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깨달음에 관한 여덟 가지 담론

깨달음 논란

불교계에 다시 ‘깨달음 논쟁’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그 중요성을 직감한 교계 언론에서는 ‘깨달음 논쟁’이 속히 본격화되기를 촉구하기도 한다.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 천명과 돈오점수 비판으로 촉발되었던 ‘돈점논쟁’의 뜨거운 열기가, 지금 다시 새로운 내용으로 계승되기를 기대하는 분위기이다.

‘깨달음’에 대한 교계 안팎의 관심이 새삼 고조된 것은, 현응 스님이 깨달음에 관한 개인적 관점을 공개적으로 개진하고, 이에 대해 비판적 관점들이 이어진 것이 계기였다. 쟁점은 ‘깨달음은 이해로 충분하고, 선정수행이란 것은 필요 없을 뿐 아니라 부처님이 설하신 바도 아니다. 선 수행도 지적 이해일 뿐이다.’라는 현응 스님의 관점이었다. 필자 역시 승단의 지성 한 분이 공개적으로 개진한 이러한 깨달음관이 매우 중요하고도 다양한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고 보아 ‘깨달음은 이해인가?’라는 글로 견해를 밝힌 바 있다. 논란이 확대되자 현응 스님은 재차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글을 발표했다. 비판들에 대한 논증적 반론이 아니라, 기존 입장을 재확인하고 부연 설명하는 글이다. 조계종 종지는 반야부 공을 ‘잘 이해하는 것’이고 니까야에 등장하는 선정설은 부파불교의 윤색이라는 관점을 부각시키면서, 조계종이 계승하는 선종 본래의 종지나 부처님 설법 어디에서도 선정수행은 자리 잡을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역설하고 있다.

필자는 선종의 종지를 반야공의 이해에서 구하는 견해는 제한적 타당성을 지닐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종지를 간과하고 있다고 본다. 단계와 내용을 도식화시키고 있는 일부 선정설 유형은 필자도 붓다의 육성이라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제한적 사례를 일반화시켜 붓다가 선정을 설하신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비약이다. 몇몇 도식화된 선정설 유형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수없이 등장하는 니까야/아함의 정학/선정 법문이 붓다의 육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마하박가》 내용에 대한 현응 스님의 이해도 다분히 아전인수적이다. 현응 스님이 정학 선수행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 관점을 관철시키기 위해 채택하는 논거들은 편향적이거나 부실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현실 문제 인식에는 많은 부분 공감하지만, 불교 이해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여러 문제점이 중첩되어 있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현응 스님의 주장에 관한 지지와 비판의 시선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급기야 전국수좌회의 입장 표명에 이어 한국 선불교 지도자 중 한 분인 수불 스님이 현응 스님의 관점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일련의 과정을 ‘깨달음 논쟁’이라는 말로 지칭하며 본격적인 논쟁으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교계 안팎의 기대와 요구가 비등하고 있다. 필자는 이 ‘깨달음 논란’(아직 쟁점에 대한 논증적 대론이 본격화되지 않고 관점의 차이만 첨예하게 부각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아직은 ‘논란’이다)이, 한 개인의 돌출적 의견 개진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간화선에 대해 누적되고 또 점증하고 있는 비판적 인식이 마침내 승단 내부에서 공개적으로 표출된 ‘예비된 현상’이라 본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매우 의미 있고 주목해야 할 현상이라 생각한다.

안거 때 선방의 선승들 사이에서도 간화선이 아닌 남방 위빠사나를 하는 분들이 제법 된다는 말이 회자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그만큼 승단 내부에서도 간화선에 대한 회의가 점증하고 있었지만, 승단의 주요 인사가 깨달음과 관련시켜 간화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공개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간화선과 관련한 승단 내부의 이견은 성철 스님의 돈오점수/해오 비판으로 촉발된 돈점논쟁이 대변하고 있었다. 간화선에 대한 신뢰는 전제되어 있었고, 다만 내부 주제에 대한 시선의 차이를 둘러싸고 담론을 형성해 왔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는 간화선 자체에 대한 비판이 승단 내부에서 공개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간화선 비판론의 연장에서 현응 스님은, 간화선에서 그토록 경계하는 지적 이해를, 오히려 ‘지적 이해가 깨달음’이라고 반전시켜 간화선의 입지 자체를 무력화시키려 한다. ‘간화선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불교가 산다’는 절박한 인식의 전략적 선택으로 보인다. 이 전략을 관철하기 위해 ‘선종의 종지는 반야공에 대한 이해일 뿐’이라는 관점을 역설하는가 하면, 급기야 ‘붓다는 선정수행을 설한 적이 없다’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간다. 간화선의 기반인 선정을 불교의 뿌리에서부터 제거하면 완벽하게 간화선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응 스님의 간화선 비판은, 비판적 인식을 넘어 간화선과 선정을 아예 불문(佛門)에서 배제하려 하는 과격성을 보여준다.

