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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원효와 의적의 입당구법(入唐求法) / 이광준
[68호] 2016년 12월 01일 (목) 이광준 worldamigo@hanmail.net

1. 머리말

지금까지 신라의 원효(元曉)는 한 번도 중국에 가지 않았고 의적(義寂)의 입당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없다. 그들의 입당(入唐)을 추정할 자료는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입당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들이 최근 확인되었다. 한때 중국의 현장삼장이 머물며 역경을 하던 섬서성 옥화사(玉華寺)의 사전(寺傳) 자료 등이 그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원효의 생애에 관한 기본 자료는 대략 10여 종이다. 그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고선사서당화상탑비(高仙寺誓幢和上塔碑)〉 《송고승전(宋高僧傳)》의 〈원효전(元曉傳)〉 〈화쟁국사영찬(和諍國師影賛)〉 《삼국유사》의 〈원효전〉 등 4건이다. 그 밖의 것은 거의 《송고승전》 혹은 《삼국유사》에 의거한 것이다. 위에 든 4건에 대해 연대순으로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선사서당화상탑비〉는 신라의 혜공왕(재위 765~779) 말부터 9세기 초(800~808)에 걸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원효전의 가장 오랜 근본 사료다. 특히 탑비의 하반부의 비문(碑文)에는 출생의 이서(異瑞) 및 고선사(高仙寺) 명칭과 손자 중업(仲業)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종래에 알지 못했던 원효의 적년(寂年)과 시적(示寂)의 장소를 알게 하는 귀중한 자료다.

《송고승전》 권4 〈당신라국황룡사원효전(唐新羅國黃龍寺元曉傳)〉은 송의 찬녕(贊寧)이 982년에 편찬하고 988년에 완성한 것이다. 여기에는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의 작성에 관한 연기설화가 소개돼 있다. 또 그 전후에 출신, 출가 후의 행장에 대해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 권4〈당신라국의상전(唐新羅國義湘傳)〉에는 원효의 입당 실패담을 기록하고 있다. 〈화쟁국사영찬(和諍國師影贊)〉은 고려의 김부식(金富軾, 1075~1151) 찬(撰)으로 엄밀한 의미에서는 〈원효전〉이기는 하지만 본찬(本贊) 가운데는 원효의 학문적 경향이 개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삼국유사》 권4 〈원효불기(元曉不覊)〉는 고려의 일연(一然)이 1276년부터 1283년 사이에 찬한 것으로 당시 유포되고 있던 《효사행장(曉師行狀)》 《향전(鄕傳)》 《당승전(唐僧傳)》 등의 기사를 근거로 하여 작성된 것이다. 그러나 기사의 불확실한 곳은 일연 자신이 고증을 더하고 있다.

이상으로 원효의 전기자료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실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지만, 이 자료 중에는 2차에 걸쳐 입당(入唐)을 시도하다가 의상만 입당했을 뿐 원효나 의적이 입당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필자는 중국의 현장 연구총서 중 ‘옥화사’ 사전(寺傳) 자료와 또 다른 자료인 일본의 《정토삼국불조전집》 그리고 원효의 저술 《판비량론》을 통하여 원효는 일시적이나마, 그리고 의적은 상당 기간 중국에 체재하였던 사실을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그 자료들을 통하여 이들의 입당 행적을 추적해보고자 한다.

2. 원효의 입당구법 추진

원효의 학문과 생애를 말할 때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두 차례에 걸쳐 입당구법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자료에 따르면 원효는 두 번의 입당을 시도했으나 1차는 실패하고 2차는 스스로 포기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는 《송고승전》과 《삼국유사》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원효가 입당을 추진한 것은 중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선진(先進) 불교와 현장(玄奘)의 학문을 흠모했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그렇다면 당시 중국의 불교 상황은 어떠했던가.

가장 주목할 점은 인도에서 돌아온 현장이 왕성한 번역활동을 했다는 사실이다. 현장은 당의 정관 19년(645)에 많은 경론을 가지고 인도 유학에서 귀국했다. 그는 국가의 지원으로 홍복사(弘福寺)를 거쳐 장안의 대자은사(大慈恩寺)에서 번역사업을 했다. 뒤에 서명사(西明寺)를 거쳐 옥화사(玉華寺)로 가서 천하의 영재들을 맞이하였다. 그의 번역사업은 신역(新譯)이라 불리는데, 역경사상(譯經史上)의 새 국면을 여는 것이었다. 현장의 역경은 총 75부 1,335권에 이른다. 이 번역사업에서 현장이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인도 유학 중에 배운 《해심밀경》 《유가론》 《성유식론》 등에 기초를 둔 이른바 유가유식(瑜伽唯識)의 교학이었다. 이 신불교는 장안에서 크게 유행했는데 그 밑에서 배운 학도가 3천 명에 이르렀다 한다.

수많은 현장 문하 가운데 뛰어난 제자 규기(窺基, 632~682)에 의해서 개립된 것이 법상종이었다. 이 유가유식의 신불교 전성시대에 “천성발군(天性拔群)의 수재로 문사(文辞)는 종횡으로 담론(談論)은 풍발하고, 대중을 압도하는 풍격이 있다고 칭송받던 원효”는 현장이 귀국하여 번역사업을 시작한 지 5년 후인 650년(진덕여왕 4년), 34세의 나이로 의상과 함께 입당 유학을 뜻을 세웠다. 원효의 입당 계획은 전후 세 차례에 걸쳐 추진되었는데 그 경과는 아래와 같다.

