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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는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 전영숙
- 청말민국초 거사집단의 도전과 출가집단의 각성
[69호] 2017년 03월 02일 (목) 전영숙 lanzhi@naver.com

1. 들어가는 말: 중국불교의 발전상을 둘러보며

최근 필자는 대만과 대륙의 불교 현장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는데, 이를 통해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먼저 대만불교의 발전상에 대해서는 주위 여러 사람으로부터 수차례 들은 바 있었기에 별다른 것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현장을 구경하고 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놀라웠다. 세련된 외관과 규모도 그렇지만 사찰 프로그램 중 기복적 요소가 거의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 정말 감탄스러웠다. 재가 봉사자 몇 분과 교류할 기회가 있었는데, 일상에서 언뜻언뜻 풍겨 나오는 인간적 품위와 수행 정진이 몸에 밴 태도는 필자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이런 모습은 꾸며서 되는 일도 아니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은 더욱 아닐 것이다. 억지로 선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근원에서부터 선함과 여유가 흘러나오는 보살의 모습을 보았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이런 분들을 보니 대만불교는 이미 세계를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불광대학교(佛光大學校) 교내 호텔에서 맛본 스님들이 개발한 채식 메뉴 또한 눈과 혀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제 채식식당은 사찰뿐 아니라 시내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타이베이에서는 각자 주머니 사정에 맞게 저가에서 고가까지 각종 채식요리를 두루 즐길 수 있다. 다만 약간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대만불교가 몇몇 고승대덕을 지나치게 우상시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 정도이다.  

한편 대륙불교는 불사를 진행하느라 여념이 없는 듯 보였다. 문화대혁명 때 파괴된 사찰을 복구하고 대형 불상을 세우는 등 엄청난 자본이 불교에 흘러들고 있다. 그래서 혹자는 대륙불교를 외관만 화려하고 내실은 없는 엉터리 불교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대륙불교를 사찰 중심으로 보는 오류에서 기인한다. 현재 대륙불교의 꽃은 재가불자들이 만든 조직이지 사찰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중국에서 거사는 남녀 재가불자를 통칭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재가자 불교를 거사불교라고 부르는데, 오늘날 중국의 재가자 조직 즉 거사림(居士林)은 대도시는 물론 중소도시까지 기본적으로 한 곳 이상이다. 미등록 숫자까지 합치면 현재 대륙의 거사림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구글’이나 ‘바이두’와 같은 포털사이트에 들어가서 한자로 ‘거사림’을 치고 검색해서 건물 외관이나 프로그램을 보면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로 이들 조직의 활동이 활발하다. 이들 중국의 거사 조직은 사찰불교와 대립 관계가 아니라 상호협조적 관계이다. 거사불교 단체는 독립적 불교 수행단체이며 불학 강좌와 수행 등을 자체적으로 진행하지만 필요시 수시로 지도법사를 청해서 의례를 행하거나 사찰과 교류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필자는 대륙에 가서도 전통사찰 중심으로 불교 현황을 둘러보고 온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불교 상품을 ‘관광’하고 온 것이지 ‘체험’하고 온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자료에 의하면 오늘날 중국의 여러 종교 신자 가운데 불교도의 교육 수준이 가장 높다. 2000년대 이후 베이징대학교(北京大學校)나 칭화대학교(清華大學校)와 같은 이른바 중국의 명문대학 수재들이 출가했다는 보도가 심심찮게 나오는 것도 최근의 변화 상황을 엿보게 한다. 중국 대도시의 불교도 화이트칼라 중에는 이른바 ‘거사소조(居士小組)’ 즉 재가자 그룹을 결성하여 사무실이나 아파트에 모여 수행과 업무를 함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신심 있는 불교도 가운데 중국을 이끄는 지도자 그룹의 핵심 인물이 나올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대륙불교는 이제 막 깨어나고 있는 중이다.

오늘날 대륙과 대만의 불교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불과 약 100여 년 전 중국불교는 거의 사라질 뻔했을 정도로 쇠락과 침체를 겪었다. 그러나 뼈아픈 반성과 피땀 어린 노력으로 오늘날 중국의 불교는 전통시대 불교에 조금도 뒤지지 않을 만큼 큰 발전을 이루었다. 앞으로 중국불교의 발전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계기를 만든 것이 청말민국초(淸末民國初) 거사들로부터 일어난 거사불교 운동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도 청말민국초 거사불교 운동을 소개한 연구가 다수 있었다. 필자는 기존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에 주목하면서 동시에 당시 거사불교의 내용적 측면에 대한 부분보다는 이 운동이 시기를 거치며 일구어낸 변주에 관심을 기울이고자 한다. 타락한 출가자에 대한 실망감에서 비롯된 거사불교 운동은 출가자들에게 위기의식을 초래하였고, 이를 계기로 불교를 향한 애정과 불학에 대한 수준을 놓고 거사와 출가자 사이의 자존심 대결이 일어났다. 비록 당사자들이 예기하지 못한 결과였으나, 지속된 상호 간의 도전과 응전 속에서 중국불교는 각성의 계기를 맞이하였다. 출가자가 다시 정신을 차리니 재가자의 불교 소양도 높아져 기복에 기대지 않아도 불교의 인기는 높아질 수 있었던 것이다.

