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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한국 불교학자] <22> 황성기 / 장진영
한국불교 재건 염원한 대승사상 실천가
[68호] 2016년 12월 01일 (목) 장진영 jinsuwon@hanmail.net

1. 고봉 황성기의 생애

   

고봉(杲峰) 황성기
(黃晟起, 1919~1979)

고봉 스님(속명 황성기, 1919~1979, 이하 존칭 생략)은 1919년 11월 19일 강원도 고성군에서 부친 평해(平海) 황씨 필홍(弼弘)과 모친 성천(成川) 라씨(羅氏) 순길(順吉)의 5남 1녀 중 5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오길(五吉)이며, 가정은 염전을 생업으로 하였다. 그의 불연(佛緣)은 어린 시절 건봉사(建鳳寺)로 출가하면서부터이다.

여기에서 고성공립보통학교를 다니며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마쳤고, 이 시기부터 자연스럽게 출가 생활과 세간 생활을 병행하게 되었으며, 보살의 서원도 싹틔우게 되었다. 16세인 1934년 경기도 화성의 용주사(龍珠寺)로 옮겨 그해 8월 5일 경하(耕荷)를 은사로 득도(得度)하였고, 고봉(杲峰)이라는 법명을 얻게 되었다. 이후 23세인 1941년 초까지 이곳 강원(講院)에서 성능(性能)의 문하에서 사미과에서 대교과에 이르는 전통이력과정을 모두 이수하였다. 황성기는 이때 이미 한문의 독해 능력과 논리적 · 철학적 사고가 출중하였다고 전한다.

황성기의 학문에 대한 열의는 식을 줄 몰랐는데, 1941년 4월, 강원을 마치자마자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 불교학과에 진학하여 근대교육을 받았으며, 새로운 학문과 포교에 대한 꿈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이 시기의 시국 상황으로 말미암아 학업에 전념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황성기는 〈동대신문〉에 연재했던 〈나의 혜전(惠專) 시절〉(1976)에서 “겨우 학생의 기분을 맛볼 새도 없이 전시체제의 마지막 고비에 말려드니 학생은 사각모 대신 전투모를 써야 하고 등하교시에도 각반을 착용해야 하며 식량도 극도로 곤란해서 대두박(大豆粕, 콩깻묵)을 보비(寶米)라고 그나마 다 썩은 것을 배급받고 있었으니 실로 무서운 전시하에서 학생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1943년 9월 졸업 후에는 용주사 수원포교소(이후 수원포교당으로 개칭)에서 포교사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동시에 1944년 고성남공립국민학교 촉탁교원을 시작으로 1953년까지 송강국민학교 교장, 고성중 · 송탄중 교원 및 거진여중 교감 등 약 9년간 교편생활을 하였다. 1951년부터 2년간 용주사 자혜원 교사를 역임하였으며, 1954년에는 수원 마하사(摩訶寺, 지금의 대승원)를 창건하고 주지에 취임하여 대중교화에 열성을 다하였다. 이 시기를 통해 학교 교육와 함께 대중 교육에도 적극 참여함으로써 포교사로서, 교육자로서 불교와 생활을 아우르는 대승보살의 서원을 현실에 구현하는 일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1945년 해방정국의 혼란과 1950년 한국전쟁의 참화는 황성기로 하여금 대중포교와 학문에 대한 열정도 더욱 간절해지게 했다. 35세인 1953년 혜화전문학교 시절 은사인 뇌허 김동화(雷虛 金東華, 1902~1980)의 권면으로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불교학과 3학년에 다시 편입하여 학부와 대학원에 진학하였고, 오롯이 학문에 매진한 끝에 1957년 〈화엄교학의 무진연기론(無盡緣起論)〉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아울러 1960년부터는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전임강사를 시작으로 대학 강단에도 서게 되었다. 이 시기에 《불교학개론》(1964), 《한국불교재건론》(1966) 등의 주요 저술을 남겼으며, 1976년에는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원측(圓測)의 유식학설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한편, 1954년 이승만이 왜색불교의 잔재인 대처승을 사찰에서 몰아내라는 취지의 담화 발표로 촉발된 이른바 비구 · 대처 분쟁으로 불교계 전반은 큰 혼란과 아픈 상처가 남았다. 황성기가 동국대학교에서 강단에 섰던 시기는 5 · 16쿠데타로 들어선 군사정권의 강압에 의해 분쟁 종식을 위한 ‘불교재건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여기에 황성기도 대처승(법륜사) 측 재건위원으로 참여하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강압에 의한 결과는 만족스러울 수 없었고, 이 와중에 그는 독자적으로 ‘불교의 개혁과 대중화를 위해 앞장서겠다.’는 발원을 세우고 1964년 7월 25일 ‘불교사상연구회’ 설립을 주도하였다. 그는 “오늘의 사찰 중심 불교를 교리 중심 불교로, 승려 본위 불교를 신앙 본위 불교로, 형식주의 불교를 구제주의 불교로 지양하고 봉사(奉仕-布施)와 인내(忍耐-忍辱)와 노력(努力-精進)으로써 불교를 현대화하고, 대중화하고, 생활화하여 광제중생의 불교 본래의 사명을 다하고자” 한다고 불교사상연구회의 설립취지에 대해 회고한 바 있다. 같은 해 12월 24일 수원지부 결성을 시작으로 전국에 10개의 지부가 결성되기도 하였다.

