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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탄불교, 접근을 위한 첫걸음
한지연 중국 섬서사범대학 서북민족연구중심 연구원
[27호] 2006년 09월 10일 (일) 한지연 중국 섬서사범대학 서북민족연구중심 연구원

이 글을 왜 쓰는가

불교의 전파경로 가운데 인도-중국 간의 가교 역할을 했던 서역지역의 불교사적 연구는 그동안 고고학적, 지리학적 접근에서 거론되어 왔다. 그러나 서역불교가 중국불교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불교학적 접근은 미비했다. 서역 오아시스로의 양 대로인 천산남로와 사막남로의 서역각국 불교에 대한 문헌학적 이해는 중국의 불교발전 양상을 고찰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특히 중국 수·당시대의 종파성립 가운데 화엄종의 성립은 기본적으로 각 품(品)의 개별적 한역에서 『화엄경』역출이 완성되었기에 가능했던 종파이다. 이러한 『화엄경』과 깊은 관련이 있는 사막남로에 위치한 호탄(Khotan)에 대한 연구가 중국 종파불교 성립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호탄이 어디에 위치한 나라였는지, 언제 건국되었으며, 언제 불교가 전래되었는가부터 한 걸음씩 호탄에 다가서기 위한 기초작업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물론 이 짧은 글에서 많은 결론을 낼 수는 없지만 호탄과 친해지기 위한 방법으로 건국설화와 불교전래 설화를 통해 대략적인 모습을 알아보려 한다. 그리고 중국 섬서성 섬서사범대학 내의 서북민족중심에서 6개월여 공부하면서 실크로드 지역 민족에 관한 접촉시간이 있었기에 이 글에서는 과감하게 호탄의 민족성에 관해서도 약간의 터치를 하려 한다. 미흡하지만 호탄으로 가는 첫걸음이라 생각하고 이 글을 읽는 분들과 함께 들어가 본다.

누가, 언제 사막 한가운데 국가를 세웠는가

호탄에 언제 불교가 유입되었는가. 이 문제를 거론하기에 앞서 호탄의 건국설화에 기록되어 있는 건국시기를 규명해봄으로써 불교전래시점을 추정해볼 수가 있다. 또한 건국설화에서 묘사되고 있는 내용으로 설화가 담고 있는 의미, 상징성을 알아보도록 한다.

호탄의 건국설화는 현재 티베트불전과 현장의 『대당서역기』 두 문헌에서 묘사되고 있다. 우선 티베트문헌의 기록을 살펴보자.

아쇼카 왕이 유행 도중 호탄에 도착했는데, 어느 날 밤 왕비가 이곳에서 잘 생긴 왕자를 낳았다. 점치는 사람이 점을 쳤더니…지금의 왕이 죽기 전에 왕이 될 것이다라고 해 왕은 두려워 왕자를 내다버렸다. 그런데 땅에서 우유가 솟아나와 왕자를 살렸으므로 그 아이를 지유(地乳 ; Sa-Nu, Kustana)라 칭하게 되었다. 그 때 중국에는 위대한 보살왕이 있었는데 왕에게는 이미 999명의 자식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비사문천(毘沙門天)에게 기원하여 1000명의 자식을 얻기를 원했기 때문에 비사문천은 버려진 아이를 이 왕에게 주었다.

중국 왕에 의해 키워진 아이는 자라서 자신이 실제 중국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1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자신이 태어난 서쪽으로 향했다. 지유의 아버지 아쇼카 왕에게 약사(耶舍)라는 이름의 대신이 있었는데, 왕에게 미움을 사 동족 7000명을 이끌고 호탄으로 오다가 지유 일행을 만났다. 두 집단의 영토다툼이 계속되자, 비사문천과 길상천이 공중에서 이를 보고 싸움을 중단시켰다.

