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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2위 종교가 된 불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열린논단 제79회 토론(요약)
[69호] 2017년 03월 02일 (목) 송진영 한양대 국문과 재학

편집자 주
 *  이 요약문은 윤승용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의 〈최근 종교인구 변동과 그 의미〉 발제에 대한 열린논단의 토론(2017년 1월 19일)을 정리한 것이다. 홍사성 본지 주간의 사회로 이도흠 본지 편집위원장과 박병기 · 허우성 본지 편집위원이 지정토론을 했다. 열린논단 참석자들도 토론에 참가했다.

   


사회 : 윤승용 선생님의 발제를 중심으로 해서 네 가지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하겠습니다. 첫째, 왜 종교인구 감소 시대 또는 무종교 시대가 왔는가, 둘째 불교신자의 감소 원인이 무엇인가, 셋째, 불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아울러, 앞으로 10년 뒤 2025년쯤 되면 어떤 결과가 올지에 대한 전망도 해주셨으면 합니다. 먼저, 지정토론자께서 이 주제에 대해 말씀해주시고 다시 답변을 들어보는 방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이도흠
본지 편집위원장, 한양대 교수

이도흠(본지 편집위원장, 한양대 교수) :
훌륭한 발표를 해주신 윤승용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회자가 네 가지 토론주제를 주셨습니다. 이 과제는 별도로 논문 한 편을 쓸 만한 양의 것이지만, 될 수 있는 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1주제인 종교인구 감소 시대, 무종교 시대 도래에 대한 저의 생각입니다. 윤승용 선생님의 발표에 대해 큰 틀에서 동의하지만, 일부 보완했으면 하는 사항은 대략 다섯 가지 정도입니다. 첫째, 탈근대적 지향 문제는 윤 선생님과 비슷하지만 해석이 다릅니다. 근대에서 인간은 진리나 신을 확정할 수 있는 것, 신을 초월적 타자로 간주하였습니다. 하지만, 탈근대에 와서는 초월적 타자로서 신, 이성중심주의(logo-centrism)를 해체하면서 신과 진리에 대해서 회의하게 되면서 종교 자체에 대해서도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둘째, 과학의 발달로 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에 회의가 왔습니다. 지금 신자들이 병에 걸리면 신께 기도하기보다 의사와 과학기술에 더 의존하는 것처럼 과학이 발달할수록 창조주나 절대자로서 신에 대한 믿음은 약해질 것입니다. 셋째, 자본주의 체제,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절, 교회, 성당에 시장 논리가 확산되고 종교 또한 상품화되면서 성직자나 수행자, 신자 모두 탐욕을 중요시하고 내면화하면서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고 궁극적 진리나 의미로 가득한 삶을 외면하게 되었습니다. 넷째, 종교가 사회적 역할을 국가나 시민사회단체에 내주었기 때문입니다. 범박한 신자들에게 종교란 소망 실현인데, 이제 국가나 시민사회단체가 종교보다 소망을 더 잘 이루어주게 되었습니다. 국가는 복지를 담당하고 시민사회단체는 국가나 자본에 맞서서 시민의 편에서 소망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대다수 신자가 억울하거나 불안, 가난 등의 위기에 처하면 국가에 요구하고 시민사회단체를 찾아가고 그런 뒤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윤 선생님과 유사한데, 이런 4가지가 어우러지면서 종교의 사사화가 촉진되었습니다. 영성종교가 확대되고 개인의 수행이나 깨달음으로 종교가 변화하게 되면서 제도종교는 자연스레 갈수록 위축되고 있습니다.
제2주제는 불교신자 감소의 이유인데 저는 대략 9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 기독교는 근대화와 서구화, 산업화, 그 뒤의 세계화와 결합하였는데 불교를 비롯한 전통종교는 그러지 못하는 바람에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로 전락하고 젊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였습니다. 둘째, 압축적 근대화로 야기된 문화 지체나 공동체 해체에 기독교는 대응했는데 불교는 거의 대응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셋째, 과학이 발달하면서 기복성이 강한 불교에 대한 믿음이 약화한 때문입니다. 넷째, 자본주의와 불교가 결합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럽은 프로테스탄티즘이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이에 맞는 이념과 윤리를 형성하였는데, 불교는 자본주의와 결합할 수 있는 논리를 개발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교리와 자본주의적 삶이 일상에서나 종교의 장에서나 괴리를 빚었고, 외려 스님들과 신자들이 자본주의의 논리에 포섭되어 불교의 교리나 윤리를 저버리게 되었습니다. 다섯째, 스님들의 범계 행위가 극심해지면서 신도들이 절을 등지게 되었습니다. 여섯째, 종교가 사회적 역할을 국가와 시민사회단체에 내준 것이 종교인구 감소의 원인인데, 불교는 기독교에 비해서도 상대적으로 훨씬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였습니다. 민주화 운동이나 빈민구제에 기독교는 적극적이었지만, 불교는 아주 미미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현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불평등인데 불교는 불평등 문제에 대하여 거의 대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중생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도, 아픈 곳을 달래주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일곱째, 디지털 사회건, 탈근대 사회건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불교는 변한 세계를 해석하지 못한 채 2,500년 전의 교리만 반복하였습니다. 여덟째, 절을 사부대중이 아니라 스님들만의 공동체로 만들고 스님들이 거의 모든 것을 독점하며 재가불자를 주변화하였기 때문입니다. 아홉째, 대중의 사사화 경향에 대해 기독교는 신도 조직을 더욱 강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의례와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데, 불교는 조직된 것조차 해체하며 비구의 독점을 강화하고 사사화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제3주제인 대안 또한 원인에 따라 처방해야 한다고 봅니다. 21세기의 변화한 세상과 대중, 그들의 삶에 맞게 교리를 재해석하고 계율을 현대화하여 스님은 물론 사부대중이 윤리적 자세를 확립하여 절을 중심으로 청정한 승가공동체를 만들고 적극적으로 사회적 역할을 하며, 기복성을 극복하고 대중에게 올바른 의미를 안겨주어야 합니다. 중생들의 아픔의 원인을 분석하여 중생들의 아픔에 동체대비심으로 공감하고 그를 치유하는 일에 불교가 앞장서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출가자와 재가불자가 화이부동(和而不同), 곧 각자 역할 분담을 하면서도 부처님의 뜻과 마음을 따르고 열반에 함께 이르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부대중 공동체를 바탕으로 모든 신자를 조직화하고 여러 의례와 사회활동에 신자들의 적극적 참여를 도모하고 디지털 시대에 부합하는 다양한 포교활동을 적극 수행해야 합니다.
제4주제는 앞으로의 전망입니다. 여태까지 우리는 이분법으로 이 세계를 바라봤습니다. 신과 인간, 기계와 생명으로. 그런데 생명에 대해 ‘물질대사를 한다, 외부와 상호작용을 하면 변화하고 진화한다, 자율적으로 자기 결정을 한다, 자기복제를 한다’ 등 몇 가지로 정의할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을 기계가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분법적인 분리가 가능했어요. 그러나 앞으로는 기계가 인공지능과 결합하여 생명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게 되기에 기계와 생명의 구분이 모호해지게 됩니다. 또, 인간이 생명의 복제와 창조에 개입하고 인공장기를 통해 수명을 늘리면서 인간과 신의 경계 또한 모호해지고 있습니다. 형이상학적으로도, 인간에게서 신을 발견하거나 신에게서 인간을 발견하고, 무한한 신이 유한한 인간에 들어오려면 인간 또한 무한해져야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해석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앞으로 자기복제를 하는 로봇이 만들어지고 인간과 로봇의 중간적인 존재인 안드로이드가 집단을 형성하면, 인간관과 신관에도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리라 봅니다. 따라서 신과 종교의 개념 자체가 변할 것이고 새로운 패러다임에 따라 교리도 달라지리라 봅니다.