황성기는 이보다 앞선 1961년부터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사재(월급)를 털어 월간 《불교사상》을 발행하였는데, 한때 중단되기도 했으나 《현대불교》 및 《불교생활》이라는 제명으로 그 명맥을 이어갔다. 또한 1964년에는 서울의 을지로 5가 통일예식장에서 ‘불교교리 토요강좌’를 개설하여 정기적으로 운영하며 한국불교의 대중화를 선도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불교학회 감사(1973~1976)와 이사(1976~1979)를 거치면서 한국불교학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불교의 현대화, 대중화, 생활화에 앞장섰던 그는 1979년 10월 15일(음) 수원 대승원에서 입적하였는데, 세수 61세, 법랍 46년이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애(金貞愛)와 장자 욱(旭), 장손 익(翼) 및 차자 영(泳), 손자 준(浚)이 있다.

황성기의 생애를 보면, 그는 대중포교에 앞장선 승려이자 불교교리의 대중화에 헌신한 교육자로서 한국불교 재건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대승보살의 실천가였음을 알 수 있다.

2. 저술 및 사상

황성기는 사미과에서 대교과에 이르는 전통강원의 이력과정과 대학의 학부에서 대학원에 이르는 근대교육을 모두 마침으로써 신구의 학문을 섭렵하여 전통과 근대의 장점을 겸비하였다. 아울러 그의 저술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구사(俱舍) · 유식(唯識) · 인명(因明) · 기신(起信) · 화엄(華嚴) · 천태(天台) 등 불교학 전반에 대한 폭과 깊이를 두루 갖추었다. 그는 교육 활동과 함께 대중포교 활동도 지속하는 등 학문과 포교, 교육자의 역할과 출가자의 소명을 병행함으로써 대승보살 정신의 실천에 소홀함이 없었다.

황성기의 논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화엄교학의 무진연기론〉(1957), 박사학위 논문 〈원측의 유식학설 연구〉(1976)가 있다. 이는 앞서 발표된 〈원측의 유식학관에 관한 연구〉(《불교학보》 제9집,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1972)를 보완한 것이다. 〈한국불교 범패(梵唄)의 연구〉 《한국불교학》 제2집(한국불교학회, 1976), 그 외에 《한국불교재건론》(1966)이 있으며, 기타 《불교사상》 11 · 12호(불교사상사)에 연재된 〈원효대사 저 《발심수행장》 강화〉 등이 있다. 주요 저서로는 1964년에 발간된 《불교학개론》(황금출판사)이 있다.