그래서 두 신은 지금까지 이 나라의 수호신으로 숭배된다. 지유가 왕이 되고 약사는 대신이 되어 동서에서 온 이주자들은 각각 구역을 정하여 정주하였다. 양구역의 중간지대에는 중국인과 인도인이 혼합되었는데 이곳에 성역을 건설하였다. 건국은 불멸 후 234년 지유가 19세 때의 일이다.1)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기록된 건국설화는 다음과 같다.

옛날 이 나라는 사람이 살지 않는 광막한 대지였고 단지 비사문천이 거주하고 있었다. 옛 인도의 아쇼카 왕이 태자를 탁실라국의 태수로 보냈는데, 아육왕의 왕비가 이 일로 태자를 미워하여, 칙서를 위조해 태자의 죄를 물어 명하여 양 눈을 도려내게 하였다. 아쇼카 왕이 이 사실을 알고 노하여 이 일을 담당한 재상을 국외로 추방하였다. 추방된 자들은 이 나라의 국경으로 들어와 이곳의 호족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 그때 동국제왕(東國帝王)의 한 왕자도 역시 죄를 지어 도망 와 이 나라의 동쪽지역을 차지하고, 부하들에게 추대되어 왕이 되었다. 나중에 동서(東西)의 두 왕이 서로 싸워 서군이 패하고 동왕이 동서 두 나라를 통일하였다. 양국이 통일을 이루자 국왕은 한 선인의 교시를 받아 수도를 호탄의 땅에 세웠다라고 전한다. 왕은 나이가 들었지만 이제껏 자식이 없어 가계가 끊어질 위기에 놓였다. 바사문천에게 청해 자식을 기원하자 그 때 신상(神像)의 이마가 갈라지면서 아기를 얻었다. 그러나 그 자식이 우유를 먹지 않아 곧 죽게 되자 왕은 다시 빌었는데 갑자기 땅이 융기하면서 우유가 솟아 아이는 그것을 마시고 지혜롭고 용맹한 사람이 되었다. 이에 신사(神祀)를 세워 비사문천을 나라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그 후 왕통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고, 지유로 길렀기 때문에 지유를 국호로 하였다.

위의 티베트불전과 『대당서역기』에 기록된 건국설화에 관해 호탄 자국의 권위 및 왕실의 정통성을 확립시키려는 설화윤색과 아쇼카 왕의 전설 요소를 도입시킨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있었다. 더불어 두 문헌의 공통점으로 호탄의 초대왕은 동국제왕의 자손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2) 이를 토대로 호탄 제1대 왕은 동국제왕의 자손이라는 문제에 거의 대다수가 이의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대로 보자면 호탄 국가설립의 영향을 끼친 것은 다름 아닌 중국 측이 된다. 티베트불전에는 확연히 중국이 거론되고 있으며, 『대당서역기』에서 거론되고 있는 “동국”이라 함은 당시의 상황으로 추측 가능한 국가는 중국밖에 달리 거론할 국가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다고 보여 진다.

