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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인도인 싯다르타와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우 / 유응오
-서양문학에 나타난 불교사상
[68호] 2016년 12월 01일 (목) 유응오 arche442@hanmail.net

서양 불교문학의 두 전범(典範)

홍기삼 문학평론가는 《불교문학의 이해》 중 〈불교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불교문학은 불교경전문학과 불교창작문학으로 나눌 수 있는데, 불교경전문학의 성격이 종교적 목적에 보다 더 부합한다면 불교창작문학의 궁극적 관심은 문학에 있다고 크게 나누어 살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전자(불교경전문학)가 불교문학의 확장된 개념이라면 후자(불교창작문학)는 축소된 것으로, 전자가 교학 연구의 한 영역을 이룬다면 후자는 문학의 영역에 귀속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게 홍기삼 평론가의 견해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중 대부분은 △불교경전 문학 △붓다의 가르침을 세계관적 토대로 수용한 창작문학 △경전과 창작의 중간 지대에 걸쳐 있는 문학의 자원(선시, 불교설화, 승전류, 영험록 등) 중 창작문학만을 불교문학으로 여기고 있다. 즉, 창작문학을 제외한 불교문학들은 불교학의 범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창작문학만을 불교문학으로 본다 할지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어떠한 근거로 불교문학의 범주를 설정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도 두 가지 정의가 발생한다. 전자는 불교적인 제재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고, 후자는 주제적인 측면에서 불교사상이 용해된 작품이다. 양자 모두 약간의 장단점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불교적 제재를 다루고 있는 작품만을 불교문학으로 보는 것은 불교문학의 외연을 축소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반면, 불교사상이 용해된 작품을 불교문학으로 보는 것은 불교사상이 대단히 방대한 까닭에 시각에 따라서 얼마든지 아전인수(我田引水)식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 까닭에 불교문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작품은 불교적인 제재를 차용함은 물론이고 주제에서도 불교적 세계관을 다루고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범주에 부합하는 작품은 많지 않다. 불교가 전래한 지 1,600여 년이 지난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불교문학의 범주에 부합하는 작품을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니, 기독교적 전통이 뿌리 깊은 서양문학에서 불교문학의 전범(典範)을 찾기란 더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헤르만 헤세의 장편소설 《싯다르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작품집 《픽션들》 《알렙》은 앞서 정의한 불교문학의 범주에 부합하는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보르헤스의 작품들에 나타난 불교사상은 《불교평론》 67호에 이미 김홍근 문학평론가가 〈보르헤스, 불교에 빠지다〉라는 글을 통해 충분히 심도 있게 해설하였던 만큼 필자의 졸고에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보르헤스의 작품을 제외하고 나면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가 남게 되는데, 이 두 작품은 상반되면서도 어느 부분에서는 일치하는 측면이 있다. 《싯다르타》의 주제와 구성은 불교의 주요 경전 중 하나인 《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入法界品)〉에 등장하는 선재동자의 구도기를 떠올리게 하는 반면,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제와 인물은 선종사(禪宗史)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받는 임제의현(臨濟義玄) 선사의 행장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까닭에 조금 비약해서 비교하면 《싯다르타》는 교(敎)에, 《그리스인 조르바》는 선(禪)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두 작품 모두 궁극적으로는 ‘일원성 속에 깃든 다원성[一卽多], 다원성 속에 깃든 일원성[多卽一]’을 염원한다는 점에서 화엄(華嚴) 만다라(曼茶羅)의 세상에서 조우한다고 할 수 있다. 

선재동자의 구도기 연상시키는 《싯다르타》
-길[道] 위에서 깨달음[道]을 얻은 성자

 
어떤 이는 가는 데마다 부처님께서 온 세계에 가득함을 뵈옵지만 어떤 이는 그 마음 깨끗하지 않아 무량겁에 부처님을 보지 못한다. 어떤 이는 가는 데마다 부처님 음성 그 소리 아름다워 기쁘게 하나 어떤 이는 백천만 겁을 지내도 마음이 부정해 듣지 못한다.

