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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분노에 대한 생명철학적 이해 / 박재순
특집 | 한국사회와 분노 그리고 불교
[67호] 2016년 09월 01일 (목) 박재순 p994@chol.com

1. 분노 감정에 대한 생명철학적 이해

감정, 생명의 주체적 반응과 표현

감정은 생명의 반응이고 표현이다. 생명은 고정된 실체나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주체다. 생명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생명의 표현인 감정도 고정된 실체나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주체다. 따라서 생명과 감정은 과학적 관찰, 철학적 성찰, 종교적 관조의 대상이기 전에 살아 움직이는 주체다. 생명과 감정을 대상화하는 모든 연구방법과 접근방식은 이차적이고 간접적인 것이다. 생명철학은 생명과 감정을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본다. 관찰자와 연구자의 자리에서 보지 않고 살아서 꿈틀거리고 움직이는 사람의 자리에서 생명을 보고, 분노하고 미워하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의 자리에서 감정을 이해한다. 주체의 자리, 당사자의 자리서 생명과 감정을 느끼고 이해하고 생각할 때 생명과 감정을 깊이 제대로 이해하고 병들고 상처받은 생명과 감정을 치유하고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오늘의 시대는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분출하는 시대이면서도 감정을 질병으로 보고, 감정을 억압하고 배제하는 학문과 종교 도덕의 전통도 확고하다. 심리학과 의학에서는 생명과 감정을 질병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생명과 감정을 질병으로 보는 것은 관찰자의 자리에서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서구 언어에서 감정(pathos)은 고통과 질병을 나타낸다. 병리학(pathology)은 감정(pathos)을 병으로 본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오늘의 심리학과 병리학은 인간과 생명, 감정을 고통과 병의 관점에서 보고 치유하려고 한다. 인간의 생명과 감정을 질병과 고난으로 본 것은 생의 주체로 보지 않고 대상으로 본 것이고 생의 중심과 깊이에서 보지 않고 표면과 증상으로 본 것이다. 생명과 감정을 대상화, 타자화하고 표면과 증상으로 보면 생명과 감정을 깊이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치유하고 살릴 수 없다. 생명과 감정을 대상화하고 표면에서 관찰하고 논의하게 된 것은 서구의 학문전통이 생명과 감정을 수학과 과학의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수학과 기하학의 세계는 생명과 감정이 없는 불생불멸의 세계이고 자기 완결적인 닫힌 세계다. 산술계산과 인과율을 생명과 정신에 직접 적용하는 것은 반생명적이다.

하늘을 제거하고 아버지를 살해하여 권력을 쟁탈한 그리스의 건국신화는 갈등과 투쟁이론을 바탕으로 삼는다. 수학에 의존한 그리스철학과 서구 근대과학철학은 산술계산과 인과율, 갈등이론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수학적 사고와 갈등이론에서 인간과 감정을 질병과 고통의 관점에서 보는 심리학은 인간을 person, ego로 보고 pre-personal, personal, transpersonal로 인간의 감정과 의식을 구분한다. 퍼슨(person)은 사사로운 개인이며 이기심과 욕망으로 가득한 에고(ego, 자아)다. 퍼슨, 에고는 하늘과 단절되고 이웃과 대립하고 역사와 사회에 대해서 닫힌 존재다. 퍼슨과 에고로서의 인간은 병적이며 갈등과 고통 속에 있는 존재다. 인간의 심리와 감정을 관찰자의 자리에서 대상화하는 이런 인간 이해는 병적 원인과 결과의 관점에서 인간의 심리와 감정의 문제와 병을 진단하고 분석하고 처방하는 데 효과적이다. 그러나 건강한 생명과 감정을 깊이 이해하고 병든 감정을 치유하고 정화하며 고양시키는 데 적합하지 않다. 이런 병리학적 심리학은 인간생명의 건강과 해방, 깊은 자유와 일치, 옹근 실현과 완성에 이를 수 없다. 퍼슨, 에고를 지배하는 욕망(에로스)은 존재의 결핍을 채우려는 충동이며 이런 퍼슨, 에고를 산술계산과 인과율로 이해하려는 학문적 노력은 생명의 본성과 깊이에 이를 수 없다. 생명은 통계자료와 물질적 인과관계를 넘어서 속에서 솟아오르고 흘러넘치는 힘(자발성)과 사랑(헌신성)이기 때문이다.

