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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空), 그리고 한국문화의 지평 / 김익두
[69호] 2017년 03월 02일 (목) 김익두 kimikdu@jbnu.ac.kr

   

김익두 
전북대 공연학과 교수

사발의 냉수도
부셔버리고
빈 그릇만 남겨요
아주 엷은 구름하고도 이별해 버려요.
― 서정주 〈피는 꽃〉 일부

일찍이 미당 서정주 시인은 그의 만년 시 〈피는 꽃〉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사발에 담았던 냉수마저도 부시어 버리고 ‘빈 그릇’만 남기자고.

미당 선생의 이 시를 처음 읽었던 사춘기 무렵엔, 선생의 시는 후기로 갈수록 참 싱거워지고 이 시도 그런 시의 ‘극치’라고 생각했다. 이제 환갑, 진갑이 넘어서 다시 읽으니, 그때 한 생각에 저절로 웃음이 난다. 이 시절, 나는 ‘무엇을 비운다’는 말의 뜻을 몰랐던 것이다. 또, 젊어서 동양화를 볼 때도 나는 늘 생각하곤 했다. “왜 그림을 그리다 말까?” 판소리 소리판에 앉았을 때도 생각했다. “왜 연기를 제대로 하지 않고 하다가 말까?” 이럴 즈음, 《반야심경》을 자주 외웠지만 그 뜻을 온전히 알기 어려웠고, 《님의 침묵》에 관한 송욱 선생의 해설을 읽어보면서도 만해 선생의 시들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실은 지금도 잘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20세기 말부터 서양 사람들은 ‘연기(acting)’라는 것으로부터 ‘공연(performance)’으로 방향을 돌렸다. 서양 사람들이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얽매여 온 ‘연극(theatre)’이라는 서양식의 좁은 개념으로는 전 세계, 특히 동양의 수많은 전통 공연양식들을 포괄해서 다룰 수 없다는 불가피한 반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러한 반성은 20세기 초반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러시아에서 중국 경극을 처음 본 이후, 그리고 앙토냉 아르토가 발리 섬의 무당굿을 본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자각과 함께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 비평이론이 ‘독자 반응비평(reader-response theory)’이다.

여기서부터 서양 사람들도 점차 ‘공연자’뿐만 아니라 ‘청관중’도 생각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러한 반성이 생기기 이전에는 공연이란 공연자가 모두 해내는 것이고, 공연자들이 무대와 청관중을 완벽하게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청관중은 공연장에서 별로 할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저 옴짝달싹 못 하고 죽은 듯이 앉아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로마 이후 지리상의 발견을 거치면서, 서양이 20세기 말까지 전 세계를 지배해온 제국주의 정치패러다임과 깊은 상관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이제 서양 사람들도 공연에서 비우는 방법을 배워 나가게 되었다. 세계문화 양식은 이제 ‘채우는 양식’에서 ‘비우는 양식’으로 점차 변화되어가고 있다. 서양의 그림은 화가가 화면을 모두 채우고, 서양의 공연은 공연자가 무대를 모두 채운다. 그러나 동양의 그림은 그림 일부만 화가가 채우고 나머지는 감상자에게 채우도록 한다. 그리고 동양의 공연, 특히 한국의 전통 공연양식들은 공연자가 일부를 채우고 나머지 부분들은 청관중이 ‘추임새’로 채우도록 한다. 판소리가 그렇고, 탈놀음이 그렇고, 꼭두각시놀음이 그렇다. 이것이 바로 내가 주장해온 ‘비움-채움의 원리’이다.

전 세계 공연예술에서 이 ‘비움-채움의 원리’가 아직도 살아남아 있는 곳은 한국의 전통 공연예술이 거의 유일하다. 이러한 원리는 멀리는 인도의 ‘공(空, 비움)’ 사상에서부터 온 것이다. 장자는 이것을 받아들여 ‘무용(無用)의 용(用)’이라 했다.

이러한 ‘비움-채움의 원리’로부터, ‘상호작용(interaction)’의 ‘관계’가 발생한다. 니스벳은 최근의 연구에서 서양인들이 사물의 구조 내부의 정합성에 밝은 반면, 동양인들은 사물과 그 바깥의 컨텍스트와의 ‘관계’ 속에서 사물을 파악하는 능력이 탁월함을 알아냈다.

21세기 문화는 ‘구조’에서 탈구조 곧 ‘관계’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 한국의 공연문화는 이 관계의 철학을 가장 월등한 지평으로 끌어올린 문화이다. 자크 아탈리는 그의 책 《더 나은 미래》에서 한국을 21세기의 중심국가로 예언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문화 면에서 우리가 이룩해 가지고 있는 철학, 스스로를 일부나마 ‘비움’으로써 다른 타자와의 ‘순리적 상호관계’를 추구할 줄 아는 지구 상의 마지막 민족임을, 그의 예지로 꿰뚫어 본 때문이리라.

삶의 그릇은 그것을 물질로 채울 때 물질을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에서 물질을 비워낼 때, 그 그릇은 비운 만큼, 삶의 체험에서 온 ‘찬란한 의미’로 가득 찰 수 있다.

 

김익두 / 전북대 공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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