1989년에는 후학들에 의해 유고집으로 불교사상연구회 편 《황성기박사불교문집》(이하 《문집》) 3권(보림사)이 간행되었는데, 1권은 《불교학개론》, 2권은 《불교의 인식 · 논리 · 의례》, 3권은 《불교사상의 본질과 한국불교의 제 문제》이다. 앞서 발표된 논문들과 신문, 잡지에 실린 글들은 이상의 《문집》 3권에 거의 수록되었기에 여기서는 유고집의 순서에 따라 그 안에 담긴 논저와 사상을 개괄하고자 한다.

1) 《불교학개론》

   
《불교학개론》(1964).
1964년에 발간된 《불교학개론》은 1964년 5월 25일 초판(황금출판사)이 나온 이후, 1974년까지 5판이 발행되었고, 1978년 증보판(법륜사)이 발행되어 1980년까지 3판이 발행되었다. 이후 1989년 입적 10주년을 맞아 신판(보림사)으로 재발행되었으며, 입적 20주년인 1999년 8월에 다시 재신판(아름다운 세상)이 발행되어 이후 2005년 3월 15일까지 5판이 발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불교재건론》(1966)이 부록에 포함되고 후기로 박선영의 〈저자 황성기 선생님의 생애와 사상을 중심으로〉와 약력 및 주요 논저가 언급되어 있다.

황성기는 《불교학개론》 서문에서 “은사 김잉석 · 김동화 두 박사님의 크신 은혜에 두 손 모아 삼가 감사를 올린다.”고 밝히고 있다. 뇌허 김동화는 1954년에 국내 최초의 근대불교학 개론서인 《불교학개론》(보련각)을 발간했으며, 현곡 김잉석은 1960년에 화엄학 입문서인 《화엄학개론》(동국대학교 출판국)을 발간했는데, 〈화엄교학의 무진연기론〉(1957)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던 황성기도 이 《화엄학개론》의 발간에 일조했다고 한다. 특히 황성기의 《불교학개론》은 당시 은사들의 뒤를 이으면서도 독자적인 의의가 있는 책이다. 그가 서문에서 “불교를 처음 알고자 하는 이에게 되도록 쉬운 말로 풀이하여 이해를 쉽게 하는 동시에 복잡한 이론들의 나열을 피하고 줄거리만을 간추려 불교교리의 체계를 세워 보고자 노트를 정리하여 대학교재를 목적으로 엮어 놓은 것이 《불교학개론》이다.”라고 밝힌 것처럼, 대중적 불교교리서를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특히 윤창화가 언급했듯이 “탈한문, 탈일본 의식하에 우리말로 된 한국적인 개론서”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황성기의 《불교학개론》을 뇌허의 저술과 목차를 중심으로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먼저 뇌허의 저술을 보면, 서론에서부터 ‘1. 불교의 의의’ ‘2. 불교의 전적’ ‘3. 불교연구의 방법’ 등 장절을 구분하여 자세히 서술한 반면에, 황성기는 장절 구분 없이 불교에 대한 개략적 소개와 본론의 기술 내용만을 언급하고 있다.