따라서 다시금 세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의 티베트불전에 의하면 건국을 이룬 지유는 실제는 아쇼카 왕의 아들이다. 어릴 때 중국 왕에 의해 길러졌다 하더라도 인도왕실과의 혈연관계는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다. 또한 대신의 직위를 갖고 있는 약사 역시 인도에서 들어온 대신으로, 비록 우두머리를 쫓아 호탄으로 유입되어 온 민족 구성이 인도와 중국으로 나뉜다 하더라도 지유는 인도 측 인물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더욱이 아쇼카 왕 즉위 8년에 일어난 칼링가 전쟁 이후, 서북인도의 상황을 잠시 보면 이러한 사실이 더욱 확실해진다. 즉, 칼링가 전쟁을 치르고 난 아쇼카 왕은 각 지역에 불교를 전파시키기 위한 전법사 파견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현재 파키스탄 영내의 각 지역에 남아 있는 불교문화재를 보더라도 아쇼카 왕 시기 이후 눈에 띠는 발전을 이룩한 것을 알 수 있다. 불교문화만 보더라도 당시 불교전파를 위한 전법사 파견과 더불어 불교문화의 전파를 위한 노력 또한 엿볼 수 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전법사 파견과 동시에 어느 정도 규모 있는 인구의 이동 역시 미루어 짐작해 볼 수가 있다. 때문에 “지유의 아버지 아쇼카 왕에게 약사라는 이름의 대신이 있었는데, 왕에게 미움을 사 동족 7000명을 이끌고 호탄으로 오다가”라는 대목은 설화로만 끝나지 않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티베트문서에서는 호탄의 역사를 리울의 역사로 부르고 있는데, 이것 역시 호탄 왕조사를 밝히는데 중요한 정보를 주며 또한 여러 불교성역의 원래 모습에 관해 묘사하고 있다. 또 가끔은 훌륭한 기초정보와 문서적인 문제를 참고할 만한 일련의 왕조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왕의 이름은 모두가 인도식이거나 접두사로서 “Vijaya”를 붙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중국과 관련된 왕실이었다면 굳이 인도식 접두사를 사용할 이유가 있을까? 또 재미있는 것은 영국의 아우렐 스타인(Aurel stein)경은 호탄인과 카시미르지역 사람들 사이에 일반적으로 보이는 얼굴 생김새에 어떤 유사성이 있다 생각하여 자주 이 두 지역을 찾았다고 한다.

반면 『대당서역기』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은 동국제왕의 아들이 호탄을 건립하고 그의 아들 이름을 국호로 정했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아쇼카 왕, 즉 인도왕실과의 혈연관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으며 오히려 중국 왕실과의 혈연관계가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호탄의 초대왕은 동국제왕의 자손이라는 주장은 양 문헌에 관한 명확한 분석이 필요한 주장이라 생각된다.

호탄의 건국설화는 두 문헌 모두 호탄의 건국과 더불어 호탄 왕실 자체에 대한 정통성 확립이라는 문제에 관해서는 인도, 중국왕실과의 혈연관계로 연결지음으로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 살펴보았듯 좀 더 발전시켜 생각해본다면 호탄 왕실은 역사적인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중국보다는 인도 측 민족과 좀더 관련이 있다고 보여 진다. 뿐만 아니라 위에서 언급했던 영국의 사타인 경의 조사를 통해 보면 호탄이 기원전 182년경 서북인도 -특히 지금의 파키스탄 탁실라 지역-의 이주민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또 다른 증거가 나오고 있다.

현재 ‘니야’ 유적지는 과거 ‘누란’으로 호탄의 동쪽에 위치한 국가였다. 이곳에서 발견된 것은 다름 아닌 목독(木牘)인 것이다. 목독이란 일종의 목간으로 여기에 기원전 2~3세기부터 기원 직후까지 인도 북서단에서 사용하던 카로슈티 문자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발견된 대다수의 목독에 관해서 스타인 경은 초기 프라크리티어3)를 카로슈티 문자로 표기한 공문서 등으로 결론내리고 있다.

이런 스타인 경의 카로슈티 목독 발견은 호탄의 대략적인 건립연대와 건국 주체자들의 출신지역까지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도 니야 유적지에서 발견된 목각들의 양식이 대부분 초기 간다라 양식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 역시 서북인도의 이주민이 건국 주체자들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위 문헌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호탄의 건국시기가 명기되어 있다는 점이다.

티베트불전에 의하면 ‘건국은 불멸 후 234년 지유가 19세 때의 일이다’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불멸연대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 불멸연대에 관해서는 대략 60여 종이 있다. 일본에서는 기원전 384년, 386년, 584년설 등이 있고, 중국에서는 기원전 1027년설을, 남방계에서는 6244년 등이 거론되고 있다. 또한 서구에서는 5세기설이 거론되고 있는데, 중국의 1027년설의 경우를 본다면 호탄의 건국 시기는 기원전 793년으로 아쇼카 왕 치세연도와 일치할 수가 없다. 또 일본의 384년설의 경우에도 건국연대가 150년이 되고, 584년설은 350년으로 모두 설화내용과 어긋나고 있다. 최근에는 대략 기원전 500~400년대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설화내용 상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기원전 486년설로 486-234=252년으로 건국시기를 대략 잡을 수가 있는 것이다.

