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칭기즈칸이 몽골을 통일하기 이전까지 몽골은 전통적인 샤머니즘(shamanism)과 함께 불교, 이슬람교, 배화교(拜火敎) 등 다양한 외래 종교가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몽골 학자들은 몽골불교의 역사를 기원전 흉노(匈奴) 시대까지 소급하지만, 몽골이 언제 불교와 최초로 접촉을 했는가에 대한 정설은 없다.

자연신과 샤머니즘을 숭배하던 몽골인들이 외래 종교를 접한 순서는 경교(景敎, Nestorian), 이슬람교, 도교와 불교, 천주교 순으로 알려져 있다. 몽골제국 내에는 다양한 종교가 존재했지만, 티베트불교가 몽골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몽골불교가 최초로 언급된 몽골 문헌은 《몽골비사》이다. 《몽골비사》 267절에는 서하(西夏)의 군주인 이현(李睍)이 칭기즈칸에게 항복의 표시로 바친 공물 중 수메스(sümes)가 포함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메스는 《몽골비사》의 방역(傍譯)에 ‘불(佛)’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위기에 처한 서하가 자신들이 가장 귀하게 여겼던 대표 불상이라고 보인다. 수메스라는 단어는 이후 몽골인들이 정식으로 불교를 수용한 후 사원을 뜻하는 ‘숨(süme)’으로 전변되었다.

광활한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해온 몽골인들의 생활과 유 · 무형의 문화유산은 여러 면에서 불교문화를 제외하고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유구한 몽골불교의 역사와 전통을 한 면에 압축할 수는 없기에, 이 글에서는 13세기 이후 몽골불교 흥망의 맥을 짚고, 오늘날 몽골불교의 현황과 그 일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2. 몽골불교의 역사와 전통

1) 두 차례에 걸친 불교 전파

13~14세기 역사상 존재했던 국가 중 가장 방대한 영토를 지녔던 몽골제국의 수장인 쿠빌라이칸(Khubilai Khaan, 1215~1294)은 티베트의 승려 파스파(’Phags-pa, 八思巴, 1235~1280)를 국사(國師)로 임명하며 불교를 공식적으로 숭상하기 시작하였고, 왕족과 귀족들도 불교를 신앙하게 되었다. 당시 원대(元代) 불교는 칸과 귀족들의 후원에 의해 외형상 크게 발전했지만 이는 상류사회의 신앙에 그쳤고, 대다수의 민간에서는 여전히 과거로부터 이어오던 샤머니즘을 숭배하였다. 특히 원(元)이 멸망한 이후에는 왕실에서도 다시 샤머니즘을 신앙하게 되었다.

16세기 말 티베트불교는 몽골 유목민들의 정신세계를 지탱해주며 다시 초원으로 전입되었다. 몽골이 티베트의 겔룩빠(dGe lugs pa) 불교를 믿기 시작한 것은 투메드의 알탄칸(Altan Khan, 1507~1582)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6세기 후반 당시 몽골의 맹주이자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아싱라마(A sing bla ma, 1557~1636)에 의해 불심(佛心)이 싹트기 시작한 알탄칸은, 티베트 승려 쇠남갸초(bSod nams rgya mtsho, 1543~1588)를 1578년 5월 청해(靑海) 호반 동쪽 앙화사(仰華寺, Theg chen chos ’khor gling, Čabčiyal-un süme)로 초청하여 회견을 가졌다. 이는 몽골불교사와 16세기 이후 몽골인들의 문화와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인 ‘앙화사 회견’이다. 이 자리에서 알탄칸은 쇠남갸초에게 “와치르-다라(Wačir-dara) 달라이 라마(Dalai Lama)”라는 존호를, 쇠남갸초는 알탄칸에게 “차크라와르(Čakrawar, 轉輪聖王) 세첸 칸(Sečen Khan)”이라는 존호를 주고받았다. 이렇게 쇠남갸초는 몽골어로 ‘바다와 같이 넓고 깊은 지혜를 가진 스승’이라는 뜻의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얻고, 알탄칸은 쿠빌라이 세첸 칸에 비견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인정받았다.