2. 청말민국초 중국 거사불교 운동과 출가자의 각성

정확한 통계를 내기는 어렵지만, 흔히 학자들은 중국 역사상 사찰 수가 가장 많았던 시대를 청나라 말기로 꼽는다. 당시 일개 현(縣) 안에 100~300여 개 불교 사찰이 있었던 기록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찰 수만 많았던 것이 아니다. 당시 나라는 어려웠으나 사찰이 보유한 전답과 물자는 방대했다.

민국 초 서세동점 위기 속에서 신식 교육의 필요성이 대두하였으나 정부는 재원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이에 자연스럽게 눈길을 돌린 것은 사찰과 사찰이 보유한 재산이었다. 정부는 30%만 출가자들의 생계를 위해 남겨 주고 70%는 신교육에 투자하도록 법령을 제정하려고 하였다. 물론 이 아이디어를 낸 관원이 기독교도였고, 그가 불교를 말살할 음흉한 의도에서 이런 방책을 제기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결과는 당시 불교계가 실제로 방대한 공간과 재원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사회적 기여는 거의 없었고, 출가자의 수준은 매우 실망스러운 상태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부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응하고자 불교계는 앞다투어 사찰 내에 승려교육기관을 만들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재산을 지키기 위한 시늉이었을 뿐 실제로 제대로 된 교육을 하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정치와 경제가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고 내부적으로는 이념 갈등과 내전으로 점철되었던 지난 100여 년간의 중국은 역사적으로 참으로 불행한 시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사찰은 경제적으로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기복신앙을 조장하고 있었다.
 
1) 양문회(楊文會)와 거사불교 운동

청말민국초 상당수 지식인은 국가 존망의 위기와 개인의 미래 불확실성 앞에서 일종의 정신적 패닉 상태에 처해 있었다.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선택하던 공부의 길, 즉 열심히 유학을 공부하여 과거에 합격한 후 벼슬자리를 얻어 뜻을 펴겠다는 꿈이 무의미해졌다. 단순히 과거제도가 없어져서 이렇게 방황한 것은 아니었다. 유학적 세계관의 이론적, 현실적 한계성이 분명히 드러났는데 이를 대신할 대안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약한 나라를 강탈하는 서양문명에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여러 시도 끝에 당시 지식인들은 마침내 불교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들은 단순히 불교에서 위안을 찾거나 도피를 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생명 본연의 가치와 사회와 인간에 대한 열린 마음의 이론적 근거를 불교에서 발견하고자 하였다.

중국 불학의 중흥조(中興祖)이자 현대 중국불교 부흥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양문회(楊文會, 1837~1911)는 불교에서 새로운 길을 열어 나간 장본인이다. 혼란한 시대 속에 길을 잃고 방황하던 청년 양문회는 우연히 《대승기신론》을 읽으며 생애 전환의 계기를 발견했다. 그 후 양문회는 불학 공부를 제대로 해보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놀랍게도 주위에서 제대로 된 불경 책조차 찾아보기 어려움을 깨닫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주위에 사찰도 많고 출가자도 많았지만 불교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출가자는 많지 않았으며 상당수가 글자조차 읽을 줄 몰랐다. 그러면서 당시에는 이를 변명할 수 있는 그럴듯한 말이 있었다. ‘지금 이대로가 부처이다.’ ‘문자 외에 별도로 전해 오는 것이 있다.’는 말이 그것이었다. 이에 양문회는 크게 한탄하였다.

근세 이래 승려들은 고루함에 빠져 배움도 없고 기술도 없다. 중국 땅에 불법이 들어온 이래 가장 타락한 시대가 지금이다.

