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 20세기의 창조자

몇 권의 획기적인 소설작품으로 현대 서구사상사를 근본적으로 전환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 그가 불교를 깊이 공부하고 《보르헤스의 불교강의》라는 책을 썼으며, 나아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풀어서 자신의 작품 모티브로 사용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보르헤스는 흔히 ‘20세기의 창조자’ ‘탈근대의 선구자’ 등으로 불린다. 그의 글은 최근까지 프랑스 철학을 선도한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모리스 블랑쇼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또한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 작가인 존 바스, 토마스 핀천, 존 가드너와 이탈리아의 움베르토 에코, 이탈로 칼비노 등의 작품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움베르토 에코는 “두 명의 대가가 인류에게 장차 1,000년을 먹고살 양식을 남기고 갔다.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새천년의 이미지는 바로 월드 와이드 웹(WWW)이다. 조이스는 그것을 언어로 구축했고, 보르헤스는 아이디어로 디자인하였다. 갈수록 세계는 이 속으로 빨려들고, 사물은 시각 이미지로 남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보르헤스의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마치 경이로운 현관에 서 있는 것 같았으나 둘러보니 집이 없었다.”고 하였다. 미셸 푸코는 “보르헤스의 글은 지금까지 간직해온 내 사고의 전 지평을 산산이 부숴버렸다.”고 했으며, 존 바스는 “보르헤스의 글은 문학의 진정한 출구에 붙인 주석서이며, 고갈된 모더니즘 문학의 탈출구다.”라고 말했다.

16세기 르네상스와 18세기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서구는 근대화를 추진했고, 세계의 중심에 ‘이성’이라는 가치를 올려놓았다. 이성은 과학기술을 중시하였고, 과학기술의 발전은 물질의 풍요를 가져왔다. 또한 이성은 역사의 진보라는 낙관론적 역사주의에 대한 믿음을 배양했다. 그 결과 자본주의, 혁명사상, 과학주의 등이 근대화란 미명하에 전 세계를 휩쓸게 되었다.

하지만 이성은 태생적으로 분별, 취사선택을 지향하기에, 필연적으로 이분법적 세계관을 낳는다. 이런 관점은 또한 필연적으로 모든 세계 구성원 사이에 갈등구조를 배가시킨다.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던 ‘이성에 대한 믿음’은 생태 파괴 등 근대화의 모순이 곳곳에서 드러나면서 점차 인류를 배반하였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그 오류의 근원에는, 서구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던 ‘이성’에 대한 낙관론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통렬히 지적한 사람이 보르헤스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이성에 대한 순진한 신뢰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하는 점을 역력히 보여주었다.

보르헤스는 서구 지성들에게 인식의 전환,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모색하도록 촉구하였다. 그 핵심은 이분법적 갈등구조를 넘어서 불이법적(不二法的) 세계관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의 글은 많은 지성인에게 매우 세련된 방법으로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그 비전 속에는 컴퓨터나 인터넷 같은 새로운 기술문명의 도래에 대한 전망도 들어 있다. 그런데, 그러한 비전을 낳은 모태가 상당 부분 불교에 대한 사색에서 비롯되었다면 대단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에 따르면 스마트폰은 ‘마음’을 카피한 것이다.

그는 29살 때, 무아를 체험하였다. 시간이 끊어지고 세상에 대한 초월적인 관찰자가 되는 생생한 체험이 그를 서구 지성을 열광시킨 독특한 작가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무아 체험을 불교를 통해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보르헤스의 문학세계와 불교

보르헤스는 1899년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보르헤스는 스스로를 ‘야생의 독자’라고 말했다. 스위스에서 코스모폴리탄이 되어 보낸 학창 시절 이후, 그의 독서는 고전은 물론 수많은 이단까지 넘나들었다.

그는 형이상학적 오지(奧地) 탐험가였다. 남들이 미처 밟아보지 못한 정신적 고산준봉과 원시 처녀림을 답사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너무나 넓은 정신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보르헤스에게 서구의 이분법적 이성 중심주의적 사고는 너무나 답답해 보였다.

