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 현대한국의 불교학자

현공 윤주일
玄空 尹柱逸
1895~1969

호남불교의 거목 현공묵암(玄空默庵)선사. 호남 사람들은 해박한 불교 이론가이자 적극적으로 포교 활동에 헌신한 윤주일(尹柱逸, 1895~1969, 이하 현공)을 그렇게 불렀다. 그의 자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라서 그런지 모른다. 그렇지만 육조혜능의 말을 적용하자면, 사람은 영남인과 호남인으로 나눌 수 있을지 몰라도 불성에는 어찌 영호남이 따로 있으며, 불법이 꽃피는데 경계가 어디 있겠는가. 시절인연 따라간 것이다. 단지 그의 위법망구 위공망사(爲法忘軀 爲公忘私)의 덕으로 불연(佛緣)이 더욱 깊어진 은혜를 잊지 못하기에 이 지역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부른 것이다.

1. 현공의 시대와 행적

현공 윤주일의 연보를 정리한 양은용은 그의 행장을 제1 성장교육기, 제2 항일개혁운동기, 제3 대중포교 활동기로 나누어 보고 있다. 그런데 삶의 행로를 자세히 살펴보면, 출가수행의 시기와 불교개혁 · 대중포교 · 인재양성의 시기 둘로 나누어 볼 수도 있다. 후자의 세 분야는 시대적 상황에서 볼 때, 병행되어 실천해야만 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활동은 근대 불교개혁가들이 그랬듯 불교에 의한 시대정신의 실천이자 항일독립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현공 또한 중생의 현실에 조응(照應)한 조사들의 발심-구도-깨달음-전법 사이클의 행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현공은 마침 승려의 도성 출입금지가 해제된 1895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금릉학교(현 강진중앙초등학교)를 졸업하던 16세에는 한일병합이 일어난 경술국치의 해였다. 18세에 서울로 올라와 중앙학교(현 서울중앙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신문물에 눈뜨게 되었다. 그리고 비로소 불법에 대한 숙세(宿世)의 인연이 발아되었다. 인사동 범어사포교당에서 용성 선사(이하 용성)의 설법을 듣고 그다음 해에 불문에 귀의하여 보살계를 받았다.

현공은 용성으로부터는 《금강경》과 《원각경》을, 만해 선사(이하 만해)로부터는 《기신론》과 《능엄경》을 배웠으며, 만공 선사(이하 만공)로부터도 설법을 들었다. 그해에 항일운동으로 퇴학당했으며, 다음 해인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다이쇼(大正)대학에서 2년간 불교학을 수학했다. 귀국 후인 1916년에 대각사에서 용성을 은사로 구족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현공 윤주일이 출가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는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불교계 또한 격변의 시기에 가해진 충격에 눈을 뜨기 시작하던 때였다. 일본은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마감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제일 먼저 불교계를 장악하기 위해 도입한 본말사제도를 한반도에도 그대로 이식하였다. 그것이 바로 근대 불교계를 옥죄었던 〈사찰령〉이다. 이회광의 원종 획책에 대한 반발로 불교계가 처음으로 뭉친 임제종 설립(1911), 그리고 이후 만해를 비롯하여 이능화, 박한영, 박중빈, 권상로 등이 불교계의 민족독립과 자주성 확립을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출가 후, 현공은 금강산 유점사로 들어가 2년간 장좌불와의 용맹정진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숙세의 사명을 위한 환지본처(還至本處)에 든 것이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질곡을 체험했고, 중생의 미망을 걷어내기 위한 심신의 준비를 한 것이다. 그는 용성의 뜻을 받들어 평양의 유점사 포교당으로 갔다. 그 길은 앞서 제시했던 것처럼 불교개혁 · 대중포교 · 인재양성으로 요약된다. 현공의 진면목은 이곳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3 · 1 독립운동의 물결이 일던 다음 해인 1920년, 경성에서 조선불교청년회가 창립되자 대표간사를 맡았다. 아마도 만해의 영향에 의해서일 것이다. 조선불교청년회는 만해를 필두로 중앙학림 학승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총독부의 모순된 식민정책은 물론 불교계에 대한 탄압 저지와 항일운동을 위해 조직한 단체이다.
이 해에 용성은 대각교를 창립했고, 만공을 중심으로 선학원이 설립되었다. 만해는 불교의 유신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조선불교청년회의 조직적 기반 위에 조선불교유신회를 결성하였다. 현공은 이 유신회의 평양지회를 창립하고 회장이 되었다. 대승보살이 으레 그렇듯 시대의 격랑 속으로 자처해 들어간 것이다.

