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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불교의 역사와 현황 / 조준호
특집 | 동남아시아불교 집중 탐구
[69호] 2017년 03월 02일 (목) 조준호 yathabhuta@hanmail.net

1. 미얀마 개황

   

미얀마는 인도 동부와 방글라데시와 함께 ‘북벵골만’에 위치한 나라로, 5개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북서쪽으로 방글라데시와 인도, 북동쪽으로는 중국, 동쪽으로는 라오스, 남동쪽으로는 태국이 위치한다. 국토 면적은 67만 6,578㎢로 세계 40위이다. 한반도의 3배 크기이며, 대륙부 동남아 나라 가운데 가장 크다. 미얀마는 남북으로 2,040km에 달하여 전체적으로 열대와 아열대로 고온다습한 열대몬순기후대에 속해 인도와 비슷하다.

미얀마의 공식적인 국가 이름은 ‘미얀마연방(The Union of My-anmar)’이며 정치체제는 대통령중심제이다. 1989년 5월 버마 연방(The Union of Burma)에서 개칭했다. 미얀마의 수도는 과거에 랭군(Rangoon) 또는 양곤(Yangon)에서 2005년에 네삐도(Nay pyi taw)로 천도(遷都)하였다. 인구는 5,689만 418명(2014년 인구조사)으로 세계 24위이다. ‘버마’의 어원은 빠알리어(Pali) ‘brahma(뛰어난)’와 관련하여 설명되어 왔지만, 이는 미얀마 북부지역(upper Burma)을 지칭한 ‘머람마(mramma)’가 와전(訛傳)된 것이라 한다. 머람마는 버마족이 히말라야의 티베트고원에서 남하하여 현재의 미얀마 북부지역에서 머문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민족 구성으로는 버마족이 68%, 샨족 9%, 꺼인족(옛 명칭 까렌족) 7%, 라카인족 4%, 중국계 3%, 인도계 2%, 몬족 2%, 그 외 까친족, 친족, 꺼야족 등의 소수종족이 나머지 5%를 차지하고 있다. 이 가운데 불교 인구는 89%, 기독교 4%(침례교 3%, 가톨릭 1%), 이슬람 4%, 그리고 토속신앙 1%와 그 밖에 2%의 다른 종교 인구로 추산된다.

인종 계통상으로는 미얀마의 주요 민족인 버마족은 ‘티베트버마계(Tibeto-Burmese)’로 분류한다. ‘사이노티베트(Sino-Tibetan)’족의 지류인데, 이들은 원래 중국과 티베트에 이어 히말라야 산록 그리고 인도 아대륙의 동부와 동북부 등의 광범위한 지역에 살고 있다. 원래 미얀마인들의 기원지는 히말라야의 티베트고원 쪽에서 시작하여 차츰 현재의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이주하였다. 미얀마인들은 불교의 기원과 관련 있는 석가족처럼 ‘태양의 후손’이라 하고 공작을 민족의 상징 새[鳥]로 여긴다. 나라꽃은 붓다의 반열반과 관련한 사라나무(Shorea robusta)의 꽃이다. 미안마력(歷)은 M.E.로 표기하며, 불기 2561년이 미얀마력 1379년이다.