분노 감정과 정의에 대한 생명철학적 이해

생명은 물질 안에서 물질을 초월한 것이다. 운동법칙과 인과율과 상대원리에 의해서 지배되고 규정되는 물질세계의 제약과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다. 생명은 물질의 타성적인 잠과 법칙적인 속박에서 해방된 것이다. 저마다 스스로 움직이는 염통과 허파의 상생과 공존 관계는 인과율과 상대성원리가 지배하는 4차원 시공간의 물질세계에서는 성립할 수 없다. 생명은 물질과 물성의 법칙과 속박을 초월한 주체(나)의 깊이와 자유이며 스스로 하는 주체의 내적 통일이다. 생명진화 과정은 스스로 하는 생명주체의 깊이와 자유를 지향하면서 서로 살림과 공존의 관계를 실현하는 길로 나아갔다. 진핵세포는 적대적 세균들의 상생과 공존으로 생겨났고 다세포생물은 함께 살고 함께 죽는 운명공동체다. 생명은 물질과 물성의 제약과 속박에서 해방된 기쁨과 신명이며 사랑과 평화의 축제다. 우주의 물질세계에서 물질의 속박과 제약을 초월하여 생명의 세계가 생겨난 것은 참으로 놀랍고 위대한 일이다. 그것은 우주가 생겨난 것보다 더 새롭고 감동적인 일이다. 물질에서 해방된 생명의 자존과 기쁨은 우주보다 깊고 큰 것이다. 깊은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누구나 생명의 기쁨을 느낀다.

감정은 외물과 타자, 상황과 사태에 대한 위대한 생명의 반응이고 자기의식이며 판단이다. ‘생명을 긍정하는가, 부정하는가, 생명에 이로운가, 해로운가?’에 따라서 생명이 ‘좋다 나쁘다(싫다). 기쁘다 슬프다. 밉다 사랑한다.’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분노는 공정성이 훼손될 때 일어나는 감정이다. 올바르지 못하고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 분출하는 감정이다.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 뇌신경세포가 먼저 반응하며 분노의 감정이 생긴다. 인간에게 가장 공정하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생명과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생명과 인간을 물건, 물질로 취급하고 돈이나 기계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생의 놀라운 기쁨과 자존감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또한 생명의 사랑과 평화, 사귐과 관계를 깨트리고 부정하고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 사랑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것, 서로 자유로운 주체로서 사귐을 거부하고 배제하는 것이 불공정한 것이다. 생명의 존엄을 깊이 느낄수록 생명의 존엄이 훼손되는 불공정에 대한 분노도 깊고 커진다. 생명의 기쁨이 깊고 큰 만큼, 짓밟히고 무시당한 생명의 분노와 혐오도 크고 강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정의는 능력과 업적에 따라서 사회적 지위(명예)와 재화를 분배하는 것이다. 서구 정치사에서 정의는 각자에게 적합한 것을 주는 것이다. 이런 정의관은 생명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지엽적이고 표면적이다. 생명(生命)의 정의는 생명을 살리고 존중하고 실현하고 완성하는 것이다. 서구사회가 사회정치적으로 확보한 권리(rights)를 바탕으로 법과 정의를 이해한 것은 서구의 철학이 사회정치적인 제약과 한계 속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한다. 권리는 생명 앞에서 너무 작고 초라한 것이다. 생존권이라는 말은 생명에 대한 몰이해와 모독을 담고 있다. 누가 생명에 생존의 권리를 부여하는가? 생명은 그 자체로서 놀랍고 위대한 것이며 기쁘고 신명 나는 것으로서 상생과 공존의 아름다운 사귐으로서 축하하고 찬미할 것이다. 생명은 권리가 아니다.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은 것이 아니다. 조건도 이유도 없이 생명은 그 자체로서 절대로 살아야 하는 명령이고 의무다. 살까 말까 망설이는 것은 생명에 대한 오해이고 착각이다. 생명을 생명 아닌 물질로 오해하고 착각했기 때문에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질은 소멸할 수 있고 육체와 몸은 죽을 수 있지만, 생명 그 자체는 죽음을 모르는 것이다. 생명이 산다는 것은 당연히 살아야 하는 사명이고 천명이다.

권리를 넘어서 생명의 근원으로, 기쁨과 사랑의 삶으로 초대한 것이 석가, 예수, 공자, 노자와 같은 성현의 가르침이다. 가장 부당하고 불의한 일은 생명을 부정하고 파괴하고 죽이는 것이다. 기쁨과 사랑의 공동체와 축제를 거부하는 것이다.

언제 사람이 분노하는가? 생명을 생명으로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을 때, 삶의 기쁨과 신명을 부정할 때, 사랑과 평화의 사귐을 거절하고 배제할 때 사람은 가장 분노한다.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할 때 분노를 느낀다. 불공정하게 당하는 고난은 분노를 일으킨다. 따라서 분노의 감정은 사회의 권리와 의무 개념이나 범위를 훨씬 넘어서며 그보다 훨씬 깊은 것이다. 생명철학의 관점에서 정의는 생명의 기쁨과 사랑, 존엄을 지키고 살리고 누리고 고양시키는 것이다. 한마디로 줄이면, 생명을 죽이거나 죽게 하는 것은 불의하고 불공정한 것이고 생명을 살리거나 살게 하는 것은 의롭고 마땅한 것이다.

