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1903년에서 1905년 사이에 하와이에 이민을 온 한인은 약 7,300명이었다. 이민자 가운데는 하와이에 이민을 오기 전 한국에서 불교를 믿었던 불교도가 상당수 있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중국과 일본 사원들에서 불교를 신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한인 불교신자들은 자신의 종교적 전통을 지키기보다는 기독교로 개종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낯선 기독교의 나라에서 자기 종교를 지키기는 그만큼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와이에서 한국불교는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70년이 지난 뒤 대원 스님이 1975년 하와이에 도착하여 대원사(현 무량사)를 개원하고 하와이 교민을 대상으로 포교하면서부터 하와이에서 한국불교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물론 더 상세하게 살펴보면 그 이전에도 하와이에는 한국불교와 관련된 기록들이 있다. 1925년 봄 일본대학 예술과를 졸업한 쌍계사의 도진호 스님의 행적이 그것이다. 그는 1930년 한국불교 승려로는 최초로 하와이에 도착했다. 그의 방문은 일본 정토진종 서본원사파 하와이 별원 불교청년회가 주최한 범태평양 불교청년대회(1930년 7월 21일~26일)에 한국대표로 참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7월 7일 서울에서 출발하여 7월 9일 요코하마에 도착하였고, 7월 11일 요코하마에서 출발하여 7월 18일 하와이의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도진호 스님은 약 1년 후 1931년 8월 21일 한국불교 포교를 위해서 하와이에 이민을 왔다고 알려져 있다.

도진호 스님이 오기 전, 개화파로 활약하였던 봉은사의 월봉 스님이 일본을 거쳐 하와이에 들어왔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도진호가 하와이에 온 후, 일본 유학 출신으로 월북작가 홍명희(1880~ 1968)의 집안인 마곡사의 어떤 스님이 하와이를 거쳐 1942년부터 1943년까지 하버드 대학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다가 2년 후 병으로 요절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하지만 도진호 스님의 경우를 제외하고, 자료의 부족으로, 월봉 스님과 홍명희 집안의 마곡사 스님의 구체적인 활동 내용은 확인하기가 어렵다.

이렇게 본다면 하와이에 한국불교도로 첫발을 내디딘 사람은 도진호이다. 하지만 그는 1931년 하와이에 온 이후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1940년대에 기독교 신자로서 하와이를 중심으로 사회활동과 독립운동을 했다고 전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진정한 미주 한국불교는 1964년 미국에 입국하여 구체적으로 포교 활동을 전개한 경보 스님(1914~1996)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미주 한국불교는 2014년이 전래된 지 50년에 상응한다. 

한국에서 불교를 신행한 한인 이민자들은 이민국가인 미국에서도 본인이 신행한 한국불교를 신행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전혀 다른 문화와 사회적 환경에서 나서 자란 미국 태생 한국인들에게 그들의 조상들이 신행한 한국불교를 강요할 수 없다. 그들은 새로운 형태의 미주 한국불교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미주 한국불교의 포교 방향이 이민자들을 위한 불교 포교에서 미국 태생 한국인들을 위한 불교 포교로 바뀌지 않으면, 미주 한국불교의 전망은 매우 비관적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글에서 미주 한국불교를 개괄적으로 검토하고, 이어서 미주 한국불교를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소개하며, 마지막으로 미주 한국불교의 당면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도진호와 초기 미주 한국불교의 굴절 

도진호는 초기 미주 한국불교의 역사에 두 가지 논란거리를 제공하였다. 첫째, 도진호의 종교적 삶은 초기 미주 한국불교의 굴절을 의미한다. 도진호의 개종에서 볼 수 있듯이, 초기 미주 한국불교는 기독교 사회인 미주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굴절되었다. 도진호 본인은 미주 최초의 한국 사원인 고려선사를 하와이 호놀룰루에 세웠다고 주장하지만, 그 사원의 창건 사실 여부는 확증할 수 없다. 설령 도진호가 고려선사를 세워 교민 포교를 했다고 해도, 그는 그 사원을 지속시키지 않았고, 자신은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도진호의 하와이행에 관한 자료는 조선불교청년총연맹 동경동맹의 기관지인 《금강저》에 보인다. 이에 따르면 그는 한국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하와이를 향해 1931년 8월 21일 한국을 출발했다. 《금강저》 편집자는 도진호에게 원고 청탁을 했으나 도진호는 정중히 거절하는 서신을 1932년 2월 29일 자로 《금강저》 편집실로 보냈다. 서신의 마지막 부분은 《금강저》 제20호(1932년 12월 8일 자, p.63)에 수록되어 있다. 《금강저》 편집실은 도진호의 서신에 근거하여 그가 하와이에 고려선사를 창설하였다고 보도했던 것 같다.