   

박병기
본지 편집위원, 한국교원대 교수

박병기(본지 편집위원, 한국교원대 교수) :
전체적으로 종교인구가 감소한 원인에 대한 분석은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만,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될 지점은 종교인구 감소가 서양에서 먼저 일어난 현상이라는 점입니다. 유럽에서 교회가 텅텅 비는 현상들이 나타났는데, 성직자들이 이미 윤리적 · 도덕적 권위를 상실한 데서 기인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요인도 있습니다. 울리히 벡은 종교를 ‘제도종교’와 ‘종교적인 것’으로 구분하면서 현대와 같은 ‘위험사회’에서 제도종교는 지속적으로 소멸하지만, 종교적인 것은 더 증가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위험이 개인의 실존적 국면으로 유비쿼터스적으로 존재하여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것이 위험사회이기에, 종교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면을 구분하면서 한국적 특수 상황을 고려하여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울리히 벡은 그리스도교가 정작 본산인 유럽에선 천대받는데 남미, 아프리카, 한국 중심의 아시아에선 인구를 늘리고 있기 때문에 전체 인구는 줄지 않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마찬가지로 아시아권에서 연원한 불교는 서양에선 상당히 열광하는데 오히려 제도불교권의 상징인 미얀마에서조차 외적으론 승가공동체가 견고한 느낌이지만 실제로는 급속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미얀마를 방문했을 때 거지 차림의 스님이 탁발을 하는데 가이드가 막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스님의 권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온전하지 않고 금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가 여러 비판에도 유지되거나, 약간 늘어나는 배경에는 그 뿌리로부터 멀어진 것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독교는 새로운 종교입니다. 개신교가 보여주는 역동성, 교회 가면 얻을 수 있는 돈과 권력, 공동체 의식 등이 어우러져 대형교회 중심으로 신자 증가가 이뤄지고 있고, 기독교 외부에서는 전통이 아닌 이단의 확산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불교신자가 크게 감소한 것은 당황스럽지만, 전체적인 흐름으로는 종교인구 감소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압축적인 근대화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개인화 현상 또한 두드러지게 일어났습니다. 가족 구성원의 변화뿐 아니라 가치관 차원에서도 가족끼리도 대화가 잘 안 되고 개개인 각각의 가치관이 공존하게 되었죠. 그다음 우리 사회에 요즘 후안무치한 자들이 많습니다. 그런 방식의 비윤리적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종교라는 게 어려운 고통을 당할 때 마음 편안히 해주어야 하고, 더 궁극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란 물음에 답을 해주어야 합니다.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담고 있는 잘 살고자 하는 열망을 윤리라고 정의한다면, 종교는 그것에 답해줘야 합니다. 유럽에서는 시민윤리라는 이름으로 종교 쪽에서 계발이 된 데 비해서, 우리는 20세기 전반기에는 식민도덕이, 후반기로 오면 유신체제에서 무조건 복종하고 말 한마디 잘못하면 중앙정보부에 그냥 끌려가는 상황에서 국민윤리를 국가가 강요했기 때문에 윤리 자체도 극복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마치 목욕하고 목욕물 버리다가 아기까지 버리는 것처럼 윤리까지도 버려버린 겁니다. 종교가 윤리와 어긋나는 데서 신자를 상실하는 것이기에, 제일 비도덕적인 개신교인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감소세로 돌아설 것입니다.
종교가 윤리적인 기반을 닦지 않으면 안 되는데, 불교로 와서 성찰하면, 승가공동체가 핵심적인 문제를 안고 있지만, 재가공동체도 윤리적인 것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승가공동체를 비판해야 해야 하지만 동시에 비판의 칼날이 재가공동체로도 향해야만 그 비판이 힘을 얻는 거죠. 종교와 윤리가 함께 가는 방향을 모색해야 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대안으로서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던져주는 열린 윤리와 결합한 불교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걸 찾아낸다면 10년 후의 불교는 더 굳건해질 것이고 찾지 못한다면 점점 더 약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국사회가 기본적으로 시민사회에 접어들었으니, 불교공동체 안에서도 최소한의 시민윤리를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단, 승가공동체의 종교적 권위와 특수성을 인정해주는 바탕에서 재가신도와 수평적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대안입니다. 승가 내부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뭘 해야 할지 잘 몰라서 또는 어떤 방향으로 찾을지 몰라서 못 하는 겁니다. 그런 분들과 함께 강하게 도덕적인 비판을 하고 계율도 우리 시대에 맞게 바꾸어야 합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계율은 과감히 폐기해야 합니다. 최소한으로 지킬 것만 남기고. 이렇게 해서 사부대중공동체를 제대로 만들 수 있으면 됩니다. 그게 안 되면 점점 쇠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윤 선생님께서 개신교의 교회 안 가는 신도를 가나안신도라고 이야기하는데 천주교의 냉담자, 불교는 냉소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냉소적인 문화를 극복해내는 것이 불교 미래의 중요한 시작이라 보고, 그 출발점으로 불교와 윤리의 만남, 여러 가지 실천적 노력들이 있다면 불교가 안전할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허우성(본지 편집위원, 경희대 교수) :
앞서 두 분의 선생님들이 좋은 말씀 해주셨는데 요즘 저는 사회적 현상을 목격하게 되면 “이거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런 질문을 던지게 해준 발표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발제자께 두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불교의 비근대성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교회에는 있고 사찰에는 없는 비근대성의 내용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지적을 해주시고요, 두 번째는 다양한 가치의 시대, 민주주의 시대에 불교인을 결집을 할 수 있는 간단한 가치의 도출이 가능한지, 그런 가치가 있다면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지도자가 불교권에서 나올 수 있을지 우리 사회의 모든 조건을 감안해서 답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회 :
지정토론을 듣자니 그럼, “불교가 기독교처럼 되어야 하는가, 중생의 욕망에 추수하는 세속종교로 나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이 질문을 포함하여 지정토론에 대해 답변해주시기 바랍니다.

