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고령화 사회와 불교 : 4인의 불자(佛子), 늙음을 돌아보다-우바새

내가 이런 글을 청탁받을 줄 몰랐다. ‘늙음을 돌아보다’라니! 나에게 이 글을 쓰라는 것은 내가 이미 늙어 가고 있다는 객관적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겠다.

나는 그동안 《청춘은 아름다워라》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글을 즐겨 읽고 또 조사(祖師) 어록이나 유교 경전 또는 서양철학서만 독서해 왔다.

그런 책들은 늙음이 주가 아니라 항상 현재의 내가 중심이 되었다. ‘깨친다[覺]’라든지, 성인이 된다든지, 형이상학적 영혼이라든지 이것은 도무지 늙음과 관계없는 것이다. 그런 개념들은 항상 ‘지금’ 현존재에 있는 것이다. 그들의 글이 수백 년 전에 쓰였다 하더라도 그 글 속에는 수백 년 전의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읽는 나의 것이기 때문에 옛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늙음을 잘 몰랐다. 그러나 이제 ‘늙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라는 글을 받고 보니 진정 나는 정신적으로는 항상 ‘지금’에 살고 있지만, 생물학적 육체는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확실히 생(生) · 노(老) · 병(病) · 사(死)가 있는 것이다.

우리 집 앞마당에 가을 장미가 두 그루 있다. 며칠 전부터 분홍색 장미꽃이 피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스무 송이도 넘는 꽃이 피었다. 그 꽃잎이 피는 것이 한 번에 피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을 두고 피었다. 다 핀 꽃잎들을 보니 한 번에 핀 것 같지만, 그들도 순서에 따라 피었다. 며칠 전에는 비바람이 몹시 불었다. 분홍색 장미꽃들의 잎이 잔디 위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 장미꽃잎이 많이 떨어졌다. 그런데 그 장미꽃잎이 다 떨어진 것이 있고 어떤 것은 아직 많이 남은 장미꽃잎이 있다. 필 때는 순서가 있었지만 질 때는 순서가 없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사람도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죽을 때는 순서가 없다고…… 그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장미꽃이 피고 지는 것처럼…….

우리는 가끔 정신과 육체를 말한다. 육체는 유한하지만 정신, 즉 영혼은 무한하고 영원하다고 한다. 모든 종교는 육체는 유한하더라도 영혼은 영원하다고 믿으라고 가르친다. 기독교에서는 영혼이 하느님의 나라로 갈 수 있고 육체도 하늘나라에서 함께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죽은 시신을 화장하지 않고 매장한다. 불교에서는 육체는 고(苦)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고 오직 마음만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육체는 죽으면 화장하고 마음만 깨달으면 된다고 가르친다. 어떤 것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다. 기독교를 선택한 사람은 육체와 영혼이 하늘나라로 갈 수 있다고 믿으면 되고, 불교를 믿는 사람은 영혼인 마음을 자신이 깨치면 되는 것이다. 유교에서는 육체는 부모로부터 받은 유산이기에 훼손하지 않아야 하고 죽으면 혼이 육체와 얼마 동안 같이 있기 때문에 화장하지 않고 매장을 한다. 그리고 삼년상을 지내면서 부모를 모신다. 육체도 혼도 영원한 것은 아니더라도, 조상의 역사와 그들의 유훈을 지키기 위하여 제사를 모신다. 그러기에 자손의 연속이 그들의 의무인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마음만 깨치면 되고 깨치지 못하면 마음과 육체가 윤회한다고 본다. 기독교는 살아 있는 동안 하느님을 믿어 영원한 평화의 나라 하느님 옆으로 가기를 갈망한다.

어느 종교도 육체를 가벼이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육체와 더불어 정신을 함께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는 구조다.

나 스스로 늙음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나의 늙음은 나의 젊음을 추억하지 않으면 비교가 안 될 것이다. 내가 젊었을 때 나의 육체와 정신을 상기해본다.

젊었을 때 나는 죽음을 실감하지 않았다. 그러나 팔순을 바라보는 어느 때부터인가 죽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 몸이 옛날같이 건강하지 않음을 깨닫고, 기억력이 흐려지고, 말을 할 때 적절한 단어가 순발력 있게 튀어나오지 않음을 자각할 때부터이다.

