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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마음챙김 그리고 정치 변혁* / 매튜 무어
[68호] 2016년 12월 01일 (목) 매튜 무어 Matthew J. Moore 신항식 옮김 ssbrand@hanmail.net

1. 서론

붓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기원전 5∼6세기경 자신의 종교적 가르침의 핵심 부분으로서 마음챙김(사티) 수행을 발전시켰다. 이는 나중에 불교로 알려진 종교/철학으로 발전되어 갔다. 오늘날 불교는 세계에 걸쳐 약 4억에서 5억의 신자를 확보하면서 4, 5위의 현대 종교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불교의 바탕이 되었고 현대 힌두교로 자체 진화한 베다교와 같이, 불교의 핵심 목표는 전생으로부터 쌓인 업을 없애고 새로운 업이 생겨나지 않도록 공부하고 수행하여 생사의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불교가 겉으로는 세속의 벗어남에 집중하는 듯하지만, 늘 정치적인 차원의 생각과 고려를 한다. 미국에서 불교는 정치적 좌파와 점점 더 관련을 맺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질문이 떠오른다. 불교와 불교의 파생적인 가지로서 마음챙김이 혹시 변혁적인 정치와 관련이 있는가, 있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러한가 하는 것이다.

부처는 그의 첫 설법(《초전법륜경》)에서 핵심 교리를 펼쳤다. 가르침은 네 가지 고귀한 진리, 곧 사성제로 시작한다. 첫째로 삶은 고(苦, dukkha)라는 것이다. 고는 고통을 의미하며, 인생은 불가피하게 늘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고귀한 진리는 고는 사념, 감각, 욕구 등 기타 우리 경험의 현상들에 집착하는 갈애(渴愛, taṇhā. 문자 그대로 갈증을 뜻한다)에 의해 생긴다는 것이다. 세 번째 진리는 집착을 깨고 고를 멈추는 것(멸, 滅, nirodha)이며, 네 번째는 집착을 버리고 바른 이해와 의도, 말과 행동 그리고 삶, 노력 마음챙김, 집중을 실천하는 방법으로서 8정도(八正道, āryāṣṭāṅgamārga)를 정하여 따르는 것이다.

《염처경(念處經, Satipaṭṭhāna Sutta)》에서 부처는 집착을 극복하고 깨달음을 이루는 데에 특별히 도움이 되는 과정을 마음챙김(판단 없는 현재의 앎, non-judgmental present-moment awareness)이라 했다. 부처는 마음챙김의 네 가지 기초를 세우는 법을 기술했는데, 그것은 신념처(身念處), 수념처(受念處), 심념처(心念處), 법념처(法念處)이다.

승려들아, 이것이 존재를 순수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슬픔과 한탄을 이기고 고통과 낙담을 흘려보내 진정한 도에 이르러 열반을 실현하기 위함이다. 이를 마음챙김의 네 가지 기초라 한다. 네 가지가 무엇이냐? 들어라 승려들아, 세계에 대한 기대도 낙담도 누른 뒤에 승려는 명석하고도 정성으로 몸속의 제 몸에 집중하여 명상하고 지내는 것이다. [정서, 마음, 현상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이 되풀이된다.] 그렇다면 승려는 어떻게 몸속의 몸을 명상하는가? 숲으로 가 나무 밑이나 빈 오두막에서 다리를 가부좌하고 몸을 꼿꼿하게 한 채 앉는다. 그리고는 눈앞에 마음챙김을 일으켜 단지 마음으로 숨을 들이쉬고 마음으로 내뱉는다. [정서, 마음, 현상에 대해서도 비슷한 수행법을 제시한다.]

본질적으로, 마음챙김은 집착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기쁜 경험이든 피하고 싶은 불쾌한 경험이든 이에 집착하지 않고서 자신의 경험에 대하여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은 채 인식하는 것이다. 몸, 정서, 마음, 현상의 네 가지 마음챙김의 기초는 경험의 가능한 대상들을 모두 비워 버린다. 그리하여 제 마음을 깨닫는 데 그 어떤 것도 배제되지 않게 한다. 경전 후반부에서 부처는 7일 동안 이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열반을 성취하거나 아니면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채 윤회의 고통을 겪을 것이라고 했다.