그 후 양문회는 청 정부의 요청으로 영국에 파견되어 근무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경험을 통해 서양문화의 한계를 더욱 여실히 느꼈고, 불교만이 중국과 세계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불교가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불경 책을 다시 유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런던에서 알게 된 일본 승려 난조 후미오(南條文雄, 1849~1927)의 도움을 받아 중국에서 유실된 불학 선장본까지 판각 · 유포하는 등 불교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피눈물 나는 노력을 쏟았다. 1987년 양문회는 마침내 자택 공간까지 희사하여 불경 경판을 새겼으니 이곳이 바로 유명한 금릉각경처(金陵刻經處)이다. 아울러 뜻있는 출가자와 지식인 재가자들을 위해 근대적 불교 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는 불교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바쳤으며, 비용을 아끼기 위해 스스로 탱화를 배우고 조각을 배웠고, 딸의 독신 수행을 보장해 주었다. 또한 죽어서도 경판을 보호하기 위해 금릉각경처에 묻힐 것을 유언하였다. 양문회 덕분에 그동안 기복이나 은둔의 상징으로 오인되던 불교가 긴 잠에서 깨어나 중국 사회에 새로운 길을 열기 시작했다. 중국의 대표적 근대사상가 양계초(梁啓超, 1873~1929)는 “청나라 말기 신지식인들치고 불학과 관계 맺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라고 술회하였다.
 
2) 지나내학원 거사집단의 등장과 출가자집단의 위기의식

1909년 양문회는 금릉각경처에 새로운 불교 교육기관 기원정사를 세웠다. 당시 참가자의 대부분은 당시 내로라하는 재가자 지식인들이었지만 개혁을 지향하는 출가자 중 일부도 그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 중에는 태허(太虛, 1890~1947) 대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기원정사는 경영난을 맞아 1년도 채 되지 않아 문을 닫았고, 양문회는 신해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죽음을 맞았다. 그러자 그의 제자 구양점(歐陽漸, 1871~1943)이 이끄는 2세대 재가불자가 금릉각경처를 이끌게 되었다.

1911년 청나라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바야흐로 민국시대가 도래하자 금릉각경처의 구양점과 몇몇 거사들은 거국적 불교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중국불교회(中國佛敎會)’를 구상했다. 이들은 모임을 이끌 대표자 명단, 회칙, 정부에 대한 건의문을 담아 당시 중화민국 총통 손문(孫文, 1866~1925)에게 서한을 보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면 이 조직을 이끌 대표자들은 재가불자 지식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곧 향후 중국불교계는 거사집단이 이끌 것임을 사실상 선언하는 문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정작 손문 등 중화민국 정부에서는 별다른 이의를 달지 않고 그대로 수용할 뜻을 보였다. 그러나 나중에 출가자들의 반대와 정국 혼란으로 중국불교회 창립 계획은 실패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출가자집단에 엄청난 분노와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을 두고 훗날 태허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민국 초 이증강(李證剛), 구양점 등 7인이 중국불교회를 기획하여 단번에 절과 승려를 말살시키고 거사불교로 대체하고자 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구양점을 중심으로 한 당시 금릉각경처의 지식인 거사집단은 이러한 행동을 멈추기는커녕 더욱 강도 높게 진행하였다. 구양점은 사적인 온갖 어려움이나 금릉각경처 운영의 경제적 어려움 심지어 출가자집단의 갖은 비난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지식인 재가집단 위주의 불교 운동을 하나하나 진행하였다. 그는 스승 양문회의 유언대로 금릉각경처에서 불경의 판각과 유포 사업을 성공적으로 지속시켰을 뿐 아니라 이를 기반으로 현대적 불교 교육과 불교 연구를 진행할 지나내학원(支那內學院)을 설립하여 많은 인재를 배양하였다. 그러면서 구양점은 출가자들을 다음과 같이 공격하였다.

