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문헌학 연구의 전범을 제시하다

1. 생애

장봉(壯峰) 김지견(金知見, 1931~2001)

장봉(壯峰) 김지견(金知見) 선생은 1931년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출생하였다. 어렸을 때는 전담 훈장을 통해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한국전쟁 당시 군에 입대하여 제대한 후 출가하였다. 김지견은 1952년 선암사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하여 1953년에 석호(石虎, 西翁 대종사의 법명)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법명은 우진(雨震)이다. 그 뒤 동산(東山) 조실이 지도하는 범어사 금어선원(金魚禪院)에서 안거를 시작하였다.

이때 김지견의 학문적 재능이 발휘되었다. 예를 들어 《금강경오가해》에 나오는 글자 한 자의 차이에 대해서 금어선원의 선승들과 토론했을 때, 동산 조실이 김지견의 해석에 손을 든 것을 비롯해 여러 실화가 전해진다. 어렸을 때부터 한학을 배웠던 것이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범어사 하안거 후 바랑을 메고 훌쩍 떠났다. 승려 생활은 짧았지만, 그간에 현대 한국불교를 이끌어가던 서옹 대종사, 범어사 동산 조실 외에도 탄허 스님, 효봉 스님, 만암 스님과의 인연 등 선승과 학승들과의 인연은 이후 김지견의 학문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1960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1963년 동국대학교에서 〈혜능의 사상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김지견은 이듬해 일본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學)으로 유학의 길에 올랐다. 1967년에 고마자와대학을 수료한 그는 그해 도쿄대학 나카무라 하지메(中村 元)의 추천으로 도쿄대학 인도철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이후 연구에 매진하여 1970년에는 일본인도학불교학회상을 수상하였고, 1973년에 《신라화엄사상의 연구》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불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모교인 동국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김지견의 귀국 시에 일본에서 거대한 환송회가 열렸으니 일본에서도 향후 학문적 성과를 상당히 기대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76년, 동국대학교를 떠나 7여 년간 재야에 머물렀다. 재야에 있는 동안에도 대한전통불교연구원을 설립하여(1976년) 연구 활동을 지속했으며, 이후 1983년 강원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부임하고, 1989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철학종교실 교수로 부임하여 1997년 정년을 맞이하였다. 정년 이후에도 일본국제문화연구센터 객원교수, 도쿄대 인문사회계연구과 객원교수를 역임하다 2001년 도쿄 신주쿠(新宿)에 있는 일련종(日蓮宗) 상원사(常圓寺)에서 71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김지견의 학문적 관심은 한국의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한국불교 문헌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것이었으며, 한편으로 현대의 대중에게 불교를 널리 알리는 것도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다. 이 글에서는 학문적 연구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하려고 한다.  

2. 문헌의 발굴과 간행

김지견의 업적으로 중요한 문헌을 발굴하거나 간행하여 학술연구가 촉진되도록 노력한 것을 들 수 있다. 간행한 문헌은 한국불교의 고문헌 등을 포함한 중요한 연구 문헌을 발굴 집성한 것이 많은데 그 가운데 중요한 업적을 소개하고자 한다.
 
1) 화엄 관련 문헌

첫째, 지눌 《화엄론절요》의 간행이다. 김지견은 도쿄대학 재학 시인 1968년 고려 보조지눌의 《화엄론절요》를 일본 가나자와문고(金澤文庫)에서 발굴하여 도쿄대학 문학부에서 영인판을 냈다. 이 문헌에 대해서는 이미 이종익(李鍾益)이 다이쇼대학(大正大學) 재학 중인 1941년에 발견하여 《불교신지(佛敎新誌)》 제36호(1942년 3월호)에 〈고려보조국사 화엄론의 발견(高麗普照國師 華嚴論の發見)〉이란 제목으로 발표까지 했던 것이다. 이종익은 이를 필사하여 보존하고, 한 본은 송광사에 증정했다. 김지견이 재발견 당시 이종익의 발견 사실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김지견 역시 동국대, 서울대, 송광사, 역경원의 탄허 선사에게 각 1부를 증정했다. 이종익이 말했듯이 이를 학계에 보급한 데에 김지견의 공헌이 있는 것이다. 이후 《화엄론절요》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본격적인 연구가 가능해졌다.