간화선의 가치와 위상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 승단 내부에서 공론화되는 계기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그 의미가 각별하다. 이 질문에 어떤 내용으로 응답하느냐 하는 것은, 선불교 내지 한국불교의 현재와 미래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또한 현응 스님을 통해 표출된 문제의식은 결코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인식해야, 그에 응답하는 과정이 제자리를 잃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이견 때문에 구도의 길을 가는 도반의 우애를 훼손시키지 않으려는 정서적 품격을 유지해 가면서도, 명증한 진리 탐구가 요구하는 서늘한 지성의 격조를 잃지 않는다면, 매우 유익한 내용을 확보할 수 있다.

2. 깨달음 담론, 깨달음이라는 말

필자의 시선을 붙잡는 것은, 깨달음 문제에 관한 불교인들의 폭발적 관심이다. 현안 쟁점에 대한 논쟁적 담론이 아직 본격화되지도 않았는데, 교계 안팎에서는 예상을 넘는 지대한 관심이 집중된다. 필자는 이 각별한 관심이 단지 현안 논란거리에 대한 궁금증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기간 채워지지 않고 누적되어 온, 한국불교계의 어떤 ‘원천적 갈증’에 대한 해소 욕구가 이 논란을 계기로 분출하는 것으로 본다. 이 갈증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한 독법과 대응에 따라, 작금의 ‘깨달음 논란’이 한국불교의 향상에 근원적이고도 현실적으로 기여하는 ‘깨달음 담론’이 될 수도 있고, 일과성 지적 소란으로 그칠 수도 있다. 필자는 이번의 논란을, 한국불교의 수준을 여러모로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깨달음 담론’으로 가꾸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관심과 전망으로 깨달음 담론의 의미와 갖추어야 할 조건들에 관한 소견을 몇 자 적어본다.

불교사상사에서 우리말 ‘깨달음’에 직접 상응하는 용어를 가지고 불교의 모든 것을 통섭(通攝)해 보려는 시도로는, 《대승기신론》의 ‘깨달음(覺: 不覺/本覺/始覺)’ 사상이 가장 본격적이고도 알찬 내용을 지닌 사례로 보인다. 그런데 작금의 깨달음 논란은 일차적으로 선종(禪宗)과 관련되어 있다. 선종은 ‘선(禪)에 의한 삶의 근원적 치유’를 핵심과제로 선택한 불교 수용의 한 방식이다. 그리고 깨달음의 구체적 방법론으로서 화두 참구를 제시한 것이 선종 내의 간화선이다. 조계종은 이러한 선종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통념적으로 조계종의 구성원들에게 깨달음이란, ‘돈오 · 견성의 선(禪)적 깨달음’인 동시에 ‘간화선을 통한 깨달음’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 글에서 필자는 깨달음 문제를 담론으로 승격시키고 싶은 관심을 반영하여 ‘깨달음’이라는 용어의 정의를 재설정해 본다.

이 글에서 채택하는 ‘깨달음’이라는 용어의 의미와 용법을 발생시키는 기초 조건은 ‘붓다의 전통’이다. 다시 말해, 개인적/사회적 삶의 불안과 오염, 상처와 왜곡을 근원적 수준에서 치유하는 ‘불교적 과정’에서, 목표 접근 내지 목표 성취라는 향상적 변화를 발생시키는 전환적 계기들이, ‘깨달음’이라는 언어의 의미와 내용을 형성하는 조건이다. 따라서 필자는 ‘깨달음’이라는 말을, ‘해탈 · 열반의 삶/세계를 정점으로 하는 향상적 변화과정에서 전환적 계기가 되는 조건들을 확보한 국면’이라 가설한다. 이 ‘전환적 계기가 되는 조건들’에는 지적 이해, 논리적 판단, 마음 국면의 변화, 정서, 의지, 욕구의 변화, 행위의 결단 등 오온(五蘊)의 모든 현상들이 포함된다. 오온 현상의 어느 것(들)에서 ‘해탈 · 열반의 삶/세계를 지향해 가는 변화의 전환적 계기가 되는 조건을 확보한 국면들’이 깨달음이다.