중국 내에 승려 수가 약 백만이나 되지만 이 가운데 불법을 제대로 알고 주지 자리를 감당할 수 있고 비구라 칭해도 부끄럽지 않을 자는 새벽 별만큼이나 드물다. 그 대다수는 유랑하며 놀기나 좋아하는 자들로, 새벽부터 밤까지 밥이나 받아먹는, 진실로 나라의 좀벌레이다. 이들은 그저 사회에 무한한 해만 끼칠 뿐 털끝만치의 도움도 안 된다. 이들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엄정하게 가려내지 않는다면 진실로 새 시대의 크나큰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는 지나내학원 설립 취지에서 “세상에 불법을 알리고, 불법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며, 출가하여 개인적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은 양성하지 않을 것임을 종지로 한다.”고 밝혔다.
이뿐만이 아니다. 구양점은 〈지나내학원 훈석 · 석사 · 벽류(支那內學院院訓釋 · 釋師 · 辟謬)〉에서 거사가 출가자를 대신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선언했으니,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첫째, 오직 출가자만 승려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둘째, 거사를 승려의 부류가 아니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셋째, 거사를 전적으로 속인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넷째, 거사를 복전(福田)이 아니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다섯째, 재가자 중에 스승의 전범이 없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여섯째, 백의의 일반인은 설법을 맡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일곱째, 재가자는 출가자의 계본(戒本)을 볼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여덟째, 출가자는 거사에게 가서 배우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홉째, 출가자는 (재가자에게) 절을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열 번째, 출가자는 거사와 서열을 논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구양점의 이러한 발언은 당시 많은 출가자의 공분을 샀다. 개혁을 지향하던 출가자는 물론 현실적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던 전통적 고승대덕도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큰 분노를 느꼈다. 중국 근대 4대 고승으로 칭송받는 허운(虛雲, 1840~1959) 대사는 “아무리 큰 성취를 이룬 거사라도 스님을 공양할 도리를 알아야 한다(居士成就再大也要懂得供僧)”는 제하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거사들이 아무리 이룬 바가 많고 선업을 지었다고 해도 출가자를 만나면 모두 마땅히 공경해야 한다. 출가자는 부처님의 옷을 입은 자이니 이는 바로 부처님 모습을 형상하는 것이며, 해탈의 형상이다. 우리는 마땅히 해탈자의 형상을 보면 공경해야 한다. ……재가자는 삼보를 대표하지도, 해탈자의 형상을 상징하지도 못한다. 거사들은 결코 오만한 마음을 내면 안 된다. ……재가자들이 삼보를 수호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찰을 당신들이 다 세운 것이 아니며, 사찰에 출가자가 거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해도 당신들은 여전히 삼보를 공경해야 한다. 혹자는 내가 출가자를 공양하니 출가자는 내 덕에 산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출가자의 복보는 부처님께서 준 것이다. 부처님이 이루신 큰 공덕의 아주 작은 부분만으로도 천하 모든 출가자를 다 먹이기에 충분하다. 도리어 거사들이야말로 출가자들이 그대들에게 복보를 주고 있음을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다. 삼보를 공양해야 삼보가 그대들에게 복보를 준다. 돈을 써서 사원을 건립하고 불상을 세우는 일은 재가자 스스로가 스스로의 복보를 기르는 일이다. 따라서 이는 출가자가 재가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이다. 이 점을 (재가자들은) 명확히 알아야 할 것이다.

물론 당시 누구보다 분노와 위기를 절절히 느꼈던 출가자는 태허였다. 구양점은 양문회 문하에서 함께 수학했던 도반이 아니었던가! 이에 태허 등 개혁 의지를 가진 승려들은 분노를 참고 양문회나 구양점의 현대적 불교교학 과정을 참고하면서 현대식 승려교육 체제를 마련하고자 목숨을 바칠 정도로 노력하였다. 태허는 불교협진회를 조직하고 금산사에서 성립대회를 개최하고자 시도하였고, 금산사(金山寺) 총림을 현대식 승려 불학 기관으로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보수파들이 칼과 몽둥이로 무장한 수십 명의 승려를 이끌고 공격하여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구양점과 지나내학원의 이러한 일련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태허는 타락한 기성 불교집단보다 더 위험한 것이 승단을 우습게 보는 엘리트 거사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태허는 금릉의 엘리트 지식인들의 영향력이 거의 미치지 않는 새로운 지역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그는 1922년에 쓰촨(四川) 성 우한(武漢)에 무창불학원(武昌佛學院)을 설립하고, 1927년에는 전봉(轉蓬) 대사가 푸젠(福建) 성 샤먼(厦門)에 세운 민남불학원(閩南佛學院)의 제2대 원장을 맡았으며, 1930년에는 쓰촨 성 충칭(重慶)에 세계불학원 한장교리원(世界佛學苑 漢藏教理院) 등을 세워 현대적 승려 교육에 기념비적 공헌을 하게 되었다. 이들 불학원의 커리큘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부분 지나내학원의 운영 방식을 많이 참고했음을 알 수 있다.

태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상의 불학 교육기관 운영에는 어려움이 많았고 단기간의 운영에 그친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태허가 관여한 교육기관에서 양성된 출가자들은 상대적으로 우수한 불학 지식과 수행을 겸비하였다. 이후 이들 중 상당수가 중일전쟁과 대륙 내전 등 일련의 병란을 피해 홍콩과 대만으로 이주하였고, 이러한 태허의 제자들 덕분에 대만에서 대륙의 인간불교가 활짝 꽃필 수 있었다. 또한 태허는 수행을 목적으로 모인 재가자 모임인 세계불교거사림과 정업사 모임에도 왕래하였다.

