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한국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삼국시대의 일로,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 전진의 왕 부견(符堅)이 승(僧) 순도(順道)를 시켜 불상과 경문을 보내왔다. 백제는 침류왕(枕流王) 원년(384) 인도 승 마라난타가 중국에서 도래하면서 불교가 전해졌으며, 신라는 5세기 중엽 승 묵호자가 개인적인 포교 활동을 하면서 전래되었다. 불교가 전해지면서 불법승 삼보를 모신 사찰이 건립되었고, 더불어 불교의 사상과 철학을 경관으로 표현한 정원이 조성되었는데, 이러한 건축과 조경은 당시로써는 한반도에서는 보기 어려운 선진적 외래문화였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 전래 초기 단계에서 조성된 사찰정원이 남아 있는 곳은 백제의 고토인 부여의 정림사지와 익산의 미륵사지 그리고 경주의 불국사 정도이다.

정림사지와 미륵사지 유구(遺構)에서는 백제시대에 조성한 방지형식의 쌍지가 남문 전면에서 확인되어 복원되었다. 불국사의 경우에는 발굴 과정에서 청운교 · 백운교 전면에 조성된 구품연지로 보이는 못이 드러났지만, 완전히 발굴하지 못하고 유구를 덮어버려 못의 전모를 파악하지 못하였다. 단지 발굴 과정에서 구품연지의 형식이 백제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방지와는 다른 곡지 형태의 못이라는 것만은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고대 사찰의 정원은 못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백제 사찰에는 방지형 쌍지가, 신라 사찰에는 곡지형 못이 조성되었고, 이러한 사찰의 원지(園池)들은 연지의 기능과 영지의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말여초에 들어서서 선불교가 전해지고 사찰이 산간벽지로 옮겨가면서 사찰정원의 표현 방식이나 전개 양상 또한 고대 사찰의 정원과는 달라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한국 사찰의 정원 가운데에서 선정원(禪庭園)이라는 특별한 양식의 정원이 존재하였다는 연구결과를 찾아볼 수는 없다. 그것은 한국 사찰에서는 선정원이라는 특별한 형식이 없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선정원으로 조성된 정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지금까지 불교계와 건축계 그리고 조경계에서는 한국 사찰에 선정원이 조성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것은 한국의 선찰들이 주로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산자수명한 곳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특별히 선정원을 만들 이유가 없었고, 스님들의 정원관이 담장 안에 인공적으로 정원을 만들어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를 정원으로 생각하는 선심을 가졌기 때문으로 보았다.

특히 조선 시대의 경우에는 불교가 핍박을 받는 환경에서 사치스럽게 정원을 조성할 만한 여유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해왔다. 이러한 생각은 일본의 경우와는 아주 다른 것으로 일본 선찰에서는 일본 고유의 선정원을 창안하여 방장 건물 전면에 적극적으로 조성하는 것과 크게 비교된다.

그러나 최근에 보고된 자료를 통해 살펴보면, 한국 사찰에서도 일반적으로 조성되어 온 사찰정원과는 다른 양식의 정원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일반적인 사찰정원에도 선정원적 개념들이 내재하여 있다는 것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담장 밖의 자연경관을 찾아가거나 그러한 자연경관을 차경하여 정원의 개념을 부여하였다는 사실도 확인되고 있다. 이를 보면 한국의 선찰에 선정원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굳이 선정원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뿐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글에서는 한국 사찰에 조성된 정원의 초기 개념은 어떠한 것이고, 그것은 어떠한 전개 양상을 띠고 나타나는지를 살피는 데 주력하고자 한다. 그것의 내용은 첫째, 선불교 도입 이전과 이후의 정원에서 다른 점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고 둘째, 최근에 한국 사찰에도 선정원이 있었다는 연구결과가 보고되었는데, 그것은 일반적으로 조성되어 온 사찰정원과 어떠한 점에서 차이가 있는지 살필 것이다. 셋째, 선정원의 유형을 몇 가지로 규정하여 한국 사찰의 선정원은 어떠한 유형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확인해보고자 한다.
이 글은 문헌조사와 현지조사 결과를 분석해서 얻어졌으며, 한국 사찰 가운데에서 정원의 형식이 나타나는 전 사찰을 연구대상으로 하였다.

2. 한국의 사찰정원

1) 선불교 도입 이전의 사찰정원

불교의 도입과 더불어 삼국시대에 조성된 사찰정원이 현존하는 곳으로는 백제시대에 지어진 부여 정림사의 정원과 통일신라 시대의 정원 유지인 익산 미륵사의 정원, 그리고 발굴조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진 불국사의 구품연지이다.