이렇게 몽골에서 새로운 정치 통합의 요구가 불교 수용으로 연결되었듯이, 당시 몽골의 군사력을 등에 업고 성장한 겔룩빠 정권도 점차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치적 지위를 종교적 의례를 통해 확인받았던 17세기 몽골의 지배층은 많은 수의 승려와 활불을 확보하고, 그들을 통해 겔룩빠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알탄칸은 1578년 쇠남갸초와의 첫 번째 회견에 즈음하여 100명의 귀족을 출가하게 했는데, 그중에는 왕공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부 몽골의 오이라드(Oirad)의 왕공들은 1599년 모든 왕공과 귀족의 아들 한 명씩을 출가시키기로 약속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불교에 귀의한 수많은 몽골 왕공들의 아들과 귀족들은 주로 티베트불교의 두 번째 영수(領袖)인 판첸 라마가 거주하는 티베트의 따씨휜뽀(bKra shis lhun po) 사원에서 수학했다. 그 결과 17세기 초 티베트불교는 몽골 전역에서 크게 흥성하였으며, 지금도 티베트불교 승려 중에는 몽골인들이 있다.

17세기 이후부터 1937년 이전까지 몽골은 명실공히 불교국가였다. 당시 불교는 모든 종교적 숭배 대상 중 최상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는데, 불교가 샤머니즘적 요소를 일거에 소멸시켰다고 해석하기보다는 그 일부가 불교에 편입되거나 또는 하위 종교로서 몽골 사회에 존속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토착 종교인 샤머니즘과 불교의 공존 속에서 불교는 몽골 민족의 상징으로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이에 대한 주요한 원인은 칭기즈칸 숭배와 불교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데 있었다. 즉, “전륜성왕(轉輪聖王)이며 오치르바니(Očirbani, 金剛手)의 화신인 칭기즈칸”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칭기즈칸의 이미지에 불교적 색채를 더했다. 또한 칭기즈칸과 그 뒤를 이은 쿠빌라이가 불교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음을 주장하여 몽골이 그 시작부터 불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음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적 의도 아래 불교가 몽골 민족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현재 러시아의 공화국이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새로운 민족 분류에 따라 몽골과는 별개의 민족으로 구분되어 있는 부랴트(Buryat), 다우르(Daur), 칼미크(Kalmyk), 오로챈(Oroqen) 등도 당시 티베트불교를 숭배하였음을 보면, 17세기 불교의 확산이 몽골계 민족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가늠할 수 있다.

13세기에 이미 불교가 이미 전래된 적이 있었지만, 17세기부터 몽골 전역에 불교가 확산되면서 초원에는 수백 개소의 사찰이 세워지고, 많은 젊은이가 승려가 되었다. 몽골에 새롭게 들어와 1585년 현재 몽골국 영내에 처음으로 세워진 사원은 어워르항가이(Öwörhangai) 지역 하르호린(Kharkhorin)에 남아 있는 ‘에르덴 조(Erdene zuu)’ 사원이다.

17세기부터 몽골과 만주의 통치자들은 각각 자신들의 목적으로 불교를 후원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청(淸) 황제는 불교 경전을 티베트어에서 몽골어로 번역하여 목판 인쇄를 통해 민중에게 보급하고, 불교의 수장들을 북경에 초빙하여 감시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청나라 제실(帝室)의 재정 지원으로 사원이 건립되었는데, 이 때문에 불교사원은 특별한 지위를 향유했다. 청은 몽골 각지를 평정하고 통합할 때마다 사원의 설립을 후원했다. 여기에 신앙심이 두터운 귀족들의 보시(布施)에 의해서도 많은 사원이 건립되었다.

