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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에서 보는 분노 / 신승철
특집 | 한국사회와 분노 그리고 불교
[67호] 2016년 09월 01일 (목) 신승철 igu1848@daum.net

1. 들어가는 말

분노(憤怒, anger)란 화가 치밀거나 끓어오르는 화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화를 이기지 못해 번민하는 마음을 통괄해 부르는 말이다. 분노는 자신이나 타인에게 어떤 자극이 위협적이거나 위험한 것으로 감지하게 되었을 때, 그에 따른 심리 생리적 반응이다.

또한 분노는 공격적 감정으로서 개인적 좌절에서는 물론 집단적 좌절에 대한 반응으로 야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어떤 위협적인 자극에 대한 공격적 반응과 분노 반응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공격적 반응이란 흔히 어떤 좌절에 의해 촉발이 되는데, 좌절을 안겨준 그 대상을 향한 (사전에는 자신이 예기치 못한) 격앙된 감정을 뜻한다. 그러므로 공격적 감정에는 흔히 분노가 동반되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뜻이다. 격앙된 공격적 반응에는 대상을 향한 열정이나 분투를 하려는 긍정의 성분이 담겨 있는 경우도 있다. 좌절에 따른 분노의 감정은 공격적 감정의 극단적 형태인 것이다.

공격적인 감정은 사실 모든 포유류 일반의 공통적 특성이기도 하다. 심리학에서는 동물의 공격적 감정/공격성을 동물적 본성의 한 부분으로 본다. 사실 동물은 주위 환경이나 대상으로부터 생존에 대한 많은 위협을 받으며 진화의 과정을 거쳐 왔다. 공격성은 진화상 동물들이 발달시켜온 감정 반응 양식의 하나다. 다시 말해 공격적 반응은 동물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발달시켜온 본성의 하나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보듯, 동물들의 공격적 감정이나 행동이란 사실 생존 전략의 하나임이 빤히 드러난다. 이러한 전략은 대부분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 돼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뇌 구조나 기능적 특성을 보더라도, 그런 감정이나 행동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보여준 동물의 행동에서 동물들은 텃세, 먹이를 쟁취하기 위한 경쟁, 영토 전쟁, 경쟁자 죽이기, 짝짓기를 위한 다툼, 새끼들의 보호와 양육에 관련한 본능적인 애착이 강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위험이 도래됐을 때 그에 대한 도전이냐 도피냐의 문제, 무리에서 쫓겨나는 게임 방식, 무리의 통제권에 대한 다툼, 외롭게 병들다 죽는 모습,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이 상존함을 자주 관찰한다. 인간 사회 역시 그러한 패턴의 관계를 되풀이하며 지내왔음을 우리는 직관적으로 그리고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다만 인간과 동물 사이의 큰 차이점이라면, 인간은 오랜 세월에 걸쳐 그러한 공격적 본능의 표현에서(또는 본능을 제어하는 방법에서) 세련되었고, 이른바 행동의 학습화로 의식화되어 본능이 잘 ‘포장’되었다는 점이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학습을 통해 얻은 이성과 지성이 결국 생존의 중요한 도구로 작용하고 있다. 한 마디로 인간은 동물적인 본능적 프로그램을 세련되게 정교화시킨 것이다.

뇌 과학적으로 보면, 인간에게 이성과 지성이 있다는 것은 인간 뇌의 전두부(특히 전전두부)가 특별히 발달한 덕이고, 이로 인해 인간은 수행/명상/대화를 통해 공격성이나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여지가 생기게 된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공격성/분노에 대한 신경학적 토대를 잠시 검토해보자.
 
① 공격성/분노 반응은 대체로 위협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난다. 위협에는 불편이나 긴장 같은 미묘한 느낌도 포함된다. 편도체는 위협을 감지하는데 특화되어 있으며 점점 더 감지되는 것에 민감해지므로, 많은 사람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위협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되며, 더욱더 공격적이 된다.

② 공격하려는 마음이 생기면, 일단 교감신경계/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축 시스템이 활성화된다. 이때 우리가 도망치는 대신 싸우기를 선택하게 되었다면, 싸우려는 동작을 준비하기 위해 혈당은 팔 근육으로 공급되며, 소름이 돋고, 적이나 포식자가 가까워졌다고 느끼게 될수록 머리털이 곤두선다, 시상하부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격노(anger) 반응을 유발하기도 한다.

③ 공격성은 높은 테스토스테론 수치와 관련되어 있는데, 이는 남녀 모두 마찬가지이다. 한편 공격성은 낮은 세로토닌 레벨일 때 나타난다.

④ 좌측 전두엽의 언어 시스템과 측두엽은 우반구의 시공간 처리와 함께 작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동지와 적, 사람과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나눈다.

⑤ ‘뜨거운’ 공격성은 강한 교감신경계/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축의 활성과 함께 전전두엽의 감정조절 기능을 압도하곤 한다. ‘차가운’ 공격성은 약한 활성과 관련되며 지속적으로 전전두엽의 활성을 일으킨다. “복수는 차가울 때 제맛이 나는 요리이다.”라는 속담을 기억해 보라.