둘째, 도진호의 사회적 삶은 일제 강점기 동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근대 한국역사의 굴절을 일정 정도 반영하고 있다. 도진호는 1931년 하와이로 오기 전 불교청년운동의 지도자로 항일운동을 열심히 전개하였고, 1940년대에는 하와이를 중심으로 조국의 독립과 사회활동에 매진하였다. 그럼에도 하와이로 온 이후, 도진호는 계속 일본의 스파이로 의심을 받았다. 미국 정부는 도진호를 요시찰 인물로 감시했고, 일본에 부역한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하와이주립대학 사학과 명예교수인 최영호는 1978년 7월 5일 도진호와 인터뷰를 하였고, 그 내용을 두 페이지 분량으로 수기하였다. 삼우 스님은 최영호의 그 인터뷰 기록을 자신의 논문에서 상세히 인용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도진호는 “1932년 1월 기독교계의 주요 인사인 동지회의 김진호와 감리교의 현순 목사(1880~1968)가 주동이 되어 조선총독부가 하와이 한인 교민들의 동향 파악을 위해 본인을 하와이에 보냈다고 주장하였고, 약 800명의 한인 교포들이 중국 레스토랑에서 만나 본인의 문제를 다루었다. 미국 이민국은 본인을 불러 그 혐의를 조사했고 무혐의로 본인을 처리했다.”라고 주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 미국 행정부는 의회와 공동으로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주제로 청문회(1945년 11월 15일~1946년 2월 6일)를 개최하였다. 청문회의 보고서(제8권)에서는 도진호의 주장과 매우 다른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도진호는 (본인의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세 가지 다른 이름을 썼고, 1933년 5월 22일 하와이 일본영사관으로부터 미화 80불을 받았고, 상당 기간 미국 정부의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받았다. 1931년 불교 승려로 하와이를 통해 미국에 입국했지만, 분명히 말해서 도진호는 하와이에서 불교 활동을 한 적은 결코 없었다. 도진호는 일본에서 수학했다. 도진호는 당분간 (호놀룰루가 위치하고 있는 오아후 섬의) 군사기지 몇 군데에서 양복 직공으로 일했고, 그 후 (오아후 섬에서) 몰로카이 섬으로 이사를 해서 그곳에서 개인 비즈니스를 했다.”

