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사회와 분노 그리고 불교

분노는 분노에 의해 멈추어지지 않는다
분노는 자비에 의해 비로소 멈추어진다.
이것이 영원한 진리(다르마)이다.


1. 분노의 시대, 불교를 주목한다

분노는 인간뿐만 아니라 욕망을 가진 모든 유정물에게서 발견되는 보편적 현상이다. 심지어 일부 생물학자들은 분노야말로 타자의 공격이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생존의 필수조건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분노는 이렇듯 보편적이기 때문에, 인류 역사상 어떤 사회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그러나 그러한 분노의 정도나 유형은 사회에 따라 혹은 계층이나 집단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실제로 아전인수(我田引水)의 고사가 시사하듯이 농경사회에서는 물싸움에서 분노의 전형을 발견할 수 있지만,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보복운전이 분노의 대표적 유형이다. 또한 어떤 시기에는 분노로 인한 갈등이 빈발하고 심지어 전쟁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어떤 시기는 이른바 황금기를 구가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는 특수한 사회적 현상이기도 하며, 그런 점에서 조절 가능한 현상이기도 하다. 분노의 조절 가능성은, 분노가 행위자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수반한다는 점 때문에 현실화되기도 한다. 전쟁의 참상을 떠올려 보면 쉽게 간파할 수 있듯이, 분노는 인류사회가 추구하는 보편적 이상인 행복과 평화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위험한 에너지이자 힘으로 작용한다. 그래서서모든 사회에서는 분노를 해결할 수 있는 법제적 장치, 정치적 제도, 인욕이나 자비와 같은 가치 등을 개발하여 인간사회의 분노 에너지를 나름의 방식으로 적절히 조율해 왔다.

문제는 현대사회다. 굳이 칼 폴라니나 니클라스 루만을 언급할 것도 없이 현대사회가 기능분화의 사회로 진화하면서 경제제도는 정치제도나 법제도와 무관하게 자기준거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게다가 현대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은 모든 구성원으로 하여금 마치 불나방처럼 희소자본을 끊임없이 추구하도록 욕망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에 그 욕망 충족의 필연적인 실패 혹은 부족에서 파생되는 분노를 피할 길이 없다. 이는, 분노를 조절하는 제도나 장치는 점점 제한적인 기능만을 하는 반면에, 좌절과 분노를 부추기는 제도는 더욱 급속히 진화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노의 구조화이다. 게다가 사회학자 루만은 현대사회의 다양한 사회적 기능체계들 중에서 경제체계와 매스미디어 체계가 가장 급속하게 진화했다고 주장하는데, 바로 이러한 기능체계가 현대인의 욕망을 부추기는 대표적인 사회적 체계이다. 그 결과 현대사회에서는 구조화된 분노가 현대인의 일상생활에 투영되어 현대인은 정치적 사건에서부터 사소한 일상적인 삶에 이르기까지 상시로 분노를 경험하는 이른바 분노의 일상화에 노출되어 있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분노가 폭증하는 사회적 맥락이다. ‘헬조선’이란 유행어를 탄생시킨 현대 한국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한국사회의 경우, 시기나 사람 혹은 계층이나 집단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현대의 자본주의적 속물주의가 전통적 권위주의 문화와 결합하면서 국민 대다수를 화병 환자 내지는 갑질의 희생자로 만들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행위자를 직접 조율할 수 있는 가치영역에 주목한다. 그리고 ‘분노를 자극하는 가치’에서 ‘분노를 억제하는 가치’로의 가치 전회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불교에 주목한다. 주지하듯이 붓다는 분노를 삼독의 하나로 간주하고 행위자 스스로가 수행 혹은 인욕을 통해 분노를 지멸할 것을 가르쳤고, 저 유명한 《법구경》의 구절이 시사하듯이 더욱 적극적으로 분노를 자비로 대체할 것을 가르쳐 왔다. 오늘날까지도 불교는 이 가르침만큼은 액면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비록 자비의 마음이 경제체계나 정치체계와 같은 현대사회의 기능체계들의 작동에 직접 개입하여 그것을 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분노와 기능체계의 구조적 연동(structural coupling)’을 ‘자비와 기능체계의 연동’으로 전환하는 것만으로도 사회 전체의 분노 수준은 상당히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전환은 행위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최소한 자신이 자신을 쏘는 ‘2차 화살’을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논의가 여기까지 도달하면, 이론적 차원에서는 분노를 배태하는 사회구조와 ‘분노를 억제하는 가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를 우선 해결해야 한다.