불교는 언제 전래하였는가

기원전 252년 경 건국된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는 호탄에 언제 불교가 유입되었는가. 건국설화의 내용으로 건국과 동시에 불교유입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점이 생길만큼 불교적 색채를 띤 윤색이 있었던 기록이다. 그러나 현재 호탄의 불교전래설화가 현존하는 만큼 그 전래설화부터 살펴야할 것이다.

『송운행기(宋云行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와 티베트불전 『우전교법사(于敎法史)』에 기록되어 있는 전래설화는 다음과 같다.

① 『송운행기』
왕은 닭 볏과 같은 금관을 쓰는데 머리 뒤로 길이 이 척, 폭 오 촌의 비단을 늘어뜨려 장식하였다. 의장대는 북, 뿔피리, 금 징, 활과 화살 한 구, 창 두 자루, 창 다섯 자루를 갖추었다. 좌우에 칼을 지닌 사람은 백을 넘지 않는다. 그들의 풍속은 부인들이 바지와 짧은 적삼을 입고 허리띠를 한 채 말을 타고 달리니 장부와 다를 게 없다. …… 본래 우전왕은 불법을 믿지 않았다. 어떤 오랑캐 상인이 비로전이란 이름의 비구를 성 남쪽 살구나무 아래에 데려다 놓고 왕에게 죄를 아뢰며 말하였다.
‘지금 다른 나라의 승려를 성 남쪽 살구나무 밑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왕이 이 말을 듣자 벌컥 화를 내며 즉시 그 곳으로 가보니 비로전이 왕에게 말하길, ‘여래가 나를 보낸 까닭은 왕에게 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탑 하나를 만들게 하여 왕업을 영원하게 하시려 한 것입니다’ 이에 왕이 ‘나로 하여금 부처를 만나게 한다면 당장 명령대로 하겠다.’
비로전이 종을 울려 부처에게 고하자마자 라훌라를 보내 형체를 바꾸어 부처로 만드니 공중에 부처의 모습이 나타났다. 왕이 오체를 땅에 던져 절하고는 즉시 살구나무 아래에 절을 만들고 라훌라 상을 그리니, 부처의 모습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우전왕은 다시 정사를 지어 라훌라 상을 모셨다. 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탑 그림자가 항상 건불 밖으로 나와서 그것을 보는 자들은 회향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안에는 벽지불의 신발이 있는데 당시까지도 썩지 않았다. 가죽도 아닌, 비단도 아닌 무엇으로 만든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② 『대당서역기』
옛날 이 나라에 불교가 아직 행해지지 않았을 때 아라한은 카시미르 국으로부터 이 숲 속에 와 선정하고 있었다. 마침 이를 본 사람은 그 용모와 차림새에 놀라 왕에게 자세히 고해바쳤다. 왕은 몸소 나가 그 거동을 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나한은 여래의 제자로 조용한 곳에서 선정을 행하고 있는 사람으로 대왕이 복덕을 행해 불교를 넓히고 가람을 지어 승도를 모여들게 해주십사 말하였다. 왕은 여래에게 어떤 덕이 있으며 어떤 신이기에 나한이 숲 속에 살면서 고행을 하고 그 가르침을 받들고 있는가를 물었다. 나한은 여래는 사생에 자비를 베풀고 삼계를 지도하면서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기도 하며, 생멸유전(生滅流轉)의 이치를 가르쳤으며, 그 가르침에 귀의하는 자는 생사의 경지를 떠날 수가 있고 그 가르침을 믿지 않는 자는 애욕의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가람을 지었으나 부처님은 어디에 계신다는 것인지 왕이 묻자 나한은 정성을 보이라 하였고, 왕은 부처님께 예를 갖추자 하늘에서 불상이 내려와 왕에게 간타를 건네주었다. 왕은 그로부터 진심으로 불교를 보급하게 되었다.4)