필자는 도진호가 언제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는지 정확히 밝혀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승만의 영향 아래에서 동지회의 핵심 멤버로 사회활동과 독립운동을 할 때, 도진호는 이승만이 세운 무교파의 한인기독교회에서 활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1943년 이승만과 정치적으로 결별한 이후, 도진호는 한인기독교회에서 오아후 섬 호놀룰루에 소재하는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 또는 오아후 섬의 다른 감리교회로 교적을 옮겼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자료의 부족으로 하와이로 이민을 온 1931년 이후 1940년까지 도진호의 하와이에서의 구체적인 활동을 추적할 수 없다. 다만 하와이의 6개 단체 대표들이 미국의 국방활동을 후원할 목적으로 1940년 10월 13일 미연합 한인분과위원회를 조직하였고, 도진호는 10월 20일 그 분과위원회의 조사부 부의장으로 선임되었던 사실은 확인된다. 그리고 보수, 중도, 진보를 망라한 총 9개의 한인 단체 대표들이 1941년 4월 16일 호놀룰루에 모여 해외한족대회 준비회의를 열고 대회의 규정을 기초할 때 도진호는 서기로 활동한 적도 있었다. 이어 그는 1941년 4월 20일에서 27일까지 8일 동안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에 이승만 추종 세력인 동지회 중앙부의 대표 3인 가운데 한 명으로 참여했고, 총 16명으로 구성된 의사부의 위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그는 또 1943년 7월 15일 구성된 한미승전 후원금모금분과위원회(위원장 정덕흥)의 위원으로도 참여했다. 그러다가 1943년 12월 12일 이승만의 독립운동 노선과 독선적 독립운동 방식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성명서를 공개적으로 발표하고 동지회를 탈퇴하였다. 그 이후로 도진호는 하와이를 무대로 이승만의 반대 진영에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도진호는 1944년 4월 2일부터 8일 사이에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한족연합분과위원회 전체대회에서 김원용, 전경무, 김용중(1898~1975)과 더불어 분과위원회의 워싱턴 사무소의 사무위원으로 선정되었다. 한족연합회의 워싱턴 사무소는 1944년 6월 10일 공식 개설되었지만, 도진호는 하와이 당국의 조사를 받게 되면서 워싱턴으로 떠날 수 없었다. 자료의 부족으로 도진호가 무슨 혐의로 하와이 당국의 조사를 받았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미국 정부의 청문회 보고서의 내용에 비추어 본다면 미국 정부는 도진호를 일본 스파이로 예의주시하고 있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1944년 5월 21일 개최된 한국독립당 호놀룰루 지부 창립발기회에서 창립준비위원 5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1944년 8월 20일 한국독립당 하와이 총지부 모임에서 집행부 서기로 선임되었고, 1945년 4월 15일 한국독립당 하와이 총지부의 사무소에서 재미한족연합분과위원회 대표 가운데 한 명으로 피선되었다. 또 한국이 1945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도진호는 1945년 10월 24일 14명으로 이루어진 재미한족연합분과위원회 대표단의 서기로 선임되었다. 도진호는 1946년 2월 12일 재미한족연합분과위원회 하와이 대표단의 한 명으로 김포공항에 도착, 1946년 2월 21일 외교협회가 한미호텔에서 주최한 모임에 참여하였다. 그는 1948년 하와이 교포들의 생활상을 현지에서 촬영한 34분짜리 기록영화인 〈무궁화 동산〉을 총지휘하였다. 이어 1949년에는 하와이에서 본토로 간 이후 미국 본토를 두루 살펴보았고, 1950년 3월 29일 하와이로 돌아왔다. 최영호가 1978년 도진호를 하와이에서 인터뷰하였기 때문에, 도진호는 1978년에는 하와이에 살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도진호는 말년에 자녀들이 사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사망하였다고 전해졌다.

이상의 자료들은 도진호가 미국에 온 이후 어떻게 활동했는가 짐작게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객관적이고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그래야 미주 한국불교 초기의 사정이 밝혀질 것이다.

3. 미주 한국불교란?

‘미주 한국불교’를 본격적으로 논하기 전에, 먼저 ‘미국불교’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미국불교’라는 용어는 매우 이질적인 개념인 ‘미국’과 ‘불교’라는 두 단어의 복합어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더해 ‘미주 한국불교’는 미주, 한국 그리고 불교라는 세 핵심 키워드의 복합어이다. 미국불교를 기술할 때, 우리는 미국과 불교의 다양한 관계성을 상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불교보다 미국에 강조점을 둘 때는 불교의 미국화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다. 반대로 미국보다 불교에 강조점을 둔다면 미국의 불교화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다. 모든 교류가 상호영향을 전제한다면 불교의 미국화와 미국의 불교화는 상보적인 관계를 통해서 확연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미국불교’는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첫 번째 정의는 ‘미국에 있는 다양한 불교 전통’이고, 두 번째 정의는 ‘미국화된 불교 전통’이다. 그 두 가지 정의를 사용하여 얼마만큼 정확하게 미국불교를 설명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필자는 이 두 가지 정의를 사용하여 미국불교를 매우 효율적으로 소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세 번째 정의로 그 두 유형의 혼합형을 상정할 수 있다. 세 번째 미국불교의 유형은 미국화된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그 조상들의 불교 전통을 신행하는 경우이다.  