1) 제1차 입당 계획

원효의 첫 번째 입당계획은 650년에 의상과 함께 고구려를 거쳐 중국으로 가는 것이었다. 경로는 당시의 상황을 그려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두 사람은 경주를 출발하여 성 밖까지 경사(京師)의 승니(僧尼) 다수의 전송을 받고 동행 수십 인은 충주로 향한다. 이로부터 개성과 평양을 거쳐 요동반도를 지나 당나라로 향하는 것이다. 요동반도에 들어설 즈음 고구려의 병사가 나타난다. “신라의 스님인가, 어디를 가는 거요?” “입당 학문승이요.” “이름은 뭐요?” “원효와 의상이라고 합니다.” “원효와 의상이라. 들어본 이름 같은데. 상부에 물어보고 나서 어떻게 할지 정하게 될 것이요.” 그리고는 국내성 보장왕 앞으로 보고한다. 수일 후, 사자가 한 통의 서간(書簡)을 가지고 돌아와서 “원효와 의상은 신라의 고명한 자이므로 포치(抱置)하라.”고 전한다.

두 사람에 대한 보장왕의 포치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죽령반환(竹嶺返還)이 뒤틀린 이후 양국이 서로 내세운 고집이 원인이었다. 고구려 왕조는 원효와 의상이 신라의 중심 세력인 김유신과 김춘추에 가까운 사람들인 것을 알고 이 왕실에 가까운 두 사람을 놓고 외교를 유리하게 전개하려는 복안(腹案)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는 고구려 왕조에서 권위를 가지고 있는 도사(道士)들의 진언(進言)이다. 이즈음 고구려의 종교 이념은 급속하게 도교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보장왕 2년(643)에 연개소문은 왕에게 권하여 적극적으로 도교를 당에 청하고 사찰을 도관으로 개축하며 도교의 진흥을 꾀하였다. 이러한 일이 거듭되자 보장왕 9년 명승 보덕화상(普德和尙)은 ‘국가는 도를 받들고, 불법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서 백제의 반룡사(盤龍寺)로 도망했을 정도이다. 그런 때에 원효와 의상이 포획된 것이다.

이 원효와 의상의 포획을 안 순간에 김유신과 김춘추는 행동을 개시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보장왕에게 많은 선물을 가지고 사자를 보내어 왕에게 배알하고 말했을 것이다.

“거듭 약속한 죽령(竹嶺)과 마목현(麻木峴)의 이령반환(二嶺返還)의 건, 너무 늦게 되어 실례했사옵니다. 진덕여왕에게는 마음에 걸려 있던 이령반환에 대한 조인(調印)을 대왕에게 상담하시라고 권하는 중이옵니다.”

“원효와 의상의 반환과 이령의 반환이라! 그럴듯한 이야기인데, 아직 우리가 손해야. 죽령이나 마목현도 원래는 우리나라 땅인데 신라가 편취한 것이지 않은가.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러나 기다려.”

그리고 물러나는 사자에게 보장왕은 말한다.

“이 두 사람은 어쨌건 이령은 반환하지 않으면 안 되네. 춘추와 유신에게 힘써 노력해 주는 게 좋을 것이라고 전해주게.”

그즈음 원효와 의상은 고구려의 구속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임진강을 건너 광주(廣州)에 이른 원효와 의상은 그곳에서 수일을 지내고 피로를 달랬다. 이 땅은 이미 신라의 세력 범위였다. 이미 7월이 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경주로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

2) 제2차 입당계획과 의상의 입당 경로

(1) 제2차 입당 계획

제1차 입당 계획으로부터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당(唐)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원효가 이젠 40세를 넘었을 때, 신라는 당의 힘을 빌려 백제는 멸망하게 되었다. 신라의 서쪽이 가로막혀 당과의 바닷길이 차단되어 있던 백제가 무너짐으로써 신라는 마음대로 당에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원효가 의상과 함께 두 번째 당을 향하여 길을 나선 것은 태종무열왕 8년, 즉 문무왕 원년(661)으로 그가 45세 때의 일이었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행장을 갖추고 당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탈 수 있는 당진항으로 향했다. 경주를 떠나 충주를 거쳐 직산으로 여러 날을 걸었다. 때마침 장마철을 만나 오랜 움막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그러나 원효는 당나라에 의상 혼자서 가도록 하고 자신은 발길을 돌렸다. 이유인즉 원효는 당나라에 가서 더 배울 것이 없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사연은 이렇다.

