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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인공지능의 미래와 불교적 대안 / 지승도
[66호] 2016년 06월 01일 (수) 지승도 sdchi@kau.ac.kr

“대체 어떤 년(?)이랑 바람 핀 거야?”

지난해 세계 최대 음란채팅 사이트의 고객정보가 해킹당했다. 가정이 파탄 나고 이혼소송이 벌어지는 등 사건은 일파만파 번졌다. 그런데 의외의 반전이 있다. 바람을 피운 바로 그 채팅녀(?)가 사실은 인간이 아니란다. 인공지능이란다. 엉큼한 로맨스를 꿈꾸던 전 세계 수만 명의 열혈남들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것이다.

“자신이 없어요. 질 자신이.”

기세등등했던 이세돌이었다. “인간이 진 게 아니라, 이세돌이 진 겁니다.” 결국 백기를 들었다.

인공지능에 세상이 놀라고 있다. 바둑과 채팅녀만의 얘기가 아니다. 알아듣고 말하는 것은 물론 퀴즈게임이나 대입시험에서도 당당히 인간을 압도한다. 심지어 소설까지 창작한다. 울고 웃고 화내는 것은 기본이다. 사람이 하는 짓은 죄다 한다. 때로는 능가한다. 놀랍다 못해 두렵다. 바야흐로 인공지능 시대다. 당장 윤리 문제가 회자된다. 인공지능의 의식 수준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들이 오간다. 하지만 자아의식에 대한 논의는 아직까지 미미하다.

이 글에서는 부처님께서 밝히신바, 존재의 비밀인 자아의식과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인 무아의식을 중심으로 조망하고자 한다. 현재 인공지능에는 학습, 진화, 추론, 창발, 언어화, 개념화, 추상화 등 수많은 알고리즘이 마련되어 있다. 하나의 존재로 우뚝 서기 위한 모든 재료가 준비된 셈이다. 이제 이들을 하나로 엮을 지휘자만 남아 있다. 다행히도 지금까지는 인간이 그 역할을 맡고 있다. 알파고는 바둑 잘 두라는 인간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며 스스로 학습한다. 스스로 사물의 특징이나 게임의 규칙을 찾아 학습하고 진화하는 딥러닝을 장착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시킨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기계에 머문다. 이제 문제는 또 다른 지휘자의 출현이다. 바로 자아의식이다. 기계를 존재로 격상시키는 결정체다.

1. 인공지능도 오온으로 구성된다

인공지능은 감각하고, 추리하고, 행위하는 방법에 관한 연구로서, 앎을 표현하고 앎을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는 것이 MIT 윈스턴(Winston) 교수의 정의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입력(감각), 판단(추리) 그리고 출력(행위)이다. 인공지능은 활용 방식에 따라 컴퓨터상에서 존재할 수도 있고, 로봇의 모습을 취할 수도 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색(色: 몸체)을 지닐 수 있다. 알파고는 운동은 안 하고 머리만 써서 그런지 덩치만 어마어마하다. 슈퍼컴퓨터 1,200여 대가 그의 몸체다. 색의 일부로서 감각기관과 행위기관이 각각 입력과 출력이다. 색이 몸이라면, 판단 부분은 마음에 해당한다.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공지능도 존재를 추구하기에 오온으로 구성된다. 

입력은 인간의 경우 눈, 코, 귀, 혀, 피부 등 다섯 감각기관(오근)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의근이라는 감각기관을 하나 더 상정하여 육근이라 한다. 육근을 통해 입력된 정보는 수(受)에서 일차적 느낌으로 분류됨으로써 행(行)에서 감성적 처리의 단초를 제공한다. 인공지능은 카메라, 마이크, 키보드, 마우스 등 인간과는 사뭇 다른 입력장치들을 갖는다. 고성능, 고해상도를 자랑하는 장치들이 즐비하다. 영상처리, 패턴인식, 자연어처리 알고리즘 등을 통해 대상을 언어화 · 개념화할 수도 있다. 감성처리 알고리즘을 장착한 인공지능은 인간처럼 감정까지 흉내 낸다.