다음으로 본론의 내용을 보면, ‘불보’ ‘법보’ ‘승보’의 삼보의 편제로 기술하였던 점은 서로 공통적이다. 다만 뇌허가 제1편 불보에 ‘1장 역사적 불타론(응신론)’과 ‘2장 진리즉불타론(眞理卽佛陀論)(법신)’ 그리고 ‘3장 제종의 불신론’ 등 불신론을 전체적으로 다루고 있다면, 황성기는 역사적 불타를 중심으로 ‘1. 붓다의 생애’와 ‘2. 원시불교의 교리’를 함께 다루고 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제2편 ‘법보’에서는 전체적으로 불교교리를 설명하는 두 가지 체계로서 ‘연기론’과 ‘실상론’을 대비하여 설명한다는 점은 서로 공통적이다. 다만 뇌허의 경우, 황성기가 불보에서 언급한 ‘원시불교의 교리’를 ‘1장 불교의 근본교리’에서 다루고 있으며, 또한 ‘2장 우주론’ ‘3장 만유제법의 분류’를 먼저 밝히고, 이어서 ‘4장 연기론(현상론)’ ‘5장 실상론(실체론)’ ‘6장 연기론과 실상론과의 소결’ 마지막으로 ‘7장 지혜론(인식론)’을 다루고 있다. 반면 황성기는 ‘1. 불교교리의 두 가지 체계’에서 ‘법보’ 편 전체를 개괄한 후, ‘2.연기론’ ‘3.실상론’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간명하게 교리 전반을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세부 목차에서도 뇌허가 연기론을 업감연기설, 아뢰야연기설, 진여연기설, 법계연기설, 육대연기설(六大緣起說), 불계연기설(佛界緣起說)까지 진언종(밀교), 일련종을 포함시킨 반면에 황성기는 법계연기설까지만 밝히고 있다. 실상론에서도 뇌허가 법체유공론, 무상개공론, 유공중도론, 제법실상론, 사사무애론, 즉사이진론(卽事而眞論) 등 화엄종과 진언종의 실상론을 함께 언급한 반면에, 황성기는 삼세실유론, 무상개공론, 유공중도론, 제법실상론까지만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 뇌허는 ‘지혜론(인식론)’을 별도의 장으로 하여 유식(唯識)의 입장에서 인식론을 비교적 상세히 다루고 있는 반면에, 불교인식론[인명론]에 대해 누구보다도 관심이 많았던 황성기였음에도 이 부분을 별도로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앞서 밝힌 ‘대중을 위한 불교교리서’라는 저술 목적에 보다 충실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본론의 제3편인 ‘승보’의 경우 뇌허는 1장에서 ‘승보의 의의’를 밝힌 후 신해행증의 순서에 따라 각각 신앙론(신), 열반론(해), 수행론(행), 단혼증리론(증)을 다루고 마지막 5장으로 ‘불국정토론’을 더하고 있다. 이에 대해 황성기는 1장에서 ‘불교교단의 제 문제’라는 제목으로 승보의 의미와 구성, 여러 의식을 밝히고 있으며, 2장에서 ‘소승불교의 비구도’ 3장에서 ‘대승불교의 보살관’이라 하여 소승과 대승의 붓다관, 보살관, 수행관을 대비하고 있다. 그리고 제4장에서 ‘한국불교의 현황’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는 당시 내부 분규로 고심하던 불교계의 현실에 대해 “대중과 울고 웃는 인류구제의 보살불교(菩薩佛敎)만이 진정한 부처님의 본회(本懷)인 동시에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불교”라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이를 통해 ‘승보’에서는 “믿고 배우고 행하고 얻어서 개인의 인격을 완성하고 사회를 정화하는 것이 우리 불교인의 할 일”임을 밝히는 방향에서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황성기의 《불교학개론》은 뇌허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으면서도 그 저술 목적이나 방식에서는 철저히 대중을 위해 쉽고 간명하게 밝혔으며, 동시에 실제 불교인의 사명과 역할에 대해 대승보살의 정신을 누누이 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불교의 인식 · 논리 · 의례》