다음 해(1921년) 현공은 평양에 청년들을 위한 야학강습소를 열었다. 1923년에는 평양불교청년회 주최로 불교자비참(佛敎慈悲懺) 강연회를 개최하여 강사로 강대련, 김보련 등을 초빙했다. 훗날 현공이 이야기하듯 현대문명을 선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욕망에 대한 뼈저린 참회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사회사업은 더욱 활발해져, 한국 최초의 정신박약아 시설인 자생원(慈生院)을 시작으로 고아원, 장학회관을 설립했다. 이후 조만식 등과 함께 민족문화운동과 신생활운동을 위한 백선행 기념관을 건립했다. 백선행은 조선 최초의 여성 사회사업가로 자신의 부를 사회사업을 위해 아낌없이 희사한 수달장자(須達長者)였다.

이어 1931년에는 보통교육을 위한 명성학교를 열었고, 같은 해에 평양 내 독지가인 김인정의 희사로 인정(仁貞)도서관을 건립했다. 이 공공도서관은 당시 전국에서 가장 좋은 도서관으로 민중의 문맹퇴치와 계몽 및 항일사상을 고취하는 역할을 했다. 현공은 이러한 자선사업뿐만 아니라 민족독립을 위한 전선에 뛰어들기 위해 〈조선일보〉 평양지사장을 맡았다.

해방을 앞두고 이능화(1943), 박중빈(1943), 만해(1944)가, 해방 후에는 만공(1946) 등이 입적했다. 시대와 함께 한 불교개혁운동이 한 막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동족상잔을 예비한 분단의 고통이 찾아왔다. 현공은 1947년 북한 지역에 공산정권이 수립되자 평양 영명사의 열반법회에서 7일 동안 《반야심경》을 강설한 후, 서울로 내려왔다. 열정은 식지 않아 다음 해에 선학원과 불교거사림에서 강사로 있으면서 박한영과 함께 불교 재건에 노력했다.

비록 암운이 드리우고 있었지만, 미래 불교의 기획과 후진 양성을 위해 김적음(金寂音)과 함께 경전 번역과 불교 강술에 힘썼다. 서울로 온 해에 《수양서 반야심경》을 간행하고, 1950년에는 해방 후 최초의 불교입문서인 《대중불교 입교문답》을 펴냈다. 50세가 넘어서 본격적으로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동서세계가 맞붙은 6 · 25동란이 터지자, 현공은 광주로 피난했다. 그래도 최후의 피난처는 불법이었으므로 〈역경불사연기문〉을 작성하고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제주 관음사를 필두로 광주, 목포, 제주, 부산을 왕래하며 포교의 일선에 다시 섰다. 1952년에 광주불교선우회 초청 상임법사로 불경과 논설을 중심으로 한 삼장을 강설했으며, 수행을 지도했다. 송광사의 포교당인 동광사에서 1965년까지 13년 동안, 그리고 동광사 폐사 후에는 광주 관음사로 옮겨 1967년까지 15년 동안 매주 일요일 열변을 토한 강의원고가 쌓여 마침내 《불교대성전》이 되었다.

1954년에는 전남대학교 철학과 강사로 불교철학을 강의하고, 다음 해는 전임강사가 되어 1963년까지 강의했다. 그 사이 전남대학교와 동광사에 주석한 그의 문하에 수많은 제자가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오늘날 광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 현대불교의 못자리판이 이루어진 것이다. 전남대에서 퇴임한 후, 광주 대건신학대학의 초빙으로 불교 강의를 했다. 또한 운허 스님이 이끄는 동국대 역경원의 역경불사에 번역위원으로 참여했다.

그의 말년은 오히려 임운등등 무애자재(任運騰騰 無碍自在)의 삶이었다. 69세인 1963년 〈전남일보〉에 〈불기 이천오백년설-일본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郎) 박사의 주장을 박(駁)함〉이라는 글을 게재하였다. 식민지 불교 청산의 일환이었다. 광주 관음사의 광주불교학생회 · 불교교문회 · 광주불교신도회 상임법사, 전주의 승암사 불교강원 개설과 이력각과(履歷各科)의 강설 지도, 이동호와 함께 전북대학교 불교학생회 창립 지도, 한국불교대학생회 전북지부 창립 등 인연이 닿는 곳마다 법풍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위한 수많은 언설이 법장(法藏)을 이루었다.

