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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을 위한 그리스도교 이야기 ②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비교종교학과 교수
[27호] 2006년 09월 10일 (일)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비교종교학과 교수

성경이란 무슨 책인가?

지난 회에는 서론적으로 불교인으로서 왜 그리스도교를 아는 것이 좋은가, 종교 간의 대화와 상호 이해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웃 종교에 대한 태도로 어떤 것들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간단히 살펴보았다. 한국 종교인구의 거의 절반씩을 차지하는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서로 무관심한 ‘독백적’ 관계 내지는 불목하는 관계를 계속한다면 이는 두 종교에 불행한 일일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조화와 평화를 위해도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 이를 대화와 상호 이해와 협력관계로 바꿈으로 두 종교가 모두 각자의 종교적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고 나아가 한국 사회 전체의 지속적인 안정과 번영을 가져오는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번 회에는 본론으로 들어가 그리스도교의 창시자로 알려진 예수님의1) 삶과 가르침을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그러기 전에 우선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성경에 대해 알아보지 않을 수 없어 성경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은 물론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삶을 꼴 지우고 이끌어가는 기본 가르침이 성경에 기초한 것이라 보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그렇게도 중요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그것이 어떤 성격의 책인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가 하는 것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성경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나야 다음에 다룰 나사렛 예수는 어떤 분인가, 그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인가, 교회에서 믿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도 이해하기가 쉬워질 것이다.

성경의 구조

그리스도교의 경전을 ‘성경(聖經)’이라고 한다. 영어로 ‘바이블(the Bible)’이라고 하는 말은 그냥 ‘책’2) 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크게 ‘구약(舊約, Old Testament)’과 ‘신약(新約, New Testament)’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약은 히브리어(Hebrew)로 씌어진3) 유대교의 경전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고, 신약은 그리스도교가 생기면서 그리스어(Greek)로 씌여진4) 그리스도인들만의 문헌이다.

1) 구약 - ‘구약’은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신약’과 대비해서 부르는 성경의 앞부분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그대로 그들의 완전한 경전이기에 유대인들 앞에서 그들의 경전을 ‘구약’이라고 하는 것은 실례되는 말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그리스도교를 논의할 때 신약과 대비되는 말로 사용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구약’이라는 말 대신, ‘히브리어 성경’, 혹은 유대인이 자기들의 경전을 부를 때 사용하는 ‘율법(Torah)과 선지자(Nebi’im)와 문서(Kethubim)’라는 긴 이름의 첫 글자를 따서 ‘타나크(Tanakh)’라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스도교 ‘구약’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성경은 그 본래의 명칭이 말해주는 것과 같이 ‘율법과 선지자와 문서’라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율법’에 해당하는 부분은 천지 창조와 아담 하와를 비롯하여 인류 초기 역사에 등장한 부조(patriarchs)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창세기』,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경험을 이야기하는 『출애굽기』, 이스라엘이 어떻게 종교적인 삶을 살 것인가 그 규례와 제사법 등을 말해주는 『레위기』, 이스라엘 자손들의 인구조사 이야기로 시작하여 그들의 광야 생활을 말하는 『민수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새로이 맺는 언약을 주로 다루는 『신명기』라는 다섯 권의 책으로 이루어졌다. 이를 ‘모세 오경(Pentateuch)’이라 하기도 한다.

한국 가톨릭 성경에서는 출애굽기를 『탈출기』라 번역했다.5)
히브리어 성경 둘째 부분인 선지서 혹은 예언서에 속하는 것으로는 『여호수아』 『사사기(판관기)』 『사무엘』 『역대기』 등과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에제키엘)』 등 대선지서와 『호세아』 『요엘』 『아모스』 등의 12 소선지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셋째 부분인 문서에 속하는 것으로는 『에스라(에즈라)』 『느헤미야』 『에스더(에스테르)』 『욥기』 『시편』 『잠언』 『전도』 『아가』 등이 있다.