다음은 《문집》 제2권인 《불교의 인식 · 논리 · 의례》(보림사, 1989)를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에 실린 글들을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3가지 서로 상이한 주제를 함께 묶은 것이다. 첫째는 〈원측의 유식학설 연구〉로 1976년의 박사학위 논문이요, 둘째는 〈인명학(因明學)의 과실론(過失論)〉과 〈인명입정리론 강의〉(未定稿)를 함께 실었으며, 셋째는 〈한국불교 범패의 연구〉로 《한국불교학》 제2집(1976)에 실렸던 글이다. 각각 독립적인 논문이 엮는 과정에서 《불교의 인식 · 논리 · 의례》라는 다소 포괄적인 제목을 붙이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형근은 서문을 대신한 〈황성기 박사의 학문 세계〉에서 황성기는 “강원교육과 학교교육을 모두 받은 분”으로서 “신학문과 구학문을 모두 구족”하였으며, 특히 “한국불교의 불교학을 바로잡고 또 교학을 부흥시키기 위하여 구사론과 유식학을 다시 도입하여 교육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감에서 연구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조선불교학에서 전무(全無)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유식학과 인명학에 관한 논문”을 썼다는 점에서 그의 선구적 연구 업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문집》 제2권의 처음에 실린 〈원측의 유식학설 연구〉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원측의 유식학관에 관한 연구〉 《불교학보》 9집(1972)에 실린 글을 보완한 것인데, 이 글은 원측(613~690)에 관한 국내 최초의 학위논문이란 점에 그 의의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남무희에 따르면, 원측에 대한 연구는 하다니 료타이(羽溪了諦)(1916, 1917)에 의해 그 행적이 소개되면서 중국 법상종의 이파(異派)로서 ‘신라계’가 주목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해방 이후 원측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조명기(1949, 1962)는 원측의 찬술 목록을 작성했고 현존 저술을 통해 그 사상적 특징이 고찰했으며, 박종홍(1962, 1972)은 한국사상사의 맥락에서 원측의 유식철학을 다루었다.

이후 1970년대 원측에 대한 연구는 원측의 유식설이 중국 법상종의 견해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밝히는 방향으로 심화되는데, 이 시기 황성기의 연구는 그 선구가 되었다. 특히 그는 자은의 제자 혜소(惠沼)의 《성유식론요의등(成唯識論了義燈)》이 언급한 원측에 대한 비판을 대비하여 소개하고, 경우에 따라 원측의 제자인 도증(道證)의 《성유식론요집(成唯識論要集)》을 통해 원측의 견해를 보충하고 있다. 황성기는 본론에서 ‘본론(성유식론) 술작(述作)의 취지에 대한 이견’ ‘경(敬)은 참괴(斬愧)로써 체(體)를 삼는다’ ‘집장설(執障說)’ ‘제식설(諸識說)에 대한 이견’ ‘식변설(識變說)에 대한 이견’ ‘심소육위법(心所六位法)’ 등 6개의 주제에 대해 총 23개의 소주제를 비교함으로써 자은(慈恩)으로 대표되는 중국 유식학과 쌍벽을 이루었던 신라 유식학의 사상적 특징을 고찰하고자 하였다.

두 번째는 〈인명학의 과실론〉과 〈인명입정리론 강의〉(未定稿)이다. 흔히 불교논리학(인명학)은 진나(陳那, Dignāga)를 기점으로 고인명(古因明)과 신인명(新因明)을 구분한다. 이 진나의 《인명정리문론(因明正理門論)》을 간명하게 정리하면서 일부 내용을 추가 ·보완하고 있는 것이 진나의 제자인 상갈라주(商羯羅主 혹은 天主, Śaṅkarasvāmin)의 《인명입정리론(因明入正理論)》이다. 특히 《인명정리문론》에서 사능립(似能立)에서 사종(似宗) 5과(過), 사인(似因) 14과, 사유(似喩) 10과 등 총 29과를 별도의 명칭 구분 없이 설명만 하고 있는 반면, 《인명입정리론》에서는 사종(似宗) 5과에 4과를 더 추가하여 총 33과로 하고 각각에 명칭을 부여하고 간단한 설명을 추가하고 있다.