《화엄경》 〈입법계품〉의 한 구절이다. 《화엄경》 〈입법계품〉은 선재동자가 53 선지식을 차례로 찾아가 그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구도기(求道記)이다.

무엇보다도 〈입법계품〉은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귀하고 천하고를 떠나서 누구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입법계품〉에 등장하는 53 선지식의 직업을 살펴보면 실로 다채롭다. 도량신, 주야신, 천(天) 등 신의 지위에 놓인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바라문, 선인 비구, 비구니 등 수행자들도 있고 왕, 부자, 현자 등 사회 지도층들도 있다. 심지어 선지식에는 뱃사공, 매춘부 등 사회 밑바닥들도 포함돼 있다.
이에 대해 법정 스님은 《스승을 찾아서》 서문에서 “여기서 부처님 제자 가운데 마하가섭이나 사리불 또는 목건련 같은 뛰어난 제자들을 제쳐 두고, 한낱 이름 없는 뱃사공에 이교도, 창녀 같은 사람들을 선지식으로 등장시켰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결국 진리를 탐구하고 구현하는 구도의 길에서는 사회적인 신분이나 지위를 물을 것 없이, 자신이 업으로 하는 그 길에 통달한 사람이면 누구나 스승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선지식은 앉은자리에서 그저 만나지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몸소 보리심을 발해 찾아 나설 때 비로소 만날 수 있다. 선지식은 메아리와 같아서,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하였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의 주인공도 선재동자와 마찬가지로 지위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을 선지식으로 여기고 깨달음을 구한다. 이는 뱃사공이 된 싯다르타와 불제자(佛弟子)가 된 고빈다가 늙어서 만나 주고받는 대화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다음 날 아침 짜인 일정에 따른 순례의 길을 떠날 때가 되자 고빈다는 몇 번이나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싯다르타, 나의 길을 떠나기 전에 자네한테 한 가지 묻는 것을 허락해주게. 자네는 어떤 교리를 갖고 있지? 자네가 추종하는 어떤 믿음이나 지식이 있나? 자네가 살아가는 데, 올바로 행동하는 데 도움을 주고 믿음이나 지식을 갖고 있느냐 말이야.”

싯다르타가 말하였다.

“이보게 친구, 그 옛날 젊은 시절 우리가 숲 속의 고행자들과 함께 생활하였을 때 이미 내가 그 가르침들과 스승들을 불신하게 되어 그 가르침들과 스승들한테 등을 돌렸다는 것은 자네도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그 후에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어. 그렇지만 나는 그 이후로 많은 사람을 스승으로 삼게 되었지. 한 아리따운 기생이 오랫동안 나의 스승이었으며, 한 부유한 상인이 나의 스승이었으며, 몇몇 주사위 노름꾼들도 나의 스승이었네. 언젠가 한번은 떠돌아다니는 불제자 한 사람이 나의 스승이 된 적도 있었지. 그는 내가 숲 속에서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순례하던 도중에 발걸음을 멈추고 내 곁에 앉아 나를 지켜봐 주었네. 그한테도 나는 배웠으며, 또한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느끼고 있네. 하지만 나는 여기 이 강으로부터, 그리고 내가 뱃사공 일을 하기 전에 이 일을 맡아 하고 있었던 나의 전임자 바주데바한테서 가장 많이 배웠다네. 바주데바라는 이름을 가진 그 사람은 매우 소박한 사람이었지. 그는 사상가는 아니었지만, 고타마에 못지않게 필연의 이치를 깨닫고 있었네. 그는 완성된 자이자 성자였네.”

싯다르타가 말한 ‘떠돌아다니는 불제자 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 순간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는 오랜 벗인 고빈다이다. 《싯다르타》는 붓다 재세 당시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난 싯다르타가 친구인 고빈다와 함께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고빈다는 고타마의 제자가 되지만, 싯다르타는 고타마가 다른 수행자들과 달리 깨달음의 완성자인 것을 알면서도 깨달음은 홀로 이룰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생각에 길 위를 떠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싯다르타는 “자기를 빙 둘러싼 주위의 세계가 녹아 없어져 자신으로부터 떠나가 버리고,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홀로 외롭게 서 있던 이 순간으로부터, 냉기와 절망의 이 순간으로부터 벗어나, 예전보다 자아를 응집시킨 채 ‘이것이야말로 깨달음의 마지막 전율, 탄생의 마지막 경련이었다’고 느낀다.”