둘째, 1977년에 당시 해인사 방장 성철 노사의 배려로 해인사에서 균여 저술을 영인하여 《균여대사 화엄학 전서》를 간행하였다. 이 간행은 단순히 영인이 아니라 10여 년에 걸쳐 일일이 두주(頭註)를 붙였다는 것에 의의가 있는데, 현재 간행된 《균여대사 화엄학전서》에서 두주와 현토(懸吐)를 확인할 수 있다. 지금처럼 검색 가능한 텍스트가 있는 것도 아닌 당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얻어진 해제는 그것 자체로 연구논문이다. 

《균여대사 화엄학 전서》(이하 《전서》로 표기함)는 일본에서 한국불교의 관심을 증폭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첫째, 법장의 《화엄일승교분기》의 텍스트 문제가 급속히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1978년 고마자와대학의 요시즈 요시히데(吉津宜英)의 텍스트 문제에 대한 연구발표를 거쳐, 1983년 가마타 시게오(鎌田茂雄)의 《화엄학 연구 자료집성》에 텍스트 문제가 정리되었다. 균여의 《석화엄교분기원통초》는 1940년 이전에도 일본에서 간행된 적이 있지만, 그 부수가 아주 적어서 연구자들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전서》 간행을 계기로 역시 가마타 시게오가 중심이 되어 그 주석적 연구가 1981년부터 시작하여 1991년 제8권까지 간행되었다. 이 주석적 연구는 한두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30여 명의 학자가 참여했고, 당시 유학생이었던 이평래, 장휘옥도 합류하였다. 그만큼 《전서》의 간행은 일본의 화엄학 연구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문헌의 간행이 갖는 힘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전서》 간행을 계기로 한국에서도 1983년에 김두진의 《균여 화엄사상 연구》가 간행되었고, 김지견의 지도로 1998년과 1999년에 서울대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최연식과 김천학이 균여 화엄사상 연구로 각각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김두진은 《석화엄교분기원통초》 전 10권에 대한 번역을 완성하여 한글대장경으로 간행하였다.

또한 균여의 《일승법계도원통기》에 대한 번역도 가마타 시게오가 1977, 78, 79년 3년에 걸쳐 완성하여 《조선화엄사상사의 연구(朝鮮華嚴思想史の硏究)》로 간행되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최연식에 의해 2010년에 역주가 완성되었다. 이와 같이 일본과 한국에서의 균여 연구는 《전서》의 간행에 힘입은 바 크다.
부언할 것은 김지견은 고마자와대학에 있던 균여 저술을 이미 열람하고 있었다. 그 연구를 계기로 1973년에 교주 《법계도원통기》를 발표하였고, 교주의 해제에는 균여의 저술과 생애, 각 저술에서 새로 발견된 자료, 향가와 40권 《화엄경》의 관련 등을 간략히 서술하여, 1977년 간행을 위한 사전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김지견은 1973년의 학위논문에 《법계도원통기》의 번역을 수록하였지만 미간이다. 미간의 원고로, 1998년 사토 아츠시(佐藤厚)에 의한 주석적 번역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 특히, 사토 아츠시는 1995년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까지 찾아와 의상계의 화엄을 배운 장본인으로 1998년의 박사학위 논문에 수록하였는데, 김지견의 영향하에 일본에서도 젊은 균여 연구자가 나온 것이다. 

셋째 《법계도기총수록》의 간행을 들 수 있다. 그동안 대정신수대장경에 의거하던 《법계도총수록》 연구에 대해서, 1988년에 《법계도기총수록》의 해인사 판본을 영인하고 활자화하여 현토를 붙여 간행하였다. 필자의 기억으로 당시 김지견은 운허 스님을 찾아가 현토를 부탁드렸다고 한다. 이것은 《총수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김지견의 지도를 받았던 해주 스님의 연구도 이러한 작업에 촉발되었으리라 생각되며, 최근에 《총수록》을 주석하여 간행하였다.