2. 분노와 사회구조의 연기적 작동

학문적 차원에서 인간의 의식(마음, 관념, 이념, 가치 등 포함)과 사회구조 사이의 관계를 가장 치열하게 논의하는 학문을 꼽으라면 단연 사회학을 꼽을 수 있다. 사회명목론적 관점과 사회실체론적 관점, 전자를 대표하는 베버리언과 후자를 대표하는 마르크시즘,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되어 이합집산을 하고 있는 각종 아류 이론들이 그간 사회학 이론을 주도해 왔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그런데 최근 사회학자 루만(L. Luhmann)은 이러한 이론들을 모조리 ‘구(舊)유럽적 사고’라고 급진적으로 비판하고, 인간이나 사회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의 관계를 구성주의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사회적 체계(social system)’ 이론을 제시하여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루만은 지금까지의 사회학이 세 가지 전제 즉 사회는 인간으로 구성된다는 전제, 사회는 국민국가와 같은 지역적 경계로 설정된다는 전제, 그리고 고전적인 ‘주체-객체’의 전제(즉 사회학자가 연구주체로서 연구대상인 사회를 연구한다는 전제) 등에 기초하여 이루어짐으로써 심각한 인식론적 장애를 겪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그는 일체의 실체론적 관점을 폐기하고 인간의 마음은 심리체계로, 사회는 사회적 체계(혹은 사회적 체계들)로 이해할 것을 제안하고 나섰다. 루만의 ‘소통으로서 사회’ 개념이 그러한 인식론적 산물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루만은 사회를 소통작동으로 구성되는 사회체계로 규정하고 있고, 사회체계는 자기준거적 자기생산(autopoiesis)을 하는 폐쇄체계(closed system)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루만에 따르면 의식이나 마음은 사회체계와는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심리체계이기 때문에 그 환경인 사회체계와 구조적으로 연동되어 공진화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사회체계와 심리체계 사이의 구조적 연동(structural coupling)과 공진화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한가? 바로 이 지점에서 루만 고유의 의미 개념이 등장한다. 루만에 따르면 의미는 개인의 의식(심리체계)의 산물이 아니라 소통으로서 사회의 산물이다.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의미는 구별에 의한 차이와 그 반복에 의한 형식의 산물이며, 그것이 구조적 연동의 매체로 작용한다. 이는 ‘심리학적 의미론의 사회학적 복원’이라 부를 정도로 큰 사회학적 함의를 지닌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루만의 사회체계론 및 구조적 연동 개념에도 다소의 한계가 내재되어 있다. 루만은 의식, 마음 등을 심리체계로 전제함으로써 의식이나 마음을 구성하는 사회적 요인을 배제하고 있다. 게다가 심리체계와 사회체계는 각각 서로서로 체계와 환경의 관계에 있고, 그 관계는 둘 사이의 구별에 근거하며 각각의 체계는 자기준거적으로 자기생산을 하면서 작동하기 때문에, 심리체계와 사회체계는 구조적으로 연동되어 있기는 하지만 각각의 내부로 침투할 수는 없다. 루만은 다음과 같이 잘라 말한다. “마음체계(systems of the mind)와 소통체계는 서로서로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두 체계는 구조적 상보성의 관계를 형성한다. ……나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각각의 폐쇄된 체계의 독자성은 구조적 상보성의 필요조건이다”. 이러한 루만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궁극적으로는, 비록 루만이 인식론적 차원에서 일체의 실체화를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구성주의적 체계이론을 제시하고 있고 그러한 점에서,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겠지만 의식이나 마음은 심리체계로 그리고 소통체계는 사회적 체계로 고정화함으로써 그 체계들을 ‘준실체(準實體; pseudo-substance)’로 간주하는 효과로 귀결되거나 해석되는 결과를 피할 길이 없다. 이러한 체계이론에 따르면 경제체계에서 돈 거래는 지불-비지불의 코드로만 작동하는 순수한 경제적 현상으로만 간주될 뿐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호의가 거래에 개입되는 경제외적 측면을 설명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이 글에서는 전통적 사회학 이론에 대한 루만의 비판을 계승하지만 그 대안을 루만의 체계이론에서 찾고자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글에서는 연기적 관점에서 사회구조와 의식(가치, 마음)의 관계를 이해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왜 연기적 관점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연기적 관점은 ‘루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보자. 우선, 우리의 인식 관심이 사회구조와 마음 현상(분노 및 자비)의 관계를 이해해야 하는 연구 상황이다. 그래서 양자의 관계를 연기적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그것은 곧 세 가지 범주, 즉 사회구조, 마음(분노 혹은 자비), 그리고 그 관계 모두를 각각 연(緣)에 의해 발생(起)하는 현상으로 관찰함을 의미한다. 동시에 이는 어떤 범주도 내적으로 불변하는 핵이나 본질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결코 실체화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불교는 이러한 연기현상을 무아, 무상, 공(空)과 같은 개념으로 파악해 왔는데 이러한 개념들은 사회체계론적 관점의 한계 즉 체계의 고정화 혹은 실체화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 게다가 이러한 연기적 관점을 선택하는 순간, 구별의 이면(사회구조)과 저면(분노 혹은 자비 현상)은 상즉(相卽)하는 동시에 상입(相入)한다. 이는 루만의 주장과는 달리, 사회구조도 어떤 방식으로든 마음에 침투하지만 마음도 소통을 통하여 사회구조에 재진입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할 때 어떤 대상을 관찰하는 사람의 인식도 주체가 심리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루만의 테제가 더 설득력을 가질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연기적 관점에 따르면, 의식이나 마음은 심리체계로 고정되거나 실체화되기보다는 육체, 이성, 감성, 의지, 상상력, 대상(자연과 사회 포함)의 연기적 작용의 결과물로 간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구조와도 지속적으로 연동하면서 구성되는 그 무엇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관심을 갖는 사회구조뿐만 아니라 마음 현상도 각각 연(緣)의 작동에 의한 우연적 단위일 뿐이다.