2. 불교의 전래

미얀마는 지리적으로 인도아대륙과 맞닿아 있다. 오래전부터 육로는 물론 해로를 통해 서로 내왕했는데, 과거에는 육로보다는 해로가 더 이동에 용이했다. 인도의 영향은 미얀마를 넘어 라오스나 캄보디아 그리고 태국 등 광범위한 지역에까지 이르렀으며, 기원전부터 인도와 동남아는 해로를 통해 민족의 이동과 문화교류, 무역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지리적 연계성과 관련하여 인도불교의 미얀마 전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석가족과 미얀마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들도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더가웅(Tagaung) 건국 전설이다. 미얀마에 최초로 세워진 더가웅 왕국은 기원전 850년경 인도 석가족이 이주해 건국한 것으로 전한다. 하지만 더가웅 왕국은 중국 남부 윈난(雲南)성으로부터 침입한 이민족에 의해 멸망했다고 한다. 그 후 부처님 재세 시에 코살라국으로부터 멸망당한 석가족이 현재의 미얀마로 도망쳐 와, 더가웅 왕국의 남은 일족과 힘을 합쳐 2차로 왕국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인도와 미얀마가 육로는 물론 해로도 바로 연결되어 있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모든 미얀마의 왕조와 왕들은 시원을 석가족의 계보에서 구한다. 더 나아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육로를 통해 직접 미얀마를 몇 차례 내방하였다고도 한다. 부처님은 500명의 아라한과 함께 미얀마를 방문하여 많은 사람을 교화하였으며, 아난다에게 미래에 이 땅에서 불교가 크게 번영할 것이라 예언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현재 미얀마불교의 상징이며 구심점 역할을 하는 쉐다곤 파고다의 건립을 부처님과 연결시키는 전설도 전한다. 율장(Vinaya Piṭaka) 《대품》에 의하면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이루고자 부처님께 최초로 공양을 올렸던 사람들은 따뿟사(Tapussa)와 발리까(Bhallika)였다. 이들은 먼 거리의 국가를 왕래하는 대상(隊商)이었는데, 마침 보드가야를 지나다가 부처님을 뵙고 최초로 귀의한 제자이며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후 계속해서 동쪽으로 이동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 사람은 미얀마에서 인도 서북쪽까지 무역하는 대상으로 보드가야를 거쳐 다시 동쪽의 미얀마를 향해 가는 중이었다고 한다. 이때 부처님께 올린 공양에 대한 답례로 부처님은 이들에게 여덟 개의 머리카락을 뽑아 주었다고 한다. 당시의 부처님 머리카락을 안치한 곳이 바로 쉐다곤 파고다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전설은 역사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미얀마인들의 불교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보다 좀 더 설득력을 얻고 있는 미얀마의 불교 전래 역사는 B.C.E. 3세기경 인도의 아쇼까 왕과 관련해서이다. 이때 불교의 제3차 결집이 이루어졌고 아쇼까 왕이 인도 변경과 다른 나라에 불교 전도단을 파견했다는 내용이 고대 문헌과 함께 아쇼까 비문의 마애법칙(磨崖法勅) 제13장에도 기록된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스리랑카 역사서에는 아홉 군데의 포교 지역이 나타나는데 그중 한 곳인 수와르나부미(Suvarṇabhūmi/ Pali: Suvaṇṇabhumī)라는 지명이 미얀마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수와르나부미는 ‘황금의 땅’이라는 의미인데 현재 미얀마 전역에 건립된 황금색 파고다를 연상하게 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는 시기적으로 버마족이 아직 미얀마 땅에 이주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역은 ‘황금의 땅’을 의미하는 미얀마 남부의 몬(Mon)족 지역의 타통(Thaton)을 지칭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미얀마 외에도 동남아 대부분의 나라는 수와르나부미를 자기 나라와 관련짓는 경우가 많다. 몬족은 호주-아시아계 인종으로 인도는 물론 동남아 지역에 분포하는 민족이다. 캄보디아와 태국 그리고 베트남 등지의 크메르족도 여기에 속한다. 미얀마에서는 몬을 탈라잉(Thalaing)이라고도 부르는데, 탈라잉은 남인도의 지명에 유래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여러 동남아국의 불교 전래와 수용은 몬족과 관련이 큰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티베트고원에 거주하던 버마족은 차츰 남하하는 과정에서 몬족의 불교를 접촉하게 되었다. 몬족 나라는 동인도나 남인도 그리고 스리랑카와 해로를 통해 교류했는데, 이러한 나라들과 미얀마는 벵골만을 무대로 해양불교를 꽃피웠다고 할 수 있다. 인도불교사에서도 벵골만에 연해 있는 동인도나 남인도의 아마라와띠 나가르주나꼰다 그리고 칸치뿌람 등지는 유명한 불교 중심지였다. 이는 중국 구법승인 현장 등의 여행기에도 증명되지만 현재에도 끊임없이 발굴되는 불교 유적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즉 남부 미얀마의 몬족 수도인 타통에서부터 스리랑카에 이르기까지 해로를 통한 교역로가 매우 이른 시기부터 형성되어 있었으며, 인도불교가 쇠망해진 이후에도 스리랑카와 미얀마가 후대까지 지속적으로 불교 교류를 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된 것이다. 5세기 초기불교 경전의 유명한 삼장 주석가인 붓다고사(Buddhaghosa)가 남인도 출신이라는 주장과 함께 타통과 관련이 있는 남부 미얀마 출신이라는 주장도 바로 이러한 해로를 통한 불교 교류의 배경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미얀마를 포함한 동남아에는 인도의 아소카 시대인 B.C.E. 3세기 전후에 이미 다양한 인도 문화가 전해졌을 것으로 본다. 바라문 힌두교는 물론 초기불교의 여러 부파, 대승불교 그리고 밀교 등이 함께 전해졌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 종교 문화가 혼재된 상황은 미얀마뿐만 아니라 다른 동남아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이나 계속해서 발굴되는 유적과 유물을 통해서도 증명되는데, 상좌부불교와 대승불교의 여러 보살상과 밀교의 따라(Tara)상이 함께 출토되었다. 미얀마에서도 대승불교와 밀교 등도 함께 신봉되는 다문화적인 상황이 11세기경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던 것이 점차 상좌부불교만이 국가적으로 주요 종교로 공인되었다.

3. 상좌부불교의 수용과 발전

1) 버마족의 불교, 버강 왕조

버마계의 또 다른 선주민으로는 몬족 외에도 쀼(Pyu)족을 꼽을 수 있다. 중국에서 쀼는 ‘표(驃)’라는 말로도 알려졌다. 쀼족은 몬족과 함께 이라와디 강(에야워디(Ayeyarwaddy)라고도 부른다) 하류에 몇 개의 도시왕국을 세웠다.

