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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잠에서 깨어난 보로부두르 / 김길녀
[69호] 2017년 03월 02일 (목) 김길녀 namoo0208@hanmail.net

   

김길녀 / 시인

어딘가로 떠난다는 건 분명 설렘을 동반한다.

낯선 나라에서 살아보는 일은, 두려움과 설렘을 동시에 안겨준다. 4년 전 생애 처음 이국에서 따뜻한 겨울을 맞았다. 거처는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 오랫동안 몸 안에 새겨진 겨울 유전자는 자연스럽게, 하양 풍경들을 그리워하게 했다. 겨울 배경의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사진과 그림을 찾았다. 열대 나라의 겨울은 우기였다. 오래된 공원의 검은 숲으로 쏟아지는 폭우는 29층 테라스에서 보면 폭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자카르타에 살면서 여러 매체를 통해 보게 되는, 이 나라의 다양한 종교가 남긴 유적들은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가고 싶은 장소에 대한 스크랩을 시작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따뜻한 크리스마스 시즌이 왔다. 세계 최대 이슬람국가로 알려진 나라지만, 모든 종교를 수용하는 나라답게 호텔과 백화점 로비에 대형트리가 장식되기 시작한다.

이 나라에 오래 살고 있는 친구는, 한 번쯤 기차여행을 해보라고 권했다. 휴가를 받아 족자카르타 여행을 계획했다. 족자카르타는 우리의 경주처럼 역사와 문화의 도시로, 술탄의 행정권 안에 있는 특별도시다. 세계 최대 불교사원인 보로부두르(Borobudur)와 아름답기로 유명한 힌두교 사원 프람바난(Prambanan)이 있다. 두 사원은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비행기로는 50분 거리를, 기차로 8시간 30분이 걸려서야 족자카르타에 도착했다. 도시는 조용하고 시내도 한산했다.

1시간이 지나 보로부두르 사원에 도착했다. 사원 입구는 세계적인 관광지답게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무들 사이로 보면, 넓은 평지의 한가운데 위치한 사원은 숲속의 요새처럼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오래전부터 현지인들은 사원을 호수에 뜬 꽃이나 큰 나무라 여기며 신성시한다고 한다.

사원 불탑 석조물의 무게는 350만 톤, 최대 높이 42m로 1,460개의 조각상, 504종의 불상, 72기의 불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8세기경 사일렌드라 왕조 시대에 약 70년에 걸쳐서 만들어졌다. 1814년 영국인이 발굴하기 전까지 흙 속에 묻혀 있었다. 천 년 동안 잠들었던 사원은 1984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보로부두르는 산스크리트어로 ‘언덕 위의 승방(보로: 승방, 부두르: 높이 쌓아 올린 곳)’이라는 뜻이다. 여러 사원이 모여 있는 일반적인 불교사원과 달리, 피라미드 형태의 단일 건축물이다. 사원을 지은 후 바로 묻어서 숨겼다는 추측이나 영묘나 왕조의 사당, 승방, 혹은 우주를 상징하는 구조물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확실히 규명된 건 없다. 불교의 세계관과 우주관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한 건축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천천히 돌계단을 오른다. 불교 경전 이야기들이 돌조각으로 새겨져 있다. 정교한 회화 조각들이 오랫동안 걸음을 멈추게 한다.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새긴 조각이 눈길을 끈다. ‘추한 얼굴’이란 비문의 글귀가 그대로 느껴지는 저 모습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오래전부터 일기장 첫 페이지에 적고 있는 팔정도(八正道)가 생각난다.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기억, 바른 마음’이 해탈에 이르는 길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인간의 지나친 욕망을 경계하라는 의미로도 느껴진다.

사원 꼭대기인 원단에는 스투파로 불리는 큰 종 모양의 불탑들이 있다. 불탑에 구멍이 있어서 종 안의 불상들을 볼 수 있다. 불상에서 어릴 때 친구와 갔던 암자의 스님 얼굴이 보인다. 처음 간 암자에서 갑자기 쏟아진 눈 때문에 하산할 수 없었던 우리는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새웠다. 눈이 그치고 새벽이 되자 밤을 꼬박 새웠음에도 스님은 손수 가마솥에 지은 밥상을 차려 주었다. 그때 스님이 적어주신 글귀가 팔정도다. 가끔 스님을 뵈러 다니다가, 고향을 떠나면서 스님도 암자도 잊혀갔다. 종탑 안의 불상 얼굴에서, 길지 않은 생을 살면서 만났던 다정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무교인 내게는 불교가 심리적 종교이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의 수양으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종교관이 매력적이다.

사원 가까이에는 발굴과 복원 시의 상황을 사진으로 보여 주는 공간이 있다. 복원 후 남은 돌조각들이 널브러진 뒤뜰에서 키 큰 미모사 분홍 꽃 무더기를 만났다. 딸아이가 좋아하는 꽃이라 반가워서 사진을 찍어 보냈다. 꽃도 사원도 천 년 잠에서 깨어나, 낯선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다. 깨어진 돌 틈에 자라는 오래된 초록 이끼가 건네는 시간의 숨결이 따뜻하다. 멋대로 누워 있는 돌무더기들을 보고 있으니, 편안한 마음이 들어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마음껏 여행자의 여유를 누릴 수 있었던 족자카르타 여행. 언제부턴가 책장에 놓아둔 불상의 뒷모습 사진을 들여다보며 나도 모르게 두 손을 곱게 모으는 습관이 생겼다. 한 번 더 언덕 위의 승방에 가고 싶다. 그때는 사원으로 연결된 정원이 있는 호텔에 묵으리라. 비가 드문 건기를 택하여, 아쉽게 놓친 일출과 일몰 아래서 느리게 느리게 사원을 걸으리라. 9층의 원단에 이르면 불상들과 눈 맞추며 그동안의 안부를 묻고, 천천히 내 안의 나를 들여다보리라. 다시, 그곳으로의 여행을 준비하는 이 겨울이 따뜻하다.     

김길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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