표면상으로 보면, 이 모든 것이 정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명확하지 않으며 초기불교 경전을 읽은 서양의 독자들도 막스 베버의 영향을 받아 오랜 기간 동안 불교가 비정치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불교는 실제로 초기 경전에서부터 모든 시대와 전통을 통틀어 정치와 관련을 맺었다. 초기경전은 인간의 천성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절도, 거짓과 폭력에 의해 인간 사회가 혼란스럽게 되기에 이에 대응하려고 사회계약과 유사한 것을 창조해내고, 민중들은 지도자를 선출하여 농작물 분배에 관련된 법을 만들고 강화한다. 이 지도자가 최초의 왕이 되며 규율은 전승된다. 만약 권좌에 오른 왕이 종교적 진보를 이루려 한다면 그는 전륜왕이 되며, 그의 법이 부처가 밝힌 도덕과 정신적 진실을 반영하고 고양한다. 법륜은 불교 이전에 태양의 상징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불교에서는 공통되는 상징이며, 붓다가 처음으로 설법을 전한 것을 의미한다.
영적으로 훌륭한 이들이 권좌에 있으면 사회는 융성하여 범죄도 굶주림도 없다. 그러나 대체로 통치자들은 무지와 오만으로 사회를 혼란하게 하기 마련이며 그렇게 되면 민중은 고통받고 부정한 짓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이 악순환이 시작되면 인간사회가 폭력과 타락의 최저점에 이르러, 도덕적으로 보다 덜 악한 소수의 사람들만이 살아남을 때까지 스스로 권력을 강화하는 데만 힘쓰게 된다. 사태에 충격을 받은 통치자들은 도덕적 자기 개혁을 하려 나서고, 순환의 전 과정이 다시 시작되고 결국 전륜왕의 통치로 정점에 이르며, 그 다음에는 불가피한 몰락이 뒤따르고, 이런 순환은 무한히 반복된다.

1850년대까지 전통적인 불교 국가들은 모두 절대왕정에 다소 유사한 체제(계몽적일 것이라 희망하며)를 지지했고, 불교가 융성한 국가 또한 모두 왕정이었다. 제국주의는 불교 신자가 다수인 몇 나라(스리랑카, 라오스, 버마/미얀마)의 불교적 정치전통을 파괴했으며, 다른 몇 나라는 압력을 받거나 혹은 스스로 왕정을 거두었지만(캄보디아, 태국, 부탄, 티베트 망명 정부), 일본은 제국주의의 중심에서, 베트남과 한국은 식민지 이전에 정치이념으로서 불교를 포기하였다. 종종 현저히 약화된 국가권력의 수장으로 왕을 두기도 했지만, 1850년대와 대략 1960년대 사이의 기간에 제국주의의 압력과 점증하는 전 지구적 경쟁 밑에서 19세기에 불교 왕정체제를 지녔던 모든 나라가 입헌공화제 정부를 채택하였다.

몇몇 근대학자들은 정치적 지침으로서 불교가 한꺼번에 몰락한 것을 두고, 고대 초기경전을 매우 정교하게 아전인수식으로 불교의 공화적 전통을 해석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다른 이들은 불교의 교리는 공화주의를 언제나 선호했지만, 역사적 환경에 따라 왕정을 더 좋아하는 것처럼 가장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변한다. 한편, 어떤 이들은 불교 정치사상이 무엇보다 실제로 왕정주의적이었다 해도 초기경전은 공화주의적 요소를 어느 정도 담고 있었으므로 근대 공화주의로의 전환은 하나의 강조된 변화의 표현이며, 저변의 원칙이 새로운 환경에 적용된 표현이라 주장한다. 다른 곳에서 보다 많이 논의했듯이 필자는 이 세 번 째 해석이 정확하다고 보는데, 불행하지만 여기서는 지면관계상 논의를 더 확대하지 않겠다. 필자는 이에 유관하지만 다른 논의에 집중하도록 한다. 즉 불교는 오늘날 미국 좌파와 어느 정도 의미 있는 이념적 교차점을 가지지만, 그럼에도 변혁의 정치와 의미 있는 동맹을 맺지는 못하리라는 점이다. 