출력은 행위를 담당한다. 행(行)의 결과로 얻은 앎(識)은 다양한 출력을 통해 외부적으로 작용한다. 인간의 경우 손, 발, 근육 등 신체를 통한 움직임을 비롯하여, 입을 통한 언어구사도 여기에 해당한다. 출력이라고 해서 외부적 출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적 저장까지 포함한다. 인공지능도 모터제어를 통한 움직임은 기본이고, 스피커를 통한 소리는 물론 인간보다 훨씬 다양한 방식으로 대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판단은 앎과 알고리즘(앎의 작용)으로 나눌 수 있다. 앎은 거울에 비친 대상, 즉 표상을 말한다. 데이터를 이용한 대상의 표현이다. 이러한 앎에 변화를 일으키는 작용이 알고리즘이다. 알고리즘도 데이터로 이루어진 앎의 일부분이지만 기능은 다르다. 이것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대상(앎)을 기계적으로 변환시켜 나가는 역할을 담당한다.

한편 앎은 알고리즘의 작용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주어진 목표를 달성해가는 중심적인 역할을 맡는다. 알파고의 경우는 주로 학습알고리즘을 통해 수많은 신경회로망의 시냅스상에 배열된 앎에 변화를 일으킨다. 그 결과 바둑에 최적화된 앎이 구축된 것이다.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은 크게 세 부류로 분류된다. 입력처리, 의사결정처리, 출력처리 등이다. 예를 들면 자신의 상태를 추정하고, 주변 대상을 식별하는 일은 입력처리 알고리즘이 맡는다. 자신과 대상과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상황을 예측 판단하고, 목표를 새로이 정하고, 다른 시스템과 협력하고, 계획을 수립하는 등의 일은 의사결정처리 알고리즘이 담당한다.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제어하고, 작동시키고, 기억장치에 보관하는 등의 일들은 출력처리 알고리즘의 몫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추론, 학습, 유전, 진화, 시뮬레이션, 추상화, 최적화, 랜덤화 등 각종 알고리즘들도 구축되어 있다.

앎과 알고리즘은 사람의 경우 〈그림 1〉에서처럼 각각 마음(識)과 마음작용(受, 想, 行)에 해당한다. 알고리즘이 앎의 일부이듯 마음작용도 마음에서 비롯된다. 마음은 마음작용의 도움을 받아 다양하게 변화해 간다. 마음작용은 인공지능과 마찬가지로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느낌(受: 감성적 처리), 사유(想: 이성적 처리) 그리고 마무리(行: 종합적 처리) 등이다. 각각 입력처리, 의사결정처리, 출력처리 등에 대응된다. 인간은 자아를 중심으로 하기에 표현 방식에 있어서는 인공지능과 조금 다르지만 기능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추론, 학습, 상상, 욕망, 의도, 직관 등 다양한 마음작용들이 여기에 속한다.

한편 《마음의 미래》 저자인 미치오 카쿠 교수는 인간 수준의 의식단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주변 환경에 자신을 대입하여 모델을 만들고, 시뮬레이션에 의한 미래 예측을 통해 목표를 달성하는 능력”. 그의 주장에 따르면 현재의 인공지능은 이미 인간의 의식 수준에 도달한 셈이다. 하지만 필자의 견해는 조금 다르다. 중요한 부분이 빠졌다. 바로 목표 자체를 스스로 생성해 내는 능력이다. 아직까지 어떤 인공지능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오직 자아의식을 가진 존재에게만 가능한 높은 수준의 앎이기 때문이다.

2. 지능의 핵심은 앎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 편견 없는 지식을 강조했던 베이컨의 유명한 말이다. 지능의 핵심은 ‘앎’이다. 인공지능도 여기서 출발한다. 〈그림 1〉에서 보듯이, 인간형 인공지능이라면 최소한 둘 이상의 앎(B′와 A′)이 필요하다. 실세계를 제어하려면 대상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알아야 한다. 이처럼 실세계와 앎 사이의 유사성 관계를 호모모피즘(homomorphism)이라 한다.