발굴조사를 통해 복원된 정림사지의 정원은 중문 전면 진입로 좌우에 조성된 방지(方池)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정림사지 정원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서 중문지 남쪽에서 두 개의 방지를 확인함으로써 이 같은 사실이 밝혀졌다.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두 개의 방지는 남문지에서 남쪽으로 24m 떨어진 곳에 조성되었으며, 폭 2.1m의 중앙통로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나뉘어 있었다. 지당의 크기는 동지(東池)가 동서 15.3m×남북 11m이고, 서지(西池)는 동서 11.2m×남북 11m로 확인되었다. 발굴조사에서는 지당 내부에 연꽃이 심어졌던 사실이 확인되었는데, 퇴적토 속에서 연꽃의 줄기와 잎 등이 흑색으로 탄화된 잔해가 적지 않게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당 이외에 또 다른 정원 시설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림사지의 정원은 동서로 구분된 쌍지를 중심으로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 2년(601)에 용화산(龍華山) 아래의 큰 못을 메우고 그 위에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미륵사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미륵사지의 쌍지는 통일신라 대 초기에 처음 조성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이는 남 회랑지와 같은 조성 시기(716년 이전)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발굴조사 과정에서 미륵사지 못 내부의 검은 유기물층에서 나뭇잎, 마름열매, 연꽃 줄기 등이 퇴적된 것이 확인되어, 미륵사지의 지당은 정림사지의 지당과 마찬가지로 연지의 기능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원 후의 정림사지 동서 연지.

그러나 사찰 뒤의 산봉우리와 미륵사지 석탑이 지당의 수면에 뚜렷하게 비치고 있는 현재의 경관을 볼 때 이 못은 연지의 기능과 더불어 영지의 기능도 더불어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연이 심어져 있었다면, 이러한 영지의 기능이 제약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에 영지의 기능을 위해 못을 조성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편, 발굴조사 시에 동쪽 지당 남 · 북 호안과 서쪽 지당 북쪽 호안에서 왕버드나무 뿌리가 노출되어 지당 주변으로 나무를 심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당과 나무뿌리 이외에는 다른 정원 시설이 발굴되지 않아, 정림사지처럼 지당이 미륵사지의 정원으로 기능하였던 것만 확인할 수 있다.

미륵사지 쌍지의 영지 효과.

미륵사지 쌍지 평면도.
출처: 《미륵사지발굴조사보고서Ⅱ(도판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1996, p.385.

불국사 구품연지(九品蓮池)는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살펴볼 때, 중문(中門)인 자하문으로 올라가는 청운 · 백운교 입구에서 극락전으로 올라가는 연화칠보교 쪽으로 길게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품연지는 정토신앙에서 말하는 구품연대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이 명칭으로 볼 때 이 지당은 연꽃을 심는 연지로서 기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불국사고금창기》에 “가경(嘉慶) 3년(정조 3년) 무오년에 연못의 연잎을 뒤집다”라는 기록이 있어 구품연지에 연을 심었다는 것이 문헌적으로도 확인되고 있다.

 

〈관경십육관변상도〉(고려시대, 일본 지온인 소장) 출처: 《고려불화대전 도록》 국립중앙박물관, 2010, 46쪽.

이렇게 현존하고 있거나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선불교 도입 이전의 한국 사찰에서 나타나는 사찰정원의 형식을 살펴보면, 한국 사찰의 정원은 못을 중심으로 조성되었으며, 못은 주로 연지로서 기능을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지는 말 그대로 연꽃을 심는 못으로 《정토삼부경》에 보이는 보배못[寶池]이 바로 연지이다. 《관무량수경》의 정선 13관중 제5관인 ‘보지관(寶池觀)’의 내용을 보면, 정토의 연지는 8공덕수로 가득 채워져 있고, 칠보로 장엄되어 있으며, 물 가운데에는 60억 가지의 칠보의 연꽃이 피어나고, 이들 연꽃은 모두 크기가 12유순이나 된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한편, 고려 불화 중 관경도(觀經圖) 즉 관무량수경변상도(觀無量壽經變相圖)는 《관무량수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고려시대에 그려진 관무량수경변상도 중 4폭이 일본에 전해지고 있는데, 다이온지(大恩寺) 소장의 관경서품변상도, 지온인(知恩院) 소장의 관경변상도, 사이후쿠지(西福寺) 소장의 관경서품변상도와 관경변상도가 그것이다. 관경변상도에 그려진 보배못은 연꽃이 가득 피어 있는 연지이다. 이러한 연지의 모습은 일본 지온인(知恩院)에 소장된 고려시대(1323년 제작) 〈관경십육관변상도〉에도 확연히 나타난다. 그림을 보면, 상부 누각 위에 하나, 상부 삼존상 좌우에 하나씩 두 개, 중앙 삼존상 좌우에 하나씩 두 개 그리고 하부 아미타불과 협시보살 하단에 3개의 연지가 그려져 있다. 하단에 그려진 연지는 중앙의 것이 상배관 연지이고, 향우측의 것이 중배관 연지, 향좌측의 것이 하배관 연지로 각각 그림의 내용이 다르다. 즉, 중앙의 상배관 연지는 아미타삼존이 상배 왕생자를 맞이하고 있고, 향우측의 중배관 연지는 두 보살이, 향좌측의 하배관 연지는 한 보살이 각각 중배 왕생자와 하배 왕생자를 맞이하고 있어 왕생의 등급에 따라 내용이 달라짐을 보여준다.