그중 가장 강성했던 나라가 이라와디 강 중류의 삐 왕국이었는데, 대략 B.C.E. 200년에서 C.E. 900년 정도의 기간으로 본다. 7~8세기경에 이 나라를 방문했던 중국인들의 문헌에는 국왕이 적극적으로 불교를 보호하고 장려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의 네 모퉁이마다 불탑과 금은으로 장엄한 수많은 사찰이 있었고, 백성들 역시 불심이 두터워 성품이 온화하고, 생명을 귀히 여겨 함부로 살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남녀 모두 7~10세 정도에 이르면 삭발하고 절에 들어가 불교 공부를 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현재의 미얀마 불교문화를 그대로 보는 것 같다. 즉 미얀마인의 온화한 성품과 신쀼(Shin Pyu) 의식을 생각하게 한다. 앞에서 언급한 더가웅(Tagaung) 왕국을 쀼족과 관련한 미얀마의 첫 불교왕국으로 본다.

버마계의 쀼족 이후 상좌부불교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인 왕조는 11세기경 버강(Bagan) 왕조이다. 버강 왕조의 아노여타(Anawy-ahta, 1044~1077 재위) 왕이 몬족 국가의 수도인 타통을 공격했을 때, 500여 명의 몬족 승려와 함께, 빠알리 경전 등의 불교문화를 대대적으로 도입하였다 한다. 그리고 몬족 출신의 ‘신 아라한(Shin Arahan)’이라는 스님으로부터 자문을 구하였다. 이로 본다면 ‘버마’계의 버강 왕조가 처음 상좌부불교를 수용하였던 것은 전적으로 몬족의 불교문화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왕은 적극적으로 스리랑카에 몬족 출신의 불교 사절단을 파견하여 불교 경전과 주석서 등을 구해 오게 하여 연구하도록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빠알리어 공부와 경전 연구 등의 교학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현재 미얀마불교의 특징은 같은 상좌부불교권에서도 아비달마 교학과 경전어인 빠알리 문법학 연구의 비중이 비교적 높다. 인도에 유학 온 상좌부불교국 스님들 중 아비달마와 빠알리 문법학에 특출한 미얀마 출신 스님들이 많은데, 이는 미얀마불교의 정초가 이미 12세기 때 확립되어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800년이라는 교학 연구 전통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버강 왕조의 수도는 버강(Bagan)이다. 미얀마 최초의 통일국가로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4백만 파고다의 도시’로 알려졌다. 캄보디아의 앙코르 유적,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 유적과 함께 세계 3대 불교 유적지로 손꼽히는 버강은 지금도 수많은 파고다가 도시 전체에 산재해 있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많은 파고다 가운데는 거의 완전한 형태로 옛 모습이 보존된 경우도 있지만 훼손된 유적도 많다. 마치 숲과 같은 버강의 수천 파고다 사이를 둘러보면 미얀마인들의 지극한 불심이 절로 느껴진다. 안타깝게도 버강 왕조는 1287년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하지만 여전히 당시의 주요 불교문화 유적은 현존하여 우리를 친절하게 맞이하며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2) 버고, 잉야 그리고 따웅우 왕조

1310년경, 몽골군이 물러간 이후 미얀마 중북부에는 샨(Shan)족에 의한 잉야(Innwa) 왕조가, 남부에는 버고(Bugo) 왕조가 성립되어 두 개의 왕조 시대가 열렸다. 버고 왕조에서는 미얀마불교사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 있는데, 담마제디(dham-mazedi, 1472~1492 재위) 왕이다. 그는 1476년에 비구와 사미를 해로로 멀리 스리랑카에 보내 스리랑카의 대사파(大寺派, Ma-havihara)로부터 여법한 수계를 받게 하고, 바른 수계법(受戒法)을 배워오게 하였다. 당시에 잘못 행해지고 있던 수계법과 계율 수지를 바로 잡아 승단을 쇄신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사적인 수계나 비밀 수계 등을 엄하게 금하고 율장에서 말하는 바에 맞는 구족계 수계가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다. 이때 스리랑카에서 들여온 수계 전통은 정통으로 간주되어 현재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이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이 담마제디 왕이 1476년에 건립한 마하까리야니시마(Mahakalyanisima) 계단(戒壇)의 비문에 남아 있다.

잉야 왕조의 샨족은 현재에도 미얀마 인구의 9%를 차지하고 있다. 이 왕조 역시 불교를 수용하고, 모든 왕이 불교 보호와 진흥에 열성적이었다. 하지만 왕들에 따라 불탑을 파괴하고 승려를 학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잉야 왕조의 불교 수용은 상좌부불교가 미얀마 북부 산악지대까지 멀리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대에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미얀마인에 의한 불교 저작 활동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초기불교 전통의 경전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나 논서에 대한 주석서 그리고 초기경전어인 빠알리어 문법서 등이 그것이다. 예를 들면, 논서에 대한 주석서로는 마하아리야왐사(Maharyavamsa) 스님의 아비담마타위바와니(Abhidhammatthavibhavaini)와 빠알리어에 관한 간타바라나(Ganthabharana) 등이 그것이다. 마하아리야왐사 스님은 15세기 중반에 활약했으며 그가 저술활동을 했던 사원은 현재에도 보존되어 있다.

