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 동국대학교 BK21불교연구단 연구원

1. 머리말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후 중국인들의 사유 양식은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물론 이런 변화가 결실을 맺기까지 내부에선 꽤나 심한 다툼이 있었다. 다툼의 종결이 꼭 한 쪽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사유 양식의 출현을 의미한다. 불교를 처음 접한 중국인들은 윤회설이나 보응설에 주목했다. 보응설은 한 인간의 나고 죽음뿐만 아니라 그 나고 죽음의 앞뒤 상황까지 문제 삼았다. 불교에서 다루는 삶은 중국의 기존 사유가 다룬 것보다 훨씬 폭이 넓었다. 이것은 불교가 윤회라는 틀로 시간 의식을 확장했기 때문에 초래된 상황이다. 중국인들은 보응이라는 형식을 만드는 핵심인 윤회주체는 뭐냐는 질문을 자연스레 제기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불교계는 중국의 전통적인 술어인 신(神) 개념을 사용했다. ‘육체의 죽음’[形盡]을 맞더라도 정신 내지 영혼[神]은 소멸하지 않는다[不滅]는 주장을 폈다. 동진 불교의 대표인 고승 여산 혜원은 ??사문불경왕자론?? 다섯 번째 ?형진신불멸론?에서 이런 논의를 더욱 진전시켰다. 이후 불교를 공격한 일부 지식인들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정신도 소멸한다는 형진신멸론을 적극적으로 제기했다.

이렇게 해서 신멸·신불멸 논쟁이 발발한다. 그들은 이 보응설을 무너뜨리면 불교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육체[形]와 정신[神]의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졌기 때문에 중국철학사에서는 ‘형신 논쟁’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중국불교사에서 최초로 발생한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불교에서는 정신이나 영혼이 윤회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불교의 윤회설이 완전하게 소개되지 않은 단계에서 중국불교인들은 나름대로 보응설을 설명했다. 이런 논쟁이 단순히 불교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라고 하면서 폄하할 수는 없다. 이 논쟁은 중국불교와 중국철학에서 불성론, 법신론, 심성론 문제로 확장되기도 했다. 남북조시대 불교 사상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2. 보응설 수용과 윤회주체 문제

보응설은 다른 말로는 업보설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면 인과보응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떤 행위[業]도 그 결과[報]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초기불교에서부터 대단히 분명하게 제시됐다. 보응설은 삶에 대한 해석술이기도 하다. 한 인간이 살면서 겪는 숱한 일들. 좋은 일뿐만 아니라 나쁜 일까지 곧이곧대로 우리 삶에 쌓인다면 아마 생을 영위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 일들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무게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어떤 식으로든 풀지 않으면 우리는 도저히 삶을 지속할 수 없다.

어떤 젊은이가 총질을 해서 수십 명을 살상시키고 자살했다고 하자. 이른바 범죄 심리 전문가들은 범인에 대한 거의 추리에 가까운 심리 분석으로 이 사건을 해석한다. 죽은 자는 말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이해할 수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풀어낸다. 사람들은 “아. 저런 이유 때문에 사건을 저질렀구나”하고 나름 이해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사건을 지나칠 수 없다. 스스로 납득하고 나서야 자신의 삶으로 돌아온다. 불교의 보응설도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건에 대한 일종의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베네딕트 엔더슨은 민족주의의 기원을 파헤친 책 ??상상의 공동체??에서 종교의 역할에 대해 말한다. “왜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는 신체가 마비되는가? 왜 나의 딸이 저능아인가? 종교는 이런 의문들을 설명해 준다. 맑스주의를 포함하여 모든 진화적이고 진보적인 형태의 사고가 가진 커다란 약점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참기 어려운 침묵으로 대답한다는 것이다.” 종교는 삶에서 가장 뼈아픈 일에 대한 설명을 주저하지 않는다. 불교의 응보설 또한 이런 측면에서는 동일하다. 한 사건에 대한 해석이 반드시 과거와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

금생의 많은 일이 전생의 어떤 행위와 관련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거에 묻혀 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의 삶은 단지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그냥 닫히지 않는다. 불교적으로 보자면 삶과 죽음은 끊임없이 교환되기 때문에 삶은 늘 열려 있다. 죽음이 단지 끝이 아님을 바로 이 보응설은 일러준다. 그래서 보응설은 오히려 미래적 언설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행위가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미래를 현재 나의 행위로 구성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구성된 존재일뿐 아니라 구성하는 존재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불교의 보응설이 윤리학이 될 수 있다. 나의 해위는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행위의 의미는 지속된다.

