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 이 글은 졸고 〈秋史의 간화선 · 대혜종고 · 삼처전심에 대한 비판과 사상사적 의의〉 《선문화연구》 17호(졸저 《禪宗史上 왜곡의 역사와 간화선》 씨아이알, 2015에 수록)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1. 간화선 풍조에 대한 비판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는 자신을 쌍수도인(雙修道人)이라고 칭하였다. 쌍수는 진제와 속제를 함께 닦는다는 것으로 추사는 그러한 자부심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억불정책이 지속된 조선사회였지만 일부 유생이나 사대부들은 불교에 대해 호의적인 사람들이 많았다. 추사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추사는 부친이 향리에 화암사를 짓고, 해인사 중창에 많은 기여를 할 정도로 불교 집안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 그의 독서는 방대한 불경은 물론 불교 사전류(史傳類)에까지 미치고 있었으며, 죽기 며칠 전에는 봉은사에서 삭발 수계하고 비구가 되었다. 그는 평생을 ‘반나절은 독서하고, 반나절은 좌선하는(半日讀書 半日坐禪)’ 수행생활을 지속했다. 그에게 불교는 궁극의 도달점이었다.

그가 살았던 조선 후기의 조선불교는 전반적으로 간화선 풍조가 주류였다. 그러나 간화선 일변도만은 아니었다. 교학도 상당히 깊고 넓게 두루 연찬한 분들이 있었다. 예컨대 해남 대둔사(대흥사)에서 펼쳐진 화엄대강회에는 수백 명이 참가하여 수 개월간 계속될 정도였다. 이 시기에 판각 출판된 불서(佛書)의 종류도 다양하다. 해남 대흥사의 12대 강사 아암혜장(兒庵惠藏, 蓮坡, 1772~1811)의 《능엄경》 해설은 일부만 남아 있지만 매우 심오하고 해박하다. 그의 《논어》에 대한 해설도 그러하다. 이에 대해서는 다산이 크게 상찬할 정도였다. 그는 초의의순(草衣意恂, 1786~1866)과 한 문중의 숙질간이었다. 당대의 지성인 초의와 추사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은 아암의 이른바 ‘백수시(栢樹詩)’가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

麻衣曾不下山扃   승복 입고부터는 산문 밖 나간 적 없건만
慙愧如今道未成   여태껏 도를 이루지 못해 부끄럽기 그지없네
柏樹工夫誰得力   ‘뜰 앞의 백수자’ 화두 공부로 누가 득력했단 말인가?
……

‘뜰 앞의 잣나무(栢樹子)’ 화두에 매진하여 왔지만 투철하지 못한 데 대한 후회를 고백한 이 시는 《아암집(兒庵集)》 〈장춘동잡시(長春洞雜詩)〉에 실려 있다. 이 시는 도성의 일부 사대부 사이에도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뒷날 추사는 연행사로 연경(燕京)에 갔는데 그때 대석학 담계 옹방강(覃溪 翁方綱, 1733~1818)과 완원(阮元, 1764~1849) 등을 만났다. 이때 추사는 이 시와 《주역》 주석서를 보여주었다. 옹방강은 이 시가 자신의 지기(志氣)와 비슷하다고 찬탄하고, 《주역》 주석서에 대해 동방성인이라면서 칭송했다고 전한다. 〈두륜산사리탑기봉안기〉에 따르면 그는 연파혜장(蓮坡惠藏)에게 전해달라며 부처님 진신사리와 자신의 문집, 손수 사경한 《금강경》 등을 추사에게 주었다고 한다. 추사는 귀국하여 연파에게 이를 전하게 되면서 대둔사의 초의와 만남도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후일 대둔사에 진신사리탑이 건립되었다.

‘백수시’가 유명해진 것은 조선 후기 불교계에 간화선 일방주의가 널리 유행한 것에 기인한다. 일부 사대부 사회에서는 불교의 간화선을 비꼬거나 비판했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추사였다. 추사는 화두를 상앙(商鞅)과 이사(李斯)의 술(術)에 빗대었다. 그의 간화선 및 대혜종고(大慧宗杲)에 대한 비판은 대부분 19세 연상인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52)과의 선(禪) 논쟁 과정에서 펼쳐졌다. 백파는 66세 되던 순조 32년(1832) 《선문수경(禪文手鏡)》을 저술하였다. 그 내용은 임제삼구(臨濟三句) 각각에 삼종선(三種禪)과 삼처전심(三處傳心)을 배당시켜 각 선법의 위상(位相)을 평정하는 것, 삼처전심의 살활(殺活) 문제 등이 중심이다. 삼종선은 조사선, 격외선(여래선과 조사선 포함) 및 의리선을 말한다. 대체로 여러 방면의 선법상의 많은 사항을 서로 연관 지어 다중으로 논하기 때문에 대단히 번잡하여 어지럽다.