이 외에도 이 시대의 많은 스님들이 붓다의 생애나 본생담을 소재로 한 작품을 남겼다. 그래서 불교학자들은 미얀마의 버강 왕조를 ‘불교가 미얀마화’한 시기라고 평가한다.

16세기에 이르러 샨족은 다시 버마족에 주도권을 내주게 되었다. 1510년, 버마족의 왕이 즉위하면서 따웅우(Taung Oo) 왕조가 미얀마 거의 대부분을 통일했다. 스리랑카로부터 장로 스님이 건너왔고 왕들은 많은 사찰을 건립하여 승원불교를 발전시켰다. 버잉나웅(Bayinnaung) 왕의 경우 잉야 왕조를 멸망시키고 인도의 마니뿌르, 중국의 윈난성 그리고 태국 등지까지 정복에 나섰다. 그는 독실한 불교도로 정복지의 사람들로 하여금 불교를 믿도록 강요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많은 불탑을 보수하고 불교 경전을 일반에 보급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한 스리랑카에서 불교가 발전되도록 지원하였고 샨족의 산간벽지에도 전법사를 파견하였다. 왕조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많은 학승이 배출되고 빠알리어로 쓰인 많은 초기불교 전적이 미얀마어로 번역되었다. 따웅우 왕조는 약 200년간 지속되었는데, 태국의 침입과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의 서구 세력의 압박을 받다가 멸망하였다.

3) 꽁바웅 왕조

1753년에는 꽁바웅 왕조 시대가 열렸다. 이 왕조는 미얀마 역사상 세 번째 통일왕조이자 마지막 왕조로, 미얀마는 이 왕조를 끝으로 식민통치의 질곡에 놓이게 된다. 이 왕조 역시 이전의 왕조와 같이 불교진흥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아 일반 대중에게까지 불교가 널리 보급되었다고 한다. 여러 곳에 사찰을 건립하고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도 재건했으며, 불교 전적을 미얀마어로 번역하고 연구했다. 특히 디가니까야(Dīgha Nikāya) 같은 경장의 주석서가 이 시기에 번역되었다.

이 시기에 스님이 마을에 들어갈 때 복식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큰 논쟁거리로 대두했다. 승복으로 양쪽 어깨를 모두 감싸는 통견(通肩)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편단(偏袒) 복식이 대립한 것이다. 결국 이에 대한 시비를 가리는 종교회의가 1788년에 개최되어 두 파가 논쟁을 한 후 통견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이 시대에는 사찰 내에서 불교 이외에도 춤, 무용, 점성술, 안마술, 승마술, 무술 등도 가르쳤다고 한다. 인도에서 많은 산스끄리뜨 문헌도 전해져 새로운 문물을 접촉할 수 있었다.

더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은 스리랑카와의 불교 교류이다. 당시 스리랑카에서는 왕명에 의해 상류 계층에만 구족계를 받는 출가를 허용했다. 그러자 출가를 원하는 하층민들은 반발하였고, 급기야 이들은 벵골만을 항해하여 미얀마에 도달하여 구족계를 받아 돌아가고자 하였다. 1800년 미얀마에 들어온 스리랑카 스님들은 왕의 환대와 함께 구족계를 받고 1802년에 다섯 명의 미얀마 스님들과 함께 많은 빠알리 전적을 가지고 스리랑카로 돌아갔다. 스리랑카 불교 교단의 대표인 승왕(僧王, sangharaja)에게 전하는 서신도 가지고 귀국하였다. 이후 스리랑카에서는 그들에 의해 ‘아마라뿌라 상가(Amarapura Sangha)’라는 새로운 상가가 생겨, 현재까지 스리랑카불교의 한 종파로 내려오고 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192년에 미얀마의 스님이 스리랑카에 가서 구족계를 받아 미얀마에 상가를 형성한 이래 다시 스리랑카에 되돌려 준 일로서 상좌부불교권이 하나로 통하는 역사와 전통을 보여준다.

꽁바웅 왕조 시대에 또 하나 중요한 사건은 불교 역사상 제5차 결집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제5차 결집은 민돈(Mindon, 1853~ 1878 재위) 왕의 주재로 1868년에서 1871년까지 약 3년 동안 만달레이에서 2,400명의 학승에 의해 이루어졌다. 불교에 정통한 학승들의 감독 아래 빠알리 삼장(三藏)을 독송하며 교정했는데, 패엽경이 필사되어 오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자나 탈자 등을 교정하기 위해 참여자의 합송(合誦)만도 무려 5개월 동안 진행되었다고 한다. 오류를 바로잡아 교정된 삼장은 총 729매로 4년에 걸쳐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흰 대리석에 새겼는데, 율장 11매, 경장 410매, 논장 208매였다.