또한 연기적 관점에 따르면, 사회와 마음의 관계는 상즉의 관계만이 아니라 그들 사이의 상입, 즉 이러한 단위 사이, 개별 단위 내부 요소와 다른 단위 사이, 그리고 각각의 단위 내부의 요소들 사이에도 상호침투의 관계가 존재한다. 게다가 연기법을 깨달은 붓다가 신, 운명, 우연, 조상신 등에 의한 결정론을 부정한 사실이 시사하듯이, 그들 사이의 관계에도 중층적 상호인과율이 작동한다. 이러한 중층적 상호인과율에 따르면, 그 어떤 현상도 내적으로 불변하는 본질을 갖는 것이 아니듯이 어떤 외적인 요소나 외부의 힘이 절대적 결정력을 가지는 것도 결코 아니다. 오히려 모든 현상은 선택된 단위 내부의 연(緣)과 외부의 연(緣)이 상호의존적으로 발생한 결과일 뿐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다음을 암시한다. 연기법이 전제하는 구별의 이면과 저면 사이의 상즉상입 관계 혹은 두 면 사이의 소통은, 내적 준거와 외적 준거가 다 함께 소통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간주하는 루만의 사회이론과 유사하지만 내적 준거와 외적 준거의 관계를 상입의 관계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루만의 사회이론과는 명백히 다르다.

이상의 논의를 우리의 주제에 적용하면, 사회구조와 마음 현상으로서 분노 혹은 자비의 발현[起]은 그 다름 즉 구별에 의해 발생하는 단위 내외의 연(緣), 즉 마음의 연과 사회구조적 연이 중층적으로 상호침투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두 가지 실증적 사례

앞에서 우리는 분노와 사회구조의 구조적 연동을 연기적 작동의 관점에서 이해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런데 매우 다행스럽게도 불교 경전에는 이를 실증할 수 있는 사건들이 다수 기록되어 있다. 특히 석가족 멸망 사건이나 왓지연맹의 칠불쇠법(七不衰法) 등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이에 아래에서는 이 두 가지 사례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본 다음 그것을 종합함으로써 사회구조와 분노의 마음 사이의 연기적 작동을 실증해 보고자 한다.