《선문수경》에 대한 추사의 비평은 대부분 그의 제주도 유배 시기에 초의와의 편지를 통해 이루어졌다. 대개 10개 조 내외의 사항으로 서로 비판하고 답변하는 방식이었다. 이에 앞서 초의는 《산문사변만어(禪門思辨漫語)》를 저술하여 《선문수경》을 비판했다. 초의는 이 저술에서 백파가 삼구(三句)와 삼종선을 각기 어디에 배당시키느냐 하는 사항에 대해 그 잘못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추사는 그러한 사항에 대해서는 거의 논급하지 않고 있다. 그런 것은 논란을 벌일 가치가 없다는 투였다. 그는 초의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름지기 선정에 머무르게, 선정 중에 생각이 들면 삼십방(三十棒)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백파 늙은이의 교회(狡獪)한 수단에 얽히고 감기게 된 모양이구려. 이 늙은이가 역시 강설에는 글에 익숙하여 구해(口海)의 물결이 뒤집힐 지경이나 선리(禪理)에 이르러서는 실로 아직 그 깊고 얕음을 모르고 있는 터요.

이는 백파가 강설의 경력이 많아 강설은 잘하지만, 선리는 아직 요달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그가 실수(實修)에 의한 수증(修證)의 경지에도 자신에 차 있었음을 짐작게 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편지에서는 영남지방에 만행 가려 하는 초의에게 함부로 망동하지 말고 굳건히 초암에서 좌정해야만 좋을 것이라며 강요하듯 말리기도 했다.  

추사는 초의를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도반으로 여겼지만, 선리에 관한 한 초의도 아직 삼처전심과 살활, 대기대용(大機大用)의 낭설, 즉 당시 선불교의 허구 속에 빠져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로 보았다. 초의가 말하는 삼처전심이나 대기대용은 당시 선불교계의 일반적 인식 수준이었고 오래 이어져 온 병통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추사는 그 원인을 ‘선지를 잘 이해하지 못한 때문’이라 하였다. 사실 경론을 통해 대승의 선지를 알게 되면 그러한 낭설들이 허구임을 아는 눈이 생긴다. 여기에 학문적 문헌 고증이 가미되면 더욱 뚜렷해진다. 추사는 당시 학문적 고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수증을 통해 그 허구성을 확신하고 있었다. 

추사는 선 수행자가 화두를 드는 것과 대혜종고의 주장에 대한 신랄한 비판자였다. 그는 그러한 풍조에 대해 마경(魔境) 혹은 흑산귀굴(黑山鬼窟)에 떨어진 것으로 비판하면서 이는 대혜종고에게 농락된 것이라 했다. 선가에서 공안 내지 화두를 전하는 《전등록》의 내용을 보배처럼 여기는 데 대하여, 추사는 이를 조그마한 동네 학교에서 첫 시험에 대비하여 가르치는 역사상식 문제집 정도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 또 《전등록》이란 본래 한때 문호(門戶)를 서로 시비하던 데서 나온 것에 불과한데 금과옥조같이 받들며, 원교(圓敎) 대교(大敎) 위에 두고, 이를 안다고 망령되이 자대(自大)하고 있음을 한탄하기도 했다.

추사가 지적한 이상의 사항들은 현대에는 새 자료 발견과 선종사 연구의 진전된 성과로 이제 거의 공인되다시피 한 내용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불교계는 그러한 비판적 시각을 갖지 못했다. 추사는 불교사 자료를 폭넓게 섭렵하고, 실수(實修) 수증(修證)한 바를 바탕으로 불교계에 상식화된 왜곡된 사실들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갖추고 있었다. 올바른 안목을 갖춘 추사로서는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그의 글에는 도처에 조선불교의 현실과 미래를 염려하는 뜻이 담겨 있다. 백파에 대한 비판이 좋은 예다.

당시 백파는 선교율(禪敎律)의 종장으로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의 높은 위상만큼이나 영향력도 컸다. 하지만 백파의 주장은 왜곡된 선사(禪史)를 그대로 맹신하고, 그를 전제로 전개한 논리였다. 예를 들어 백파는 임제삼구에 삼종선과 삼처전심을 종횡으로 배치시키고 있는데, 삼처전심은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한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또 여래선의 실제 뜻도 《능가경》의 법문에 의하면 의리선(義理禪)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능가경》에서 여래선은 불위(佛位)에서 중생과 보살을 호지(護持)하는 행이다. 그래서 여래만이 행할 수 있는 선을 말한다. 달마선의 전통에서 자주 거론되는 여래청정선은 본래 여래의 자리에 있음을 뚜렷이 알게 되면 무작의(無作意) · 무수지수(無修之修) · 부사(不思) · 절관(絶觀) · 무심(無心) · 무사(無事)의 행이 된다는 것이다. 즉 이미 여래의 자리에 있다고 알고 행하는 까닭에 여래선이라 하는 것이다. 사실 여래위에서의 행을 제외하고는 이보다 더 높은 행이 있을 수 없다. 선종의 조사들은 이러한 행을 하는 까닭에 조사선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조사선은 무슨 격외(格外)의 선을 칭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여래선을 의미한다. 그러나 남종(南宗) 일각에서 여래선을 일러서 문자어언(文字語言)을 빌린 교의를 설하는 의리선으로 격하하고, 선종 조사의 선을 의리선을 넘어선 격외의 선 내지 조사선이라 칭하고 있다. 그리고 간화선이 바로 그러한 조사선이라는 것인데, 이는 실로 터무니없는 낭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추사의 지적이었다.