③ 『우전교법사』
세인(世人)을 구도하는 미륵보살과 문수보살 두 분이 우전이 삼세불(三世佛) 복전(福田) 가운데 한 곳이라는 것을 알고 우전 사람들을 선지식으로 만들기 위해 두 분은 우전으로 내려와 잡니마국 동산에 도착하였다. 미륵보살은 국왕이 되어 위지림박와라 이름 하였고, 문수보살의 화신 비로자나비구는 잡니마니국 동산 안에 거주하면서 사람들에게 문자와 말을 가르쳐 성교(聖敎)가 일어나게 하였다. 후에 국왕 위지림박와는 성자 문수보살과 비로자나 비구를 위해 우전에 잡니마사를 건립하였다.

『송운행기』와 『우전교법사』에서는 공통적으로 ‘비로자나’가 등장하고 있다. 비로자나는 중국 종파불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화엄종에서는 석가모니와 동일한, 즉 삼신불(三身佛) 가운데에서 법신, 보신, 응신의 개념이 아니다. 천태종의 경우 비로자나는 법신으로 배대하면서도 체(體)는 같지만 이름만 다른 것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본다. 결국 비로자나는 대승불교 경전에서 빈번히 출현되고 있는 부처님으로 중국에서는 석가모니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있다. 특히 『화엄경』과 이후 중국에서 일어난 화엄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특기할 사항이다. 그리고 세 문헌 모두 불교전래와 동시에 가람과 불상, 탑의 건립이 이루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언제 불교가 전래되었는가.

티베트불전의 『우전국수기(于國授記)』에 보면 ‘우전 건국 165년 비자야 삼바하베(Vijaya sambhave) 3代왕이 즉위하고 5년째의 일’이라 기록하고 있다. 3대왕인 위지림박와는 건국 후 165년이 흐른 시점에 왕위에 즉위, 5년 후 불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건국 시기는 앞서 252년으로 추정, 이에 근거하여 기원전 82년경에 호탄에 불교가 전래된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크게 변함이 없다.
여기서 잠시 중국과 서역간의 교류역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중국과 서역과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점은 전한(前漢) 무제연간(武帝年間)이다.5) 장건에 의한 서역착공으로 중국과 서역간의 교류가 시작된다. 장건은 기원전 138년 1차 서역행을 기점으로 기원전 119년의 4차 서역행까지 무려 24년간에 걸쳐 서역각국으로 원정을 나선다. 서역행의 목적은 흉노정벌에 두었지만 이 원정을 통해 한의 서역경략권을 보장키 위해 회랑(回廊)이 설치되었다. 이후 후한대(後漢代)에 들어서면서 장군 반초(班超)가 선선국과 우전국을 한국(漢國)에 복속시켰다. 그렇다면 전한시대 원정을 떠났던 장건은 호탄에 관해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한서(漢書)』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우전국은 왕이 서쪽의 성을 통치하며 장안에서 9672리(3천797만6천7백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가구 수는 3300호, 인구는 19300명, 병사는 2400명이다.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제후와 좌우의 장군…옥석이 많이 나며 서쪽 380 리를 가면 피산(皮山)이 통한다.6)

위와 같은 가구, 인구, 병사의 수는 장건의 원정을 바탕으로 기록된 것이므로 기원전 138년~119년에 걸친 사항이라 볼 수 있다. 이후 반초장군은 후한 명제(明帝) 영평(永平) 16년(73)에 서역에 파견되었다. 이때 호탄에 들어간 반초장군과 관련된 기사를 『후한서(後漢書)』를 통해 살펴본다.