민돈 왕의 제5차 결집의 의도는 자주 국가의 면모를 세계에 알리고 불심으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일환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영국이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이미 미얀마 중 · 하부를 장악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얀마의 자주권을 지키고자 했던 민돈 왕은 수도를 잉와(Ava)에서 만달레이로 옮기고, 내륙 중심부를 흐르는 이라와디 강의 항로를 정비하고 교통체계를 확대하는 등 산업화와 근대화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서구열강의 위협에 흐트러진 민심을 불법으로 수습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제5차 결집이라는 불사를 통해 대내외적으로 미얀마의 위상을 높이고 구심점을 모아 절박한 시대 상황을 타개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영국과도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영국을 견제할 수 있는 다른 유럽 세력과도 균형을 이루는 외교력을 발휘해 미얀마를 외침으로부터 지켜나갔다. 이는 고려 시대 몽골의 침입 시에 국난극복의 방법으로 대장경을 간행했던 우리의 역사를 떠오르게 한다. 특히 미얀마에서의 제5차 결집은 1856년이 부처님 탄생과 성도 그리고 반열반 2,400주년임을 기념하는 불사였다고 한다. 현재에도 제5 결집의 결과물인 대리석판에 새겨진 석경은 만달레이 구릉에 잘 봉안되어 있는데 그 모습은 실로 장관이다. 각각의 석경은 파손을 막기 위해 탑 속에 안치되어 있는데, 입구에는 다채롭고 화려한 모습의 꾸도더(Kuthodaw) 파고다가 있다. 이 파고다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책(The World’s Big-gest Book)’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민돈 왕은 평소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교단의 정화와 발전 그리고 포교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 외에도 그는 1858년에 타락한 승려들을 참회시키는 정화와 외세가 침투한 남부 미얀마로의 전법 활동을 장려했으며, 불교 성전 시험을 대대적으로 여는 정책 등을 펼쳤다. 또한 이 시기에 미얀마의 2대 분파인 셰진(Shwezin) 종파와 수담마(Sudhamma, 또는 뚜담마(Thudhamma)) 종파가 확립되었다고 한다. 민돈 왕이 죽고 난 후 그의 아들 띠보(Thibaw)가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그는 꽁바웅 왕조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미얀마는 영국 제국주의와 벌인 1824년과 1852년의 두 차례의 전쟁에 이어 마지막 세 번째 침탈에 결국 무너져 1886년,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4) 영국의 식민지배와 독립운동

1886년 1월 1일, 영국령으로 선포된 미얀마는 다시 영국령 인도의 한 주(州)로 편입되었다. 영국은 ‘분할통치(divide &rule)’ 방식을 택하여, 미얀마의 지배 민족인 버마족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산간이나 주변부의 소수종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고 했다. 오래전부터 미얀마에 들어와 선교하려 했으나 쉽게 개종을 이끌어내지 못하던 기독교 선교사들은, 불교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적고 부족의 토속신앙이 강한 문맹의 산악 지역의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영국은 이렇게 개종한 주민들을 미얀마 식민통치의 부역자로 이용하였다.

현재도 기독교로 개종한 지역의 부족은 분리독립을 위해 중앙정부와 계속해서 충돌을 빚고 있어 미얀마 정국을 불안케 하는 주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인도에서 이주해온 이슬람교와 함께, 미얀마의 종족 간, 종교 간 갈등과 반목을 초래한 역사적 배경이 바로 기독교 개종이라고 할 수 있다.

미얀마 민족주의 운동은 1916년에 영국인들이 불교 사원에 신발을 신고 들어온 행위가 그 계기가 된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인도를 비롯하여 동남아 불교권에서는 사찰 내에서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것이 기본 예의이다. 성스러운 장소에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것은 대단히 불경스러운 실례를 범한 것으로 간주한다. 영국인들의 이러한 무례에 청년불교도연맹은 영국 식민당국에 사원 내의 탈화(脫靴)를 법적으로 규정해 달라고 성명서를 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스님들은 성명서에 서명하는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다시 1919년에 유럽 관광객들이 또다시 신발을 신고 사찰에 들어오자 스님들과 불교도들은 식민정부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집회를 열었고, 위협을 느낀 영국은 정식으로 사과하고 사찰 내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도록 공표하였다.

미얀마의 청년불교도연맹은 계속해서 자치권을 얻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면서 점차 정치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전국적인 모임을 통해 ‘전국불교도평의회(GCBA)’로 이름을 바꾼 청년불교도연맹은 이후 다시 다른 조직과 힘을 합쳐 ‘전버마평의회(General Council of Burmese Associations)’로 확대 개편되었다. 전버마평의회는 영국 상품 불매운동을 전개하여 스님들이 시장을 돌며 국민에게 운동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미얀마에는 청년불교도연맹과 같은 불교운동단체 외에도, 이미 1897년부터 전국 각지에서 불교단체들이 결성되어 불교를 보호하고 진작시키려는 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중북부인 만달레이의 불교협회(Buddhasasananugaha), 남부 지역인 몰라민의 불교수지회(Sasanadhara), 서부 뻬테인의 아쇼까협회(Asoka Society) 등이 대표적이다. 미얀마 근대사를 보면 이처럼 출가 스님들이 역사와 민족을 위해 그리고 민중의 고통을 달래주고자 적극적으로 참여한 ‘참여불교’를 만나게 된다.