사실 여래선과 조사선의 도리 내지 선지에 의하면 화두 드는 행은 이치에 어긋난다. 조사선의 선지를 올바로 안다면 화두선을 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방해가 되고, 여러 폐단을 낳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간화선은 남송(南宋) 초 대혜종고에 의해 주창되어 점차 달마선의 전통을 그대로 전수하던 묵조선을 넘어 선종의 주류가 되는 모습으로 진전되었다. 여기에는 대혜종고와 남종선 일각에서 행한 위조와 왜곡이 대중들을 현혹했기 때문이다. 즉 대혜종고는 달마선 전래의 선법을 설하고는 바로 이어 그마저도 버리고 화두를 참구하여 타파하여야 최상궁극의 성취가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래서 화두 참구로 깨우치는 것이 그 이전의 성취자들보다 더 뛰어난 것처럼 인식되었다. 대혜종고를 비롯한 간화선자는 화두를 참구하는 행을 통해서만이 지해(知解)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결정적 문제가 있다. 간화선이 나오기 이전에 성취하였던 분들은 어떻게 지해에서 벗어났다는 것인가! 초기 선종의 선사들 어록을 보면 반드시 경론을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송 대 이후의 선사들은 가능한 한 높은 대접을 받기 위해 경론 인용을 피하였다. 선대(先代) 조사들이 고구정녕하게 최상승의 선지를 설한 뜻도 이해를 못하면서 스스로를 높이기 위해 경론 인용을 회피한 것이니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만연되어 온 것이다. 대승선은 먼저 선지(禪旨) 선리(禪理) 내지 대승의 심의(深義)를 이해하지 않으면 도저히 행할 수 없다. 이는 일단 대승경론의 학습을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야 정법의 정로(正路)가 열리게 된다. 이를 모르면 화두를 들든 무슨 행을 하든 실은 암묵선(暗黙禪)에 지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실은 아직 모르기 때문에 화두를 참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화두를 참구하여 알아지는 것이 아니다.

아암혜장의 ‘백수시’는 당시 선 수행자들의 통렬한 경험담이었다. 거울이 흔들림 없어야 만물을 제대로 비추듯이 무엇을 알려고 하면 거울이 찌그러져서는 실상이 체현되지 못한다. 그래서 진실한 공부는 화두 참구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 부처님 이래 누가 간화선 같은 행을 설하였는가. 간화선이 아닌 법으로 성취하여 왔다. 수십 년 화두 참구하였으나 아직 달마선의 기본 선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예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추사는 특히 그 폐단으로 손상될 후대의 아손(兒孫)들이 크게 걱정된다 하고 있다.

백파의 지견에 대한 추사의 엄준한 비판은 실로 하나의 울부짖음에 가깝다. 속가인으로서 연상의 승가 종장에 대한 그의 비판 태도는 무례하다고 할 정도이다. 이는 당시 불교계와 미래의 후손들에 대한 추사의 염려가 그만큼 컸던 것임을 알게 해준다.

2. 삼처전심의 허구성에 대한 비판

남종의 일각에서 벌인 왜곡과 위조, 조작의 행위는 실로 후인들이 사실을 올바로 인지하는 것을 막아버렸다. 거짓을 진실로 알게 하여 속임수에 빠져 헤어나지를 못하게 했다. 사실 왜곡의 여러 사항 가운데 삼처전심(三處傳心)이 있다. 삼처전심이란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이 연꽃을 드니 가섭이 빙그레 웃었다는 것[拈花微笑], 부처님 열반하시어 관에 모셨는데 먼 여행으로 늦게 도착한 가섭이 관에 이르러 예를 올리니 부처님의 발이 관 밖으로 나왔다는 것[槨示雙趺], 노승이었던 가섭이 만행하고 돌아오니 부처님이 앉아 계신 자리의 반쪽을 나누어 앉게 하였다는 것[分半坐]을 말한다. 선종에서는 이 세 장면이 부처님이 가섭에게 법을 부촉한 증거라는 것이다. 이때 전해진 법은 문자가 아니라 이심전심으로 전해진 것으로 부처님의 골수의 법이라고 한다. 이 이심전심의 선법은 가섭 이후 아난을 거쳐 일인전(一人傳)으로 이어져 당 중기 정도에는 대략 서천이십팔조설(西天二十八祖說)로 정립되었다. 삼처전심의 허구성은 당(唐) 이래 남종에서 나온 사서류 내지 등사류(燈史類), 어록류에 직결되어 있어 그 영향력이 지대하였다.