중국 항저우 도량사의 방생지.

이렇게 경전상에서 볼 수 있는 연지는 결국 정토를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정토신앙에서 연지는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상징물이다. 중국 사찰의 경우에는 연지라는 명칭보다는 방생지(放生池)라는 명칭을 가진 지당이 많이 보인다. 중국 사찰의 방생지는 주로 사찰의 산문 앞에 조성하는데, 그 크기는 사찰의 면적에 따라 다르다. 이 방생지는 천태산(天台山)의 지자대사(智者大師)가 만들기 시작했으며, 일반적으로 물고기를 놓아주는 곳으로 쓰였다고 한다. 당나라 숙종(肅宗) 건원(乾元) 2년(759)에 황제는 각 사찰에 방생지를 만들도록 하교하여 당시 만든 방생지가 81개가 있었다고 한다. 이 방생지는 한편으로는 연을 심기도 하고, 미기후(微氣候)를 조절하는 기능도 하였으며, 방화수로도 쓰였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선불교 이전에 우리나라 사찰에 조성된 지당은 중국의 방생지가 옮겨진 것으로 보이며, 이곳에 주로 연화를 심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지당에 연꽃을 심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정토사상에 기인한 것으로 보이며, 당시의 사찰정원은 이러한 연지를 중심으로 한 매우 소박한 형식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2) 선불교 도입 이후에 조성된 사찰정원

선불교가 도입되어 선찰이 지어지기 시작하는 고려시대 이후에 조성된 사찰에서 정원의 형식으로 보이는 못이 존재하고 있거나, 있던 것이 없어졌거나, 발굴조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사찰은 봉원사, 전등사, 청평사 문수원, 건봉사, 개심사, 실상사, 선암사, 대흥사, 백련사, 불영사, 통도사, 해인사, 쌍계사 칠불암이 전부이다. 이 가운데에서 조성 연대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대상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확인되는 춘천 청평사 고려선원의 영지와 최근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실상사 못뿐이다. 선암사의 못과 대흥사의 무염지, 통도사의 구룡지와 원형지는 일제강점기에 조성되었거나, 수리 · 개조된 것으로 한국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못의 형식을 온전히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없다. 나머지 사찰들에서 보이는 못들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조성 연대를 알 수 있는 근거는 아무 데서도 찾을 수가 없다.

청평사 고려정원의 영지 평면도.
출처 《청평사 실측조사보고서》 강원대 산업기술연구소, 1984.

복원 후의 청평사 영지.

청평사 고려선원에는 고려시대에 조성한 영지가 남아 있어 사찰정원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청평사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이는 고려 광종 24년(973) 당에서 온 영현선사(永玄禪師)로, 선사는 경운산에 백암선원(白巖禪院)을 창건했다. 그 뒤 문종 23년(1068)에는 춘주도감창사(春州道監倉使)로 부임한 이의(李顗)가 폐허가 된 백암선원의 옛터에 절을 지어 보현원(普賢院)이라 했으며, 선종 6년(1089)에 이의의 아들 이자현이 29세 때 관직을 버리고 입산해 산 이름을 청평산(淸平山)으로, 절 이름을 문수원(文殊院)으로 바꾸고 선도량을 일구었다. 이자현은 입산하여 문수원을 중심으로 청평산 10여 곳에 암, 당, 정, 헌 10여 채를 짓고, 건물 주변을 가꾸고 정원을 조성해 수도도량을 만들었는데, 영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지원도 이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구당집》에 고려 말 나옹(1320~1376)이 이미 조성된 못 주변에 식재를 했다는 것과 보우의 《허웅당집》에서 ‘오래된 연못’이라 칭하고 《청음집》 등에서는 영지를 ‘천년지수’로 표현한 것 등으로 볼 때 이자현이 조성한 선정원의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청평사 영지에 관련된 몇 가지 문헌을 살펴보면, 영지가 어떠한 기능을 하였는지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매월당시집》에 나온 시 〈제청평산세향원남창(題淸平山細香院南窓)〉에는 “네모난 못엔 천 층의 봉우리들이 거꾸로 꽂혀 있고(方塘倒插千層岫)”라 하였고, 구사맹의 《팔곡집》에 실린 〈영지〉라는 시에는 “방형의 거울은 먼 봉우리를 찍어내고(方鏡印遙岑)”라 하였으며, 우담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의 《우담집(愚潭集)》에는 “봉우리와 바위가 깎아지른 듯 서 있고 산의 암자가 영지에 또렷이 비치는 것이 마치 그림과 같다(邊峯巒石壁 山庵到影池中 歷歷如畵)”라고 했다. 이것을 보면 청평사 영지는 그림자를 비추는 못이되 산봉우리 같은 자연적 물상을 끌어와 물에 비치도록 하는 산영지(山影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네팔 룸비니의 마야데비 못(욕지).