……두 사람은 비가 내리는 어두운 밤에 질척거리는 들판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길가 언덕 밑에 땅막[土龕]이 있음을 발견하고 들어가 하룻밤을 편안히 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잠에서 깨어보니 그곳은 땅막이 아니라 낡은 무덤 속이었다. 그날도 비가 멎지 않고 계속 내리므로 또 하룻밤을 그곳에서 자게 되었는데, 간밤에는 그토록 평안히 잘 수 있었던 그 땅막 아닌 무덤에서 이제는 귀신이 나타나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여기서 원효는 홀연 ‘간밤에는 땅막으로 생각하였으므로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고, 지금은 무덤(鬼鄕)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귀신이 법석을 떠는구나’ 생각하고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事象)이 일어나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니다[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二]’라고 깨달았다. 즉 ‘삼계가 다 생각 나름이고 만법은 오직 마음이 만든다[三界唯心 萬法唯識]’라는 진리를 체득하였다. 이리하여 신라인 원효는 당나라 유학의 길을 스스로 포기하고 발길을 되돌렸다. 그리고 의상 혼자서 당나라를 향했다.
 
(2) 의상의 입당 경로

그렇다면 혼자가 된 의상의 입당 경로는 어떠했을까. 의상의 입당 당시의 상륙 지점은 간단히 설명될 수 없다. 하나는 《송고승전》이 기록하는 등주(登州)이고, 또 하나는 《삼국유사》의 기록인 양주(楊州)이다. 당시 이 양쪽 모두 당과 신라의 교통거점이었다. 어느 쪽을 택할지는 의상이 승선(乘船)한 배가 어떠한 종류였는지에 의해 결정된다. 《삼국유사》가 말하듯이 ‘당사(唐使)의 배로 서쪽으로 돌아가는 것이 있어 그곳에 끼어 중국에 들어갔다’면 이 책의 기록대로 양주일 것이다. 양주로부터 장안(長安)까지의 육로는 2,753리로 등주 · 장안 간의 3,150리에 비해 400리나 가깝고, 또 양자강 입구로부터 변(汴, 開封)까지 대운하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일수가 대폭 단축될 수 있다.

한편 《송고승전》의 기록인 ‘상선(商船)에 의탁하여 등주의 해안에 이르렀다’고 하면, 적산(赤山)에의 도정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만 이 경우 양주로부터 등주에 이르는 동중국 해안의 해도주항로(海道舟舡路)라고 하는 항로가 있어, 신라 배는 일찍부터 이를 이용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唐) 사절의 선박을 타고 일단 양주에 들어간 후에 상선을 얻어 다시 해상으로 나와 또다시 등주로 들어갔다고 한다. 양주에 들어간 후 당나라 사절에 동행하여 장안으로 직행하지 않고 왜 다시 등주로 돌아갔을까. 거기에는 문등현 적산에 있던 신라원(新羅院, 후의 法花院)의 존재를 무시할 수가 없다.

당시 신라는 초주(楚州, 江蘇省淮安府)에 신라방(新羅坊), 산동의 적산에 신라원을 설치하고 있었고, 이곳을 거점으로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회안(淮安)의 신라방이 해외 교역자의 거류지였던 데에 비해 산동의 신라원은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 사는 신라계 사람들의 불교 신자가 집회하는 사원이었다. 어쨌건 당초 의상은 양주에서 내려 주장유지인(州將劉至仁)의 청에 의해 관아에서 쉬면서 공양을 받았다. 양주는 당시의 국제무역 도시이다. 백제, 신라, 왜(倭), 주애(朱崖), 담이(儋耳), 회계(會稽), 동야(東冶), 월(越), 안남(安南) 그리고 멀리 천축이나 파사(波斯)로부터도 선(船)이 들어와 교역하였다. 그런데 양주로부터 등주로 돌아온 것이 의상의 뜻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양주에서 접촉한 선승들의 요청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의상은 상선으로 회항하였다.그리고 장안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리고 원효와 함께 당에 들어가려고 했던 의상은 종남산 지상사(至相寺)로 지엄(智儼)을 찾았다. 그때 지엄은 60세였다. 만일 원효가 다시 입당을 결행했다면 의상의 경로와 같은 등주나 양주 코스를 밟았을 것이다.

3) 원효의 제3차 입당 결행

그렇다면 원효는 끝내 당나라로 가지 않았던 것일까.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원효는 의적(義寂)을 대동하고 의상의 입당과 같은 해인 661년에 입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661년 6월에는 태종무열왕이 서거하고 태자 법민(法敏)이 문무왕(文武王)으로 즉위한 해였다. 계절과 사회적인 상황으로 볼 때 아마도 의상은 6월을 전후하고, 원효와 의적은 7월을 전후하여 입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 자료로는 사전적(寺傳的)인 성격을 띤 중국 자료 현장연구총서 《옥화사(玉華寺)》와 입당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자료인 일본의 《정토삼국불조전집(淨土三國佛祖傳集》의 〈가재전(迦才傳)〉 그리고 원효의 저술 《판비량론(判比量論)》 등이 있다. 이제 이 자료들을 분석하며 원효의 입당 사실을 추정해보고자 한다.

(1) 중국 자료 《옥화사(玉華寺)》에 나타난 원효

① 옥화사(玉華寺)는 어떤 절인가

태종 정관(貞觀) 19년(645) 현장이 장안으로 돌아오자 당 태종은 홍복사(弘福寺)로 맞아들여 대접을 후하게 하고, 다시 자은사(慈恩寺)가 낙성되자 특별히 번경원(飜經院)을 설치하여 현장으로 하여금 번역사업에 종사케 하였다. 그 후 또 서명사(西明寺)를 거쳐 다시 옥화궁(玉華宮)을 사(寺)로 고치고 이곳에서 역경사업을 하도록 하였다.