보응설은 “선인락과 악인고과”라는 어쩌면 매우 단순한 도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여기에 전세·현세·내세라는 삼세설이 결합된다. 이것은 한 사건이 세 가지 층위를 가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한 사건은 늘 과거이고, 현재이고, 미래다. 보응설은 이렇게 시간의 중첩을 말한다. 지겸(支謙)이 번역한 ??법구경??에서는 “이 육체는 사라지는 것이지만 정신은 형체가 있는 존재가 아니다. 가령 죽어서 다시 태어나더라도 죄복은 없어지지 않는다.

나고 죽음이 한 번이 아니며 무명과 애욕 때문에 오래간다. 이 때문에 고통과 즐거움 받으니 육체는 죽지만 그 정신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지겸은 3세기 경 중국 오나라에서 활동한 역경가다. 그는 여기서 벌써 정신[神]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죽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이것 때문에 우리가 지은 행위는 죄복을 견인한다는 논리다. 정신은 전생과 현세, 그리고 현세와 내세를 연결시키는 통로다. 보응의 메커니즘으로 ‘신’을 제기한 것이다.

중국의 전통적인 관념에서 신(神)은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주재자로서 천신(天神), 정신 작용, 복잡하고 신묘한 변화 작용이다. 지겸의 번역에서 등장하는 신은 두 번째 정신에 해당한다. 남북조시대 진행된 형신 논쟁에서 등장한 신 개념도 바로 이것이다. 문헌에는 여러 가지 용어로 등장한다. 신(神), 정신(精神), 신식(神識), 신명(神明), 혼신(魂神) 등이다. 이것은 분명 몸[形]과 대비되는 정신 활동을 가리킨다.

당시로선 생사윤회하면서 인과보응하는 주체를 다른 방식으로 상상할 수 없었다. 인도 불교의 개념들이 소개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중국인이 윤회주체를 이해할 때 가장 익숙한 개념을 사용했다. 몸과 정신을 벗어난 윤회주체나 혹은 주체 없는 윤회를 상상하거나 수용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격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후 정신 개념은 논쟁 과정에서 다양한 변화를 맛본다.

불교에 대한 초기 이해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치초(?超, 약 331-373)의 ?봉법요(奉法要)?에서는 윤회 주체로 ‘식’을 거론한다. “식은 여러 겁(劫)을 거치지만 오히려 마음에서 출발한다. 비록 그것의 연유를 알지 못하지만 신체 행위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아주 작은 데서 미세하게 시작하지만 결국 커다란 결과를 맺는다.” 윤회 주체를 식이라고 하는 경우는 어느 정도 인도불교의 전통을 고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초기 문헌 가운데 하나인 ?이혹론(理惑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몸은 오곡(五穀)의 뿌리와 잎에 비유할 수 있고, 혼신은 오곡의 씨앗과 열매에 비유할 수 있다. 뿌리와 잎은 생겨나 반드시 사라지지만 씨앗과 열매가 어찌 끝이 있겠는가. 몸만 사라진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중국에 보응설이 소개되고 나서 윤회의 주체로 ‘식’과 ‘신’이 제기됐다. 뤼청(呂?)은 “두 가지 개념의 내포와 외연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개념들은 곧바로 뒤섞이기 시작했다.

3. 신불멸의 주장과 논쟁의 발발

남북조시대 일기 시작한 신불멸론은 이런 인과 보응설에 일종의 논리를 제공했다. 거꾸로 말하면 인과보응설이 신불멸론을 요청한 것이다. 여산혜원은 ??삼보론??과 ??사문불경왕자론??에서 인과보응설과 신불멸론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우리는 일상에서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 힘겹게 사는 것도 보고, 가증스런 이가 버젓이 거리를 활보하고 심지어 TV에 나와 이러쿵저러쿵 훈계하는 것도 본다. TV를 부수고 싶지만 그래도 참고 살아간다.