그 사이 한국사회도 정치적으로 한판이 뒤바뀌고, 불교계도 일제의 강점에 의한 후유증으로 정화운동이 일어났다. 군사정권의 불교재산법으로 인해 불교 종파가 우후죽순처럼 탄생했다. 고통이 치유도 되지 않은 채 일본과 수교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전변(轉變)의 시대에 1969년 현공은 열반에 들었다. 전주 전북불교회관에서 펼쳐진 《화엄경》 강설 특별법회에서 그의 마지막 사자후를 토했다. 그리고 11월 12일 전주 노송정사에서 십념(十念)을 칭명한 후, 거연히 좌탈입망했다. 세수 75세, 법랍 53세였다. 그의 유지에 따라 유해는 화장하여 전주의 남천에 흘려보냈다.

그는 수행자, 포교자, 사회사업가, 교육자, 상담자, 저술가, 언론가, 항일독립운동가, 불교개혁가, 불교청년운동가 등의 모습으로 시대와 장소와 구제의 대상에 따라 상응한 보살이었다.


2. 현공 윤주일의 불교사상

현공의 광활한 활동을 가능케 한 사상적 특징은 화엄교학에 기반한 점, 불교를 철학과 과학적인 종교로 보고 있다는 점, 그리고 불법의 현실적 실천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앞에서 본 것처럼 현공은 만년에 《화엄경》 강설로 자신의 삶을 회향하였다. 현공은 용성의 설교를 들은 소회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심조만유(心造萬有)의 원리와 화엄법계관(華嚴法界觀)의 부사의도리(不思議道理)는 참으로 어린 정신을 도취시켜버렸다.(〈불교성전출판에 임하여〉)

용성의 《심조만유론》은 삼계가 유심이고 만법이 유식이라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 사법계 · 이법계 · 이사무애법계 · 사사무애법계의 화엄법계관은 주지하다시피 세계를 일심법계로 파악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화엄적 세계관을 현공은 의상 대사의 《화엄일승법계도》를 분석한 《의상조사법성게과주》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는 《화엄경》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징관이 시작하여 법장이 체계화한 신(信) · 해(解) · 행(行) · 증(證)의 4분과로 나누고 있다.

현공은 신분에서 자신의 우주론을 삼계유일심(三界唯一心)으로 파악하고, 마지막 증분을 일진법계(一眞法界)로 보았다. 이는 《대승기신론소》에서 일심이 일법계로 전개되는 해석을 놓고 있는 원효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현공이 《화엄경》은 모든 존재를 통괄해서 일심을 밝히는 것[統萬法明一心]이라고 한 것(《관음경강의》)과도 일치한다.

그의 화엄사상은 유심과 정토마저 포섭한다. 현공은 심성을 수양하면서도 극락정토(타방정토)에 태어나는 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수행이 부족한 사람도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거, 염불을 통해서 극락정토에 태어난다(《불교강연집》)고 한다. 중국 근대불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양문회(楊文會)가 그랬듯이 《화엄경》 〈보현행원품〉의 보현보살의 10광대원(十廣大願)에 의해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처럼 보현행원을 통해 비로자나불이 아미타불과 연결되어 구체적인 실천에 의거한 일승정토를 수용한 것이다.

현공의 화엄적 시각은 이미 《의상조사법성게과주》의 신분에 제시한 것처럼 자신의 우주론을 통합적 관점에서 파악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우주 만유의 현상과 본체를 연구 관찰함에 있어서 시간적 관찰과 공간적 관찰의 두 가지 방법이 있으니 시간적 관찰이라 함은 현상계에 나타난 만유제법이 시간적으로 어떻게 변화생성이 되는가 하는 원리를 규명하는 방법이니 이것을 연기론(현상론)이라고 하며, 공간적 관찰이라 함은 우주만유의 본체가 공간적으로 여전히 존재해 있는가의 원리를 규명하는 방법이니 이것을 실상론(본체론)이라고 한다.(《불교의 우주론》 상)

이처럼 현공은 불교의 우주론에 대해 이 우주 만유를 실상론과 연기론으로 나누어 보았다.
이러한 실상론과 연기론의 결론은 심조만유론, 즉, 통만법명일심(通萬法明一心)으로 맺는다. 용성의 《심조만유론(心造萬有論)》을 계승한 것이다. 유불선 삼교에 대해서도 현공의 화엄적 회통론이 등장하여 삼교회통을 내세우고 있다.