첫 번째 유형의 미국불교와 두 번째 유형의 미국불교는 매우 긴밀한 상호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미주 한국불교는 한국불교의 미국화를 요구하면서도 미국불교의 한국화를 요구한다. 한국불교는 미국의 문화와 언어를 통해서 미국사회 속에 수용될 수밖에 없다. 미국은 한국불교의 수입을 통해서 미국의 문화를 풍부하게 할 수 있다. 한국불교의 본격적인 수입은 1965년 미국 정부의 이민법 개정을 통해서 가능해졌다. 많은 한국인이 아시아인의 이민을 합법화한 개정된 이민법 덕분에 미국으로 이민을 올 수 있었고, 한국불교는 그 이민자들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미국에 착근되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은 한국불교가 동아시아의 다른 불교 전통인 중국불교 그리고 일본불교와 많은 부분에서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사실을 미주 한국불교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동아시아 불교도들은 한문으로 쓰인 동일한 경전들을 사용하지만, 일본불교는 종파주의적이어서 어느 특정 전통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실천한다. 이에 비해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와 같이 다양한 불교 전통을 동시에 연구하고 실천한다. 그렇지만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와 다르게 불교미술, 건축 그리고 의식의 측면에서 티베트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들여 한국불교의 고유한 특성을 형성하였다.

1) 첫 번째 유형: 이민자 한국불교

첫 번째 유형의 미국불교는 미국에 있는 불교로 정의할 수 있다. 필자는 그 첫 번째 유형의 미국불교를 이민자 불교라고 부르고자 한다. 불교국가의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올 때,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불교 전통을 들여와서 미국에서 실천한다. 미국은 이민국가로 불교의 다양성을 담지하고 있다.

한국계 이민 1세들이 미국에서 신행하는 한국불교는 그 첫 번째 유형의 미국불교 범주에 속한다. 경보 스님은 미국 정부가 1965년 이민법을 개정하여 아시아인들이 미국으로 합법적으로 이민을 올 수 있는 길을 터주기 바로 한 해 전인 1964년 미국에 입국하였다. 스님은 사실상 최초로 한국불교를 미국에 소개하였다. 그 이후로, 한국의 스님들과 불교 지도자들이 미국에 들어오기 시작하여 한국불교를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한국불교가 미국에 소개된 연도는 1964년으로 볼 수 있다.

경보 스님 이후, 삼우 스님은 1967년, 그리고 박성배, 강건기, 이장수, 선 무용가인 이선옥 등은 1969년 미국에 입국하였다. 경보 스님의 제자인 고성 스님은 1970년, 재가 지도자인 이한상(1917~1984)은 1971년, 숭산 스님(1927~2004), 법안 스님(1932~2007)과 정달 스님이 1972년, 그리고 대원 스님과 도안 스님(1939~2006)이 1975년 미국에 입국하였다. 광옥 스님은 1976년, 인환 스님은 1977년 캐나다에 입국하였다. 법안 스님은 미국 동부인 뉴욕과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도안 스님은 미국 서부인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대원 스님은 하와이를 중심으로 한국계 이민 1세를 대상으로 포교하였다. 한국에서도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그들은 특히 초기 미주 한국불교를 정초하고 지도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한국계 이민사회의 규모는 중국계 이민사회에 비해서 매우 작다. 한국인 1세들의 기독교인 비율은 중국인 1세들에 비해서 매우 높은 반면, 불교인 비율은 매우 낮다. 그러나 그들은 로스앤젤레스의 서래사, 남가주 샌 디마스의 자재공덕회 본부, 뉴욕의 장엄사, 샌프란시스코의 만불사 등으로 대표되는 중국 사원과 같은 대찰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매우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미국 곳곳에 한국 사원을 창건하였다. 다음에 기술된 그들의 미국 활동을 살펴보면, 우리는 미주의 한국불교사를 한눈에 조감할 수 있다.