윤승용(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 :
마지막 질문부터 답변해 보겠습니다. 우선 사회자가 화두로 던진 ‘불교가 기독교처럼 되어야 하는가’입니다. 이는 한마디로 불교가 ‘멤버십 종교’로 즉, ‘프로테스탄티즘 부디즘’으로 나아가야 하는 가라는 질문인데, 저의 입장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 주장은 사부대중이 똑같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길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승려를 포함한 모든 구성원이 주인이 되는 길을 찾아보자는 것이지요. 한국적 불교 전통을 계승하지 않고는 한국불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전통을 계승한다는 것은 사부대중의 협의에 의해 정해질 문제이지 외부에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특히, 종교단체를 유지하기 위한 합리적인 가치와 제도와 더불어 필수적인 카리스마가 있는데, 하나는 지도자가 가져야 할 영력(靈力)의 카리스마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 이후 새롭게 구성된 종교전통이 가진 카리스마입니다. 영력의 카리스마는 해당 종교인들이 스스로 가꾸어 가야 합니다. 다만 종교전통이 가진 카리스마를 하루아침에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사부대중이 협의해서 지켜야 할 전통을 최소한으로 한정하고 급변하는 시대변화에 맞는 가치와 제도가 필요합니다.
그다음은 불교의 비근대성과 불교인을 결합할 수 있는 가치에 대한 허 교수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개신교의 목사가 승려처럼 개인적 카리스마를 행사하지만. 개신교의 조직은 기본적으로 평신도 대표인 장로가 운영하는 조직입니다. 원칙적으로는 평신도들이 장로라는 그룹을 형성해서 교회를 만들고 목사를 초청하는 형식입니다. 개신교는 시민정신이 기반을 이루고 있습니다. 장로와 그 구성원들은 권리와 의무가 분명한 근대시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를 비롯한 한국의 종교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서구의 개신교는 일차적으로 국민국가와 연결됩니다.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종교와 세속이 분리되는데, 종교가 가진 역할을 분할시켜서 일부는 국가가 떼어가 국가와 종교가 분리됩니다. 이런 교통정리를 하려면 우선 국가가 근대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식민지 국가였기 때문에 그런 과정이 없이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비롯한 전통종교들은 소위 국가와 종교 간 분리된 영역들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민족종교도, 불교도 정교분리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종교로서는 전근대적입니다. 어떻든 전통을 계승하면서 쇄신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또 다른 전근대의 모습은 승랍이라는 것입니다. 불교 조직의 위계서열을 만드는 것이 승랍인데, 수행집단이 아니면 승랍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수행집단에 관련 없는 사람은 아예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불교공동체라는 것은 승가집단이지, 실질적으로 사부대중의 불교공동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박병기 선생님이 조금 전에 ‘사부대중이 전부 각자의 역할을 책임을 다해야 하는데, 재가라고 해서 막 팽개치면 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재가가 책임이 없는 건 아니지만 불교공동체라는 면에서 보면 재가는 권한이 없으니 책임도 없는 것입니다. 또한 불교를 개인 내면의 심층문화로만 말하는 경우가 많아서 신앙대중이 함께 어울릴 수 없습니다. 대중문화로서 불교문화의 대중화, 개방화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음은 불교인을 결합할 수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담당할 지도자가 불교에서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답변입니다. 다양한 불교인을 결합할 수 있는 특별한 가치가 별도로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불국토의 건설, 깨달음의 사회화, 미륵정토 사회, 시민보살 등의 지향점 있는 불교 가치에 시대정신을 담는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사부대중이 자기 책임과 역할을 겸하다 보면 지도자가 재가 쪽에서 나올 수도 있고, 출가 쪽에서 나올 수도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지도자가 나와야 다양한 가치가 수렴되고 다양한 불교로 발전할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현재의 구조로 보면 불교는 철저히 출가자 중심이어서 일부에서는 ‘비구독재’라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간화선에 관한 것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간화선은 언어의 단절을 요구하기 때문에 불교 대중과 소통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는 일반 대중과 소통되는 담론을 가지고 이야기해야만 종교적 의미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일반 신도들이 ‘간화선이 불교의 모델인가 보다.’라고 생각해서 원래의 자기 본분을 버리고 종교 전문인이 하는 간화선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재가신도가 많습니다. 일반 신도들은 직분도 다르고 그렇게 할 시간도 없으니 출가 승려들을 따라 하지 말라고 하고 싶습니다.
또한 종교의 기본 욕구인 구복을 청산하고 구도를 하자는 말을 자주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전문적인 수도자가 아닌 다음에야 구복이 없는 종교는 없습니다. 구복을 소망으로 바꾸면 서원불교가 되는 것입니다. 세계의 최대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는 3박자 축복이 기본입니다. 여의도의 순복음교회가 부흥하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3박자 축복이란 ‘내 영혼의 잘됨같이 범사(凡事)에 잘되고 강건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를 믿으면 건강하고 모든 일이 잘되고 축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부와 권력, 자손 등의 범사가 잘된다는 게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이지요. 불교에서는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행하는 구복을 구복불교라고 배척합니다. 그러면서 불교는 계속 스스로가 깨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실존적으로 절박한 문제들을 소망으로 수용하지 않고 배척만 합니다. 한국불교는 겉만 근대화되어서 교리불교나 선불교만 불교로 생각합니다. 정작 현장의 생활 속에서 필요한 서원이나 실천이 필요한 실천불교를 중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교는 종교이고 종교는 실천이지 사상이 아닙니다. 실존적인 개인 문제들을 내버려 두고 본질의 문제만 가지고는 대중적 종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신앙대중의 다양한 가치를 수용하려면 그 지도자가 되는 길도 다양해야 합니다. 다양한 지도자가 다양한 삶의 모델 속에서 새로운 불교 창출에 대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한국불교에는 선, 정토, 밀교 등이 함께 있음에도 구복불교의 청산과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이름으로 종교 전문인들만 행하는 간화선만 대중화하려고 합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서민불교, 즉 민중불교, 현장불교를 자꾸 소멸시키는 역할을 함에 따라 신앙대중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한국불교는 종교 전문가인 수행집단의 귀족불교이고, 동시에 불교학자들의 교리불교에 함몰되어 않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전통을 계승하는 것도 아니고 종교를 신앙대중과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박병기 선생님의 논평에 대한 답변입니다. 박 선생님은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를 거론하시며 현대사회에서도 종교가 흥하는 개발도상국들을 예로 들면서 종교적 욕구는 줄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글이 기독교 중심의 분석임을 지적하며 한국적 특수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질의하시고, 불교 인구 증가를 위해서는 시민윤리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하셨습니다. 박 선생님의 이런 주장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만이 아니라 개신교도 시민윤리가 부족한 가운데 불교의 종교인구는 감소하고, 개신교의 종교인구는 증가한 것에 대한 논평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단지 발표자가 보기에는 누가 시민윤리로 무장했는가보다는 앞으로 우리 사회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방향 제시로서는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울리히 벡이 예를 든 종교인구 증가 국가들은 모두 발전도상국으로서 서구적인 근대화를 새롭게 추진하는 국가들입니다. 대중적인 근대성이 필요한 국가들이고 그것을 기독교를 통해 보완하고자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기독교의 급격한 성장을 고려해 본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끝으로 한국적 특수한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시간 관계로 말씀을 드리지는 못했으나 발제 내용에 기술되어 있는 것을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도흠 선생님의 토론에 대한 것입니다. 첫째, 무종교 시대 도래에 대한 원인 분석 둘째, 불교신자의 감소 원인, 셋째, 원인에 따른 처방, 넷째, 앞으로의 전망에 대한 말씀 순으로 토론하였습니다. 주제별로 종합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별다른 의견은 없습니다만 이 선생님의 종교에 대한 관점을 보면, 앞으로 종교는 쇠퇴할 수밖에 없다는 것과 그것을 저지하려면 대중의 삶에 맞게 불교 교리를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점, 그리고 앞으로는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 인간관과 신관도 다시 재구성되어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종교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과거 제도종교는 쇠퇴할지는 몰라도 인간이 유한한 현실에서 사는 한 실존적인 고민이 없을 수 없을 것이고, 그런 실존적인 고민 해결과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형식이 필요한 한, 종교적인 욕구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그 표현 방식이 많이 달라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말하자면 다양한 대체종교들이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도 대중의 삶과 그 삶을 표현하는 대중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사회 :
그 문제에 대해서는 좀 다른 의견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불교가 뭘 지향하는 종교인가?’와 관련이 있고, 그리고 ‘불교를 서양종교의 틀에다 놓고 해체해봐야 할 것인가?’ 하는 의견이 있죠.
윤승용 : 불교를 서양종교의 틀에다 놓고 분석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과 현대 학문의 서구적인 성격을 먼저 말씀을 드려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 논의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각 종교의 지향점은 종교의 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서 다루기가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한편, 이도흠 선생님께서 종교의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종교학계에서는 그것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탈근대 시대에 구성원들이 종교적 조직으로 묶여야 하고, 타자에 대한 배타성을 가지고 있어야 자기 정체성을 가지는 종교문화로서는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근대적 개념만 가지고 종교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지는 큰 문제입니다. 그 다음에 과학이 발전해 종교가 소멸하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지금 현재 등장하는 많은 종교는 둘이 융합하는 경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경제와 융합한 신종교보다 과학과 종교가 융합하는 양상이 더 많이 등장하고 있기에 과학이 발달한다고 해서 종교가 소멸할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도흠 :
소멸이 아니라 양적으로 준다는 것이지 저도 융합하는 방향, 곧 과학적 합리성을 결합한 종교로 흘러갈 것으로 생각합니다.