청년불교도연맹(YMBA)의 지도자는 반식민지 · 반영 투쟁운동으로 유명한 우 옥뜨마(U Ottama) 스님이었다. 그는 미얀마 대중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처음에는 양곤대학의 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던 투쟁운동은 곧 다른 학교로도 파급되었다. 영국 지배에 항거하는 민족해방운동을 펼친 우 옥뜨마 스님은 우 위자라(U Wissara) 스님과 함께 전국적 규모로 반영운동을 확대시킨 지도자로 존경받았다. 그는 “불교 교단은 한마음으로 자신들의 정신적 이익을 위해 집중해 있을지라도 민중들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불법의 위상은 신앙심이 좋은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다. 교단의 보살은 반드시 고난 속에 있는 중생들을 이끌어야만 한다”고 보살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승가의 사회참여를 독려하였다. 그는 인도의 간디에게서 영국 식민정부에 협력하지 않는 저항운동을 배워 미얀마 각지에 세금을 내지 말 것, 외국상품을 구입하지 말 것을 등을 선동하고 미얀마 문화를 파괴하는 영국을 비판하다 결국 여러 차례 체포와 구금을 반복했다.

우 옥뜨마 스님과 함께 청년불교도연맹에 속했던 우 위자라 스님은 경찰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반영 설법을 하다가 투옥당하기를 거듭했다. 그는 세 번째 투옥 시 단식으로 대항하다 166일 만에 옥사하였다. 감옥에서 죄수복 대신 가사를 입도록 해주고 형무소에서도 보름마다 포살을 허용할 것을 주장하는 166일간의 단식농성 끝에 옥사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영국 정부는 다른 스님들이 투옥되었을 때 가사 착용과 포살을 인정했다.

우 위자라 스님이 옥사한 다음 해에 영국 통치에 저항하는 최대 규모의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1932년에 진압되기까지 1만 명이 사살되고, 8,000명이 체포되었으며 28명이 사형, 270명이 무기징역형을 받은 후에야 봉기는 막을 내렸다. 이때 농민 봉기를 이끈 지도자는 사야 산(Saya San) 스님이었다. 사야 산 스님 또한 체포되어 1937년에 교수형을 당했다. 이어 우 옥뜨마 스님도 거듭되는 투옥 끝에 1939년 결국 옥사하였다.
이후에도 수많은 출가 스님들은 영국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국민의 지도자가 되어 반영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많은 스님이 투옥되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같은 불교 승려들의 투쟁과 반복적인 투옥은 미얀마 국민에게 반영 사상을 더욱 고조시켰다.

미얀마 독립에 크게 역할을 한 또 다른 단체는 1930년에 학생들을 주축으로 조직되었는데, 자신들의 이름 앞에 ‘떠킹(Thakin)’이라는 단어를 붙였다. ‘떠킹(Thakin)’은 미얀마 말로 주인이란 뜻으로 꺼인(Kayin), 까친(Kachin) 그리고 샨(Shan)족 출신 병사들이 영국군 장교를 ‘떠킹’으로 여기고 있는 것에 반발하여 ‘미얀마인이 주인’이라는 의식을 심어주기 위하여 이름 앞에 떠킹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국을 돌면서 강한 민족의식과 독립의식을 고취했고 1940년에는 출가 스님들도 이러한 운동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교육 문제와 관련하여 학생파업을 주도하기도 했는데, 이 운동의 지도자는 마웅 아웅 산(Maung Aung San)과 마웅 누(Maung Nu)였다. 아웅 산은 후일 미얀마 독립을 이끈 인물이 되고 마웅 누는 미얀마의 초대 수상이 되었다.

5) 일제의 미얀마 점령과 미얀마 독립

미얀마청년불교도연맹(YMBA)은 1917년과 1919년에 미얀마의 자치권을 얻기 위해 인도와 영국에 가서 활동하였으나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인도에는 자치제를 허용한 반면, 미얀마에는 허용하지 않은 영국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더욱 고조되어 불교가 앞장선 종교적 투쟁보다는 종교와 분리된 정치적 투쟁으로 점차 선회하였다. 1930년대 말기에 이르러 스님들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운동이 점차 젊은 학생들이 주도하는 투쟁으로 방향이 옮겨갔다.

1942년 3월에 이르러 미얀마는 다시 일본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일본군이 진입한 시기에 일본은 미얀마 내 일본에 대한 국민적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도쿄에서 열린 ‘대동아불교대회(Great-er East Asia Buddhist Conference)’에 미얀마 불교도를 초청하였다. 그리고 미얀마가 형제의 나라이며 같은 불교국임을 주지시키기 위해, 양곤에 새 파고다를 건립하고 불사리를 봉안하여 미얀마인의 인심을 얻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이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란 구호 속에 미얀마를 다시 종속시키려는 의도를 보이자, 아웅 산은 일본군과 함께 퇴각시켰던 영국을 다시 끌어들여 1945년 3월 27일 일본군을 미얀마에서 몰아냈다. 미얀마는 이날을 미얀마의 ‘국군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마침내 1945년 8월 28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미얀마는 약 3년 남짓한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다시 영국의 영향권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미얀마 독립을 위한 아웅 산과 영국과의 협상이 성공하여 드디어 1948년 1월 4일에 완전한 독립을 맞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아웅 산(Aung San, 1915~1947)은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반대파에게 암살당했다.

