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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한국 불교학자] <23> 심재열 / 이병욱
연구와 수행 일치시킨 재야 불교학자
[68호] 2016년 12월 01일 (목) 이병욱 lbw33@hanmail.net

1. 서론

   
심재열(沈載烈, 1932~2012)
성진(性眞) 심재열(沈載烈, 1932~2012)은 재야학자로서 평생 불교학 연구에 매진한 인물이다. 그는 김범부(金凡夫) 선생의 문하에서 동양학을 공부하고, 대각회에서 활동하면서 이종익(李鐘益, 1912~1991) 선생을 만나 불교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보조사상》 5 · 6합집(이종익 박사 추모논문집)에 제자를 대표해서 추모사를 쓰기도 하였다. 그는 고려대 정치학과를 수료했고, 재야학자로서 원효사상연구소를 개설하여 연구와 포교에 헌신하였다.

심재열의 생애에 관한 기록이 없어 필자는 그의 부인 이여영 여사와 인터뷰를 하였다.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심재열이 정치학과에 다닌 이유는 그의 아버지가 정치활동을 한 것과 관련이 있었다. 그는 젊었을 적에 천주교와 개신교를 공부하기도 하였고, 어릴 때부터 죽음에 대해 성찰하였다. 16세 때에 동산 스님을 찾아가서 보살계를 받았는데, 그때 그가 동산 스님에게 출가하겠다고 하니까 동산 스님이 “너는 바깥세상에서 세상 사람들의 정신을 맑혀주는 사람이 될 수 있으니, 굳이 출가할 필요가 없다. 속가에서 학문을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심재열은 술, 고기, 오신채 등을 먹지 않을 정도로 지계에 철저했다. 군대에 갔을 때는 고기와 오신채가 들어 있는 음식을 먹지 않아서 영양실조로 4번이나 쓰러질 정도였다. 그러자 그의 부모님이 그의 아들을 위해 인절미를 만들어서 부대의 다른 병사와 함께 나누어 먹였다. 만년에 이르러 그는 2011년(80세)에 쓰러져서 7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별세했다. 그때 병원에서 그에게 달걀 흰자위를 먹이려 했으나 그의 부인은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가 군대에 있을 때 부모님이 좀 편한 부서인 PX로 보직을 변경해주었는데, 그는 남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고 하면서 다시 훈련을 받는 보직으로 옮겼다. 이는 그의 강직한 성품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심재열은 바른말을 잘하고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심재열은 일상생활에서도 모범적 불교인이었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서 참선하고, 집에 석굴암의 불상 사진을 걸어두고 아침과 저녁에 한 시간씩 예불을 했다. 그는 매년 음력 3월 29일에 제사상을 차렸다. 이날이 원효의 제일(祭日)이기 때문이었다. 또 도선사에서 신도회장을 하면서 도선사에 주석했던 청담 스님을 보필했다. 청담 스님의 《금강경》 강의 테이프가 라면 상자 12개 분량이 되었는데, 그것을 그의 부인이 듣고 글로 옮겨놓으면 심재열이 교정을 보았다.

이처럼 3년 정도 작업을 해서 청담 스님의 《금강경 대강좌》라는 책이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청담 스님의 다른 책 6권도 함께 출판하였다. 그는 원고를 쓸 때도 손을 씻고 집필할 정도로 정성을 다했다.
심재열은 돈이 생기면 집에 쌀이 없어도 향을 먼저 샀다. 그의 부인이 산모였을 때 쌀이 떨어져서 며칠 굶은 적이 있었다. 그가 원고를 출판사에 건네주고 원고료를 곧장 받기를 원했는데, 며칠 있다고 오라고 해서, 결국 쌀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공부에 매진하였다. 그는 남 앞에 나서기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남에게 대우를 받으면 머리가 어지럽기 때문이었다. 그는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맑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심재열이 김천 대휴사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수련대회를 일주일 정도 하였는데, 그 절의 비구니 노스님이 묵언정진을 하다가 심재열을 보고는 묵언을 깨고 제자 스님에게 그에게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그래서 제자인 김수정 스님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김천에서 새벽 6시에 첫차를 타고 서울에 와서 공부하고, 막차를 타고 내려갔다. 이 스님은 나중에 동국대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해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뒷날에는 승가대학장의 소임을 맡기도 하였다.

심재열은 쓰러지기 10일 전쯤에 그의 부인에게 유언을 남겼다. “우리 보살 고생했다. 당신이 나에게는 관세음보살이었다. 당신 덕분에 학문을 잘하고 간다. 내가 며칠 있다가 갈 것이다. 당신에게 면목이 없다. 고생을 시켜 미안하다. 다음 생에는 덜 고생 시키겠다. 49재는 ○○절에서 해달라.”