그런데 ‘상향적 변화의 전환적 계기가 되는 조건을 확보한다’는 것은, ‘불교적 문제해결력을 제대로 확보하여 문제를 해결한다’는 의미이다. 개인적/사회적 삶의 오염과 상처들이 치유해야 할 문제들이라면, 그 문제들을 ‘불교적으로 치유하는 해법을 확보하여 그 해법의 효력만큼 문제를 풀어낸 것’이 깨달음이다. 이때 깨달음의 내용과 수준의 문제는, 확보한 문제해결력의 내용과 수준의 문제가 된다. 깨달음의 정의를 이렇게 설정한다면, ‘깨달음 담론’의 주제와 대상은 이법(理法)과 사법(事法) 모두에서 다양하게 발굴될 수 있다.

3. 깨달음에 대한 관심과 갈증의 의미

부처님 이후로 불교를 관통하는 정체성의 중심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깨달아 가는 것’이고 ‘깨달아 사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불교인들은 ‘깨달음’ 논란에 새삼스러워 보일 정도로 비상한 관심을 보인다. 불교의 정체성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면 발생하지 않을 현상이다. 불교 본연의 면모인 ‘깨달음’에 대해 이처럼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그 관심 정도만큼이나 불교가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한국불교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아 가고, 깨달아 살게’ 하는 데 기대만큼의 기여를 못하고 있다는 증좌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한국불교 역사상 현재처럼 불교에 대한 소상한 지식과 정보가 용이하게 유통된 적은 없다.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불교 지식에 관한 갈증은 대부분 해소된다. 법회를 비롯하여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불교 강좌가 지금처럼 자주 그리고 많이 열려본 적도 없다. 절도 많고 수행 도량도 많아 장소가 없어 공부 못 한다는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한글로 쓰인 다양한 불교 경론과 해설서들도 넘쳐나고, 각종 법회와 강의를 TV를 통해서도 언제든지 접할 수 있다. 불교를 접할 수 있는 조건들이 지금처럼 풍요로운 때는 일찍이 없었다. 불교학도 오늘처럼 체계적으로 전개된 적이 없고, 문헌학/언어학적 소양을 탄탄하게 갖춘 불교학자들이 지금처럼 전업으로 탐구하고 연구물을 쏟아낸 적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왜 한국불교인들은 ‘깨달음’이라는 말에 새삼 흥분과도 같은 관심을 보이는가?

‘불교적 문제해결력에 대한 혼란과 결핍’이 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깨달음이란 ‘불교적으로 치유하는 해법을 확보하여 그 해법의 효력만큼 문제를 풀어낸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깨달음에 대한 한국불교인들의 비상한 관심은, ‘삶에 대한 불교적 문제해결력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갈증’이 적절히 그리고 충분히 채워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 지성이 협업으로 가꾸어가야 할 ‘깨달음 담론’의 초점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부처님의 법설은, ‘지금 여기에서’ ‘삶의 불안과 상처에 관련된 문제들’을, ‘경험 가능하고 선택 가능한 범주’에서, ‘근원적으로 풀어주는 해법’이다. 불교 고유의 생명력은 ‘문제해결력’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적 문제해결력을 확보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음과 같은 원칙에 따라야 한다.

경험 가능한 것, 경험을 통해 검증 가능한 것에서 해법을 구하라.

‘인간 자신이 선택하여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을 주목하고, 문제해결에 유효한 조건들을 인과적으로 포착하라.

탐욕/분노/무지에 연루된 문제들에 집중하고, 그 문제들을 잘 풀어주는 해법을 추구하라.

나와 남의 삶을 동시에 이롭게 할 수 있는 해법을 선택하라.

이 원칙들이 일관되게 적용되어야 할 곳은 ‘지금 여기’이다.

깨달음이란 것은 이러한 원칙들에 따라 문제해결력을 확보한 것이며, 또한 그 문제해결력의 효력만큼 문제를 해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불교인들이 깨달음 논의에 비상한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갈망하는 불교적 해법을 필요한 만큼 명확하게 인지 내지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며, 불교적 문제해결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구한 불교전통과 화려한 유산, 넘쳐나는 교학 정보와 수행 열기에도 불구하고, 불교적 문제해결력을 향한 갈증이 심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갖가지 음식이 차려진 밥상을 대하고서도,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는다. 여전히 배고프다’면서 허기를 채워줄 다른 음식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이것이 당신이 찾는 음식이야.’라는 소문이 들리면 반색하며 우르르 몰려가는 형국이다.