윤승용 :
예, 잘 알겠습니다. 신자유주의와 관련한 문제에 대해서는 저도 같은 입장입니다. 좀 더 분명하게 말씀드리자면 신자유주의는 사실 시장 근본주의입니다. 신앙 근본주의와 강조하는 측면만 다르지 똑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근본주의라는 시대의 흐름이 영역별로 드러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종교의 사회적 역할을 이야기해 주셨는데, 복지 이런 건 국가의 임무로 이관되었기 때문에 세속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실존적인 물음은 종교 이외의 것으로는 잘 해결이 안 되기 때문에 다른 형태의 종교로 남아 있을 거라 봅니다. 제 발제문 역시 종교적 욕구가 증가했음에도 종교인구가 줄었다는 기저에서 논술한 것입니다. 앞으로 종교인구가 더 줄어들 것인가는 살펴봐야 할 문제입니다. 특히 우리의 전통종교는 초월적인 신과 같은 부분이 없어도 유지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서구는 신이 종교의 모델을 결정하지만 우리는 성인이 종교의 모델을 정합니다. 동양에서는 아무리 도를 깨쳐보아도 신이라 하지 않고 성인이라고 합니다. 예수가 인간‐신인 것은 서구 기독교의 독특한 존재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불교와 같은 동양 종교들은 기독교와 같은 종교와는 여러 가지로 다른 측면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모든 측면에서 차이를 고려한 분석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회 :
지금 우리는 종교인구의 양적인 증감을 논의하고 있지만 이와 함께 질적인 문제도 논의해봤으면 합니다. 불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사람들에게 불교적 가치가 확장되고 있는가 축소되고 있는가, 확장될 필요가 있는가, 이대로 있어도 괜찮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 의견을 나누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도흠 :
윤 선생님의 의견에 답변하면서 자연스럽게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근본적으로 종교 개념이 달라진다고 보는데, 앞에서 말한 대로 다섯 가지 이유로 유럽과 미국에서는 절대적인 양에선 줄어들지만 다른 차원의 종교가 형성될 것으로 봅니다. 제도로서 종교는 축소되겠지만, 종교적인 것으로서 종교는 더욱 증가할 것입니다. 인간의 실존은 더욱 위기에 놓이고, 불안과 두려움, 소외는 더욱더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죠. 초월적 타자로서, 창조자로서 신의 개념도 과학의 발전에 따라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반면에 삶에 내재하는 신 개념, 폴 틸리히의 정의대로 ‘관계성의 원천과 힘’으로서 신의 개념은 늘어날 것입니다. 지금 사라져야 할 것은 신이나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실존이나 초월과 별 관련이 없는 실체로서, 절대적 타자로서, 우주와 생명의 창조자로서 신입니다. 역설적으로 신은 없어서 존재합니다. 유한하고, 불완전하고, 불안한 인간은 신이 없기에 실존의 깊은 심층에서 무한, 완성, 평정을 추구합니다. 신은 이제 초월적 힘에 대한 감수성으로, 인간존재의 심연에서 우러나는 울림으로, 나보다 아픈 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원천과 힘으로서, 모든 탐욕을 버리고 비속함에서 초월하여 도달할 수 있는 열반의 희열 속에서 만나는 절대자로서 존재할 것입니다. 신은 유한한 존재로서 한계가 많고 불안하고 고독한 인간이 초월하고자 할 때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체험하는 무엇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도로서 종교는 더욱 위축되거나 근본화하겠지만, 개인의 실존과 초월, 인간 본성의 완성으로서 종교적인 것은 더욱 확장될 것입니다. 더불어, 종교가 과학과 부합하고 윤리의 지표가 되고 마음의 평안과 실존적 초월성과 결합하는 경향은 더욱 증가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진화론이나 양자물리학, 디지털 현상과도 부합하는 불교의 연기론은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많습니다. 불교는 기독교와 달리 신을 부정하고 이를 불성으로 대체하고 탐욕을 지멸하고 마음의 평안을 추구합니다. 환경파괴와 자원 고갈의 시대에 생명을 중시하고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삶을 추구하기에 21세기의 대안과도 부합합니다. 이런 점과 아울러 무엇보다도 모든 사회적 약자에 대해 동체대비의 자비심을 갖기에 불교가 기독교의 한계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대안의 종교로 부상할 가능성이 큽니다. 대신, 한국불교는 지혜와 자비를 원융(圓融)시켜야 합니다. 한국불교 가운데 그래도 기독교의 민주화 운동처럼 내세울 만한 것은 생명평화 운동이라 생각합니다. 도법 스님, 수경 스님, 지율 스님께서 목숨을 걸고 실천하셨고, 이에 대한 논리를 계발하여 비불교도에게도 생명평화의 가치를 확실히 각인시켜서 담론 투쟁에서도 성공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생명평화 운동처럼, 불교의 가치로 21세기의 사회문제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담론 투쟁과 실천을 계속 수행해야 합니다. 이를 위한 교리의 재해석, 싱크탱크의 설립, 이를 알리기 위한 언론 및 홍보, 포교 및 교육체계 수립이 뒤따라야 합니다.