넷째, 1983년에 김시습 《대화엄일승법계도주병서》에 대한 강의를 들 수 있다. 이 책은 김시습의 저술 가운데서 《대화엄일승법계도주병서》를 번역하고 주석한 대작으로 김시습의 불교사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선사로서 김시습의 면목이 발휘된 저서로, 선어록이 그렇듯이 구어 및 속어가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들을 일일이 주석으로 설명하고 철학적 입장까지 덧붙임으로써 후학들에 큰 지침이 되었다. 이와 아울러 조명기 박사가 비장하고 있었던 《화엄석제》와 도봉유문의 《법성게과주》를 함께 활자화하여 소개하였다. 부록으로 김시습 전기에 대한 해설이 있으며, 화엄과 선에 관계에 대한 논문은 의상계 화엄사상을 성기사상으로 해석하는 초석이 된 역작이다. 그리고 텍스트에 대한 문헌학적 소개를 덧붙임으로써 이를 통해 의상계 화엄사상이 지속적으로 연구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의 영향으로 김시습을 연구하는 사례가 단편적으로 있었으나, 2015년에 김시습의 불교 저술 전부를 탐구하는 박사학위 논문이 나오면서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일승법계도합시일인》을 들 수 있다. 그동안 대정신수대장경 제45권에 실린 《화엄일승법계도》를 대상으로 한 번역이 있었지만, 《법계도기총수록》에 실린 원문과 비교할 때 후자 쪽이 선본임을 확인한 후 《총수록》을 저본으로 하여 역주 작업을 한 최초의 주석서라는 데 이 책의 의의가 있다. 이것은 1993년 대한전통불교연구원에서 강의 자료의 일환으로 《화엄일승법계도기》라는 책으로 출간된 바 있다. 그 자료에는 주석과 함께 한 · 중 · 일의 주석서를 함께 자료로써 전재하였는데, 후에 그 가운데 주석만을 뽑아서 별도로 간행한 책이다. 제목이 《화엄일승법계도기》에서 《일승법계도합시일인》으로 바뀐 데에는 균여의 《법계도원통기》에 그렇게 되어 있고, 그것이 《법계도》의 원래 제목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기존의 《화엄일승법계도》를 토대로 한 번역의 오류를 지적했을 뿐 아니라, 양 본을 교감하여 대조표와 교감을 제시한 점에서도 한국불교 문헌학의 모범적인 연구 방법을 보였다는 데서 선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법계도》를 활용할 때 《총수록》 본의 중요성이 학계에 인지되었으며, 대조표 등의 방법론을 통한 문헌학적 연구는 해주 스님이 중심이 되어 2007년 의상의 전 저술을 교감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2) 선 관련 문헌

김지견은 동국대학교에서 육조혜능을 전공하였고 출가 생활을 경험했기 때문에, 선에 대한 관심과 식견이 남달랐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육조단경》에 관해서 석사논문을 썼고, 고마자와대학에서도 선학과에 입학하였다. 김지견의 선에 대한 관심은 기본적으로 문헌학적 관심이 우선이었다.

