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동남아시아불교 집중 탐구

1. 태국의 개황

태국의 국토 면적은 51만 3,120㎢로 세계 51위이다. 이는 프랑스나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와 비슷한 크기이다. 한반도의 2.3배, 대한민국의 5배이며 평야가 많다.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말레이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전 국토는 방콕을 포함해 77개의 도로 나뉘며 북부 9개, 중부 21개, 동북부 20개, 남부 14개, 동부 7개, 서부 5개의 도로 구성되어 있다.

태국의 인구는 약 6,800만 명(2014년)이다. 각 도의 인구수를 살펴보면 방콕 825만, 나컨랏차씨마 252만, 싸뭇쁘라깐 183만, 우본랏차타니 174만, 컨깬 174만, 치앙마이 171만, 촌부리 155만, 쏭클라 148만, 나컨씨탐마랏 145만, 논타부리 133만 명 등이다(2012년 현재).

다수 종족은 타이족이지만 라오스인, 말레이시아인, 캄보디아인, 중국인, 인도인 등도 거주하고 있으며 중국 등에서 이주해 온 고산족들도 있다. 비(非)타이계 민족 중 최대의 인구를 가진 소수종족은 화인(華人)이다. 태국 내 화인의 수는 전체 인구의 14%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2012년), 부분적으로 중국계 혈통을 가진 수까지 합하면 최대 40%까지 추산되고 있다. 종교는 상좌부불교가 주종이며 인구의 95%가 신봉한다. 이 외는 이슬람교, 기독교, 대승불교도 믿고 있다.

타이어는 고유의 문자를 갖고 있다. 고대 인도에서 사용하던 문자를 본떠서 만든 캄보디아 문자의 고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1283년 쑤코타이 왕조의 람캄행 대왕이 만들었다. 최초의 타이어 문자는 람캄행 대왕의 비문에 남아 있는데, 수 세기에 걸쳐 그 형태를 변화시켜 왔다.

타이족은 중국 남부로부터 점차 인도차이나 반도로 이동하였으며 13세기에 쑤코타이 왕조(1238~1438), 14세기에 아유타야 왕조(1350~1767)를 세웠다. 이후 1767년 버마군의 침략으로 아유타야는 멸망하고, 15년간의 단명에 그쳤던 톤부리 왕조(1767~1782)를 거쳐 1782년에 랏따나꼬씬 왕조(1782~현재)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태국은 1932년 입헌군주제를 채택했으며 현재 국가원수는 와치라롱껀(Vajiralongkorn) 국왕이다.1952년생인 와치라롱껀 국왕은 그의 아버지 푸미폰 국왕에 이어서 2016년 12월 라마(Rama) 10세로 즉위했다. 태국의 정부 형태는 내각책임제이며 국회는 상 · 하 양원으로 구성된다. 총리는 선출직 하원의원 중에서 뽑는다(또는 비선출 임명직도 가능). 임기 4년의 하원은 지역구 의원과 정당명부제 비례대표 의원으로 구성되며, 임기 6년의 상원의원은 임명직으로 구성된다.

2. 불교의 전래

인도 최초의 통일왕조인 마우리야 왕조(Maurya, B.C. 317~B.C. 180)의 3대 왕 아쇼까(Asoka, B.C.269~B.C.232) 대왕은 전쟁을 통해 역사상 최대의 지배영역을 확보했을 뿐 아니라, 불교 옹호정책을 펴 정법정치(正法政治)를 천명하고 자비와 도덕률을 강조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북인도에서만 교세를 떨치고 있었던 불교를 세계의 종교로 바꾸어 놓은 데 있다. 아쇼까 대왕은 인도 밖의 여러 지역-실론(스리랑카), 시리아, 이집트, 마케도니아, 쑤완나품(Suvarnabhumi, Suwannaphum, the Golden Land)-으로 전법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이를 통해 불교는 세계적 종교로 발돋움할 수 있었는데, 아쇼까 대왕의 아들 마힌다(Mahinda)가 실론에 상좌부불교(上座部佛敎)를 전파하여, 실론의 상좌부불교는 동남아시아 상좌부불교의 모태 역할을 했다.
마힌다에 교화된 실론의 국왕 띳사(Tissa)는 포교를 위해 사원을 지어 희사했는데, 이것이 상좌부불교의 근거지인 마하위하라(Maha Viharaya,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大寺’)이다. 이후 실론의 불교는 인도 대륙의 불교교단과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발전해 갔으며, 마하위하라 중심의 상좌부불교가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등 각지로 보급, 전파되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아쇼까 대왕은 쑤완나품 지역에 소나(Sona)와 웃따라(Uttara)를 파견했다. 이들은 태국 등 동남아 국가들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와 중국 상인들은 이전부터 이 지역에서 금을 구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 그러나 쑤완나품 지역이 정확히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몬(Mon)족과 미얀마족이 만든 비문이나 경전에서는 이 지역은 미얀마에 있다고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있는데, 반대하는 측에서는 아쇼까 대왕이 소나와 웃따라를 미얀마에 보낸 증거가 없으며 불교가 5세기 전에 이곳에서 발전했다는 증거도 없다고 주장한다. 태국에서는 이 지역을 쑤판부리, 나컨빠톰, 랏차부리, 나컨씨탐마랏 지역이라고 주장하며 쑤완나품의 수도를 나컨빠톰(Nakhon Pathom)으로 추정하고 있다.