인간의 공격성이나 분노에 대한 신경학적/생리학적 반응은 동물이나 인간에게 유사한 메커니즘으로 작동된다. 동물/인간은 ‘자기나 자기편’에게는 혜택을 주는 쪽으로, 그리고 ‘적들’에게는 공포와 절망을 안겨주고, 그 적들을 패퇴시키는 쪽으로 신속하게 마음을 쓴다. 인간 사회에서 공격적인 우리의 마음은 여러 층위에서 드러난다. 학교 내 패거리 문화에서도, 정치권은 물론 회사 내에서의 권력 싸움, 가정 폭력에서도 공격성과 분노/증오는 여전히 작동된다. 더 큰 규모로 우리의 분노/증오는 편견과 독재, 인종청소, 전쟁 등으로 나타난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볼 때, 집단적 규모에서 일어나는 분노와 증오의 원천은 그들 아버지 혹은 권위자에 대한 (무의식/비의식에 깔린) 적개심의 투사(投射)인 것이고, 또 그러한 맥락에서 확산된 집단적 아이덴티티의 형성이, 소위 정치적 구호나 일종의 집단 최면을 통해 상대를 곧바로 ‘적들’로 규정해버리며 악마화시켜 버린다.

사실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진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대대로 동물의 유전적 유산도 물려받고 있다. 다른 말로 우리 인간은 동물의 유산인 공격성을 부정하거나 부인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개인적이든 집단 수준에서든, 이를 부정하거나 도외시하는 일은 우리 고통의 근본 원인이기도 한 분노(瞋)에 대한 무지(癡)를 드러내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요컨대 우리의 공격 본능과 분노 반응은 진화사에서 우리 뇌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공격 본능과 분노 반응은 일체의 위협에 맞서려는 준비과정으로서, 그 진화적 연원이 있다. 물론 우리에게는 자비의 마음과 사랑이라는 것이 내면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공격과 분노를 일으키는 마음도 안에 있어 우리를 곧잘 요동치게 하고 있는데, 그런 현상은 생존을 위해 필연적이라는 사실이다.

2. 분노(anger)의 심리학

분노 반응은 우리 삶의 현장에서 늘 생기했다가 소멸하고, 그리고 다시 생기했다가는 다시 소멸하는 등, 우리의 주위에서나 현전에서 쉼 없이 그 생멸을 반복하고 있다. 우리 에고의 실상이 본래 그럴 것이다. 크게 보면, 번뇌의 원천은 탐욕으로 말미암은 경우가 허다하고, 욕구(안전/생명 유지에 대한 욕구, 소유에 대한 욕구 등) 좌절로 곧잘 분노가 일어난다. 심리학적으로는 ‘나’에 대한 상처받음(나르시시즘의 상처)이 곧 분노를 일으킨다고 보고 있다.

심리학이나 정신분석의 연구들은 대부분 인간의 발달 초기부터 이 문제, 곧 분노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 다루어온 전통이 있다. 인간은 유아 시절, 어머니와의 관계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좌절과 분노의 싸움으로 점철된다. 좌절/분노에 대한 감정의 표현이나 전달이 어려운 유아나 어린아이는 이런 감정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원시적 수준의 환상으로 ‘소화’를 해내거나 겨우 몸짓으로 또는 울음으로나 표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후에도 우리 인간은 성장해가면서 좌절과 분노의 연장선에서 그리고 이들 감정의 파도를 타면서 곡예의 삶을 영위한다.

프랑스의 저명한 정신분석가인 자크 라캉은 분열과 파쇄(fragm-entation)가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제반 ‘위협들’로부터 심리적 방어를 하기 위해 우리는 공격적인 성향을 생래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아무런 주체도 없이 진행되는 우리의 여러 생물학적 기능들. 부산하게 움직이는 생리 화학적 신체반응들. 이 생명체가 하나의 개체로서 생존 유지가 되려면, 내적으로 이를 이끌어 갈 시종일관한 통일된 하나의 아이덴티티가 있어야 마땅하다고 그는 추론한다. 유아 시절에는 모호하고 그 경계가 분명치 않아 보이던 이 아이덴티티란 것은 후에 통일된 하나의 인격체 혹은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라캉 역시 ‘나’라고 하는 것을 불교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가립(假立)된 것으로 보았다. 가정적으로 ‘나’라고 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 마땅히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에서 호칭하는 ‘나’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심리적 환영(psycho-logical illusion)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가 환영이라는 말 속에는 우리가 본래 취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숨기고 있다는 함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래 그런 존재라는 사실/진실을 알지 못한 채, 다시 말해 환영의 ‘나’가 고정된 나인 것으로 확신하게 되면, 말할 것도 없이 그에 따라 일체의 경계(대상/현상)도 고정된 것으로 알게 되고 만다.