그의 부인, 이여영 여사는 심재열이 사실상 남편이 아니었고 자신은 공양주 보살로 그를 보필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심재열은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이 돌 무렵이 되었을 때 부인에게 우리는 이제 마음으로 부부가 되자고 하며, 실제로 부부생활을 하지 않고 각자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심재열이 고기와 오신채를 먹지 않은 덕분에 그의 부인은 그의 건강식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그래서 사찰음식을 공부하고 12년 전쯤에 《자연건강 사찰음식》이라는 책도 낼 수 있었다. 이 책에는 사계절의 음식의 358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그의 부인은 사찰음식을 강의하러 다니기도 하였다. 심재열은 부인에게 “나는 글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맑히고, 당신은 음식으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맑힌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심재열의 저술은 상당히 많다. 주저로는 《원효사상 2 윤리관》(1986)이 있고, 번역서로서는 《대각국사문집》 《범망경》 《육조단경》 《보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여기서는 그의 논문 일부와 《원효사상 2 윤리관》에 초점을 맞추어서 대각국사 의천, 보조지눌, 불교윤리관에 관한 그의 생각을 검토하고자 한다.

2. 대각국사 의천에 관한 연구

심재열은 현존하는 《대각국사문집》이 원래의 《대각국사문집》의 3분의 1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라고 말했다.

원판(原板)은 조선조의 억불 · 법난 등으로 대부분 산실되어 현재 온전하게 보존된 것은 한 권도 없고, 매 권 수 매씩 남아 있을 뿐이며 심지어는 다 결락(缺落)되어 모습조차도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도 있다. 손상되기 이전의 이 원판을 인출한 완전한 인출본마저 얻어 볼 수 없는 현재로서는 해인사 사간장고(寺刊藏庫)에 잔존되어 있는 판목에 의해 인출된 결락본(缺落本)만을 접할 수 있을 뿐이다. 현존 자료를 근거로 보면, 본래의 이 《대각국사문집》은 총 7백20여 장 전 33권 9책이었을 것으로 추산되지만, 현재로서는 총 2백28장 상하권의 1책만이 잔존하고 있어 과거 민족문화에 대한 자학의 아픔을 길이 통감하게 한다.

심재열이 의천(1055~1101)을 바라보는 거시적 관점은 다음과 같다. 심재열은 소승불교보다 대승불교의 우위를 주장하고 있고, 이 대승불교가 중국에서 여러 종파불교와 학파불교로 발전하였는데, 한국의 민족성과 역사성에 부응하는 것이 회통불교라고 했다. 이 회통불교를 제시한 사람이 원효이고, 이 원효의 회통불교를 다시 주장한 사람이 의천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심재열은 최남선 등이 제시한 한국불교 우월론을 수용하고 있다. 필자는 심재열의 이러한 주장에는 대승불교의 우월론과 한국불교의 우월론이라는 편견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국불교의 특성이 회통사상에 있고, 그 회통사상을 사상적으로 성숙시킨 사람이 원효이며, 원효사상의 계승자가 의천이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석존의 교법을 깨달음의 보리수에 비유한다면 이 보리수를 일신(一身)의 수용(需用)으로 만족하는 것이 소승이고, 만인을 구제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감로약으로 광용(廣用)하는 것이 대승불교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대승불교가 중국의 풍토 · 역사에 알맞도록 인식된 것이 중국의 종파불교 · 학파불교이며, 우리나라의 민족성과 역사성에 부응하여 재배된 것이 한국의 회통불교이다. 학자들은 이것을 일러 ‘인도불교는 원천불교, 중국불교는 지엽불교, 한국불교는 결실불교’라고도 한다. 대승불교가 비록 중국에서 지엽이 무성하고 백화가 난발하게 전개되었지만 그 열매는 해동에서 거두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회통불교를 사상적 · 교학적으로 완성한 최초의 선각자가 원효(元曉) 성사이며, 원효가 간 뒤 4백 년에 대각국사가 출현하여 불타의 근본정신인 회통불교를 재정립함으로써 다시 한 번 민족의 지도이념으로 정착시킨다.