1) 석가족 멸망 사건의 사례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석가족 멸망 사건의 개요를 살펴보자.

꼬살라의 빠세나디 왕은 부처님을 흠모한 나머지 샤까족 출신의 왕비를 맞이하고 싶어 했다. 그는 까삘라 성으로 사신을 보내어 자신의 뜻을 전했는데, 까삘라의 숫도다나 왕은 내키지 않았으나 강대국 왕의 청혼을 거절할 수 없었다. 샤까족은 꾀를 내어 왕족 마하나마와 그가 데리고 있는 하녀 사이에 태어난 딸 와사바캇띠야를 왕족이라고 속여 보냈다. 이런 사정을 몰랐던 빠세나디 왕은 크게 기뻐하며 와사바캇띠야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와사바캇띠야는 얼마 후 위두다바 태자를 낳았다. 태자가 성장해서 어머니 나라이자 자신의 외가인 까삘라 성을 방문했다. 샤까족 사람들은 그를 천민의 자식이라고 경멸하고 모욕을 주었다. 그때 어린 왕자의 가슴에 원한의 싹이 심어지니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아버린 위두다바는 돌아와 부왕에게 이를 고했고, 빠세나디 왕은 진노하면서 왕비와 태자의 지위를 박탈했다. 이에 태자는 부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뒤 대군을 이끌고 까삘라 성을 공격하였다. ……“대왕이여! 동족이 없는 것은 그늘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자 위두다바는 군대를 철수하였다. 이러기를 세 번이나 반복하였지만, 그 원한의 뿌리가 하도 깊어 복수하려는 의도를 참으려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위두다바의 네 번째 출병 현장에는 부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위두다바의 군대는 샤까족 백성을 모조리 살육하였다. ……다음과 같은 후일담도 전해진다. 전승을 거두고 왕궁으로 돌아온 위두다바는 제따 태자가 유흥을 즐기는 것을 보고 꾸짖었다. 제따 태자는 차마 사람을 죽일 수 없어 전쟁에 나가지 않았노라고 말했다. 격노한 위두다바는 태자를 베어 죽인다. 태자는 죽어서 도리천에 태어난다. 위두다바 왕이 개선한 지 이레 후 아찌리와띠 강가에서 성대한 전승 축하연을 연다. 그날 저녁 홍수가 밀어닥쳐 왕은 물에 빠져 죽고, 왕궁은 벼락을 맞아 불탄다.

위의 내용을 보면, 분노(원한)의 마음은 자기준거적으로 작동함이 잘 나타난다. 샤까족 사람들이 위두다바를 천민의 자식이라고 모욕을 주면서 위두다바의 가슴에 분노의 싹이 심어지자, 그것은 부왕 빠세나디의 분노로 전이되고 그 분노가 위두다바와 그의 어머니에게 가해지고 그것이 다시 분노가 되어 친부 살해라는 분노를 낳고, 심지어 샤까족의 살육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후일담이 상징적으로 암시하듯이 위두다바는 자신의 자식인 제따 태자도 죽이고 또 제따 태자는 홍수를 일으켜 자신의 부왕인 위두다바를 죽인다. 이렇게 볼 때 분노는 이전의 분노를 준거로 자기재생산 됨이 분명하게 드러날 뿐만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분노는 분노로 결코 극복되지 않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심지어 그 분노는 부처님도 어떻게 할 수 없음이 잘 드러나고 있는데, 이는 분노의 자기생산은 외부의 힘이 결코 개입할 수 없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분노의 자기준거적 자기생산이 하나의 법칙(인과법)임을 드러내고 있다. 결국 분노는 두 나라 모두에게 엄청난 비극을 낳고 말았다.