불교 지성들이 함께 공들여 가꾸어가야 할 ‘깨달음 담론’은, 불교적 문제해결력을 다양한 관점에서 포착하여 수준급 언어로 복원하고, 그것을 발전시키고 구현해가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깨달음 논쟁은 자극적 주장의 시선 끌기도 아니고, 유명 인사들의 한판 겨루기도 아니며, 편 갈라 서서 특정 관점의 지지와 반대 열기를 고조시키는 일도 아니다. 유례없이 풍요로운 불교환경 속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깨달음의 갈증과 빈곤을 겪고 있다. 만약 그러한 현상이 ‘불교적 문제해결력에 대한 혼란과 결핍’에서 유래한다면, 깨달음 논쟁에 관한 불교인들의 뜨거운 관심은 ‘불교적 문제해결력의 확인과 확보’에 대한 갈증의 표현이다. ‘깨달음 담론’의 현재적 의미는 여기에 있다.

4. 깨달음 담론의 구성 조건

문제를 이렇게 진단한다면, 깨달음 담론을 구성하기 위한 조건들도 분명해진다. 불교적 문제해결력의 이해와 적용을 장애하고 있는 것들을 극복해 가는 것이 담론 구성의 조건이 된다. 그렇다면 어떤 장애가 극복의 대상인가? 필자는 두 가지를 주목한다. 하나는 남방전통 교학과 북방전통 교학의 상호불통과 불화이고, 다른 하나는 불교 전문지식을 산출하는 불교학의 비실용적 속성이다.

한국의 경우, 불과 50여 년 이전 시절만 해도 불교적 문제해결력을 제대로 탐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출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특별한 어문 능력을 요구하는 한문 경론, 교학적 편향성으로 운영되는 출가자 중심의 교육과정, 교학과 수행 정보의 편향적 유통과 난해한 가독성이라는 환경은, 불교적 문제해결력을 제대로 탐구해 가는 데 치명적 장애물이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아마도 전통불교 권역은 대부분 비슷한 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과 수십 년 사이에 불교 역사상 최초라 할 혁명적인 환경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한국인뿐 아니라 대부분의 세계인은 대중 언어를 통해 불교의 거의 모든 정보에 쉽게 접근한다. 정보혁명은 불교의 장구한 전통지형마저 완전히 새로 재편해 가는 중이다. 어지러울 정도로. 이처럼 접근성과 가독성이 용이해진 경론과 교학, 수행 정보들이 넘쳐나고 잘 훈련받은 전문연구자들이 전 세계에 포진해 있는 현실에서, ‘불교적 문제해결력에 대한 혼란과 결핍’을 거론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적어도 한국불교의 경우, 특히 두 가지 문제 때문에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장기간 격리된 채 고유의 정체성을 형성해 온 남방불교 전통과 북방불교 전통이 직접 조우하면서 발생한 상호 불통과 불화가 그 한 문제이고, 불교의 문제해결력을 현재적 시선으로 포착/발굴하는 관심이 처음부터 결여된 근현대 불교학의 속성이 또 하나의 문제이다. 두 문제를 음미하는 동시에, 그에 대한 해법으로서 각각 ‘남전(南傳) · 북전(北傳)의 통섭적(通攝的) 지양’과 ‘실용불학(實用佛學)’을 제안한다.

1) 남 · 북전의 불통과 불화 그리고 통섭적 지양

정보환경 혁명에 수반하여, 대략 2, 30여 년 전부터 한국불교는 교학적 지형의 획기적 변화 국면에 접어들어 현재진행 중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부에는 오랫동안 고립적으로 전개되던 남방불교 전통과 북방불교 전통의 본격적 조우가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 고려 이후 단절되었던 티베트불교 전통과의 재연결까지 추가되면서, 한국에서는 남 · 북 두 전통의 핵심 내용들이 제한 없이 교섭하면서 그에 따른 다양한 변화가 역동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신흥집단의 약진과 전통집단의 동요가 목격된다.