인도 바이샬리 아쇼까 석주와 승원 유적지의 욕지.

이러한 영지는 《정토삼부경》에 근거할 때, 인도에서는 욕지(浴池)로 쓰였던 것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파되면서 욕지보다는 영지의 기능이 부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지는 비치는 대상에 따라 불영지(佛影池), 탑영지(塔影池), 산영지(山影池)의 3가지 유형이 있다. 즉, 불, 탑, 산을 비추도록 만든 것이 영지인데, 여기에서 탑과 불은 불교에서 가장 존중하는 대상이고, 산은 전래 민간신앙인 산신신앙을 불교화하는 과정에서 존숭의 대상이 된 토속적 개념의 예배 대상이다. 이러한 불, 탑, 산을 비추도록 만든 영지는 연지와는 분명히 다른 것으로 청평사의 경우를 살필 때 선정원의 한 유형으로 작용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물을 중심으로 조성된 사찰정원이 있는 반면, 꽃이나 나무를 중심으로 조성된 정원도 있다. 특히 한국의 사찰은 경사지에 터를 만들면서 전각의 후면부를 화계(花階)로 정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화계에 키가 높지 않은 철쭉이나 목단과 같은 관목류를 심거나 혹은 작약이나 나리, 국화 등과 같은 초화류를 심어서 정원의 기능을 부여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봉선사 큰법당 후면부의 화계인데, 이 화계는 장대석을 이용해서 3단으로 축조하였다. 화계와 더불어 담장에 붙여서 화오(花塢)라고 부르는 화단 형식의 식재 기반을 만들어 기화이초(奇花異草)를 심기도 하였다.

한편, 지금은 그 자취를 볼 수 없고 문헌상에만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사찰정원에 대한 몇 가지 기록이 전해지고 있어 한국의 사찰정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먼저 김부식이 창건한 관란사(觀瀾寺)의 사찰정원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관란사의 북쪽 산이 초목이 없는 민둥산이었기에 김돈중 등은 인근의 백성들을 모아 소나무[松], 측백나무[柏], 삼나무[杉], 노송나무[檜]를 심고, 기이한 꽃과 풀[奇花異草]을 심었다. 또 단을 쌓아 왕이 머물 방을 만들어 금과 푸른 옥으로 치장하고, 대(臺)와 섬돌은 모두 괴석을 사용하였다(又以寺之北山童無草木, 聚旁近民, 植松栢杉檜奇花異草. 築壇爲御室, 飾以金碧, 臺砌皆用怪石).”

완주 화암사(花巖寺)에 대해서는 “못가에는 창포가 우거져 있고, 섬돌 앞에는 노랑 목단이 활짝 피어 마당과 담을 누렇게 물들이고 있으며, 작약도 붉게 피어 중국 초나라의 미인 서시(西施)를 취하게 하고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수다사(水多寺)의 사찰정원에 대해서는 이규보(李奎報, 1168~ 1241)가 노래한 “그윽한 새가 물을 스쳐가며 푸른 비단을 가르니, 방지를 뒤덮은 연꽃이 살며시 움직이네, 참선하는 마음(禪心)이 원래 스스로 깨끗함을 알려면, 청초한 가을 연꽃이 찬 물결에 솟은 걸 보소”라는 시에서 그 면모를 살필 수 있다.

대흥사(大興寺)는 고려 태조 4년(921) 10월에 오관산(五冠山)에 창건된 사찰이다. 이 사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고려고도징(高麗古都徵)》에 실려 있다. “여름이면 녹음이 우거져 마당을 덮고, 목련이 피어 맑은 향기가 온 고을에 넘치며, 가을이면 붉은 단풍과 황채(黃菜)가 물과 뜰에 아름답게 수놓으니 진가경(眞佳景)이 아닐 수 없다.”