그는 문학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관견(管見)에 사로잡혀 있는 서구 사상계를 마음껏 조롱했다. 그리고 언어의 망치를 들고 그들의 속되고 편협된 고정관념을 산산이 깨부수는 작업을 감행했다. 알음알이(이성의 왜곡)가 얼마나 사람을 어둡게 만드는가 하는 것은 불가(佛家)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가르침이다. 보르헤스가 근대 서구인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 이 대문을 들어서는 자는 알음알이를 버려라)”였다.

보르헤스는 지극히 현묘한 초이성의 세계를 날렵한 직관과 거침없는 상상력으로 포착하여, 군더더기 없고 경쾌한 문체로 독특한 문학세계를 구축해 놓았다. 그는 마치 깨달음의 소식을 전하는 것처럼 경이적이고 환상적인 세계를 독자들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

보르헤스는 만년에 그의 고향에서 행한 강연에서 “불교는 나에게 구원의 길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청년기에 읽은 쇼펜하우어의 책에서 처음 불교를 접했고, 이후 《불소행찬》 등의 불경과 파울 도이센이나 스즈키 다이세츠의 책을 통하여 불교에 대한 이해를 넓혀나갔다.

‘보르헤시안 문학’ 탄생의 계기, 시간 체험

보르헤스는 유럽에서 돌아온 20대 중반 무렵, 아르헨티나 고유의 문화를 체험하고자 당시 유행하던 탱고와 팜파스의 가우초(목동)를 접해 나갔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변두리를 돌아다녔던 이 시기에 그는 뜻밖에도 결정적인 문학 체험을 했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인 1928년, 어느 시골길에서 모든 예술 체험의 원형이랄 수 있는 ‘시간 체험’을 한 것이다.

보르헤스는 자신의 문학을 관통하는 주제로 ‘시간’과 ‘무한’을 꼽은 적이 있다. 보르헤스의 환상과 형이상학의 뒤에는 시간에 대한 오랜 사색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 계기는 인간에게 주어진 시공간의 제약이라는 존재론적인 조건을 뚫고 초월의 세계로 비약해본 다음의 경험이었다. 보르헤스는 자신의 ‘근본 경험’을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며칠 전에 경험했던 일을 여기다 기록하고자 한다. 모험이라 부르기에는 너무나 덧없으면서도 한편 아찔한 경험이며, 사상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비이성적이고 감성적인 것이었다. 말하자면, 하나의 장면과 그 장면이 한 말을 내가 들었던 것이다.

그날 밤 별다른 할 일이 없었고 날씨도 고즈넉해서, 저녁 먹고 난 후에 산책하러 나갔다. 나는 딱히 방향을 정해 놓고 싶지 않았다. 가능한 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 어느 길 하나라도 그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소위 말하는 대로, 발길 따라 정처 없이 걸은 것이다. (……) 골목길의 안쪽 끝은 들판으로 이어져 아스라이 말도나도 지역 쪽으로 사그라지고 있었다.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운 땅 위에 서 있는 분홍빛 토담은 달빛을 비추는 게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비추고 있는 것 같았다. 부드러운 분위기를 표현하는 데는 저 분홍빛 이상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대로 멈춰 서서 그 순박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생각했다. 이것은 30년 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이다…… 나는 그 세월을 가늠해 보았다. 큰 변화가 없는 나라에선 그 시간이 긴 세월은 아니지만, 급속한 변화를 겪고 있는 이 나라에선 꽤 장구한 기간이었다.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나는 작은 새 크기만큼의 친근감을 느꼈다. 자세히 둘러보니 그 아찔한 침묵 속에서, 역시 비시간적으로 들리는 풀벌레 소리만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태어나기 전인 천팔백몇십 년에 있다’고 마음먹으니, 그 말의 의미는 단순한 상념에서 풀려나 문자 그대로 현실화되는 것 같이 느껴졌다. 나는 스스로가 마치 죽은 사람인 것처럼, 이 세상에 대한 추상적인 관찰자로 느껴졌다. 알지 못할, 그러나 선명한 형이상학적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내가 소위 시간의 강물을 거슬러 올라왔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감각할 수 없는 ‘영원’이란 단어의 묵시적이고 부재하는 의미를 포착한 게 아닌가 의심해 보았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비시간 속에 들어가서 세상에 대한 추상적인 관찰자가 되어 ‘영원’을 엿본 체험. 그 ‘형이상학적인 공포’는 보르헤스 문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는 그 공포를 해명하기 위해 글을 썼으며,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형이상학’과 ‘환상’의 세계를 탐험하게 되는 것이다.