유교는 인륜철학인 동시에 현세도의(現世道義)적 종교로써 존심양성(存心養性)을 통해 태평성대를 추구한다. 도교는 자연주의적 철학인 동시에 인천인과교(人天因果敎)로써 성명쌍수(性命雙修)를 통해 장생불사를 추구한다. 불교는 해탈주의적 철학인 동시에 삼세인과론, 삼계유심교로 명심견성(明心見性)을 통해 해탈열반을 추구한다. 그러나 셋은 모두 권선징악, 심성수양을 통한 진리의 체득과 인의, 자검(慈儉), 자비를 통한 인류제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같고, 각각 의미를 갖는다.(《대중불교 입교문답》)

이러한 화엄사상에 기반하여 불교를 철학과 과학으로도 보는 현대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그는 만해 한용운의 영향을 받아 종교, 철학, 과학인 불교가 인류의 문명을 이끌어야 한다고 했다. 즉 “불교는 종교요 철학이요 과학이다. 그러나 종교만도 아니요 철학만도 아니요 과학만도 아니다. 모든 종 · 철 · 과를 포괄하여 무궁무진한 진리를 설파하였다.”(《불교요의》)고 하여 문명의 요소들을 일치시켰다.
《화엄경》에 대한 4분과를 보는 관점 또한 일관되어 있다.

불교는 종교요 철학이요 과학이다. 불교의 최고 경전인 《화엄경》의 교리를 분과(分科) 설명한 신(信) · 해(解) · 행(行) · 증(證)의 4과에 대비하여 불교 전체를 총판하여 볼 때에 신으로 보면 종교요, 해로 보면, 철학이요, 행과 증으로 보면 과학이다.(《불교강화》)

불교를 철학 및 과학과 부합하는 것으로 보고자 했던 인물은 근대 일본의 이노우에 엔료(井上円了)였다. 송현주에 의하면, 이노우에 엔료가 불교를 철학적으로 정립하고자 한 보다 구체적인 의도는 첫째, 불교는 철학 · 과학과 부합한다는 점, 둘째, 불교의 절반은 철학이며 불교사는 철학사와 유사하다는 점, 셋째, 종교는 철학의 응용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이노우에 엔료의 의도는 불교가 근대문명에 적합한 종교임을 확립하고자 한 것이다.

불교는 진여의 이체(理體)를 도본(道本)으로 삼아 인과의 이법(理法)을 규칙으로 삼고, 그것을 종교 위에 응용하여 안심입명의 도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불교는 철학의 논리에 기초하며, 이학(理學)의 실험에 부합하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여기서 이학은 오늘날의 과학을 말한다. 현공은 당시 일본불교의 연구 성과를 받아들여 불교의 현대화에 매진한 것이다.

이처럼 화엄의 일심법계를 통해 종교, 철학, 과학을 통합하고자 한 것은 결국 현대사회에 적합한 종교가 불교라는 점을 역설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불법의 융회 정신으로 미래의 불법에 대한 희망을 보았다. 그는 불교의 미래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불교는 부처님을 위하여 생긴 종교가 아니요, 중생을 위하여 생겨난 까닭입니다. 둘째로 불교는 시간과 공간을 통하여 영원불변하는 종교입니다. 셋째로 불교는 부분적이 아니요 전체적입니다. 넷째로 불교는 이론적인 동시에 실천적입니다. 다섯째로 불교는 과학적 종교입니다.(《설법집》)

불교는 편협한 정신에 벗어나 인류 문명 전체에 대응하는 종교로서 기능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 최종 목표는 불교의 대중적 실천을 위한 것이었다. 현공이 당면 과제로서 국문으로 된 불교성전 편찬, 남녀 포교사 양성, 일반이 보기 쉬운 포교서적 간행을 제시했던 것도 불교의 대중적 실천을 위한 것이었다.
양은용은 현공의 저술 특징으로 ① 대중불교의 사상이 드러남과 동시에 한글화를 이루고 있는 점, ② 경전에 의하여 강설하는 형식이되 각종의 경전을 두루 섭렵하고 있는 점, ③ 경전 해설에는 불교교리의 체계화가 중심이며, 불교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는 점, ④ 전체적으로 현대인을 위한 불교성전의 형성을 꿈꾸어 왔던 점을 들고 있다.