사회 :
플로어 쪽으로 발언 차례를 넘기겠습니다. 발제와 토론을 듣고 소감이나 덧붙일 의견 있으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배광식(서울대 치의과대학 명예교수) :
우선 종교인구의 감소 문제를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야 원인이 분석되고 해결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인구는 점점 감소해가고 있습니다. 종교인구도 자연소멸, 이민, 이탈 등 여러 요인이 있을 것입니다. 종교인구 증감을 논하면서 연령대별 통계가 제시되지 않으면 그 경향성을 파악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별, 연령대별로 살펴보면 사회 주축 인구인 40대, 50대에서 종교인구가 많이 줄고 있습니다.
종교인구가 줄어든 원인은 크게 보면 이탈자가 늘고 새로 진입이 안 되는 것에 있습니다. 불교의 경우는 대체로 이탈자가 많다는 것을 제1원인으로 분석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새로운 종교인구가 진입하지 않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실례로 초등학교에 가서 “불자, 손들어.” 하면 한두 명이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손들까 말까 합니다. 이는 새로운 진입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자연소멸만큼이나 중요한 원인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저의 생각은 투자 마인드를 가지고 집중을 안 한다는 겁니다. 쉬운 예로 기독교는 문화 속에 넣어 저절로 그 종교에 끌리게 하는데, 불교는 문화 침투를 거의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 문제가 있지만, 제일 큰 문제는 접점이 생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좋은 게 많이 있어도 닦아서 보여주려는 노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집중 투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종린
전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박종린(전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
저는 이 상태로 간다면 지금 762만 명조차 10년 뒤에는 반 토막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지금 주도층이 전혀 사회적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개인적 제도적 노력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자력불교, 깨달음의 불교를 강조하는 것은 재고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출가승단이 간화선을 강조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하려 하면 할수록 불교는 어렵습니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불교는 새로운 길로서 이단이 나와야 합니다. 이단의 한 형태로서 불교는 깨달음이 아니라 믿음의 종교로 전환해야 합니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강조되고 믿었을 때 그 내용인 깨달음도 함께 온다는 것을 인식시켜야 합니다. 그랬을 때 불교가 온전한 종교로서 존재하지 않겠습니까?