그런데 심재열은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다. 앞에 소개한 것처럼 대승불교 우월론과 한국불교의 우월론을 주장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그 대신 모든 불교는 대등하지만, 한국에는 한국불교의 특성이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다 같은 불교이지만 소승 · 대승의 불교가 다르고 종파에 따라 삼장의 선택과 관찰이 다르듯 인도불교 · 중국불교 · 일본불교 · 서장불교 · 스리랑카 · 태국의 불교가 각각 다르다. 그것은 다 같은 사람이지만 인도 사람 · 중국 사람 · 한국 사람 · 일본 사람이 각각 다른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한국불교가 다른 나라의 불교와 어떻게 다르지 않으며 또한 어떻게 다른가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곧 생명력을 잃은 죽은 불교이다. 중세적 사고방식으로 중국불교에 대한 맹종만을 지금껏 강요하는 불교는 일본불교에 대해 분별없이 추종하는 이들이나 나아가 특정 민족의 선민적 신앙만을 따르는 한심한 이단들과 더불어 오늘의 국가 민족을 암담하고 위험하게 하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의천의 사상에서 큰 난점이 있는데, 그것은 《대각국사문집》과 〈영통사 비문〉에서 강조하는 점이 서로 충돌된다는 것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대각국사문집》에서는 종밀의 사상을 강조하고 있는 데 비해, 〈영통사 비문〉에서 의천이 1101년에 홍원사에 화엄 9조당(마명-용수-천친-불타발타라-혜광율사-두순-지엄-현수법장-청량징관)을 세웠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는데, 그 9명의 조사 가운데 종밀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대각국사문집》에서 종밀의 사상을 강조하고 있다면, 의천이 화엄 9조당을 세울 때도 종밀이 들어가야 순리에 맞을 것이다. 그런데 홍원사의 화엄 9조당에서는 종밀을 배제하고, 《대각국사문집》에서는 종밀의 사상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점을 어떻게 해석할지 문제가 된다.

이에 대해 심재열은 자신의 견해를 제시했다. “규봉종밀을 누구보다도 존경했으면서 9조에 봉안하지 않은 것에서 [화엄종과] 지론종 · 법상종을 화회(和會)하려는 그의 의지가 그만큼 컸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재열의 이런 주장이 성립하려면, 화엄의 9조당에서 종밀이 빠지면 유식(지론종과 법상종)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가 제시될 수 있다는 주장이 성립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법장과 징관도 유식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는 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심재열의 이러한 주장에는 논리적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심재열이 의천의 사상에 대해 전반적인 평가를 내린 것에 대해서는 필자도 공감한다. 다음에 소개하는 예문에서 심재열은 의천의 사상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국사의 천태사상은 단순히 중국의 천태종을 그대로 고려에 옮겨놓은 것이 아니라 원효의 원융회통사상 위에 당시의 선 · 교 제종(諸宗)을 융합한 사상이며, 여기에 다시 진호적(鎭護的) 호국불교의 뜻을 더해서 구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3. 보조지눌에 관한 연구

1) 조계종조는 보조지눌

   
심재열 강설《보조법어》(1986)
한국불교계에서는 1941년 조선불교조계종이 성립될 때를 전후해서 종조를 누구로 정할 것인지 몇 가지 주장이 있었다. 김영수(1884~1967)는 태고보우를 종조로 하는 태고종조론을 주장하였고, 방한암(1876~1951)은 도의를 종조로 하는 도의종조론을 주장하였으며 권상로(1879~1965)는 처음에는 태고종조론을 주장하다가 도의종조론으로 주장을 바꾸었다. 그리고 이능화(1868~1943)가 《조선불교통사》에서 보조지눌을 종조로 하는 보조종조설을 먼저 주장한 뒤에 이불화(1915~1981)와 이종익이 보조종조론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 가운데 심재열은 ‘태고종조설’을 비판하고 ‘보조종조론’을 지지했다. ‘태고종조설’은 환암혼수-구곡각운-벽계정심-벽송지엄-부용영관-청허휴정으로 법맥이 이어졌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이불화와 이종익은 ‘보조종조설’을 주장했다. 그것은 보조지눌의 법맥이 졸암연온-구곡각운-벽계정심-벽송지엄-부용영관-청허휴정으로 법맥이 이어졌다는 주장이다. 위의 두 종조설을 비교해보면 벽계정심에서 청허휴정까지는 같은데, 다른 점은 구곡각운의 스승의 누구냐는 것이다. ‘환암혼수(幻庵混修)-구곡각운(龜谷覺雲)’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태고종조설의 주장이고, ‘졸암연온(拙庵衍昷)-구곡각운’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보조종조설의 주장이다.