상좌부불교가 동남아시아에서 지배적인 종교가 되기 전 이 지역 왕국들은 다양한 종교를 믿고 있었다. 1세기경 세워진 동남아 최초의 왕국인 부남(Funan, 扶南, 68~550) 왕국에는 상좌부와 대승불교 모두 성행했다. 6세기 중엽 진랍(真臘, Chenla, 550~802) 왕국이 대두하자 부남의 영토는 축소되었으며 7세기 중엽에는 멸망했다. 진랍 왕국은 힌두교가 번성했던 것으로 보이며, 불교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짜오프라야 강 유역에 세워진 몬족의 타와라와디 왕국(Dvarav-ati, A.D. 6~13C)은 상좌부불교를 신봉했다. 타와라와디 왕국이 번성하고 있을 때 수마트라 섬에서는 스리비자야(Srivijaya, 650~ 1377) 왕국이 발흥했다. 이 왕국은 대승불교를 믿었다. 이라와디 강 하류 삐(Pyay, Prome)를 중심으로 쀼족의 왕국(Pyu city states, 驃國, B.C. 2~A.D. 11세기)도 세워졌다. 쀼족은 티베트-버마 계통으로 나중에 버마족으로 흡수되었는데, 그들은 상좌부, 대승불교와 힌두교, 민속신앙이 혼합된 종교를 믿고 있었다. 미얀마 남부 몬족 왕국에서는 상좌부불교가 전래하여 타통(Thaton)을 중심으로 번창했다. 베트남 중남부 지역에는 참(Cham)족이 세운 임읍(林邑, 占城, 占婆, Champa, 192~1832) 왕국이 있었는데 이 왕국은 힌두교와 대승불교를 믿었다.

타이족이 중국 남부로부터 이주해 오기 전 현재 태국 지역은 캄보디아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타이족이 남중국(南詔國, 大理國, 650~1253)에 있을 때는 중국의 불교인 대승불교를 믿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크메르 왕조에서는 힌두교와 불교가 혼합된 종교를 믿었다.  

3. 불교의 발전

1) 시대적 발전 과정

(1) 쑤코타이 왕국(Sukhothai, 1238~1438)

타이족은 1238년 당시 쑤코타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던 앙코르 왕국을 몰아내고 쑤코타이 왕국을 건립했다. 이후 쑤코타이 왕국은 200년 동안 9명의 왕이 통치했다. 쑤코타이 왕국의 3대 왕인 람캄행(Ram Khamhaeng, 1279~1298) 대왕은 과거 이 지역을 통치했던 크메르 색채의 대승불교를 불식시키기 위해, 당시 상좌부불교의 중심지였던 남부 태국의 나컨씨탐마랏(Nakhon Si Thammarat)에서 고승을 초빙했다. 이후 상좌부불교는 고대 태국의 왕권을 정당화하는 통치 이데올로기이자 민중의 신앙 대상으로서 태국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람캄행 대왕의 뒤를 이어 쑤코타이 왕국의 불교를 크게 진흥시킨 왕은 리타이(Lithai, 1347~1368 또는 1374)였다. 리타이 왕은 그의 저서인 《불교 우주론(Traiphuum Phra Ruang, 일명 Traibh-umikatha)》을 통하여 우주 구조를 설명하고 태국사회의 사회적, 정치적 기구의 정당화를 설명했는데, 이러한 설명은 오늘날까지도 태국사회에서 정치적 유용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철학자라고도 불릴 만큼 불교철학에 조예가 깊었고, 삼장(三藏)을 두루 이해한 최초의 군주였다. 목뜨마(Martaban)에 있던 스리랑카 스님을 쑤코타이로 초청해 불교의 융성을 도모했으며 자신도 출가생활을 했다. 이때부터 태국에는 단기출가의 습속이 만들어졌다. 또한 그는 최초로 비구와 사미승을 위한 학교를 설립했다. 이웃 나라들에 불교를 전파하기도 했으며 많은 사원, 불상, 불탑을 건축하고 산 위 4곳에 불족적(佛足跡)을 모셔 두기도 했다.

(2) 란나타이 왕국(Lannathai, 1292~1775)
짜오프라야 강 유역에 거주한 타이족 중 한 종족이 쑤코타이 왕국을 건설했을 때 북서부 고원에는 또 다른 종족이 몬족을 몰아내고 란나타이 왕국을 세웠다. 고대 치앙쌘 왕국의 멩라이(Mengrai, 1292~1311) 왕이 람푼의 몬족 왕인 예바(Ye-Ba)를 패퇴시킨 후 치앙마이에 도읍을 세우고 란나타이 왕국을 건설한 것이다.
멩라이 왕 이전 란나타이 지역의 불교는 상좌부불교와 대승불교가 혼합된 형태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타이족이 중국 남부에서 태국 땅(란나타이)으로 이주해 왔을 때는 중국의 대승불교를 갖고 왔을 것이며, 크메르의 영향력이 강하게 나타난 곳이었기 때문에 대승불교의 영향력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이곳에는 승려들이 육식을 하지 않는 등 대승불교의 다양한 전통들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멩라이 왕 이후 쑤코타이 왕국과 마찬가지로 상좌부불교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란나타이 왕국의 상좌부불교는 하리푼차이(Hariphunchai)를 수도로 삼았던 타와라와디 왕국의 상좌부불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란나 왕국 불교 발전의 황금기는 띠록까랏(Tilokarat, 1442~1477) 왕 때였다. 치앙마이에서 500인이 출가했으며, 많은 사원을 신 · 개축하고 스리랑카로부터 들여온 보리수나무들을 심었다. 왕은 1447년 이후 두 차례 단기출가해 법과 율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불기 2000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마하포타람이라는 사원도 만들었는데, 사원 양식은 인도의 부다가야(Buddha Gaya)와 스리랑카 양식을 본뜬 것이다. 이어 프라므엉깨우(Phra Muang Kaeo, 1495~1525) 왕 때 란나타이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1,200명의 출가의식이 치러졌다.