   

동출 스님
설법연구원 대표

동출 스님(설법연구원 대표) :
‘비구독재’라는 말을 하셨는데 사실은 사찰은 ‘주지독재’입니다. 주지가 모든 걸 할 뿐만 아니라, 20대나 30대에서 시작한 주지 소임을 지금까지 거의 50년 동안 독점하는 분도 많습니다. 제가 승랍이 40년 가까이 되지만 절에 0.1%도 관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스님들이 남을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의 생존에 급급하게 되어 있습니다. 스님들이 각자도생할 뿐이고 제대로 팀워크를 이뤄서 역할을 하는 절이 거의 없습니다. 그나마 봉은사, 실상사, 불광사 같은 극히 일부의 사찰을 제하고는 논의 구조 자체가 없습니다. 스님들이 하는 방식이 뭐냐면, 자기가 전방을 차려 자기 생존을 위해 신도들을 포섭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도들을 관리하는 것이죠. 신도는 자기 생존을 위한 신도일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찰에서는 몇 분이 사시든 주지만 주인이고 나머지는 개인입니다. 스님들이 서로 어려우면 다 같이 나누어야 하는데 그런 구조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신도들도 아무 권한이 없습니다. 주인의식도, 책임도 없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겁니다. 신도들은 절에 가서 주지 스님이 없으면 “스님 없네.” 하고 그냥 집에 갑니다. 이 근본 모순이 해소가 안 되면 스님들은 종단 걱정, 불교 걱정, 사회 걱정은 할 열정도, 여유도 없어집니다.

사회 :
종교인구의 증감과 관련해 이런저런 이유가 많겠지만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포교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포교에 적극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박종린 :
배광식 선생님이 ‘접점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 어린이가 스스로 법회에 오지도, 부모가 데려오지도 않을까요? 재미가 없기 때문이고, 심지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초등학생들도 자기 문화와 언어가 있는데 절에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부처님 가르침을 전해주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접점이 안 맞는가’에 대해 깊게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이덕주
문학평론가

이덕주(문학평론가) :
다른 종교가 잘하고 있는 것은 벤치마킹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들을 교회에 데리고 가면 금방 녹아듭니다. 그들에게 맞는 프로그램과 시스템이 있습니다. 절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저도 어려서 교회, 성당에 자주 갔었는데 가면 흥미롭고 재미난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재가불자들이 ‘각성, 헌신, 행위’라는 세 가지 측면의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마더 테레사는 헌신과 행위를 융합하여 많은 이들에게 기독교의 가치를 전파하였습니다. 동사섭(同事攝)을 말로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신이 불교 미래를 위해 실질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자신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이라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
스님께 좀 공격적으로 묻겠습니다. 절에서는 왜 포교에 적극 나서지 않는 것입니까.