개신교에서는 위와 같이 유대교 경전에 포함된 것과 같은 내용을 그대로 ‘구약’ 성경으로 받아들여, 『사무엘』을 『사무엘 상』과 『사무엘 하』로 나누는 등 이를 모두 39권으로 분류해 놓았다. 한편 가톨릭은 이 외에 유대교 전통에서 내려오긴 하지만 유대교가 자기들의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은 『바룩』 『토빗』 『유딧』 『마카베오 상 하』 등 십 여 권으로 구성된 이른바 ‘외경(外經, apocrypha)’이라는 것을 구약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정경의 일부로 받아들인다.6)

2) 신약 - 그리스도교에서는 구약이 모두 예수님과 그리스도교의 출현을 예표하기 위해 씌여진 준비 단계의 책이라 그 자체로는 완전하지 않다고 여긴다. 구약에 예표된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 거기서 생겨난 그리스도교 신앙을 직접적으로 가르쳐주는 책은 바로 ‘신약’이라 주장한다. ‘신약’ 첫 부분에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말해주는 『마태(마태오)복음』 『마가(마르코)복음』 『누가(루카)복음』 『요한복음』의 4복음서가 나온다. 4복음서 중 처음 셋을 일반적으로 ‘공관(共觀, synoptic)복음’이라 하는데, 예수님의 생애를 약간씩 다른 시각이지만 대체적으로 ‘공통된 시각에서’ 기록했다는 의미에서이다. 이 세 복음서에 비해 『요한복음』은 초대 교회에서 발달한 나름대로의 독특한 신학적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복음서와 구별된다.

신약의 4복음서 다음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이 어떻게 그리스도교를 시작하게 되었는가를 중심으로 하는 그들의 행적을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한 『사도행전』이 등장하고, 뒤를 이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 형식의 『로마서』 등 전통적으로 바울(바오로)이 썼다고 여겨지는 14편의 ‘바울 편지서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 야고보, 베드로, 요한, 유다가 썼다는 ‘일반 편지서들’이 들어가 있다. 끝으로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계시 받은 것을 기록했다는 『요한 계시록(묵시록)』이 들어 있다. 이렇게 신약은 모두 27권으로 이루어져 있어 구약 39권과 합해 ‘성경 신구약 66권’이라 통칭하기도 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보다 직접적으로 관계된 신약에 대해 약간 부연하면, 신약 성경 27권은 연대기적으로 배열된 것이 아니다. 27권 중 제일 먼저 쓰인 것은 바울 서신 일부로 대략 서기 50년대에서 60년대에 쓰였으리라 보고 있다. 바울이 자기가 세운 교회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교 믿음의 내용을 설명하고 그것이 유대교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쓴 편지들이다. 복음서들의 경우,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점점 죽어가고, 특히 서기 70년 로마가 예루살렘을 공격하므로 예루살렘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이 사라짐에 따라, 예수님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자 뭔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기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사망 후 40년 정도가 지난 서기 70년대에 그 동안 구전으로만 내려오던 자료와 초기 기록들을 모아 처음 기록으로 남긴 것이 바로 『마가복음』이었다. 다음으로 『마태복음』 저자와 『누가복음』 저자가 『마가복음』에 쓰인 내용을 근거로 하고 각각 자기들 나름대로 구할 수 있던 다른 재료들을 덧붙여 대략 80년경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썼으리라 짐작한다. 이 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저자들이 『마가복음』 이외에 독자적으로 참조한 자료를 ‘Q’라고 하는데, 이는 독일어로 ‘자료’를 뜻하는 ‘Quelle’의 첫 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마지막으로 서기 100년 전후로 『요한복음』이 씌어졌으리라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성경의 정경화(正經化)

그리스도교에서는 불교와 같이 1차, 2차, 3차 결집 같은 것이 없었지만 그와 비슷한 과정을 통해 오늘 그리스도교에서 가지고 있는 경전이 ‘정경’으로 성립되었다. 구약이나 신약의 문헌들은 물론 오랫 동안 구전으로 내려오다가 드디어 문자화되고 그렇게 문자화된 문서들은 일정 기간 각각 독립된 문헌으로 돌아다녔다. 히브리어 성경(구약)의 경우 물론 그리스도교와 관계없이 유대교 자체 내에서 유대인 학자들이 서기 90년경 팔레스타인 얌니야(Jamnia)에 모여 지금과 같은 내용의 경전으로 확정 지었다. 이렇게 유대교에서 확정한 유대인의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도교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그리스도교 정경의 일부로 인정한 셈이다.