환영의 ‘나’가 고정된 나인 것으로 취급되어 확신하게 된 까닭은, 라캉의 말을 빌리자면 심리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허약함이나 취약성을 감추려는 의도가 커서이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허약함이나 취약성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이런 약점을 드러내는 일은 생존 전략에서도 불이익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해서 인간은 이러한 진실을 감추기 위해 우리의 ‘나’라고 하는 환영은 어떤 힘(power)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을 자연 품게 된다는 이치다. 이 힘이 다름 아닌 공격(aggression) 또는 공격에 따른 힘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떤 위협에 직면했을 때, 이 힘을 재빠르고 손쉽게 그리고 아주 흔하게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힘의 사용(여러 사용 패턴)을 정신분석에서는 방어(defense)라고 부른다.

분노의 심리학에 대해 말할 때, 이것이 짜증 남이나 상처받음의 느낌과 어떤 관계인지, 여기서 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러한 개념 구분은 나중에, 분노에 대한 치유 방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 혹은 어떤 대상이 우리의 기대나 바람을 어긋나게 하거나 방해를 하게 되면, 순간 상처받았거나 짜증 남을 ‘느끼게’ 된다. 자동적인 ‘신경생리학적 반응’이다. 그러나 일반 심리학자들이나 뇌 신경학자들이 개념상 혼란을 겪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분노란 그때 겪는 그 ‘느낌(feeling)’과는 성질이 다르다.분노(行)란 느낌(受)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기 어렵다. 분노가 느낌에서 비롯된 것이고 느낌을 포괄할 수 있으나, 내용 면에서 따져보자면 분노는 그런 느낌에 동반되는 정서와는 사뭇 다르다. 분노는 어떤 불쾌한 느낌을 가져다준 그 (원인) 대상에게 복수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는 욕구의 한 형태이다.

예컨대 고속도로에서 정상속도로 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뒤에서 연신 경적 소리를 내며, 빨리 가라고 다그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자. 그럼 순간 불쾌한 느낌이 생기고 이와 거의 동시에 ‘열’을 받는다. 뇌 내 도파민 수치가 올라가고, 핏속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게 된다. 혈압이 갑자기 올라가고 심장은 두근댄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돌아간다. 갑자기 속도를 더 줄여서 상대에게 골탕을 먹일까, 아니면 모른 척하고 아래 차선으로 비켜서 가던 길을 양보하고 져주고 말까. 위협에 대한 두 가지 반응/대처가 머릿속에서 오간다. 이미 분노 반응이 진행되고 있지만, 분노를 처리하는 방도는 분명 자신의 의도에 달려 있음도 알고 있다. 성격이 급하고 화끈한 A형 인간은 분노의 감정이 쉬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느 경우엔 양보하는 척하다가 다시 그 차를 앞지르며, 운전자를 향해 손가락질하거나 욕설을 내뱉기도 할 것이다. 아주 위험한 짓이지만, 가해성이 역력한 행동으로 보복운전을 감행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행위는 분명 상대에게 상처 내지 손해를 끼치려는 명백한 의도다. 자신이 받은 만큼의 자존심 상처를 곧바로 앙갚음하겠다는 욕구가 행동으로 직접 드러난 것이다. 분노 반응은 이처럼 욕구의 행동화와 직접 맞닿아 있다. 그러므로 통상의 ‘느낌’과는 다른 성질로, 느낌이라는 분류에 포함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분노라고 하는 현상/증상을 겪으며 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거나 극복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자연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원인을 세밀하게 분석하는 일은 동시에 치유에 대한 전망도 가져오게 할 것이다.

먼저, 분노에 대한 치유책으로서는-정신분석이든 마음 챙김 수행에서이든- 분노의 ‘원인’에 대한 깊은 성찰이 우선돼야 한다. 사람은 일단 분노가 일어나면, 분노의 원인인 대상에 대한 느낌을 잊어버리고 만다. 느낌을 충분히 자각하도록 하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타당한 말일 듯싶다. 통상 사람들은 일단 분노 반응이 일기 시작하면 그 분노에 휩쓸려버려 ‘과정에 대한 느낌’은 그만 뒷전으로 밀려나고 만다. 자신의 자존심에 대한 상처가 지배적으로 또 자동적으로 작동이 되어, 곧바로 복수에 대한 감정으로 ‘느낌’은 덮여버리고 만다. 다만 그때 그가 감지할 수 있는 느낌이라면, ‘나도 힘이 있다. 나도 너만큼, 너 못지않게, 아니 너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단단히 갖고 있음을 확인할 따름이다. 이는 라캉이 언급했듯이, 본래 사람 마음의 취약성, 더 넓게 말해 우리 존재의 무상성을 숨기고, 역설적으로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려는 의도다.

분노 발작은 자신이 능히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을 노골화시키는 감정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이런 정황에서 분노의 원인을 알아차린다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의당 분노의 강도가 드세어질수록, 분노의 원인에 대한 알아차림은 더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대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고, 그가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줬다면, 그 믿었던 상대에 대한 복수심에 그는 몸을 떨기도 할 것이다. 믿었던 만큼 분노의 강도는 더 세질 것이다. 그리고 분노 감정의 부정이나 적정한 처리(충분한 알아차림을 통해 그런 분노 반응을 비쳐 보고, 이후 이성적으로 진중하게 고려하는 행위를 말함)를 하지 못하는 경우, 사람들은 흔히 우울증에 빠지고 만다.