동출 스님 :
자기 살기도 급급한데 나설 틈이 있나요? 제가 아는 어떤 스님은 1년에 1억 정도씩 투자해 어린이 포교를 하다가 포기했습니다. 왜냐면 어린이 포교가 되는 곳은 상대적으로 가난한 동네이고, 돈 있는 동네는 토요일, 일요일이면 학원 가기 바빠서 절에 올 수가 없어요. 물론 교회도 잘 가지 않지만, 불교보다는 사정이 훨씬 났습니다. 저는 불교 인구의 확대를 위해 어느 때가 포교하기 좋은가를 보면 답이 나온다고 봅니다. 보통 종교에 관심을 가질 때는 어려울 때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는 시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입시생을 둔 어머니입니다. 이들은 자식 때문에 불자가 됩니다. 또 하나는 남자들의 경우 군대에 가면 종교에 관심을 갖습니다. 저는 여기에 착안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라고 봅니다.

   

이창숙
여성불교학자

이창숙(여성불교학자) :
저는 절에 다니기 시작한 지 40년이 넘었습니다. 가끔은 누가 저에게 어느 종파 어느 절에 가면 좋으냐는 질문을 합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가 가장 당황스럽습니다. 어디를 추천해줄지 대답하기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큰 절에 가면 초심자에게 오리엔테이션을 하는데, 주지 스님이 ‘여기 많이 오면 부처님이 도와주신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데 참 민망했습니다. 불교의 교리와 신행이 따로따로 노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사찰에서 친절하지 않다는 겁니다. 절에 가면 왔냐 가냐 하는 인사도 없습니다. 법당에 가서 행하는 기초적인 예법, 기초적인 예절도 누구한테 배운 적 없습니다. 저도 눈치로, 독학으로 배웠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새로 오는 사람만이라도 계속 오게끔 좋은 길로 인도하는 곳이 많았으면 합니다.

허우성 :
제가 윤 선생님께 비근대성의 의미를 물었는데 대답 중에 다양한 층위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유치원 아이들도 사찰에 안 가지만 대학에서도 15년 전에는 불교 조직이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없어지는 추세입니다. 근대의 제도는 다양한 층위가 있듯이, 불교와 사회가 각 층위에서 연결이 되어야 초등학교는 초등학교대로 중학교는 중학교대로 대학은 대학대로 불교와 관계를 맺어야 포교가 될 것 같습니다. 불교 조직 자체가 근대 조직과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발제자께서는 불교적 가치는 다양하게 존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스님 개개인이 자기가 잘할 수 있는 불교적 가치를 찾아서 그걸 잘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이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박병기, 이도흠 선생께서도 본인들이 주장하는 불교적 가치가 있으면 그걸 수행하는 영웅이 되어서 그 분야에서 존경을 받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창숙 :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대중설법으로 유명한 법륜 스님도 예전에는 비판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비판해도 바뀌지 않는 걸 깨닫고 내가 비판을 할 게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생각을 바꾸셨다 합니다. 그러다 보니 많이 바뀌더랍니다. 비판도 중요하지만 실천이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서승석
불문학자

서승석(불문학자) :
저는 두 가지 관점에서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불교신자까지는 아니고 불교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 동기는 대학교 때 법정 스님의 수필집을 읽고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계기로 불교 관련 책도 읽고 이해의 폭도 넓혀왔습니다. 이처럼 포교는 대중적인 문화와 눈높이에 접목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글이라는 매체를 활용하고, 더 나아가 선시, 승무, 바라춤 등 동적인 영역을 홍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상당히 역동적인데 불교가 너무 정적인 문화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들은 쭈그리고 앉아서 가만히 있는 행위를 싫어합니다. 한류 문화도 아이들이 역동적으로 춤을 추며 흥에 겨워합니다. 케이팝(K-pop)처럼 콘테스트도 하는 등 아이들한테도 재미난 문화를 전파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읽는 것보다 모든 걸 SNS나 미적 이미지로 활용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 미국에서 공부한 선생님들은 이미지를 많이 활용하는 걸 보았습니다. 불교에서도 부처님의 삶을 만화책이나 놀이, 스마트폰에서 이미지로 보여주는 방법을 개발한다면 습득도 빠르고 재미있게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특히 40~50대 인구를 잡으려면 문화센터를 활용하면 좋을 것이라 봅니다. 종교인들이 여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젊은 엄마들을 보면 수영장 가서 수영하고 문화센터에서 배우는 분들 많습니다. 문화센터를 활용해 활성화하고 문화와 접목시킨다면 좋은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60대 이후 연령층은 고령화가 심해지니까 인구가 늘고 있지 않습니까? 호스피스 병동의 노인 환자들을 대상으로 불교적으로 평화로운 죽음 등을 포교하면 좋겠습니다.