2. 불교, 마음챙김, 정치학 그리고 좌파

1960년대 공화주의로의 전환 이후 특히 미국과 유럽의 개종자들 사이에서 불교는 진보적이거나 변혁적 정치와 점점 더 깊은 연관을 맺어 왔다. 이를테면 전미 불교인구 조사에서 콜먼(James Cole-man)은 미국 불자 가운데 60%가 민주당 지지자이고 9.9%가 녹색당인데, 단 2.6%만 공화당 지지자라고 밝혔다. 불교와 좌파정치의 연합은 또한 불교의 영적 실천을 경제, 정치, 사회정의의 문제와 조합하는 ‘참여불교’의 개념을 만든 베트남 승려이자 평화운동가인 틱낫한과 같은 민중의 운동을 통해 발전되어 왔다. 가장 최근에 두드러진 것은 로우(James Rowe)가 심포지엄에서 세부적으로 발표한 내용처럼 불자들이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월스트리트 점령시위(Occupy Wall Street)’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실상, 불교와 진보좌파의 정치 사이에는 몇 부분에서 연관관계가 있다. 불교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의 미국과 유럽 좌파의 몇 가지 핵심적인 원칙들을 지지한다. 이를테면 불교는 비폭력 평화를 지지한다(폭력과 전쟁은 둘 다 이기적인 망상이자 인류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기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의 복지국가와 같은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가난한 자들에게 적절한 조치를 제공하지 못하여 이들이 그들의 필요를 벌충하려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경우, 장래에 전륜성왕이 될 사람이라면 그의 실수로 인하여 돌이킬 수 없도록 사회를 쇠잔케 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불교 승려공동체인 상가(saṅgha)는, (장유유서를 따랐고 경험을 존중했다 하더라도) 전통적으로 합의에 의해 의사를 결정했던 일종의 직접민주 공동체로 운영되었다. 불교는 나사렛의 예수보다 몇 세기 앞서 (상가가 남녀 사이의 불평등의 몇 가지를 견지하긴 했어도) 모든 이에 대한 도덕적 평등을 주장했다. 불자들은 전통적으로 채식주의자이며, 인간이 아닌 동물을 인간존재와 도덕적으로 평등하게 취급하자고 주장했으며, 또한 자연을 존중하고 지속이 가능한 인간관계를 오랫동안 역설했다. 마지막으로 불교의 금욕주의, 특히 승려적 전통은 근대 서양의 이기적이자 소비 중심적인 문화와 명료하게 배치된다. 이는 좌파 쪽의 많은 이들이 서양 근대 사회가 환경주의적으로 지속 불가능하며 지적으로 천박하며 도덕적으로 어리석다고 비난해 온 것들이다. 이런 까닭에 불교가 좌파와 좋은 동맹을 맺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교를 정치적 좌파의 일파이거나 유망한 동맹으로 보는 데는 몇 가지 조심해야 할 이유가 있다. 한편의 염려는 철학적인 것이다. 불교는 진보좌파의 목표에 맞추기에 쉽지 않은 부담으로 다가오는데, 이는 유럽과 미국의 불교인들이 잘 모르는 것이다. 불교의 모든 전통은 은유나 유추가 아니라 인간 실존의 한 사실로서 윤회를 믿는다. 더 나아가 미국의 불교인들이 거의 말하지 않지만, 업에 대한 불교의 원리는 베다의 조상으로부터 우려할 만한 사안을 전수받는데, 그것은 낮은 사회적 지위 속에서 태어났거나 인생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전생에 저지른 악행의 업보 결과로 인과응보라는 것이다. 틱낫한과 같은 불자들이 세계의 고난과 고통의 원인으로서 나쁜 정부,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불의, 그리고 개선점, 인간적 실패를 지적한다 해도, 인간의 많은 고통은 고통받는 자가 이전에 행한 악행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통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한다면 최소한 그 고통은 적절한 것이며 그 사람이 미래에 정신적으로 진보하는 데 필요한 것이 된다.

더 나아가 초기경전은 반복적으로 수행자들이 정치에 적극 가담하는 것을 금기시해 왔다. 예를 들면 전쟁과 같은 정치나 정치적 쟁점에 관하여 승려들이 토론하는 것을 금지하고, 현재에는 스님은 사람을 죽일 수 있으므로 군복무를 하지 못하게 하여 법적 처벌을 받게 했다. 부처 자신은 이를 근거로 전륜성왕이 될 기회를 버렸다.그의 영적 소명에 비하면 가치가 떨어지는 것일 터, 정치적 관심은 미래의 영적 진보를 이루는 데 단지 방해가 될 뿐이라는 이유로 전륜성왕으로 미래에 환생하는 것을 거부했다. 영적 생활과 부딪치는 정치에 관한 이 역사적인 문제는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다. 예를 들면, 위의 전미 불교인구 조사에서 콜먼은 과반수의 신자들은 그들의 불교단체들이 정치에 좀 더 관여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운동가들은 소수였다고 밝혔다.