분노는 그것을 날것으로서, 있는 그대로 표현을 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문화권마다 분노에 대한 표현의 패턴은 있기 마련이고, 거기에 순응하여 나름대로 표현한다는 것에도 우리는 동의한다. 하지만 우리의 내면에서 누구든 상처를 받거나 모욕을 당했다고 느끼게 되면, 분노가 일어난다는 것은 보편적인 하나의 ‘생리적’ 반응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어느 문화권에서든, 분노의 감정이나 그 원인에 대한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문화적 장치는 있기 마련이다. 한데 만일 분노에 대한 이런 알아차림마저 지속적으로, 강하게 억압시키는 문화라고 한다면, 그런 사회에서는 편견, 증오, 의심, 학대, 인권 유린, 가정 폭력, 알코올 중독 같은 문제들이 만연하게 된다. 왜냐면, 억압된 분노의 감정은 같은 부류의 집단에 동화되어 그 사회 문화의 저변에 검은 그림자로서 왕성하게 작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울증의 역동 심리와 마찬가지로, ‘과정에 대한 느낌’과 느낌에 대한 소통이 허락되지 않고 분노의 표현마저 억압된 사회라면, 그 에너지는 자신이나 타인을 학대하거나 증오하는 에너지로 곧잘 전환되어서다. 억압된 분노는 열역학의 법칙에 따라, 그것이 병리적 행동으로 통하든 생산적 활동으로 통하든 그 에너지는 행동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억압으로부터 벗어난 생명체는 자유도가 그만큼 커지게 될 것이고, 개인/집단이 숨을 쉬거나 자유롭게 움직일 여지도 그만큼 생기게 된다.

실은 진실에 대한 오류가, 사실에 대한 왜곡이, 우리에게 괴로움을 일으키는 주된 원인일 것이다. 느낌을 알아챈다는 것은 언어에 의해, 우리의 왜곡된 기억에 의해 야기된 것의 원인을 깨닫게 해주는 가장 직접적인 방도가 된다. 사념처 수행의 본뜻도 여기에 있다. 알아차림은 주관적인 느낌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마치 물속에 달이 비친 것 마냥, 있는 그대로 관조하는 마음의 태도를 말한다. 물론 이렇게 되려면, 고요히 집중하는 정신이 뒤따라야 한다. 깊이 주의를 기울이는 가운데, 자신의 안과 밖의 현상이 그림자처럼 지나감을 알아차리게 된다. 고요한 관조의 힘이 바로 지혜로 맞닿게 됨을 스스로 밝히게 된다. 이러한 관조의 정신이 습관화가 되면, 알아차림은 일상에서도 용이해질 것이다.

우리의 현전에서 오가는 일에 대해 제 마음속에서 어떻게 느껴지는가를 관찰하는 일은, 얼핏 아주 단순해 보인다. 원인을 참구한다는 것은 원인에 따라 일어나는 사건의 과정이나 그 결과도 관(觀)하게 하는 지평을 열어 준다. 이러한 관에서 즉, 일어나는 사건의 과정에 대한 관조에 있어서는 자신의 느낌이 어떻게 오가며, 다가오는지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마치 내가 한 알의 사과를 먹을 때, 그 사과가 씨앗으로부터 어떻게 자라 여기 나에게까지 오게 되었나를 생각하는 일과 같다. 그런 배경/원인을 깊이 알고 먹는다면, 사뭇 한 알의 사과를 지금 먹고 있다는 일 자체가 경이롭고, 기특하다는 생각에도 이를 것이다. 원인에 대한 앎은 자연스럽게 이후 이성적 사유를 하게끔 도와주기 때문이다. 뇌 과학적으로 말해, 전전두부가 자연스럽게 개입하게 될 여지를 남겨두게 된다는 말과 같다.

분노 반응은 동물 일반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현상이다. 크나큰 분노가 일어났을 때, 잠시 그 반응을 멈추게 하고(호흡에 집중하든, 다른 곳에 마음을 두는 일을 하든, 의지로 억제하든) 평온을 되찾은 다음, 그 분노의 원인/배경에 대해서 알아차리게 되면, 흔히 보통 사람들은 잠시 우울한 기분에 잠기게 된다.-일상에서, 즉각적으로 충동을 행동으로 드러내기를 잠시 멈추고, 분노에 대한 지연반응(delayed response)을 함이 궁극적으로 적응/대인관계에서 유리하다는 것을, 우리는 뒤늦게 자각할 때가 많다.- 이때의 우울한 반응은 ‘정상 범주’에 해당하는 반응이다.(분노 발작이나 심각한 우울증은 자극에 대한 작용(reaction)으로 보는 반면, 이러한 정상적 범위의 우울 현상에 대해서는 단지 현상적 반응(response)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이러한 우울은 분노의 억압에 따른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자신의 본성을 더럽힌 것에 대한 슬픔이거나 부끄러움이거나 상처를 준 상대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스며든 결과일 가능성이 많다.