〈죽음 속에서 느끼다〉라는 글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살아서 부닥쳐보는 죽음은 언제나 인생을 깨닫게 해주는 근본적인 은총이다. 장자는 죽음을 대종사(大宗師), 즉 큰 스승으로 불렀다. 사(死)는 곧 사(師). 미리 죽음을 당겨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비의를 깨닫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죽음 속에서 느끼는 것’은 무엇보다도 시간이 끊어지는 느낌인데, 이 시간제단(時間際斷)의 근본 경험은 의식의 흐름을 끊어놓음으로써 무아(無我)와 무한(無限)을 체험하게 해주었다.

1936년 보르헤스는 《영원의 역사》를 펴냈다. 이 에세이집에는 여섯 편의 에세이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세 편은 ‘시간’에 대한 글이고 나머지 세 편은 문학 수사학에 관한 글이다. 보르헤스는 평생 ‘시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강박관념을 지니고 살았다. 그것은 보르헤스로 하여금 ‘시간의 원형’에 대해 사색하게 하였다. 그는 서구 역사에서의 시간관을 검토해 보았다.

그는 자신이 20대에 시간의 원형인 일종의 ‘영원’을 맛보았지만, 그것은 서구에서 말하는 전통적인 영원과는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 자신이 경험한 시간 체험을 분석하고 규명하기 위해, 서구에서 ‘영원’이란 개념이 형성되고 재해석되어온 과정을 추적하고, 그 말미에 자신의 경험을 덧붙인 것이 이 책의 제목으로 채택된 〈영원의 역사〉라는 에세이다.

보르헤스는 “시간이 무엇인지 알려면 먼저 시간의 모델이며 원형인 영원을 이해해야 한다”라고 플로티누스가 《에네이다스》에서 말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글을 시작하고 있다. 제1장에서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해한 ‘영원’에 대해 다루는데, 영원은 과거, 현재, 미래의 기계적 총합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동시성을 시사한다고 한다.
그리스인들의 ‘영원’관을 집약한 사람은 플라톤이다. 그는 ‘시간은 영원의 움직이는 영상’이라고 정의했다. 인간은 사물을 하나씩 하나씩 연속적으로 인지할 수밖에 없지만, 이데아의 세계에 머무는 신은 만물을 포괄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신의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흘러가지 않고, 만물은 그 상태 그대로 자족하는 가운데 조용히 지속될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전지전능하지 못한 인간은 절대적인 영원을 인식할 수 없고, 대신 영원의 움직이는 영상인 시간을 통해 사물을 순차적이며 상대적으로 인식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데아주의자 플라톤의 이론은 이렇게 정리된다. “개체와 사물은 그것들이 포함되는 종(種)에 참여할 때만 존재한다. 종은 그들의 영속하는 실재이다.” 지금 들리는 새소리는 어느 한 마리 새의 소리일 뿐 아니라, 그 새가 속하는 종이 시간을 뛰어넘어 내는 영원한 소리라는 것이다.

제2장에선 기독교의 ‘영원’을 다루는데, 그것이 가장 잘 반영된 책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 제11권이다. 이레네우스 주교가 삼위일체설을 교회의 공식 도그마로 공표했을 때, 기독교적 ‘영원’이 탄생했다고 보르헤스는 말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시간적인 선후관계 없이 동시에 일체가 된다는 것은 곧 초시간적인 ‘영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영원은 신의 열아홉 가지 속성 중의 하나로 부여되었다. 결국 신의 품속인 사후세계의 천국에서 시간은 영원으로 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영원’을 해명하려고 애쓴 것이 성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제3장에선 현재 속에 과거와 미래가 내포되어 있는 것을 통해 영원을 설명하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을 보다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보르헤스는 이 글의 마지막 장인 제4장에서 자신이 경험한 ‘영원’을 소개하고 있다. 그 내용은 앞에서 이미 소개했다. 옥타비오 파스는 ‘시적 체험의 핵심은 시간 체험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보르헤스의 시와 단편소설에 나타나는 독특한 형이상학적 세계는 그가 20대 후반에 체험한, 마치 ‘죽은 사람’처럼 ‘세상에 대한 추상적인 관찰자’가 되어본 특이한 경험의 산물로 인간과 우주를 바라보는 하나의 독특한 ‘입장’을 가져다주었다. 보르헤스는 1946년에 자신의 시간관을 새롭게 정리하여 〈새로운 시간론〉을 썼는데, 그 말미에 다시 한 번 시간과 인간의 본질에 대해 언급했다.