옥화사는 중국 섬서성 방주(坊州) 의군현 서남쪽에 있다. 옥화궁사(玉華宮寺)라고도 한다. 처음 당 태종이 피서를 위해 이 지역 진소룡(秦小龍)의 집에 이르러서 궁을 세우고 옥화궁이라 칭하였다. 정관 22년 5월, 현장은 태종의 명에 따라 이 궁에 와서 10월에 홍법대(弘法臺)에서 《능단금강반야경》을 번역하였다. 현경(顯慶) 4년 10월에는 《대반야경》을 번역하려고 장안의 번잡함을 피하여 칙(勅)을 받들어 이 궁에 들었다. 이때 규기(窺基), 보광(普光), 현칙(玄則) 등도 모두 역장(譯場)에 참여했다. 드디어 광운전(光雲殿), 명월전(明月殿), 가수전(嘉壽殿), 경복전(慶福殿), 팔계정(八桂亭) 등에서 《대반야경》 및 기타 경전을 역출하였다. 인덕(麟德) 원년 2월, 현장은 이곳에서 시적(示寂)하고자 유언하여 이르기를, “내가 이 궁에 온 것은 반야를 번역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부정한 몸으로 궁사에 가까이하지 말라.”고 하였다. 다음 3월에 칙하여, 이미 번역한 경을 서사하고 미번역의 것은 모두 이를 자은사(慈恩寺)로 보내고, 또 현장의 제자 및 번경승(飜經僧)으로서 당사(當寺)에 속하지 않는 자는 각기 그 본사(本寺)에 귀환케 하였다. 어쨌거나 이 책에서 원효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② 원효, 옥화사를 찾다

《옥화사》 3 ‘옥화역경(玉華譯經)’ 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현장이 인도에서 돌아온 후, 그 명성은 이전보다도 더 치솟고, 그 문하에는 고승들이 숲과 같았다. 당시 제자가 3천이라 칭했는데, 달자(達者)가 70인, 고족(高足)이 4인으로, 이들은 유명한 일대의 고족인 신방(神昉), 가상(嘉尙), 보광(普光), 규기(窺基)의 네 분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 4인은 또 ‘장문사철(奘門四哲)’ 혹은 ‘장문사신족(奘門四神足)’이라 칭했으며, 이 사람들도 모두 스승을 따라 함께 모여 옥화사로 왔다.

그리고 《옥화사》 p.53에서는 원효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중국의 간자체 한자는 한국의 번쇄체 한자로 바꾼 것이다)

현장법사를 따라 함께 옥화사에 온 대당 고승들은 현장과 4인의 고족 이외에, 또 대덕 홍언, 석전, 대승흠, 정매, 현칙, 현각, 보광 등의 일대 불교계의 유명인들이 있었는데, 각자가 모두 법문의 용상(龍象)들로 학문을 대성하고 우수성이 비범하였다. 이들 중 대학자 심현명 등도 있어 함께 참여하여 역장의 일을 했다. 이 밖에 옥화사에는 또 구학(求學)을 위해 온 외국의 고승이 적지 않게 있었으니, 일본불교 법상종의 제1대 전인 도소, 제2대 전인 지통과 지달도 모두 선후하여 옥화사의 현장법사에게 배우기 위해 온 적이 있었다. 조선의 고승 원효와 의적(1종의 자료에는 의상이라고 기록된 것이 있다) 또한 현장에게 배우고자 찾아왔다. 이때에는 바로 조선불교의 전성시대로 적지 않은 불교학의 이론가가 출현하였다. 그 가운데 조선불교의 발전에 가장 심심한 영향을 준 3인이 있었는데, 그중에 원효와 원측이 있었으니, 그들은 모두 현장의 문인과 학생이었다.

隋同奘師一起來到玉華寺的大唐高僧們, 除玄奘與其奘四位高足外,還有大德弘彦, 釋詮, 大乘欽, 靖邁, 玄則, 玄覺, 寶光等一代佛界名流, 個個 皆是法門龍象, 學有大成, 氣度非凡. 還有大學者沈玄明等, 也一起參與了譯場工作. 此外, 玉華寺還有不少來求學的外國高僧. 日本佛敎法相宗的第一代傳人道昭, 第二代傳人智通和智達, 都先后來過玉華寺就玄奘法師求學. 朝鮮高僧元曉,義寂(有一種資料記爲義湘). 亦來此就奘遊學. 此時, 也正是朝鮮佛敎的鼎盛時代, 出現了不少的佛學理論家. 其中有對朝鮮佛敎的發展影響最深的三個人, 其中就有元曉和圓測, 而他倆都是玄奘的門人和學生.

이 문장에서 편자는 원효와 의적(혹은 의상)이 현장에게 찾아왔다고 하는 원본 자료를 밝히지 않고 있어 사실 여부를 확정하는 데는 약간의 의문이 남는다. 그러나 이 책자는 당대의 많은 자료를 참고자료로 하고 있어 그 신빙성을 무시할 수 없다.