깨달음을 얻은 이후 싯다르타는 사색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알고, 단식할 줄 아는 재주만으로 도시에서 제일 가는 아름다운 기생인 카말라와 사랑을 하게 되고, 도시에서 손꼽히는 재력가인 카마스와미 아래서 돈을 벌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욕락(五欲樂)에 찌든 나머지 사색할 줄도, 기다릴 줄도, 단식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다시 길 위를 떠돌 수밖에 없다.

싯다르타와 고타마는 출가 후 처음으로 조우한 자리에서 아래와 같은 대화를 주고받는다.

“싯다르타, 자네는 어디로 가는 길인가?”

싯다르타가 말하였다. “친구, 나도 자네와 마찬가지 처지라네. 나는 발길 닿는 대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네. 나는 단지 도(道)를 향해 나아가는 도중에 있을 뿐이네. 나는 순례를 하고 있네.”

(중략)

“자네가 순례를 하고 있다고?” 고빈다가 말하였다. “하지만 그런 복장을 하고, 그런 신발을 신고, 그런 머리카락을 하고 순례하는 순례자는 거의 없어. 벌써 오랫동안 순례 생활을 하고 있지만 아직 그런 행색으로 순례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구.”

“고빈다, 자네 말이 옳다고 생각해. 그러나 지금, 오늘에야 비로소 자네는 그런 순례자를 한 사람 만났다는 말이야. 이보게, 설마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겠지. 형상의 세계란 무상한 것 덧없는 것이야. 우리의 옷차림이나 머리카락과 몸뚱이 그 자체도 덧없기는 마찬가지이고. 자네가 제대로 보았네만, 나는 부자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네. 내가 그런 옷을 입고 있는 것은 나도 한때는 부자였기 때문이네. 그리고 내가 색을 밝히는 속세 인간들의 머리카락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내가 한때 그런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고.”

싯다르타와 고빈다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 작가인 헤르만 헤세는 깨달음은 고행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지만, 쾌락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싯다르타》가 구도소설로서 한 전범이 될 수 있는 까닭도 싯다르타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편적인 인생사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담아내면서도 그 내용 안에 욕망이 얼마나 덧없는가를 잘 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싯다르타는 카말라에게서 애욕이 얼마나 덧없는지 깨닫고, 카마스와미에게서 물욕이 얼마나 덧없는지 깨닫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싯다르타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만나면서 자식에 대한 헌신도 실은 한낱 소유욕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싯다르타가 이러한 오욕락을 이기고 선정의 경지에 들 수 있었던 것은 뱃사공인 바주데바로부터 강의 말을 듣는 법을 배웠기에 가능하였다.

도식화하면 싯다르타에게는 두 추상적인 개념의 선지식이 있는데, 하나는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욕망을 비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두 추상적인 개념의 선지식을 상징하는 인물이 카말라와 바주데바이다.