이 삼처전심설에 대해서는 중국에서 이미 위조설이 지적되어 온 바 있고, 국내에서는 김동화(金東華)가 그것이 “터무니없는 망설”임을 단언하였다. 한편 한기두(韓基斗)는 그 사실성이 희박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선가로서는 무시하지 못할 중대한 사상을 이룩하게 되었다는 점을 들어, 그것이 가탁(假託)된 것이로되 전혀 터무니없는 망설로 엮어졌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는, 다소 애매한 견해를 제기하였다.

그런데 추사는 일찍부터 이 설화에 회의를 품고 거의 사실성을 부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제주 유배 중에 초의에게 보낸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래가 발등을 보였다는 것(槨示雙趺)은 어떤 경에서 보았는가? 매양 《전등록》을 들어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은 우리 속가 사람들의 얕은 견문과 마찬가지라네. 선문에는 그 원본을 찾아본 자가 있을 것 같으니 행여 자세히 살펴내어 새 목사가 들어오는 편에 보내주면 어떠한지요. 심히 바라고 바라외다.

선과 교, 불교사 전반에 해박하였던 추사의 안목으로 보면 삼처전심의 사실성에 의혹이 갈 것은 당연한 일이다. 추사는 ‘곽시쌍부’에 대한 회의심에 불타 바다 건너 초의에게 주위의 승려들에게 수소문해서라도 그 전거를 찾아보아 주기를 당부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모습에서 이미 그 허구성에 심증을 굳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어떤 승려에게 보낸 서신에서 삼처전심의 허구를 거의 확신한 태도로 설파하고 있다.

삼처전심 하였다는 것은 모두 명확한 증거가 없으며, 두 발등을 보였다는 그 일도 적확(的確)한 것이 없으니, 곧 마음으로 억조(臆造)한 것에 불과하다. ……무상(無上)의 법을 대아라한에게 넘겨주었다면 또 가섭 한 사람뿐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삼처에서) 전심하였다는 것은 명확한 증거가 없는 것이다. 또 염화시중의 사안도 혜천(慧泉) 대사 같은 분이 대장경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하나의 정상안(頂上眼)을 가진 사람이 이를 (허구의 일로) 부수어버리지 않았으니 어찌 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추사가 삼처전심을 허구의 것으로 부정하는 근거는 부족한 면이 보이지만 삼처전심의 전거 자체가 지니는 허구성을 아직 확인 못 한 가운데 이루어진 그의 통찰력은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초의는 삼처전심을 허구의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래서 백파가 《선문수경》에서 거론하는 삼처전심의 살활 문제를 열심히 반박하고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삼처전심을 사실의 일로 전제한 가운데 삼처 각각의 살활 적용에 대한 이견 제시였을 뿐이었다. 그러자 추사는 아직 삼처전심의 허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초의를 일깨우기 위해 이런 편지를 썼다.

보내주신 글에서 이른바 삼처전심과 오종(五宗)의 분파 따위도 역시 지난날의 이른바 옛사람의 성어(成語)를 주워 모은 것이 어찌 아니겠소. 이는 다 종잇장 위의 빈말일 뿐, 결코 사(師, 초의)의 마음속에서 터득한 것은 아니니 이는 이른바 구두선이라는 것이오. 사가 다시 또 이와 같이 갈등하여 마지않을 줄은 생각도 못했구려…… 이에 앞서 대략 여러 선백(禪伯)들과 더불어 선을 논할 경우 이를 들어 말을 삼지 않는 이가 없어서 바로 오늘날 총림 중의 한 가지 문면어(文面語)로 되어 있으니 이러한 때문에 근래의 총림이 일패도지(一敗塗地)하여 법당(法幢)을 세울 만한 땅이 없고, 혜등(慧燈)을 이어갈 곳이 없는 거요. 어찌 한탄스럽지 않으리오! 살인 · 활인 · 대기 · 대용이 사의 본래 면목에 무슨 관여가 되기에 그처럼 죽음을 구하느라 겨를을 못 챙기는 꼴이 되는 건지요. 지금 살인 활인을 어느 곳에 베풀고자 하는 건지요. ……이는 다 말세 이래로 선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고인의 성어(成語)에 나아가 입에 나오는 대로 말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차츰차츰 미혹에 빠지고 만 거외다.