③ 옥화사 유관대사 연표

그리고 《옥화사》 9의 ‘옥화사급유관대사연표(玉華寺及有關大事年表)’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정리하고 있다.

현경 4년(659) 10월, 현장은 제2차로 황제의 칙을 받들어 옥화사에 머물면서 불경을 번역하였다…… 윤10월, 현장과 규기, 즉 스승과 학도 2인은 함께 법상종의 대표경전 《성유식론》 10권을 번역하였다…… 5년(660) 정월, 현장은 《대반야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용삭 원년(661), 신라승 원효와 의적은 옥화사에 와서 현장으로부터 업(業;학업)을 받았다…… 2년(662), 현장은 옥화사에 있으면서 ‘금강좌’ 석가모니 불상을 정중하게 조성하였다…… 3년(663) 10월, 현장은 《대반야경》 600권의 번역을 마쳤다…… 인덕 원년(664) 2월 5일 야반에 현장은 옥화사에서 원적하니 시년 65세였다.

顯慶四年(659)十月, 玄奘第二次奉勅來玉華, 住玉華寺飜譯佛經…… 閏十月, 玄奘, 窺基師徒二人, 合譯成法相宗的代表經典-《成唯識論》 十卷…… 五年(660)正月, 玄奘 開譯 《大般若經》…… 龍朔元年(661), 新羅僧元曉, 義寂,來玉華寺從玄奘 受業…… 二年(662), 玄奘在玉華寺敬造 “金剛座” 及釋迦牟尼像…… 三年(663)十月, 玄奘 譯完 《大般若經》 六百卷…… 麟德 元年(664) 二月五日夜半, 玄奘 圓寂于玉華寺. 時年六十五(pp.127-128).

이 ‘옥화사 유관대사 연표’에는 신라의 원효와 의적이 661년에 현장을 찾아왔다고 확실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편자가 이 연표를 작성하면서 옥화사의 사전(寺傳) 기록을 그대로 작성한 1차 자료인지 아니면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여 정리해놓은 2차 자료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원효와 의적이 입당하여 현장을 찾았다고 하는 이 사전 기록의 학술적 가치는 매우 중요하다. 참고로 이 연표에는 서주(西周), 동진(東晉), 당(唐) 시대부터 1994년 3월까지 옥화사 관련 사항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④ 《옥화사》의 역사인물 편

또 부록의 〈역사인물 택개(擇介, 가려 뽑아 소개함)〉 편에서는 스무 번째로 원효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신라(지금의 조선)승 원효가 의상(주20 참조)과 더불어 입당하여 용삭 원년(661) 옥화사에 있으면서 현장법사로부터 업(業, 학업)을 받고, 본국으로 돌아간 후 법상종을 조선에 처음 전하였다. 그 학(學)은 원측과 더불어 그 주창하는 바도 동격이었으며, 저술이 매우 많아서 알 수 있는 것이 약 40여 부(《동성록》 《의천록》을 보라)로 매우 널리 걸쳐 있고, 현존하는 것이 17부가 있다.

新羅(今朝鮮)僧元曉與義湘 入唐, 于龍朔元年(661)在玉華寺從玄奘法師受業. 回國后首傳法相宗于朝鮮. 其學與圓測同其風氣, 著述極富, 可知者約四十余部(見 《東城錄》 《義天錄》), 所涉極廣, 現存者有十七部(p.147).
이 문장에서 편자가 말하고 있는 ‘원효는 의상과 함께 입당했다’느니 ‘《동성록(東城錄)》 《의천록(義天錄)》을 보라’느니 하는 등으로 보아 현장 당시의 자료들과 더불어 후대의 자료까지 참조하여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2) 일본 자료 《정토삼국불조전집》에 나타나는 원효

① 〈가재전(迦才傳)〉

한편 일본의 성총(聖聰, 1366~1440)이 편찬한 《정토삼국불조전집(淨土三國佛祖傳集)》의 〈가재전(迦才傳)〉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가재 화상은 처음에는 삼론종을 여러 전적으로 배우고 뒤에 정토종으로 돌아왔다. 정토론 삼권을 지어 널리 종문에 홍통시켰다. 이 논에서 이르기를 이 종파는 요로에 스며들어 있다. 이것이 그 증거이다. 드디어 종남산에 이르러 오진사의 원효대사에게 예를 올리고 법을 이어 조사의 지위에 올렸다. 널리 교화를 하고 가람을 세워 홍법사라 했다. 문도는 일천 여인이 머물렀으며 항상 끊이지 않았다. 이에 칙령으로 정토대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迦才和尙者 初三論宗學諸典 後歸淨土宗 而撰淨土論三卷 弘通宗門行勸化 彼論云 此一宗 竊以爲要路 已上 是其證也 遂至終南山 禮悟眞寺元曉大師 嗣法登祖位 普行勸化 建伽藍號弘法寺 門僧一千餘人 共住居 六時不斷 勅諡淨土大師.