그렇다면 구양점은 왜 이렇게 극단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것일까? 과연 구양점은 오만불손한 불교계의 이단인가? 실제로 구양점은 그런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스승 양문회의 유지를 받들어 《유가사지론》 100권 판각의 대업을 완수했을 뿐 아니라, 현대어로 상세한 설명을 붙여서 후학들의 유식 공부에 결정적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당시 그는 당 현장법사 이후 사라진 유식학을 다시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늘날 태허의 제자들이 많이 자리 잡은 대만불교에서는 구양점을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지만 그러한 태도는 객관적이지 못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지금 그의 저술 중 상당 부분이 유실되고 말았지만 현재 전해오는 《유식결택담(唯識決擇談)》 《구양경무내외학(歐陽竟無內外學)》 《장요(藏要)》 등 그가 현대 중국불교에 끼친 불학적 평가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평생을 바쳐 대장경을 현대인이 알아보기 쉽게 요즘 말로 설명을 붙였고, 만년에는 불교 안에서 유학을 회통시키는 작업을 하였다. 또한 난리가 나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피난을 떠났는데 그는 경판 소실을 우려하여 홀로 남아 40여 일을 전쟁 참화 속에서 버티었다. 그 후 몇몇 제자들이 돌아오자 피난 떠나고 주인이 돌아오지 않은 마을의 빈집에 불학연구부를 신설하여 차분히 불법을 강론하니 장내 분위기가 숙연해졌다고 한다. 전쟁의 참화 속에 의지할 바 없던 젊은 인재들이 소문을 듣고 속속 몰려드니 금릉각경처는 불법을 향한 순수 열정으로 가득 찼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구양점이 유독 출가자들을 향하여, 그것도 전국의 출가자들이 볼 수 있도록 출판물을 통해 독설을 퍼부은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어쩌면 그것은 출가자가 구양점을 미워하게 하여 이를 계기로 위기의식과 각성을 유도하고자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한편 구양점은 ‘불교는 종교도 철학도 아니지만 현대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강연을 통해 중국 사회 안에서 불교가 절대적 지위를 점유하게 만들었다. 독서인 출신으로 과거시험에도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했던 그였기에 그의 발언은 많은 지식인이 관심을 가졌다. 구양점은 불교가 종교적 특성과 철학적 특성을 두루 갖추고 있지만 종교와 철학을 넘어서는 위치에 있음을 천명하여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 가슴속에 불교를 최고로 공부할 만한 가치가 있는 분야로 간주하게 하였다. 한편 그는 불학 연구를 제대로 하기 위해 외국어에 능통한 인재 풀을 가동하고 범어, 빠알리어, 티베트어 불전 등을 일일이 대조하여 연구하였다. 중국 근대사상사와 학술사 방면에 큰 성취를 이루었던 양수명(梁漱溟), 웅십력(熊十力), 여징(吕澂), 탕용동(湯用彤) 등, 지나내학원을 거쳐 간 인재들을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만큼 구양점은 많은 인재를 배출해냈다.

3. 다르지만 같은 길: 대만불교의 발전과 대륙불교의 부흥

대륙 공산화 후 대륙에서 불교가 급속히 쇠락했으나 다행히 태허의 제자들이 대만으로 내려가 그 등불이 대만에서 이어져 대만불교 성장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대만불교 성장에 이어 이제는 대륙불교가 빠르게 성장 중이다. 대륙불교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렇다고 대만불교를 그대로 따르지는 않는다. 대만불교는 승단이 중심이 되어 나아가고 있고, 대륙불교는 거사 조직이 중심이 되어 나아가고 있다. 중국불교가 현대사의 여러 악조건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살아남아 발전을 거듭해 가는 데에는 청말민국초의 엘리트 거사들의 도전과 출가자들의 응전 속에서 불교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통렬히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 고승대덕의 등장과 대만불교의 발전