황성기는 《인명입정리론》의 총 33과를 중심으로 〈인명학의 과실론〉을 정리하고 있는데, 이보다 먼저 혹은 동시에 〈인명입정리론 강의〉가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 글이 언제쯤 강의 혹은 저술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인명입정리론 강의〉는 서론에 해당하는 현담(玄談) 부분과 《인명입정리론》의 원문 풀이 그리고 과문(科文)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실제 황성기의 간략한 원문 풀이는 진능립(眞能立)과 사능립(似能立)까지만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해 〈인명학의 과실론〉은 이 〈강의〉를 논문 형식에 맞게 세부 목차를 제시하고, 그 풀이를 대폭 보완하여 일상적인 사례와 함께 일부 도표 등을 사용하여 현대적으로 풀어쓴 것이다. 그러므로 두 글은 한 세트로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황성기는 실제 인명의 이른바 팔대부분(八大部分), 즉 오타(悟他)를 목적하는 능립 · 능파의 진(眞) · 사(似) 4문과 자오(自悟)하는 방법인 현량 · 비량의 진 · 사 4문 중 진능립(眞能立)과 함께 과실론에 해당하는 사능립의 2대 부분만 통하면 나머지는 자명해진다고 보았으며, 이에 〈인명학의 과실론〉을 저술하였다. 그는 “불교학을 전공하거나 또는 일독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간과할 수 없는 필수과이니 인명을 모르고는 불경론(佛經論)을 알 수 없다고 한다고 해서 과장은 아닐 것이다.”라고 하여 불교학에서 인명학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며 결론을 맺고 있다.

세 번째 논문 〈한국불교 범패의 연구〉는 1976년 《한국불교학》에 게재된 것이다. 서론에서 ‘경전상에 나타난 인도범패의 유래’에서부터 ‘중국범패의 유래’ 그리고 ‘신라 진감국사(眞鑑國師)의 범패 전입’까지 범패의 기원과 유래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황성기는 여기서 진감선사(774~850)를 ‘해동범패의 조(祖)’라고 강조하고 있는데, 이후 원효의 《판비량론》 필사본을 통해 740년 이전에 범패에 대한 각필 악보가 발견되었다. 또한 신라의 《화엄경사경조상기》(754년)에 《화엄경》 의식 과정에서 범패승에 대한 기록이 제시되었기 때문에 이미 진감에 앞서 범패가 이 땅에 전래되었음이 지금에는 자명한 일이 되었다. 하지만, 범패가 진감선사로부터 본격적으로 전수되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다음으로 본론에 해당하는 2단원에서 ‘불교의식의 실제와 범패’를 다루고 있는데, 1장 ‘불교의식의 실제’에 있어서는 예경편(禮敬篇), 재공편(齋供篇), 각청편(各請篇), 천혼편(薦魂篇, 施食), 점안편(點眼篇), 이운(移運), 수계편(受戒篇), 다비편(茶毘篇) 등으로 밝히고 있다. 이성운에 따르면, 황성기의 불교의식에 대한 소개는 기본적으로 《석문》의 분류를 따르되, 천혼편에 시식을 병기하고, 각청편을 공양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송주편은 분류에 보이지 않는 점 등을 언급하면서 이는 의례 전부의 분류라기보다는 《석문》의 주요 편을 소개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2장 ‘범패의 분류’에서 겉소리(外唄) 3가지, 안소리(內唄) 4가지로 총 7가지로 구분하여 소개하고 있다. 다만 “교의 모든 의식의 의식문은 다 한문으로 되었고, 그 한문 가사를 다 범패로 창하므로, 첫째 배우기 어렵고, 또 범패는 한다 해도 그 가사의 뜻을 이해하는 이는 많지 못하다.”고 간단한 평가를 더하고 있다. 이어지는 3장에서는 ‘상주권공(常住勸供)’에서 황성기는 불교의식 중 가장 음악적인 것으로 재식을 꼽고 그중에서도 가장 간략한 상주권공재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마지막 결론에서는 범패 전승의 어려움을 토로함과 동시에 범패 대신 찬송가식 작사 · 작곡하기를 즐기는 세태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앞으로 기회 있으면 의식 전반을 다 소개만이라도 해서 어떻게 하는 형식만이라도 남겨두고자” 한다는 취지를 밝히고 있다. 황성기의 범패를 비롯한 불교의식의 보존과 계승에 대한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3) 《불교사상의 본질과 한국불교의 제문제》

다음은 《문집》 제3권인데, 여기에 수록된 글들은 1961년부터 1978년까지 불교계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글로서 총 73편에 달한다. 가장 많은 편수를 차지한 것은 〈동대신문〉에 실렸던 글로 제158호(1961.5.25.)에서 제650호(1976.6.22.)까지 총 51편에 달한다. 그 외에는 《불교생활》 7편, 《불교계》 4편, 《불교사상》 3편이고, 《법륜》 《백련》 《한국철학연구》 〈동대시보〉 《현대불교》 등에 각 1편씩이 실렸으며, 저술 연도만 밝힌 것이 2편, 그마저도 없는 것이 1편이다. 이 가운데 〈동대신문〉은 동국대학교 재직 시절 지속적으로 기고한 글들이며, 《불교사상》 《불교생활》 《현대불교》는 황성기가 관여했던 ‘불교사상연구회’의 정기간행물들이다.