2. 전통 종교철학의 감정 이해

수학 중심의 서구철학에 대한 반성

감정에 대한 이해와 접근은 문명권에 따라서 다르다. 그리스 · 로마의 건국신화에 따르면 이들은 하늘(우라노스, 아버지)을 거세하고 살해한 다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통치 질서를 수립했다. 이 건국신화는 이민족을 정복한 후 인간 이성을 중심으로 국가질서를 형성한 그리스 로마의 정치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런 정치역사의 전통에서 형성된 그리스철학(헬레니즘)에서 이성은 지배자와 통치자이며 감정은 다스림을 당하고 제어되어야 할 대상이다. 여기서 감정은 주체로 대접받지 못한다. 역사와 사회의 공동체적 전통을 중시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정을 인생과 사회관계의 중요한 요소로 보고 존중했지만, 감정을 주체로 보지는 못했다. 그도 역시 이성을 중심으로 인간과 감정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 로마의 대표적 철학인 스토아학파는 감정을 완전히 극복하고 초월한 ‘무감정(아파테이아)’을 삶의 이상적인 경지로 보았다. ‘무감정’의 이상은 감정을 이성에 의한 극복과 통제의 대상으로 본 그리스철학의 귀결이었다.

이성 중심의 그리스철학은 수학과 자연과학을 중시한 자연철학의 전통에서 형성되었다. 플라톤이 아카데미아의 정문에 “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마라.”고 써 붙인 것은 수학이 그의 철학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해 준다. 그가 말한 ‘이데아’나 ‘형상’은 수학과 기하학의 원리와 도형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산술계산과 평면기하학의 세계는 생명과 감정이 없고 고난과 죽음이 없는 불생불멸, 절대불변의 세계다.

수학은 물질과 생명, 감정을 배제하고 제거한다. 불교, 힌두교, 요가 철학에 큰 영향을 미친 인도의 상키야학파는 수론(數論)에 근거해서 물질과 의식을 나누고 물질과 생명은 죄와 더러움을 가진 것이고 의식, 정신은 깨끗하고 영원한 것으로 보았다. 물질과 몸을 지닌 현실세계는 더럽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보는 비관적인 철학이 인도철학을 지배하게 된 것도, 수론의 세계를 미화하고 물질과 생명의 현실세계를 부정하는 잘못된 세계관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불교도 수론학파인 상키야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물질과 생명과 감정을 영혼의 감옥으로 보고 고통의 바다로 보았다. 불교는 정(情)을 ‘혼탁한 망상’으로 보았다(naver 국어사전). 고통과 병으로 본 것이다. 물질과 생명과 감정에 대한 불교의 이러한 부정적인 이해는 수론에 지배된 고대철학과 학문의 오류와 독단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우주 1㎤ 공간 안에 원자폭탄 10억 개와 맞먹는 에너지가 들어 있다. 물질 안에 저다운 물성, 성질이 있고 존재의 깊이와 주체가 있다. 물질과 생명은 더럽고 악한 것이 아니다. 물질이 생명과 정신을 억압하고 더럽힐 수 있지만, 물질을 통해서 생명의 기쁨과 자유, 사랑과 헌신이 표현될 수 있다. 몸은 생명을 유한하고 불안정하고 연약하게 만들지만 몸을 통해 생명의 기쁨과 자유, 아름다움과 사랑이 표현될 수 있다. 몸은 생명과 신령의 집이 될 수 있다.

히브리 성경(구약성경)의 분노와 극복 과정

불의하고 낡은 국가질서와 체제를 버리고 떠돌이 생활을 했던 히브리-기독교인들은 굶주림, 고난, 죽음의 위기 속에서 살았다. 삶과 죽음의 근본적인 위기 속에서 살았던 이들에게서 욕망(식욕과 성욕)과 감정은 관찰과 성찰의 대상도 아니고 억압과 통제의 대상도 아니었다. 오히려 욕망과 감정은 삶의 욕구와 열망을 드러내는 주체적 표현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몸과 맘으로 불의한 고난을 겪고 분노와 슬픔을 표현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삶과 감정을 관찰자의 자리에서 대상화하는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들은 고난을 깊이 체험하고 아파했으며 분노하고 슬퍼했으며 분노와 슬픔 속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했다. 감정은 삶의 가장 깊고 높은 혼과 얼을 드러내고 가장 절절하고 알뜰한 진실과 심정을 나타내는 주체적 표현이었다.