안화사(安和寺)는 고려 태조 13년(930) 8월에 안화선원(安和禪院)으로 창건한 절로, 예종 때 안화사로 재창하였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산허리에 샘이 있는데, 맛이 달고 맑았다. 정자를 이 위에 세우고 그 샘물 이름을 안화천(安和泉)이라 하였으며, 주변에 대나무와 나무를 심었다. 괴석을 배치하여 놀고 쉬며 즐기기에 알맞도록 꾸몄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사찰정원에 대한 기록을 보면, 고려시대의 사찰에도 방지를 만들어 연을 심고, 다양한 수목과 초화류를 도입하였으며, 괴석을 놓아 즐겼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경관이 좋은 곳에는 정자를 짓고, 주변의 경관을 완상하였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이러한 몇 가지 기록 가운데서 특히 선심(禪心)을 연꽃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큰 것으로, 연지가 단순히 정토사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선심을 표현하는 데도 능히 한몫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선불교 도입 이전의 사찰정원과 도입 이후의 사찰정원을 살펴본 결과, 정원은 못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진귀한 수목들과 기화요초를 심고, 심지어는 괴석까지 도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못의 유형은 주로 연지가 많기는 하나 선불교가 도입된 이후에 조성된 선찰의 정원에서도 연지가 도입되고 있다는 사실로 볼 때, 연지가 단정적으로 극락정토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만 보기는 어려운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영지는 기이한 현상을 물에 비치도록 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일반적인 정원의 개념이 아니라 선 사상과의 상관성을 살필 수 있는 정원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3. 한국 사찰에서 발견되는 특별한 형식의 정원

1) 양평 상원사의 정원

《관음현상기》는 조선 초기 양평 상원사의 경관을 읽을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이 자료는 명나라 천순(天順, 세조 7년, 1462) 10월 경인(庚寅, 29일)에 세조가 중궁 세자와 더불어 경기도 지평현(砥平縣, 현 양평군)으로 사냥을 나가서 미지산(彌智山, 현 용문산) 상원사(上院寺)로 행차했을 때, 담화전(曇華殿, 현 대웅전) 상공에서 흰 기운이 백의관세음보살(白衣觀世音菩薩)의 모습으로 화현(化現)하는 모습을 중추원 예문관 대제학 최항이 왕의 명으로 교찬한 기록이다.

《관음현상기》에는 당시의 신이로운 광경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이러한 모습을 화공이 한 장의 그림으로 그려 《관음현상기》 첫 부분에 실었는데, 이것이 바로 〈백의관음화현도〉이다. 이 그림을 보면 조선 초기 효령대군의 보액사찰이었던 상원사의 사찰 배치는 물론 주변 환경 그리고 사찰 내의 다양한 물리적 현상들을 보여주고 있어 조선 초기 산지사찰의 경관성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상원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절로 선찰의 위상을 면면히 이어온 사찰이며, 지금도 경내에 용문선원이 있어 수좌들이 선수행을 하는 곳이다. 따라서 상원사의 공간구성이나 건물의 배치 등을 보면 조선 초기 선찰의 경관을 살필 수 있어 한국의 선(禪) 건축이나 선정원(禪庭園)에 대한 자료를 제공할 가능성을 가진다. 《관음현상기》에 실린 〈백의관음화현도〉를 보면, 당시에 담화전으로 명명된 주법당과 좌우의 건물들이 보이고 마당에 탑이 하나 있다. 이 건물군 좌우와 후면부에는 담장이 둘려 있어 주변과의 경계를 아주 잘 정리하였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입구에는 석축으로 부지를 조성하였고, 계단을 오르면 중문, 행랑채 형식과 유사한 승방, 가운데에는 누각이 있고 마당으로 들어서면 좌우에 당우가 하나씩 보이는데, 이것은 승당이나 선당으로 쓰였던 건물로 추정된다.

〈백의관음화현도〉 원으로 표시된 곳이 암석 주변에 담장을 두른 모습이다.

흥미로운 것은 담화전을 기준으로 바라볼 때, 우측 당우의 후원에는 부도탑이 있고, 좌측 당우의 후원에는 커다란 바위가 보이는데, 바위가 있는 공간을 담장으로 둘러 외부와 격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암석은 크기로 볼 때, 어느 곳에서 의도적으로 옮겨온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그 자리에 오래전부터 있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 바위를 그대로 방치한 것이 아니라, 주변에 담장을 두르고 하나의 경석(景石)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우 사찰정원을 비롯한 어떤 정원에서도 이렇게 자연적인 경물을 정원 요소로 활용하고 있는 곳은 없다. 물론 자연적으로 형성된 암석을 암경으로 차경하거나 그 주변에 인공 요소를 도입하여 경관 요소로 활용하고 있는 경우는 있겠으나, 본래 그 자리에 있었던 자연 요소를 담장을 둘러 의도적으로 경관 요소로 활용하고 있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료안지의 선정원