예를 들어 현공은 《대중불교 입교문답》을 전편 25장으로 구성, 현대사회와 종교 내지는 불교의 필요성, 불법승 삼보를 통한 불교 교리의 평이한 설명, 가정 · 사회 · 직업 생활 속에서의 불교 수행, 불교에 대한 염세적이고 소극적인 부정적 인식 철폐와 수도와 계율로 청정한 승가 복원, 사농공상의 직업을 가지고 수행하는 대중불교라는 점을 문답을 통해 친절하게 베풀고 있다. 그리고 말미에는 불교용어 풀이와 《법구경》 〈쌍서품〉의 법구를 게재하였다.

《불교대성전》에서는 불타품(불보), 교리품(법보), 수도품(승보-自治品), 수도품(승보-對治品), 포교품, 구경품의 6편으로 일목요연하게 불교의 요목을 전개하고 있다. 이는 경전의 대중화를 위해 방대한 팔만대장경을 한 권으로 결집하고자 한 것이다.

불법의 실천을 위해 현공은 불가의 모든 가르침을 통합, 활용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반야심경》을 통해 사종법문으로 사종삼매를 성취할 수 있다고 했다.

먼저 사종법문은 교문(敎門)/선문(禪門)/염불문(念佛門)/총지문(摠持門)을 말한다. 그 목적으로는 각각 개시오입(開示悟入)/견성성불/정토왕생/즉신성불을 들고 있다. 이를 성취하는 방법으로는 삼장연구/공안참구/구념심행(口念心行)/삼밀상응(三密相應)에 해당하며, 그 결과로 간경삼매력/선정삼매력/주력삼매력/염불삼매력을 증득할 것(《반야심경강의》)이라고 했다. 이는 종래의 선종 위주의 마음공부를 벗어나 대승불교에서 구현된 모든 방법론을 통해 불법을 사회화하고자 하고 것에 목표가 있었던 것이다.

그가 《반야심경》을 불교의 대중화에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은 《반야경》 600부의 골자이자 방대한 팔만대장경의 골수법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화엄사상에 입각한 현공의 일심법계 사상은 문명의 인문적 세계관과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각각 통합하여 불법의 현실적 실천으로 나아가고자 하고 있다.

 3. 현공 윤주일의 유산

1) 불교민중화의 정신

그렇다면 현공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무엇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선사(先師)들의 개혁정신을 계승, 불법의 대중화에 뛰어든 개척의 정신이다.

주지하다시피 근대에는 권상로의 〈조선불교개혁론〉(1912년),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1913년), 백용성의 대각교 운동(1921년), 이영재의 〈조선불교혁명론〉(1922년), 박한영의 〈조선불교현대화론〉과 박중빈의 《조선불교혁신론》(1935년)이 등장하여 불교개혁을 주장했다.

현공은 그의 행적에서도 보았듯이 용성, 만공, 만해의 법맥과 학맥을 계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불교운동을 계승하고 있다. 예를 들어, 《대중불교 입교문답》은 용성이 불교의 기본교리, 신앙의 목적, 세간의 불교평가 등 8가지 조항을 세운 《불교입교문답》(1913)을 계승한 것이다. 이는 경전에만 머무는 불교가 아닌 불교의 대중화를 위한 혁신이다. 현공의 모든 글이 한글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전의 한글화 또한 용성이 조직한 삼장역회(1921)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양은용은 《불교대성전》은 “《불교대전》(1914)을 해독 · 강설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 현공은 만해 선사의 학맥을 잇고 있다.”라고 하며, 교의 사상의 출발점이요 귀착점이라고 주장하였다.
현공이 호남 지역에서 각종 불교회와 강원을 설립하거나 여기에 상임법사로서 출재가의 제자들을 길러낸 것은 만공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만공은 선학원을 통해 전국에 선원을 건립하여 수행납자들을 지도, 배출하고자 하였다. 현공은 이러한 정신을 계승, 출 · 재가를 차별하지 않고 불법의 수호자들을 길러낸 것이다.
대승행은 깨달음만 있고, 제중(濟衆)의 실적이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이를 위해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두꺼운 장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현공은 《대중불교 입교문답》에서 당시 불교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개탄했다.