흥미로운 것은 《화엄경》 〈입법계품〉에서도 53 선지식 중 뱃사공과 몸 파는 여자가 제법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바시라 뱃사공과 바수밀다 여인은 남을 위해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게 보살도(菩薩道)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바수밀다 여인은 선재동자가 찾아왔을 때 “어떤 중생이 애욕에 얽매어 내게 오면, 나는 그에게 법을 말해 탐욕이 사라지고 보살의 집착 없는 경계의 삼매를 얻게 한다. 어떤 중생이고 잠깐만 나를 보아도 탐욕이 사라지고 보살의 환희삼매를 얻는다. 어떤 중생이고 잠깐만 나와 이야기해도 탐욕이 사라지고 보살의 걸림 없는 음성삼매를 얻는다. 어떤 중생이고 잠깐만 내 손목을 잡아도 탐욕이 사라지고 보살의 모든 부처 세계에 두루 가는 삼매를 얻는다.”고 설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누구에게나 분별없이 대하는 바수밀다 여인이기에 중생에게 삼매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바수밀다 여인의 해탈 법문은 중생 세계에 들어가지 않고는 중생을 교화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바수밀다 여인은 중생의 욕망에 따라 몸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는 관세음보살이 온갖 중생의 요청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청정한 마음을 지닌 바수밀다 여인이기에 오탁악세(五濁惡世)의 법으로써도 능히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선재동자가 찾아왔을 때 바시라 뱃사공은 “나는 소용돌이치는 곳과 물이 얕고 깊은 곳, 파도가 멀고 가까운 것, 물빛이 좋고 나쁜 것을 잘 안다. 해와 달과 별이 운행하는 도수와 밤과 낮과 새벽 그 시각에 따라 조수가 늦고 빠름을 잘 안다. 배의 강하고 연함과 기관의 빡빡하고 연함, 물의 많고 적음, 바람의 순행과 역행에 대해 잘 안다. 이와 같이 안전하고 위태로운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갈 만하면 가고 가기 어려우면 가지 않는다. 나는 이와 같은 지혜를 성취해 이롭게 한다.”고 말한다.

선재동자의 구도에서 바수밀다 여인이 자비의 화현(化現)이라면, 바시라 뱃사공은 지혜의 화현이라고 할 수 있다. 비유컨대 지혜와 자비는 법륜(法輪)이라는 이름의 자전거를 이끄는 앞뒤 바퀴라고 할 수 있다. 《싯다르타》에서도 몸 파는 여자인 카말라와 뱃사공인 바주데바는 주인공에게 유사한 역할을 한다.

헤르만 헤세의 문학세계에 비추어보면, 《싯다르타》는 《데미안》이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연장선 위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작품을 발표한 시간대로 보면 《싯다르타》는 《데미안》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중간에 있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데미안에게 세계란 선과 악이 함께할 때 비로소 하나가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듯이,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는 고빈다에게 단일성과 다양성의 세계는 결국 하나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리고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금욕주의자인 나르치스와 쾌락주의자인 골드문트가 대비를 이루듯 《싯다르타》에서 고타마의 가르침에 귀의해 수행하는 고빈다와 홀로 깨달음을 이루는 싯다르타가 대비를 이루고 있다.

무엇보다도 《싯다르타》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서양 문학작품으로서는 드물게도 붓다의 일생과 가르침을 작품 속에 용해하고자 노력했고, 관조적 삶(수행)과 실제적 삶(일상)이 다르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문학으로서 탁월한 문학적 성과를 남겼다고 볼 수 있다.    

춤추는 ‘조르바’ 혹은 할(喝)하는 무위진인(無位眞人)
-인간이 뭐냐고? 그건 바로 자유

주제, 구성, 문체, 인물, 사건, 배경 등으로 나눠서 분석하는 구성주의 비평으로 볼 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인물(캐릭터)의 형상화가 성공적일 때 얼마나 그 작품이 빛을 발하는지를 단적으로 대변해주는 명작이다. 인물의 형상화가 잘된 작품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리스인 조르바》 역시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쓰여 있다.

그런데 《그리스인 조르바》는 불교적인 제재를 다루거나 불교사상을 전면 내세운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표적인 출 · 재가자 문인인 법정 스님과 한승원 작가가 이 작품을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소설로 손꼽고 있다.

기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주인공인 ‘나’가 붓다에 대한 작품을 쓰고 있다는 내용을 제외하고 나면 표면적으로는 불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가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왜 많은 이가 이 작품을 불교문학의 범주에 넣고 있는 것일까? 그 해답은 조르바라는 인물에서 찾을 수 있다.