그렇다면 도대체 보응설은 현실에서 작동하기나 하는 건가. 이렇게 현실에서 보응설은 징험이 없다는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혜원은 ??삼보론??에서 “현보(現報), 생보(生報), 후보(後報)”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현보는 현생에 자신의 육신으로 과보를 받는 것이고, 생보는 다음 생에 받는 것이고, 후보는 이생이나 삼생, 백생, 천생을 거친 뒤에 받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통해서 현생에서 “선인락과, 악인고과”를 확인할 수 없다는 비판을 비켜갈 수 있었다.

혜원과 비슷한 시대에 활동한 라함(羅含)은 ??갱생론(更生論)??을 지어서 만물은 다시 변화하고 다시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그가 비록 불교의 윤회설을 지지했지만 그의 주장은 순수한 불교 논리는 아니었다. 그는 도가철학의 자연주의에 영향을 입었다. 라함이 ??갱생론??을 제출하자 손성(孫盛)은 편지를 써서 비판한다. “몸이 흩어지면 의식도 그것을 따른다.” 당시 신멸론자 대부분 기론(氣論)에 바탕해서 논의를 전개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육체와 정신은 기의 취산에 의해서 형성되고 사라진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

대규(戴逵, ?-396)는 ??석의론(釋疑論)??에서 “인간은 두 가지 성질(음·양)에 의지해서 생겨나며 오상(五常, 인·의·예·지·신)의 기질로써 양육된다”고 말한다. 혜원은 신을 단지 육체와 대비되는 정신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는 “신(神)은 정미함이 지극하여 신령해진 것이다. 정미함이 지극하면 ‘음양의 기준’[卦象]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혜원은 ‘신’을 육체와 정신 상위의 어떤 것으로 심화시키려는 의도이다. 괘상은 ??주역??에서 말하는 사상팔괘(四象八卦)를 말하는데 음양설에 따른 세계관을 가리킨다. 혜원은 ‘신’은 이것을 통해서 파악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혜원은 “땔감과 불”의 비유로 육체가 소멸하더라도 정신은 소멸하지 않다는 주장을 폈다. 불이 다른 땔감으로 옮겨가는 것은 정신이 다른 육체로 옮겨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는 ‘신’의 성격을 규정하면서 “사물에 감응함으로써 작동한다[感物而動]”고 했다. 여기서 감응은 계속해서 윤회하는 삶을 말한다. 그런데 혜원은 ‘신’ 외에 다시 ‘정’과 ‘식’ 개념을 부가했다. 그는 윤회[化]의 원인으로 정(情)을 제시했다.

이것은 무명 또는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은 윤회의 어미이며, 신은 정의 근본이 된다. 정에는 사물과 회합하는 도가 있고 신에는 은근히 옮겨가는 공용이 있다. 단지 깨친 자만이 근본으로 돌아가고 이치에 미혹된 자는 사물을 쫓을 뿐이다.” 혜원의 이런 논의는 몸과 정신이라는 단순한 구조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훨씬 여러 층위의 의식을 상정함으로써 논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승려인 혜림(慧琳)이 ?백흑론(白黑論)?을 지어서 윤회설을 비판했다. 그는 이 글에서 유교[白]와 불교[黑]의 우열을 가르고 보응설로 사람을 꾄다고 불교를 비판했다. 당시 관료이자 자연과학에 밝았던 하승천(何承天, 대략 370-447)은 혜림의 주장을 적극 지지한다. 혜원의 제자 종병(宗炳)에게 보낸다. 하승천은 ?달성문?을 지어서 “생겨나는 것은 반드시 죽음이 있고 형체는 육체는 썩고 정신은 흩어진다”고 말한다.

마치 사계절이 바뀌듯 모든 존재는 태어났다가 사라지고 만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보응문?에서 “불경은 단지 방편 설법으로 사람들에게 착하게 살라고 권장할 뿐이지 실제 사실과는 관계가 없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보응설이 사실에 기반을 둔 게 아니라 현실에서 윤리적 의도를 가지고 제기된 것이라는 말이다.

하승천과 직접 논쟁한 인물은 혜원은 제자인 문인 종병이다. 그는 ??명불론(明佛論)??(일명 ??신불멸론??)에서 단순히 육체와 정신이라는 도식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인간이 가진 비물질적인 여러 가지 능력이나 활동들은 물질적인 육체에 의해서 구성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혜원이 말한 욕망[情], 의식[識], 신명[神]의 관계를 다시 한 번 거론한다. 그는 이 셋을 명확히 구분해서 사용한다.