이에 성철은 고려말의 유학자 이색이 지은 〈남원승련사기〉와 〈곡구곡시〉에 의거해서 ‘졸암연온-구곡각운’의 관계를 비판했다. 그런데 심재열은 이러한 성철의 주장이 한문을 오독하거나 글자를 바꾸어 읽어서 생긴 실수라는 것을 논증하고 있다.

먼저 《동문선》의 〈남원승련사기(南原勝蓮寺記)〉에 소개되어 있는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무술년 가을에 [졸암연온이] 세상을 떠나려고 할 때에 구곡각운이 가족으로는 조카이고 불법으로는 제자이므로 절의 일을 맡기었다(戊戌之秋 其將示寂也 以雲師 於族爲娚 於法爲嗣 付以寺事).”

그런데 성철은 위의 문장에서 ‘불법에서는 제자가 된다[於法爲嗣]’를 ‘불법에서는 스승이 된다[於法爲師]’로 바꾸어서 읽었다. 이렇게 바꾸어서 위의 문장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무술년 가을에 [졸암연온이] 세상을 떠나려고 할 때 구곡각운이 가족으로는 조카이고 불법으로는 스승이 되므로 절의 일을 맡기었다.” 이렇게 한자를 바꾸어 읽은 성철은 구곡각운이 졸암연온의 스승이 되므로 보조종조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졸암연온-구곡각운’으로 법맥이 이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성철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심재열은 논증한 것이다.

그리고 〈곡구곡시(哭龜谷詩)〉의 일부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구곡은 좋은 집안의 자손으로 출가하여 임제의 법손이 되었다(龜谷衣冠冑 去爲臨濟孫).” 그런데 이 대목을 성철은 “구곡의 법통은 가서 임제의 법손이 되었다”라고 번역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의관주(衣冠冑)’이다. 성철은 의관주(衣冠冑)를 법통으로 해석했다. 그러고 나서 성철은 이런 해석에 근거해서 구곡각운이 출가하기는 보조의 계통으로 출가하였지만, 그곳을 떠나 임제종의 승려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의관(衣冠)’은 좋은 집안을 의미하고 ‘주(冑)’는 자손을 의미하므로 ‘의관주(衣冠冑)’는 좋은 집안의 자손으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 이처럼 심재열은 성철의 번역이 틀린 대목을 지적해 냈다.

이렇게 보조종조설을 비판한 성철의 주장의 문제점을 지적한 다음에 심재열은 보조종조설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는 한국의 선(禪)이 간화선이고, 이 간화선은 대혜종고에 의해 확립되었는데, 이것을 한국에 제일 처음 도입한 인물이 보조지눌(1158~1210)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보조지눌의 제자 진각국사 혜심(慧諶, 1178~ 1234)도 간화선을 더욱 선양했다고 주장했다.

심재열은 자신의 주장을 보다 확실하게 입증하고자 청허휴정(1520~ 1604)의 《선가귀감》의 내용을 간접적으로 활용했다. 그것은 《선가귀감》에서 임제종의 조사를 소개하고 있는데, 6조 혜능에서 임제의현을 거쳐서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에서 끝마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태고보우가 법을 받아온 석옥청공(石屋淸珙, 1272~ 1352) 계열에 비중을 두지 않고 대혜종고에 무게를 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혜종고보다 100년 뒤에 활동했던 석옥청공을 청허휴정은 임제종에서 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청허휴정이 태고보우를 중시했다면, 그가 법맥을 받아온 석옥청공을 임제종 계보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무시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혜종고의 간화선을 한국에서 제일 먼저 수용한 사람이 바로 보조지눌이라는 점에서 심재열은 보조종조설을 주장한 것이다.

필자는 조계종의 종조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학문의 주제라기보다는 조계종 내부의 합의가 우선되어야 하는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조계종이 계속 유지되어 왔던 종단이라면 누구를 종조로 할 것인지가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불교 종파가 사라졌고, 일본강점기와 그 이후에 드디어 종파를 세우려다 보니 다시 새롭게 세우는 종파의 단체, 곧 종단의 종조에 누구를 선정할 것인지 문제가 된 것이다. 그래서 종조 문제는 학문적 영역이 아니고 조계종 내부의 합의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심재열이 조계종의 종조는 보조지눌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한국 선불교의 사상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을 제기한다면, 보조지눌이라는 심재열의 주장을 수용하고자 한다. 심재열의 주장처럼, 한국 선불교의 사상가 가운데 간화선을 제일 먼저 수용하고 조선시대를 거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선불교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인물은 보조지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 보조지눌의 돈오점수