오늘날 대만불교의 발전을 논하면서 태허 대사의 인간불교 사상이 끼친 영향을 거론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교개혁 운동의 선두에 섰던 태허는 해외 불교와의 교류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므로 스리랑카, 라싸 등에 제자를 파견하고 출가자의 능력 배양과 국제 네트워크 구축에도 관심을 가졌다. 한편 중일전쟁과 내전으로 대륙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자 많은 중국인이 동남아로 탈출하여 화교 사회를 형성했는데, 이들 화교들의 요청으로 태허의 제자들 중 상당수가 동남아와 홍콩, 대만으로 진출했다. 이에 따라 오늘날 대만은 물론 동남아 각 지역에서 태허 대사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태허 대사의 문하에서 나온 인순(印順, 1906~2005) 스님은 수행과 학식을 겸비한 대만의 대표적 고승대덕으로 대만불교의 정신적 지주로 일컬어진다. 뿐만 아니라 인순 스님의 제자가 바로 자제공덕회를 이끄는 증엄 스님이다. 한편 불광산사를 이끄는 성운(星雲, 1927~  ) 스님은 금릉각경처가 있던 남경 출신으로, 태허와 함께 불교개혁 운동에 공헌한 자항(慈航, 1893~1954) 스님의 제자이다. 한편 법고산사 성엄(聖嚴, 1931~2009) 스님의 스승인 동초(東初, 1908~1977) 스님도 역시 태허의 제자였다.

1980년대 대만 경제의 급성장과 함께 발전해 온 대만불교는 21세기에 들어와 대만 사회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막강한 힘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최고의 자선, 의료, 재난구제 민간단체로 기능하고 있다. 오늘날 대만 사회에서 불교의 영향력은 정부기관보다 더 강하다고 말할 수도 있으며, 불교 지도자 중 일부는 정치인 못지않은 영향력이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대만불교가 성장할 수 있었던 숨은 동력은 잘 수행된 훌륭한 출가자들이었고, 그러한 출가자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청말민국초부터 대륙 공산화 직전까지 있었던 불교계의 대각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대륙불교 발전의 견인차: 승속평등과 불교거사림(佛敎居士林)

대륙 공산화 이후 대륙불교는 큰 위기를 맞았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중국 정부가 노골적으로 종교 탄압에 들어갔고 사찰 대부분이 파괴되어 대륙에서 불교는 거의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나 최근 조사된 대륙의 종교 현황 자료를 살펴보면 불교 신자가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 대륙이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이후 다른 종교를 멀찌감치 제치고 불교가 가장 빠르게 약진하는 이유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필자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무엇보다 조박초(趙樸初, 1907~2000) 거사의 공로 덕분이다. 누구보다 불교를 사랑했던 그는 청렴과 수행으로 일관하며 일생을 살았다. 대륙 공산화 이후 때로는 공산주의 사상에 불교사상이 결코 저촉되지 않는다는 논리로써, 때로는 이웃 불교국가와의 교류에 불교가 도움을 준다는 논리로써 조박초는 강인한 인내심과 집중력으로 위기 때마다 공산주의 권력자들로부터 불교를 지켜냈다. 그는 중국 최초의 재가자 수행단체 중 하나인 상하이 정업사(‘淨業結社’의 의미) 출신으로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때 불교계의 피난민 구제 사업에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섰던 청년이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그의 사람됨에 큰 신뢰를 표했으며 오늘날 중국불교계에서도 그를 ‘보살’이라 일컫는다.

둘째, 대륙불교계는 승단의 권위의식이 상대적으로 높지 않으며, 출가자와 재가자는 기본적으로 평등한 위치이다. 뿐만 아니라 승려교육에도 경쟁 시스템을 도입하여 출가자의 능력을 객관화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단순히 정치가 종교를 통솔하는 중국 공산당의 지배 시스템 영향 때문만은 아니다. 공산화 이전 거사불교 운동의 영향으로 출가자와 거사 간의 관계에서 전통적 상하 · 수직관계가 많이 사라졌고, 이에 따라 출가자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자연시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2008년부터 시작된 승려 강경대회(講經大會)이다. 작년 가을 8회째에 접어든 강경대회는 말이 강경대회이지 사실상 출가자의 법문 시합이다. 각 불학원과 전국 사찰에서는 이 대회에 출전할 인재를 뽑기 위해 내부적으로 예선대회를 연다. 이렇게 선발된 승려 선수는 다시 지역대회에 나가고, 지역대회에서 선발되면 전국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예를 들어 작년 전국대회는 8월 28일부터 9월 1일까지 산시(山西) 성 오대산(五台山)에서 열렸는데, 전국 25개 성(省)의 사찰과 불학원 예선에서 최종 선발된 30여 명의 젊은 출가자들이 본선에 참가하였다. 대회 진행 방식은 특정 경전과 주제를 미리 주고 법문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방청석에는 1천여 명의 사부대중 방청객이 모여 열띤 응원 속에 대회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모두 7명의 심사위원이 심사를 진행했는데, 심사위원은 출가자와 재가자가 골고루 포함되었다. 이 대회에서 7명이 3등상, 5명이 2등상, 3명이 1등상을 받았다고 한다. 작년에는 대만과 홍콩의 중국불교, 티베트불교, 남방불교의 3대 언어권의 고승대덕 및 각계 대표와 스님이 운집했는데, 특히 대만 불광산사의 스님을 모셔와 시범 법문을 들으며 법문 노하우를 배우기도 했다는 소식을 불교계 언론들은 전했다. 대만 불광산사에서 온 스님은 불법과 현대 심리학 지식을 결합하여 법문하는 요령을 알려주어 청중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는 소식도 함께 전했다.