(3) 아유타야 왕국(Ayuthaya, 1350~1767)
쑤코타이 왕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우텅(U-thong) 왕국은 1350년 독립을 선언한 후 아유타야 왕국을 건설했다. 417년의 역사를 유지하게 되는 아유타야 왕국은 33명의 왕이 통치했으며 상좌부불교가 크게 번성했다. 아유타야 시 안팎에는 교육, 병원, 회합의 장소가 되었던 수많은 사원과 파고다가 만들어졌으며, 불교는 국민의 정신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건축과 불상 건립 등 불교예술도 번창했다.
초기 아유타야 왕국(14세기 중엽~15세기 말)의 불교 발전은 뜨라이록까낫(Tralokkanat, 1448~1488) 왕 때부터 이루어졌다. 그는 재위 기간만도 40년이나 돼, 이 시기에 불교 발전이 공고해질 수 있었다. 뜨라이록까낫 왕은 쑤코타이 불교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의 왕비는 쑤코타이 탐마라차 4세(Phra Maha Thammaracha IV, 1419~1438)의 딸이었다. 람캄행 대왕 이후 탐마라차 4세까지 쑤코타이의 왕들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이런 영향을 받아서 뜨라이록까낫 왕은 불심이 돈독했다. 그는 부왕(副王) 시절과 왕이 된 후 두 차례나 과거 아유타야의 식민지였던 쑤코타이를 직접 관리했던 핏싸누록(Phitsanulok)에서 통치했다. 핏싸누록은 불교왕국 쑤코타이의 잔재가 강력히 남아 있던 곳이다. 이런 사정도 그의 불심을 돈독하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뜨라이록까낫 왕은 중요한 불교적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는 원래 사용하던 왕궁을 사원으로 만들도록 하고 왕궁을 롭부리로 옮겼는데 이 사원이 왓프라씨싼펫(Wat Phra Si Sanphet)이다. 그는 3년에 걸쳐(1458~1460) 500개의 보살상을 주조했으며, 핏싸누록의 쭐라마니(Chulamani) 사원 등을 신축하고 수많은 사원을 복원시켰다. 그는 쭐라마니 사원에서 2,388명의 귀족, 왕족과 함께 수계를 받았는데, 이는 아유타야 왕조 개국 이래 가장 큰 수계식이었다. 왕은 8개월 15일 동안 이 사원에서 승려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의 수계는 이웃 나라들에도 자극이 되어 홍싸와디(Hongsawa-di)의 탐마쩨디(Thammachedi) 왕은 승려들을 실론에 보내서 새롭게 수계를 받게 했으며, 귀국 후에는 새로운 종파를 만들게 했다. 치앙마이 왕국의 띠록까랏 왕은 뜨라이삐독(Traipidok, 삼장) 결집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뜨라이록까랏 왕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는 쑤코타이의 리타이 왕과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했다. 《마하찻캄루엉(Mahachatkhamluang)》이라는 작품도 썼는데 이 작품은 부처의 일대기로서 아유타야 왕국 최초의 불교문학 작품이다.
중기 아유타야 시기(15세기 말~18세기 중엽)에 해당하는 쏭탐(Song-tham, 1610~1628) 왕 때 태국 승려들은 실론으로 유학을 많이 갔는데 실론에 가서 부처의 발자국을 찾아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실론의 승려들로부터 태국에도 다섯 곳에 부처의 발자국[佛足跡]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쏭탐 왕은 불족적을 찾아보도록 했는데 어떤 날 싸라부리(Saraburi) 도지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사냥꾼이 사냥을 나갔다가 사슴을 쏘았다. 사슴은 도망을 갔으며 사냥꾼은 사슴을 쫓았다. 사슴은 상처를 입은 채 동굴로 숨어들어 갔다. 잠시 후 동굴에서 나온 사슴은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이상하게 여긴 사냥꾼이 동굴로 들어갔을 때 발자국을 발견했는데 그 속에는 물이 고여 있었으며 그 물은 신비하게도 치료의 능력이 있었다. 사냥꾼은 그의 오래된 상처에 물을 바르게 되었는데 상처가 씻은 듯이 나았다.