둘째, 분노 반응으로 오랫동안 괴로움에 시달리는 사람의 경우, 치유에서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만으로는 불충분할 수가 있다. 상처에 대해 ‘깊은 뿌리’(과거의 삶에서 물려받은)가 내재해 있는 경우가 있어서다. 가령 어떤 사람은 운전할 때 누가 끼어들기를 할 때마다 항시 분노를 못 이긴다. 그에게는 상대가 자기 차를 앞지르거나 끼어들거나 경적을 울려 양보를 한다는 일이 곧, (무의식적으로 혹은 자동 반사적으로) 자기는 패배자라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이런 패배의식이 강한 사람은 내면에 강한 열등의식이 잠재해 있을 공산이 크다. 어느 날엔 도가 지나쳐서 보복운전으로 이어지고 폭력 행사로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한다.-보통 사람은 난폭 운전을 겪고는 순간 화가 치밀기도 하지만, 대개는 그 순간을 지나 이내 잊고, 평상심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어떤 모욕을 참아내지 못하는 사람, 상처에 취약한 사람, 좌절을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들에게는 과거에 일찍부터 부모와의 관계에서 혹은 여타 인간관계에서 사랑/인정받지 못했거나 자존감에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받아, 그로 인해 억눌린 분노의 감정을 켜켜이 내면/무의식에 쌓아왔던 기억이 있었음이 드러나곤 한다.

이런 경우, 어떤 경계를 접해 일어나는 분노에 대해 느낌을 알아차리라고 그에게 충고한다고 해도 말이 잘 먹혀들지 않는다. 그는 오랫동안 느낌을 알아채는 일에서 회피하는 태도를 습관으로 고정화시켜 왔기 때문이리라. 이런 사람에게는 알아차림의 수행에 있어, 별도의 지도가 필요할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치유에는 치유에 대한 의지/동기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선한 의지가 있다면, 그는 정신치료를 통해서든, 참 나를 찾기 위해 믿음 생활에 헌신하든, 좀 더 치밀한 수행을 통해서든 자신의 ‘행복’에 이르는 길에 다가설 수 있다. 이런 동기로 말미암아 치유에 대한 저항의 문턱은 보다 낮아질 수 있겠다.

셋째, 치유와 관련된 하나의 생각으로, 분노가 정당화될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 소위 공분(公憤)이란 것을 내세워서다. 분노의 직접적 신체적 표현은 폭력 행사다. 공분을 내세울 때는, 의당 정의(正義)라고 내세우는 성분도 함유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의 문화 의식은 여러 역사적 경험/교육을 통해 이미 여러 타입의 공분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공분의 개념은 시대나 문화권에 따라 자의적인 잣대로 정의가 되기도 하고 달리 평가받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일부 극단보수의 일본인 가운데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보는 사람이 있다. 안 의사의 분노 행위는 우리는 물론 여타 다른 나라에서도 정당성이 확보되어 있다. 안중근 의사는 공분의 명분이 뚜렷하고, 그의 분노 행위가 사적 보복의 의미가 아니어서다. 반면, 요즘 중동에서 무자비하게 살인을 자행하는 IS(이슬람 무장단체)의 분노에 찬 보복적 행위에 대해서는 명백히 테러리즘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들 자신은 분노의 행위가 종교의 편견으로부터의 해방 혹은 특정 종파의 피압박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주창하지만, 거듭되는 야만적 테러행위(그들 이념과 관련도 없는 민간인 살상, 어린아이들의 무참한 살해 실상 등)를 보면, 정작 테러 자체가 목표인지, 자신들의 분노로부터의 해방이 목표인지 알기가 어렵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내세우는 명분도 모호하게만 들린다. 최근 이들 단체는 유럽 여러 지역에서 자폭이나 폭탄 테러를 자행하곤 한다. 기전(機轉)은 빤해 보인다. 이들은 외려 종교를 인질로 삼고, 민족 이념을 구실로 삼아, 자신들의 존재감과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분노는 살인과 테러의 자행으로 타당화되는데, 여기에는 아이덴티티의 혼란을 겪는 청년들에게 숭고한 종교적 헌신이라는 망상으로 세뇌를 시켜, 그들의 자존감을 한껏 인플레이션 시킨 결과다. 종교적인 동시에 민족적 나르시시즘에 빠뜨리게 한 것이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자들은 자신들과 이해를 달리하는 자를 곧잘 ‘적’으로 규정하고, 다른 사람을 ‘사물’로 보게 한다. 독일의 나치주의자들이 유대인들을 홀로코스트에 보낸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자들이 특정 이념이나 종교를 내세울 때는 그들 집단의 응집력을 높이기 위해 어떤 대상이나 상대를 적으로 규정해, 짓밟아 버리려는 전략을 구사한다. 가장 부서지기 쉬운 존재인 자아도취자들은 그런 방식으로 ‘힘’이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려, 존재감을 드러내려 하기에 분주하다.