한편 최근 블로그 스님 스타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점이다. 특히 중국불교회 회장을 맡고 있는 학성(學誠, 1966~ ) 법사, 저장(浙江) 성 일대 스타 스님인 제군(濟群, 1962~ ) 법사, 티베트족 출신 가조활불(加措活佛, 1980 ~ ) 등은 컴퓨터에 능한 블로그 스타로서 블로그를 통해 일대일 상담도 펼치고 있다.
셋째, 개혁개방 후 도시마다 우후죽순처럼 불교거사림 조직이 생겨나고 있고, 빌딩 숲에 불교 공부 소그룹 모임이 만들어지고 있다. 참가자 다수는 중국 사회의 전문가들로서 교육 수준과 문화적 소양이 높고 컴퓨터를 수월하게 다루는 사람들이다. 이 덕분에 최근 다양한 중국불교 사이트가 개설되고 있는데, 매일 올라오는 방대한 자료는 놀라울 정도이다.

청말민국초 거사불교 운동의 영향으로 20세기 초부터 20세기 초 대륙 공산화 직전까지 중국 전역에는 많은 거사불교 조직인 이른바 거사림이 활동하고 있었다. 거사림은 사찰처럼 여러 전통 공간을 만들지 않고 법당과 사무실 등 필수적인 최소한의 공간만 있어도 운영이 가능하다. 또한 도심이나 교통이 편리한 교외에 있어 접근이 용이하였다. 대륙 공산화 후 대부분의 거사림 공간은 지방 정부에 몰수되고 말았으나, 개혁개방 후 중국 정부는 거사림의 재건을 허용하였고, 이에 따라 몰수했던 공간을 되돌려 주거나 그에 상당하는 비용을 마련해 주고 있다. 이에 따라 이전에 있던 거사림은 대부분 복원되었고, 새로운 거사림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대도시와 중소도시의 일부 거사림은 외관과 규모 면에서 사찰에 뒤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거사림은 특정 사찰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임장(林長)을 중심으로 전통사찰보다 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중국은 일반적으로 50세가 되면 정년퇴임을 하기 때문에 퇴임 후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거사림을 중심으로 수행과 불학 공부에 전념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거사림에는 거사림을 이끄는 거사 출신 지도자가 있지만 동시에 지도 스님을 지정해 놓고 지도 스님에게 각종 의례를 부탁하기도 하고 주위 사찰도 수시로 방문하기 때문에 대륙에서 거사 지도자와 출가자, 거사림과 사찰은 기본적으로 경쟁 관계가 아닌 협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1958년 베이징에는 모두 2,666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몇 차례의 정치적 동란을 거치며 사찰 대부분이 파괴되고 말았다. 개혁개방 후 다시 복원되었거나 복원이 진행 중인 사찰은 약 200여 곳 남짓이고, 이 가운데 대외 개방을 하는 곳은 몇십 곳에 불과하다. 더구나 종교장소로서 합법적 허가를 얻은 곳은 20여 곳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베이징 시 인구가 약 2,200만이라고 하는데 이 중 10%를 불교도로 상정할 경우 어림잡아 11만 명의 신자가 있다. 베이징 시내의 사찰 수는 너무도 부족한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거사림과 직장 내 불교 공부 소그룹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다. 특히 직장이나 주민끼리 결성한 불교 소그룹은 주로 화이트칼라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퇴근 후 직장 내 사무실이나 주말에 아파트에 모여 불경을 공부하며 심신의 안정을 얻음은 물론 도시 생활에서 얻기 어려운 강한 귀속감을 갖게 한다. 이들은 특정 경전을 함께 강독하고 해외 유명 스님의 강연을 듣고 필요시 사찰에 자원봉사를 하기도 한다.