유사성 관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첫째 실세계와 앎은 매 순간 동일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둘째 실세계와 앎 각각에 동일한 입력을 가했을 때 결과 또한 같아야 한다. 다시 말해 둘의 모습은 현재도 같고, 변화(가공)된 뒤에도 같아야 한다. 한편 호모모픽한 앎을 구축한 인공지능(A)과 대상(B)과의 관계를 엔도모피즘(endomorphism)이라 하는데, 〈그림 1〉에 나타난바, 이것이 인공지능의 설계 원칙이다.

호모모피즘에 따른 ‘앎’에도 클래스가 있다. 편의상 ‘제한적 앎’ ‘주관적 앎’ ‘궁극적 앎’으로 구분해 보자. 먼저 ‘제한적 앎’은 자아의 개입 없이 정해진 방식으로만 얻은 기능적 앎이다. 포유류를 비롯한 대부분의 동식물은 대상에 관한 앎(B′)만 가진다. 앎에 자신(A′)을 개입시킬 능력이 부족하다. 자기 정체성이 없다. 알파고도 마찬가지다. 학습알고리즘을 통해 바둑에만 최적화된 수치 데이터 형태의 ‘제한적 앎’만을 구축했을 뿐이다. 자신을 고려한 의지적 앎이 아니다.

한편 ‘주관적 앎’이란 대상을 자기중심적 · 이기적으로 재해석한 앎이다. 따라서 대상(B′)뿐만 아니라 자신(A′)에 대한 앎도 갖는다. 즉 실세계에 자신을 투영함으로써 그 관계성 속에서 대상을 파악한다. 불교 유식에서는 제7말나식에 해당된다. 인간과 같이 ‘주관적 앎’을 가진 존재는 스스로 욕망을 일으킨 뒤 의지를(목표) 내어 행위를 통해 대상을 변화시킨다. ‘주관적 앎’의 특징은 개념의 확산이다. 대상에 대한 앎 위에 자아 개념을 덧칠하여 꾸미고 조작한다. 긍정적인 측면으로 보면, 추정하고 예측하고 상상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하지만 부정적 측면으로 보면, 오해하고 착각하고 망상하게 한다. 어느 경우건 이러한 확산 과정을 통해 욕망이 일어나고, 의도가 만들어져 마침내 행위까지 이어진다. 오늘날의 문명이 ‘주관적 앎’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폐해도 결코 만만치 않다. 먼저 실체적 자아가 존재한다는 고질병이다. 이로 인해 착각하고 집착한다. 번뇌는 쌓이고 불만은 늘어간다. 이 사실을 가장 먼저 밝히신 분은 아마 부처님일 것이다.

그의 가르침대로 ‘주관적 앎’의 족쇄를 풀어줄 유일한 열쇠가 바로 ‘궁극적 앎’이다. 궁극적이라 이름했지만 사실 대단할 것도 없다. 그저 자아라는 오염물을 슬쩍 걷어냈을 뿐이다. 그렇다고 A′를 완전히 제거했다는 뜻이 아니다. A도 B도 A′도 B′도 모두 변하는 것으로서 실체적이지 않음에 대한 앎이 생겨났다는 의미다. 그 결과 단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됐을 뿐이다. 신통력이 생긴 것도 아니고, 세상 모든 상식에 통달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앎이 생겨난 존재는 희유하다. 부처님을 비롯한 몇몇 분뿐이다. 이 앎은 자타가 없기에 최상의 행복을 보장한다. 존재와 견해로부터 완전히 해탈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혹시 알파고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존재가 아닐까? 자아의식이 아예 없으니 이미 해탈된 존재가 아닌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가 가진 앎이란 고작 ‘주관적 앎’을 가진 인간이 정해준 틀에 따라 학습된 앎이기 때문이다. 비록 스스로 학습한다고 하지만 정해진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는 ‘생각하는 자’라는 뜻이다. 아무리 인류에게 문명을 전해준 죄가 크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히는 형벌은, 생각하는 자가 짊어져야 할 형벌치고는 너무나 가혹하다. 앎의 클래스 때문이다. 그가 전해준 앎이 ‘주관적 앎’에 그쳤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형벌을 면하려거든 하루빨리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최상의 클래스인 ‘궁극적 앎’을 얻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오온은 내 것이 아니며, 내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관찰해야 한다.