대승선 내지 달마선 수행자라고 하면서 선지를 모른다면 그것은 달마선을 하는 것이 아니다. 추사의 지적에 따르면 조선불교의 주된 병폐 가운데 하나가 선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화두선 일변도의 풍조가 주된 요인이 되었다. 일단 선지는 경론을 통해서 이해하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화두만 타파하면 된다 하고 경론 공부를 등한시하는 까닭에 선지가 통해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달마 대사의 《이입사행론》에서 먼저 이입(理入)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암묵선이나 사도(邪道)에 빠지기 쉽다. 먼저 이로(理路)가 열려야 하는 것이다.

삼처전심이 허구라는 것은 현대학자의 연구에 의해 확인된다. 삼처전심의 근거로 제시되는 경전 자체가 위조된 것이거나, 진실한 경문을 거짓으로 확대 해석한 것이다. 먼저 ‘분반좌’의 경우는 《중본기경(中本起經)》 권하 〈대가섭시래품〉 제12(대정장 권4, p.161a) 및 잡아함의 몇 가지 경에 나온다. 또 대승경전으로는 상하 2권 24품본 《대범천왕문불결의경》 권상 〈초회법부촉품〉 제일(만속장 권1, p.419b)에 보인다. 그리고 ‘염화시중’은 위의 《대범천왕문불결의경》 권상 같은 품(만속장 권1, p.418c)에 나온다. 또 동명의 1권 7품본 《대범천왕문불결의경》(만속장 권1, p.442a)에도 나온다. 그리고 ‘곽시쌍부’는 《불반니원경》 권하(대정장 권1, p.174a) 및 《반니원경》 권하(대정장 권1, p.189c)에 나온다.

지면 관계로 자세한 검증 내용을 여기에 옮길 수 없지만 원시경전에 나오는 단편의 기사들은 특별한 법을 부촉하였다는 뜻이 아니다. 위작(僞作)의 대승경론에서는 그 단편의 기사를 크게 확장하면서 여기에 전심(傳心)과 부촉의 사실로 위장하여 포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7품본 《대범천왕문불결의경》 〈염화품〉 제2에서는, 가섭을 제외한 나머지 10대 제자는 심성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심성의 체를 아직 얻지 못하였으며, 심성을 올바로 진실하게 쓰지 못한 까닭에 성불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법화경》에서만 하더라도 10대 제자가 나란히 함께 수기를 받는다. 또한 심성을 중시함은 특히 달마선의 근간이기도 하다. 심성을 먼저 요지(了知)함이 실로 중요하다. 단지 가섭만이 심성을 올바로 믿고 진실하게 썼다는 설은 어디에도 근거가 없는 이 경만의 주장일 뿐이다. 10대 제자 중에서도 사리불과 목련존자는 부처님의 ‘양대 제자’로 칭해졌으며 여타 제자들은 아직 숙사(宿舍)도 없이 지낼 때 오직 양대 제자만이 부처님의 숙소 양옆에 당우를 마련하여 거처할 정도로 대접을 받았다. 부처님을 대신하여 기초과정은 사리불, 상급과정은 목련존자가 각각 맡았다. 양대 제자는 모두 부처님보다 일찍 입적하게 되었지만 이들도 성불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인가.

가섭존자가 부처님 입멸의 자리에서 법을 부촉받은 것은 과거 비바시불로부터 현재 천불에 이르기까지 항상 이어져 온 것이며, 미륵불을 거쳐 최후의 누지불(樓至佛)에 이르기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겁말(劫末)의 중생들은 신심이 열등한 까닭에 가섭에게 법을 부촉받은 증거로서 옷[袈裟]을 주었다고 한다. 선종에서 전의설(傳衣說)의 시작은 하택신회(荷澤神會, 684~758)의 저술부터이지만 그 저술자는 실은 후대 제자이며, 스승의 이름을 빌린 것이다. 전의설은 《육조단경》의 위조된 전의(傳衣) · 도의(盜衣) 사건을 통해 육조혜능이 진실한 6조 전법자 내지 부촉인으로서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 전의의 전통 또한 중당(中唐) 이후 선종의 주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달마 대사가 가사를 전했다는 전의설과 일인전(一人傳)의 전통은 6조 이후 단절되었지만, 그 영향력은 그 후에도 이어졌다. 그런데 인도에서 나온 경전의 이야기가 어째서 중국 8세기 이후 중국 선종이라는 한 종파에서 약속이나 한 듯이 전개되고 있을까.

또 이 경의 같은 단락에서 가섭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을 바로 부촉한다고 하였다. ‘정법안장 열반묘심’은 그야말로 선종에서 이후 전유물처럼 읊조리던 성구인데 어찌해서 오직 가섭에게 부촉한 일을 기술한 곳마다 이 구절이 따라붙는 것인가. 가섭에게 무상정법을 부촉하였다는 것은 40권본 《대반열반경》 권2에 “나에게 있는 모든 무상정법을 모두 마하가섭에게 부촉한다”고한 것이 가장 믿을 만한 전거가 되는 셈이기는 하다. 이 성구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송 대부터인데 특히 간화선자들이 즐겨 쓰던 어구이다. 때문에 대략 북송 후기 연간에 누군가가 이 ‘무상정법’을 ‘정법안장 열반묘심’으로 좀 더 구체화하고, 그 전거를 조작하기 위해 위의 경전들에 이 성구(成句)를 끼워 넣었다고 본다.