1981년 당시 종정이던 성철이 그의 저술 《선문정로》에서 보조지눌의 돈오점수를 비판하면서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논쟁이 현대 한국불교계에서 시작되었다. 이 논쟁은 세 가지 입장으로 전개되었다. 첫째 보조지눌의 돈오점수를 옹호하는 입장이고, 둘째 성철의 돈오돈수를 지지하는 입장이며, 셋째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주장을 수용해서 한국불교의 대안을 모색하려는 입장이다. 세 번째 입장은 박성배의 주장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의 입장 가운데 심재열은 첫째 입장, 곧 보조지눌을 옹호하는 입장에 서서 자신의 견해를 전개했다. 그래서 심재열은 지눌의 돈오점수가 소승과 대승의 수행론을 관통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깨달음과 닦음에 일정한 궤범(기준)이 있는데, 그 단계는 발심(發心)→수행(修行)→도를 깨달음[悟道]→수도(修道)→성불(成佛: 究竟覺)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10가지 번뇌를 끊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면, 탐(貪) · 진(嗔) · 치(癡) · 만(慢) · 의(疑) · 신견(身見) · 변견(邊見) · 사견(邪見) · 견취견(見取見) · 계금취견(戒禁取見)의 10가지 번뇌 가운데 발심(發心)한다고 했다. 다음 단계인 수행을 통해 도를 깨달아서 6가지 번뇌, 곧 의(疑) · 신견(身見) · 변견(邊見) · 사견(邪見) · 견취견(見取見) · 계금취견(戒禁取見)을 끊고, 깨달은 뒤에 본격적인 수행[保任]과 보살행을 통해 미세한 상태로 잠재된 깊은 본능, 곧 나머지 4가지 번뇌인 탐(貪) · 진(嗔) · 치(癡) · 만(慢)을 끊어서 마지막에 구경각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소승의 수행도를 살펴보면, 견도(見道) 이전에는 준비 단계로서 4단계가 있다. 그 4단계는 3현(三賢)과 4선근(四善根)이다. 여기서 3현은 3단계로 이루어졌고, 4선근은 1단계로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 3현의 1단계에서는 5정심관(五停心觀)을 닦고, 2단계에서는 4념처관(四念處觀)을 각각 닦고, 3단계에서는 4념처관을 총괄적으로 닦는다. 그리고 4선근의 단계에서는 사성제를 관찰한다. 이것은 4단계 곧 난(煖) · 정(頂) · 인(忍) · 세제일법(世第一法)을 거친다. 그러고 나서 견도(見道)에 들어간다. 견도와 수도(修道)와 무학도(無學道)는 성자의 길이고, 무학도에서 아라한이 된다. 성자의 길에 모두 8단계가 있다.

그리고 심재열은 여러 대승 경전에서 말하는 수행단계를 소개하고, 또한 유식종, 화엄종, 천태종의 수행단계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서 《성유식론》의 5단계가 소승과 대승의 수행단계를 잘 종합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1단계 ‘자량위’는 선행(善行)을 쌓아나가는 단계이다. 2단계 ‘가행위’는 유식관(唯識觀)을 깊게 하는 단계이다. 3단계 ‘통달위’는 지혜를 체득하는 단계이다. 4단계 ‘수습위’는 지혜를 닦아서 몸에 스며들어 있는 나쁜 버릇을 고쳐가는 단계이다. 5단계 ‘구경위’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 단계이다.

이처럼 심재열은 발심하고 수학해서 도를 깨닫고, 도를 깨달은 뒤에 남아 있는 번뇌를 제거하는 수행을 통해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소승과 대승을 일관하는 수행의 원형이라고 했다. 이런 점에서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에 의지해서 남아 있는 번뇌를 제거해 나가는 수행, 곧 ‘돈오점수’가 불교 수행론의 원형이라고 심재열은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보조지눌의 ‘돈오점수’에는 돈오하기 이전에 점수하는 것이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심재열이 해석하는 ‘돈오점수’는 보조지눌이 주장하는 ‘돈오점수’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그렇지만 이렇게 약간 변형된 의미, 곧 돈오하기 전에 점수를 인정하는 ‘돈오점수’에 수행론의 보편성이 있다는 심재열의 주장에 필자는 공감한다.