선/중관/유식/화엄/천태/정토/밀교 등에 의거한 전통집단은, 아직은 한국불교의 사상/교학과 수행 및 신행 현장의 주류로 자리 잡고 있지만, 그 위상과 영향력은 현저하게 동요하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한국불교의 미래를 전통불교의 연장선에서만 전망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한편, 주로 남방 상좌부 교학과 수행전통에 기대어 한국불교의 새로운 한 축을 형성해 가고 있는 신흥집단은, 단기간에도 불구하고 주목할 만한 영향력을 확보해 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부처님 원음에 대한 한국인들의 갈증이 신흥집단이 보여주는 확장력의 원천이다. 그러나 이 신흥집단 역시 한국불교의 대안이 되기에는 한계가 명백해 보인다. 무엇보다 신흥집단이 의거하고 있는 교학/수행 전통이 보여주는 니까야 및 부처님 법설에 대한 이해가, 그들의 신념만큼 타당하거나 견실한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북전(北傳)과 남전(南傳)의 불교전통 사이에는 다양한 차이와 간극이 존재한다. 각자 장기간 축적하고 계승해 온 ‘법설(法說) 해석학’의 차이는 교학과 수행론, 신행의 차이로 표현되는데, 그 차이들은 결코 작지 않으며 간과해도 무방한 것이 아니다. 한국불교의 전통집단과 신흥집단은 각자의 선호에 대한 우월적 확신을 품은 채 각자의 길을 가는 평행 병존을 유지하고 있다. 차이로 인한 격리와 간극을 그대로 유지하는 병렬적 동거 상태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거는 근본적 불화와 갈등을 방치하는 것이기에, 다원적 평화 상태라 하기는 어렵다. 현장을 유심히 보면, 전통집단과 신흥집단이 각자 상대를 보는 시선은 위험할 정도의 상호 몰이해와 배타성을 잉태하고 있다. 상대에 대한 경멸적 우월감을 집단적으로 노출시키고 있지 않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불교는 잠재적이고도 구조적인 내부 분열을 방치하고 있는 셈이다.

이 두 상이한 불교해석학 전통의 갈등은 한국불교인들로 하여금 ‘불교적 문제해결력의 탐구와 포착’에 적지 않은 혼란을 겪게 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화두 참구의 간화선만이 부처님 법설의 문제해결력을 확보하는 최고의 방법이다’라는 주장이 기치를 높이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대승전통은 불교가 아니다. 상좌부 교학과 위빠사나 수행이야말로 불교적 문제해결력을 확보하는 길이다’는 주장이 목소리를 높인다. 이미 어느 전통을 선택한 사람, 아직 선호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 모두에게, 이러한 정황은 곤혹스러울 정도로 혼란스럽다. 삶의 불안과 오염을 치유하는 불교적 문제해결력을 확보하려는 사람들로서는, 상호 배타적으로 보이는 이 상이한 불교 이해들 앞에서 방황하기 마련이다.

한국불교의 현장에서 직접 조우하고 있는 북전과 남전의 상이한 시선과 불화를 방치하거나 건너뛴 채 깨달음을 논하는 것은 공허하며 또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한국불교계는 이 중차대한 현안에 대해 본격적이고 지속적이며 충분한 공론을 펼쳐가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전과 남전의 시선을 실존에 접속하려는 열정이 혼재하는 한국불교야말로 남/북 전통을 통섭하기에 적절한 조건을 갖춘 것인지도 모른다. 일찍이 원효가 시도했던 대/소승 회통 작업이, 우리에게는 남/북전 통섭(通攝: 서로 열고 서로 껴안기)의 과제로 다가온다. 불교적 문제해결력의 확보와 그에 의한 문제풀이를 깨달음이라 본다면, 남 · 북전의 시선 차이를 신중하고 깊게 다루어가는 통섭적 탐구는 ‘깨달음 담론 형성’의 필수조건이다.

북전과 남전은 모두 니까야/아함에 담긴 부처님 법설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학이다. 부처님 법설을 읽는 특정한 시선의 해석체계(교학)이고, 그 해석에 의거한 수행론 구성이며, 각자의 시선에 따른 신행적 전개이다. 그 어느 전통이 부처님 법설의 적통성이나 해석학적 타당성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한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남방 상좌부전통이 주장하는 문헌적/교학적 적통성도, 북방 대승전통이 천명하는 사상적/종교적 적통성도, 모두가 조건적으로 평가해야 할 해석학적 선택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각 전통에서 수립된 교학과 수행, 신행 등의 해석학적 차이들을, 그 어떤 전제에도 갇히지 않고 현재적 관심으로 지속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불교전통들을 무력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법설과 불교적 문제해결력을 더욱 온전하게 포착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해서는 남/북전 전통에 대한 무조건적 인정과 수용, 부당한 상대비판, 안이한 회통, 근거 없는 자폐적 찬가는 경계하여야 한다. 또한 교학과 수행에 관한 그 어떤 전문적/대중적 통념이나 이미 확립된 해석학적 틀과 권위에도 갇히지 않으려는 열린 용기가 요청된다. 이런 태도로 남 · 북의 교학 · 수행론을 문제해결력을 기준으로 재성찰하고, 그 내용을 통섭적으로 지양시켜 가는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 이것이 ‘깨달음 담론’의 주요 내용이 되어야 하고, 그럴 때 ‘불교적 문제해결력에 대한 혼란과 결핍’이 점차적으로 수습될 수 있을 것이다.