시간의 연속성을 부정하는 것, 자아를 부정하는 것, 별이 가득 찬 우주를 부정하는 것은 겉으로는 절망으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위로가 된다. 우리의 운명은 (스베덴보리의 지옥이나 티베트 신화의 지옥과는 달리)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무서운 게 아니다. 그것이 무서운 이유는 돌이킬 수 없고 완강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나를 이루는 본질이다. 시간은 나를 휩쓰는 강이지만, 내가 곧 강이다. 시간은 나를 삼키는 호랑이지만, 내가 바로 호랑이다. 시간은 나를 소진시키는 불이지만, 내가 즉 불이다. 세상은 불행히도 실재하고, 나는 불행히도 보르헤스다.

시간이 우리 밖에서 흐르는 게 아니라, 우리의 내부에서 흐르고, 시간이 곧 우리 자신이라는 보르헤스의 글은 많은 생각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잘 생각해보면 시간은 저기 밖에서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서 흘러간다. 아니, 보르헤스에 따르면, 내가 곧 시간이다. 기차를 타보면, 창밖으로 전봇대와 들판이 지나간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사물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정으로 가는 것은 반대다. 들판은 가만히 있고, 내가 지나가고 있다. 인간은 관성으로 사물들이 흘러간다고 느끼지만, 실제는 내가 가고 있는 것이다.

인생이란 기차는 언젠가 우리를 종점으로 데려다준다. 보르헤스는 기차에서 내릴 수 없기에 ‘세상은 불행히도 리얼하고’ 그것을 알면서도 가야 하기에 그는 ‘불행히도 보르헤스다.’ 이런 맥락에서 선가에서 전해오는 게송의 한 구절인 “다리가 흐르지 물이 흐르는 게 아니다[橋流水不流]”의 의미도 이해할 수 있다.

보르헤스와 불교

1976년 보르헤스는 《보르헤스의 불교강의》를 펴냈다. 보르헤스는 젊은 시절부터 심취했던 불교에 대한 애정을 이 책을 통해 표현했는데, 열두 개의 아티클을 통해 서구의 독자들에게 불교의 요체를 알기 쉽게 압축하여 들려준다.

먼저, 보르헤스는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붓다보다는 전설상의 붓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역사상의 붓다라는 인물의 생애는 이미 그 삶의 족적이 드러나 있어 크게 새로울 것이 없지만, 전설상의 붓다 이야기는 많은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불교 예술은 대부분 붓다의 전설을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상상력을 중요시하는 보르헤스에게 붓다의 전설은 수많은 사람의 상상력 보고로 여겨진 것이다. 또한 그는 궁극적 진리는 이성적 논리보다 오히려 신화나 설화 속에 더 잘 표현되어 있다고 보고, 문학도답게 불전(佛傳)이나 《불소행찬(佛所行讚)》 등의 문학적 이야기 속에 함축된 비유나 가르침에 주목한다.
흔히 ‘환상적 사실주의’의 대가라고 불리는 보르헤스는 그 이름에 걸맞게 ‘사실적인’ 붓다의 일생보다는, 그에 관한 여러 ‘환상적인’ 묘사에 더 관심을 가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나 혹은 이성으로 파악되는 것만이 사실이라고 믿는 서구의 일반적인 경향과는 달리, 그는 과연 ‘무엇이 사실(리얼리티)인지’에 대해 깊이 회의하였다.

그는 불교와 힌두교, 우파니샤드 철학의 영향으로, 밖으로 드러난 외부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깊게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진정으로 세계를 리얼하게 파악하려면, 겉만 묘사하는 사실주의로는 안 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속까지 잡아내는 환상적 사실주의를 통해 접근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붓다의 참모습은 그 삶에 대한 단순한 역사적 기록에 있는 게 아니라, 붓다가 도달한 경지를 상상력을 통해 드러낸 문학적, 비유적 표현에 있다는 것이다.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처럼, 그에게 환상[空]은 세계의 숨겨진 이면과 신비[妙有]를 포착할 수 있는 상상력을 의미했다.