1973년: 이한상은 현존하는 미주 한국 사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삼보사를 북가주 카멜에 창건했다.
1973년: 숭산스님은 남가주 로스앤젤레스에 달마사를 창건하여 제자인 계정 스님을 초대 주지로 임명했다.
1974년: 손영익, 최옥희, 이장수 등은 중서부 시카고에 불타사를 창건했다.
1974년: 법안 스님은 동부 뉴욕 원각사를 1974년부터 이끌었다.
1975년: 대원 스님은 호놀룰루 무량사(구명 대원사)를 창건했다.
1975년: 도안 스님은 로스앤젤레스 관음사를 1975년부터 이끌었다.
1980년: 현호 스님은 로스앤젤레스에 고려사를 창건했다.
1980년: 설조 스님은 북가주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여래사를 창건했다.
1983년: 일면 스님은 워싱턴 타코마의 서미사(옛 이름 성불사/경국사)의 주지로 부임했다.
1984년: 혜성 스님은 뉴욕 백림사를 창건했다.
1992년: 도범 스님은 보스턴 문수사를 창건했다.
1994년: 숭산 스님의 백인 제자 무량 스님이 남가주 테하차피에 태고사를 창건했다.
1994년: 휘광 스님은 업스테이트 뉴욕에 불광선원을 창건했다.
1996년: 청화 스님(1924~2003)은 남가주 배닝에 금강선원을 창건했다.
1996년: 태응 스님은 캐나다 밴쿠버에 서광사를 창건했다.

한편 1999년 이후 한국에서 미주로 활동 영역을 넓힌 정우 스님은 미주 한국불교의 기초를 세우고 입적한 숭산 스님, 법안 스님, 그리고 도안 스님의 불교 활동을 계승하여 미국에서 현재 왕성하게 불교를 포교하고 있다. 스님은 1999년 남가주 오렌지 카운티에 선연사를 창건하였고, 1974년 창건된 뉴욕 원각사, 1981년 창건된 오리건 포틀랜드의 보광사(구명 성불사), 2002년 창건된 애리조나 메사의 감로사, 그리고 1977년 창건된 캐나다 토론토의 대각사와 인연을 맺었고, 이상의 사찰들을 통도사 해외 포교당으로 조계종에 등록하였다. 특히 스님은 뉴욕 원각사 대작불사를 현재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경기도 안양에 본부를 두고 있는 한마음선원은 대행 스님(1927~2012)의 원력으로 1989년 뉴욕 지원, 1990년 로스앤젤레스 지원, 1991년 시카고 지원, 그리고 1993년 캐나다 토론토 지원을 개원하여 교민 포교를 하였다. 서울 능인선원의 지광 스님은 2007년 뉴욕 근교의 턱시도에 뉴욕 능인선원을 개원했다.

그러나 대다수 한국불교 사원들은 아직 제대로 된 사원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많은 경우 ‘하우스 사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규모나 시설이 열악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와이 무량사, 로스앤젤레스의 달마사, 뉴욕의 백림사, 뉴욕의 한마음선원, 워싱턴 타코마의 서래사, 캐나다 밴쿠버의 서광사, 남가주 테하차피의 태고사, 그리고 남가주 배닝의 금강선원은 한국 전통 양식의 사원 건물을 확보하고 있다. 원각사는 현재 한국 전통 양식의 사원 건물들을 건립하는 중이다. 일본불교는 인도의 종교 건축 양식을 받아들여 일본계 미국불교의 독특한 사원 양식을 나름대로 만들었다. 하지만 한국불교는 한국계 미국불교의 독특한 사원 양식을 아직까지 만들지 못했다. 이는 한국불교의 미국화가 더디게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2) 두 번째 유형: 미국화된 한국불교

첫 번째 유형의 미국불교가 미국으로 이민을 온 이민자들을 위한 불교라면, 두 번째 유형의 미국불교는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미국인들을 위한 불교이다. 1972년 미국에 입국한 이래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포교하였던 숭산 스님과 1967년 미국에 입국한 이래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포교하고 있는 삼우 스님이 두 번째 유형의 미국불교에 속한다. 티베트불교의 달라이라마, 베트남불교의 틱낫한 스님, 그리고 일본 선불교의 스즈키 다이세츠(1870~1966)는 두 번째 유형의 미국불교를 대표하는 지도자들로 미국에 있는 자국민들을 포교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었다.