좌파에 불교가 도움이 될 가능성에 대하여 유념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불교와 불교인들이 진보에 좋은 동맹이며 또한 얼마간의 진보주의자들이 개인적으로 불교인이 되거나 여러 불교적 수행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불교는 미국과 유럽 내에서 주변적인 문화현상이며 좌파의 목표를 지향하는 어떤 운동도 아주 미미하게 공헌하는 이상의 위상을 차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010년대 1.2%의 미국 사람들이 불교신자였으며 유럽에서는 0.2%였다.

이는 마음챙김에 관련하여 미국 좌파가 좀 더 포괄적이지만 그만큼 모호한 관심사로부터 벗어나 많은 대중을 끌어들일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1980년대, 미국 불자인 존 카바트 진은 불교적 뿌리와 복잡다단성으로부터 유리된 채 일종의 의학 치료법이자 자기계발 기법으로 판단 없는 현재의 앎이라는 마음챙김 개념을 유행시켰다. 그는 ‘명상기반 스트레스 완화(Mindfulness-Based Stress Reduction, MBSR)’의 선구자인데, MBSR은 자신의 경험을 판단하지 않는 인식을 통하여 고통과 만성질환에 대처하는 것을 배우는 방법이다. MBSR의 성공 덕택에 일정 부분, 마음챙김의 수행이 대중문화 속에서 눈에 띄게 늘어갔다, 예를 들면, 〈타임〉은 2014년 1월 24일 ‘마음챙김 혁명(The Mindful Revolution)’을 제1주제로 내걸었다. 어떤 단어가 특정 기간에 얼마나 자주 서적에 등장하는가를 계산하는 구글의 엔그램(Ngram) 뷰어를 보면, 마음챙김의 단어 사용이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사이에 대략 225% 정도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최근 연도에도 이 수치는 유용하다). 마찬가지로 마음챙김에 대한 구글 조사데이터 분석을 보면, 2014년 2월과 2016년 1월 사이에 거의 10배 증가했다. 월드캣 세계 도서관 데이터베이스를 보면 1988년과 1989년 사이 마음챙김의 키워드로 187권의 서적이 있으며, 512권의 서적이 1990년과 1999년 사이에, 2,093권이 2000년부터 2009년 사이에, 4,878권이 2010년과 2016년 사이에 출간되었다.

마음챙김과 정치 사이의 연관 가능성도 점증하는 관심을 받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마음챙김과 정치에 관한 여러 서적이 출간되고 있는데, 맥러드의 《마음의 정치학》 미 하원의원인 라이언의 《마음의 국가》 카바트 진의 《우리의 감각으로 들어와서: 자기 힐링과 마음챙김의 세계》 가 있다. 미 의회에는 비공식으로 매주 명상모임을 갖는 ‘경건의 시간회’ 모임이 있고, 영국 의회에는 ‘마음챙김 전체 정당 의원모임’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도 마음챙김의 인기가 이것이 발생한 불교전통에서 독립하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마음챙김은 마치 요가와 같이 오늘날에는 흔히 하나의 기법으로 활성화하고 있다. 사람들이 신앙고백을 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실행될 수 있는 것으로, 이는 형이상학과 역사를 벗어나며 정치적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불교는 절대왕정을 옹호하는 데 2,000년을 소비했을 터이지만, 마음챙김은 그렇지 않다.
마음챙김이 무슨 정치적인 사안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질문에도 활짝 열려 있다. 특히 불교가 그랬듯이 마음챙김이 정치적 좌파에 호소력을 갖고 함께할 것인지도 아직 확실하지 않다. 요가가 그래왔듯이 다시금, 정치적인 색채 없이 보다 더 중립적이고 기술적인 수행이 되어갈지도 확실하지 않다. 이는 마음챙김의 떠오르는 인기가 정치적 좌파에게는 마음챙김의 매력을 확대하고 새로운 연대를 구성하는 기회가 아닌가 하는 질문을 유발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것이 진보적 저항문화 속에서 자라나서 상품화되고 일반화되어 비정치적이 되어 버린 유기농 식품처럼, 보다 광범위한 대중에게 호소력을 갖는 이슈의 또 다른 예가 될 것인가 궁금하기도 하다.