등산도 잘하고 몇 시간을 걷더라도 피로하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인가 허리가 아프고 관절이 좋지 않음을 느낄 때, 아! 이것이 늙음에 이르는 징조임을 깨닫게 된다. 늙음은 서서히 죽음의 문턱에 도달한다.
육체와 정신 또는 마음의 이원론적(二元論的) 견해는 육체가 중심이라는 견해와 마음이 중심이란 견해가 뚜렷하게 구별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본 나의 인생은 육체도 마음만큼 중요하고 마음도 육체만큼 중요한 상관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뜻은 육체의 퇴화한 부분은 바꾸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의료기술과 신약이 발명되었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치유는 될 수 없고 한계가 있다. 그러나 마음은 녹슬지 않고 영원할 수 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고 형상이 없어서 나의 의지로 자유자재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는 시간, 공간에 변화되지만 마음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도 착각이라 생각한다. 물론 특수한 사람은 마음으로 육체를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육체가 젊었을 때 마음의 훈련을 지속적으로 잘 훈련된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지, 보통 사람은 육체와 마음이 비례해 간다. 더구나 나이가 들어 늙어지면 그것은 확연히 드러난다. 육체가 늙으면 마음도 늙어진다. 그러나 육체는 한정되고 제한적이지만 마음은 자유자재로운 본성이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수련이 쌓이면 어느 정도 육체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극한에 도달하면 마음도 그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어떻든 나는 육체는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요 고통의 원산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연령과 관계있다고 생각한다. 한창때인 청장년은 육체를 잘 조절하여야 한다.

그래서 육체의 정욕을 극복해야 함은 틀림없다. 그러나 노년에 들어서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사람은 육체 자체를 잘 조절하여 훼손됨이 없어야 마음의 활동도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이 말한 ‘육체는 영혼의 무덤’이라는 생각은 이런 뜻에서 육체가 영혼의 무덤이 되지 않도록 잘 조절하라는 뜻일 것이다.
늙어간다는 것은 마냥 복고적이고 회한에 차서 쓸쓸해하고 허무하고 외로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 평화로운 안정이 있다. 서정주 시인이 〈국화 옆에서〉에서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세월이 지나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하였듯이 국화꽃같이 조용하고 품위 있는 늙음의 멋도 있다.

참으로 늙음이란 아름답고 정조가 있다. 어깨가 축 늘어지고 걸음걸이가 늦어지는 것만 늙음이 아니다. 그렇다고 늙지 않은 것처럼 젊음을 뽐내는 것도 보기 싫다. 늙으면 늙는 대로 그에 응하는 멋이 있다.
우선 젊어서 소홀했던 가족과 친구를 챙기고 생각하는 여유가 생긴다. 또한 살아온 세월과 살아갈 세월을 관조한다. 젊었을 때의 살아온 세월은 흥분과 좌절이 섞여 있지만 늙어서 생각하는 젊음의 추억은 가을날 햇볕을 쬐면서 잔잔히 미소 짓듯이 상념의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늙으면 젊어서 하고 싶었던 것을 하지 못하고 이루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말한다. 나는 늙으면서 후회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본다. 후회한다는 것은 원하는 것을 다시 할 수 없을 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후회할 것이 아니라 그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최선이었다고 생각하고 마침표를 찍어야, 늙음의 아름다움이라 생각한다.

젊었을 때의 열정과 열망은 늙으면서 자연히 관조와 관용으로 바뀌는 것 같다. 어떤 말을 들어도 상대편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고,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라고 수용하는 태도도 늙음의 시초이다.

늙으면 계율이 없어진다. 젊었을 때는 계율을 지켜야 한다고 해서 지키려고 애쓰지만, 늙으면 몸으로 짓는 계율은 조금만 노력하면 저절로 지켜지고, 입으로 짓는 업도 줄어지고 뜻으로 짓는 것도 적어진다. 따라서 신(身), 구(口), 의(意)가 저절로 청정(淸淨)해진다.

물론 여기서 ‘저절로’라는 말은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서 이루어진 상태를 말한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나이가 들면 품위가 있어야 한다.

다산(茶山) 선생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늙어서 머리가 하얗게 되는 것은 여러 사람들 가운데 눈에 잘 보여서 구별하기 쉽게 하기 위함이요, 귀가 잘 안 들리는 것은 큰 소리만 들으라는 뜻이다. 눈이 잘 안 보이는 것은 확실한 것만 보라는 의미이다.”라고 말했다.

늙는다고 마음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늙을수록 의식의 끈을 놓지 않고 어제와 똑같이 살아야 한다고 본다. 화두를 들든 염불을 하든 사경을 하든 죽는 순간까지 놓지 말아야 한다.

불자여, 불자여! 늙음 속에 늙지 않음이 있으니 화두, 염불, 사경으로 마음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

 

송석구 / 삼성꿈장학재단 이사장. 동국대학교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박사). 동국대학교 교수, 동국대학교 총장,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장 등 역임. 주요 저서로 《송석구 교수의 불교와 유교 강의》 《송석구 교수의 율곡 철학 강의》 《대통합》 《진리와 실천》 《바람이 움직이는가 깃발이 움직이는가》 등 다수가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