역사적으로는 사실이 아니었음에도 자신들의 조상을 티베트와 인도로 연결시키려는 움직임은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이는 한족(漢族)의 역사에 흡수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몽골인들은 만주족의 지배를 받았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한족을 더 경계하였기에 굳이 한족의 문화와 사상을 배우려 하지 않았고, 인도-티베트-몽골로 이어지는 불교문화권 형성을 통해 몽골의 독자성을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청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몽골인들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중 하나가 티베트어와 몽골어 불경을 인쇄하여 보급함으로써 몽골인의 정신적 통합을 유지하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스스로 몽골인의 역사를 저술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17세기에 저술된 몽문연대기(蒙文年代記)들은 불교 설화를 몽골 역사에 기록하고, 불교 사상을 기반으로 몽골 역사를 설명하게 되었다. 또한 불교의 환생과 윤회 사상을 몽골 민중들은 초능력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이 결과 몽골의 왕들을 부처의 환생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아울러 불교가 몽골에 전파된 역사를 자세히 서술하여 몽골을 정교일치(政敎一致)의 국가로 기록하였다.

2) 17세기 이후 몽골불교의 융성

17세기의 겔룩빠는 티베트불교의 각 교파 중 운영 및 교육 체계에 있어 가장 완비된 교파였으며, 각각의 사원은 티베트의 불교 전통 지식을 전수하는 고등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겔룩빠 사원이 몽골 각지에 건립됨에 따라 티베트불교의 전통 지식도 신속하게 몽골에 도입되었고, 몽골인들의 삶과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청대(淸代) 전 시기에 걸쳐 겔룩빠 불교사원은 몽골 지역에서 정치 · 종교 · 교육 · 문화 · 예술의 중심지였다. 겔룩빠 불교가 몽골에 전파되던 초기에 사원 교육의 중심은 대부분 티베트에서 오거나 유학한 학승들이 맡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몽골인들 중에서도 뛰어난 불교학자들과 고승이 다수 배출되었다. 이러한 몽골의 학승들은 불교철학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언어, 역사, 의학, 천문, 역학, 수학 등 학문에 대해 티베트어와 전통 몽골어로 다량의 저술을 남겼다.

17세기 이후 티베트어는 몽골 지역의 학술 언어로 자리 잡았고, 불교 이외에도 문학과 조형예술, 건축, 역법 등 티베트의 다른 문화들도 몽골에 전해졌다. 이때 몽골인들의 문화에 스며든 티베트의 명사와 호칭 등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불교가 몽골 지역에 급속도로 확산하면서 몽골인들의 사상과 삶에 큰 변화를 일으켰는데, 그중에서도 교육 분야의 발전을 꼽을 수 있다. 몽골의 불교사원은 티베트 승원의 구조를 빌려왔지만, 몽골에 정착되면서 조직화된 구조와 전통 유목사회의 모습을 함께 보이며 발전해 나아갔다. 그리고 사원에 부속된 다창(datsan, grwa tshang)에서는 현종(顯宗), 밀종(密宗), 의학(醫學), 천문(天文), 역법(曆法), 시륜(時輪) 등을 종합적으로 교육하였다. 불교사원에 부설된 다창은 불교 경전의 해석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을 교육하고 연구하는 종합교육기관으로, 특히 규모가 큰 사원에 부설된 종합 다창은 대학문사(大學問寺)로서 오늘날의 종합대학교와 비교할 수 있다.

17~19세기 몽골 전 지역에 보편적 신앙으로 자리매김한 불교의 영향에 의한 사원의 확장과 다창의 건립은 기존의 유목사회 교육 시스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다창 설립 이전에는 관학(官學)과 가정 내 훈육, 마을 단위의 일부 도제식 교육이 중심이 되었던 것과 달리, 다창이 도입된 후에는 불교사원 내에서 분과별 전문성을 가진 ‘학교’의 시스템을 구축되어 체계적인 학문의 교육과 연구가 진행되었다.