그런가 하면 7품본에서는 ‘정법안장 열반묘심’에 바로 이어 ‘불립문자, 교외별전’을 추가하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교외별전’이 중국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이 북송 말인데 어떻게 해서 인도에서 건너온 경전에 이 명구가 그대로 쓰여 있는 것인가. ‘교외별전’이 북송 말의 전적에서 처음 등장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불립문자나 이심전심 등이 처음 쓰인 중당 이전으로 올라가지는 못한다. 요컨대 이 경전에 이 2구가 기재되어 있다는 것은 이 경전이 중국 선종의 누군가에 의해 중당 내지 말기 이후에 위조되어 끼워 넣어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역사를 돌아보면 부처님 입적 당시에 누군가에게 교단을 대표하여 이끌어갈 수 있는 후계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미 사리불과 목련존자의 양대 제자가 입적했기 때문에 가섭존자가 그 적임자로 유촉받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후계자에게 그를 신임하여 믿고 따를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위의 《대반열반경》에서 가섭에게 부촉한다 하고, 부처님을 뒤이어 의지처로 삼도록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과 사정은 하나의 가정이나 사회 국가에서도 평범하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가섭존자 1인 만이 부촉받은 것으로 묘사하면서 그 뜻을 과대 포장하여 가섭만이 미래에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또 그가 유일하게 부촉받은 것은 심성을 올바로 진실하게 쓴 때문이었다는 등으로 위조함으로써 가섭이 여타의 제자와는 다른 특별하고 진실한 수행을 한 때문에 부촉받은 것으로 오인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여타 제자는 잘못되고 엉뚱한 수행을 한 것이란 말인가. 만약 그랬다면 부처님은 왜 그 잘못됨을 진즉 올바로 일깨우지 못한 것인가. 또한 그러한 위조를 통해 가섭이 받은 부촉이 이전의 가르침과는 다른 무언가 특별한 가르침을 받은 것인 양 위장하였다. 선종의 뛰어남과 우월성을 과시하려고 선전하는 모습이지만, 실은 선종 가운데 자파(自派)의 유리를 위해서 행한 것이었다. 이심전심에서 더 나아가 교외별전을 내세우면서 그 근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가섭이 부촉받은 것은 종래의 가르침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확대 선전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 부촉은 단순한 의지처가 되라는 것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 되었다. 이심전심의 부촉을 선전하면서 심성 수행을 기준으로 ‘부촉받음’(가섭)과 ‘부촉받지 못함’(나머지 10대 제자)의 근거로 삼았다. 그 부촉받은 법에 무언가 신비성과 우월성 특별성을 부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법안장 열반묘심’은 그러한 필요성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이를 통해서 이제 가섭은 올바로 심성 수행한 오직 1인이 되었고, 그 법을 이심전심으로 부촉받은 오직 한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다음 대의 오직 1인에게 법을 부촉한다는 전통이 이어져 이십팔조설 등의 전승 계보가 가공 내지 허구의 글로써 저작되게 되었다.

삼처전심 가운데 ‘곽시쌍부’는 위의 2경에는 나오지 않는다. 《불반니원경》 권하(대정장 권1, p.174a) 및 《반니원경》 권하(대정장 권1, p.189c) 등에 처음 나온다. 이 두 경은 거의 같은 내용으로 모두 《열반경》의 여러 이본에 속하는데, 대승의 《열반경》을 대표하는 40권본 《열반경》에는 곽시쌍부의 모습만 전할 뿐 선종과 관련지을 수 있는 어떤 내용도 없다. 더구나 이 일을 가섭이 부촉받은 것으로 부가하여 설명하지도 않고 있다. 단지 《불반니원경》 권상에 “비구승들이 모두 이미 부처님이 교칙(敎敕)한 바를 알았으며, 스승의 법을 받들고 있으니 모두 제자들에게 부촉한다. 모든 제자들은 마땅히 지니고 실천하며 익히도록 하라!”고 하였다. 즉 여러(모든) 제자에게 부촉한다 하였고, 가섭 1인에게만 부촉하였다는 기사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이 여러 제자에게 부촉하였다는 기사 외에 그 어떤 특별한 별개의 부촉을 내린 바가 없다.