이후 쏭탐 왕은 실론 승려들의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으면 토지를 하사해 불족적을 안치할 4각형의 구조물을 만들고 매년 음력 3월과 4월에 참배하도록 했다. 불심이 돈독한 쏭탐 왕은 삼장을 빠알리어로 가르쳤으며 궁정은 불교 교육의 장이 되었다.
나라이(Narai, 1656~1688) 왕 때는 불교 시험이 처음으로 치러졌다. 승려에게 자격을 부여하기 위한 시험이었는데, 도시 승려인 캄마와씨(Gamavasi, town-dwelling)는 시험에 응한 반면, 산림 승려인 아란야와씨(Araññavasi, forest-dwelling)는 국가가 주도하는 시험에 반대했다. 시험을 치른 후 많은 무자격 승려들이 승적을 박탈당했다.
말기 아유타야 왕국(18세기 중엽 이후)의 버롬마꼿(Borommak-ot, 1733~1758) 왕은 실론에 태국 승려들을 파견해 실론 승려들에게 오히려 수계를 해주기도 했다. 실론은 포르투갈의 식민통치를 경험하면서 가톨릭화되고 사원과 불탑, 삼장 등이 파괴되었다. 불교를 다시 부흥시키고자 했으나 비구승은 없고 사미승만 남아 있어 수계식을 갖지 못했다. 버롬마꼿 왕은 우빨리(Upali)를 단장으로 하는 16명의 승려를 파견해 실론불교의 부흥을 꾀했으며 삼장과 금불상을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우빨리와 사절단은 실론에서 3년 동안 거주하며 700명의 승려와 3,000명의 실론의 사미승에게 계를 내렸고, 우발리는 그곳에서 사망했다. 이들은 실론 불교 최대의 종파인 우빨리파(Upali-vamsa, Siam-vamsa)를 만들었다. 버롬마꼿 왕 때 관리들은 일시적으로 승려생활을 하지 않으면 고위직에 임명될 수 없었다. 엑까탓(Ekathat, 1758~1767) 왕 때인 1759년에는 실론에 2차 사절단(Visuddhacariya, Varananamuni)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4) 랏따나꼬신 왕국(Rattanakosin, 1782~현재)
랏따나꼬신 왕국(Rattanakosin) 들어 라마 4세 몽꿋(Rama Ⅳ, Mongkut, 1851~1868) 왕은 탐마윳띠까니까이(Thammayutikani-kai) 종파를 만들어 불교를 근대화시키고, 라오스와 캄보디아 불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몽꿋은 태국이 서양과 접촉하는 근대화 과정에서 정치 · 사회적 근대화와 함께 불교개혁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나 장 칼뱅(Jean Calvin)의 종교개혁과 같이 상좌부불교의 근본적인 개혁을 급진적으로 추진했다. 몽꿋은 왕위에 오르기 전 27년 동안 승려생활을 하면서 빨리어 경전 연구에 심취했으며 경전과 태국 승려들의 실제 관습 사이에 상이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승려생활을 하는 동안 서양 선교사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신지식을 획득하여 서구의 합리주의 사상을 갖게 되었다. 몽꿋은 오랜 전통이 있는 몬(Mon)불교 관습이 원래의 불교 관습과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몬불교를 모델로 설정한 후 자신과 유사한 신념을 가진 승려들을 모아서 기존의 태국불교 종파인 마하니까이(Mahanikai)와는 다른 탐마윳띠까니까이(Thammayutikanikai)를 만들었다.
몽꿋의 탐마윳띠까니까이 운동의 주요 내용은 경전주의(scriptu-ralism), 주지주의(intellectualism), 합리주의(rationalism)를 특징으로 삼았다. 이 운동은 두 가지의 중요한 결과를 초래했다. 첫째, 서구과학에 일치하는 불교의 재해석 시도는 전통불교에 인식론적 변화를 가져왔다. 몽꿋의 개혁운동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불교 세계관을 새로운 방식으로 인식하도록 만들고, 사회개혁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둘째, 당시에 지역적으로 나누어진 다양한 불교 세력들의 이단적 교리해석을 거부하고 탐마윳띠까니까이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절대주의(a religious absolutism)를 구축했으며 더 나가 국왕이 절대권을 갖는 정치체제를 정당화했다.
몽꿋 왕의 탐마윳띠까니까이 불교개혁운동을 이어받은 사람은 태국의 근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한 그의 아들 쭐라롱껀(Rama V, Chulalongkorn, 1868~1910) 대왕이다. 당시 태국에서는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 침투가 노골화되었으며 이는 국가안정과 왕권에 대한 큰 위협 요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쭐라롱껀 대왕은 통치체제와 왕권의 강화 필요성을 절감하고 탐마윳띠까니까이를 새로운 사회적, 종교적 이데올로기 도구로 사용해 근대화와 개혁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근대화 작업의 일환으로써 쭐라롱껀 대왕은 교육개혁을 시행했다. 근대 이전 태국의 교육은 보통 사원에서 행해졌는데, 쭐라롱껀 대왕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이 같은 전통적인 사원 교육에 주목했다. 교육 프로그램의 진흥을 승가가 주도하게 되면서 보다 효율적으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하여 전국적인 승가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1902년 태국 최초의 승가법을 제정했다. 승가법은 정부의 중앙집권식 행정체제의 모델을 따른 것으로 종교의 수호자로서 국왕의 권위를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고 승가의 중앙집권적 위계질서를 확립시켰다. 이러한 승가와 정치권력의 밀착은 쭐라롱껀 대왕의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확고하게 해주고, 그의 정부를 정의롭고 자비로운 정부로 자리매김하게 해주었다.

1902년, 승가법에 따른 승가의 중앙집권적 행정체제는 쌍카랏(승왕)이 이끄는 마하테라싸마콤(Mahatherasamakhom, 원로회의)이 모든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는데 이는 4개 지역의 승가 행정 대표와 행정부 대표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왕이 직접 임명하였다. 4개 지역 중 3개 지역은 중부(Khana Klang), 남부(Khana Tai), 북부(Khana Nua) 지역을 의미하지만, 나머지 한 개는 지역이 아니라 탐마윳띠까니까이(Khana Thammayutika)를 의미한다.

태국은 동남아의 어떤 상좌부불교 국가보다도 국가권력과 승가와의 관계가 밀접하다. 그것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승가법이다. 1902년 이래 승가법은 세 차례의 개정을 거쳤는데, 국가권력의 정치적 목적을 실현시키려는 의도에 부응해 개정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1902년 최초의 승가법은 라마 5세의 근대화 정책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승가는 근대화된 관료체제의 통제하에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조직이 되었다. 1932년 입헌혁명 이후 만들어진 1941년의 승가법은 입헌혁명의 영향을 받아 승가의 구조를 민주화하고, 국가로부터 보다 많은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게 했다. 1962년의 승가법은 싸릿의 권위주의 정치체제 구축과 국가개발에 부응한 것으로 승가는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으며 중앙집권화되었다.

현재 태국은 민주적인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기본적으로는 권위주의적인 1962년 승가법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정치가 세속화되고 불교도 점차 탈정치화하고 있기 때문에 불교가 세속적 정치권력의 형태를 반영하고 있는가에 관한 관심이 없어졌기 때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962년 승가법 제정 이후 지금까지 승가법은 1992년과 2004년 두 차례 개정되었는데, 1990년 이후 승가법은 정치적 기능보다는 종교적 기능에 충실하면서 변화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인 예는 개정 승가법의 내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92년 승가법의 중요 개정 조항은 쌍카랏(승왕) 임명에 관한 것이다. 즉 “쌍카랏의 직이 공석일 때 총리는 마하테라싸마콤(원로회의)의 동의로 쏨뎃프라라차카나(Somdet Phra Ratchakhana) 중 연장자의 이름을 국왕에게 제출해서 쌍카랏을 임명한다.”고 되어 있다. 태국에는 국왕이 고위직 승려들에게 위계(Samanasak, 싸마나싹)를 수여하는데, 쏨뎃프라라차카나는 가장 높은 직에 있는 10명의 원로 승려이다. 그 밑의 위계를 프라라차카나(Phra Ratchakhana)라고 부른다. 프라라차카나는 5등급으로 나뉘는데 이에 속하는 승려들의 수는 500명이 넘는다. 성직에 따른 쏨뎃프라라차카나 중 연장자가 직무를 수행하지 못할 때 총리는 마하테라싸마콤의 동의로 차순위의 쏨뎃프라라차카나의 이름을 국왕에게 제출해 승왕에 임명한다. 이는 국왕의 쌍카랏 임명권이 제한되고 대신 마하테라싸마콤의 권한이 증대됐음을 의미한다. 2004년 승가법은 승왕이 병석에 눕자 그 직무를 대신할 7명의 고위 승려(쏨뎃프라라차카나)로 구성된 위원회를 임명했다. 이는 대행을 한 명으로 할 경우 분란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승가법 개정은 태국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 승가 자체의 필요성에 의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국가권력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실시되었던 과거 승가법 개정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승가 행정체제는 중앙집권형이다. 모든 권한은 원로회의 21명(승왕, 마하니까이 10명, 탐마윳띠까니까이 10명)에 집중되어 있다. 그 밑에 5개 행정지역(Administrative Sectors)을 담당하는 짜오카나야이(Chao Khana Yai)는 중부, 북부, 남부, 동부의 4개 지역과 탐마윳띠까니까이 각 1명씩 모두 5명으로 구성된다. 지역 행정체제를 살펴보면 승가 지역 담당자(Chao Khana Phak)는 두 종파에서 각각 18명(지역은 몇 개의 도를 8개의 지역으로 묶은 것을 의미함)으로 구성되며, 승가 도지사(Chao Khana changwat)는 두 종파 각각 77명(전체 도는 77개, 각 도 1명씩)으로 구성된다. 한편 짜오카나야이 밑으로는 마하니까이와 탐마윳띠까니까이가 독립적으로 종단을 운영하고 있다.