또한 이 사례는 인간의 분노가 정치의 작동과 연동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선 위두다바와 빠세나다 왕의 분노가 샤까족의 정복과 연동되어 있다. 또한 분노는 부왕에 의한 태자 및 왕비의 지위 박탈, 태자에 의한 왕위 찬탈, 태자 살해 사건, 태자의 부왕 살인 등과 연동되어 있는데, 당시 사회가 왕국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엄청난 정치구조의 혼란을 의미한다. 이는 분노가 정치구조를 교란시키고 사회질서를 혼란에 빠뜨리는 데 영향을 미침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마음상태로서 분노는 정치와 연기적 관계로 작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질서에 개입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2) 왓지연맹의 칠불쇠법

이 사례의 경우도 본격적인 내용으로 들어가지 전에 그 등장 배경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지 44년 깃짜꾸따에 머무는 동안 마가다국의 왕 아자따삿뚜가 대신 앗샤까라를 보내 갠지스 강 북쪽의 강력한 경쟁자 왓지연맹을 토벌하려는 뜻을 전하면서 세존의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왓지연맹과의 전쟁 문제에 대해 세존은 직접 답을 주지 않는다. 그 대신 시자 아난다와 대화를 나누면서 앗샤까라가 알아서 판단하게끔 하였다. 자신의 심중을 넌지시 내보이는 세존의 방식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보자.

“첫째, 아난다, 왓지 사람들은 자주 회의를 열며, 회의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데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둘째, 왓지 사람들은 윗사람 아랫사람이 서로 화목하면서 함께 국정을 운영한다는데 사실이냐?” “사실입니다.” “셋째, 왓지 사람들은 앞사람들이 정한 규칙과 법률을 깨뜨리지 않고 중시하며, 함부로 고치지 않는데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넷째, 왓지 사람들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과 어른을 공경하며 순종한다는데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다섯째, 왓지 사람들은 남녀가 고유의 의무를 수행하며, 여인들은 행실과 덕행이 참되고 남자들은 강압적으로 이끌거나 약탈하는 법이 없다는데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여섯째, 왓지 사람들은 종묘를 받들고 조상을 숭배한다는데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일곱째 왓지 사람들은 도덕을 숭상하고, 계율을 지키는 수행자가 찾아오면 후하게 맞이한다는데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이렇듯 세존이 물은 일곱 가지 질문에 아난다는 “사실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러자 세존이 결론을 내린다. “아난다, 이 일곱 가지를 잘 지켜 윗사람 아랫사람이 모두 화목하다면 그들은 강성할 것이다. 그런 나라는 언제나 안온하며 누구의 침략도 받지 않을 것이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왓지 사람들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일곱 가지 원칙, 즉 소통을 통한 민주주의, 세대 간 사회적 연대, 사회질서의 준수, 원만한 사회관계, 사회적 역할의 평등한 배분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가정이나 종족의 공동체성 확보, 정신적 가치를 소중하게 여김 등의 원칙을 지킴으로써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구성원들 사이에는 분노보다는 화합과 연대라는 ‘마음의 습속(habit of the heart)’이 지켜지고 있으며 따라서 결과적으로 건강한 사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사회 내부의 건강성이 분노를 방지함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러한 건강성을 근거로 붓다는 아자따삿뚜로 하여금 왓지연맹과의 전쟁을 포기하도록 암시하였는바, 이는 국내 사회의 건강성이 국제사회적 차원의 원한이나 분노의 발생 가능성까지도 예방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왓지연맹의 칠불쇠법은 붓다의 두 번째 테제, 즉 ‘분노는 자비에 의해 비로소 멈추어진다’는 가르침을 잘 입증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3) 소결: 두 사례의 종합