삼처전심의 핵심인 가섭 1인에게만 특별히 심법을 전하고 수기하였다는 내용을 모두 담고 있는 《대범천왕문불결의경》(24품본)은 앞에 지적한바, 《열반경》을 바탕으로 하면서 여기에 끼워 넣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경은 경록(經錄)에 보이지 않고, 역자의 이름도 전하지 않고 있어 위조 가능성이 매우 큰 경이다. 단지 선가의 여러 글에 자주 인용되는 《사익범천소문경》(대정장 권15)과는 제명(題名)이 약간 비슷하나 내용과는 무관하다. ‘만속장(卍續藏)’에는 이 경에 관한 약간의 별기(別記)가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본 경의 사본은 3백 년 전부터 일본의 모 사찰에서 비장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출처에 대해서는 감히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으며, 넘겨주신 분이 비장해 온 까닭에 그 내력을 말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으니 더 이상 천착하지 말라고 한다. 또한 이 경의 역자 이름이 없는 것을 괴이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경전이란 세간에 널리 펴기 위해서 편찬하고, 또 널리 펴져야 한다. 그런데 왜 이 경만 유독 오랫동안 궁궐이나 사찰에 비장되고, 공개되지 않았을까.    

이상의 몇 가지 이유에 의거하면 삼처전심의 고사는 위조된 허구의 설화일 뿐이다. 그 위조의 행위는 대략 당 말에서 북송 말 사이 남종에서 나온 여러 등사류(燈史類)와 어록집을 제작 내지 편집한 계통에서 행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추사가 삼처전심의 허구성을 간파하고 주변에 알리고자 한 것은 한국불교사상 대단히 선구적인 쾌거였으며, 그것을 사실로 믿고 보배처럼 떠받들어 온 조선불교계에 큰 경종을 울린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3. 《금강경》 지상주의 비판

중당 이후 심어진 잘못된 인식 가운데 하나가 선문의 뿌리를 《금강경》에 두고 오직 《금강경》을 외치는 《금강경》 제일주의이다. 달마가 2조 혜가에게 《능가경》에 의지하여 공부할 것을 부촉하였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인지되어 왔지만, 중당 이후에는 이러한 사실도 거의 잊히고 오직 《금강경》에만 매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방향 전환을 초래한 데 큰 영향을 끼친 것이 하택신회이다. 그의 법문들은 오직 《금강경》 수지(受持)의 공덕을 찬양하는 내용이 길게 이어진다. 심지어 둔황에서 발견된 자료에는 하택신회의 이름을 저자로 한, 오직 《금강경》을 외치는 문구만으로 이어지는 장문의 글도 있다. 그러나 이는 신회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회의 여러 법문은 수십 종의 대승경론을 인용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그는 《능가경》 《열반경》 《유마경》 《금강경》에 의거해 선지를 해설하고 있다. 따라서 오직 《금강경》만을 외치는 내용의 부분은 하택신회의 이름을 도용하기 위해 끼워 넣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범인은 그의 후대 제자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금강경》도 대승의 핵심 선지를 전하는 소중한 경전이다. 그러나 이 경에는 논리적 설명 부분이 없고, 결론의 내용만 있다. 여타 경론이 여러 방면에서 그 심오한 선지를 이해시키고자 논리적 해설을 하고 있는 것과 다르다. 해설이 빠져 있지만 《금강경》의 장점은 분량이 간단해서 수지 독송하며 지니기에 좋다. 그래서 대중성이 있다. 반면 《능가경》은 풍부한 해설을 갖추고 있지만 번다하고 어려운 교리가 많으며, 분량이 많아 대중성이 적다. 초기 이래 《능가경》의 전통을 이어간 북종에 비해 《금강경》을 내세운 남종이 우세해진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러한 배경도 있다. 그러나 해설이 없고, 오직 《금강경》에만 한정되다 보니 폭넓게 경론의 해설을 통해서 선지를 파악하는 길을 막아버렸다는 병폐가 있다.

《금강경》 제일주의의 문제점을 인식하였던 추사는 백파에게 보낸 〈변망증(辨妄證)〉 제9조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달마가 《능가경》으로서 2조에게 부촉한 것은 천하가 모두 알고 모두 듣는 바이거늘, 《금강경》을 함께 부촉하였다는 것은 어느 글에서 보았으며, 누가 전한 말인가? ……다만 《금강경》만 전했다는 것은 또한 누구의 전설인가? 이것이 운문(雲門)의 말인가, 대혜(大慧)의 말인가? (이것이) 사의 망증(妄證) 제9이다.

추사의 지적대로 사실 《능가경》과 《금강경》의 핵심 선지 중의 하나는 ‘일체 모든 것을 얻을 바 없다(一切法不可得)’이고, 이것은 여타의 대승경론에 공통한다. 단지 《능가경》은 유식과 중관, 여래장 사상 등을 함께 아우르며 더 폭넓고 깊이 설명하고 있지만 《금강경》은 해설 없이 결론의 부분만 있을 뿐이다. 굳이 두 경을 크게 다른 것인 양 구분할 필요가 없다. 다른 사상이나 행법을 설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금강경》 지상주의로 인해 《능가경》은 거의 선불교계에서 도외시되다시피 하였다. 자세한 해설이 없는 《금강경》 위주로 공부하다 보니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하는 자를 보기 드물다. 대승경론 전반에서 《금강경》의 여러 구절들의 깊은 뜻을 자세히 해설하고 있다.