2) 태국불교의 특징

(1) 해탈 지향성: 승려

태국의 상좌부불교는 대중구제를 중시하는 대승불교와는 대조적으로 승려 자신의 해탈에 중점을 두고 있다. 상좌부불교 교리에 의하면 인간은 고통, 노여움, 병고, 죽음 등의 고뇌가 끊임없이 계속되는 윤회계에 살고 있다. 이 고뇌의 원인은 인간이 가진 쾌락이나 소유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집착이 있는 한 인간은 윤회계의 포로가 되고 생과 사를 반복하면서 영구히 고뇌를 계속하게 된다. 이 고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길은 팔정도(八正道: 正見, 正思,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政定)를 행하여 해탈에 이르는 것이며 해탈의 권리는 승려에게만 주어진다.

상좌부불교 교리에 따르면 초자연적인 힘이나 신에게 의존하는 일 등은 완전히 배제되며, 불교적 세계관의 이해와 그에 근거하는 실천에 의해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신비적 요소를 배제하는 점에서 합리주의적이고 개인의 깨달음을 강조하는 점에서 개인 중심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실천을 가능케 하고자 태국의 승려들은 승가(僧伽, San-gha)라고 부르는 조직체를 국가적 규모로 구성하고 있다. 태국 승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갖는다.

우선 승가에 승려로서 참여하는 것은 성인 남자에 한하고 있다. 미성년자에게는 십계를 하사하여 넨(沙弥僧)이라고 부르며 여성은 승가의 가입을 금하고 있다. 승가의 구성원이 되는 자는 전답을 경작하는 등 일체의 세속적인 일이 금지된다. 따라서 승가는 그 자체로는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으며 의식주 전반을 재가신도에게 의존한다.

(2) 공덕 지향성: 재가신도
사실상 해탈 지향을 내용으로 하는 종교적 교리는 승려라는 종교적 엘리트를 대상으로 한 것이고, 재가신도에 대해서는 별도의 원리에 의한 행동 지침이 있다.

윤회전생의 질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해탈에 전념하게 되는 불교에서 설명하는 세계를 보면 윤회계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이 가능해진다. 윤회계의 생 전부를 고통이라고 생각하여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드는 일생과 마음에 들지 않는 일생이 구별되어 있다. 한 인간의 일생은 업(業) 개념에 의해 설명되는데, 즉 인간의 현생에서의 지위, 운, 불운 등은 그 사람의 전생 행위의 결과인 업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업을 결정하는 주요한 요인은 그 사람이 쌓은 분(Bun), 즉 공덕(功德, 善德)이다. 전생에 ‘탐분(Tham Bun, 공덕 쌓기)’을 많이 한 자는 현생에서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그와 반대로 전생에 탐분을 행하지 않으면 현생의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다. 분의 반대 개념은 밥(Bap)이라는 악덕(惡德) 행위로 생물을 죽이고 도적질을 하는 등의 악행을 행하면 밥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선업선과(善業善果), 악업악과(惡業惡果)로 요약된다.

인간의 업이 각 개인의 분과 밥에 의해서 변화하게 된다는 설명은 전생과 현생, 현생과 내생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현생에서도 적용된다. 현생의 생활 가운데 축적된 분과 밥의 결과 현생의 장래 생활에서의 운/불운, 행/불행도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의 원리에 근거하여 태국 불교도들은 개인의 생활을 분과 밥의 척도로 계산하면서 행동한다.

이러한 소위 업결정론을 믿는 태국 불교도들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승가에 공덕을 쌓는다. 구체적인 예로 출가, 사원 건축 · 수리비용 보시, 자식을 승려로 출가시키기, 불적 순례 등이 이에 해당한다. 매일 탁발하거나 재계일(齋戒日, 완프라)에 사원을 참배하고 승려에게 음식물을 공양하며, 5계와 8계를 준수하고 까틴 축제(Khatina Robe Ceremony) 때 승려에게 금품을 보시하는 일 등도 공덕을 쌓는 것에 속한다.