다이센인의 선정원

이러한 형식은 일견 일본의 선찰에서 볼 수 있는 선정원인 평정고산수 양식의 정원과 유사한 개념으로 보인다. 물론 일본 선찰의 선정원인 고산수 양식의 정원은 특별한 대상, 예를 들면 후지 산이나 세토내해의 섬 등 자연경관이 훌륭한 곳을 모티프로 삼아 축경 양식으로 만드는 것이다. 상원사의 경우와는 정원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기는 하나 돌이나 모래로 만든 형상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상원사의 암석원은 마당에 있던 큰 바위를 하나의 경물로 삼아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특별한 정원 형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조선 초기 상원사에 볼 수 있는 이러한 정원은 일반적인 공간에서 연출하기는 어렵고 선찰에서나 가능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러한 형식의 사찰정원이 혹시 한국 선정원의 한 사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정원이 다른 사찰에서 나타나지 않음을 볼 때, 이것을 선정원의 유형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찰 주변의 거암 등을 차경하여 하나의 차경정원 형식으로 삼은 곳은 여러 곳에 있으므로 이것을 그러한 차경정원과 연결시켜 선정원으로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 일로 보인다. 더불어 이러한 형식의 정원이 가능하였다면, 이것은 지금까지 물을 중심으로 설명되던 사찰정원의 범위를 다른 요소로 확장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확인이 될 것이다.

2) 남원 실상사의 지당

실상사에서는 2014년에 진행된 발굴조사를 통해서 원형 그대로 보존된 고려시대 원지를 확인하였다. 이 고려시대 지당은 천석(川石, 강돌)을 바닥에 촘촘히 깐 타원형에 가까운 독특한 모습을 보이는데, 규모는 전체 폭 8.06m, 높이 48cm 크기의 3단 구조를 가진 원지였다. 발굴조사에서는 이 지당의 입수로와 배수로 그리고 건물터 2동도 확인할 수 있었다. 입수로는 길이 42.6m, 높이 20cm 정도로 형태가 뚜렷했다. 발굴조사 후 관계자들은, 이 지당이 실상사가 선종 사찰이었던 점을 들어 좌선을 마친 수행자의 포행로의 기능을 했으리라는 견해를 밝혔다. 고려시대 불화인 〈관경16관변상도〉에서 연지와 배수로가 확인되고 있어 구품연지와 관련됐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으나 바닥을 방수 처리하여 연꽃을 심을 수 없었다는 점에서 볼 때, 구품연지와의 관련성은 적어 보인다. 그렇다면 지당의 또 다른 유형인 영지로 볼 수도 있겠으나, 아직 이 지당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가 보고되지 않고 있어서 분명한 성격을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고려시대 지당 발굴모습(2014. 6)

지당의 발굴된 모습

3) 송광사 계담정원

송광사는 전남 순천시 송광면 조계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사찰로 우리나라 간화선의 효시인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결사(定慧結社)가 열린 곳이다. 송광사에 대한 지눌의 중창불사는 고려 신종 원년(1198)에 이루어지는데, 이때 사찰의 면모가 일신되었으며, 사찰의 이름이 수선사(修禪寺)로 바뀌고 더불어 산 이름도 조계산으로 바뀌었다. 오늘날의 송광사 공간구성 형식은 고려시대에 있었던 보조국사 지눌의 중창불사 형식이 원형으로 작용하고 있어 선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송광사는 선종에 바탕을 두고 화엄사상을 접하였던 보조국사의 사상에 근거를 두어 공간구성 형식이 결정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송광사 계담과 보 위에 설치한 돌다리와 폭포. 

 

송광사에는 일주문을 지나서 우화각에 이르는 전이공간의 왼편에 계담(溪潭)이 있다. 송광사에 조성된 계담은 우리나라 전통사찰에 있는 몇 개 안 되는 계담 가운데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수경관(水景觀)이 나타나는 곳으로 그야말로 특별한 사찰정원으로 기능하고 있는 곳이다. 이 계담은 송광사의 남쪽으로부터 서쪽으로 휘감아 돌아가는 계류를 막아서 조성한 인공 못으로서 그 위에는 무지개다리 위에 회랑 모양으로 길게 설치한 우화각(羽化閣)이라는 수상누각을 설치하여 놓았다. 이 우화각에 오르면 소동파(蘇東坡)가 〈적벽부(赤壁賦)〉에 쓴 대로 “날개 돋쳐 날아오르는 신선(羽化而登仙)”이 된 기분이 된다.

한편, 계담에는 육감정(六鑑亭)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임경당(臨鏡堂) 건물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서 있다. 여기에서 육감정이란 육근(六根: 眼, 耳, 鼻, 舌, 身, 意)을 고요히 하여 지혜롭게 마음을 비춰보는[鑑] 정자라는 의미일 것이고, 임경당 역시 거울 같은 물가에 임한 집이라는 뜻일 것이니 송광사 계담은 가시적인 현상만 비치는 영지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까지도 비쳐 볼 수 있는 의미를 내재하고 있는 수경관 요소이다. 이러한 송광사 계담에 대한 의미부여는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이러한 정원이 곧 한국 선찰의 한 유형이 될 수도 있겠다. 