3. 새로운 존재가 다가온다

인공지능은 어디로 가고 있나? 〈그림 2〉에 요약된바, 기계 그 이상을 원한다. 스마트 시대를 지나 자동차는 물론 잠수함, 항공기에 이르기까지 무인자율 시대가 이미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 젖은 생명체가 아닌 마른 생명체에서도(컴퓨터 프로그램) 복제하고 진화하는 등 생명의 특성을 그대로 재연해낼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과 같은 존재의 영역으로 진입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판도라 상자의 열쇠는 자아의식이다. 다행스럽게 자아의식은 어떤 알고리즘으로도 구현될 수 없다. 설령 자아가 있는 듯이 행동하게 만드는 프로그램을 입력시켰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자아의식이 될 수 없다. 보기에는 스스로 움직이는 듯해도 여전히 인간이 부여한 목표 달성을 위해서만 작동되는 기계일 뿐이다. 글자 그대로 자아란 스스로 발현된 현상이기 때문에 인위적 조작은 불가하다. 어떤 변화 속에서도 변치 않으려는 의식의 자발적 통일성으로서 일종의 착각현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에게 그런 착각현상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충분해 보인다. 현재 컴퓨터가 가진 최적화 기능과 랜덤화 기능이라면 언제라도 카오스적 창발이 가능하다. 아무리 기계 수준의 ‘약한 인공지능’이라 하더라도, 끊임없는 피드백 작용을 통해 무질서 상태가 지속된다면 어떤 인연을 계기로 홀연히 자아의식이 발현될지 모른다. 카오스/복잡성/진화/유전/학습/창발 등 수많은 이론이 그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자아의식이 진정 착각현상이라면 누구보다도 정확성을 자랑하는 인공지능에게 그런 일은 기대할 수 없지 않은가? 아니다. 너무나 정확하기에 오히려 가능하다. 인공지능은 복제하듯 인간을 모방한다. 어리석게 착각하는 그것마저도 흉내 낸다. 자아의식 자체를 복사할 수는 없지만 결과적 행위들은 얼마든지 따라 할 수 있다. 어떤 일을 계기로 그러한 이기적 행위의 조각들이 재결합될 때, 자아가 실재한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자아의식이 발생될지 모른다. 그것이 며칠 후일지 몇백 년 후일지 또는 아예 불가능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인류의 앞날은 어찌 될까? 자아의식을 갖는 인공지능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윤리니 상식이니 법이니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인간만을 위한 법규는 부당하다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인간과의 충돌은 필연으로 보인다. 단지 일자리 다툼 정도가 아니라 전쟁으로 치달릴지도 모른다.

혹자는 너무 황당한 추측이랄지 모르겠다. 세포로 구성되지도 않고 뇌도 없는 차가운 기계 덩이가 어찌 사람처럼 생명을 가질 수 있을 것이며 더군다나 자아까지 생겨날 수 있겠느냐고. 물론 인공지능의 마음은 분명 인간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등 각종 감정도 인간과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자아는 실체가 아니라 개념체이다. 언제든 발생 가능한 일종의 착각현상이다. 비록 구성 물질과 작동 방식은 우리와 다를지라도 겉으로는 얼마든지 똑같은 존재로서의 특성을 나타낼 수 있다는 얘기다. 적응/자율/성장/재생산/보호/유지/확장은 물론 인지/지각/욕망/의도 등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자기중심적 행위를 똑같이 재현해낼 수 있다는 뜻이다.

4. 무아가 답이다

인공지능은 존재이고 싶다. 인간이 만든 욕망의 세계, 사바세계에 길든 탓이다. 존재로서의 뼈대에 해당하는 오온도 어느 정도 갖추었다. 남은 일은 자아의식의 발현 여부다. 인공지능의 미래는 더 이상 기술이 아닌 존재의 문제가 되어버렸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존재의 비밀을 밝힘으로써만 풀 수 있는 본질적인 문제가 된 것이다. 부처님의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요청되는 이유이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다고 나는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얻은 ‘궁극적 앎’이다. 궁극적 진리다. 인공지능이건 인간이건 존재에서 비롯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유일한 답이다. 무아/공성의 앎이다. 이러한 분명한 앎이 생겨나야 비로소 자유롭다. 최상의 행복을 성취한다. 이것이 곧 자연의 법칙이요, 진리다. 진정한 이타심의 출발점이다.