(3) 주술 지향성
공덕 지향성을 중시하는 태국불교의 또 다른 특징은 주술 지향성을 띠고 있다는 데 있다. 공덕 지향의 교리가 주로 내세나 장래에 대해서 보장은 하고 있으나 현실에서 당면하는 여러 가지 문제 등에 해답을 주지 못하는 경우, 주술 지향적 불교가 보완적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태국불교의 주술적 성격을 보여주는 일례가 프라크르엉(Phra Khruang)이다. 태국인들은 프라크르엉이라고 하는 작은 불상을 지니고 있으면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주술신앙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주술신앙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빠알리어 경전인 프라빠릿(Phra Parit, 보호게송 혹은 讀經)이다. 프라빠릿은 불상의 개안(開眼) 의례, 집의 신축 기념, 장례식, 공양 등의 불교 의례 때 암송되고 있다. 태국인들은 프라빠릿이 악령을 퇴치하는 주력이 있다고 믿고 있다. 예를 들면 장례식장에 싸이씬(Sai Sin)이라는 성사(聖絲)를 둘러치고 그 일부를 승려가 손에 쥔 후 프라빠릿을 암송하면 전기가 전선을 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력이 장례식장에 가득 차서 악령의 침입을 방지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불교 의례 때 승려가 참배자에게 뿌리는 남몬(Nam Mon)이라는 성수도 프라빠릿을 제창하면서 뿌린다. 이 물을 맞으면 힘이 체내에 가득하여 재앙을 물리칠 수 있게 된다고 믿는다. 불상이나 몸에 지니는 작은 불상에 혼을 집어넣기 위해서 고승을 초빙하는 의례가 행해지는데, 이때도 불교 경전과 함께 프라빠릿을 암송한다.

3) 불교 축제와 행사
대부분의 태국인은 불교도이기 때문에 태국에는 불교 행사가 많다. 불교 행사는 태국식 음력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해마다 그 날짜가 조금씩 바뀐다.

(1) 완마카부차(萬佛節)
태국력 3월(마카) 보름에 열리는 불교행사이다. 부처님이 왕사성(王舍城, Rajagrha)의 죽림정사에 있을 때 1,250명의 제자에게 계율을 설법하고 3개월 후 보름에 입적할 것을 예언한 날이다.

(2) 완위싸카부차(釋迦誕辰日)
태국력 6월(위싸카) 보름에 열린다. 석가의 탄신과 성도, 열반 세 가지를 축원하는 날로 태국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불교 축제이다.

(3) 완아싼하부차(三寶節, 初轉法輪日)
태국력 8월(아싼하) 보름에 열린다. 석가가 깨달음을 얻어 5인의 제자에게 초전법륜(初轉法輪)을 설파한 날이며 불 · 법 · 승 삼보의 성립을 축원하는 날이기도 하다. 사원에 양초를 진상하고 각 촌락에 국왕이 보낸 왕실 양초가 전달된다. 특히 동북부 나컨랏차씨마의 양초축제는 성대하기로 유명하다.

(4) 완카오판싸(入安居)
완아싼하부차(三寶節) 다음날을 말한다. 판싸(Phansa)는 빠알리어로 우기를 뜻한다. 승려는 이 기간에 3개월 동안 사원에 머물면서 수행하며 외출이 금지된다. 우기 중에는 홍수가 발생해 탁발(托鉢)을 나가게 되면 농민들에게 불편을 끼치기 때문에 승려들은 한 장소에 모여서 수행, 정진한다. 판싸를 거치는 일은 승려들의 경력과 직결된다. 이날 재가신도들은 사원에 직접 가서 음식물 등을 공양한다. 완카오판싸 때는 단기출가자들이 급증하고 각지에서 득도식이 행해진다.

(5) 완억판싸(出安居)
태국력 11월 보름이며 우기가 끝나는 날이다. 우기가 끝나면 바로 승려들에게 음식물을 공양하는 의식이 치러지는데, 이 의식을 중부 지방에서는 딱밧테워(Tak Bat Thevo), 남부 지방에서는 착프라(Chak Phra)라고 부른다.
완억판싸 날에는 승려들의 성공적 우기 수행을 축하하기 위하여 신도들이 사원에 가서 가사(袈裟)를 진상한다. 이러한 행위를 텃까틴(Thot Kathin)이라고 하는데 완억판싸가 끝나고 나서 한 달간이나 계속된다. 텃까틴을 하기 위해 신도들은 버스나 트럭을 타고 종이나 큰북을 치면서 사원으로 향한다.

4) 불교예술

(1) 불상
태국 내 크메르의 예술품들은 롭부리(Lopburi) 양식으로 분류한다. 롭부리는 태국 내 크메르 제국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롭부리 불상은 권위주의적인 모양을 하고 있는데, 평평한 사각형의 얼굴, 일직선의 눈썹, 나가(Naga)에 둘러싸여 왕관을 쓴 것이 특징이다.

쑤코타이 불상은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태국 고유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걷는 불상(Walking Buddha)이 만들어져 독립국가의 진취성을 보여주고 있다. 불상의 특징은 화염 모양의 머리, 곱슬곱슬한 작은 머리카락, 아치형의 눈썹, 길고 가느다란 코, 은은한 미소, 마른 몸, 넓은 어깨이다. 또 가사는 왼쪽 어깨에서 배꼽까지 드리워져 있으며 V 자형의 새김눈으로 마무리된다.

아유타야의 불상에는 15세기 뜨라이록까낫 왕 즉위 후 쑤코타이의 영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이후에는 아유타야 고유의 양식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7~18세기에는 크메르 양식이 도입되어 불상도 왕관을 쓰고 있는 권위주의적인 것들이 유행했다.

(2) 불탑
태국의 불탑은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대체로 종 모양의 실론(스리랑카)식 스투파(Stupa)와 옥수수 모양의 롭부리식 스투파인 쁘랑(Prang)으로 나눌 수 있다.

(3) 회화
태국의 회화는 불교 포교의 수단으로써 다음과 같은 주제를 많이 묘사했다.

① 차독
부처님 전생의 이야기(본생담)로 태국에는 이 중 최후의 10가지 이야기를 묘사하여 테마로 삼은 것이 많다. 석가가 싯다르타 왕자로 태어나 중생을 구제하는 데 필요로 했던 도덕적 미담 10가지-거부, 용기, 애정, 결심, 분별, 인내, 영원, 평정, 정직, 자선-가 주요 내용이다.