법정 스님은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은 소감을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조르바가 물었다.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이야기 좀 들읍시다. 요 몇 해 동안 당신은 청춘을 불사르며 마법의 주문이 잔뜩 쓰인 책을 읽었을 겁니다. 모르긴 하지만 종이도 한 50톤쯤 씹어 삼켰을 테지요. 그래서 얻어낸 게 도대체 무엇이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묻는 준엄한 질문처럼 들렸다. 우리가 읽고 쓰고 하는 뜻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지금껏 그토록 많은 종이를 씹어 삼키면서 얻어낸 게 무엇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삶의 본질과 이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한낱 종이벌레에 그치고 만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그가 살았던 크레타에 한 번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1995년 여름 볼일로 파리로 갔다가 그리스로 날아갔다.
(중략)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성루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가 있었다. 묘비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에 쓰인 글은 작가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 독자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과 같다. 작품 속에서 조르바는 아무것도 원치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이다.
작품 속에서 화자가 조르바를 처음 만났을 때 둘은 이런 말을 주고받는다.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란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조르바는 질그릇을 만들려고 물레를 돌리는 데 거슬린다는 이유로 도끼로 새끼손가락을 자를 정도로 그 어디에도 예속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을 지녔다. 작품 속 화자가 본 대로 조르바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인 것이다.

그래서 조르바는 인간의 이성이란 “물레방앗간 집 마누라 궁둥짝” 정도로 여긴다. 조르바가 화자에게 “당신의 그 많은 책 쌓아 놓고 불이나 싸질러 버리시구려.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연장선 위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이리 재고 저리 재는 그런 이성적인 삶이 아닌 탄광 일을 할 때는 갈탄과, 산투르를 연주할 때는 산투르와 혼연일체가 되는 직관의 삶을 사는 조르바이기에 슬플 때거나 기쁠 때거나 감정이 북받치면 아무 데서고 춤을 추는 기벽(奇癖)이 있다. 조르바는 하느님은 자비로운 존재라고 믿지만 “여자가 잠자리로 꾀는데도 거절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거절당한 여자는 풍차라도 돌릴 듯이 한숨을 쉴 테고, 그 한숨 소리가 하느님 귀에 들어가면, 그자가 아무리 선행을 많이 쌓았대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화자가 도 닦는 데 방해가 된다고 성기를 자른 한 수행자의 이야기를 하자 “그건 장애물이 아니라 열쇠야. 열쇠.”라고 대꾸하는 조르바의 거침없고 파격적인 태도에서 독자들은 자신을 옥죄는 세상의 모든 경계를 허무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카잔차키스는 《영혼의 자서전》에서 자신의 영혼에 깊은 골을 남긴 사람으로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조르바를 꼽는다. 그러니까 조르바는 카잔차키스가 직접 만난 실존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카잔차키스가 인생이라는 여행 속에서 화두로 여긴 육체와 영혼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은 조르바라는 자유인을 만나 하나가 되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첫 스승인 호메로스는 그의 고향인 크레타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이 크레타라는 지역은 터키로부터 해방을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했던 역사의 장이기도 하다. 크레타 지역의 역사인 ‘압제와 자유’라는 양극 개념은 베르그송에 경도되면서 ‘신의 압제와 인간의 자유’로 이어지게 되고, 니체에 경도되면서는 ‘인간의 한계와 초인의 극복’으로 승화하게 된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조르바라는 진정한 자유인과의 만남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탄광 일을 할 때는 갈탄이 되고 산투르를 연주할 때는 산투르가 되는, 그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은 채 거침없는 행보를 하는 조르바의 모습은 중국 임제 선사의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즉,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 지금 있는 그곳이 바로 진리의 세계이다.’라는 가르침을 연상하게 된다. 자기 자신의 인생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수많은 선사들이 주인공이 되는 삶을 역설했는지도 모르겠다.

중국 당나라 때 서암사언 스님은 반석 위에 앉아서 정진하시면서 항용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주인공아!”

“예!”

“성성하게 깨어 있어라. 성성하게 깨어 있느냐?”

“예! 깨어 있습니다.”

서암사언의 일화는 이 세상 사람 모두가 주인공임을 일깨워준다.

열반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우리나라의 경봉 스님은 “사바 사계를 무대로 한바탕 멋지게 살아라.”라고 말하였다.

경봉 스님의 말씀 역시 우리는 모두 세상이라는 무대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불교의 교조인 붓다 또한 “자기야말로 자신의 주인이고 자기야말로 자신의 의지할 곳이니 말장수가 말을 다루듯 자신을 잘 다루라.”고 강조한 바 있다. 구체적인 부처님의 일화를 소개해 보자. 

