을 보고,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불교적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배제의 논리, 폭력의 논리의 부당성을 명확히 말하고 있다. 문제는 한국의 불교계는 불교의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제도화된 불교 안에서 안주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여성문제 그리고 폭력의 문제는 이런 점에서 불교와 현실, 불교와 우리 시대 만남의 첨예한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

 

박진영 
미국 아메리칸대학교(워싱턴 소재) 철학과 교수 · 동양학 프로그램 디렉터. 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학에서 〈불교와 탈근대철학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저서로 Women and Buddhist Philosophy, Buddhism and Postmodernity, 편저로 Makers of Modern Korean Buddhism: Budd-hisms and Deconstructions이 있으며, 역서로 Reflections of a Zen Bu-ddhist Nun: Essays by Zen Master Kim Iryop 등이 있다. 현재 북미한국철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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