2) 실용불학의 요청

서구 불교학의 출발은 박물관불교학

근대/현대 불교학은 ‘불교라는 유물’에 대한 서구인의 ‘관람자적 호기심’에서 출발하여 발전해 왔다. 불교전통을 삶의 문제해결에 적용해 본 경험이 없었던 서구인들로서는 불교를 ‘흥미로운 유물’로 대하는 것이 당연하였고, 이 유물에 대한 이해를 학문적 태도로 구축해 가는 과정에서 성립한 것이 근대불교학이었다. 유물과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여 연구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유물을 분석하여, 유물의 양식과 차이, 계보와 체계 등을 이론화시키는 박물관적 관심에서 출발한 것이 서구의 불교학이다. 박물관불교학이라고 불러본다.

박물관적 관심이 추구하는 것은 ‘유물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지 ‘유물의 현재 실용성’이 아니다. 유물은 ‘보존과 이해의 대상’이지 ‘사용의 대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가 아닌, ‘어떤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성립한 것이 서구 불교학의 기본 성격이다. 근자에 서양이 불교에 대해 보여주는 종교적 관심은, 불교학의 산물이라기보다는 문화융합의 산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다만 서구 불교학이 구축한 문헌학/언어학적 성과가 종교적 관심의 지적 기반으로 기여하는 점은 주목된다.

일본의 근/현대 불교학은 서구 불교학의 방법론과 내용을 학습하여 성립한 것이고, 한국의 근/현대 불교학은 일본 불교학의 연장선에서 형성되었다. 따라서 한국의 근/현대 불교학도 기본적으로는 서구 불교학의 성격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한국불교 학인들의 유학 대상은 일본이 주류이며, 일본 학자들과의 사제관계를 통해 일본이 계승한 서구 불교학의 방법론과 성격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근자에는 영미권, 유럽, 동남아 상좌부권 등 유학 대상지가 다양해지고 있지만, 한국 불교학은 여전히 우회적으로나 직접적으로 근대 불교학을 출범시킨 서구 불교학의 시선과 방법론, 성격을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이 문제인가?-불교학과 사용가치의 불상응

불교를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해 채택해 온 전통과 권역에서, 불교는 흥미로 관람하는 ‘유물’이 아니라 삶의 현재적 도구이자 해법으로 사용되는 ‘현물’이다. 이 전통과 권역에서 산출한 문헌과 교학은 기본적으로 ‘삶의 사용가치’를 확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박물관불교학이 ‘관련 자료 이해를 위한 문헌학 · 언어학’ ‘교학의 가치중립적 분류와 분석’ ‘사용가치에 대한 무관심’을 특징으로 하는 데 비해, 불교 문헌과 교학의 본래 목적은 ‘문제해결을 위한 사용가치’에 있으며 따라서 ‘가치 선택적’이다. 물론 불교전통 내부에서도 사용가치와 무관한 사변이나 형이상학에 대한 취향들이 문헌과 교학의 형성 궤적을 남긴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한국불교학에 대한 질문

박물관불교학에서 출발한 근/현대 불교학은 ‘불교 본연의 문제해결적 사용가치와의 분리’를 학문의 이름으로 정당화시켜 온 경향이 있다고 본다. 최근 서구 불교학에서는 박물관적 관심이 어느 정도 충족됨에 따라 불교의 사용가치를 주목하는 시선 전환이 목격되지만, 서구 불교학을 전범으로 삼아 근현대 불교학을 구성해 가고 있는 동아시아국가, 특히 한국의 불교학은, 아직 박물관불교학의 속성에서 자유롭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특정 문헌과 교학에 대한 학문 전문성이 현재적 문제해결력과 무관하게 추구되거나 인정받는 것은 아닌가? 사용가치와 무관한 학문 전문성이 불교학의 목표일 수 있는가? 또 그러한 전문성이 불교학자가 추구해야 할 학문 역량인가? 현대불교학자는 과연 ‘불교적’ 논사(論師)인가? 문헌/교학에 대한 전문지식을 확보한 불교학자는, 그 전문지식의 ‘현재적 문제해결력’을 모색하면서 그것을 ‘자기 견해를 담은 언어’로 ‘재기술’하려고 노력하는가?