몽골국 영내에 1585년 최초로 세워진 하르호린(KharKorin)의 에르덴 조(Erdene Zuu) 사원 내에 설치된 다창을 시작으로, 16~17세기 몽골에서 다창을 보유한 사원은 17개소에 불과했지만 18세기 들어서는 103개소로 늘어났다. 19세기 말엽에는 독립된 다창만 492개소에 이를 정도로 폭발적인 증가 양상을 보이며 몽골 지식층 양산의 모태가 되었다. 몽골의 사원과 다창은 종교적 · 정치적 기반과 더불어 교육 및 연구기관의 구심점으로서 20세기 초반까지 유지되었다.

다창을 설립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학승들과 이들을 교육할 수 있는 승려가 상주해야 했기에 독립된 불전과 경당이 있어야 했고, 정기적인 경제적 지원이 수반되어야만 했다. 이 때문에 종합적이면서도 심도 있는 교육을 위해서는 대형 규모의 사원에서만 다창이 설치될 수 있었다.

다창을 갖춘 사원들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지식의 교육 및 연구는 몽골인들에게 이전보다 높은 학문적 수준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불교사원 교육은 귀족 자제뿐 아니라 신분에 상관없이 다른 유능한 아이들도 문자를 익히고 학문을 배울 수 있게 해 주었다.

17~19세기 몽골의 다창은 현종, 밀종, 시륜, 의학, 천문역법 다창 등의 분과로 나누어지지만, 그 학습 내용에서는 긴밀한 연계성을 가진다. 모든 학승은 기본적으로 현종의 오부대론(五部大論)의 내용에 대해 학습해야 했다. 이는 종교적 소양을 다지고 승려이자 지식인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교육 내용이었다.

특히 의학 다창의 학승들은 점성학의 이론을 숙지하여야 인간의 생리와 질병진단법을 통달할 수 있었고, 천문역법을 배우는 학승들도 기본적으로 인체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어야 점술 학습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은 몽골 다창이 실용학문의 전문적 지식 습득에서도 분과별 학습 내용이 서로 연결되도록 하여 폭넓은 학습을 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몽골의 현종과 밀종, 시륜 다창에서는 티베트 다창의 교재를 기준으로 하였으며, 주로 번역과 주해 작업이 이루어졌다. 한편 의학과 역법(曆法) 다창에서는 몽골 지역의 환경과 기후에 적합하도록 만든 몽의학서(蒙醫學書)와 각 지역의 다창을 기준으로 한 몽골력(蒙古曆)이 제작되었다. 이는 실용학문의 경우 티베트 다창의 이론과 학습법을 수용하여 몽골화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18~19세기 다창에서 발전되어 학문적 이론의 기틀을 마련한 몽골 전통의학과 몽골 역학은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몽골에서 17~19세기 불교의 전파와 소통을 담당했던 사원은 몽골인들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결집시키는 공간이었다. 당시 사원에서는 집단적 종교의식과 교육 · 예술 · 문화 공연 · 축제 등이 어우러지며 몽골인 고유의 복합적 활동 공간이 형성되었다. 몽골과 청(淸) 조정의 겔룩빠 불교에 대한 전폭적인 정치적 혹은 경제적 지원이 있었기에 이 시기 사원에서 여러 학문이 신속하게 성장할 수 있었고, 당시의 사회적 조건과 몽골인의 굳건한 신앙심은 학문적 융성과 문화예술에 대한 번영을 불러왔다.

16세기 이후 몽골의 불교 전파는 티베트 및 티베트불교와 학문적으로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사회 각 분야에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몽골의 사원 문화는 단순히 종교집단의 향유로 그친 것이 아니라 경제 · 교육 · 문화 · 예술에 이르기까지 몽골 민중 생활의 구심점이었다.