신약은 서기 367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그때까지 떠돌던 복음서 등 여러 문서 중 27권을 선정해 그 권위를 인정했는데, 이것이 그 후 그대로 신약성경 ‘정경’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정경으로 확정된 후에도 5, 6세기까지도 ‘일반 편지서’ 등 몇 가지 책은 달갑지 않은 책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특히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의 경우 10세기까지도 그리스도교 전체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한 책이었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성경이란 처음부터 오늘 우리가 보는 책과 같이 얇은 종이에 인쇄된 후 가죽 뚜껑에 금박이 칠해진 책으로 제본되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구전으로 내려오다가 문자화되고 그것이 계속 하나 하나 손으로 필사되어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에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아무리 조심스럽게 베껴 쓴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사본마다 약간씩 다를 수밖에 없었다. 불경이든 성경이든 경전의 ‘원본’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수많은 필사본들만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경이나 불경에 일점일획의 오류가 없다는 말은 적어도 그 본문을 두고서는 성립할 수 없는 주장이다.

성경에 대한 태도

불교의 경전은 부처님의 제자 아난다가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나는 이렇게 들었다(如是我聞)’는 말로 시작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씌어진 ‘하나님의 말씀’이요 ‘계시(啓示)’의 책이라 믿는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느냐 하는 문제에 이르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의견이 서로 다르다. 이른바 보수주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근본주의 혹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대체적으로 성경에는 절대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성경 무오설’을 주장한다. 심지어 성경은 글자 하나하나가 모두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축자영감설(縮字靈感說)’을 주장하는 이들까지 있다.

예를 들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엿새 만에 창조되었다든가, 사람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홍수를 보내 온 세상이 물에 완전히 잠기고 노아와 그 가족만 살아남았다는 『창세기』 이야기, 혹은 예수님이 물위를 걷고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기도 하고,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기적을 보였다는 복음서의 이야기 등등이 모두 문자 그대로 역사적인 사실이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성경에 나온 이야기들이 모두 문자 그대로 역사적·과학적 사실이라고 믿는 것을 ‘문자주의(literalism)’라고 하는데, 이런 문자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어야 참 믿음이라고 믿는다. 전능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가 우주를 엿새 만에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히브리어 성경 처음에 나오는 ‘모세 오경’도 모세가 직접 쓴 것이고, 복음서들도 그 이름대로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 마태와 요한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바울의 동역자 마가와 누가가 쓴 것이고, 바울의 편지서도 14권 모두 바울이 직접 쓰고, 일반 편지서도 그 이름을 가진 저자들이 손수 쓴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18세기 계몽시대 이후 발달된 이른바 ‘역사 비평학적 접근’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현대 성서학자들 대부분과 그들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는 주류 그리스도인들은 창조나 노아 홍수나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 등 성경에 있는 이야기들을 어느 한 때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과학적 사실이라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또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지 않더라도 그 ‘상징적’ 의미를 발견하게 되면 여전히 성경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이요 계시로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런 진보적 학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은 예를 들어 ‘모세 오경’도 모세가 직접 쓴 것일 수 없다고 본다. 모세 오경 중 『신명기』 끝부분에 나오는 모세의 죽음에 관한 기록을 어떻게 모세 자신이 쓸 수 있었겠는가 하는 식이다. 모세 오경은 내용이나 문체나 용어 등에서 각각 특유한 몇 가지 종류의 문헌이 나중에 편집되어 이루진 것이지 모세 한 사람이 쓴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창조 이야기는 두 가지로서, 『창세기』 1장1절에서 2장4절까지 나오는 이야기와 2장4절 이후에 나오는 이야기가 각각 다른 문서들이었는데, 후대 『창세기』 편집자가 이 둘을 적절히 짜깁기해서 붙여 놓은 것이라 보는 것이다.7)