불교 본연의 문제해결력에 대한 요청을 그저 응용불교학이라는 부수 영역에 위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특정 문헌/교학 범주 안에서, 전통용어와 논리 안에서만 유효할 수 있는 언어게임으로 동업자끼리 인정하는 자폐적 전문성에 자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현재적 사용가치와 무관한 지식 전문성을 불교학의 논사 능력으로 간주하여 추구하는 것은 아닌가? 실존에 대한 불교적 문제해결력의 포착과 발전을 위해, 문헌/교학의 해석학적 전통과 권위에 갇히지 않을 수 있는가?

실용불학(實用佛學, Pragmatic Enlightening Science)의 요청

문헌/언어/교학/역사/문화에 대한 유물 탐구적 학문인 박물관불교학은, ‘가치중립적 연구’와 현재적 사용가치와 분리될 수 있는 ‘지식 전문성’만으로도 학문성을 인정한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과거에 집중한다. 이에 비해 개인과 사회의 현재실존이 안고 있는 문제의 해법을 붓다의 길에서 확보하여 문제를 풀어보려는 탐구를 ‘실용불학’이라 부른다면, 실용불학은 문제해결의 불교적 방식이 지닌 사용가치를 현재적 관심으로 포착하여 발전/구현시켜 가려는 가치 지향적 탐구이다. 이것은 실존의 문제해결을 위해 불교적 통찰을 학문적 깊이에서 길어 올리는 노력이며, 과거를 안으면서 현재와 미래의 문제해결력을 역동적으로 구성하는 데 집중한다.

실용불학을 구성하여 발전시켜 가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몇 가지 구체적 조건들을 제안해 본다.

첫째, 불교학의 활로는 목표를 보는 시선 선택에서 확보되어야 한다. 문헌/교학 탐구의 목표를 ‘불교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모든 학적 탐구는 문제해결력으로 수렴되어야 하고, 필요하다면 전통문헌과 교학에 대한 상이한 가치 배분과 새로운 구성도 시도해야 한다. 문제해결력에 초점을 맞추면 문헌/교학에 대한 이해도 달라진다.

둘째, 실용불학은 박물관불교학의 성과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활용하는 것이다. 지금 실용불학을 거론할 수 있게 된 것은, 따지고 보면 박물관불교학이 그동안 축적한 성과 때문이기도 하다. 박물관불교학의 성과를 외면하는 실용불학의 탐구는, 전통적 시선에 갇히거나 부실할 수 있다. 그러나 ‘가치중립적 태도’와 ‘현재적 문제해결력에 대한 무관심’을 학문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려는 태도는 극복해야 한다.

셋째, 실용불학이 추구하는 문제해결력은 ‘학문적 깊이’에서 확보되어야 한다. 해법을 수립하게 하는 관련 조건들의 적절한 포착, 그 조건들의 인과적 연관에 대한 정밀한 분석과 논리적 설명, 그를 통한 보편적 호소력의 확보는, ‘학(學, Science)의 자격조건’이다. 이러한 ‘학의 자격’을 갖추려는 노력과 과정이 생략되거나 ‘학의 조건’이 부족한 문제해결 방식들은, ‘학의 성찰적 검토’를 통해 지속적으로 보완되어야 한다. 정서적 호소력에 의존하는 신앙적 해법, 수행 프로그램, 명상 프로그램, 심리치료 프로그램들의 기법주의적 문제해결, 재치 순발력과 현실감각으로 대응하는 즉문즉답의 대증요법식 문제해결, 그 밖의 다양한 현장불교들은, 학의 성찰적 깊이와 지속적으로 접속하여 상호작용해야 한다.

넷째, ‘학적 역량’으로 실용불학을 지향하려면 ‘자기의 생각’을 ‘현재어’에 담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어떤 영역, 어떤 주제를 다룰지라도 ‘자기의 이해와 생각’을 ‘의미를 분명히 제한시킨 언어’로 명확하게 드러내야 한다. 원전용어나 교학이론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써 자기 견해를 대신하는 방식에 머무르지 말아야 한다. 전통용어와 교학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현재어로 재기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와 같은 실용불학의 성격에 상응하는 탐구는 아직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필자 자신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서구 불교학계에서 최근 산출되는 연구들 가운데는 불교적 문제해결력과 연관되는 주제나 내용을 현재적 관심으로 다루는 경우가 점증하는 경향이 목격된다.