② 뜨라이품프라루엉
불교 우주관에 따라 세 개의 세계-천국, 현생, 지옥-를 묘사한 이야기이다. 인간은 전생에 지은 업에 따라 이 중 한 곳에서 태어난다고 한다. 이 작품은 쑤코타이 왕조의 리타이 왕이 처음으로 저술했는데 인간의 행복과 사회 · 경제적 지위는 업과 선행, 악행으로 결정된다는 가르침을 통해 왕권과 사회질서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③ 라마끼안
인도의 고전 서사시인 《라마야나(Ramayana)》 이야기를 태국식으로 편찬한 것으로 권선징악의 주제를 다루고 도덕관념을 가르치고 있다. 《마하바라타(Mahabharata)》와 함께 세계 최장편의 서사시로 알려져 있다. B.C. 3세기경 발미키(Valmiki)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며, 그 기원은 B.C. 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많은 태국본이 있었지만 1767년 아유타야가 버마에 의해 멸망할 때 소실되었으며, 현재는 라마 1세와 2세 때의 것이 널리 알려져 있다. 현 왕조의 왕들이 라마(Rama)라는 명칭을 세습할 정도로 이 작품은 태국의 정치 · 사회 ·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5) 태국의 불교문화와 브라만교

태국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뿐 아니라 브라만교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타이족이 1238년 크메르 제국의 속국 지위에서 벗어나 세운 쑤코타이 왕국의 3대 왕인 람캄행 대왕은, 크메르 브라만교의 영향력을 불식시키고 독립을 확고히 할 목적으로 스리랑카로부터 남방 상좌부불교를 도입해 왕권을 확립했다. 그러나 이어서 아유타야 왕국을 건립한 라마티버디 1세는 절대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브라만교를 정치에 이용하게 됨으로써 불교는 사실상 브라만교와 혼합되어 발전되기 시작했다. 이후 랏따나꼬씬 왕국의 몽꿋 왕이 탐마윳띠까니까이를 만들어 불교의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브라만교는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아유타야 왕조 때부터 랏따나꼬씬 왕조 중기까지 존속했던 많은 수의 브라만 사제들은 1932년 입헌혁명 후 크게 줄었다. 현재 태국 국민의 95% 이상이 불교도이며 승려 수는 30만 명 이상이지만, 브라만 사제의 숫자는 십수 명 정도로 왕실 관할의 브라만 관련 의식을 집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브라만교는 왕실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태국 문화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브라만교의 영향을 뚜렷이 살펴볼 수 있는 것은 관련 행사, 사원의 벽화, 조각물에 나타나고 있는 힌두 신들이나 신화 창조물 등을 통해서이다. 특히 쑤코타이 이래 오늘날까지 왕국의 수호신을 힌두교의 3대 신(神)인 브라흐마(Brahma), 비슈누(Vishnu), 시바(Shiva) 중 하나인 비슈누로 삼고 있으며, 왕국의 문장을 비슈누의 화신인 크룻(Garuda)으로 정하고 있는 데서도 브라만교의 영향력을 살펴볼 수 있다.

4. 태국불교의 현황과 전망

2012년의 자료에 따르면 태국의 승려 수는 20만 명, 사미승 수 8만 명인데 안거 기간 중에는 각각 30만 명, 10만 명 이상까지 증가한다. 사원의 수는 2만 9,000개이다.승가에는 두 종류의 종파가 있다. 첫째는 과거부터 유래한 전통적인 마하니까이(Mahanikai)이고 또 하나는 1836년 라마 4세가 주도적으로 만든 탐마윳띠까니까이(Thammayutikanikai)이다. 마하니까이가 97%를 차지하는데, 탐마윳띠까니까이는 마하니까이에 비해서 계율을 더욱 엄격히 지키며 역대 승가의 관리와 간부 계층을 장악해왔다. 또 역대 태국의 승왕도 탐마윳띠까니까이에서 선출된 경우가 많아, 이 때문에 마하니까이와의 갈등이 초래되기도 했다.

앞으로 승가법 개정은 국가권력의 정치적 목적보다는 승가의 순수성을 복원하기 위한 종교적 기능을 충족시키는 쪽으로 변화할 것이 예상된다. 승가법 개정과 관련된 쟁점 사항은 우선 승가 조직과 관련해서는 마하테라싸마콤에 집중된 권력을 분산시키는 일이다. 현재의 마하테라싸마콤 활동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가 우세한 실정이다. 태국의 국립행정개발위원회(NIDA, National Institute of Development Administration)가 2015년 2월 26~27일 전국 1,24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불교개혁 관련 설문조사 결과는 마하테라싸마콤이 매우 효과적이지 못하며(34%), 거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응답(19%)이 50%를 상회하고 있다. 마하테라싸마콤은 고도로 중앙집권화되어 있으며 노쇠해 있기 때문이다(2015년 기준 평균 연령 76세). 따라서 승가 조직의 권력분립은 향후 승가법 개정의 가장 중요한 쟁점으로 꼽힌다.

승가 조직 이외의 또 다른 쟁점은 승가의 세속화로 나타나는 현상들을 들 수 있다. 1990년대부터 태국 사회가 상업주의적, 소비주의적으로 변함에 따라 정치사회에서 전통적 문화의 양상도 세속화되고 있다. 태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은 불교에 많은 영향을 미쳐, 1990년대 이래 승려들은 점차 소비와 상업활동에도 관련이 되고 있다. 태국 저명한 불교학자인 쑬락은 승려들이 소비문화에 길든 재가신도를 따르기 때문에 점차 타락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많은 불교학자도 불교의 상업화가 승가 내의 도덕적 타락과 각종 스캔들-사원 재산 횡령, 마약 복용, 섹스 스캔들-을 초래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위 NIDA의 설문조사에서는 이 같은 승려들의 비행과 파벌 다툼을 이유로 들어 불교개혁에 동의하는 비율이 80%에 육박하고 있다(즉각 개혁 53%, 개혁의 필요성 동의 24%). 국가불교 사무국에 따르면 2012년 유사한 사건으로 연루된 총 6만 1,416명의 승려 중 300명이 견책을 받았으며, 여러 사건으로 승려직을 박탈당하는 일도 발생했다.