공분을 내세움이 어디 이러한 극단주의자들뿐이겠는가. 공분은 도처에서 요란하게 떠들어 대고 있다. 티브이나 극장가에서, 전자오락게임에서도 공분은 들끓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분노의 해결책으로 보복을 정당화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소식들은 자라나는 세대에게 그리고 성인이 된 우리의 내면에, 좌절에 대한 극복의 방편으로 보복이 유일한/타당한 수단이라고 계속 짖어대는 것이다. 자라나는 세대의 무의식에, 분노는 곧 보복으로 이어져야 마땅하다는 환상을 심어주고 있다. 이른바 정당한 분노와 의분은 에고가 상정한 위치성 및 타인에 대한 기대가 도덕주의적으로 팽창한 것이다.

증오심과 더불어 분노는 외부의 적에게 고정되는데 이는 사실상 에고 자체의 내적 증오 성향이 상징적 대리자에게 투사된 결과다. ‘죄에 대한 증오’ 역시 증오일 뿐이다. 때문에 도덕적으로 우월하지도 않은 것이다. ‘죄에 대한 증오’는, 오류가 오류를 나쁘다고 하는 부조리를 빚어낸다. 격분해서 죄인들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것은 선동이라는 사리 추구 외에는 별다른 이익이 없다.

말할 것도 없이 영화나 드라마에서 벌어지는 분노의 복수극은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다. 건강한 반응도 아니다. 참으로 정의로운 성질의 공분이라면, 거기에는 공동체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한다. 또 어느 누구의 희생을 담보하지 않고, 거기 내세우는 조건에는 공동체의 평화나 안전을 위한 의지가 담지되어야 마땅하다. 엄밀히 말하면, 공분이란 하나의 사회적 관념이다. 정신분석의 입장에서는 어떤 공분도 정당성을 얻기 힘들다. ‘밖의’ 공분도 실상 자신의 내면에서, 공감과 함께 깊은 애정에서 나오지 않는 바에야, 그것은 자신이 한때 동일시한 관념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공분의 정당성 여부에 대해 굳이 분별하자면 이러한 점을 깨달았나, 깨닫지 못 했나의 차이가 있다고 보인다.

넷째, 어떤 사람은 모욕 등으로 상처를 받았을 때, 분노 반응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기보다 ‘환상’ 속으로 침몰하여 내색하지 않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몸담은 문화 양식이나 종교 등에 기대어, 그 사회에서 표현하는 일반적인 ‘말 속에 들어가 앓기’를 자청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이란 쉽게 말해 ‘죄’라는 혹은 ‘나는 죄인’이라는 생각에 지지(자기가 속한 문화에 젖거나, 종교적 감성에 동화가 되어)를 보내어, 그런 죄의식 문화에 젖어 사는 경우를 말한다. 신학적(특히 기독교적) 의미에서 흔히 거론되는 죄는 본질적으로 우리 에고가 활동하는 삶에서 가치를 찾는다는 것이 의미 없음인데, 거기서 무슨 가치를 찾겠다고 집착하는 일 자체가 잘못인 까닭에, ‘죄’라고 하는 것이 성립됨을 함의한다. 하지만 일반에서는 그런 식으로 심도 있게 ‘죄’의 개념을 포괄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 듯하다. 사회 일반에서 죄란 자신의 적개심이나 억눌린 분노에서 생긴, 죄책감과 등가의 개념으로 대부분 받아들이고 있다.

정신분석의 입장에서 죄란 하나의 ‘열병’으로서, 허영심에서 비롯된 좌절에 대한 자기 비난, 분노에 대한 자책감 같은 성질이 끓어서 생긴 것을, 나름의 언표로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 본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바라는 바를 성취하지 못하게 한 어떤 대상이나 인물을 패퇴시키고 싶고, 무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동시에 자신은 어떤 특권을 누리고 싶고, 잘난 척도 하고 싶다. 한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는 남들에게 근사한 사람, 멋있는 사람, 재능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 그는 무슨 사회적 봉사 활동에도 열심이지만, 실은 이타적 행동이라 보기가 어렵다. 속사정은 남에게 인정/존경받고, 그런 인물로 평가받고 싶어서가 우선이어서다. 이런 사람은 남에게 상처를 주고도, 잘 느끼지 못한다.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그가 사랑이나 연민, 동병상련 같은 말을 입에 곧잘 올리기는 하지만, 이런 말과 그의 행동과 생각 사이에는 그 차이가 크다. 그의 내면의 실상은 매우 이기적이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자기 방종에 빠져 있을 때가 많다.