1989년에 발표한 《육조단경》에 대한 논문은 다양한 텍스트를 고찰하면서 향후 연구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으로 평소의 관심을 잘 보여준다. 이 논문은 1989년 뒤에서 설명할 대한전통불교연구원 주최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이며, 그때 〈교주 돈황육조단경(校注 敦煌六祖壇經)〉도 함께 발표하였다. 화엄 문헌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선에 대해서 문헌학적 연구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일본 연구 학풍의 영향이다. 선 관련 문헌의 두 가지 중요한 업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1987년 《조당집 병 논집(祖堂集 幷 論集)》의 간행이다. 《조당집》에 대해서는 이미 일본에서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이 줄곧 연구해왔고, 한국에서도 1986년에 국역이 완성되지만, 김지견의 평소 20여년 관심의 결과를 해인사 소장 원본과 중국어, 일어, 불어 논집과 함께 호적(胡適)의 편지와 서여(西餘) 민영규(閔泳珪) 선생의 회고담도 수록하여 이후 《조당집》 연구가 활성화되도록 하였다는 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둘째, 1994년에 각안범해본(覺岸梵海本) 《사산비명주(四山碑銘註)》를 영인하여 간행한 것이다. 또한 간행하면서 석전(石顚)이 필사한 《정주사산비명(精註四山碑銘)》의 존재를 발굴한 기록과 함께 석전의 〈사산비명주해연기〉를 번역하였다. 이 책에서는 그동안의 사산비명 번역 오류 등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 책의 간행 이후 세간에 사산비명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었다. 이후 2009년에 혜남 스님이 《정주사산비명(精註四山碑銘)》을 공개하고, 2012년에는 동국대 중앙도서관에 전시되기도 하였다. 현재도 사산비명에 대해서도 본격적 연구가 시작되는 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선구적 문헌 발굴과 간행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김지견의 학문적 태도가 문헌학적인 토대 위에서 시작되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이다. 

  3. 한국불교 계보학의 정립

문헌의 발굴과 간행이라는 문헌학적 토대 위에서 한국불교학의 계보를 정립하는 것이 김지견 평생의 과제였다. 이와 같은 목표는 국제불교학술교류를 통해 실현되었다. 김지견의 화갑논총에는 당시 동국대학교 총장이었던 민병천 박사가 김지견에 대해서 문화외교를 한 민간 외교관이라 평한 축사가 있다. 당시는 한일외교관계가 성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상호 간의 이해가 깊지 않은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김지견은 1976년 대한전통불교연구원을 설립하여 국제불교학술교류를 추진하였고, 12회에 걸쳐 한국불교와 관련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연구원 차원이라고는 해도 사실상 혼자서 추진한 국제학술대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제5회 대회가 열릴 때까지 김지견은 재야에 있었으니 그 조직 능력과 한국불교 연구를 부흥시키려는 서원은 놀랄 만하다.

대한전통불교연구원은 한국인의 학술적 연구와 현대적 포교를 모색하며, 한국불교의 계보학(系譜學)을 정립한다는 목표를 세우면서 출발하였다. 김지견은 설립 취지에 걸맞게 생애 동안 12회에 걸쳐 인물 또는 주제를 선택, 일본 및 중국과 서양의 불교학자들을 초청하여 한국불교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첫 대회는 ‘균여 대사의 화엄사상’이 주제로서 1977년 《균여대사 화엄학전서》를 간행한 것을 계기로 균여 화엄사상을 재조명하기 위해 본인을 비롯하여 한 · 미 · 중 · 일 4개국 학자 10명을 초청하여 개최한 국제학술대회였다.

 

김지견 편주 《균여대사화엄학전서》(1977). 오른쪽은 책의 본문 사진.

김지견은 균여에 대해서 “나말여초의 혼란한 사회배경 속에서 빛을 잃어가던 불교를 사상적으로 통일시키고 불교 대중화에 앞장선 위대한 사상가”라고 평하였다. 이 대회는 한국불교 계보학을 정립해 나가는 첫발이라는 데서 의의가 크다. 제2회 대회는 원효가 주제였다. 일본, 대만 학자를 초청하여 3국의 학자가 모여, 원효의 《열반종요》 《판비량론》 《이장의》 《기신론소》와 정토사상 등을 발표하여 최초로 원효사상을 종합하려고 시도하였다는 데서 의의가 있다. 제3회 대회는 회의장을 일본 류코쿠대학(龍谷大學)으로 옮겨 의상을 주제로 열렸다. 이때는 의상과 법장, 의상과 지엄, 그리고 균여 · 설잠 등이 본 의상 등 의상의 사상뿐 아니라 의상의 신앙 등 의상의 제 문제를 다루었다. 제4회 대회는 최치원과 관련하여 화엄사상과 선문의 관계를 주제로 열렸다. 제5회 대회는 ‘아시아 불교의 원(源)과 유(流)’를 주제로 대만의 불광산에서 개최되었다.