예수의 감정을 나타내는 말로 자주 썼던 ‘자비’ ‘연민’의 원어는 ‘스프랑크니조마이’인데 이것은 창자, 자궁이 파열할 정도로 자비와 연민, 동정과 공감을 느낀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나타내는 말도 창자, 자궁과 관련되어 있다. 불의한 억압과 박해를 받으며 삶의 고통 속에서 사유했던 히브리-기독교인들에게 생명과 감정은 관조와 성찰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전체적인 삶의 절절한 표현이었다. 몸의 고통, 굶주림과 목마름은 맘의 감정과 영혼의 아픔을 가져왔고 맘의 슬픔과 고독은 살과 뼈의 절절한 아픔으로 다가왔다. 삶의 고통스러운 구체적 현장에서 체험하고 사유했던 이들에게 몸, 맘, 감정, 양심, 생각, 영혼은 인간 존재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였고 표면의 현상이 아니라 깊은 주체를 드러냈다.

히브리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잃고 바빌론 제국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편집하고 완성한 책이다. 히브리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비와 사랑의 신이기도 하지만 압도적으로 분노와 격정의 신이다. 사랑과 정의의 신이기 때문에 불의하게 생명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현실에 대해서 분노하고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신이다. 질투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배타적이고 전투적인 종교관과 맞물려 있다. 우상숭배나 이교(異敎)신앙은 모두 불의한 국가권력과 생명파괴를 정당화하는 부도덕한 것이다. 다른 종교를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질투와 분노를 유발한다. 이들의 종교적 배타성과 독단성은 특정한 시대와 사회의 상황 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나라를 잃고 억울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의 절박한 신앙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정당성이 있지만 이런 배타성과 독단성과 적대성이 시대와 사회의 제약을 넘어서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잘못된 것이다.  

고난의 종

히브리 성경에서 불의한 고난과 분노를 철저하게 극복하고 정화시킨 것은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의 종’ 이야기다. 이 본문 역시 바빌론 포로기에 작성된 것인데 가장 깊고 높은 자리에서 불의한 역사의 고난 문제를 성찰한다. 무능하거나 죄를 지었기 때문에 또는 운수가 나쁘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는 생각이 고대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런 생각은 생명의 주체적 자유와 기쁨에 반하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하는 생명의 주체적 자발성을 부정하는 것이고 생명의 존엄과 상생공존의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오랜 세월 불의한 고난을 당하면서 고난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몸과 맘으로 고난을 겪으면서 고난받는 사람의 삶의 자리에서 고난을 보고 고난의 관점에서 고난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비로소 고난받는 사람의 자리에서 고난을 주체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고난을 중심으로 세상과 인간을 보게 된다. 고난받는 사람들의 고난은 우리 자신과 세상의 불의와 죄악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더 나아가서 그 고난은 그와 나와 우리와 세상 속에서 생명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사랑의 힘과 지혜를 일깨워준다. 겉보기에 고난받는 사람이 볼품없고 초라해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고난받는 사람은 우리와 세상을 구원하는 위대하고 거룩한 신적 존재다. 고난받는 사람은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죄와 허물, 불의와 악행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고난당하는 사람은 세상의 병과 죄악을 치유하고 정화하기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고난이 나와 다른 인간들을 치유하고 구원한다.

이것은 고난에 대한 가장 주체적이고 공동체적인 이해이고 해석이다. 고난에 대한 이런 적극적인 해석을 통해서 고난받는 사람과 함께 우리 모두는 절망과 죄의식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분노와 슬픔에서 벗어나 생명의 근원과 중심으로 들어간다. 고난과 죽음에서 치유와 생명이 싹튼다. 파괴되고 손상된 생명과 공동체가 치유되고 살아난다. ‘고난의 종’ 이야기는 생명의 진리를 찾아 헤맨 히브리 종교의 천 년 역사에서 가장 깊고 높은 생명의 진리를 보여준다. 여기서 드러난 고난의 진리는 불의한 고난과 분노를 치유하고 생명의 근원과 목적으로 이끄는 길과 그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지혜를 준다. 이것은 히브리 성경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를 이루며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으로 직결된다.

3. 예수의 분노와 생명체험

예수의 생명살림운동과 죽음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가난한 민중, 이른바 죄인들인 세리와 창녀를 결코 치유와 구원의 대상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난한 민중, 죄인이 치유와 구원의 주체로 나타난다. 예수는 병을 고쳐주고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거나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함으로써 병든 죄인이 주체로 일어서게 하였다(《마가》 2,9: 5,34). 그는 먼저 “가난한 사람들이 하늘나라의 주인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고 선언하고 가난한 민중을 섬기고 그들과 더불어 사귐으로써 공동체 운동을 벌였다.