유고문집 3권의 목차를 살펴보면, 1. 불교사상과 보살도, 2. 불교의 수행, 3. 불교사 산책, 4. 불교와 그 문화, 5. 수학, 교육, 잊지 못할 인사, 6. 한국불교의 방향 등으로 엮여 있다. 전체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대승보살’ ‘보살도’ ‘보살승’ 등 대승보살 정신의 강조인데, 이는 그가 제시했던 한국불교에 대한 제언들 가운데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특히 1964년에 기술된 〈우리는 보살승이다〉에서는 당시 불교계의 비구 · 대처승 분쟁의 구실이 되었던 ‘승려의 취처(娶妻)’에 대해 ‘교리에서 본 승려취처의 시비’와 ‘역사에서 본 승려취처의 시비’를 밝혀 “불교의 교리나 역사로 보아 승려의 취처는 죄가 아닐 뿐 아니라 대처승(帶妻僧)이라는 표현은 교리상 역사상 전연 근거 없는 악의적인 망어이므로 응당 보살승(菩薩僧)이라고 일컬음이 옳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승보살의 관점에서 한편에서는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고자 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는 보살승이다.’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취처의 문제는 일제의 유물이 아니며, 그 사례로서 원효뿐만 아니라 부득(夫得) · 박박(朴朴)과 광덕(廣德) · 엄장(嚴莊) 등 신라 고승과 근세의 한용운 등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불교재건론》(1969)
특히 황성기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보살승으로서 원효를 중시하였는데, 그는 곳곳에서 ‘원효성사(元曉聖師)’라는 존칭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불교학계, 오늘의 문제점〉(〈동대신문〉 1967)에서는 “우리 신라의 원효성사야말로 해행구전(解行俱全) 비지겸비(悲智兼備)한 석가 이후 유일의 종교가요 사상가요 학자임을 추존하기에 주저할 수 없다.”라고 하였고, 〈한국불교와 대승보살사상〉(《불교생활》 1, 1964)에서는 “원효 스님이 세계적인 불교학자요, 저술가요, 사상가요, 선지식이었음은 너무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어쨌든 동서고금 3천 년의 불교 역사 가운데 가장 멋지게 사신 분이라고 해서 지나친 말은 아니리라.”라고 추앙하였다. 원효에 대한 관심은 〈발심수행장 강화〉(《불교사상》 11~12, 1962)를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이 《발심수행장》은 《유심안락도》 《십문화쟁론》 등과 함께 주석서가 아니라는 점에서 원효의 사상을 아는데 가치가 크다고 보았으며, 원효의 입장에 대하여는 “《화엄경》은 오히려 철학적 이론의 바탕이요 종교적 실천의 형식은 염불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평가하여 염불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또한 〈한국불교와 을사년〉(《불교생활》 2, 1965)에서는 “신라의 원효성사께서는 《십문화쟁론》을 지어 통불교 사상을 고창하면서 불교통합을 촉구했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러면서 “불교통합의 이상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더욱 뼈아프게 요구된다. 자기가 옳다는 망집 사견을 버리고 하나의 ‘한국불교’로 통합하여 오로지 이 나라 이 겨레의 부강 번영과 나아가서는 세계 평화와 인류의 복지 향상을 위해 대승보살행을 할 수는 없는지? 실로 통탄을 금할 수 없는 노릇이다.”라고 구체적으로 “종명 없는 ‘한국불교’로 통합”할 것을 간곡히 주장하였다.