복음서들의 경우도 비슷하다. 복음서들이 처음에는 저자의 이름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후대에 가서 지금 저자들의 이름이 붙여졌다고 본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 마태가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 마태가 썼다면 자기가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직접 본 것을 그대로 기록하면 될 것인데 왜 예수의 제자도 아닌 마가가 쓴 『마가복음』에 그 정도로 의존해서 그렇게 많은 구절을 인용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또 『요한복음』을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썼다면 그가 『요한복음』을 쓸 당시 그의 나이는 100살에 가까웠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등의 의문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나와 있는 말씀도 사실 모두 다 예수님 ‘자신의 말씀(verba ipsissima)’이라기보다 상당수가 후대의 사상을 예수님의 입을 통해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본다.8) 바울 서신 등도 바울이 쓴 것으로 여겨지는 것도 있지만, 이른바 ‘목회서신’이라는 것은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사상이나 문체 면에서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 바울 자신이 쓴 것이라 보기가 곤란하다는 것이다.9)

불트만의 ‘탈신화화’ 이론

이처럼 성경을 역사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 신학자의 이론 하나를 예로 들어 본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을 수 없다고 주장한 많은 신학자들 중에 가장 잘 알려지고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신학자를 꼽으라면 20세기 최대 신학자 중 하나인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을 들 수 있다. 그는 『신약 성서와 신화』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 등의 저작을 통해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탈신화화’ 혹은 ‘비신화화(demythologizing)’ 이론을 제창한 신약 성서 신학자였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성경, 특히 신약 성경은 ‘신화적’이라는 것이다. 우주를 ‘하늘과 땅과 지하’라는 3층 구조로 이루어진 구조물로 보고 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가 올라갔다고 이해했다든가, 병이 나면 그것이 악귀가 들었기 때문이라 믿었다는 등 신약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세계관은 전근대적, 과학 이전의 사고방식에 불과하고, 이런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기초로 하여 기록된 성경은 어쩔 수 없이 신화적 성격을 띠울 수밖에 없었다고 보았다. 이런 전근대적 세계관에 입각한 신화적 이야기들 문자 그대로 믿으라고 하는 것은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지성의 희생’을 강요하는 억지라 보았다.

불트만은 이런 전근대적 우주관에 기초한 신화적 요소들이 더 이상 문자적으로 설득력이 없을 뿐 아니라 전혀 믿을 필요도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세계관은 그 자체로 그리스도교에만 해당되는 그리스도교 특유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당시 유행하던 조로아스터교나 영지주의 세계관일 뿐이기에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이런 비그리스도교적 신화를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교에서 현대인들에게 할 일은 이런 전근대적 신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라 강요할 것이 아니라 그 신화적 표현 속에 들어 있는 그리스도교 특유의 복음, 이른바 ‘케류그마(kerygma, 선포)’만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 일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비신화화’ 혹은 ‘탈신화화’ 작업이라 했다.
그는 신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화의 참된 목적은 세상이 어떻게 생긴 것인가 하는 것을 객관적으로 이야기해 주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자기를 스스로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10)

따라서 불트만은 신화를 이해할 때 그것이 마치 우주의 어떠함을 말해주는 무엇인 것처럼 ‘우주론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이 우주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인간 스스로의 실존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말해주는 이야기라 생각하고 ‘실존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신화를 이해할 때 신화적인 표현으로 가득 찬 성경에서 복음의 진수를 발견하게 된다고 역설하였다.

한 가지 지적하여야 할 것은 ‘비신화화’라든가 ‘탈신화화’라고 했을 때, 신화를 제거하는 작업이라 오해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신화’란 상식적으로 생각하듯 ‘거짓’이나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적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쓰이는 하나의 상징 수단이므로 신화를 제거한다는 것은 진리 자체를 방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많이 쓰는 말로 아기를 목욕시키고 목욕물은 버리더라도 아기를 버리면 안 되듯, 특수한 신화적 표현 자체는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고 시대가 지나면 효력을 상실할 수 있지만 그 신화가 말해주려는 뜻까지 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탈신화화’라는 오해하기 쉬운 말 대신에 ‘탈문자화(deliteralization)’ 혹은 ‘신화의 껍질을 깨기(breaking myth)’라는 말을 쓰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라고 보았다.