이상으로 우리는 두 가지 사례를 각각 살펴보았다. 첫 번째 사례는 분노가 정복전쟁으로 비화했지만 그것이 해원(解寃)으로 귀결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비극을 낳는 등 확대재생산되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반면에 두 번째 사례는 한 사회 내부에서 다양한 사회계층 사이의 화합과 연대를 토대로 생성된 사회구조(혹은 건강한 사회)가 정복전쟁을 예방함으로써 분노마저도 예방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를 저 유명한 《법구경》의 테제로 요약하면, 전자는 분노는 분노에 의해 멈춰지지 않음을 입증하는 반면에 후자는 자비와 친화성을 가진 화합과 연대에 의해 분노가 멈추어짐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면 두 가지 사례를 종합해보자. 세 가지 사실이 드러난다. 첫째, ‘분노는 분노가 아니라 자비에 의해 비로소 멈추어진다’는 붓다의 테제가 입증된다. 둘째, 분노의 마음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유동적인 것임이 드러난다. 셋째, 분노의 마음이 정치구조의 작동에 영향을 미침은 물론 역으로 사회구조가 그 사회 내외적 분노 혹은 자비의 증감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왜냐하면, ‘평등이나 평화가 해답이다’라는 주장에서 즉각 ‘어떻게 평등이나 평화를 이룰 것인가?’의 문제가 수반되며, ‘이 암울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혁명이나 개혁밖에 없다’라는 진술에도 ‘어떻게 혁명이나 개혁을 할 것인가’의 의문이 반드시 수반된다. 그러하듯이, 저 《법구경》의 테제에도 ‘어떻게 분노의 마음을 자비의 마음으로 전환할 것인가’의 실천적 과제가 수반된다. 이와 관련하여 분명한 것은 연기의 이치를 체득한 극소수의 수행자나 일부 보살들의 경우에는 그 당사자에게 이 문제의 해결을 맡겨 두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채 세속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 사람들의 경우 분노를 억제시키는 사회구조적 환경을 제공해 주는 사회적 실천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다. 두 사례를 종합한 결과도, 개인적 차원의 실천과 사회적 차원의 실천이 동시에 요구됨을 시사한다.

4. 개인적 · 사회적 실천이 수반되어야 한다

제2장에서 논의한 연기적 작동의 관점에 따르면, 사회구조도 지속적으로 변화하지만 개인의 마음도 변화한다. 우선 사회구조의 경우 사회에 따라 그 사회구조가 분열이나 갈등의 구조를 갖기도 하지만 유대나 화합의 구조를 갖게 되기도 할 것이다. 또한 개인이나 집단의 마음의 경우에도 그 구성원에 따라 동일한 사회 현실 속에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자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는 반면, 분노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동일한 사람도 상황에 따라 분노하기도 하고 자비를 베풀기도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구조와 개인의 마음이 결합하는 경우의 수는 〈표 1〉과 같이 네 가지 유형이 가능할 것이다. 
 