이렇게 추진한 국제학술대회는 1996년까지 12회까지 개최하였다. 다루어진 인물은 제1회 균여를 비롯하여 제2회 원효, 제3회 의상, 제4회 최치원, 제6회 지눌, 제7회 서산, 제8회 김시습, 제12회 도선 등이며, 주제는 제5회 ‘아시아 불교의 원과 유’를 포함하여, 제9회 《육조단경》 제10회 동아시아에서의 화엄의 위상, 제11회 나 · 당불교의 재조명이었다. 중간에 제2회 원효학술대회를 확대하여 1987년에 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2회의 학술대회는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첫째, 영세한 한국불교계를 국제적인 무대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였다. 주제가 화엄과 선에 집약되었다는 점이 있지만, 이 두 분야를 전공하는 일본, 중국, 대만, 미국 등의 학자들이 꾸준히 참가하면서 한국불교를 연구해왔다는 점에서 한국불교의 위상이 높아졌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한국불교의 독자성, 한국불교의 의의와 지위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매회 새로운 주제였기 때문에 발표자들은 새로운 연구가 필요했다. 따라서 한국불교를 깊이 있게 연구하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한국불교의 독자성이 국제적으로 인지되었다. 셋째, 연구원의 창립 목적이었던 한국불교학의 계보학이 정립되어 갔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화엄은 화엄대로의 사상의 계보가 전승되고 있고, 선은 선대로 화엄과 밀접히 관련 있는 계보가 전승되었음을 통찰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서 아직 완성형은 아니지만, 한국불교가 중국불교의 아류가 아니라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했음을 정립해 갈 수 있었다.     

12회의 국제학술대회는 제6회 때부터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그와 함께 연구원 간행물로서 앞에서 언급한 문헌들 외에 《경허화상행장(鏡虛和尙行狀)》 《매월당법계도주병서》 《화엄일승법계도기》 등의 자료를 현토 내지는 주석하여 간행하였다. 이와 같은 연구서 간행은 이후 한국불교 연구에 큰 힘이 되었으며, 김지견의 원력이었던 한국불교의 계보를 정립하기 위한 일환이었음은 첨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4. 의상계 화엄 연구-성기사상의 창출

김지견 본인의 연구로서 학술적으로 평가받고 후학들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친 것은 의상계 화엄학의 연구일 것이다. 의상계 화엄 연구 가운데 중요한 학술적 공헌은 첫째, 신라 화엄을 주류와 비주류로 나눈 점이다. 이 연구가 발표되기 전까지 신라 화엄은 원효를 중심으로 이해되었는데, 의상계 화엄이 주류를 차지하고 원효계 화엄이 비주류라는 논지로써 이후 학계의 반향을 일으켜 신라 화엄을 계통별로 정리하려는 연구의 선구가 되었다. 김지견의 이와 같은 시도 역시 한국불교에 대한 계보학적 관심의 표명이었다. 이후 김상현이 원효계, 법장계로 신라 화엄을 분류했다. 한편, 김복순은 중대의 경우 부석사계와 황룡사계로 구분하고, 하대는 의상계가 다시 부석사계, 표훈계, 해인사계로 분파되었다고 보았다. 이후 신라 화엄학의 계보는 대체로 김복순의 틀을 견지하는데, 그 시발점은 김지견의 탁견에 의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 의상의 법휘(法諱)를 확정하려는 작업이다. 의상은 일반적으로 ‘의상(義湘)’으로 표기되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김지견은 1988년에 ‘의상(義相)’이 본휘라는 주장을 하였다. 이와 같은 추구는 단순히 명칭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스스로 ‘상’ 자가 되어야 “부석종이 중국 화엄의 일부분에 그치지 않고 해동화엄으로서 독자성을 표방할 수 있는 소이인 것이다”라고 표현하듯이 중국 화엄, 즉 좁게는 법장의 화엄종과 구별되는 한국 화엄만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왜 그러한 생각을 했을까. 이에 대해서 김지견의 논문을 통해 음미하고자 한다. 그것은 의상이 중국 유학 시절에 스승인 지엄이 의상에게는 의지(義持)라는 법호를 법장에게는 문지(文持)라는 법호를 주었다는 전승에서 비롯되었다며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문(文)이 언어적 표상 그것인 데 반하여 의(義)는 그것이 전달하는 내포로서의 소식 곧 소전의 의리이다. 뿐만 아니라 법호에 있어서 위와 같은 대비는 양인의 법휘에 있어서도 나타나 있다. 불교의 일반적 터미놀로지에 따르면 법은 존재 자체 또는 진리성을 의는 존재의 현재(顯在), 또는 작용으로서의 의리(arthā)를 각각 표상한다. 그리고 장은 잠세태를 가리킴에 대하여 상은 현현된 본질현상으로서의 현실태를 가리킨다.  