즉 《정토삼국불조전집》에서는 원효가 입당하여 종남산 오진사(悟眞寺)에 머물면서 가재(迦才, ?~648? )에게 법을 전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성총(聖聰, 聖冏의 문하)은 무엇을 근거로 원효가 입당했다고 기록한 것일까. 또 무엇을 근거로 원효를 가재의 스승으로 자리매김했을까.

여기에서 그 이론적인 근거를 살펴보면 원효와 가재의 정토교학이 특별히 대비되는 것은 양자의 주저(主著)라고도 할 수 있는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와 《정토론》의 논점이 다음과 같은 점에서 매우 유사한 점을 들 수가 있다.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의         《정토론(淨土論)》의
초술교기종치(初述敎起宗致)와     팔명교흥시절(八明敎興時節)
이정피토소재(二定彼土所在)와     일정토체성(一定土體性)
사현왕생인연(四顯往生因緣)과     삼정왕생인(三定往生因)
오출왕생품수(五出往生品數)와     이정왕생인(二定往生人)
육론왕생난이(六論往生難易)와     칠장서방도솔, 상대교량우열
                                                      (七將西方兜率, 相對校量優劣)
칠작의복제의(七作疑復除疑)와     사출도리(四出道理)및 구교인혼       
                                                        염권진기심(九敎人欣厭勸進其心)

즉 구성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다만 그 내용상 서로 다른 것은 《유심안락도》의 삼명의혹환난(三明疑惑患難)과 《정토론》의 오인성교위증(五引聖敎爲證) 및 육인현득왕생인상모(六引現得往生人相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양자에는 많은 양의 같은 내용, 즉 《유심안락도》의 측면에서 보면 전체의 7분의 1 이상이 《정토론》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만일 《유심안락도》가 원효를 가탁한 작품이라 해도 그것은 원효에 가탁할 만한 사상적 근거가 있었을 것이고, 실제로 원효의 정토사상은 화엄이나 유식에 빠지지 않을 만큼 정미로운 데가 있다. 그러면 성총은 과연 무엇을 근거로 원효가 오진사(悟眞寺)에서 가재에게 법을 전했다고 했던 것일까. 그 《정토삼국불조전집》에서 성총은 다음 페이지의 표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즉 진단삼류(震旦三流)를 정토종의 혈맥으로 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총은 《정토삼국불조전집》에서 자민일류(慈愍一流)의 조사(祖師)의 거의가 종남산과 관계 깊은 데서 이 일류를 ‘종남산정류(終南山正流)’라고도 형용하고 있다. 때문에 자민일류의 원점에 앉힌 원효의 소재를 그 상징이라고도 해야 할 종남산 오진사로 설정한 것은 《정토삼국불조전집》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같은 관점에서 생각하면 ‘원효-가재’의 위상을 사제관계로서 규정하는 것은 입당 결행 때 ‘법상종초전(法相宗初傳)’으로서 원효가 당에서 현장(600~664)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이 기록되어 있는 점, 또 자민(慈愍, 680~748)이 법을 전하기 위해서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귀국하는 개원 7년(719) 이후에도 원효가 중국에서 인정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토삼국불조전집》에 보이는 〈가재전(迦才傳)〉의 원효가 종남산 오진사(悟眞寺)에서 가재에게 법을 전했다고 하는 견해는 보다 구체적인 자료가 요청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일단은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충분히 가능성은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에서의 원효의 경로를 옥화사→장안 일원→오진사→귀국의 길로 추정해볼 수 있는 것이다.

② 종남산 오진사고(終南山 悟眞寺考)

그러면 오진사는 어떠한 곳일까. 종남산 오진사는 일본의 정토교에서는 선도(善導)와 연고가 있는 사원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 양자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자료는 많은 ‘선도전(善導傳)’ 중에서 왕고(王古)의 《신수왕생전(新修往生傳)》(1084년 성립) 중권의 〈선도전〉에 처음 나온 것으로 선도 몰 후 대략 4백 년을 경과하여 출현한 기록이다. 오진사의 기원에 대해서 도선(道宣)은 《속고승전》 권12의 〈수(隋) 종남산오진사석정업전〉에서 수 대의 정업(淨業)에 의해서 창건되었다고 한다. 한편 가재의 《정토론》에는 방계법사(方啓法師)가 현과법사(玄果法師)와 함께 정관 9년(635) 동사(同寺)에서 아미타불을 염(念)했다고 하는 구체적인 사례를 남기고 있다. 석가재(釋迦才)라고 하는 인물이 어떠한 경력의 고승인지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정토론》의 〈왕생인상모장(往生人相貌章)〉은 중국 정토교 사상 중요한 역할을 했던 담란, 도작의 기사를 전하고 있으며, 양전은 사실을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로서 평가되고 있다.
이상과 같은 고찰에서 종남산 오진사는 창건 이래 정토교와 깊은 관계가 있으며, 수당 시대 장안의 정토교 실수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견해가 있어 왔다.