우리가 미래를 정확하게 예견할 수 없긴 하지만 우리는 마음챙김 그 자체로서 이념을 분석하고 정치적 사안이 될 만한 요소를 찾아볼 수는 있다. 먼저, 정치학에서 마음챙김을 활용하는 대변자들 자신은 무어라 말을 해왔는가? 카바트 진은 마음챙김의 수행이 덜 즉각적이고, 스트레스를 덜 받으며 독선에 덜 사로잡히게끔 개인을 도와줌으로써 원초적으로 정치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우리 삶 속에서 좀 더 큰 차원으로 마음챙김을 계발하는 일은 일련의 이데올로기의 관점과 의견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전체를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찰나의 순간마다 우리 자신을 전혀 새롭게 볼 때 더 높은 단계의 마음챙김이 가능하다. 마음챙김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고 또 매우 중요한 기능이기도 한 것은 우리의 의견, 그 모든 의견을 의견으로서 여여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것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알게 되어 무슨 내용이든 그것들에 의해 사로잡히지도 맹목적으로 따르지도 않을 것이다.

카바트 진과 그의 활동을 하나의 영감으로 여기는 라이언은 그와 유사하게 마음챙김을 정치에 적용함으로써 생겨날 감정적 이득과 과정상의 이득이라 부를 만한 것에 관하여 집중한다.

우리는 우리의 실수 속에서 유머를 보며 그런 우리 자신에 대하여 더욱 웃을 수 있다. 타인과 자신에 대하여 보다 덜 비판적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실수에 대하여 더 빨리 그리고 더 진지하고 친절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한층 더 쉽게 용서할 수 있다. 우리를 극력 반대하는 이들과도 같이 앉아 시민정치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카바트 진과 라이언은 둘 다 마음챙김을 자기탐구의 한 과정으로 보며, 마음챙김이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하는 점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예상한다. 이들은 또한 수행자의 성향과 믿음의 두 주요 영역에서 변화가 나타날 것이라고 분석한다. 즉 라이언은 마음챙김을 수행하면 우리의 성향이 덜 비판적이고 보다 겸손하며 보다 개방적으로 바뀔 것이라 주장하며, 카바트 진은 우리 믿음의 내용이 변화하는 것을 보거나 혹은 우리가 어떻게 그 믿음에 집착하고 있는가를 볼 것이라 주장한다. 무슨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될 것인가에 대한 이들의 설명은 흥미롭긴 하지만 초보적이다. 이 장에서 필자는 이에 대해 좀 더 깊게 분석해 본다.

첫째로, 정치와 직접 연관된 어떤 믿음이나 성향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정치와 무관한 믿음이나 성향, 즉 비정치적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근거해 보면, 비정치적인 믿음은 정치, 정부 혹은 정책적 선택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세계에 대한 기술적인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자아의 본성에 대한 질문(나는 원자론적 자아인가, 아니면 보다 전체적이고 장대한 것의 발현인가?), 인과응보의 기능, 사후세계의 존재와 유사한 주제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비정치적인 성향은 정치에 직접적인 언급이 없는 인생, 어려움, 갈등, 결정 등등에 대한 일반적인 접근을 말한다. 사람이 보통 합리적이거나 감정적이거나, 행복하거나 슬프거나, 확신을 가지거나 불명료하거나, 사회적이거나 고독하다면, 이 같은 모든 것은 비정치적 성향의 것들이라 본다. 반면 정치적 성향은 특별히 정치적인 맥락에서 어떻게 행동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집에서는 선천적으로 잘 어울리는 사람이 시청 모임이나 어떤 정치적 사안에 대하여 토론할 경우 호전적이며 편을 가르는 것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믿음이란 정치에 직접적으로 연관하든 아니든, 규범적인 믿음을 포함하여 모든 믿음의 총체이다. 대부분의 규범적인 믿음이 정치적 문제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치적 믿음은 특정 정당의 구성원들이 악당이며 불량배라고 믿을 수도 있는 것처럼, 모든 종류의 폭력은 심층적으로 보면 도덕적으로 잘못이라는 믿음도 포함한다. 