불교와 관련한 아웅 산의 입장을 살펴보면, 1940년 아웅 산은 불교를 앞세운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견지에서 정치와 종교는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종교는 정치와 본질적으로 달라 함께하면 종교의 순수성이 떨어질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우 누(U Nu)를 중심으로 하는 ‘버마연방공화국’의 가장 중요한 사안은 불교사회주의와 불교국교화 문제였다. 독립 후에도 미얀마가 불교를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우 누의 불교관에서도 잘 나타난다. 우 누 수상은 영국 식민지배 기간에 생긴 미얀마의 대립과 무질서를 불교를 통해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사회주의를 불교적 입장으로 수용하는 것을 강조했는데, 불교와 사회주의는 유사점이 있어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 경제적 평등을 이루고 욕망을 절제하여 많은 휴식과 명상으로 해탈로 나아가야 함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경제 이념은 ‘불교경제(Buddhist Economics)’라고 불렸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쓴 경제학자 E. F. 슈마허(1911~1978)가 우 누의 경제 자문역이었다. 그가 1955년 미얀마를 방문했을 때, 소득수준은 낮지만 행복한 삶을 사는 미얀마 사람들을 보고 체득한 새로운 경제철학 저서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고 한다.

우 누는 사회주의도 종교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어야 함을 강조하며 자신의 불교사회주의를 민주주의와 조화를 이루려고 시도했다. 특히 개인의 의지와 자유를 존중하는 불교와 민주주의는 서로 부합한다는 견해를 자주 표명했다. 또한 경제 문제에서 사회주의 경제정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영국 식민지배로 인해 미얀마인보다는 영국인, 인도인, 중국인 등 외국인들이 미얀마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도입이 필요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누는 초대 수상으로서 불교철학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접목하여 미얀마 연방을 새롭게 건설해 보려고 하였다. 우 누는 네 윈과 같은 ‘30인 지사’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독립 후 최초의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어 미얀마연방의 수상에 취임했으며 다시 1960년에도 2대 수상으로 취임했다.

4. 미얀마불교의 현황

1) 국가와 불교의 관계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얀마는 불교, 국가, 승가, 국민이라는 네 요소의 관계로 설명된다. 이 네 요소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여 사회적 통합력을 유지해 왔지만, 영국 식민지배 기간에는 이러한 관계가 단절되었다. 즉 영국 식민정부에 의해 국가와 기타 세 가지 요소인 불교, 승가, 국민의 긴밀한 관계가 성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식민정부가 불교의 후원자나 보호자 같은 역할과 기능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는 영국의 미얀마 식민지배의 주요 실패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불교를 중심으로 하는 미얀마 민족주의 운동이 가속화된 원인이기도 했다. 미얀마는 독립과 함께 국가와 승가 그리고 국민의 긴밀한 전통을 회복하였다.

우 누는 독립한 미얀마의 초대 수상으로서 불교와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의 조화를 시도하는 정책을 폈다. 계속해서 여러 불교 진흥책과 불교 국교화를 추진하려 했다. 그의 정책은 국민적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불교 국교화를 반대하는 종족과 종교의 반발을 야기했다. 결국 그러한 시책은 미얀마 정국 불안의 요인이 되어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빌미를 제공했다.

1962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네 윈은 불교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입장을 견지했고, 이후 오랫동안 미얀마는 정치 · 경제적으로 정체를 면치 못해 왔다. 그 과정에서 군부에 항거하는 민주화 시위가 계속되었으며, 군사정권은 개혁 · 개방과 민주화를 약속하며 현재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독립 이후 네 윈을 포함한 미얀마의 모든 정권은 불교와 사회주의를 결합하는 정책을 변함없이 추진했다. 최근에는 군부독재에 저항했던 야당 지도자인 아웅 산 수 치가 집권한 민간정부가 들어서면서 불교의 모습이 새롭게 변화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미얀마 국민의 불교 신봉 태도는 변함없을 것으로 보인다. 1948년 독립 이후 국제적 차원의 제6차 경전 결집 등을 개최하여 국내외에 미얀마불교의 역량을 과시하였고, 국제적으로도 세계불교회의를 개최하는 등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2012년에는 부처님 성도 2,600주년을 기념하여, 12월 15일부터 17일간, 세계 불교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다양한 행사를 국가적 차원에서 개최하였다.