이런 특징을 가진 자를 정신의학에서는 나르시시즘, 또는 자기도취형의 인격 장애자라 부른다. 어느 사회든 정치인을 비롯하여 많은 유명인사들이 이런 ‘병’을 앓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나약함을 숨기는 데 아주 미숙하다. 다른 사람을 사물/물건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농후하다. 사람들을 자신이 이용하려는 수단으로 보는 게 외려 자연스럽다. 자신의 느낌을 제대로 감지해내지도 못한다.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접하면, 분노를 처리하는 데 무척 큰 애를 먹는다. 이들은 분노를 겪게 되면, 자신은 분노를 가져다준 대상의 희생자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많다. 희생자라는 의식에, 즉 분노의 내향화로 죄의식이 스며들게 돼 있다는 뜻이다.

다섯째, 분노 발작이 반복적으로 일어나,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고통을 겪게 되는 경우다. 사소한 자극에 대해 반복적인 분노 발작이 일어나는 원인 가운데, 진단적으로는 뇌손상 환자나 특정 질환(조현병이나 양극성 장애 등) 같은 뚜렷한 정신장애로 인한 것도 있다. 이런 경우는 약물요법 등 정신과적 치료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

그런데 잦은 분노 반응은 그 뿌리가 과거에 겪은 크나큰 정신적 외상(psychic trauma)이나 과거에 반복적으로 받은 정신적 외상의 후유증 탓으로 야기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얼마 전 세월호 사건을 겪은 부모들은 처음 그 소식을 접하고는 자녀들이 졸지에 당한 비참한 죽음이 믿어지지 않았다. 왜 하필 우리 애냐, 웬 날벼락이냐. 부모들은 착란과 혼몽에서 헤어날 길이 없었다. 이런 커다란 충격적 사건에는 분명 그 원인이 있을 터고, 그 원인이 인재임이 밝혀지자 그 좌절에 대한 분노의 불길은 온 나라 국민을 비탄의 계곡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 같은 분노에 대한 정신적 보상은 어디서 찾을 것이며, 어디서 받을 수 있겠는가. 이윽고 애도의 반응은 분노의 폭발로 이어지곤 했다. 이제 사회적으로  애도 반응의 물결은 잦아들었지만, 그렇다고 그 일이 쉬이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 커다란 충격에 따른 분노 반응은 부모의 의식에서나 무의식에서나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희생자’ ‘우리는 죄인’-부모 자신이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학여행에 자녀를 안 보냈으면, 괜찮았을 텐데 하는 죄책감 같은 것이 앙금으로 남아 있을 것이기에- ‘우리는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등, 자기 비난이나 자책의 심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비난의 대상(세월호 선장, 선주, 운항 허가 관련 공무원, 응급구조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 등)이 뚜렷이 나열되지만, 부모로서 해야 할 행위에는 한계가 있다.(그러나 비난받아야 할 대상자들도 역시 자신은 ‘그 앞의 누군가’로 말미암은 희생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얼마나 ‘엉터리 심리’인가!)

가족들 대부분은 상당 기간 희생자 분노라는 울타리에 갇혀, 다시 말해 분노의 마수에 걸려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내면에 갇힌 분노는 반복해서, 그 울타리를 뚫고 뛰쳐나오기고자 계속 시도한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 보고도 놀라듯, 대형 사고를 겪은 뒤에는 사소한 자극이거나 위협적인 상황에 접하게 되면 당사자는 반복된 트라우마의 환상으로부터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런 자극으로 인해 비의식에 억압된 분노가 다시 노출되려고 꿈틀거려서다. 이성의 힘으로 부정적 세력을 억제하려 힘을 쓰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극심한 불안을 겪게 된다. 소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질환이다. 이 병에서 회복하는 데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병 초기 치료에는 약물치료가 큰 도움을 주지만, 역시 시간을 두고 상담전문가와 함께, 혹은 같은 희생자들끼리 생각과 감정을 나누고 의지하며 교감을 통한 대화로 호전이 기대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반복적으로 학대를 받아 피해자의 분노가 갈수록 축적되어 나중에, 피해자 자신이 분노 문제로 고통을 겪는 경우다. 이것은 요즘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는 아동학대의 문제를 말한다. 아동이 친부모든 계부나 계모로부터 이든, 신체적, 정신적 학대에 자주 노출되다 보면-그 아동은 왜, 무엇 때문에 자신이 고통을 받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을 테지만- 이런 학대에 대해 자기가 무슨 책임을 질 건지도 알지 못한다. 학대/폭력은 아무튼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것이고, 저쪽의 몫이다. 저쪽 가해자가 나에게 고통을 주니, 과오는 분명 저쪽에 있는 거로 생각한다.