이 같은 네 가지 인성의 양상에 마음챙김은 무슨 효과를 줄 것인가? 마음챙김의 수행이 비정치적이고 비규범적인 믿음을 바꾸게 할 것은 확실히 가능해 보인다. 마음챙김 수행자들은 수행으로 인하여 그들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개인의 정체성에 구멍이 많고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모든 현상이 수없이 많은 사전 원인의 결과이며 수없이 벌어질 미래 현상의 부분적 원인이기 때문에 우주는 상호의존적인 복잡한 그물망 속에서 결합함을 믿게 되었다고 자주 말한다. 믿음의 이런 변화는 사람을 좀 더 행복하게 하거나 덜 불안하게 하거나 혹은 죽음을 덜 두려워하게 하는 식으로 비정치적 성향에 영향을 줄 것이다.

비정치적 성향의 변화가 정치적 성향의 변화를 이끄는 것도 가능해 보인다. 이 변화는 사람의 믿음이 변화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거나, 아니면 변화 자체가 독자적인 현상일 수 있다. 예를 들면, 마음챙김 수행이 나로 하여금 보다 더 행복하고 스트레스를 덜 받게 했기 때문에 실망과 욕구불만에 대하여 내가 좀 더 인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변화가 정치적 성향을 바꿀 수도 있을까? 우리는 두 가지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정치적인 맥락과 비정치적인 맥락에 차이를 두지 않는 사람으로서, 성향이 한결같은 경우다. 이 경우, 이들의 성향 전체가 바뀔 때 정치적 맥락 속에서의 행동이 바뀔 것이다. 이는 합리적인 결론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마음챙김이 사람들을 더 좋게 만든다면 어떤 맥락에서든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 수행자가 두 맥락을 구별하여 정치적으로 행동할 때와 비정치적으로 행동할 때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지는 경우다. 이 경우에 비정치적 성향의 변화가 그들의 정치적 행동에 어떤 방식이든 영향을 줄 것이라고 속단하기 쉽지만, 마음챙김의 수행이 그들의 정치적/비정치적 차이를 수정하거나 포기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비정치적 성향의 변화가 비정치적 행동을 변화시킨다면 모를까 정치적 행동을 변화시킬 것이라 생각할 이유도 없다. 이렇듯, 이들이 모든 사람에게 더 잘 대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정치적인 반대자였던 예전의 사람들에게조차 잘할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도 없고 거꾸로 이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에게 잘한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그런 성향을 이전에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중요한 정치적 이슈가 논의될 때를 제외하고 나서 나머지는 모두 좋다고 한들, 그들의 새로운 태도가 이 차이를 없애 줄 것이라 생각할 이유가 없다. 두 가지의 다른 상황에서 정도의 차이가 그들을 유쾌하게 한다 하더라도 그렇다. 이처럼 정치적 · 비정치적 맥락을 구별해 행동한다면, 비정치적 성향의 변화가 정치적 성향의 변화를 이끌 터이지만 두 성향은 여전히 다른 것으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비정치적 성향과는 구분되는 것이 있다는 전제에서) 마음챙김의 수행이 정치적 성향의 변화를 직접 이끌 수도 있을까? 앞서 고려한 주제들과 이 질문을 구별하기 위하여 여기서는 질문을 사람의 정치적 성향이 비정치적 믿음이나 성향의 변화로부터 독립적으로 변화할 것인가로 한다. 예를 들면, 내가 나의 정치적 반대자에 대하여 보다 더 많은 신뢰를 보내게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모든 이들에게 더 많은 신뢰를 보내게 되었기 때문도 아니고 인간의 본성 같은 것에 대한 나의 믿음이 변해서도 아니다. 여기서 필자가 생각하기에 마음챙김 수행이 나의 성향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것은 매우 타당해 보인다. 아마도 마음챙김은 정부가 내게 적대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내가 정치적 맥락에서 아주 완고하게 처신한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두려움을 알고 이를 조절하고 통제한다면 두려움이 좀 더 약해지는 것은 익숙한 경험이다. 즉 내가 덜 두려워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덜 완고해진다. 확실히, 나의 두려움이 정치와 연관되어서 이런 변화가 생겨난 것이라기보다는 마음챙김이 두려움을 알고 대처하도록 가르침에 특별한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며 나의 두려움이 하필 정치적 맥락에서 생겨나서 그런 것이다.