사찰은 염세 타락자의 도피장이 아니면 오직 부녀자들의 기도 불공하는 장소로만 생각하게 되었으며, 승려로 말하면 사람이 죽으면 시다림(屍多林)과 재불공(齋佛供)이나 하여주고 개금불사(改金佛事)니 가사불사(袈裟佛事)니 하여 권선문(勸善文)을 가지고 이집 저집으로 돌아다니며 심지어 걸망을 메고 남의 집 문전에서 한푼 두푼 동령하는 스님들을 보고서 불교 전체를 비방하게 되었으니, 불 · 법 · 승 삼보로서 가장 존경을 받아야 할 승려의 행동은 도리어 세상 사람들의 수모와 멸시를 아니 받을 수 없을 만큼 타락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어떻게 이처럼 불교를 비관적이고 소극적이며 삼강오륜도 모르는 염세적 종교로 볼 수밖에 없느냐는 물음을 던지며, 일갈했다.

나는 부르짖는다. ‘세상에는 불교와 같이 진정한 신앙의 교리를 가지고 고해에 빠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분투노력하는 세간적 종교는 없으리라고 확언하노라.’ 이것은 과거의 역사가 증언하는 바이다.(《대중불교 입교문답》)

그리고 이 책의 저술 목적을 이렇게 밝혔다.

첫째 세상 사람들에게 불교에 대한 바른 인식과 새로운 지식을 가지게 함이요, 둘째 불타의 진리는 시대적이요 과학적인 것으로서 종교를 배척하는 일반 과학자들도 한번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권장함이요, 셋째 태허(太虛) 법사가 제창한 바와 같이 불교는 종교요 철학이요 과학이라는 견지에서 우리 불교신자는 일층 더 합심 협력하여 소아(小我)를 버리고 진아(眞我)의 정신으로써 널리 세계대세를 관찰하며 적절한 방법으로 포교발전에 연구 노력하여 참화의 위기에 절박한 전 세계 인류에게 불타의 진리와 광명으로써 불안과 공포를 물리치고 영원한 평화와 행복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취지(《대중불교 입교문답》)

이러한 점은 전남 영광에서 깨달음을 얻어 전북 익산에 1924년 불법연구회(1947년 원불교로 전환)를 연 박중빈의 사상과도 통한다. 그는 불교는 “장차 세계적 주교가 될 것”이라고 하며, 불법을 천하의 큰 도라고 보고, “참된 성품의 원리를 밝히고 생사의 큰일을 해결하며, 인과의 이치를 드러내고, 수행의 길을 갖추어서 능히 모든 교법에 뛰어난 바”있다고 하고, 불법의 생활화, 대중화, 시대화를 주장했다.
또한 1947년 참회원(1953년 대한불교진각종으로 전환)을 연 손규상의 생활불교, 실천불교의 활동과도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손규상은 계율, 의례, 불상, 기복, 타력 중심의 불교에서 깨달음, 실천, 무상진리, 현세정화, 자력 불교로 혁신하고자 하였다.

박중빈과 손규상의 공통점은 불교의 현대화를 위해 불상을 모시지 않고, 각각 일원상과 금강륜상을 모시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근대 불교개혁의 정신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공은 이들과는 달리 전통적인 교단 내에서의 개혁 정신을 따랐으며, 따라서 현실 속에서 보다 깊이 불법의 본질에 다가서고자 하는 열망이 함께하였다.

현공이 평양포교당을 간 것은 불교개혁의 지향점인 대중화와 생활화를 구체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전국 시, 군 소재지에 포교당을 설치하여 불교대중화를 도모하자는 8대 강령을 제시하였다. 그가 평양에서 포교한 순서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조직을 먼저 결성하고, 문맹퇴치 교육을 다졌다. 그리고 불교의 사회화를 위한 학교건립, 병원, 유치원 등의 방향으로 가고자 하였다. 이는 결국 불교의 근대화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공은 마침내 포교를 위한 인재양성을 위한 계단(戒壇)을 마련하였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1929년 6월에 행해진 3사7증을 청하여 금강계단을 설하고, 비구 및 비구니계와 우바새 및 우바이계를 수지한 수계자가 3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는 기독교가 평양에서 교세를 확장하는 중이어서 불교계에서 예전에 없던 10대 법사를 모시고 수계의식을 행한 것은 평남 불교계에 일대 서광으로까지 평가하였다고 한다. 평양포교당과 평양불교청년회는 경성불교전도대를 초청하여 가상전도는 물론 설교 강연을 개최하였다. 이러한 불교 강화(講話)에는 수백, 수천 명의 청중이 운집하였다. 그의 학교 운영 또한 1937년대에 불탄일에 참석하는 학생이 5백여 명에 이를 정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53세가 되기까지 30여 년을 보낸 평양에서의 기록이 그다지 남아 있지 않아 그의 포교활동 전모를 알 수 없어 아쉽다. 하지만 남하한 후 호남에서 벌인 활동을 보면, 남북을 가리지 않고 손길과 발길이 닿는 곳마다 불교의 대중화에 전신을 던졌음을 알 수 있다.