《마가》 3장 1-6절은 그 시대의 상황과 생명을 살리는 예수의 자세를 잘 드러낸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던 유대 나라는 정치 · 군사적으로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으나, 종교 · 사회적으로는 예루살렘 성전 종교와 율법이 지배하는 나라였다. 로마 총독, 대사제, 율법(성경)학자들, 부유한 특권세력이 3중 4중으로 가난한 민중을 억압하고 수탈하였다. 특히 종교와 율법의 지배가 엄격하였다. 복잡한 종교예식과 율법규율에 어긋나면 부정한 죄인으로 낙인이 찍혀서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다. 대다수의 가난한 민중은 복잡하고 세밀한 종교의식과 율법규율을 지킬 수 없었고 죄인 취급을 당했다. 절대적인 가난 속에서 굶주리면서 외세의 정치 · 군사 · 문화적 억압을 당하고 종교적으로 억압과 소외를 당하는 유대 민중은 온갖 질병과 소외 속에서 살았다. 복음서에는 몸과 맘의 온갖 질병들이 나온다. 당시 유대 나라는 질병박물관이라고 할 정도로 수많은 질병이 들끓고 있었다. 예수 시대는 정치, 군사, 경제, 종교, 문화의 모든 세력이 총체적으로 가난한 민중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시대였다. 가난한 사람들을 사람으로 존중하기는커녕 억누르고 수탈하면서 죄인으로 낙인찍고 비난하고 저주하였다. 로마 총독, 대제사장, 율법학자, 의회원들에게 가난한 민중은 억압과 수탈의 대상이고 비난과 저주의 대상일 뿐 결코 주체로 존중되지 않았다. 가난한 민중은 버림받은 존재들이었다. 굶주림과 질병, 학대와 소외 속에서 민중은 분노와 절망으로 시들어가고 있었다.

예수는 이들에게 생명 해방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죄를 용서하고 질병을 고쳐주며 이들을 새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일으켜 세웠고 이들의 친구가 되어 함께 먹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 운동(하늘나라운동)을 벌였다. 예수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人子, 사람의 씨)로 부르고 가난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딸/아들로 불렀다. 예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선언하였다. 겸허하게 섬김으로써 억눌리고 빼앗기고 버림받은 가난한 죄인들을 하늘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예수는 생명을 살리고, 죄를 용서하고, 병을 고치는 치유자로 나온다. 밥상공동체 잔치를 벌이며 세리와 창녀와 사귀는 친구다. 그의 사명은 사람을 살리고 병을 고쳐서 절망과 죽음에서 일어서게 하는 것이다. 먹보와 술꾼이라는 비난을 들으며 기쁜 생명잔치를 벌인다(마 11,19; 눅 7,34). 그의 하나님 나라는 기쁜 생명잔치로 표현된다. 그의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생명의 기쁨과 신명, 사랑과 평화, 생명의 본성과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다. 예수는 병을 고쳐서 생명을 치유하고 살리며 밥상 잔치를 통해서 생명의 기쁨과 사랑을 나누는 이로 나온다.

그러나 생명을 살리는 예수와 적대적 대립 관계에 있는 이들이 있다. 제사장, 율법학자, 부자, 의회원들은 거룩한 율법과 종교를 내세워 인간과 생명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위선적인 지배세력이다. 이들이 민중을 억압하고 수탈하여 민중은 병과 고통, 굶주림과 죽음의 위기 속에 있다. 이들은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는 안식일 법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민중은 안식일 법을 지킬 수 없다. 본래 안식일 규정은 지나친 노동의 압박에서 인간을 해방하여 안식을 취함으로써 생명의 기쁨과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지나치게 엄격한 안식일 규정을 내세워 가난한 민중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비난하였다. 생명을 해방하고 지키기 위해 제정된 안식일 법이 거꾸로 생명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법으로 바뀐 것이다. 더 나아가서 안식일에 예수가 병을 고치는 것도 안식일 규정에 어긋나는 죄를 짓는 행위라고 규탄하였다.

《마가복음》 3장 1절에서 손 오그라든 사람이 안식일에 예수께 고침을 받기 위해 나온다. 기성종교에 충실한 예수의 적대자들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 예수는 안식일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있는 것이지 죽이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4절에서 예수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었다. 5절은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노기 띤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펴자 그 손은 이전처럼 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예수는 문제의 핵심을 착한 일을 하는 것과 악한 일을 하는 것, 사람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으로 단순하고 예리하게 제시한다. 착한 일은 생명을 이롭게 하는 것이고 악한 일은 생명을 해치는 것이니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과 겹친다. 역사와 사회의 모든 문제는 결국 생명을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로 귀결된다. 이것은 역사와 사회를 넘어서 우주 안에서 가장 깊고 크고 근본적인 문제다.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생명의 근본적 물음이고 우주 전체의 보편적 물음이다. 생명의 주체와 전체가 온전히 살게 하는 것이 진리이고 선이고 아름다움이며 사랑이고 정의이고 평화다. 생명을 살리고 살게 하는 것이 정치이고 경제이고 법이고 학문이고 철학이고 종교다. 어떻게 하는 것이 생명을 살리는 것인가? 생명을 제대로 깊이 이해하지 못하면 생명을 살릴 수 없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물질의 힘은 생명의 힘보다 훨씬 강하고 본능과 욕망의 힘은 지성과 영성의 힘보다 훨씬 크다. 물질의 힘과 유혹을 이기고 생명을 살리기는 쉽지 않고 욕망과 본능을 극복하고 지성과 영성을 살리기는 어렵다. 생명과 인성과 감정을 주체와 전체로 보지 못하면 생명을 살릴 수 없다. 어쩌면 생명의 근원과 중심인 하나님만이, 생명의 본성을 깊이 깨달은 이(부처)만이 생명을 살릴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을 살린다면서 생명을 파괴하고 죽이게 된다.