그리고 심재열은 다른 저술에서는 앞에 소개한 조금 다른 의미의 ‘돈오점수’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돈오한 뒤에 보살행을 닦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4. 불교의 윤리관

심재열은 그의 저서 《원효사상 2 윤리관》의 1부 〈총설〉에서 초기불교, 대승불교의 윤리관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서술하고 있고, 그 가운데 자신의 주장도 아울러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체계적인 서술은 이 책이 출판된 1986년을 기준으로 해서 본다면, 그 당시로는 불교학계에 큰 기여를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몇 가지 항목에 초점을 맞추어서 그의 관점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1) 업사상(業思想)

업(業)은 본래 행위를 뜻하는 말이지만, 그것이 단순히 행위에 한정되지 않고 그 행위에 의해서 미치는 영향으로서 업력(業力)을 포함하는 말이다. 이것은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로 발전한다. 이는 과거에 행한 업이 미래에 과보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류의 업사상에는 한편으로는 우리의 인생을 전생의 업에 의해 선천적으로 정해진 것이라고 보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의지와 행위에 따라 현세의 운명을 개척하고 내세의 결과를 이끌어낸다는 측면도 아울러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불교의 업사상은 운명론이나 결정론이 아니고, 인생에서 의지의 자유를 중시하고 행위의 책임을 중시하는 동기론적(動機論的) 사상이고 또한 목적론적(目的論的)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업감연기설의 관점은 대승불교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위의 설명에서 심재열은 불교의 ‘업감연기설’이 어떤 점에서 ‘동기론적 사상(윤리)’이고 ‘목적론적 사상(윤리)’인지 분명히 제시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우선 ‘동기론적 윤리’는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윤리사상이 대표적인 것인데, 칸트는 윤리적 행위에서 도덕법칙을 추구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한 것이지 행위의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목적론적 윤리’는 ‘결과주의 윤리’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는 ‘행복’이나 ‘쾌락’을 목적으로 해서 윤리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표적인 목적론적 윤리사상으로는 영국의 공리주의 윤리를 거론할 수 있다.

심재열은 업감연기설에서 ‘의지의 자유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도덕법칙을 추구하는 의지를 중시하는 ‘동기론적 윤리사상’이라고 보았고, 또 업감연기설에서 ‘행위의 책임을 중시한다는 점’, 이는 행위의 결과를 중시한다는 말이므로 ‘결과주의 윤리사상’ 곧 ‘목적론적 윤리사상’이라고 보았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심재열은 서양 윤리의 2대 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 ‘동기론적(동기주의) 윤리’와 ‘목적론적 윤리’로서 불교의 윤리를 설명하고자 했다. 이는 불교의 윤리를 현대적 안목으로 바라보고자 한 것으로 풀이된다.

2) 복전사상(福田思想)

복전사상은 사회적 윤리활동의 구체적 기초를 이루고 있는 불교사상의 한 가지다. 복전(福田)이란 ‘복덕(福德)을 생겨나게 하는 밭’이라는 의미다. 이는 복덕을 짓는 방법 또는 복덕을 쌓는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생긴 것이다.

초기불교의 복덕 사상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불타(佛陀)와 성자(聖者)를 존중하고 공양하는 것이 자신의 복덕을 짓는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물건을 보시함이 복덕을 생기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물건을 보시한다는 것에는 ‘사회적 공공사업’을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장아함 2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탑을 세우고 정사(精舍)를 지으며 공원에 과실나무를 심어서 베푸는 것, 광야에 수초(水草)를 베푸는 것, 배를 만들어 사람들을 건너게 해주는 것, 당각(堂閣: 집)을 세워서 보시하는 것, 이러한 것을 실천하면 그 복(福)이 날로 더할 것이다.”

또 잡아함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원에 과실나무 등을 심어서 숲의 그늘로 [대지를] 청량(淸凉)하게 하고, 다리를 놓고 배를 만들어 건너다닐 수 있게 하며, 우물을 파서 목마른 사람들이 먹을 수 있게 하고, 객사(客舍)를 세워서 나그네가 잠을 잘 수 있게 하면, 이로 인한 공덕이 밤낮으로 늘어난다. 충실하게 계(戒)를 지키면 이 인연으로 하늘 세계에 태어날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위의 두 가지 경전 이외에 증일아함 10권, 《마하승기율》 4권, 《사분율》 4권에도 소개되어 있다.