〈표 1〉에서 (1)유형은 사회도 유대 구조를 갖고 있고 개인들도 자비의 마음을 갖고 있는 유형이다. 앞 장에서 논의한 왓지연맹의 사례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붓다도 이러한 유형을 매우 이상적인 상태로 간주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1)유형은 분노 해결의 이상형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2)유형은 사회구조가 화합과 유대관계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노하는 개인이 존재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이 경우 분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국불교의 전통적인 대응방식, 즉 당사자의 마음 수행이나 인욕을 실천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반면에 (3)의 경우는 사회구성원들은 자비의 마음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사회의 구조가 계급투쟁이나 전쟁과 같은 분열과 갈등에 휩싸이는 경우인데, 이 경우 인욕과 같은 전통적인 대응방식은 설득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오히려 임진왜란 당시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선사였던 서산청허가 승병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듯이, 전체 사회의 갈등구조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4)의 유형은 현대사회처럼 분노의 구조화로 특징지어진 사회 속에서 그 구성원들마저도 분노로 가득 차 있는 경우이다. 이는 네 가지 유형 중에서 최악의 유형인데, 오늘날 한국사회가 이 유형에 해당하지 않겠냐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유형론에서 볼 때, 삼독의 하나인 분노의 해결과 관련하여 오늘날 한국불교에 주어진 실천적 과제는 (2)유형, (3)유형, (4)유형을 (1)유형으로 전환시키는 것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4)유형을 (1)유형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지금 여기의 한국불교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시대적 과제다. 그렇다면 이러한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불교가 중생의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선대의 발자취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붓다의 방법은 결정적인 교훈이 될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두 가지 사례가 암시하듯이 붓다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즉 하나는 분노는 행위자 스스로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서 분노를 예방하는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 틱낫한, 술락시바락사와 같은 이른바 참여불교 운동가들 역시도 사람들 스스로가 마음의 자비를 가질 것을 주문함과 동시에 분노를 야기하는 사회구조를 비판하거나 바꾸려는 노력을 통해 시대의 고통을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한국불교도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차원의 실천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 하나는 분노를 확대재생산하는 세속사회의 작동방식을 비판하거나 적극적 대안을 모색하는 활동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오늘날 현대인들이 끊임없이 행위자 자신의 마음이나 태도를 성찰적으로 관찰하도록 하는 실천방법을 개발하여 알려주는 역할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 한국불교가 아래 〈표 2〉의 (3)유형, 즉 개인적 성찰은 강조하지만 사회적 실천을 등한시하는 유형에 속하거나 (2)유형, 즉 개인적 자각에 기초하지 않은 채 무반성적 보살행만을 간헐적으로 실천하는 관행에 젖어 있다는 점이다. 좀 더 비판적인 관점에서 보면 (4)유형에 속한다고 생각되는 모습도 적잖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초지일관 지혜와 보살행을 동시에 추구하는 (1)유형을 강조해 왔고, 대승불교 역시도 깨달음과 육바라밀의 실천을 분리의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라 통합의 관점에서 이해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한국불교 스스로가 자기성찰을 통해 불교 본래의 비판성, 즉 사회의 세속적 작동방식에 대한 비판성을 회복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불교와 사회의 만남이란 관점, 즉 불교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현대사회와 같은 기능분화의 사회에서 불교의 역할은 훨씬 더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불교가 아래의 〈표 3〉에서 제시한 매트릭스의 빈칸을 남김없이 모두 채울 수 있을 때, 한국불교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분노의 구조화 및 일상화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으며, 그럴 때 비로소 붓다의 혜명을 이어 대승정신을 오늘날의 현실 속에 올곧게 실천한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5. 풀지 못한 난제가 남아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분노를 삼독의 하나로 전제하고(그랬기 때문에 분노를 지멸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에서 분노를 해결하기 위한 이론, 실증적 사례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개인적 · 사회적 실천 등을 장황하게 논의해 왔다. 그리고 그 논의는 개인적 차원에서 분노를 자비로 전환시키고 사회적 차원에서는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불교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다루지 못했다.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이 글에서는 독재정권이 권력을 남용하는 비민주적 사회와 같은 건강하지 못한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분노가 요구된다는 측면, 즉 정당성을 지닌 분노의 측면을 다루지 못했다.

마침 이 글을 탈고하려는데 ‘강남스타일’이 넘실대는 강남역 부근에서 이른바 ‘묻지마’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피해자에게 아무런 개인적 원한이 없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며칠 뒤 부산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렇다면 ‘묻지마 살인’의 범인들은 누구에게 원한을 가진 것일까? 혹시 우리 사회에, 아니 현대라는 세상에 원한을 가진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들의 분노는 부당한가, 혹은 정당한가? 그리고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 사회가 일시적이나마 자기성찰의 계기를 갖는다면, 그들의 분노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감정과 거시사회구조의 관계에 관한 최근의 사회학적 연구들은 두려움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이 미시사회학적 측면만이 아니라 거시사회학적 측면에서 사회에 개입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광우병 파동이나 촛불시위는 거시사회학적 사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고 평범한 우리 일반인도 스스로 거기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 결과는 때론 분노와 같은 감정적 에너지도 거시시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긍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당한 분노도 분노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도 붓다에 의해 영원한 법(다르마)으로 선포된 저 유명한 《법구경》의 테제는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테제를 적용시키는 순간, 정당한 분노도 동시에 사라진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부당한 체제나 현상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난제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러한 난제를 풀기 위한 치밀한 논의를 할 여유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무책임한 처사인 줄 잘 알지만, 이 난제는 눈 밝은 후속 연구자에게 남겨 둔다. 물론 그 눈 밝은 후속 연구자가 필자일 수도 있고 다른 연구자일 수도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유승무 / 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회학부 교수. 한양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한양대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저서로 《불교사회학》이 있으며, 공저로 《오늘의 사회이론가들》 《사회학적 관심의 동양사상적 지평》 《현대사회와 베버 패러다임》 《유교적 사회질서와 문화, 민주주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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