비록 정기간행물을 통해 실린 단편적인 글들이지만, 황성기는 일관되게 당시 한국불교가 정치적으로 왜곡된 문제의식으로 인해 호도되고 분쟁에 휩싸였던 현실을 개탄함과 동시에 그 대안으로서 ‘한국불교’로의 통합을 주장하였다. 또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원효의 예를 통해 대승보살도에서 찾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종합적으로 제시한 글이 바로 1966년에 작성된 《한국불교재건론》이라 할 수 있다. 이 《재건론》은 ‘1. 불교재건의 필요성’ ‘2. 대승불교의 요체’ ‘3. 보살행도의 진수’ ‘4. 한국불교의 당면과제’ ‘5. 한국불교의 나아갈 길’로 구성되어 있다.

그 요지는 한마디로 ‘대승보살 정신에 입각한 새로운 불교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먼저 1장에서는 불교재건, 즉 새로운 불교운동의 필요성에 대해 ‘인류는 고민(즉 생로병사의 문제)을 가지고 있다는 점’ ‘현대는 불안이 점고(漸高)하고 있다는 점’ ‘민족의 수난이 극심하고 있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2장에서는 새로운 불교운동의 근저가 되는 것으로 ‘대승불교’의 요체를 ‘중생을 구제하는 일’ ‘사회를 정화하는 일’ ‘자아를 완성하는 일’로 밝히고 있다. 3장에서는 보살행도의 진수를 간추려 보시 · 인욕 · 정진의 3바라밀이면 족하다고 보았는데, 즉 대승만행 중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 무진한인욕(無瞋恨忍辱) · 무방일정진(無放逸精進)을 강조하고 있다. 4장에서 한국불교의 당면과제로 ‘사찰보다 교리를 중심으로’ ‘승려보다 신앙을 본위로’ ‘형식보다 구제주의 불교’로 나가야 함을 그 과제로 제시하고 있으며, 5장 ‘한국불교의 나아갈 길’에서는 불교의 현대화 · 대중화 · 생활화를 그 방향으로 제시하였다.

3. 결론을 대신하여

이상에서 고봉 황성기의 생애와 저술에 대해 개괄해보았다. 그의 생애는 국가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큰 혼란기인 근대기에 걸쳐 있다. 특히 그의 수학 시절은 일제강점 말기와 해방 전후의 혼란기였으며, 한참 활동해야 할 시기에는 불교계가 내부 분규로 인해 큰 혼란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그는 어릴 적부터 익혀왔던 전통과 근대, 이론과 실천, 불교와 생활, 출세간과 세간 등을 아우르는 대승보살로서 평생을 일관하였다. 그는 유식, 인명, 화엄 등에 선구적인 연구 활동을 전개했으며, 불교학 전반에 걸쳐 관심을 두고 어떤 면에서는 국내 최초라 할 수 있는 대중적이고 한국적인 불교학 개론서를 저술하였다. 그럼에도 그가 학문적 조명을 크게 받지 못한 것은 단지 그의 연구논저가 적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황성기가 이론적 논의를 중시하는 학술논문보다는 실천적 내용을 중시하는 대중적 글쓰기에 더 적극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동국대학교 강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분쟁에 휘말린 불교계 현실을 목도하면서 ‘불교사상연구회’를 결성하고, 정기적인 대중강연을 실시하며, 정기간행물을 발간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은 오직 한국불교의 재건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고, 대승보살 정신에 입각한 새로운 불교운동의 일환이었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불교운동의 선두에서 자리이타의 보살로서 일생을 살았던 황성기의 저술과 그의 활동은 작금의 불교계가 다시금 주목해야 할 소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


장진영 /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HK교수. 동국대학교에서 〈화엄경 문답 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고,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을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연기와 성기의 관계〉 〈일승법계도에 나타난 실천사상〉 〈초기화엄교학에 미친 유식사상의 영향〉 등과 저서로 《화엄경문답을 둘러싼 제문제》(공저), 《명상과 치유》(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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