이처럼 사회적 공공사업을 하는 것이 복덕이 된다는 것은 대승불교에도 계승되고 있다. 《불설제덕복전경(佛說諸德福田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7가지 복전을 주장하고 있다. “첫째 불탑 · 승방(僧房: 사찰) · 당각(堂閣)을 세우는 것, 둘째 공원에 과실나무[果樹木]를 심고 목욕할 곳을 만드는 것, 셋째 의약을 베풀어서 많은 병자[衆病]를 치료해 주는 것, 넷째 튼튼한 배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건네주는 것, 다섯째 다리를 놓아서 사람들이 통행하게 하는 것, 여섯째 길 옆에 우물을 파서 행인들의 목마름을 해소해주는 것, 일곱째 공중변소를 세워서 대중이 편리하게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승율(大乘律)에 속하는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 3권 〈공양삼보품〉(북량의 담무참 번역)에서는 3가지 복전을 거론한다. “첫째 은혜에 보답하는 복전[報恩田]은 부모 · 사장(師長, 스승과 어른) · 화상(和尙, 계를 준 승려)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 둘째 공덕을 쌓는 복전[功德田]은 불타(佛陀)와 성자를 공경하는 것이다. 셋째 빈궁한 사람을 돕는 복전[貧窮田]은 큰 어려운 일이나 불행한 일[窮苦困厄]에 처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구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 찬술 경전[僞經]에 속하는 《상법결의경(像法決疑經)》에서는 두 종류의 복전을 말하고 있다. “첫째 공경의 복전[敬田]은 불법승(佛法僧)의 삼보를 공경하는 것이고, 둘째 자비의 복전[悲田]은 곤궁하고 고독한 사람을 가엽게 여겨서 구제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복전 가운데 자비의 복전[悲田]이 더 뛰어난 것이다. 그런데 보시를 행할 때는 복전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베푼다는 생각 없이 베푸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 경전에서는 정법(正法)의 시대(500년)가 지나고 그다음으로 오는 상법(像法)의 시대(1000년)에는 빈궁한 사람과 고독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오노 신조(大野信三)는 이러한 복전사상을 불교의 사회정책적인 사상의 기본이념 가운데 하나라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오노 신조는 이 복전사상은 광범위한 사회보장제도의 도입이라고 해석한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병자, 장애자, 고아, 노인 등이 적어도 일상의 물질생활에서 걱정을 덜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노 신조는 ‘불교사회연대주의’를 주장한다. 이는 불교사상에 기반을 둔 ‘윤리적 이상주의’라고 할 수 있다. ‘사회연대주의’는 콩트가 주장한 것으로 이는 지식이 진보해서 이타적 감정이 증가하고 그리하여 인류가 서로 연대하고 결합한다는 것이다.

3) 사섭법(四攝法)

사섭법은 불교에서 다른 사람을 돕는 네 가지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보시, 애어, 이행, 동사이다. 첫째, 보시(布施)는 모든 사람에게 재물과 가르침[法]을 베푸는 것이다. 둘째, 애어(愛語)는 상대방을 교화할 목적으로 부드러운 말을 하는 것이다. 이는 얄팍한 명성과 이익 때문에 간사한 의미로 부드러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셋째, 이행(利行)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이는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고통스러운 사람,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고, 나아가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가르침을 베풀어 믿도록 하는 것이다. 계를 깨뜨리는 사람에게 가르침을 베풀어서 계를 지키도록 하는 것이며, 지식이 부족한 사람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 등도 이행(利行)에 포함된다.

넷째, 동사(同事)는 상대의 입장에 서서 도와주고 협력해 주며 이롭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죄를 범하려는 사람을 인도하기 위해서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친구가 되어 그 사람이 죄악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도 포함된다. 또한 수행인에게는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협력해 주고 함께 수행해서 빨리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러한 사섭법은 초기불교, 아비달마불교, 대승불교, 밀교에 걸쳐서 계속 주장된 것이다. 초기불교의 중아함 제33의 《선생경(善生經)》에 사섭법이 소개되어 있고, 아비달마불교의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설일체유부의 7가지 논서 가운데 하나) 제9에는 사섭법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 있다. 그리고 대승불교에 이르러서는 보살의 이타행(利他行)으로 중시되었다. 그래서 《반야경》 《화엄경》 《유마경》 《대지도론》 《유가사지론》 《대승장엄경론》 《섭대승론》에서 사섭법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밀교에서는 사섭법의 정신을 인격화해서 사섭(四攝)의 보살, 곧 금강구(金剛鉤), 금강삭(金剛索), 금강소(金剛銷), 금강전(金剛銓) 보살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오노 신조는 사섭법이 많은 불교 지도자에 의해 불교인의 사회적 활동원리로 활용되어 왔고, 특히 단체조직의 협동수단으로도 그 현실적 의의를 인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4) 원효의 계율관