긴 논의를 정리한다면, 직접적이든 또 다른 영역(정치적 성향)을 변화시키는 영역(비정치적 성향)의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그렇든, 마음챙김의 수행은 우리의 비정치적 믿음, 비정치적 성향 그리고 정치적 성향에 변화를 이끌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지금 필자가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 마음챙김이 사람의 정치적(그리고 규범적) 믿음을 변화시킬 것 같은가?

필자는 이 믿음이 의지하는 것에 따라 답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 몇몇 믿음들은 궁극적으로 개인의 감성이나 습관에 의존하며, 어떤 것들은 사실에 대한 믿음에, 어떤 것들은 필자가 잠정적으로 ‘실존적 근본 믿음’이라 부르는 것에 의존한다고 상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나는 특정 사회단체의 구성원 몇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그 경험이 내 마음속에 감정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 사회단체의 구성원들이 원래부터 대체로 선하고 신뢰할 가치 있는 사람들이라고 (다소 의식적으로) 믿을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체포와 판결 통계를 보고 알게 된 것을 근거로 나는 어떤 사회단체의 구성원들이 비정상적으로 범죄활동에 관여했을 것이라고 믿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존중받을 가치가 있고 풍요로울 기회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 충실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집단의 구성원들도 존중받고 평등해져야 한다고 믿을 것이다. (감정, 사실, 실존적 믿음 사이의 구분은 범주라기보다는 의도적으로 해석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짐작해보면 실상 우리 믿음의 대부분은 세 가지 요소가 모두 섞인 것이며 여러 무의식적이고 비추론적인 요소도 이에 관여한다.)

이런 구분이 지워진 채로 보면, 마음챙김 수행은 의식적인 인식과 평가에 접근하는 믿음의 기초를 만드는 원초적인 감정에 뿌리박은 믿음에 영향을 줄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이런 믿음이 꼭 바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바뀔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추론일 듯하다. 대조적으로, 마음챙김 수행이 사실의 정보에 근거한 믿음에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마음챙김이 사실에 대한 의식적인 인식과 사실관계 및 믿음과의 관계성에 대한 성찰을 부추겨 사실에 근거한 믿음을 더 강화한다고 보는 것이 더 확실한 추정일 것이다. 사실이 거짓이거나 사실에 대한 이해가 감정에 휘둘려 믿음에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정도까지 확장해서 본다 하더라도, 감정적 왜곡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사실 인식을 하는 사람의 진정한 사실에 뿌리박은 믿음이라면 그리 영향을 받지 않을 듯하다.

필자가 말하는 ‘실존적 기초’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데 토대가 되는 규범적 믿음을 의미한다.(실존적으로 기초적인 비규범적인 믿음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에 비추어 이것들은 비정치적 믿음의 범주에 든다). 이런 믿음들은 확실히 감정과 사실에 영향을 받는다 해도 논리적으로 파생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 흄에 따르면, 살인의 잘못은 (다른 이들에게는 심히 불행하고 사회적으로 해를 주는 등등의 것이지만) 살인에 대한 우리의 정서나 어떤 사실에 논리적으로 의거하여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이나 정서가 다른 경우에서조차 대다수의 사람들은 살인은 여전히 나쁘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마음챙김의 수행은 이런 실존적 기초의 믿음에 영향을 주는 것 같지 않다. 한편에서 보면, 이런 믿음은 우리의 도덕적 우주에 대한 이해의 기초이다. 이를 바꾸는 것은 실제 드문 일로 우리 도덕적 인성을 엄청난 정도로 재조직해야만 가능하다. 다른 한편에서 보면, 이런 믿음이 다른 근거 없는 믿음이나 정서에 논리적으로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다른 믿음이나 정치적 성향을 바꾼다고 해서 우리의 실존적 기초에 따른 믿음이 바뀔 것 같지 않다.