이때 우전왕 광덕(廣德)은 사차국을 공격, 격파하여 남도에서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흉노는 사신을 보내 우전국을 감독, 보호하였다. 반초장군은 이미 서역에 들어와 먼저 우전에 도착했다. 광덕왕은 존경의 뜻을 깊이 나누었다. 또한 그 풍속으로 무당을 믿었다. 무당이 말하길…(후략).7)

반초장군이 우전국에 들어갔을 때의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후한 명제 영평 16년(AD 73년)에 원정을 갔을 당시의 풍속에 관해 언급하면서 불교에 관련된 풍속의 묘사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시점을 대략 기원후 70년 정도로 잡고 있으며, 실질적인 불교전파를 그 이전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반초가 호탄에 들어갔을 시점에 중국에서는 이미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탄의 풍속에 대해 무속신앙적인 성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호탄불교의 시작은 가람, 불상, 탑 등의 조성과 함께 이루어졌다. 또한 불교 전래설화처럼 기원전 82년경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면 이미 1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기원후 73년에 특기할 만한 불교적 색채 없이 ‘무속신앙’이라 기술한 것은 전후사정을 고려했을 때 맞지 않는 부분이 매우 많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기존의 기원전 82년설에서 100여년 후인 기원후 70여년에 불교가 전래된 것으로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허나 이럴 경우 호탄의 불교전래 시점을 늦추기 보다는 중국 불교전래 시점을 한 시기 올려야 하는 것이 더욱 합당하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호탄을 비롯한 서역 불교의 역사가 연구되어져야만 중국의 불교전래 시점이 좀 더 명확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떤 불교가 전래되었을까

호탄에 불교가 전래된 시점에 관해서는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기원전 82년설이 있고, 본고에서는 기원후 70년 이후로 잡고 있다. 두 시기 모두에 공통적으로 관련시켜볼 수 있는 불교사상의 흐름은 어떤 것인가.

불교전래설화가 기록되어 있는 『송운행기』 『대당서역기』 『우전교법사』 등에서 묘사되고 있는 사항들은 대승불교사상의 흥기와 발전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부파불교사상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불타의 법(法) 그 자체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던데 비해 대승불교 흥기와 더불어 불탑신앙이 압도적으로 강했다.8) 그리고 이러한 불탑에 예배하는 신앙자들에게 응답하는 인격적인 불타의 모습이 요구됨에 따라 ‘보살(菩薩)’이 출현하게 된다. 물론 보살이라는 용어가 쓰인 것은 대승경전에서 최초로 쓰였다고 볼 수는 없다. 불전문학 『숫타니파타』 『나라카경』 『자타카』 등에서 보이고 있고, 이런 보살에 관한 연원 문제에 관해서는 그 설이 매우 분분하다.9) 그러나 대승에서 사용되고 있는 ‘재가보살’적 개념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고 다만 지위의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사원, 탑, 불상의 조성과 더불어 문수보살 및 미륵보살의 등장은 지극히 대승적 성격의 불교가 전래되었음을 암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문수보살의 경우 『수능엄삼매경』에서는 수능엄삼매라는 것은 보살이 갖추어야 할 자세를 나타내는 것이며, 이를 인격적으로 상징한 것이 문수사리라고 하고 있다. 또 『반야경』에서는 위의 『수능엄삼매경』과 다르게 문수보살은 어떤 역할 수행의 문제가 아닌 단지 출가한 보살10)로 간주되고 있으며, 이에 비해 미륵보살은 재가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우전교법사』에서 ‘미륵보살은 국왕이 되어 위지림박와라 이름 하였고, 문수보살의 화신 비로자나비구는 잡니마니국 동산 안에 거주하면서 사람들에게 문자와 말을 가르쳐 성교(聖敎)가 일어나게 하였다’라고 한 부분은 『반야경』에서 표현되고 있는 미륵과 문수보살의 상징성 문제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밖에도 『대당서역기』의 기록 가운데 ‘…왕은 부처님께 예를 갖추자 하늘에서 불상이 내려와…’라는 언급은 대승불교 특징 중 하나인 예불참회의 법을 제시한 것과 연관지어 볼 수 있으며, 또한 응답의 효과로서 불상이 내려왔다는 것은 대승불교의 불탑신앙과 보살사상과의 밀접한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의 세 문헌 모두 그 내용 및 표현상에 있어서 대승불교적 성격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대당서역기』안에서는 처음 호탄에 불교를 전해준 인물에 대한 표현으로 ‘아라한(Arahat)’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아라한의 경우 부파불교에서 최상의 목적으로 추구하는 과위(果位)이다. 성문사과(聖門四果) 가운데 가장 수승한 경지로서 아라한위는 무학도(無學道)ㆍ무학위(無學位)인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이는 대승불교에 들어서 크게 대두된 ‘보살’과 대비되는 과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라한 기록 뒤에 나오는 내용전개로 볼 때, 단순히 대소승을 엄격하게 구별 지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위의 세 문헌을 통합, 고려했을 때 지극히 대승불교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설과 상상을 마치며