2) 불교 인구의 구성

일반적으로 미얀마의 불교 인구는 전체 인구의 89%로 추정하지만 최근 조사에 의하면 87.9%로 약간 감소한 것으로 나타난다. 불교 외에는 기독교(침례교와 가톨릭) 6.2%, 이슬람교 4.3%, 낫(Nat) 신앙(토속종교) 0.8%, 힌두교 0.5%, 기타 0.2%, 무교(無敎) 0.1%라고 한다. 2014년 이전의 자료에서 나타난 통계인 불교 89%, 기독교 4%(침례교 3%, 가톨릭 1%), 이슬람교 4%, 기타 3%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민족 구성과 관련해 불교 인구의 90%가 버마족이며, 그 밖에는 샨족이나 몬족 등이다. 외국 선교사에 의한 미얀마 국내 선교는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미얀마에는 5만 8,399개의 사찰이 있으며 출가자 수는  비구 22만 6,508명, 사미 2만 5,834명 그리고 여성출가자(Thila-shin)는 3만 명에서 9만 명까지로 추산한다. 여성출가와 관련하여 미얀마는 사미니나 비구니를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8계나 10계를 준수하는 틸라신(Thila-shin)이라는 여성출가자를 인정하고 있다. 최근 들어 이러한 여성출가가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3) 미얀마불교의 종파

불교 승단과 종교를 관리하는 미얀마는 정부기관으로 종교성(宗敎省: Ministry of Religious Affairs)이 있다. 미얀마불교 종파는 1990년 승가조직법(The 1990 Law Concerning Sangha Organi-zations)에 의해 공인된 9개 종파(Nikaya)가 있다. 수담마(Sudha-mma, 또는 뚜담마), 셰진(Shwegyin), 마하드와라(Mahādvāra), 물라드와라(Mūladvāra), 아나욱차웅드와라(Ana-uck Chaung dvara), 웰루완(Veḷvan), 켓뜨윈(Hgettwin), 가나위묵(Ganavimukkutho) 그리고 마하인(Mahayin)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18세기 후반에 창종한 수담마는 가장 큰 종파로 출가자의 85~90%를 차지한다. 이 종파는 영국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운동과 군부독재에 대한 민주화 운동 등에서처럼 사회와 정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다음으로 셰진은 19세기 중반에 수담마로부터 분종한 파로서 약 5% 정도이다. 셰진은 수담마보다 엄격하게 계율을 강조한다. 셰진은 수담마와는 반대로 영국 식민지배에 대한 국수주의적 저항운동에 비참여적인 경향을 보여왔으며, 1960년대에는 군부의 네 윈(Ne Win)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이러한 종파들 사이에 교학이나 수행상의 큰 차이점은 없다. 하지만 계율을 지키는 수준과 착의법 등의 세부적인 계율 규정이 종파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면, 수담마는 우산의 사용, 흡연과 꽁야(Kun Ya, 씹는 담배) 등을 허용하는 반면, 셰진은 엄격하게 금지한다. 수담마는 사찰 안이나 밖에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복식 차림인 데 반해 셰진과 드와라는 외출 시 양쪽 어깨를 모두 감싸는 통견(通肩)을 하는 차이가 있다.

4) 한국불교와 교류

중국은 남진정책의 일환으로 미얀마와 불교를 매개로 하는 교류를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으며 인도 또한 중국을 견제하는 동방정책으로 미얀마와 불교 교류를 경쟁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한국불교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미얀마의 불교문화 유적을 순례하는 한국의 성지순례단과 위빠사나 수행센터를 찾는 한국인들이 늘고 있는 추세이다. 미얀마의 위빠사나 수행법은 한국불교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한국에 미얀마 이주민을 위해 여러 미얀마 사찰이 건립되어 상좌부불교가 행해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미얀마에 한국 사찰(미얀마 고려사-담마마마까)도 건립되었고 양국 간 여러 방면에서 불교 교류가 진행되고 있다.

미얀마의 역사 환경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다. 각각 영국과 일본이라는 제국주의의 식민 경험이 있고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으로서 형성되는 민족주의가 그것이다. 민족주의는 다시 군부 통치를 허용하는 혼란스러운 정치적 환경으로 나아가 오랜 군사독재와 다시 이에 저항하는 민주화 흐름도 그 궤를 같이한다. 이러한 역사적 인과(因果)로 한국은 남북 분단의 현실, 미얀마는 종족 간 종교 간 갈등과 경제발전의 침체라는 여파가 상존하게 되었다. 물론 양국은 서로 다른 점이 있다. 한국은 수출 지향의 자본주의로 경제적 발전을 이룬 반면, 미얀마는 사회주의적 성향의 정책으로 1962년 군사 쿠데타 이후 ‘시간이 멈춘 나라’로 경제적 후진 상태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불교는 역사적으로 미얀마 국가의 정체성과 사회통합의 구심점으로 작용해 왔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불교는 앞으로도 미얀마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적 역할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

 

조준호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동국대 및 인도 델리대 불교학과 석사 · 박사. BK 21 불교사상연구단, 동국대 불교학술원 전임연구원, 한국외대 인도연구소 연구교수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대승의 소승폄하에 대한 반론〉 〈위빠사나 수행의 인식론적 근거〉 등이 있으며, 저서로 《우파니샤드 철학과 불교》 등과 역서로 《인도불교 부흥운동의 선구자-제2의 아소카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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