미국불교의 두 번째 유형은 두 가지로 세분된다. 자신들의 오래된 종교인 기독교와 유태교를 버리고 불교로 개종한 백인들이 첫 번째의 그룹에 속한다. 이에 비해 그들의 종교인 기독교와 유태교를 버리지 않고 불교를 신행하는 백인들도 있는데 이들은 두 번째 그룹에 속한다. 이런 점에서, 두 번째 유형의 미국불교는 미국의 다종교주의를 충실히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서양의 종교전통에 관한 것이다. 모든 서구 종교의 주류는 이분법적 이론체계에 근거하고 있다. 동일한 종교적 뿌리를 가진 유태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는 배타성 때문에 자기 종교의 우월성과 정통성을 끊임없이 주장하였다. 그 결과 이상의 세 종교는 각자 자기 종교의 우월성과 정통성을 다른 종교들에 때로는 폭력을 통해 강요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미국불교는 기독교인 또는 유태인의 개종을 요구하지 않고, 자신들의 종교인 기독교 또는 유태교를 믿으면서 불교를 신행할 수 있도록 미국인들에게 권유한다. 이런 활동을 통해 미국 사회에서 성공을 거둔 경우가 숭산 스님과 삼우 스님이다.

숭산 스님은 1972년 미국으로 입국한 이후, 당해 10월 10일 프로비던스 젠 센터를 개원하였다. 같은 해 11월 8일에는 미국인 불자들에게 재가 5계를 수여하였다. 스님은 2년 후 1974년 보스턴 케임브리지 선원을 개원하였고, 1977년 외국인 포교를 위해서 뉴욕 조계사를 창건하였다. 이어서 스님은 1981년 관음선종을 선포하였고, 1982년 프로비던스 재미홍법원 본부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재미홍법원 10주년 기념 세계평화고승대법회를 개최하였다. 스님은 1984년 계간지인 Primary Point를 창간하였고, 1987년 3년에 한 번씩 개최하는 제1회 세계일화대회를 재미홍법원에서 개최하였다. 스님은 1992년 재미홍법원 개원 20주년 기념식을 개최하였고, 그 기념으로 평화탑을 준공한 바 있다.

삼우 스님은 1967년에 미국에 도착한 이후, 1968년 캐나다 몬트리올로 활동 무대를 옮겼고, 1972년에는 토론토로 옮겼다. 스님은 캐나다의 토론토와 미국의 미시간 앤아버와 일리노이 시카고에 선련사 분원을 창립하였고, 1984년 멕시코 포교를 시작하였다. 선련사 불교운동본부는 스님의 지도로 1987년 7월 10일부터 17일까지 8일 동안 미국과 캐나다에서 활약하고 있는 38명의 불교지도자와 학자들을 초청하여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북미불교세계대회를 미시간의 앤아버에서 개최하였다. 스님은 1993년 7월 4일 토론토 선련사에서 본인의 북미포교 25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고, 1994년 12월 26일부터 30일까지 5일 동안 멕시코 포교 10주년 기념 용맹정진법회를 개최하였다.