지금까지 호탄의 건국설화와 불교전래에 관한 문제를 전설을 통해 살펴보았다.

건국설화는 호탄지역에서 나온 문헌이 아닌 중국과 티베트 문헌으로 연구되어지기 때문에 그에 따른 문제점이 발견되고 있음을 보았다. 동시에 불교전래에 관한 부분에서도 그 시기를 명확한 답을 내리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이 문제들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지금까지 서양학자들 위주로 발표되었던 논문으로 호탄에 관한 연구가 중단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다만 이 글을 쓰면서 잠정적으로 결론내릴 수 있는 것은 호탄의 대략적인 건국 시기와 건국 주체들이 서북인도 - 지금의 탁실라 유역 - 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일부 학자들에 의해 부파불교성격에서 대승불교로의 발전과정을 겪었다고 주장되는 호탄의 불교성격이 불교전래 그 시점부터 대승불교의 성격이 아니었는가에 관해 언급하였다. 지금까지 서역의 불교를 부파 → 대승불교로의 발전과정을 거쳤다는 연구 때문에 호탄불교 역시 동일선상에 놓여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많은 불교사료를 통해 처음부터 대승불교가 성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앞으로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이 문제에 관한 명확한 답을 내림으로써 사막남도의 불교성격을 규명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앞서도 말했지만, 서역의 불교가 연구되어져야만 중국의 불교전래 시점 역시 명확하게 규명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중국불교를 공부하다가 갑자기 서역불교의 길로 들어선 것은 바로 중국의 불교 전래시점의 불투명성에 답답함을 느낌과 동시에 경전의 역경작업 문제를 더 명확하게 알고자 이 길로 뛰어든 것이다. 이 갑갑증을 풀기 위해 뛰어들었으나 서역 모든 고대 국가에 대한 미비한 자료로 비록 힘들긴 하지만, 이번 글과 같이 한 걸음 한 걸음 사막 한가운데로 발을 내딛음으로 신비에 싸여있는 실크로드 국가들과 그들의 불교를 세상 밖으로 내보이겠다는 서원을 세우며 글을 마친다.

한지연
중국 섬서사범대학 서북민족연구중심 연구원 .2000년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졸업. 2002년 박사과정 수료. 1998년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연구조교 및 동 대학원 불교학과 대학원 조교. 이후 BK21 ‘불교사상과 문화’ 사업 및 ‘한국의 역사’ 정보화사업, ‘간다라역사와 문화’ 학술진흥재단 사업 등에 참여했으며, 2005년부터 중국 섬서사범대학 서북민족연구센터 방문학자로 활동했다. 논문으로는 「중국초기 역경사업에 관한 연구」 「신라하대 선사상 연구」 「쿠차불교의 역사와 문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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