종병에 따르면 욕망은 중생이 끊임없이 생사하는 까닭이다. 의식[識]을 통해서 사라지지 않는 근본을 징험하고 무위무욕한 상태에 도달한다. 그렇게 되면 신명[神]은 홀로 밝게 빛난다. 이런 상황이라면 다시 태어남이 없다. 육체는 없고 오직 신명만 있는데 이것을 종병은 법신(法身)이라고 했다.

4. 범진의 신멸론 논리

남북조시대 불교계를 가장 곤혹스럽게 한 이론가는 범진(范縝, 450-515)이다. 중국 고대철학사에서 한대(漢代) 왕충(王充)과 더불어 대표적인 유물론자이다. 범진은 여러 방면으로 불교를 공격했다. 그가 쓴 ??신멸론??은 신멸론 논의의 가장 완성된 형태다. 그도 물론 기론에 근거했다. 범진은 육체와 정신의 관계에 집중한다. 신불멸론이 근거하고 있는 형신이원론을 공격했다. 불교측에서는 육체와 윤회주체로서 정신은 분리된다고 주장했다. 육체의 죽음을 맞고도 윤회가 지속되려면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뭔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범진은 바로 이런 형신이원론을 끈질기게 비판했다. 그는 육체와 정신은 나눌 수 없다고 주장했다. 비교적 체계적인 형신일원론을 제기한다.

범진이 가장 먼저 내세운 논리는 상즉론이다. 그는 ??신멸론??에서 “정신[神]이 바로 육체고 육체가 바로 정신이다. 그래서 육체가 있으면 정신도 존재하고 육체가 다하면 정신도 사라진다.”고 말한다. 범진이 제기한 형신상즉(形神相卽)은 육체가 사라지더라도 정신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불교계의 형신이원론에 대한 정면 비판이다. 범진의 형신일원론은 육체[形]를 정신의 우위에 두고 있다.

육체의 존재여부는 곧 정신의 존재여부를 결정한다는 주장이다. 당시 범진과 논쟁을 벌인 조사문(曹思文)은 형신합용(形神合用)의 논리로 이 점을 비판한다. 그는 말한다. “육체가 곧바로 정신이 아니며, 정신도 곧바로 육체가 아니다. 이것은 합쳐져서 공용(功用)이 되는 것이지만 합쳐지는 것일 뿐이지 즉(卽)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으면 합쳐져서 쓰임이 되고, 죽으면 형체는 남고 신은 떠나간다.” 조사문은 범진의 ‘상즉’에 대항해서 ‘결합’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삶은 결합을 통한 활동이고 죽음은 육체와 정신의 헤어짐이라는 논리다. 범진이 형신은 “이름만 다를 뿐 본질은 하나[名殊而體一]”라고 한 데 반해 조사문은 “이름도 다르고 본질도 다르다[名殊而體異]”고 선언했다. 그는 형신이원론을 분명히 한 셈이다.

범진은 형신일원론을 매우 적극적으로 주장하는데 상즉 개념뿐만 아니라 일종의 체용 개념을 동원하기도 한다. “육체는 정신의 바탕이고, 정신은 육체의 작용이다. 이렇다면 육체를 정신의 바탕이라 말하고, 정신은 육체의 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육체와 정신이 다를 수 없다.” 체용 개념은 불교인에게 대단히 익숙한데 이것을 불교를 비판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체용 개념이 순수하게 불교 개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범진이 이렇게 바탕[質]과 쓰임[用]으로 형·신의 차이를 인정한 까닭은 정신이 갖는 지각 능력 때문이다. 그는 정신의 지각 능력은 바탕으로서 육체에서 파생되거나 연장된 것이라고 말한다.

범진은 이런 형질신용(形質神用)을 설명하면서 몇 가지 비유를 들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날카로움[利]과 칼날[刃]”이다. “정신(精神)과 바탕의 관계는 날카로움과 칼날의 관계와 같다. 육체의 작용에 대한 관계는 칼날이 날카로움에 대한 것과 같다.”고 말한다. “‘날카로움’은 칼날이 아니고, ‘칼날’이 날카로움이 아니지만 날카로움을 버리고는 칼날은 없으며 칼날을 버리고는 날카로움이 없다.