역사에는 언제나 생명을 파괴하고 죽이는 세력이 있다. 생명을 살리는 예수는 생명을 죽이는 세력과 맞서 있다. 처음부터 예수가 일으키는 생명 살림 운동에 대해서 기득권 세력은 생명을 죽이는 세력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권력과 부를 위해서 종교제도와 율법을 위해서 인간의 생명을 짓밟고 죽인다. 인간의 생명을 억압하고 수탈하며 짓밟고 죄인으로 낙인찍고 죽이는 세력에 대해서 예수는 분노한다. 민중을 살리려는 예수는 불의한 지배체제를 흔들고 불안정하게 만든다. 지배세력은 끊임없이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벼른다. 불의한 기득권 세력에 대한 예수의 저항과 분노가 커질수록, 짓밟힌 민중을 살리는 하늘나라운동이 확산할수록, 예수에 대한 지배세력의 적대감과 불안도 커진다. 가난한 민중을 억압하고 짓밟고 죽이는 세력의 총본산은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예수의 분노는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고 숙청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는 분노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뒤엎고 종교 장사꾼들을 내쫓는다. 대제사장과 로마 총독은 예수를 잡아서 십자가에 처형시킨다. 생명을 살리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비참하게 끝이 났다. 그러나 고난과 죽음, 절망과 분노가 생명의 끝이 아니다. 예수가 일으킨 생명살림 운동, 하나님나라 운동 속에서 예수는 부활하였다. 예수의 부활은 역사의 고난과 분노를 극복하고 치유하고 승화하는 삶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이고 선언이었다. 기독교인의 세례는 죽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신앙의 다짐과 결단이다. 성만찬은 밥을 먹고 물을 마실 때 예수의 살과 피를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죽은 예수의 생명과 정신을 살리고 이어가는 신앙의 행위다.

예수의 분노와 생명체험

예수의 분노는 생명을 살리려는 의분이었다. 그의 분노는 그의 깊은 생명 이해와 체험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물질의 제약과 속박을 초월한 생명은 속에서 흘러넘치는 사랑이고 매임과 막힘이 없는 자유다. 그가 만난 하나님은 흘러넘치는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지닌 친밀한 아버지 같은 이였다. 그는 친밀하고 다정하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서 그리고 히브리 신앙과 역사를 향해서 가난한 민중을 향해 한없이 열린 존재였다. 복음서에서는 놀랍게도 예수의 사사로운 욕심과 감정을 찾아볼 수 없다. 개인의 욕심과 감정, 생각과 의식으로 닫힌 자아, 에고(ego), 퍼슨(person)을 찾아볼 수 없다. 예수를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사명과 가난한 민중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생각뿐이었다. 그에게는 에고, 퍼슨, 자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자아를 초월하여 하나님, 민중, 히브리 역사 전체와 하나로 통하는 삶을 살았던 것은 물질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하게 하는 생명체험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하나님 체험과 신앙은 근원적인 생명체험이었다. 생명은 참된 주체이고 참된 전체다. 생명의 참된 주체와 전체는 생명의 창조적 근원과 중심인 하나님 자신이다. 그가 생명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참된 주체를 만나고 그 주체와 하나로 되었기 때문에 “나는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또한 생명체험을 통해서 모든 것을 하나로 끌어안는 하나님의 품(전체 생명의 근원과 중심)에 이르렀기 때문에 서로 살림과 공존의 하늘나라운동을 벌일 수 있었다.

고정된 자아가 없이 밖의 타자를 향해 무한히 열린 존재였기에 그는 늘 흔들리고 움직이는 심정과 영혼의 사람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탄식과 번민을 자주 하면서도 늘 기쁨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흔들림 없는 달관에 이른 동양의 도인들과는 달리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한결같이 불안과 동요 속에서 격동하는 인간들이었다.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이사야, 예수, 베드로, 바울은 모두 불안과 동요 속에서 감정의 격동을 느끼는 이들이었다. 역사와 하나님 앞에서 생명의 바다 속에서 그들은 어린이처럼 아파하고 흔들리면서 생명의 기쁨과 사랑, 주체와 전체의 근원과 중심인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실현하려고 하였다.