이와 같은 김지견의 해석은 의상의 화엄사상에 대한 해석과도 밀접히 관련된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한편 이와 같은 김지견의 주장이 수용되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현재 한국불교계에서는 의상(義相)으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의상계의 화엄사상을 성기사상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김지견은 1973년 논문에서 화엄적 세계관의 근본적 구상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해인삼매를 의상 화엄의 특징으로 든다. 해인삼매의 해인은 바다에 모든 사물이 비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김지견은 이때의 해인삼매는 세계가 정적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세계가 자신을 열어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언급에 훗날 주장하는 성기사상의 연원이 있다. 이후 1983년에 간행한 김시습의 《대화엄일승법계도주병서-김시습의 선과 화엄》에서 성기사상을 처음 언급했다. 이 책의 부록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성기’의 ‘성(性)’은 법성의 ‘성’과 같은 의미이다. 그때의 ‘성’은 본래성이며 개념 규정을 떠나있는 무규정적인 화엄의 존재세계 자체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존재세계가 본래성에 있어서 무규정적이라 함은 주검과 같은 정지를 의미하지 않는다. 본래성은 바로 현현이요 현현이 다름아닌 본래성으로서 스스로 현현하는 것이다. 이것을 화엄에서 성기자연-〈저절로 그러한 것〉이라고 한다. 설잠이 의상의 법성게 30구의 본의가 요컨대는 법성이요 법성은 바로 수연이라고 함은 이것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김지견의 언설은 김시습의 《대화엄일승법계도주병서》 원문을 강의하면서 이미 드러난다. 즉, 〈무연선교착여의(無緣善巧捉如意)〉에 대해서 김시습이 ‘진여성연기지무연(眞如性緣起之無緣)’이라고 해석한 것에 대해서 “‘본래 그러한 것: 성(性)’이 ‘그러한 것: 기(起)’일 뿐이다고 한다.”라고 풀이한다. 그리고 부연하여 “성기(性起)는 성이 바로 기(起)이고, 그 기(起)가 성인 것으로서의 자기(自起)인 것이므로”라고 표현한다. 한편, 논문에서는 “법계 자체, 바꾸어 말하면 향내적인 부처의 경계에서만 성기의 세계는 참다운 모습을 드러낸다.”고 성기사상의 발현이 부처의 세계에 속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지눌이 법계도 자체를 해인정 속에 현현한 자내증의 세계를 표상한 것으로 이해하였다고 보며, 이런 점에서 김시습과 지눌이 의상의 사상에 대해서 같은 생각을 하였다고 이해한다. 김지견은 “지눌이 그렇듯이 설잠에게 있어 화엄의 성기법계와 선체험은 근원적으로 상의관계였다.”고 하듯이 본 논문에서 지눌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면서, 김시습의 사상과 동일화시키고 있다.