보르헤스는 붓다가 살았던 기원전 6세기를 인류사에 있어 ‘성인(聖人)들의 시대’라고 불렀다. 공자, 노자, 자라투스트라,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이사야, 예레미야 등이 모두 당시의 동시대인이었다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역사상의 붓다를 다루면서 석가의 생애와 예수의 생애를 비교했다.

서구인의 입장에서는 붓다의 일생과 예수의 일생을 서로 비교해 보는 것이 불가피할지 모른다. 예수의 전도 생활은 격정적이고도 극적인 사건으로 채워진 반면, 붓다의 전도 생활은 인류의 스승으로서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신(神)이 인간의 육신을 취하여 도둑들 사이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죽었다는 교리는, 태자가 출가하여 성도(成道)한 뒤 깨달음의 길을 가르쳤다는 사실보다 훨씬 더 강렬하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불교는 개인의 유일한 인격이라는 것에 부정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예수같이 드라마틱한 인물상은 불교의 기본적인 교리인 무아론(無我論)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들 중 두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면 내가 그중 세 번째 사람이 되겠다”고 했다. 비슷한 상황에서 붓다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자기 자신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의지하여라”고 가르쳤다. 타력신앙과 자력신앙의 차이가 뚜렷하다.

한편 보르헤스는 불교학자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를 인용하여, 두 종교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인 시간관의 상이함을 지적했다.

대승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붓다는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모습으로 이 땅에 나타나는 원형(原形)이기 때문에 붓다의 개성적인 모습은 큰 의미가 없다고 했다. 예수의 삶과 죽음은 일회적(一回的)이고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한다. 반면 붓다의 삶과 가르침은 역사적인 주기 때마다 반복되며 고타마는 과거에서 미래로 끝없이 연결되는 거대한 흐름의 한 고리의 역할을 다하였다.

이어 보르헤스는 붓다 개인 생애의 기록보다는 그의 정신세계와 가르침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지적했다.

무아와 자아정체성의 문제

보르헤스의 주요 주제 중의 하나는 자아의 정체성 문제이다. 바로 이 점에서 보르헤스는 불교의 ‘무아 사상’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라는 주제는 보르헤스의 단편, 에세이, 시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그는 〈보르헤스와 나〉라는 짧은 에세이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공적인 자신의 모습’과 ‘내밀하고 개인적인 자신의 모습’을 구분하여 두 분신 사이의 관계와 갈등을 묘사하고 있다. 공적인 보르헤스에 관하여는 작가로서의 자신 앞으로 보내오는 편지나 문인 인명사전에 실린 자신에 대한 신상에서 인식한다. 사적인 보르헤스는 그가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거나 노래를 들을 때 스스로를 느낀다고 한다. 그는 가끔 세상에 알려진 자신의 이미지(공적인 자기 모습)에 싫증이 나서 그것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주제와 작품세계를 바꾸기도 했다. 이 글의 말미에 그는 “지금 이 글을 그(작가로서의 공적인 보르헤스)가 쓰고 있는지 아니면 나(개인적인 사적 보르헤스)가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보르헤스는 또 말하기를, 인간이란 동시에 연극의 배우이며, 연출가이며, 관객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자아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의 문제에 대한 보르헤스의 생각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1990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멕시코의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는 보르헤스의 부음을 듣고 보르헤스를 회상하여 쓴 글의 제목을 〈궁사(弓士)와 궁시(弓矢, 활과 화살) 그리고 과녁의 일치〉라고 붙였다. 바로 활을 쏘는 사람이나, 날아가는 활이나, 활이 가서 박히는 과녁이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보르헤스를 기념하여 그렇게 붙인 것이다.

파스가 본 보르헤스의 핵심은 이것이었다. 그러나 이 주제 또한 보르헤스가 인도사상에서 따온 발상이라는 것을 그가 쓴 《보르헤스의 불교강의》에서 암시하고 있다. 그는 불교에 영향을 미친 사상을 설명하면서, 인도 육파철학의 하나인 상키야 학파의 학설을 소개한다.