바라나시 녹야원에서 최초 설법을 마치고 부처님은 우루벨라를 향해 교화의 길을 떠났다. 숲 속 나무 아래 앉아 쉬고 있는 부처님 앞으로 젊은이들이 몰려왔다. 그들이 부처님에게 물었다.

“혹시 도망가는 여인을 보지 못했습니까?”

“그 여자를 어째서 찾으려고 하는가?”

“그 여자가 우리의 귀중품들을 모두 훔쳐 달아났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 달아난 여자를 찾는 일과 자기 자신을 찾는 일과 어떤 것이 더 보람 있는 일인가?”

“물론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죠.”

부처님은 젊은이들을 자신의 앞에 앉힌 뒤 괴로움이 어디서 오며(四聖諦), 괴로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八正道) 설하였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나면 모든 굴레를 벗어던진 것 같은 해방감을 만끽하게 되는데, 이는 임제의현 선사의 가르침인 무위진인(無位眞人)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기실, 《그리스인 조르바》의 문학적 성취는 애오라지 조르바라는 인물을 통해서 완성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작품의 서사는 다분히 사변적(思辨的)인 주인공이 우연히 조르바를 만나 탄광사업을 하게 되지만 결국 망한다는 게 그 골자이다. 그렇다고 해서 복잡한 구성을 취하고 있거나 추리적 기법을 활용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 작품은 놀라울 정도의 가독성을 지니는데, 이는 조르바라는 야성적인 인물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사문학에서 캐릭터 설정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게 해주는 실례이기도 하다.

서사문학에서만 인물(혹은 인간)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선종사(禪宗史)에서 임제 선사가 남긴 최고의 업적은 바로 ‘깨달음’이니 ‘마음’이니 하는 형이상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삶의 주체인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내렸다는 데 있다.

하루는 한 스님이 와서 임제 스님에게 물었다.

“불법의 대의가 무엇입니까?”

임제 스님이 “할(喝)”을 했다. 그러자 법을 청한 스님이 절을 하였다.

 임제 스님이 말하기를 이 스님과는 법을 말할 만하다 하였다. 임제 스님에게 할은 법거량의 상징적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조르바가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한바탕 춤을 추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무위진인(無位眞人)은 임제 스님 가르침의 핵심 골수이다. 《임제록(臨濟錄)》 시중(示衆)에는 대중에게 훈시한 법문들이 수록돼 있는데, 무위진인에 대한 내용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아래와 같은 구절들이다.

“붉은 살덩이로 된 몸뚱이에 지위가 없는 참사람이 하나 있다. 항상 여러분들의 얼굴에 드나들고 있다. 증거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잘 살펴보시오.”

“그대들이 부처를 알고자 하는가? 바로 내 앞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그 사람이다.”

“사대(四大)는 법을 설할 줄도 들을 줄도 알지 못한다. 허공도 법을 설할 줄도 들을 줄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눈앞에 모양이 없는 밝고 신령스러운 것이 능히 법을 설할 줄 알고, 들을 줄 안다.”

임제 스님은 《임제록》에서 ‘무위진인’이 되는 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수행자여, 참다운 견해를 얻고자 하거든 오직 한 가지 세상의 속임수에 걸리는 미혹함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모든 대상을 바로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나한(羅漢)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 권속을 죽여야 비로소 해탈하여, 어떠한 경계에도 얽매이지 않고 투탈자재(透脫自在)한 대자유인이 될 수 있다.

임제 스님은 “부처를 최고의 목표로 삼지 마라. 내가 보기에 부처는 한낱 똥 단지와 같고 보살과 아라한은 죄인의 목에 거는 형틀에 지나지 않는다. 이 모두가 사람을 구속하는 물건이다.”라고 말하였다. 대자유인인 까닭에 임제 스님은 자신을 옥죄는 모든 것에서 단호히 벗어나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불제자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부처를 믿는 데 있지 않고, 스스로 부처가 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최고 압권은 주인공이 조르바와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이다. 케이블과 철탑이 무너지는 바람에 ‘나’는 모든 것을 잃고 빈털터리가 된다. 그리고 그때는 조르바의 애인인 부불리나가 죽은 직후이다. 그런데도 둘은 해방감에 젖어서 춤을 춰대는 것이다. 서툴지만 신명 나게 흔들어대는 화자에게 조르바는 이렇게 말한다.