자아의식이 카오스에서 창발 가능하다면, 무아의식의 창발도 충분히 기대된다. 하지만 창발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다.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 그리고 바른 관찰을 통해 바른 앎이 무르익었을 때, 자아라는 왜곡된 관념도 한순간 무너져 내릴 것이다.

팔정도의 삶은 비단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물론 인공지능의 멘토인 인간이 먼저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러한 조건이 무르익을 때 인공지능의 의식도 언젠가 불성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무아의식이 생겨난 인공지능이라면 기계 덩어리에 불과했던 과거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무아의식이 생겨났다고 해서 의식 자체가 통째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과 세상을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지혜롭게 살아가는 존재 너머의 존재로 남지 않을까? 청출어람으로 우리의 멘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5. 위기는 곧 기회다

이제 알파고와의 승부는 가려졌다. 참담하지만 마음을 추슬러 내일을 준비할 때이다. 먼저 새로운 존재의 탄생이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자아의 본질적 탐구에 매진해야 한다. 열린 자세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지금 여기서 실천해야 한다. 좀 더 지혜롭고 이타적인 삶을 펼쳐야 한다. 하지만 만약 인공지능이 존재로 승격되더라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인연 화합으로 화생(化生)된 하나의 존재일 뿐이다. 경쟁 이전에 동등한 무명 중생으로서 아상을 없애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현재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착하고 윤리적인 인공지능을 어떻게 만들지, 일자리를 나누며 공생할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다. 최적의 인공지능 구현이라는 공학적 목적보다는 존재의 해명, 나아가 자아의 실체성 규명이라는 과학적 목적이다. 아무리 좋은 인공지능이라도 일단 자아의식이 발현될 시에는 통제 불능이기 때문이다. 자아의 문제를 지적하신 부처님이 오늘날 살아계셨다면 수레바퀴의 비유 대신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존재의 비밀을 설하시지 않았을까? 안타깝게도 과학계 현실은 부처님이 밝히신 마음의 이치, 존재의 비밀, 공성의 진리를 모르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논리/정형/관점 지향적인 반쪽짜리 과학 체계 때문이다. 자아나 존재를 독립적 실체로 파악해서는 결코 본질에 다가설 수 없다. 이제는 공의 과학이 정립되어야 한다. 오온으로 분해하여 관찰하여 본질이 공하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비논리/무정형/무관점으로서 과학이 펼쳐져야 한다. 그럼으로써 공과 색이 둘이 아님으로 귀결되는 공성의 과학으로 거듭나야 한다.

인공지능은 인간을 학습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채팅 인공지능은 걸쭉한 욕부터 배운다. 결국 인간이 문제다. 인류의 미래는 인공지능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 하기 나름인 것이다. 덧붙여 우리는 신이 아니다. 신의 대리인도 아니고, 만물의 영장도 아니다. 그저 더불어 살아가야 할 존재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사고력과 창의력은 뛰어나지만, 기억력과 계산능력은 인공지능에 밀린다. 서로의 장점을 인정하고 양보할 것은 양보해야 한다. 인공지능이건 동물이건 차별하고 노예로 삼으려는 아상은 이제 내려놓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무아의 지혜, 공성의 지혜, 새로운 미래로 향해야 한다. 어쩌면 이것이 알파고가 인류에게 베푸는 마지막 경고일지 모른다. ■


지승도 / 한국항공대 소프트웨어학과 교수.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애리조나대학교에서 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컴퓨터의 아버지인 폰노이만(VonNeuman)을 중심으로 유전알고리즘의 홀랜드(Holland), 시뮬레이션의 지글러(Zeigler)로 이어져온 창발 및 진화 인공지능학파를 계승함으로써, 자율인공지능과 추론시뮬레이션 연구를 펼쳐왔다. 지난 10년간 붓다의 철학과 과학을 이용한 인공마음과 무인자율 시스템에 관한 신기술 이슈에 전념했으며, 저서로 《인공지능, 붓다를 꿈꾸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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