우리가 본질적으로는 우리 생의 배우가 아니라 관객이라는 논리를 환기시키기 위하여 상키야 학자들은 아름다운 비유를 든다. 무용이나 연극공연을 보러 가면 우리는 흔히 자신이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을 한다. 우리가 생각이나 행동을 할 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한 사람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또 그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상태를 함께한다. 이 친밀한 동거(同居)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곧 그 사람이라고 믿는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이와 유사하게 자신의 자서전 제목을 《그의 생의 목격자가 이야기하는 빅토르 위고》라고 지었다.

그는 《꿈의 책(Libro de suenos)》 서문에서, 18세기 영국의 작가 애디슨(J. Addison)이 들려준 꿈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는 꿈속에서 자신이 동시에 무대 위에선 연기하고, 무대 뒤에선 연출하며, 객석에선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에 대한 매우 의미심장한 비유이다. 우리가 동시에 배우이며 관객이라는 생각은 보르헤스로 하여금 서구 근대철학의 핵심주제인 ‘근대적 주체(ego moderno)’에 대하여 회의하게 했다.

보르헤스는 《보르헤스의 불교강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면서 13세기 페르시아의 범신론자 할랄 우딘 루미의 말(“나는 그물을 던지는 자요 낚이는 고기이다”)과 쇼펜하우어의 말(“고문하는 자와 고문받는 자는 동일인이다”) 그리고 보들레르의 말(“나는 때리는 손이며 맞는 뺨이다”) 등을 인용한다.

그리고 실제로 이 문제를 작품화하는데, 대표적인 단편소설이 〈신학자들〉이다. 이 소설에서 신학적 입장이 다른 두 신학자가 치열한 논쟁을 벌이다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단으로 몰아 화형(火刑)에 처하게 한다. 그러나 가해자의 입장이었던 신학자도 후일 불에 타 죽는데, 그는 사후 신성의 마음속에서는 정통파와 이단자, 고발자와 희생자, 증오하는 자와 증오받는 자 모두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인간의 차원에서는 서로 적대적인 입장이지만, 초월적인 신의 차원에서는 모두 동일인이라는 것이다.
세계의 속성이 환영이라고 하는 보르헤스의 또 다른 중요한 문학적 주제 역시 인도 사상에 빚지고 있다. 그가 불교에 영향을 미친 두 번째 사상으로 베단타 학파를 소개하는 글에서 세상의 본질이 환영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8세기의 베단타 철학자 상카라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세계는 무지와 환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모두 본질의 겉면에 불과할 뿐이라고 상카라는 말한다. 열과 빛이 불의 속성인 것처럼, 마야(幻影)는 신의 속성일 뿐이다. 신의 정확한 모습을 파악한다면, 환상 따위는 믿지 않을 것이다. 우주는 거대한 환영이며 육체, 자아, 창조주로서의 신의 개념 등은 그 환영의 부분적인 모습일 뿐이다.

세상은 신이 꾼 꿈(마야)이라고 하는 인도 사상에서 빌린 아이디어에 의해 또한 《픽션》에 수록된 그의 작품 〈원형의 폐허들〉이 탄생한다. 이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하나의 초자연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즉 그는 신이 꿈을 꿈으로써 우리를 이 땅에서 살게 하듯이 그도 한 인간을 꿈꿈으로써 현실 속에 내놓고 싶었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하나의 완전한 인간, 한 소년, 한 아들을 ‘꿈꿨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창조물이 자기가 다른 사람의 꿈에 의해 만들어진 단순한 환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얼마나 굴욕감을 느낄 것인가 하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던 중 그가 살고 있는 신전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불길은 그의 살갗 속을 파고들지 못했다. 불길은 그를 할퀴고 그를 집어삼켰지만 그는 불의 열기를 느끼지도 못했고, 타지도 않았다. 안도감과 함께, 치욕감과 함께, 두려움과 함께 그는 자신 또한 자신의 아들처럼 다른 사람에 의해 꿈꾸어진 하나의 환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미로정원, 소설로 그려낸 업 사상