4. 맺는말

대만과 대륙의 불교계는 청말민국초 거사불교 운동으로 시작된 불교계의 각성이라는 귀한 자산을 공유하고 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급성장한 대만불교는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 불교 모범의 하나로 간주되는 실정이다. 대만불교의 조직 운영 방식과 잘 배양된 출가자집단은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대만에서는 태허의 출중한 출가자 인재들이 대만에 이주하여 대만불교 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고, 이들 고승대덕으로부터 잘 배양된 대만의 2세대 출가자들은 대만불교는 물론 대륙불교에도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

이제 대륙불교도 깨어나고 있다. 지금 중국 대륙에서는 점차 많은 사람이 금전만능주의에 회의를 느끼고 내면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으며 정부 정책도 여기에 부응하고 있다.

2016년 11월 중국 공산당 중앙일간지 〈인민일보(人民日報)〉 산하 잡지 《인민논단(人民論壇)》에서는 현재 중국 사회에 만연한 10대 병폐를 설문 조사했는데, 조사 결과 ‘신앙 부족으로 인한 도덕적 결핍 상태’가 그중 하나로 꼽혔다. 중국 정부는 공산주의 사상으로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한때 유학에 기대를 걸고 많은 돈을 들여 유학 진흥에 힘써 봤지만 사람들은 도덕과 교훈을 강조하며 매사에 ‘가르치려고만 드는 유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빈자리를 기독교가 메울 수 있을까? 물론 기독교도 부단히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로써는 대륙에서 기독교가 크게 발전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다른 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의 한계와 문화적 이질성 때문에 중국 정부뿐 아니라 대다수 중국인이 기독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륙에서 꽃필 수 있는 종교는 결국 불교일 수밖에 없다.

종교 탄압으로 대륙불교가 30여 년의 세월을 신음했지만 이 또한 어제 일이 되었고 지금 중국에서 불교는 상상을 넘어서는 속도로 빠르게 회생하고 있다. 그런데 대륙불교는 거사들이 주축이 되어 움직인다. 그래서 민국 초에 도시마다 생겨났던 거사림이 다시 복원되거나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고, 직장 내에는 거사 소그룹이 결성되어 참선과 불경 공부가 한창이다. 도시화에 따른 공간의 이동으로 새로운 귀속감이 필요했던 상황에서 대륙의 불자들은 대만과는 달리 거사림을 이용한다. 사찰 공간이 대부분 파괴되었고 출가자 수준이 낮은 것도 그 한 이유이다. 거사림은 전통 방식으로 운영되는 사찰과 달리 필요시 수시로 모임을 만들어 강한 결속력과 함께 수행 중심 도량으로 거듭나고 있다.

최근 복원된 상당수 대륙의 전통사찰이 정부의 의도로 상업적 목적의 ‘관광용’ 사찰로 전락하는 현실 속에서 거사들의 불교 조직은 사회 안정과 시민 성숙도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대륙에서 거사 조직을 이끄는 사람들과 출가자들은 경쟁관계가 아니다. 거사들은 사찰의 봉사자로도 일하기를 즐긴다. 예를 들어 베이징의 거사림 회원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모이는데, 광제사(廣濟寺)와 용천사(龍泉寺)에 나가서 봉사자로서 적극적 활동을 하고 있다.

청말민국초에 난징(南京)에서 시작되었던 거사불교 운동과 출가자의 각성은 오늘날 중국불교의 발전과 미래 중국불교 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그것은 유식학에 대한 전반적 재연구로부터 시작하여 불교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제도, 불교 교육 커리큘럼은 물론 구체적이고 분명한 수행방법론의 개발 등 제 문제가 전반적이고 종합적으로 다루어졌다.

공간적으로 볼 때 난징에서 시작된 불교 각성 운동이 베이징과 허난(河南) 성 일대, 상하이, 항저우, 닝보(寧波) 등의 저장 성 지역과 안후이(安徽) 성 전역으로 확대되었으며, 멀리 쓰촨 성과 푸젠 성을 거쳐 홍콩과 대만으로 퍼져나갔다가 다시 대륙으로 돌아오고 있다. 당분간 중국불교의 미래는 밝다. 왜냐하면 출가자와 재가자를 막론하고 중국의 불교 지도자라면 모두 가슴에 새긴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떠난 불교는 절대로 통하지 못한다는 철저한 각성이 그것이다. ■

 

전영숙
연세대학교 중국연구원 전문연구원.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 박사. 순천향대학교 초빙교수, 대만사범대학교 조교수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대만불교 성장의 숨은 동력〉 〈한국 천생연분 설화의 유형과 특성〉 등과 공저서 《아시아사회의 이해》, 역서 《그저 인간이 되고 싶었다: 중국 근대 사대고승 홍일대사 법문집》, 중문 역서 《한국 영화사 100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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