(3) 《판비량론》의 각필(角筆) 자료 검토

《판비량론(判比量論)》은 원효가 55세 때인 671년에 찬술한 논서다. 내용은 인명(因明)이라는 고대 인도 논리학의 형식을 빌려 유식(唯識)의 교설을 논한 것이다. 오타니대학(大谷大學) 소장본은 단간(斷簡) 3매로 전부 105행의 본문과 따로 권말의 회향게 2행 및 이에 이어지는 오서(奧書) 3행을 합쳐 5행뿐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각필 연구의 일인자인 고바야시 호키(小林芳規)가 2003년(平成 15)에 원본을 조사하던 중 묵서(墨書)의 본문의 한자 옆 등에 각필(角筆)로 지면을 움푹 들어가게 하여 써넣은 문자나 여러 가지 부호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1200년대 또는 1300년 이전에 써넣은 요철(凹凸) 문자로 지질(紙質)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알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 《판비량론》의 각필 문자는 한국에서는 현재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랜 것으로, 이 또한 보다 구체적인 연구가 있어야 하기는 하지만 입당 당시에 당나라로부터 도입한 필법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7세기 말에 서사(書寫)된 《금강반야바라밀경》에 간단한 부호가 쓰이고 있던 것이 가장 오랜 각필 문헌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판비량론》의 출현으로 시점을 더욱 소급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중국의 돈황 문헌 중에는 이미 서력 406년에 비구 덕우(德祐)가 서사한 《십송비구바라제목차계본(十誦比丘波羅提木叉戒本)》이 각필 문헌으로서 가장 오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의적(義寂)의 입당

1) 의적의 생애

의적의 생애나 행적을 헤아릴 자료로는 《삼국유사》 제4 〈의상전교〉 조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의상의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되어 있을 뿐이다. 그 밖에 《대각국사 문집》 제16의 〈제금산사적법사문(祭金山寺寂法師文)〉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모년 모월 모일에 구법사문(求法沙門) 모(某=義天)는 삼가 차와 과일을 올리고 엎드려 신라 대법사 고금산사(故金山寺) 적공(寂公)의 영(靈)에 제사지냅니다. 저는 일찍이 해동승전(海東僧傳)을 읽어 법사의 도와 덕과 행과 원을 두루 보았으며(이하 결락)
維年月日 求法沙門某 謹以茶菓之尊饋 祭于新羅大法師故金山寺寂公之靈 日余會讀海東僧傳 俻見法師之道之德之行之願.(以下缺)

위의 글 중 ‘적법사(寂法師)’가 여러 문헌 자료로 보아 의적(義寂)인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 밖에 균여의 《화엄교분기원통초(華嚴敎分記圓通鈔)》 권1에 의적의 이름이 몇 번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중국의 《옥화사(玉華寺)》 자료일 것이다. 여기에서는 분명히 원효와 함께 옥화사로 현장법사를 찾고 있다.

의적(義寂)의 전기는 아마도 신라시대 후대에 활동했던 최치원(崔致遠, 857~?)이 쓴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삼국유사》에 보면 의상의 10대 제자들을 열거하는 가운데 의적이 의상의 제자였다고 하나 현전하는 의적의 저술을 보면 법상종 관계의 저술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로 보아 의적은 아마도 입당 이전에 원효, 의상 등과 함께 화엄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나, 입당 후에는 법상유식을 중심으로 전회했던 것으로 보인다.
 
2) 의적의 행적

(1) 저술

의적의 저술은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있다. 즉 반야 · 법화 · 열반 · 정토 · 미륵 · 유식 · 계율 등 연구 분야가 다양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그의 찬술 목록 가운데 법상 관계만을 일별해 보면 《대승의림(大乘義林)》 12권, 《성유식미상결(成唯識未詳決)》 2권, 《마명생론소(馬鳴生論疏)》 1권, 《미륵상생경료간》 1권, 《백법론총술(百法論總述)》 3권, 《백법론주(百法論注)》 1권 등이다. 특히 《대승의림》 12권과 《유식미상결(唯識未詳決)》 2권 등은 그가 원효와 함께 입당한 후의 법상학(法相學)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인데, 저술이 남아 있지 않아 아쉽기 그지없다.

(2) 법상종 관련 자료

균여(均如, 923~973)는 그의 《원통초(圓通鈔)》에서 의적을 “법상종(法相宗)에서 왔다”고 쓰고 있다. 또 일본의 안넨(安然, ?~884)의 《교시쟁론(敎時諍論)》에서는 현장삼장의 문인(門人)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의적이 입당하여 현장 사문으로서 법상종에 소속된 인물로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본 법상종의 선주(善珠, 723~797)가 지은 《유식의등증명기(唯識義燈增明記)》에는 도증(道證)의 《성유식론요집》에 인용된 《성유식론》의 주요한 해설서 중 하나가 의적의 《성유식론미상결(成唯識論未詳訣)》임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요집(要集)》 6권은 여섯 학자의 이야기를 모아서 하나의 책을 만든 것이다. 첫째는 유설(有說)이고(窺基法師), 둘째는 유석(有釋: 圓測法師), 셋째는 유초(有鈔: 普光法師), 넷째는 유해(有解: 慧觀法師), 다섯째는 유운(有云: 玄範法師), 여섯째는 미상결(未詳決: 義寂法師)이다. 요집 서(瑞)에 이르기를, 「그리하여 자비로운 가르침이 당시에 성행하였는데, 자취를 드러내 글로 만든 사람이 여섯이 있었다. ……분양(汾陽)의 의적(義寂)은 깊게 살펴서 아는 바가 많았다. ……… 적(寂)을 ‘미상(未詳)’으로 이름 붙였다.」라고 하였다.