당시 몽골 지역에 뿌리내린 불교는 사회 ·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결정적인 구조 변화를 초래했다. 즉 독립적인 경제 단위를 형성한 사원 공동체의 발생은 처음으로 몽골의 옛 경제구조와 결별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원에서 부와 재산을 축적한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무산 계층뿐 아니라 재산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귀족층과도 대립하게 만들었으며, 수많은 승려들은 민중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다.

3) 1930년대 사회주의로 인한 불교사원의 폐쇄

18~19세기에 융성했던 불교사원은 이미 몽골 사회에 확고하게 입지를 굳힌 상태였고, 1911년 몽골의 독립 이후 10년 동안 몽골 내 사원과 승려의 수는 폭발적으로 확장하게 된다. 급변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징집을 피하기 위해 출가하는 자들이 늘어났고, 이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으나 이미 방만하고 비대해진 몽골의 사원은 자정 작용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1924년 당시 몽골 인구는 대략 70만 명 정도였는데 이 중 113,000명 정도가 승려로 전체 남성 인구의 약 40%에 달했으며, 국가 재산의 20%는 사원 소유였다. 막강한 세력과 부를 갖고 있던 몽골 불교사원은 그 역사에 비하여 너무나 짧은 시간 사이에 사라지게 되었다.

역사적 사실로 알려진 중요한 외부 요인은 인민혁명을 통해 몽골을 위성국가로 만든 스탈린의 종교말살 정책이 작용한 결과였다.

그러나 당시 몽골불교가 일순간 침몰하게 된 내부 요인은 세계정세 변화에 대한 무지와 판단력 부족, 비대하고 방만해진 사원, 국민 생활을 압박하는 사원의 고리대출업, 이로 인한 대중적 지지기반 약화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1922년 급진 개혁에 반대하는 국민봉기가 있었음에도, 몽골불교계는 이를 주도해 상황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복드칸(Bogd Khan, 1869~1924)의 통치기에 인민혁명 세력에 동조함으로써 법률과 제도 정비를 통한 그들의 세력 확장을 방조했다. 당시 몽골불교는 스스로 변화를 주도하지 못하고 변화의 파도에 쓸려가게 되었다.

몽골 정부는 사회주의 혁명의 달성을 위해 몽골의 사원과 승려를 혁명의 적으로 규정하여 탄압하였으며, 사원의 파괴와 승려의 환속 또는 살해가 자행되었다. 같은 티베트불교 전파 지역이지만 티베트나 칭하이(靑海) 지역에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몽골 지역의 사원은 전멸하다시피 파괴되었다. 1990년대 이전까지 외몽골에서 사원의 형태를 유지한 곳은 울란바토르의 간단사(Gandategchenlin khiid)뿐이었고, 현재까지도 몽골과 중국의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에는 폐허에 가까운 사원과 절터만 남아 있는 곳이 즐비하다. 당시 몽골 사회에서는 몽골 쇠퇴의 주요 원인이 불교 때문이었으며, 불교의 전파와 흥성조차 부정하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그래서 학자들 사이에서도 그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연구의 대상으로도 삼지 않으려는 경향이 팽배해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1937년 9월부터 1938년 7월까지 83,203명의 승려가 사원에서 추방되었다. 이렇게 대부분의 승려들은 유죄판결을 받아 범죄자로 전락하였고, 그나마 생존해 있던 승려들도 1938년 10월 가장 대규모의 숙청에서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살해당했다. 심지어 고위관직에 있던 승려들도 초기 사회주의의 숙적으로 여겨져 반혁명분자와 간첩 혐의, 또는 정부 몰락을 도모하였다는 혐의로 기소되었고, 막대한 세금(오늘날의 보석금)을 내고 나서야 풀려났다. 이러한 예는 몽골 정부가 당시 승려들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 · 문화적 권력과 불교사원의 존재를 무너트리려는 수단으로 시행했던 것이었다.