피와 땀을 흘리며 기도하는 예수, ‘고민이 되어 죽겠다’는 예수는 흔들림 없는 달관에 이른 도통한 인간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는 욕쟁이다. 생명을 짓밟고 죽이는 위선자들을 거리낌 없이 ‘독사의 자식, 여우들, 사탄의 무리들, 거짓말쟁이들, 음란한 세대. 회칠한 무덤, 위선자’라 부르고 적대자들을 향해서 악독과 거짓과 위선이 가득하다고 비판한다. 그는 거침없는 저항의 젊은이다. 그러나 흔들리고 고통스러워하는 예수, 번민하고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예수는 한없이 섬세하고 부드럽고 연약하고 예민한 젊은이다. 십자가의 고난 속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절규하는 예수는 역사의 나락에 떨어진 버림받은 비참한 존재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이웃과 역사 앞에서 자아(ego)가 없는 한없이 열린 존재다. 함석헌의 풀이대로 예수의 십자가 절규는 개인의 절규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고통받는 민중의 절규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 속에 인류 역사의 고난과 죽음, 절망과 분노가 압축되어 있다. 그는 고립된 개인, 에고, 퍼슨으로 살지 않고 그의 역사와 민중 전체를 몸과 맘에 품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친밀함 속에서 하나님의 심정과 뜻을 자신의 심정과 뜻으로 살았다. 그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민중의 삶과 하나로 살았다. 그는 생명의 근원과 중심에서 하나님의 품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민중의 심정과 처지에서 민중을 살리고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 모든 인간의 참된 주체이고 전체다. 하나님 안에서 살았던 예수는 민중의 심정과 처지를 자신의 심정과 처지로 느끼고 살 수 있었다. 그에게는 민중이 남이 아니었다. 민중이 그의 몸과 맘속에서 살았고, 그는 민중의 몸과 맘속에서 살았다. 함석헌은 예수를 가리켜 “너를 나라고 한 이”라고 하였다. 생명의 참된 주체인 ‘하나님의 나’는 사사로운 개인의 나가 아니라 나의 나, 너의 나, 그의 나가 하나의 나가 되는 전체의 나였다. 그는 생명의 이러한 나를 알고 그 나를 살았다. 그는 인간의 생명을, 자신의 인성과 몸을 깊이 체험하고 깨달았다.

영장류의 뇌에는 ‘거울신경’이 있는데 인간에게서 특히 발달했다고 한다. 거울신경은 남이 하는 것을 보기만 해도 내가 하는 것처럼 작동한다. 거울신경은 기계나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않고 생명에 대해서만 반응한다. 거울신경에 비친 상대의 ‘나’는 나와 똑같은 ‘나’다. 거울신경은 공감의 뇌신경이며 인간의 생명은 서로 투영되어 있다. 생명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교감하는 거울신경은 남의 생명을 내 속에서 느끼고 경험한다. 내 속에 다른 나가 있고 다른 나 속에 나가 있는 것이다. 거울신경은 모든 생명의 근원과 주체인 하늘이 생명 속에 열린 것이다. 예수의 생명체험은 자신의 인성 체험이고 하늘 체험이었다.

깊은 생명체험을 한 예수는 생명의 아픔 속에서 깊은 고통과 감정을 느끼고 절절하게 표현했지만, 생명의 깊은 내면에는 기쁨과 자유, 사랑과 평화가 있었다. 복음서에는 전혀 상반된 예수의 모습과 언행이 나온다. 마치 두 얼굴의 사나이 같다. 하루에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에는 분노와 미움의 감정이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축복하고 기도하라는 예수는 적을 향해 독사의 자식이라고 비난하며 분노하는 예수와는 전혀 다른 예수로 보인다. 눈이 범죄 하면 눈을 빼버리고 손이 범죄 하면 손을 잘라버리라는 가르침은 너무 단호하고 확고해서 흔들림과 불안 속에서 번민하는 예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미워하면 이미 살인을 저지른 것이나 같다고 하고,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도 돌려대라 하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도 주라는 예수는 성전을 숙청한 예수가 아닌 것 같다. 예수가 위선자나 정신분열증 환자는 아니다. 야누스 같은 예수의 이중성은 그의 생명체험과 역사와 민중의 체험이 그만큼 역동적이고 격렬했으며 그의 삶과 생각과 행동이 민중의 삶의 현장에 충실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체험은 기쁨과 자유, 사랑과 정의와 평화인데 불의한 역사 속에서 고통당하는 민중의 현실은 깊은 슬픔과 분노와 번민을 주었다. 태풍이 일어난 바다처럼 생명의 바다는 흔들리고 요동친다. 태풍의 중심은 아무 움직임도 없이 고요한 것처럼 예수가 체험한 생명의 중심에는 기쁨과 사랑, 정의와 평화만 있었다. 흘러넘치는 기쁨과 사랑의 임이신 하나님이 있었다.