3) 세 번째 유형: 혼합형 미주 한국불교

세 번째 유형의 미국불교로, 앞서 살펴본 두 가지 유형의 혼합형을 상정할 수 있다. 이민 1세들은 자신들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신행해온 불교 전통을 신행할 수밖에 없다. 한국계 이민 1.5세 또는 2세들은 부모들과 다르게 한국의 전통과 문화가 아니라 미국의 전통과 문화 속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화되어 있다. 그럼에도, 미주 한국불교는 한국계 이민 1.5세 또는 2세들을 위한 한국불교의 유형을 아직 창출하지 못했고, 그에 대한 노력조차 거의 하지 못했다. 일본계 미국인들을 위해서 혼합형 미국불교를 오랫동안 실천해온 일본불교와 다르게, 혼합형 미국불교를 실천해온 한국불교 사원은 거의 없다. 미주 일본불교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미주 한국불교는 세 번째 유형의 미국불교의 기초조차 세우지 못했다. 미국 토착화조차 시도하지 못한 미주 한국불교는 첫 번째 유형의 형태로 영구히 미국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미주 한국불교는 첫 번째 유형의 미국불교를 발전시키고, 세 번째 유형의 미국불교를 창출할 필요가 있다. 대다수의 한인 불자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온 후 기독교로 개종하는 현실에서, 첫 번째 유형의 미국불교는 현재형 미주 한국불교에 매우 중요하다. 1.5세와 2세들을 위한 두 번째 유형의 미국불교는 미주 한국불교의 미래형일 수밖에 없다. 일본의 선불교 그리고 티베트불교와 다르게, 한인 교포 포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미주 한국불교는 비한인 포교를 목적으로 하는 두 번째 유형의 미국불교를 주도적으로 창출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민불교를 철저히 토착화한 미국불교의 창출이 우리 불자들의 궁극적인 과제이겠지만, 미주 한국불교의 당면과제는 이 세 번째 유형의 창출에 있다. 이 세 번째 유형의 미국불교 모델은 미주 일본불교이다. 일본불교는 19세기 말 미국에 소개되었고, 상당수의 일본계 이민 3세와 4세 심지어 5세들도 일본불교를 신행하고 있다. 미주에 있는 정토진종 서본원사파 소속 사원들은 세 번째 유형의 미국불교를 대표한다.

이 세 번째 유형의 미국불교를 통해 미주 한국불교의 당면과제와 미래를 검토해볼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민국가인 미국사회에서 몇 세대를 걸쳐서 자기 조상들의 종교(불교)를 고수하는 것이 좋은지는 쉽게 단언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인종 간 그리고 민족 간 결혼을 통해서 일본계 미국인들은 점차 사라질 것이고, 그 결과 미주 일본불교는 점차 사라질 것이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말해서, 한국계 미국인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미주 한국불교는 존재해야 한다. 미주 한국불교는 100여 년 이상의 역사적 그리고 종교적 경험을 축적한 미주 일본불교를 통해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미주 일본불교, 미주 한국불교, 미주 중국불교 등은 먼 훗날 결국 사라지고, 토착화된 미국불교라는 이름 속에 모든 불교 전통들이 용해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의 한국불교로서는 한국계 미국인들을 위한 미주 한국불교를 창출해야 할 지상과제를 안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4. 미국에서 한국불교의 위상