사실 어느 의미에서 종교적 진리는 신화적인 표현이 빌리지 않을 수 없기에 옛 신화적 표현을 완전히 버릴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의미를 주는 새로운 신화로 ‘재신화화(remythologizing)’하는 것이 더욱 적절한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불트만의 사상이나 그의 해석학적 업적이 그 후 ‘후기 불트만 학파’에 의해서 수정되고 정교화 되었지만, 그의 기본 주장은 그리스도교 신학 역사에서 획기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아직도 발휘하고 있는 특별한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성경 읽기의 문제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오직 성경’ ‘성경대로’만을 외치며 성경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고 있는 자기들은 ‘성경을 믿는 사람들(Bible believers) ’라고 주장하면서 성경을 읽되 자기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면 그들은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거의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근래에 발견한 ‘해석학적 원칙’에서 말해 주듯이 누구든 성경을 읽을 때 ‘성경 그대로’ 읽을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 중 자기들이야 말로 가장 충실하게 성경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따른다는 사람들마저도 자기들끼리 의견이 상충하는 경우를 보면, 아무리 성경을 그대로 읽으려 해도 그대로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를 좀 거창한 용어를 쓰면, 인간은 사물을 볼 때 객관적으로 볼 수 없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사회적, 심리적 제반 조건에 따라 자기 나름대로 사물을 관찰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세상에 아무리 철저한 과학자라 하더라도 결코 사물을 진공상태 속에서 ‘100%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없고 자기 시대 자기가 속한 과학 공동체에서 받아들인 ‘패러다임’에 따라 관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주장한 1960년도 토마스 쿤(Thomas Kuhn)11) 이후, 이제 과학자들마저도 자기들의 과학적 관찰이 절대적으로 객관적이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자기도 모르게 그 시대에 주어진 ‘패러다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고 결국, ‘패러다임에 영향을 받으며(paradigm-laden)’ 한 관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있다.

성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그대로 이해하려고 해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안경에 따라, 우리가 가진 패러다임에 따라, 각각 다르게 보고 다르게 이해할 수밖에 없다. 성경 읽기란 곧 자기 개인이나 자기가 속한 집단의 특수 사정에 따른 ‘해석’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엄연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우리가 쓰고 있는 안경,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패러다임에 따른 해석은 옳고 남이 쓰고 있는 안경, 남이 가지고 있는 패러다임에 따른 해석은 안 된다는 주장은 결국 어린 아이가 때를 쓰듯 억지를 부리는 소리라 할 수 있다.12)

이해를 돕기 위해 두 가지만 예로 든다. 첫째, 『성경』 ‘창세기’ 첫 부분에 보면 인류의 첫 여인 하와가 뱀의 꼬임을 받아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통칭 선악과를 따서 자기도 먹고 또 자기 남편 아담에게도 주어 아담이 먹었다고 되어 있다. 여성 비하 시대, 남성 우위의 사회에서 남녀차별의 심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사람이라면, 이 이야기를 읽고, ‘아무렴 그렇지, 여자는 유혹에 약하지. 그 뿐 아니라 여자는 남자를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이기도 해. 여자의 말을 들으면 집안 망한다는 말 하나 틀릴 게 없지. 암탉이 가히 어디라고. 또 여성은 남자의 그늘 아래 있어야지 혼자 나돌면 위험하다는 거야.’ 등으로 이해하고 이것이 ‘성경대로’ 읽고 거기서 얻은 교훈과 진리라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요즘처럼 성차별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세상에서는 같은 성경 이야기라도 달리 이해한다. 특히 여성신학자들 중에는 이 이야기에서 ‘하와가 먼저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구별할 줄 아는 눈을 떴다. 하와는 아담이 아직도 뭐가 선인지 뭐가 악인지도 모르는 채 그야말로 앞뒤도 못 가리는 철부지 상태에서 헤매고 있는 것을 보고 연민과 자비의 마음으로 그도 선악을 알도록 선악과를 먹게 도와준 거지.’ 하식 식으로 읽기도 한다.