학살이 자행되는 가운데 일부 승려들은 승직을 포기하였고, 몽골불교의 맥을 단절하기 위하여 반복된 숙청과 사원 폐쇄에 앞장서기도 했다. 불교 탄압에 앞장선 승려들은 몽골 정부의 높은 관직에 오르기도 했다.
한편 사원에서 부동산과 전차(磚茶), 생필품 등에 대하여 고리대금을 받고 유통했던 행위들이 재판에 회부되기도 하였다. 이는 새로 수립된 몽골 정부와 재판부가 법 집행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재판부에서는 승려에 대해서도 법률을 엄격하게 적용하였다. 사회주의자들은 살아남고자 개인의 신념을 저버리고 당시 시류에 적응해야만 했다. 몽골 정부의 불교 탄압은 반(反)종교주의 혹은 반(反)성직자주의로서 자행되었다기보다, 몽골불교와 사원이 장악하고 있던 정치력과 경제 · 사회적 기능을 단절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1937~1938년 사이 몽골의 모든 사원은 사회주의 이념으로 인해 모두 불타거나 파괴되어 문을 닫게 되었고,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곳들은 그마저 창고나 마구간, 군대의 숙소로 전락하게 되었다. 20세기 초반 115,000여 명에 달했던 몽골 사원의 승려들도 대부분 숙청당했다. 이렇듯 청대(淸代) 몽골에 융성했던 불교는 순식간에 침몰하게 되었다.

4) 오늘날의 몽골불교

몽골불교는 20세기에 극적인 성쇠를 지나, 1990년 민주 정부의 등장으로 본래 모습을 되찾기 위한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종교는 아편’이라는 슬로건 때문에 숨겨져 있었던 불교문화재들과 몽골 민중의 불심도 표면으로 드러나게 되었고, 폐허로 남아 있던 사원의 중건이 시작되었다.

현재 몽골불교의 중심에는 울란바토르의 간단사와 부설 승가대학이 있다. 몽골 전통불교를 일으키기 위한 노력은 승가대학의 중건과 간단사 불교미술 대학을 비롯한 강원 등 불교 관련 교육시설 설립으로 이어지고 있다.

1990년대에는 억눌렸던 불심을 회복하고 사원을 복원하는 데 열중했다면, 2000년대 이후에는 불교 서적의 출판과 함께 다양한 불교 사업이 각지에서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몽골불교 활성화가 지방 불교 활성화와 직결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몽골 각 지역에 전통문화예술원 지부를 설립하여 불교 중흥 네트워크를 추진하고 있다.

몽골불교 교육의 큰 축을 맡았던 다창은 현재 간단사를 비롯한 대형 사원의 승가대학과 몽골전통의학 대학의 기능으로써 그 맥을 잇고 있다. 1991년도 설립된 초대 전통의학 단과대 오토치 만람바(Otoch Maanramba) 대학교가 불교의학의 전통적인 방식을 전승하면서 현대 서양의학과 함께 교육하여 몽골전통의학 전문의와 간호사를 양성하고 있다.

한편, 2011년 기준 15세 이상 몽골 국내 거주인구 중 몽골불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은 53%로 집계된다. 2010년 인구조사에 따른 몽골국 인구수는 2,754,685명이며, 이 중 몽골 국내 거주 15세 이상 신앙인은 1,170,265명으로 나타난다. 종교를 가지지 않는 인구를 포함한 신앙 분포는 불교 52.93%, 이슬람교 3.0%, 샤머니즘 2.9%, 기독교 2.15%의 순이다.