불교에 대한 박물관적 관심이 어느 정도 충족되자 불교의 사용가치에 대한 관심으로 시선이 이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불교계의 경우,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박물관불교학적 태도로 전통 언어를 보수적으로 관리하는 데 머무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실용불학적 탐구는 문헌과 교학, 교학사상사를 다루는 전통 불교학 범주에서보다는 오히려 철학이나 윤리학, 심리학 등에서 산출되고 있다. 기존의 불교학 범주나 방법론적 관행에 익숙한 불교학자들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국불교계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짧은 기간 내에 연구 인력이나 연구 내용 모두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다. 학문 역량이 세계적 수준에 이른 경우도 증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교적 문제해결력의 발굴과는 무관한 연구와 글이 아직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고도화된 학문 역량이, 불교 고유의 문제해결력을 현재적 관심으로 발굴하려는 관심과 결합한다면, 불교학의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관심의 변화와 아울러 글쓰기 방식에 대한 고민이 요구된다. 문체가 어떠하든, 어렵게 쓰든 쉽게 쓰든, ‘자신의 이해’를 명확히 드러내는 글이어야 한다. 원전 개념과 표현을 그대로 채용하는 방식의 글쓰기는 지양해야 한다. 필자 자신에 대한 반성에서 하는 제언이다.

불교학계의 글에서는 원전용어나 문장을 그대로 채용하면서, 연구자 자신이 그 용어와 문장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조금만 따져 물으면 내용이 모호해지는 용어와 문장들을 버릇처럼 그대로 사용하면서 논문 형식을 만들어 간다. 이미 누구나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전통 언어방식 그대로 구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조금만 따져 물으면 그 이해가 궁색해지거나 모호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원전언어나 익숙한 전문용어 뒤에 자신의 불명확한 이해를 은폐시켜도 안 되고,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착각해서도 안 된다. 가장 기초가 되는 개념과 이론들마저 끊임없이 낯설게 보려고 해야 이해가 명확해지고 향상된다. 그리고 원전 개념과 이론에 대한 연구자의 이해는 글에서 명확하게 드러내야 해야 한다. ‘정확한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개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해의 정확성 문제는 담론 속에서 타당성 정도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이해의 명확한 기술을 위해서는, 가급적 현재어로 풀어서 재기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기 이해를 명확히 개진하는 글쓰기는 불교적 문제해결력을 현재적 관심으로 포착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수사적 형용이나 동어반복에 불과한 글, 원전용어나 전통 교학언어를 그대로 채용하여 체계적으로 재배열하면서 논문 형식은 갖추지만 연구자 자신의 이해나 견해를 알기 어려운 글, 한문용어와 문장들을 나열하여 한문에 낯선 사람들에게 대단한 내용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을 분석해 보면 막연하거나 알맹이가 없는 글, 하나 마나 한 말을 ‘현대적 의의’라면서 말미에 붙이는 것으로 현재성을 대신하는 글, 불교 이외의 지식 계보에서 차용해 온 개념과 이론들이 화려하게 진열되지만 마치 남의 집 구경한 듯 허전함을 안겨주는 글.

이런 글들을 불교계 내부에서 자주 만나게 된다. 이런 현상이 방치되거나 답습되는 한, 실용불학은 뿌리내리기 어렵다.

5. 힘 있는 불교학

“서구와 일본의 불교학은 힘이 없다. 한국 불교학은 ‘힘 있는 불교학’이 되었으면 좋겠다.” 최근 ‘한국불교 향상포럼’5)을 준비하면서 동국대 황순일 교수로부터 전해 들은 어느 외국인 불교학자의 말이다. 그가 말하는 ‘힘’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불교학의 속성에 대한 적절한 비판적 직관으로 보인다. 불교적 문제해결력에 집중하는 실용불학의 구성은, 근/현대 불교학의 속성으로 보면 낯선 길이지만, 불교 본연의 면모와 생명력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걸어야만 할 길이다.

불교적 문제해결력을 현재적 관심으로 발굴하고 구현하는 데 집중하는 실용불학의 태도, 그런 태도로 남 · 북 전통을 통섭적으로 지양하여 제3지대로 나아가는 것-이것이 ‘깨달음 담론’의 핵심 구성 조건이다. 이런 전망으로 문제해결력과 관련된 교학과 수행의 이법(理法) 및 사법(事法)들을 다양하게 발굴하여 협업적으로 다루어보라는 것-이것이 ‘깨달음 담론’의 요청이다. ■

 

 

박태원 / 울산대 철학과 교수. 한양대 법학과, 고려대 철학과 대학원 졸업(석사 · 박사). 주요 논저로 《대승기신론사상연구(1)》 《원효와 의상의 통합사상》 《정념과 화두》 《인문고전 깊이 읽기−원효》 《원효의 십문화쟁론−번역과 해설 그리고 화쟁의 철학》 등과 원효, 의상, 지눌, 선에 관한 연구논문 다수. 원효학술상, 대정학술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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