칼날이 무뎌지고 날카로움이 존재한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육체가 사라짐을 인정하고서도 정신이 존재하겠는가?” 범진에 따르면 날카로움이 칼날 자체는 아니지만 그것을 결국 칼날에 포함된다. 날카로움은 칼날의 쓰임일 뿐임을 강조한 것이다. 칼을 계속 사용하면 칼날이 무뎌져서 날카로움은 사라지지만 그렇다고 칼날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날카로움은 결코 칼날을 떠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신불멸론을 말하는 쪽에서는 물질적인 형체나 육체가 비물질적인 정신을 생산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만약 정신을 가지거나 생산할 수 있다면 나무도 정신을 가져야 한다. 정신이 단지 육체의 작용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신불멸론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정신은 육체와 구분되는 전혀 다른 범주라고 생각했다.

범진이 정신은 단지 육체의 한 쓰임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내자 그들은 목석같은 경우 인간의 육신처럼 형체를 갖지만 전혀 정신활동은 없는 점을 든다. “사람의 바탕에는 지각이 있고 나무의 바탕에는 지각이 없다. 사람의 바탕은 나무의 바탕이 아니고, 나무의 바탕은 사람의 바탕이 아니다.” 범진은 정신 작용은 인간이 가진 특수한 자질일 뿐이지 그것이 육체를 벗어난 어떤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만약 지각은 사람의 바탕이 가진 특별한 작용이라고 한다면 아직 상하지 않은 시체에서도 지각 작용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질문에 대해 범진은 죽은 사람의 육체와 산 사람의 육체는 본질적으로 바탕[質]이 다르다고 말한다. 그것은 무성한 나무는 열매를 맺고 시든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은 육체의 작용이라고 했는데 막 죽은 시체는 왜 정신 작용이 없는가”라는 질문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5. 맺음말

신멸·신불멸 논쟁 과정에서 ‘신’ 개념은 의미가 확장한다. 그것은 당시 불교계 상황과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418년 법현(法顯)은 ??대반니원경??을 번역했고 421년 담무참은 ??대반열반경??을 번역했다. 열반 불성론은 당시 불교계의 가장 중요한 관심으로 부상했다. 특히 이런 경향은 남조에서 더 강했다. 불성 개념에 대한 관심은 신멸·신불멸 논쟁과 겹치기 시작했다. 윤회나 보응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나 깨달음의 문제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결국 ‘신’ 개념은 불성이나 법신 개념으로까지 확대된다. 이런 조짐은 혜원에게서 이미 보인다. 혜원은 ?사문불경왕자론?의 ?구종불순화?장에서 ‘궁극의 탐구’[求宗]와 ‘생사윤회의 단절’[不順化]을 이야기했다. 제자 종병은 ‘법신’이라는 말로 궁극적 상태를 표현했다. 온갖 번뇌가 완전히 탈각된 상태다. 종병이 ??명불론??에서 말한 아무런 작위나 욕망이 없이 신명만이 홀로 빛나는 단계. 즉 깨달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불성이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양무제 소연(蕭衍, 464-549)은 “신명을 건립해서 부처가 된다”는 뜻의 ?입신명성불의기(立神明成佛義記)?를 지어서 신명 개념을 불성과 결합시켰다. “마음은 근본인지라 일찍이 달라진 적이 없다. 그것의 작용은 끊어진 적이 없기 때문에 성불의 이치는 분명하다. 소연은 여기서 ??대승기신론??에서 ‘불변(不變)’과 ‘수연(隨緣)’으로 진여의 특징을 말할 때와 비슷한 방법으로 신명이나 심식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논쟁은 여러 가지 이론적 선분 위에 있었다. 신멸·신불멸 논쟁은 양무제 소연 때 종결했지만 그것은 중국적인 교리 전개의 한 계기가 되었다.

김영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본지 편집위원, 동국대학교 BK21불교연구단 연구원, 〈연구공간 수유+너머〉 회원이다. 논저서로 《대당내전록(大唐內典錄)》(공역) <중국근대 불교학 형성과 역사주의 시각> <장타이옌 불학의 근대와 반근대> 등이 있으며, 학술사나 사상사 관점에서 청대와 민국시기 불교를 연구하고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