성기와 대비되는 세계는 연기이다. 성기의 차원이 무규정적이어서 이미 모든 존재도 비존재도 아닌 반면에, 실체화하는 순간 연기의 차원으로 전락한다고 보며, 나아가 연기적 차원의 불경계가 부처를 이해하는 측면이라면, ‘법성이 그러한 것’으로서의 불경계는 성기적 의미에서 견불, 견성의 입장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지견은 김시습의 성기는 다만 불경계가 아니라 중생의 신심본체로서의 존재 세계이므로, 망상의 일념은 동시에 성기의 장으로서 구성된 일념이라고도 하며, 현재의 일념 구조에 법계가 현현하는 비밀의 구조가 있다고 평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의상에서 비롯된 해동화엄의 전통과 특색을 논한다는 것은 시기상조가 아닐 수 없다. 중국의 화엄이 두순과 지엄을 거쳐 의상에게 이어졌을 때, 그것은 해인삼매의 실천에 의하여 법계의 비로(毘盧)가 그대로 현현하는 진면목의 성기이었고, 그래서 실천적 종교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김지견의 성기사상은 김시습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지눌을 염두에 두고 화엄과 선의 상의를 주장하는 가운데서 발휘되며, 중국의 두순-지엄-이통현, 해동의 의상-의상계의 전통-지눌-김시습의 성기사상을 동일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법장과 징관의 사상은 성기라고 하더라도 체계화된 철학이라고 단언하며 의상계의 성기사상과 구별한다. 다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연기적 차원을 성기적 차원보다 낮게 평가하면서도, 연기적 차원이 동시에 성기적 차원임도 부정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의상계통의 화엄사상을 계보학적으로 성기사상에 귀속시키는 김지견의 견해는 이후 상당한 영향을 미치면서 후학들에게 수용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원광대의 정순일 교수와 동국대의 해주 스님이다. 김지견은 지엄과 의상을 같은 성기사상으로 보았는데, 정순일의 논문은 《화엄성기사상사 연구-중국 화엄종을 중심으로》(1988) 전자를 계승했고, 해주 스님은 《신라 의상의 화엄교학 연구-일승법계도의 성기사상》(1989)에서 후자를 계승하여 각각 박사 논문을 완성하였다. 둘 다 김지견의 강의를 듣고 감화된 바가 있었을 것이다. 이후 ‘성기사상’은 한국불교 연구에서 중요한 주제의 하나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근에 이와 같은 의상 및 의상계의 ‘성기사상’ 이해에 대해서, 지눌을 통한 의상 및 의상계통의 성기 사상에 대한 이해라는 의문을 제기한 연구가 개진되어 ‘성기사상’에 대해서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필자가 이 논란에 참가할 의도는 없지만, 김지견은 의상의 해인삼매와 해인삼매의 현재화에 주목했고, 이것을 김시습과 지눌을 통해 성기적 사상으로 정립하려고 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일본 불교학계에서 의상 및 의상계의 사상을 성기사상으로 규정하는 연구가 없다는 것과 아울러서 향후 깊은 논의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김지견이 의상계 연구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의상의 사상을 특별히 중시한 것도 있지만, 큰 틀에서는 한국불교학의 계보학을 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의상계 사상에 대해서는 ‘성기사상’이라는 사상적 계보를 계승한다는 점을 밝히려고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김지견은 문헌학적인 기초 위에서 불교사상을 밝히려고 했고, 그러한 연후에 한국불교의 계보가 정립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한국불교의 계보를 정립한다는 것은 한국불교의 독자성을 찾으려고 시도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한국불교의 독자성을 밝히기 위해 어려운 환경 속에서 혼자의 힘으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였고, 선과 화엄에 집중해서 문헌 발굴뿐 아니라 동시에 문헌에 대한 기초 연구를 지향했던 김지견은 한국불교 문헌학의 선구적인 학자였다. ■

 

김천학 /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HK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균여의 화엄일승의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소장 역임. 주요 논문으로 〈종밀에 미친 원효의 사상적 영향-《대승기신론소》를 중심으로〉 등과 저서로 《헤이안기 화엄사상의 연구》(일어), 《균여 화엄사상연구》 등이 있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 한국불교융합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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