켄 윌버(Ken Wilber) 같은 초심리학자는 선악과를 먹었다는 이 이야기에서 인간이 선과 악, 상대 세상과 나라는 것도 분간하지 못하던 ‘미이분법적(未二分法的, pre-personal)’ 의식상태에서 ‘이분법적’ 의식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읽는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타락이 아니라 한 단계 Up이라는 주장이다. 이제 인간은 이분법을 뛰어넘는 ‘초이분법적(超二分法的, transpersonal)’ 의식으로 옮겨갈 차례라는 것이다.13)

우리는 여기서 어느 해석이 옳고 어느 해석이 그르다고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곧 해석하는 것’이란 기본 원리를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같은 성경을 보고도 얼마든지 다른 뜻을 끌어낼 수 있고 이런 각이한 해석의 가능성에 열린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물론 모든 해석이 다 좋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어느 한 가지 성경 해석이 옳고, 그것만이 절대적 진리라 만용을 부릴 수는 없지만, 성경을 읽고 그대로 믿는다고 하면서 그 것 때문에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계속 싸움만 할 생각이 생긴다거나 자기만 복 받고, 자기들만 천국 가려는 이기적인 생각이 들게 된다면, 그런 성경 읽기는 결코 좋은 것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되 나를 비우고 이웃을 더욱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게 읽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성경을 읽을 때 자문해보아야 할 ‘윤리적 해석학(ethical hermeneutics)’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성경이든 불경이든 그것을 읽고 내 속에 새로운 의식을 일깨우도록 하는 것, 이른바 ‘환기적 독법(evocative reading)’이 중요하다는 것도 아울러 지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영지주의 복음서

성경에 대한 우리의 논의를 끝내기 전에 한 가지만 더 기억해야 할 사항이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위에서 말한 4복음서 이외에 많은 복음서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 여러 공동체들은 각기 자기들의 신학적 입장이나 필요에 따라 나름대로의 복음서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후대에 와서 신약 성경을 정경화할 때 위에 말한 4복음서 이외에 다른 복음서들은 모두 정경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말았다.

정경에 들어오지 못한 복음서들은 그 동안 거의 잊혀진 상태였는데, 1945년 이집트의 나그 함마디(Nag Hammadi)라는 도시에 사는 농부가 모래 밑에서 파낸 4세기경의 항아리에서 콥트어로 된 약 45개의 문서들이 나왔는데 이 중에 이런 잃어버렸던 복음서들의 사본이 들어있었다. 이 사본들 중에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것이 『도마복음서』 『막달라 마리아복음서』, 『빌립복음서』 『베드로복음서』 『야고보복음서』 등이다.14) 최근에 화제가 되고 있는 『유다복음서』도 이런 복음서의 일종이다.15) 현재까지 20여종의 복음서와 복음서 단편들이 발견되었다.

이런 복음서들의 일반적 특징은 그 당시 이집트, 로마 제국, 중동 지방에 성행하던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 사상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지주의는 나중에 다시 거론하겠지만, “네 자신을 알라”라는 말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내 속에 있는 참나의 실체를 발견하는 깨달음을 통해 해방과 자유를 얻는다는 가르침을 강조하는 종교 사상이었다. 이런 종교적 흐름은 강력한 교회 지도층에 형성됨과 함께 시작한 ‘문자주의’에 의해 억압되다가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거의 종적을 감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교의 경전 성경을 말할 때, 불교인으로서 명심해야 사항은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성경이 그들의 삶에 절대적인 중요성을 지닌 책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일반적 현상이지만, 그 성경에 대한 태도나 이해나 해석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극히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불자들이 일상에서 만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교파 어느 전통에 속하느냐, 또 어느 정도로 자기들의 신앙 전통을 깊이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성경관이 천차만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성경 해석에 따라 불교를 비롯하여 다른 이웃 종교에 대해 대화와 화합과 협력 관계를 바라는 이들도 있고, 이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거나 심지어 죄악시하는 이들도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이렇게 이해한다”는 식으로 그들의 성경관을 일률적인 것으로 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말할 나위도 없이 모든 불자들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 듯, 그리스도인도 이처럼 다 같지가 않다. <다음 호에 계속>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비교종교학 교수.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교에서 종교학으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학위논문은 『화엄(華嚴)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 현재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Regina) 비교종교학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길벗들의 대화』(1983), 『도덕경』(1995),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1996), 『장자』(1999), 『예수는 없다』(2001), 『예수가 외면한 그 한가지 질문』(2002), 『세계종교 둘러보기』(2003)가 있고, 번역서로는 『종교 다원주의와 세계 종교』(기독교서회, 1993), 『살아 계신 붓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1997), 『귀향』(2001), 『예언자』(2003) 등이 있다. 제17회(1987) 코리아 타임스 한국현대문학 영문번역상(장편소설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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