근래 들어서 승가 사회의 가장 충격적인 스캔들은 상업주의로 비난을 받고 있는 탐마까이 사원(Wat Phra Dhammakaya)의 주지인 탐마차요(Phra Dhammachayo)가 싸하껀클렁짠(Klongchan Cred-it Union Cooperative) 횡령사건 용의자로부터 10억 밧(Baht)을 기부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조사 진행 중인 사건으로, 큰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이 같은 승가 세속화 사례를 통해 승가의 정화를 위한 승가법 개정의 필요성이 끊임없이 대두되고 있다. 또 승가 쌍카랏(승왕) 대행으로 국왕의 임명 승인을 기다리고 있는 쏨뎃프라마하랏차망칼라짠(쏨뎃 추엉)에 대한 임명 지연 건도 이런 범주에 속한 사건이다. 임명이 지연되고 있는 한 가지 이유는 그가 고급 차(고전형 메르데스벤츠)를 구입하고 탈세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일부 승려들이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쏨뎃프라마하랏차망칼라짠은 이 자동차는 선물로 받아 그가 주지로 있는 왓빡남의 박물관에 보관 중인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현재 그는 이 사건으로 수사를 받고 있으며, 쁘라윳짠오차 총리는 불교계 분쟁이 가라앉지 않으면 국왕에게 쌍카랏 임명 승인을 요청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불교계 내부의 대립, 정부와 불교계 간의 대립으로 이 사건은 일파만파가 되어서 1992년 개정된 쌍카랏 임명 조항(마하테라싸마콤에서 쌍카랏을 추천하여 국왕이 임명)을 다시 원래대로 복원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2016년 12월 의회는 국왕이 쌍카랏을 직접 임명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5. 한국과 태국의 불교교류

근래 들어 한국과 태국 양국은 다방면의 인적 · 물적 교류를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이 중 별로 언급이 되지 않는 분야 중의 하나가 불교계의 교류이다. 양국 불교계 간의 실질적 교류가 이루어진 것은 비교적 최근이지만 이전에도 교류의 맥은 이어져 왔다.

그 시작은 1950년대 중 · 후반 한국의 스님들이 세계불교도우의회(WFB)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WFB는 세계적으로 가장 규모가 크고 영향력 있는 국제 불교단체로, 1950년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27개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설되었으며 태국에 본부를 두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1963년에 지부 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1990년과 2012년 두 차례 WFB대회가 개최되었는데, 1990년 대회에서는 당시 사회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서경보 스님이 준비위원장을 맡았었다. 1973년에는 한국의 중진 스님들이 태국 스님 12명을 초청해 통도사에서 계를 받은 사실도 있어, 한국과 태국 양국에 서로의 불교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양국 간 불교교류가 보다 다양화되고 본격화된 시기는 2000년대 초반으로 볼 수 있다. 1999년 12월 13일 유엔 총회에서 태국의 ‘베삭 기념일(Vesak Day)’을 국제적인 날(International Day)로 인정하고 해마다 유엔본부와 기타 지역의 유엔기구에서 기념행사를 치르기로 결정했다. ‘베삭 기념일’은 부처님의 출생, 득도, 열반 세 가지를 축하하기 위한 ‘완위싸카부차(부처님오신날)’로 태국력 6월 보름이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태국은 2004년 기념법회와 학술대회를 방콕 유엔컨벤션센터와 나컨빠톰에 있는 풋타몬톤(Buddhamonthon)에서 개최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차례(2008년 제5차 대회는 베트남에서 열림)를 제외하고, 2016년의 제13차 국제불교대회(International Buddhist Conference)까지 모두 태국에서 개최되고 있으며 여기에 우리나라의 불교계 인사들도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있다.

2007년 4차 대회에서는 22개국의 80여 개 불교 관련 기관으로 구성된 국제불교대학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Buddhist Universities, IABU)가 출범해 한국 대표들이 참석하고 있다. 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마하쭐라롱껀대학(Mahachulalongkornrajavidyalaya University)은 2001년 한국(부산)의 동국불교전법대학과 학문 결연 협정을 맺고 그곳에 분교를 설치했다. 1기 졸업생은 2005년에 배출되었고 2016년까지 12기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동국불교전법대에는 학사와 석사과정이 개설되어 있으며 학생들은 한국과 태국 본교에서 번갈아 수업을 받은 후 매년 5월 중 태국에서 치러지는 졸업식에 참석한다. 이들은 양국 불교교류에 가장 적극적이고 확실한 역할을 하는 인재들인 셈이다. 마하쭐라롱껀대학은 2007년 동국대학과도 학문교류 협정을 체결했으며 청도 운문사 승가대학과도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현재 방콕에는 한국의 한마음선원, 능인선원, 정토원 지부가 개설되어 있으며 한국에는 부산 태종대에 있는 태종사, 밀양 여래원 등에서 태국 상좌부불교 포교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태종사는 우리나라에 상좌부불교를 포교한 최초의 사원이다. 이 사원의 조실 스님인 도성 스님은 1972년 태국 승단으로부터 정식으로 비구계를 받았으며 2009년에는 한국 상좌부불교의 승왕으로 추대됐다. 태종사는 태국 탐마까이(Dhammakaya) 스님들이 한국 포교를 위해서 몇 년째 상주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양국 간 불교 교류가 다양화되는 예는 한국 내에 태국의 위빠사나 명상원이 설립되고, 한국 불자들이 태국 사원이나 명상센터에서 수련하거나 개인 또는 사찰 단위의 교류가 빈번해지는 데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김홍구 
부산외국어대학교 동남아창의융합학부 교수. 한국동남아학회장, 한국태국학회장, 국제지역학회장, 한국동남아연구소장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태국의 탐마라차와 테와라차 특성비교〉 〈태국과 한국의 불교정책 비교: 근대화 과정 전후를 중심으로〉 〈태국 승가법과 국가권력〉 등 다수와 《태국불교의 이해》 《태국문화의 즐거움》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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