   

조연향
시인

조연향(시인) :
교리공부를 하고 싶으면 신자들이 모여서 할 수 있도록 쉬운 교재도 많이 보급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찰이나 스님들이 너무 소극적인 것도 문제라고 봅니다. 또 하나는 스님과 신도들의 역할이 분담되었으면 합니다. 제가 나가는 절에서는 주지 스님께서 사회변화에 맞추어 많은 노력을 하는데도 성과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주지 스님이 모든 걸 혼자 다 감당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짐을 신도들에게도 적당히 나누어 지게 하는 것도 방법이 될 것입니다.

이도흠 : 한국불교가 포교를 잘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첫째, 너무 선 중심이라 법회가 안 됩니다. 신라나 고려 때처럼 교와 선이 융합되어야 합니다. 둘째, 법회가 있는 곳이라 하더라도 맥락이 사라졌습니다. 교회에서 설교가 신도들한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성경에 있는 교리들을 일상이나 현대사회에 결부시켜 이야기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님들로부터는 그런 것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2,500년 전의 경전을 21세기에 맞게 해석하는 설법 자료들이 필요합니다. 셋째, 매개체들이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는 소설, 영화, 애니메이션, 만화 등 다양한 매개체가 있잖아요. 아마 법정 스님의 수필집 《무소유》 말고는 대중에게 불교적 가치를 올바로, 그리고 폭넓게 전달한 매개체는 없다고 봅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매개체를 통해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것, 예를 들어 스마트폰 한 페이지로 읽는 경전 등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넷째, 동출 스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주지독재’ 문제입니다. 그에 대한 대안은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사찰운영위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주지가 위원을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으로 신자들이 선정해서 각자 근기와 능력에 따라 포교하실 분은 포교하고 재정을 담당하실 분은 운영을 하시는 등 무엇보다 재정과 수행을 분리해야 합니다. 기독교와 달리 포교와 재정과 수행의 분리 등이 안 되는 이유는 불자들 사이에 시민사회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럽에서 17세기 이후 종교의 영역과 성직자들의 권력으로부터 분리된 시민사회가 형성되었고, 이것이 다시 성당과 교회를 바꾸었습니다. 우리는 촛불을 들고 나섰지만 아직까지 시민사회를 구성하지 못했습니다. 시민사회를 만들고 그곳에 공공영역을 조성하고 공론을 모으고 그것이 정책으로 구현될 때까지 여러 실천을 해야 합니다. 절에서도 신자들이 주체가 되어 사부대중이 평등한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절의 시스템과 구조를 개혁하여야 합니다. 다섯째, 경전과 의례문의 한글화와 대중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저는 2008년이 마침 연구년이어서 조계종 포교원의 요청으로 《표준 법요집》에 들어가는 의례문 전문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은 아직도 출판되지 않았습니다만, 그 가운데 시험 삼아 《천수경》과 《반야심경》 〈칠정례〉 등을 보급하였는데, 실제 절에 가면 한글로 이루어지는 사례가 별로 없습니다. 시간이 길어지고 곡조와 호흡에 맞지 않는 등 한글화 자체에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만, 이런 문제는 모두 극복이 가능합니다. 스님들이 한글로 하면 권위를 상실하거나 전통을 위반한다는 편견을 갖고 있거나 아니면 한글로 다시 암송하고 운율을 맞추는 것이 번거롭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신자들이 절에서 멀어진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 라틴어로 의례를 하는 성당이 있는지요? 아니, 유럽에서 대학이 만들어지던 초기에는 인문학 고전이 모두 라틴어로 기술되었는데 지금 라틴어로 인문학을 강의하는 대학이 있는지요? 사피어 워프의 가설대로 언어는 세계의 형식을 규정합니다. 아무 뜻도 모른 채 경전을 낭송하고 의례문을 따라 하는 신자들이 그것을 통하여 부처님의 뜻을 얼마나 마음과 몸에 새기겠습니까? 여섯째, 교육이론 중에 교사의 삶이 교재란 말이 있는데, 스님들의 삶이 바로 경전입니다. 스님들의 청정한 삶이야말로 대중들로 하여금 불법의 진리를 몸과 마음으로 훈습하게 만듭니다.

사회 :
발제자인 윤 선생님께서 오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한국불교가 새로운 도약을 위해 이런 것은 꼭 해줬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결론 삼아 해주셨으면 합니다.

윤승용 :
새로운 불교인구의 진입 이야기를 하셨는데 저도 그 지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통계를 보면, 불교는 모태신앙이 별로 없는데, 기독교는 모태신앙이 30~40%를 차지합니다. 진입의 차이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템플스테이 등이 불교 포교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지만, 수행과 명상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불교인문학 학교로 전락하였습니다. 불교나 기독교 모두 탈근대 사회에 들어 다양한 종교현상이 나타나면서 중고등학교나 대학의 학생회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나마 존속하는 곳을 보아도, 대략 몇십 명 정도만 활동합니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포교하는 방식, 전략들은 불교 근대화를 추진한 개항기 시대의 것들입니다. 시대적으로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회 :
오늘의 말씀을 종합하면, ‘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데 왜 안 하는가?’ 하는 지적이 결론일 듯합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은 양적인 성장도 중요하지만, 불교가 추구하는 본래적 가치가 ‘모든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것을 위해 오늘의 불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입니다. 자칫 양적인 성장에만 주력할 때, 불교 본래의 목표나 가치가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나치게 교세 확장만을 위해 세속화로 치달을 때 생길 부작용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에 대한 종합적 성찰이 뒤따라야 불교가 종교로서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또 오늘의 토론 주제인 종교인구 변화 추이에 대한 전망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결론이 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좋은 발제를 해주신 윤승용 선생님, 토론에 참여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정리/ 송진영(한양대 국문과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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