4. 반성과 서로 배움
 
인간의 근본적인 불안과 분노는 물질적 제약과 속박 때문에 고난받고 죽어야 한다는 운명적 사실에서 생겨난다. 이 근본적인 불안과 분노에서 인간의 폭력이 나온다. 물질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으로는 인간의 근본적인 불안과 분노를 극복하고 치유할 수 없다. 물질에 토대를 둔 현대 산업 물질문명의 체계와 물질에 근거한 사회의 권리-의무 관계 안에서는 이런 불안과 분노와 폭력을 극복하고 치유할 수 없다. 아무리 완벽한 민주적인 정치질서와 체계를 마련하고 정교한 사회복지체제를 완성해도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과 분노와 폭력을 극복하고 치유할 수 없다.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과 분노와 폭력은 생명 자체의 근원과 중심으로 돌아갈 때 극복되고 치유되고 승화될 수 있다. 생명 자체는 물질의 제약과 속박을 초월한 것이고 물질의 제약과 속박에서 해방되고 해탈하여 자유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하는 생명의 주체와 전체는 물질의 제약과 속박에서 벗어나 기쁘고 신명 나는 사건이며, 서로 살리고 공존하는 사랑이다. 생명의 근원과 중심에는 불안과 분노와 폭력이 없다.

어떻게 생의 근원과 중심에 생의 주체와 전체에 생 그 자체에 이를 것인가? 예수는 역사 속에서 고난받는 민중의 삶 속에서 생명의 근원과 중심에 이르렀다. 가난한 민중의 심정과 처지에서 역사의 중심에서 살았던 예수는 생명의 근원과 중심, 주체와 전체를 하나님으로 체험했다. 하나님은 분노하고 행동하는 생의 주체이며 전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주체 속에서 주체를 살리고 일으켜 세우는 이다. 생명과 역사를 미생과 미완과 미결의 과정 속에서 고통받는 민중의 주체 안에서 보았기 때문에 생명과 역사의 근원과 중심이, 주체와 전체가 분노하고 사랑하고 행동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난 것이다. 석가는 중생의 고난을 관찰하고 성찰하고 관조하여 생의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진리에 이르렀다. 물질적 제약과 조건을 초월한 생의 근원에서 생의 중심을 본 것이다. 석가에게 생의 근원과 중심은 불성(佛性)으로 나타났고 불성을 깨달음으로써 석가는 물질의 제약과 속박과 물질적 욕망과 집착을 완전히 떨쳐버린 해탈과 자유의 세계 열반적정(涅槃寂靜) 니르바나에 이르렀다. 생명의 근원과 중심, 주체와 전체, 생 그 자체(眞如)라는 점에서 예수의 하나님(하늘나라)과 석가의 열반은 상통하는 것이다.

예수는 고난받는 민중의 삶과 분노를 주체로 파악하는 데서 시작했고, 석가는 생의 근원과 중심에서 궁극적인 깨달음과 해탈의 자리에서 고난받는 민중의 삶과 분노를 구원하려고 했다. 예수는 민중의 고난과 분노를 주체의 자리에서 보았다면 석가는 중생의 고난과 분노를 전체의 자리서 보려고 했다. 예수는 고난받고 분노하는 민중과 함께 기뻐하고 괴로워하며 분노하고 싸우다가 민중과 함께 고난받고 죽었다. 석가는 생 전체의 자리에서 병들고 고통당하는 중생을 깊이 이해하고 설득하고 깨우쳐서 물질과 몸의 속박과 욕망에서 벗어나 고난과 분노를 초월하여 스스로 즐겁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경지에 이르는 길로 이끌려고 했다.

불교인은 예수에게서 민중의 고난과 분노를 주체로 보고 민중과 함께 고난과 분노를 극복하고 정화해 가는 자세와 열정을 배울 수 있다. 기독교인은 석가에게서 민중의 고난과 분노를 이해하고 이치에 맞게 설득하고 몸과 맘의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생의 자유와 평화에 이르는 수행방법과 과정을 배울 수 있다. 석가와 예수는 생의 근원과 중심에서 생의 주체와 전체의 자리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가르치고 행동한 분들이다. 석가가 전체의 자리에서 고난받는 주체를 설득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체(불성)를 깨닫고 생의 근원과 중심에 이르게 했다면 예수는 주체의 자리에서 함께 고난받고 분노하고 싸움으로써 생의 근원과 중심(하나님 나라)을 고난받는 삶의 현장에서 열려고 하였다. 석가가 스스로 자신의 불성을 깨닫고 깨달은 이, 부처가 되어서 중생을 부처가 되는 길로 이끌었다면 예수는 스스로 고난과 죄의 짐을 지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민중과 함께 서로 주체의 공동체적 사귐으로 나아가는 그리스도(보살)였다. ■

 

박재순 / 씨알사상연구소장. 서울대 철학과 졸업. 한신대 신학박사. 한신대 연구교수, 성공회대 겸임교수, 씨사상연구회 · 함석헌기념사업회 회장, 재단법인 씨알 상임이사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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