위의 자료에 의하면 《성유식론요집》에는 기(基), 칙(測), 광(光), 관(觀), 범(範), 적(寂) 등의 《성유식론》에 대한 주석서들이 인용되고 있는데, 이들은 각기 자은사(慈恩寺)의 규기, 서명사(西明寺)의 원칙, 경(京: 長安)의 보광, 아곡(阿曲)의 혜관(慧觀), 산동의 현범(玄範), 분양(汾陽)의 의적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지금의 산시(山西)성에 속하는 분양(汾陽)은 낙양에서 북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으로 근처의 태원(太原)은 측천무후의 고향이었다. 의적이 이곳에 머무른 시기는 현장(玄奘)이 입적한 664년 후로 볼 수 있고, 도증(道證)이 《성유식론미상결》을 인용하면서 ‘분양의 의적’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책이 찬술되었을 때 분양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3) 원효와 의적의 귀국

원효는 661년 7월을 전후하여 의적과 함께 입당했다가 늦어도 10월을 전후하여 혼자서 귀국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10월부터 12월 사이에는 당군과 신라군의 군량 수송작전 문제로 원효는 김유신의 자문에 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옥화사》 자료에서 원효와 동행했던 것으로 알려진 의적은 신라에 귀국한 시기나 귀국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도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균여의 《석화엄교분기원통초》에는 의적과 의상의 문답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의상(義相)과의 대론(對論)이 현재까지 알려진 국내에서의 유일한 행적이다. 의상이 신라에 귀국한 것은 670년이지만 의적이 의상에게 질문한 내용은 의상의 가르침과 《탐현기》의 내용의 차이를 둘러싼 것이었다. 《탐현기》는 법장(法藏)이 신라의 승전(勝詮)이 귀국할 때 자신의 저술들을 의상에게 보냄으로써 신라에 전해지게 되었는데, 편지에 ‘헤어진 지 20여 년(一從分別 二十餘年)’이라고 하였으므로 의상이 귀국한 때로부터 20년이 되는 690년 이후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661년에 원효와 함께 입당한 의적은 늦어도 690년 이전에는 귀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앞에서 소개한 의천의 《대각국사문집》에 보이는 의적 화상을 기리는 제문의 문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문장에 나오는 적공(寂公)은 의적(義寂)을 가리키는 것으로, 의적이 귀국한 후에 금산사에 주석하면서 법상종을 폈을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4. 맺음말

이상으로 원효와 의적의 입당 행적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고려 중기인 1111년에 건립된 〈금산사혜덕왕사비〉의 기록에는, ″당의 문황(文皇)이 신라왕의 표청(表請)에 따라 《유가론》 100권을 보내주니 이로써 응리원실지학(應理圓實之學=法相宗)이 이 땅에 점차 번성하게 되었다. 원효 법사가 앞에서 인도하고 태현대통(太賢大統)이 뒤에서 계승하심에 이르러 등(燈)과 등이 빛을 전하고, 대대로 번성함이 이어졌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국내의 자료로서는 신라 법상종의 형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자료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고려 중기의 대표적 법상종 승려인 소현(韶顯)의 비문에 언급된 것이다.

그렇다면 원효와 의적의 관계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의적은 법상종의 입장에서 법상종의 이론과 신역(新譯)의 유식학 논서들을 주요하게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원효는 신역의 논서들을 거의 활용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함께 현장 문하를 찾기는 했지만, 현장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오랜 기간 당나라에 체류하면서 연찬을 거듭한 의적과, 신라 국내에서 일찍이 원광과 자장으로부터 섭론 계통의 교학 체계를 수학하고 당에서 곧바로 돌아온 원효의 사상적 기반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원효는 섭론 계통의 유식학자이지 법상 계통의 유식학자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법상종(法相宗)의 소의경전인 《해심밀경》 《성유식론》 《유가사지론》에 대한 주석 가운데 원효의 《해심밀경소》 서문이 《동문선》에 수록되어 전하고 《성유식론》이 있었으나 일실되었다. 그리고 《유가사지론》 100권이 현장에 의해 번역이 끝난 것이 648년 5월이다. 신라에서는 국왕이 당 태종에게 요청하여 이 책을 들여왔다. 648년의 일이다. 원효는 이것을 보고 《유가사지론초》 5권과 《유가사지론중실》 4권을 저술했을 것이다. 입당하기 전이다.

그리고 입당한 후 “법상종초전”이라는 《옥화사》의 기록으로 볼 때 원효가 신라의 법상학을 앞에서 이끌었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일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볼 때 원효와 의적이 함께 입당했다는 중국 자료 《옥화사》의 입당설은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사료되는 것이다. ■

 

이광준 / 재일불교학자. 동국대 졸업, 일본 고마자와(駒澤)대학 심리학박사. 한림성심대학 교수,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외국인 연구원(교수), 하나조노(花園)대학 연구원 등 역임. 《카운셀링에 있어서의 선심리학적 연구》 외 다수의 저 · 역서가 있음. 현재 류코구(龍谷)대학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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