종교를 가진 인구 가운데 불교 신자는 전체 연령대에서 80% 이상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으며, 30대 이상에서는 다른 종교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인 87%를 보인다. 특히 60대 이상 신앙인의 90.7%가 불교를 믿는다는 통계를 보이는 부분에서 현재 몽골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한편 몽골국 전체 종교 사원의 수는 2014년 기준 336개소로, 불교 141개소, 기독교 164개소, 이슬람 25개소, 기타 6개소로 집계된다. 이 중 기독교 사원의 수가 2004년에 63개소에 불과했던 것을 비교하면 몽골 내 설립된 교회의 수가 최근 큰 폭으로 상승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공격적인 선교로 인한 교회 수 증가로 보이며, 기독교 교회와 성직자는 증가하고 있지만 신학생 수는 급격히 감소하고 있어, 그 한계점과 함께 정확한 요인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몽골 울란바토르와 지방의 주요 도청 소재지에도 한국 개신교를 비롯한 해외 기독교의 선교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 단기 봉사선교로도 몽골을 매년 찾고 있는 실정이다. 기독교의 선교는 봉사 측면에서 분명히 순기능도 많다. 그러나 몽골 종교에 대한 이해 없이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로 몽골인들의 반감을 일으켜 혐한(嫌韓) 인식이 생겨나고, 몽골 거주 교민들에 대한 피해도 종종 이어지고 있어 이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3. 현대 몽골불교의 문화적 특징

앞서 살펴보았듯이, 몽골 인구의 53% 정도가 불교 신자인 만큼 의식하지 않더라도 몽골인들의 삶에 스며들어 있는 불교문화를 찾아볼 수 있다.

매년 7월 11~13일에 열리는 몽골 최대의 민속 축제인 나담(Naa-dam)의 개막식에서도 참(tsam)의 일부분을 볼 수 있다. 8명의 호법신장(護法神將)과 재물을 관장하는 포대화상(布袋和尙)과 여덟 동자승, 수명을 관장하는 흰 노인 등이 등장하며, 벽사진경(辟邪進慶)의 집약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국가행사의 하나인 축제에 불교의례의 단면이 등장한다는 점은 몽골불교의 위상과 함께 몽골인들에게 전통문화로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현대 몽골불교는 기복신앙(祈福信仰)을 중심으로 나아가고 있다. 건강과 장수, 부(富)에 대한 기원은 시대와 인종, 지역을 막론하고 가장 기본적인 소망일 것이다. 특히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몽골인들에게 재복(財福)에 대한 열망은 특히 높아지고 있다.

일례로 몽골 셀렝게(Selenge) 지역의 아마르바야스갈랑트(Ama-rbayasgalant) 사원에서는 작년 8월 중순, 재물운을 관장하는 호법신 법회가 크게 열려, 전국 각지에서 재복을 얻고자 하는 신도들이 몰려 사원 주변 구간이 며칠간 극심한 정체로 몸살을 앓았다. 이러한 모습은 몽골인들의 현실 기복에 대한 열망과 신앙심을 볼 수 있는 단면이다.

사업의 번창 기원과 택일(擇日), 크고 작은 고민 등을 상담하기 위해 사원의 승려에게 찾아가 상담하는 모습은 몽골 어느 사원에서나 흔히 볼 수 있다. 사원 경내에 상담을 위한 승려가 낮시간에 대부분 상주하며, 상담하는 신도를 위해 그 자리에서 간단한 점복(占卜)과 염불, 기도를 해준다. 또한 대형 사원의 경우, 신도는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기도를 직접 골라 해당 기도비를 계산원에게 제출하고 이름을 입력하면, 그 다음 날 아침에 승려가 독경과 기도를 해주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필자가 작년 현지조사에서 확인한바, 100여 가지의 기도 중 본인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면 종류에 제한 없이 고를 수 있으며, 기도비를 지불하면 자동으로 계산대에서 영수증이 발급된다. 이러한 모습에서 자본주의의 끝 지점을 보는 듯한 느낌과 함께 생활에서 기도 청탁이 보편화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몽골 사원에서는 초 공양 대신 기름 등잔에 솜으로 심지를 말아 세우고, 등잔 안에 소나 양 기름을 굳힌 것을 덜어 녹여 등불 공양을 올린다. 작은 등잔 여러 개를 놓기도 하고, 큰 등잔 하나를 오래 피우기도 하면서 기도자의 안녕과 소원성취를 간절히 염원하는 모습은 몽골 사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특히 먼 길을 가는 사람에 대한 수호(守護)를 비는 기도가 별도로 전하는데, 이는 몽골의 광활한 초원에서 형성된 유목문화의 전통이 현대까지 이어지는 모습의 일례이다.