보르헤스는 불교의 윤회설에 깊은 매력을 느꼈다. 그는 불교의 윤회설을 설명하면서 그것을 그리스 철학자들의 윤회설과 비교했다. 보르헤스는 윤회설을 주창한 피타고라스와 엠페도클레스 그리고 플라톤과 플로티누스의 윤회사상을 소개한 뒤, 고대 켈트족의 사제계급인 드루이다와 유태 카발라의 윤회전생론을 인도의 윤회설과 대조했다. 또한 ‘윤회설이야말로 철학이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이다’고 확신한 데이비드 흄과 쇼펜하우어가 이해한 윤회설을 소개했다. 덧붙여 “나는 클레오파트라 여왕의 침대에서/ 잠자던 병사였다”로 시작되는 루벤 다리오의 시도 인용했다.

보르헤스가 윤회를 직접 자신의 문학적 소재로 활용한 것은 〈죽지 않는 사람들〉에서이다. 여기서 주인공은 불사(不死)의 도시를 찾아가는데, 그곳에서 《오디세이》를 쓴 지 천오백 년이 지나서까지 살고 있는 호머를 만나고, 자신도 불사의 인간이 된다. 보르헤스는 이 작품에서 불교의 윤회설을 ‘우주적 차원의 하나의 정밀한 보상제도’라고 표현하고 있다. 영혼이 윤회한다고 하는 대부분의 서구 윤회설과는 달리, 영혼을 부정하는 불교의 윤회설의 핵심은 업사상(業思想)에 있다고 보르헤스는 보았다. 보르헤스는 고향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행한 불교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1989년에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것, 내가 만년에 눈이 먼 것, 오늘 밤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강연하는 것 등 이 모두가 내가 전생에 지은 업의 작용입니다. 현세에서의 나의 행동 중 전생의 행위와 무관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업이라는 것입니다. 업이란 너무도 정교한 정신적 구조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의 어느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인연의 천을 짜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지, 행동, 잠, 불면 그리고 꿈까지도 이 천을 구성하는 실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그 천을 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르헤스는 특별히 윤회의 장치로서의 ‘업’이라고 하는 사상에 주목했다. 그는 업을 정교한, 아주 정교한 정신 구조로 보았다. 보르헤스는 ‘업(業)’을 이렇게 정의했다.

인도에서는 전생의 행위가 이생을 결정하고, 이생의 행위가 내생(來生)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다음 생을 결정하는 행위를 인도 철학자들은 업(業, karma)이라고 정의했다. 이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만들다’ 혹은 ‘창조하다’를 의미하는 크리(kri)에서 파생되었다. 업은 우리가 끊임없이 짜나가는 천(織物)과 같은 것이다. 한 사람의 모든 행위, 말, 생각, 그리고 어쩌면 꿈까지도 사후(死後) 그의 다음 생을 결정짓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업이란 쉬지 않고 짜이는 인연의 천이라는 아이디어는 보르헤스로 하여금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단편소설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을 쓰게 했다. 보르헤스는 업이라는 그물구조에서 바로 ‘시간의 미로’라는 생각을 끄집어낸 것이다. 이 소설에서 보르헤스는 취팽 선생이라는 중국인이 만들었다는 ‘완벽하게 무한히 계속될 그런 미로’를 묘사했다. 

깨달음의 세계와 함께 보르헤스가 불교에서 가장 매력을 느꼈던 주제는 윤회설과 업(業) 사상이었다. 그는 업이라는 그물구조에서 ‘시간의 미로’라는 아이디어를 끄집어낸 것이다. 인간은 이 세상이라는 공간적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 살아가고 있지만, 동시에 업이라는 시간의 미로 속에서도 전생(轉生)하며 헤매고 있다는 것이 그의 관점이다.

알레프, 소설로 그려낸 화엄법계

보르헤스의 대표작에는 불교의 영향이 선명히 배어 있다. 그는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정각을 이루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홀로 나무 아래 정좌한 싯다르타는 순간적으로 자신과 모든 중생의 수많은 전생을 보았다. 한눈에 우주 구석구석의 수많은 세계를 둘러보았다. 그 뒤 인(因)과 과(果)의 사슬도 모두 보았다.