마음챙김의 수행은 실존적 신념을 바꿀 수는 없지만, 이 믿음에 대한 확신을 더욱 깊고 강하게 하는 데는 관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음챙김 수행을 통하여 자신의 경험에 치밀하게 집중하고 일시적인 감정과 보다 지속적인 믿음 사이의 구분을 깨닫는 것은 자신의 믿음을 비교적 더 중요한 것으로 만든다. 마음챙김 수행을 통하여 실존적 기초의 믿음에 전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단지, 마음챙김의 수행이 이런 변화 속에 있는 결과를 야기한다고 생각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점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필자는 앞서 카바트 진과 라이언이 자신의 경험으로서 마음챙김에 집중했다고 강조했다. 이 관점으로부터, 마음챙김이 우리의 경험을 깊게 관조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현상학적 실천일 뿐이지, 우리의 경험과 이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인 실상 사이를 연결하는 것까지 논의하기는 어렵다. 즉, 마음챙김 수행을 통하여 내가 무엇인가를 아주 강하게 믿거나 이 믿음이 나의 태도나 행동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배울 수는 있지만, 이 통찰이 내 믿음이 진실인가 아닌가에 대해 가르침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불교의 뿌리로부터 유리된 마음챙김이 위험을 제공하는 공간일 것이다. 불교적 전통은 인간이 끊임없이 문제를 야기하는 탐욕, 성냄, 무지의 삼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또한 어떤 개인적 정체성도 어떤 경험의 양상도 그것이 대상이든 믿음이든 영원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고로 만물은 찰나적이며 무상하다. 인간이 확실히 행동하고 선택한다 해도 불교는 담대하기보다는 조심하고 겸손하라고 조언한다.

이런 여러 다른 믿음으로부터 유리된 마음챙김 수행은 수행자가 그들의 경험으로부터 배운 것이 사실상 경험으로부터 독립된 실상의 반영이라고 착각을 하게 할 위험성을 지닌다.

예를 들면, 필자가 마음챙김의 수행을 통하여 알게 된바, 많은 믿음과 정치적 성향이 변화무쌍하고 불안정한 반면에 두서너 가지의 믿음만이 지속적이고 현재적일 경우 이 믿음이 경험상 중요할 뿐만 아니라 진실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이리하여 카바트 진과 라이언의 희망과 달리, 마음챙김이 나를 더 겸손하지 못하게 하고, 덜 유연하게 하고, 덜 참게 하고, 나와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덜 관계하게 만들 것이다.

이는 나의 반대자(결국 사실을 지각하는 데 단지 실패해서 나를 반대하는 이들)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게 하여 갈등과 교착상태를 더욱 증가시킬 공산이 클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마음챙김은 크게 보아 수행자의 성향과 믿음에 영향을 줌으로써 정치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듯하다. 신중하거나 원초적인 믿음을 바꿀 것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자신의 경험을 관조하는 수행보다는 진실을 찾는 행위로서 마음챙김에 접근한다면, 여러 믿음을 받아들이면서 진실을 판단하고 확실한 태도를 정하는 데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3. 결론

불교와 마음챙김의 인기가 높아지는 현상이 좌파에게 기회가 될 수 있을까? 필자가 앞에서 제시한 분석이 대략 맞는다면, 불교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미국 좌파와 이념적으로 교차하는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미국 불자의 수는 극히 적다. 만약 많은 미국인이 불교를 매력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진보주의자들에게는 좋은 소식일 것이지만, 당장에는 전략적으로 획기적인 전기를 갖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불교의 뿌리로부터 유리된 기법으로서 마음챙김은 빨리 성장하고 있지만, 마음챙김이 비이념적이고 목적보다는 도구적으로 수용되는 면모를 보면 불교철학이나 종교로서보다는 보다 대중화한 미국문화 현상이 된 듯하다. 삼독을 소멸하라 하고 무상을 추구하는 불교적 근원적 가르침 때문에 불교는 좌파에게 잠재적인 관심이 되겠지만, 위에서 제시한 분석대로 실제로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마음챙김이 사람들의 기초적인 가치와 믿음을 바꾸지는 못하기 때문에, 마음챙김을 좀 더 유연하게 수행한다 하더라도 보수적인 미국인들이 좌파에 가까워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며, 이념적 경직성과 갈등을 조장할 실질적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처럼 ‘마음챙김 혁명’은 수행자들에게는 성실한 개인적 도우미가 되기를 희망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중립적으로 보인다. ■

 

신항식 / 한양대학교 초빙교수.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서양 근현대사로 DEA, 파리 디드로 대학에서 제3세계 사회학으로 DEA 학위를 받았다. 홍익대 미술대학 교수 등 역임. 현재 한양대, 이화여대, 연세대 초빙교수이다. 주요 저서로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 《시각영상 커뮤니케이션》 등이 있고, 〈신자유주의 디아스포라〉 등의 논문을 썼다.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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