4. 한국 사찰에서 발견되는 선정원의 유형

1) 선심정원(禪心庭園)

한국에 조성된 일반적인 사찰정원은 못을 중심으로 조성한 정원으로 그 유형은 연을 심는 연지와 그림자를 비치는 영지이다. 연지는 일반적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대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꽃 자체가 선심의 상징적 표현이기도 하다. 한편, 영지에는 불, 탑, 산의 그림자만이 비치는 것이 아니라, 사찰 주변의 다양한 물상이 비친다. 송광사 계담은 계류를 막아 만든 담(潭)으로, 이 계담 역시 영지로서 기능을 가진다. 전술한 바와 같이 송광사 계담이 사람의 마음까지 비치도록 하는 영지라면 이것은 다분히 선적인 개념의 지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아름다운 꽃이나 푸른 소나무, 느티나무와 같은 나무들을 심어 오감을 통해 그것들과 소통할 수 있다면 이것 역시 선정원으로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선당(禪堂)의 섬돌 아래 피어난 한 송이 꽃의 아름다운 모습, 선당 뒷산의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화오(花塢)나 화계에 심은 매화나무의 향기, 선당 뒤뜰에 심은 감나무에서 딴 감의 맛, 꽃이나 열매 혹은 나무줄기의 감촉 등이야말로 선심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고 선심을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이러한 정원은 봉정사 영선암 중정에서 살필 수 있다. 본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암반과 그 암반에서 자연스럽게 자라고 있는 소나무 그리고 그러한 물상들이 잘 드러나도록 배치한 법당과 승당의 조화야말로 영선암의 중정에서 발견되는 선정원적 개념이다.

따라서 한국 사찰에 조성된 일반적 정원 가운데에서도 선심이 게재되어 있는지 유무에 따라, 선정원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이중성이 발견된다. 즉, 같은 영지라도 단순히 불, 탑, 산을 비추도록 하는 영지라면 선정원이라고 보기 어려우나, 마음이 비치는 영지라면 그것은 선정원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 같은 연지라도 연꽃을 보면서 선심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선정원으로서 정체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청정계류 위에 지은 태안사 능파각.

2) 자연정원

한국의 선찰은 아름다운 자연경관 속에 하나의 요소가 된다는 측면에서 볼 때, 자연 그 자체가 정원으로서 기능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산사의 경우에 자연과 정원이 둘이 아니고 하나였던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각하면, 한국의 선정원은 본래부터 있어 왔던 아름다운 자연 자체이며, 선사들은 그 자연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깨닫고 통찰할 뿐이다. 이러한 선사들의 태도는 일본의 선사들이 아름답고 결점이 없는 자연을 담장 안으로 끌고 들어와 그 경관을 축소해서 일본 고유의 선정원을 만들어내는 것과는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이어령은 일본인의 정원문화와 한국인의 정원문화를 밧줄 문화와 수레바퀴 문화로 비교하였다. 일본인들은 후지 산이나 아마노하시다테(天橋立), 비와코(琵琶湖) 등과 같이 아름다운 경관을 밧줄로 끌어와 뜰에 옮기는 축경식 정원을 만드는 반면에, 한국인들은 수레를 타고 아름다운 경관을 찾아가 수레에 앉아 그 경관을 즐기는 데 만족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 정원에는 유독 후지 산을 조성한 사례가 많다. 후지 산을 밧줄로 끌어와 정원에 축경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한국의 수레바퀴 문화라는 것은 고려시대 이규보의 〈사륜정기(四輪亭記)〉에 나오는 것으로 이규보는 사륜정을 만들어 그것을 풍경이 아름다운 곳에 끌고 가 풍경을 즐기고 휴식을 취하고자 하였다. 이어령은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일본 선정원과 한국의 선정원을 극명하게 비교하였다.

같은 선이라도 한국과 일본이 그렇게 다른 것은 자연에 대한 태도에 그 원인의 하나가 있을지 모른다. 한국의 선승은 세속의 땅을 떠나는 데서부터 그 수도가 시작된다. (중략) 한국의 선승들은 초의대사처럼 자연과 직접 대면함으로써 일체의 선적 경지를 터득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선승은 도시 한가운데 있으면서 자연을 자기들 마루 앞으로 끌어들였다. 그것이 일본 선찰의 방장 뜰이다.

한국의 선사들은 이규보가 수레를 타고 절경을 찾아 즐기려고 한 것과 같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찾아가 즐기려고 하였지 사찰 안에 정원을 만들어 그것의 인공적 아름다움을 취하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선정원은 경내에 만든 인공정원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가 곧 정원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하는 자연정원이었다.

강화 보문사의 차경 효과.