싯다르타 태자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이 장면에서 보르헤스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바로 한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시공간의 제약을 뚫고 전 우주적 존재로 변모하여 피안으로 도약하는 경험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부처님이 말한 우주의 심오한 구성방식(인과법)을 이해했다. 그는 그 정각 장면을 소설화해보고 싶었다. 먼저 그는 〈신의 글〉이라는 단편을 썼다.

신성과의, 우주와의 합일이 일어났다. 나는 지극히 높은 바퀴를 보았다. 그것은 내 눈앞에, 뒤에, 또는 옆에 있는 게 아니라 모든 곳에 동시에 있었다. 미래에 있을 것이고, 현재에 있고,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모든 것이 서로 얽혀 짜인 채 그 바퀴를 형성하고 있었다. 거대한 깨달음에서 오는 기쁨! 나는 우주의 심오한 구성방식을 보았다.

보르헤스가 말하는 바퀴란 진리의 법륜(法輪)임이 명백하다. 위의 묘사는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을 더욱 상세하게 묘사한 《화엄경》 〈입법계품〉의 선재동자의 깨달음의 장면과 너무나 유사하다. 《화엄경》에서는 바퀴가 탑으로 비유된다.

탑은 하늘과 같이 넓고 광대하다. (……) 젊은 순례자 선재는 각개의 탑 하나하나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탑들 속에서, 즉 하나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고 그 각각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그런 곳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알레프〉란 단편소설에서 이 세상의 실상이 제망찰해(帝網刹海)의 화엄법계임을 그려냈다. 알레프는 서구 알파벳의 첫 글자로 희랍어의 알파에 해당하는 말이다. 즉 모든 문명의 근원을 상징한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어느 지하실에서 우주의 비밀을 간직한 동전 크기만 한 발광체를 보았다고 했다. 그것은 일종의 우주경(宇宙鏡)으로서, 앞에서 나온 바퀴나 탑의 또 다른 비유이다. 그는 마니주를 본 체험을 소설로 형상화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알레프를 보았다. 알레프의 직경은 2~3센티미터밖에 안 되었지만, 우주 전 공간이 축소되지 않고 거기 있었다. 나는 현기증이 나서 울고 말았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그 이름을 남용하지만 결코 본 일이 없는 현현한 가상의 대상, 즉 불가해한 우주를 내 두 눈이 보았기 때문이다.

보르헤스의 서술은 소설 속의 평범한 묘사를 뛰어넘는 직관이 담겨 있다. 그것은 번개 같은 찰나에 우주의 신비를 깨친 어느 각자(覺者)의 체험이 담긴 글 같기 때문이다.

이분법에서 불이법으로
이성주의의 이분법에 기반을 둔 모더니즘적 사고를 넘어서야 한다는 반성이 작금의 시대적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보르헤스는 누구보다도 앞서 이 사실을 꿰뚫어 보았다. 그의 글은 주객 갈등의 완고한 근대적 자아라는 감옥에 갇혀, 대상에 대한 지배에 집착하고 정신분열에 신음하던 서구의 지성들에게 탁 트인 소요유와 확연무성한 불이법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보르헤스의 글을 읽고 서구가 수천 년 동안 사로잡혀 있던 이분법의 고정관념에서 깨어나오는 암시를 받았다. 이 점에서 우리는 왜 서구의 많은 지성이 보르헤스를 인식전환의 나침반으로 지목하고 따랐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보르헤스 사상 밑바닥에는 불교가 연연히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바야흐로 인류를 인도할 새로운 지성의 별이 동쪽에서 떠오르고 있다. 서구의 지성들이 깨달음의 세계에 눈을 뜬 것이다. 동서를 넘나든 보르헤스가 길을 열어놓은 바대로, 그 별은 포용적이고 궁극적 진리를 함유하는 불이법의 불교사상임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문제는 부처님이 제시한 그 진리가 어떻게 새로운 시대에 맞는 논리와 언어의 옷을 입고 나와서, 서구 지성까지 포함한 온 인류를 인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새 시대를 맞이하는 한국불교의 지성적 사명 역시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김홍근 / 문학평론가 ·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스페인 마드리드대학교 문학박사. 성천문화재단 고전아카데미 부원장 역임. 주요 저서로 《보르헤스 문학전기》 《참선일기》 《인생교과서-부처》 《선화(禪話)》 등과 역서로 《보르헤스의 불교강의》가 있다. 현재 한국간화선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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