호남에서 활동은 그가 평양에서 행한 행화(行化)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송담 스님은 현공에 대해 “남북동서와 빈부귀천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해박한 교리와 무애한 변재와 무연의 자비로써 법등을 환하게 밝히셨으니, 선생의 인품과 학덕을 칭송하여 한국의 유마요 말세의 부설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설법집》)이라고 평했다.

잘 알다시피 무연자비(無緣慈悲)는 부처님이 모든 중생에게 차별 없이 베푸는 절대 평등의 대자비심을 말한다. 현공의 일생은 대승불교의 근본을 돌아보는 이 한마디에 수렴된다.

2) 입처개진(立處皆眞)의 보살의 삶

수행자는 스스로를 경책함으로써 대중과 화하되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는 화이불류(和而不流)의 정신을 잃지 않는다. 그러한 수행의 공덕으로 처하는 곳 모두 진실한 불국토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현공은 다음과 같이 자신이 만든 경구를 벽에 붙여놓고, 매일 소리 높여 읽었다고 한다.

일, 노상에서 재물을 얻었을 때 무슨 마음으로 처리하겠느냐. 이, 시비곡직을 불문하고 타인에게 모욕과 구타를 당할 때에는 무슨 방법으로 처리하겠느냐. 삼, 권리와 세력으로써 자기의 사욕을 채울 수 있을 때에 이 마음을 억제할 수 있겠느냐. 사, 권력에 굴복하면 생명을 구할 수 있고, 대의에 충직하면 생명을 바치게 될 경우에 어떻게 처리하겠느냐. 오, 죽음에는 노소가 없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생은 순간이요 사는 영원인데 영원한 죽음의 길을 떠나게 될 때에 무엇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할지 생각해 보았느냐.(《대중불교 입교문답》)

여기에는 수행자가 반드시 극복해야 할 탐욕과 화냄과 어리석음, 그리고 인욕과 정의와 죽음의 문제가 들어 있다. 이를 달리 말하면 내면과 외면의 일치, 허가(虛假)를 버리고 진실을 추구하는 자세, 생사불이(生死不二)의 가르침에 대한 진지한 수행이 깃들어 있다. 이 경구는 현공 스스로 불법에 대한 굳은 믿음에 의거, 진아(眞我)를 찾기 위한 노력을 경책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반야심경》 연구의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불교 공부의 구경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불교는 어떠한 종교인가, 불교는 진아를 찾는 것이 그 첫째 목적이다. 성불의 첩경은 진아를 발견함에 있다. 진아는 과연 어떠한 것인가, 진아는 반야공(般若空) 가운데서 발견된다, 진아를 발견한 각자(覺者)의 행동은 어떠한가.(《반야심경강의》)

그리고 《불교대성전》의 말미에는 “얻기 어려운 사람 몸 이제 얻었고, 만나기 어려운 부처님법 이제 만나니, 이 몸을 금생에 제도 못하면 믿을소냐 내생길 무엇이 될지”라는 게송류의 자경문을 제시했다. 그만큼 불법에 대한 투철한 신행의 자세를 자신과 불자들에게 주문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우리 사회와 인류를 볼 때, 한없는 절망이 생겼던 것도 사실이다. 그는 “인류가 현재는 축생의 길을 밟고 있다.”(《설법집》 이하 동일한 자료)고 하며, 문명의 미래에 대해 절망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원인으로 인간의 생명욕을 들었으며, 이에 대한 “그칠 줄 모르는 탐욕심의 불꽃은 오직 자연계를 정복하고 다른 동물을 살육하는 것만으로 만족을 삼지 않고, 결국은 인간끼리 살상을 하는 대전쟁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라고 했다.