   
《원효사상 2 윤리관》(1988)
심재열은 원효 사상의 업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거론했다. 첫째, 원융회통(圓融會通)의 정신이다. 이는 서로 다른 종지의 가르침을 불타(佛陀)의 큰 진리의 바다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둘째, 원효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많은 저술을 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원효보다 많은 저술을 남긴 불교사상가도 있지만 그것은 한 가지 종파에 한정된 것이었으며, 많은 번역을 남긴 불교번역가도 있지만 그것은 국가적인 후원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에 비해 원효는 개인적인 저술을 한 것이고, 어느 한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폭넓은 저술을 남기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대중불교(大衆佛敎)운동이다. 원효는 불교를 대중화하기 위해서 여러 촌락을 돌아다니면서 광대의 역할을 하였고, 그래서 글을 모르는 대다수의 민초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불교의 대중화운동은 특수 귀족층이나 지식인들의 불교에서 벗어나서 모든 국민이 불교를 알게 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심재열은 원효의 화쟁(和諍) 사상을 현대적으로 다시 연구할 때에 ‘조국의 평화통일’도 가능하고 ‘세계의 안녕과 질서’도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심재열은 원효의 사상에 관한 전반적인 큰 그림을 제시하고 나서, 원효의 계율관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했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 한 가지 점만을 거론하고자 한다. 《범망경보살계본사기》에 나타난 원효의 주석적 특징은 《범망경》의 제목을 지관(止觀)의 관점에서 풀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지관(止觀)으로 《범망경》의 제목을 풀이한 것은 다른 주석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원효의 저술에서만 나타난다고 심재열은 주장했다.

원효는 일여(一如)의 법계(法界, 진리의 세계)를 체득하는 것이 지(止)이고, 법계가 한결같은 것이지만[一如] 그 가운데 가유(假有)의 존재를 관조하는 것을 관(觀)이라고 한다. 심재열은 앞에 말한 지(止)는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에 속하고, 관(觀)은 후득지(後得智)에 속한다고 풀이했다. ‘근본무분별지’는 일체 현상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는 것을 아는 지혜이고, ‘후득지’는 ‘근본무분별지’에 근거해서 현상 차별의 모습을 아는 지혜이다.

5. 결론

이 글에서는 심재열의 학문적 업적의 일부를 검토하였다. 이제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는 것으로 결론을 삼고자 한다. 심재열은 대각국사 의천의 천태사상이 중국의 천태사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아니고 원효의 원융회통 사상 위에 당시의 선종과 여러 교종을 융합한 것이며, 의천이 천태종을 세운 것에는 호국불교의 의미도 있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이 주장에 공감한다.

또 심재열은 조계종의 종조는 보조지눌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는데, 오늘날 조계종의 종조는 내부의 합의사항이지 학문의 영역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조계종의 종조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심재열의 주장을 한국 선불교의 사상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 누구인가로 조금 바꾼다면, 그때는 심재열의 주장대로 보조지눌이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성철이 ‘돈오돈수’를 주장하고 보조지눌의 ‘돈오점수’를 비판한 것에 대해 심재열은 ‘돈오점수’를 옹호하고 있다. 그것은 발심하고 수행해서 도를 깨닫고 그 깨달은 힘에 의지해서 도를 닦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 것은 소승과 대승을 일관하는 수행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심재열이 보조지눌의 ‘돈오점수’를 조금 바꾸어서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지눌이 주장하는 ‘돈오점수’에는 돈오하기 이전에 점수하는 것이 부각되지 않았다. 여기에 심재열의 주장이 문제가 있다고 하겠지만, 아무튼 변형된 의미의 ‘돈오점수’가 불교 수행의 원형이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심재열은 《원효사상 2 윤리관》에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윤리관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원효의 계율관의 특징을 제시하였다. 심재열은 불교의 업사상을 서양철학의 ‘동기론적(동기주의) 윤리’와 ‘목적론적(결과주의) 윤리’로 바라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불교의 업사상을 서양철학의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한 것이다. 또 대승의 윤리사상에서 복전사상, 사섭법의 전개 양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서술했다. 그리고 원효의 계율관에서는 《범망경》의 제목을 지(止)와 관(觀)의 관점으로 읽어낸 점이 다른 주석가와 구분되는 특징이라고 한다.

심재열은 재야의 불교학자이지만, 그의 학설은 불교학계의 전문가를 능가하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재야학자로서 고단한 삶을 살아왔으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조용하면서도 철저하게 학문의 길에 임한 심재열 선생에게 삼가 존경의 염을 표한다. ■

 

이병욱 / 고려대 강사.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저술로는 《천태사상연구》 《고려시대의 불교사상》 《한국불교사상의 전개》 《불교사회사상의 이해》 등이 있다. 현재 중앙승가대, 동국대 평생교육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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