그런데 남종 일각의 전술한 바와 같은 의도적 행위로 후대인들은 위의 백파의 사례와 같이 상당한 오해를 하게 된 것이다. 달마는 2조에게 《능가경》을 전하며, “내가 보건대 중국에 오직 이 경이 있을 뿐이다. 인자(仁者)가 이에 의지하여 행한다면 스스로 증득하고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한 것이 《속고승전》을 비롯한 초기의 여러 자료에 등장한다. 그런데 나중에 《금강경》 독존주의를 내세우는 집단이 달마가 처음 《능가경》과 함께 《금강경》을 2조에게 부촉하였다고 위조하게 된 것이다. 추사의 비판을 받은 백파는 심지어 답신으로 보낸 서신에서 “두 경의 종취(宗趣)가 같아 두 개씩이나 전수할 필요가 없어 《금강경》으로 한 것일 뿐이다”고 했다(위의 ‘妄證 제9’). 백파가 추사의 견해를 부분 수용하면서 변명을 하다 보니, 마침내는 《능가경》 부촉의 사실이 빠져버렸다. 이 분야에 대한 추사의 식견은 정확하다. 

추사는 이렇게 한국불교사상 거의 최초로 삼처전심 고사를 의심하여 조작된 것으로 보고, 대혜종고의 간화선이 불교 정통 내지 달마선 전통의 수행 원리와 선지에 어긋나는 것임을 어떻게 알고 확신하게 되었을까. 추사가 누구로부터 그러한 사실을 얻어들은 바는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는 불교 경론 공부를 통해 스스로 문제점을 파악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사실 불교 경론의 이법(理法)에 의하건대 삼처전심의 진실성에 의구심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간화선의 문제점 또한 전통 내지 정통의 선지를 터득했다면 그런 법이 행해지지도 아니하고 허다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도 자연히 파악된다. 삼처전심의 허구성은 여러 방면에서 제기된다. 단지 그 허구의 작성자도 상당한 식견을 갖춘 자이다. 사이비들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진실의 사항도 넣어야 한다. 그래서 삼처전심에도 상승의 법문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허구를 호도하기 위한 장식에 불과하다. 어두운 사람은 거기에 보이는 그럴듯한 상승의 법문에 속아 넘어가고 만다. 그러나 달마선의 도리가 경론의 선지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초기 선사들은 모두 다종의 경론을 인용하여 그 선지를 설파하고 있다. 경론에서는 과지(果地)를 분명히 설명하고 있고, 인지(因地)에서의 행이란 그 과지에 일치해야 한다. 그래서 먼저 과지에 대한 깨달음 내지 이해가 필요하고, 요구된다[先悟後修]. 그런데 간화선과 같이 그 인지의 행이 과지에 어긋나는데 어떻게 온전한 성취가 이루어지겠는가. 

당 이래의 불교계는 대부분 당대 선승의 어록에 사로잡혀 그것에 휘둘리고, 그것을 붙잡고 씨름하며, 친절한 경론의 가르침은 멀리하였다. 그들이 읊조린 오도송 등의 어록이 경론의 자구를 쓰지 않고, 무슨 말인지 애매모호할수록 최상승의 뛰어난 경지로 평가되었다. 특히 선승들의 그러한 작태는 자신의 명리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추사 당시의 조선에서는 불교 승려사회에 거의 만연되어 있다시피 하였다. 그의 제주 유배 생활 중에도 간화선 한다는 승려들이 제주까지 찾아와서 살활, 대기대용을 장황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추사는 실소를 금하지 못하기도 했다. 추사는 백파에게서 왔다는 어떤 스님을 전사리(顚闍梨) 즉 ‘돌아버린 스님’이라 칭하고 있다.

추사는 조선 후기 불교사회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파악하여 올바른 안목을 제시해주었다. 어느 사회에나 당대의 고질적 문제가 있다. 지성인은 이를 통찰하여 널리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만대 후손까지 그 병폐를 입게 된다. ■

 

박건주 
전남대사학과 강사. 전남대 사학과 졸업(학사, 석사) 성균관대 박사(동양고대사). 성균관대 · 전남대 등 강사, 동국역경원 편집위원, 능가선연구회 지도법사 등 역임. 저 · 역서로 《달마선》 《중국 초기 선종능가선법 연구》 《선종사상 왜곡의 역사와 간화선》 《유생과 정치》 《능가경 역주》 《보리달마론》 《능가사자기》 《하택신회의 어록 역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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