하지만 반복되는 학대를 받다 보면, 아이의 내면에는 동시에 뭔가 자신은 안 좋은 게 있나 보다, 자신은 정말 나쁜 아이인지도 모른다는 마음을 품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경멸하게 되고 자존감은 한없이 추락하게 되고 만다. 외양상 그 아이는 늘 시무룩해 보이고, 자신감이 결여돼 있다. 가해자에게 향해야 할 적개심(부정적 에너지)이 자신 쪽으로 향해질 수밖에 없어서다. 하지만 그 가운데 그는 계부나 계모가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도 문제 해결의 한 방도임을 무의식적으로 습득하게 된다. 분노를 처리하는 다른(지혜로운) 해결 방법을 배울 기회도 없었을 테다. 평소 그가 몸소 ‘체험’으로 배운바, 분노의 처리 방법으로 폭력 행사가 유일한 방법인 것으로 각인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이는 이제 (자동적으로, 무의식에 훈습이 되어) 가해자와 동일시하는 심리를 취해, 자기 패배나 좌절로부터 벗어나는 통로를 확보하게 된다. 다시 말해 가해자의 ‘힘’을 자기의 ‘힘’으로 삼아, 이후 자신은 어떤 좌절이나 스트레스를 겪을 때, 이런 부정적인 ‘힘’을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그 ‘힘’은 오랜 학습 과정을 통해 이미 그의 내면에서 정당화된 ‘힘’이기도 하다. 이런 심리 과정을 정신분석에서는 공격자와의 동일시(identification with the aggressor)라 부른다. 흔히 폭력의 대물림이란 말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성폭력을 당한 아이가 후에 성폭력 범죄를 저지르는 일도 유사한 맥락의 심리 과정에 따른 결과다. 폭력을 대물림받은 사람은 이성적 판단을 하기에 앞서 자신의 분노에 대해 어떤 구실을 붙여 서둘러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농후하다. 세상/세계를 부정적으로 비난하고, 비판하는 일에 부화뇌동하는 경향도 많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실상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이 ‘분노 희생자’ 관념에서 벗어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치유란 이 ‘희생자라는 관념’에서 탈피하는 쪽으로, 해서 점차 용서의 개념으로 나아가야 궁극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3. 맺는말
 
분노 반응에 대한 치유의 커다란 줄기들을 대략 스케치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분노는 날것 그대로 폭발시켜서는 결코 제거되지 않는다. 보복에 대한 무의식의 환상이 지속되는 한 그것은 반복되어 다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소 일상에서 분노가 일어나거나 혹은 화가 날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이런 반응을 ‘무의식에 숨기거나 잠입되지 않도록’ 있는 그대로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습관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것은 분노란 인간/동물의 생래적인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함의도 있다. 그리고 이런 감정에 대해, 또는 그 느낌에 대해 잠시 의도적으로라도 헐떡이는 마음을 내려놓고, 그것들이 제 마음 안에서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주시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상처받은 것이 곧바로 보복으로 이어지는 것에 대한 그 후과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오랫동안 이런 관찰 수행을 자주 하다 보면, 분노의 폭발이란 것이 자신의 두려움에 기반을 둔 것임이 발견된다. 자존심이란 것도 별 의미가 없다는 앎에 이르게도 될 것이다.

2) 겸손과 양보와 인욕의 마음을 내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이다. 이런 마음 자세를 갖추다 보면, 해가 거듭될수록 내면이 점차 자유로워짐을 느끼게 되는, 그런 공간이 마련되리라 본다.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드러낼수록 분노가 절로 녹는다는 것도 알게 된다. 분노는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고, ‘자신 있음’이 아니라, ‘자신 없음’에서 나온 과장된 방어의 하나임을 인지하게도 된다.

3) 평소 대인관계에서 분노나 짜증을 일으킬 만한 상황이라면, 그 느낌을 스스로 알아채고 그 느낌에 대해 상대에게 말로 표현하고, 상대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이것의 유익성은 이런 태도를 연습하는 가운데 금세 스스로 알아채게 된다. 돌아가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보다 자신의 느낌에 주의를 하면서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매우 유익하다는 것이다. 절대로 상대를 조정/조절하려는 의도를 품지 말아야, 그 대화는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대화 시 섣부르게 판단을 앞세우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상대에게 앙심을 품는, 하나의 공격으로 비칠 수도 있다. 타인에게 강요하는 의미도 있다. 이로 인해 상대에게 예기치 않은 분노 반응이 야기될 수도 있다. 진정 선의를 갖고 대화를 하면, 사실 두려워할 게 없다.

4) 어떤 고통이 있다면, 고통을 고통으로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태도의 견지는 고통을 여러 방어로 숨기고, 무의식의 세계를 어둡게 드리우는 것보다 훨씬 건강하고 유익한 방도다. 고통을 여러 방어로 숨기는 방도 가운데, ‘죄’를 부둥켜안거나, 혹은 ‘지극히 높으신 분’께 용서를 빌며 상대가 변화하기를 기도하는 일이 있는데, 이는 자기의 파괴적 욕구의 한 변형일 뿐이다. 하지만 분노 관련, 용서의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결국 용서하는 마음에서 분노는 궁극적으로 용해될 수가 있다. ■

 


신승철 / 정신건강의학 · 신경과 전문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연세 의대 정신과 교수, 미국 텍사스 의대 정신보건 연구 교수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한국인의 자살〉 등과 저서로 논문집 《연변조선족 사회정신의학 연구》 역서 《비폭력의 기원, 간디의 정신분석》(에릭 에릭슨 저) 에세이집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 《나를 감상하다》 등이 있다. 현재 블레스 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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