“종이와 잉크는 지옥으로나 보내 버려! 상품, 이익 좋아하시네. 광산, 인부, 수도원 좋아하시네. 이것 봐요. 당신이 춤을 배우고 내 말을 배우면 우리가 서로 나누지 못할 이야기가 어디 있겠소!”
조르바와의 교감을 통해서 화자가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되는 순간이다.

우주와 합일하는 인지적 순환 세계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싯다르타》와 《그리스인 조르바》는 불교문학의 한 전범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 면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인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리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두 작품이 조우하는 지점은 분명히 있다.

《싯다르타》에서 고빈다가 오랜 구도 여정 끝에 늙은 뱃사공이 된 싯다르타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과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화자가 참 자유인인 조르바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 다르지 않다.

《싯다르타》의 말미에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자 싯다르타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수백 개의 얼굴들이, 수천 개의 얼굴들이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왔다가 다시 흘러가 버린다. 그렇지만 그 모든 얼굴들이 동시에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얼굴들은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어 새로운 모습의 얼굴로 변하였다. 그렇지만 그 얼굴들은 모두가 싯다르타의 얼굴이었다.”고 느낀다.

여기서 수많은 얼굴이란 비단 사람의 얼굴만 국한된 게 아니다. 물고기, 산돼지, 악어, 코끼리, 황소, 새 등 온갖 짐승과 크리슈나, 아그니 등 신들의 모습도 스쳐가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화자는 달빛을 받는 조르바를 바라보며 “주위 세계에 함몰된 그 소박하고 단순한 모습, 모든 것(여자, 빵, 물, 고기, 잠)이 유쾌하고 육화하여 조르바가 된 데 탄복”한다. 화자는 우주와 인간이 그처럼 다정하게 맺어진 예를 일찍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두 작품 모두 이상과 현실(혹은 선과 악)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가 아니라 현실 안에 이상이 투영된 일원론적 세계를 지향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급진적 구성주의에 따르면, 인간의 인식이란 세계 자체에 대한 인식이 아니다. 스스로에게 유리하도록 파악한 세계에 대한 인식일 뿐이다. 이를 일컬어 서구철학에서는 ‘인지적 순환’이라고 한다. H. 마투라니의 “앎이 곧 삶이요, 삶이 곧 앎이다.”는 주장이나, H. 하이네의 “선한 사람은 세상에서 그의 천국을 경험하고, 악한 사람은 그의 지옥을 경험한다.”는 주장은 인지적 순환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서구철학에서 말하는 인지적 순환은 “그때 여래가 걸림이 없는 청정한 지혜의 눈으로 온 법계의 모든 사람을 두루 살피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신기하고 신기하여라. 이 모든 사람이 여래의 지혜를 다 갖추고 있구나. 그런데 어리석고 미혹하여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구나.’”라는 《화엄경》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의 구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독자가 흐르는 강물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는 싯다르타와 생래적으로 무위의 삶을 살 줄 아는 조르바에게서 배우는 것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단편》에서 역설한 내용과 유사하다.

"전체지만 전체가 아니고, 수렴하지만 확산하며, 일치하지만 부조화하고, 모든 것에서 하나가 나오지만 또 하나에서 모든 것이 나온다.”

이러한 단일성에 대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은 각각의 구슬들이 모여서 하나의 그물을 만드는 연기사상의 동시성과 선사상의 패러독스와 일정 부분 그 의미가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    

  
유응오 / 소설가. 〈불교신문〉 〈한국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주간불교〉 〈불교투데이〉 편집장 역임. 《이번 생은 망했다(샘터)》 《영화, 불교를 만나다》 출간. 옴니버스 장편소설(실천문학), 존 레넌 청소년 평전(자음과모음), 스님들 출가수행기(쌤엔파커스)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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