현공이 지나온 20세기는 인간끼리의 대량살육이 이루어진 전쟁의 세기였다. 과학문명이 이토록 인류를 지옥 같은 고통의 궁지로 몰아넣을지 예상치 못했다. 그럼에도 자기반성 없는 문명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따라서 그는 현대문명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가는 인간 스스로 먼저 참회를 실천할 것을 외쳤다.

불타의 교훈으로서 첫째 인간은 몸과 마음이 큰 죄악을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요, 둘째, 우리는 인간답지 못한 인간이라고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이며, 셋째 우리는 죄악을 깨닫고 부끄러운 줄을 아는 이상에는 하루바삐 진정한 마음으로 참회하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오직 참회 가운데에서도 온 몸을 던져 눈에서는 피눈물이 솟아나는 진실한 상참(上懺)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그는 문명의 한 축인 지식인의 사명을 역설하며 날카롭게 질책했다.

학문이 많고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물욕에 대한 탐욕이 더욱 강함으로써 자기의 지식과 학문을 이용해서 온갖 죄악을 더 많이 짓게 됩니다. (중략) 도덕을 무시하고 양심을 잊어버린 학문과 지식이 인류사회에서 무슨 필요가 있으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결국 이러한 탐욕을 멈추고,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불법의 가치를 전파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리고 비로소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다.

태양의 광명보다 더 밝으신 불타의 광명이 전 세계 인류의 심장 속에서 빛이 날 때에, 물질문명이 정신문명으로 과학적 세계가 도덕적 세계로 전환이 될 때, 우리의 눈 앞에 가리웠던 물욕의 꺼풀은 벗어지고 참회의 눈물이 쏟아질 때에, 비로소 우리의 얼굴에는 거룩한 인간다운 표정을 보게 될 것이요, 우리의 가정에도 국가 민족에게도 전 세계 인류사회에 아름다운 행복의 꽃이 피고 우렁찬 종소리가 들려올 줄로 믿는 바입니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발전방향을 불교의 포교에서 찾고, 인류사회의 발전방향을 불교의 자비에서 구했다.
이처럼 사자후를 토한 현공은 송담 스님이 앞에서 언급했듯이 유마의 삶 그 자체였다. 그는 자신의 삶을 수행자에 빗대 이야기했다.

밝고 바르고 큰길로 가는 사람은 너무나 마음이 밝고 바른 까닭에 남에게 속일지언정 남을 속이지 않으며, 언제나 물욕을 초월하여 생활하는 까닭에 항상 생애가 곤궁하며 권문세도가 없는 까닭에 언제나 적막하고 고적(孤寂)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중생이 병들었으므로 나도 병들었다”는 유마의 대비(大悲)의 삶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현공이 살던 시대는 한반도 역사 이래 가장 큰 질곡과 고통이 동반된 격변기였다. 식민지, 분단, 전쟁, 시민혁명과 군사 쿠데타, 독재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땅이었다. 이 혼동의 시기에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의 일생을 산 것이다.

임석진은 현공의 《불교강연집》 서문에서 그에 대해 “불타의 본회(本懷)도 잘 알고, 유마의 두구(杜口, 침묵)도 잘 알고, 달마의 면벽도 잘 알고, 조문의 경절도 잘 아는 분이다.”라고 했다. 실제 그는 법사, 선사, 대법사, 보살 등 여러 호칭으로 불렸다고 한다. 현공 스스로는 자신을 거사라고도 불렀다. 십일면관음보살만큼이나 응신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미 서두에서 보았지만, 그에게는 백척간두를 넘어서 선풍을 드날리는 선사의 풍모와, 민족의 고통을 통째로 안은 투사의 기세와, 대중교화를 위해 저잣거리에 투신한 열혈 포교자의 면모와, 현대문명의 모순을 수술대에 올린 혁명가의 모습이 점철되어 있다. 그의 이러한 행적은 근현대 한국불교사의 지평 확장에 새로운 광맥을 선사한 것이다. ■

 

원영상 / 원광대학교 정역원 연구교수. 2006년 교토(京都) 불교대학에서 〈往生伝의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주요 연구 분야는 일본불교의 역사 및 사상이며 〈일본 근대불교의 연구현황〉 〈일본불교의 내셔널리즘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그 교훈〉 등의 논문과 《승가대학 교재: 한 권으로 보는 세계불교사》(공저), 《축의 시대와 종교간 대화》(공저) 등이 있다. 현재 한국일본불교문화학회 회장, 원불교 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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