3) 차경정원(借景庭園)

중국 명 대의 유명한 정원사인 계성(計成)이 지은 《원야(園冶)》에 ‘차경(借景)’이라는 말이 나온다. 차경이라 함은 경역(境域) 밖의 풍경을 시각적으로 빌려와 이용하는 것으로, 원경을 빌리는 원차(遠借), 가까운 곳의 경관을 비리는 인차(隣借), 눈 위에 전개되는 높은 곳의 경관을 빌리는 앙차(仰借), 눈 아래에 전개되는 낮은 곳의 경관을 빌리는 부차(俯借)가 있다.

차경기법은 한 · 중 · 일 삼국의 정원에서 두루 쓰이는 조성 기법의 하나다. 한국에 선불교가 도입되고 나서 경승지에 자리를 잡은 선찰들은 특별히 인공적인 정원을 조성하지 않아도 사찰 주변의 풍경을 차경하여 인공적인 정원에 못지않은 다양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인하여 산속에 지어진 선찰에 특별히 정원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고 말하는 스님들이 있기도 한데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추론이다.

이렇게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담장 안으로 끌어들여 정원의 기능을 하도록 한 것이 이른바 차경정원인데, 이 경우 아름다운 주변의 경관을 선택하여 취하려면 건축의 입지와 향 및 구조를 차경하기 유리하도록 선택하는 작업만 필요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경관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동화되도록 해서 사찰 안으로 들여오면 되지, 굳이 사찰의 담장 안에 인공적인 자연경관을 조성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선사들의 선심이었다고 생각된다.

통도사 자장암 경내의 거암.

4) 암석정원

〈백의관음화현도〉를 통해서 살펴본 양평 상원사의 정원은 한국 정원사에서는 특별히 보기 어려운 형태이다. 이것은 일본의 고산수 양식의 정원과는 전혀 다른 성립 배경을 가진 정원이다. 즉, 일본의 선찰에서 볼 수 있는 고산수 정원은 특별한 자연경관을 축경하여 옮겨놓은 것이지만 상원사의 정원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 암석에 의미를 부여하고, 경계를 둘러 정원으로서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특별히 이것을 암정원이라고 명명하고자 하는데, 바로 이러한 형식이 한국의 선사들이 생각한 선정원이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만약 이러한 정원의 형식을 특별히 한국의 선정원이라고 한다면 향후 한국의 선정원 조성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하나의 설계 원리로 작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5. 맺는말

이 글은 한국불교에 조성된 정원의 전개와 양상에 관한 연구 결과로, 연구의 내용은 선불교 도입 이전과 이후의 정원의 차이점 확인, 선정원의 정체성 규명, 한국 사찰의 선정원에 대한 유형과 그것의 의미 규정으로 구성된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에 지어진 사찰에 조성된 정원을 선불교 도입 이전과 도입 이후로 나누어 그것의 특징을 살펴본 결과, 정토정원을 대표적 유형으로 하는 일반적인 개념의 사찰정원으로부터 선심을 담은 선정원으로 정원의 성격이 전개되어가는 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 단지 한국 사찰에서 선정원이라는 특별히 양식이 성립되었거나 전승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선정원에 대한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지만, 선 사상이 도입된 이후에 조성된 정원에서는 구석구석에서 선정원적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한국 사찰에 조성된 정원의 성격이 정원 그 자체의 형식보다는 그 정원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가 중요하게 생각되어왔다는 점이 주목되는데, 이것은 한국 사찰의 정원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선불교 도입 이후에 조성된 사찰정원 가운데에서 선정원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정원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 먼저, 일반적인 사찰정원에 선적 개념을 도입한 선심정원, 다음으로 선사들이 사찰 주변의 승경(勝景)을 찾아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정자와 같은 약간의 시설을 설치한 자연정원, 또한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차경하여 정원으로서 의미를 부여한 차경정원, 그리고 경역 내의 암석이나 경물 자체를 정원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암석정원이 바로 선정원이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정원 아닌 정원’ 혹은 ‘자연이 곧 정원’이라는 개념은 오직 한국 사찰에서만 나타나는 선정원의 형식이라고 해도 크게 무리가 없어 보인다. 향후 이러한 몇 가지 선정원의 유형들을 보다 심도 있게 연구하여 한국 현대사찰의 선정원 조성을 위한 설계언어와 설계원리를 찾는 작업이 지속된다면 일본이나 중국의 선정원과는 다른 한국성을 가진 독특한 선정원이 조성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  

 

홍광표
동국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졸업. 〈신라사찰의 공간형식변화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한국전통조경학회 회장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경주 표암 선각화의 사찰경관적 의미〉 〈관음현상기를 통해서 살펴본 조선 초기 상원사의 경관연구〉 등과 저서로 《한국정원 답사수첩》(공저) 《전통문화환경에 새겨진 의미와 가치》(공저) 등이 있다. 현 한국정원디자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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