현대 몽골의 불교사원은 지나치게 상업화되었다는 지적을 받는 동시에, 여전히 몽골인들의 불심을 모으는 중심으로서 자리 잡고 있다.

4. 맺음말

몽골인들은 부처를 ‘보르항(Burkhan)’이라 부른다. 이는 신(神)을 통칭하는 단어이기도 하기에, 몽골인들의 전통적인 신격 관념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흥망을 거듭해왔지만 몽골불교는 여전히 몽골인들의 생활과 민속, 통과의례에 뿌리 깊게 스며들어 있다. 유목생활에 기반을 두고 살아왔던 몽골인들은 13세기 유라시아 대륙을 통일하고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를 이룩한 세계제국을 이루었다. 이후 16세기 알탄칸이 불교를 정치적 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티베트 · 몽골불교문화권’을 형성하게 된다. 이때 몽골인들의 종교사상은 불교적 인식체계로 전환되면서 몽골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 몽골불교에 대한 이해 없이는 오늘날 몽골인에 대한 이해도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13세기 첫 번째 전교 이후 16세기 말 두 번째 불교를 맞이한 몽골은 17~18세기에 지역사회의 종교 · 문화적 토대 위에서 19세기에 가장 크게 불교를 융성시켰다. 이후 20세기 초반 청으로부터의 독립 후 약 10여 년간 폭발적으로 승려의 수가 증가하였다가 1938년 사회주의 전환과 함께 모든 사원이 폐쇄되었다. 몽골의 불교사원은 티베트불교 유입 이후 몽골 사회의 구심점으로서 교육과 문화, 경제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청대 위정자들의 대(對)몽골 정책과 1930년대 사회주의 종교탄압 등 정치와 시대변화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던 한계점을 보였다.

1990년 민주주의 전환 후 몽골의 불교문화는 어지러운 국제 정세 속에서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현재 몽골에 재건된 불교사원은 141개소로 예전의 흥성기에 비할 수 없지만, 유구한 몽골의 문화유산의 맥을 이으며 몽골인들에게 불심의 근원지로 자리 잡고 있다. 아울러 몽골인 53%가 불교 신자임을 감안하면, 몽골불교는 여전히 몽골인들의 대표 종교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승가학교인 다창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소략한 듯하지만, 승가대학으로서 기능과 몽골전통의학 학교로서 기능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13세기 이후 몽골불교의 흐름을 짚어보고, 몽골의 불교가 티베트나 청(淸) 문화의 영향 아래 형성된 하부 문화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몽골만의 불교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2000년대 이후 국내에서 티베트불교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활기를 띠고 있다. 이러한 관심이 몽골과 중국의 네이멍구, 칭하이 지역, 러시아의 부랴트 등 이른바 ‘티베트 · 몽골불교문화권’의 철학과 문화에 대한 보다 다양하고 심층적인 연구와 시야 확장으로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

 

김경나 / 단국대 몽골학과 강사. 몽골국립대 몽골어문학과 졸업. 고려대 문화재학협동과정 석사, 단국대 대학원 몽골학과 졸업(몽골학 박사). 주요 논문으로 〈17~19세기 몽골 불교사원의 다창 연구-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중심으로〉(박사 논문) 〈19세기 몽골 다창의 교학제도와 분포〉 등이 있고, 역서로 《언두리(神)가 들려주는 끝나지 않는 이야기》 저서로 《초급 만주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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