미국사회에서 한국불교에 대한 인식은 어느 정도일까? 이 문제를 자세하게 살펴보면 한국불교가 미국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주목할 점은 학자들이 연구대상으로 한국불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학자들이 미주 한국불교를 주제로 저술한 한글 단행본 저서는 거의 전무하다. 샤론 A. 서는 2004년 워싱턴 주립대학 출판부를 통해서 미주 한국불교를 주제로 영문판 단행본 저서인 Bei-ng Buddhist in a Christian World: Gender and Community in a Korean American Temple을 출판한 바 있다. 서 교수는 로스앤젤레스의 한 사찰의 신도들을 인터뷰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동체, 종교와 젠더의 의식 구조를 인류학의 입장에서 규명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책은 영문과 한글을 통틀어서 미주 한국불교를 주제로 쓰인 최초의 단행본 저서이다. 한편 한창호가 번역하고 《미주현대불교》와 운주사가 공동으로 2009년 발행한 릭 필즈의 《이야기 미국불교사》는 미국불교사의 고전으로 인식되고 있고, 필자가 위에서 요약한 두 번째 유형의 미국불교를 다양한 예화를 통해서 매우 상세히 그리고 알기 쉬운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미국불교를 알고 싶어 하는 한국인 학자 또는 불자들이 한글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단행본 참고문헌이다. 지금까지 영어로 출판된, 다양한 각도에서 미국불교를 조명한 미국불교 관련 단행본 저서들이 한글로 번역된다면, 한국불교의 미국화와 미국불교의 한국화는 그 저서들을 통해서 쌍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1981년에 초판이 발행된 릭 필즈의 이 책은 1986년에 재판, 1992년에 3판이 발행되었다. 필즈는 판을 거듭하면서 필자가 위에서 요약한 첫 번째 유형의 미국불교의 내용을 조금씩 첨가하여 그 책의 부족한 부분을 상당히 보강하였다. 필즈가 두 번째 유형의 미국불교의 내용을 주로 다루고 첫 번째 유형을 제대로 다루지 않아, 그 책이 미국불교를 전체적으로 조망하지 못했다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필자는 필즈의 책은 우리가 두 번째 유형의 미국불교를 이해하는 데에 손색이 없다고 간주한다. 그 책의 이러한 약점을 보강할 수 있는 또 다른 미국불교 단행본 개론서가 빠른 시일 안에 한국어로 번역되어 한국의 학자들과 독자들이 미국불교를 좀 더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필즈의 단행본 제3판은 총 16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필즈는 제15장(pp.545-575)에서 중국불교와 베트남불교와 더불어 한국불교를 매우 조금 그리고 피상적으로 다루었다. 필즈는 7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미국불교사를 기술하면서 오직 12페이지(pp.555-566)를 할애하여 미주 한국불교를 다루고 있을 뿐이다. 엠마 맥크로이 레이맨은 필즈의 단행본 제3판이 출판되기 이전인 1976년 Buddhism in America를 간행하였다. 필즈와 다르게 레이맨은 필자가 요약한 첫 번째 유형과 두 번째 유형의 미국불교를 모두 소개하였다. 레이맨은 미국불교, 일본의 정토진종, 선불교 그리고 일련정종, 티베트불교, 중국불교, 상좌부불교를 매우 잘 요약하였지만, 한국불교는 아예 소개하지 않았다.

리처드 휴즈 시이거는 1999년 출판한 Buddhism in America에서 레이맨처럼 각각 한 장(章)씩 할애하여 정토진종, 창가학회, 선불교, 티베트불교 그리고 상좌부불교를 상세히 소개한 이후, 그 이외 불교 전통이라는 한 개의 장(pp.158-181)을 할애하여 중국불교(pp.159-168), 베트남불교(pp.173-181) 와 더불어 한국불교(pp.168-173)를 매우 피상적으로 다루고 있다. 시이거의 저서가 출판되기 1년 전인 1998년 찰스 S. 프레비시와 케네스 K. 다나카는 16편의 논문을 편집하여 The Faces of Buddhism in America를 캘리포니아주립대학 출판부에서 간행하였고, 그 책에 숭산 스님의 미국인 제자였던 무송 스님의 〈미주 한국불교: 새 유형의 선불교〉(pp.117-128)를 포함하였다. 무송 스님은 또한 자신의 저서에서 숭산 스님을 중심으로 미주 한국 선불교를 매우 간단히 소개하였다.

필즈의 책 제3판, 프레비시와 다나카가 편집한 책, 그리고 시이거의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듯이, 1990년대 이후 발행된 미국불교 개론서들은 미주 한국불교를 매우 피상적으로 다루고 있다. 2014년 미주 한국불교 50주년을 맞이한 오늘, 한국불교계는 미주 한국불교의 당면과제와 미래를 진지하게, 종합적으로, 그리고 심층적으로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미주 한국불교의 당면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의 한인불교는 그 역사와 교리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중 하나가 정기간행물의 발간이었다. 이런 활동은 1980년 이래 간헐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대원 스님은 1985년 3월 1일 《대원신문》의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이 신문은 1986년 10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도철 스님은 1985년 4월 《미주불교》의 창간호를 발행하여 1988년 3월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을 중지하였다. 법안 스님은 1986년 5월 월간 《원각》의 창간호를 발행하여 그 회보의 발행을 1988년 6월호까지 지속시켰다. 경암 스님은 1989년 4월 《미주불교신문》의 창간호를 월간으로 발행했지만 오랫동안 그 신문의 발행을 지속시키지 못했다. 월간 《원각》의 편집인으로 활약하였던 김형근은 1989년 10월 월간 《미주현대불교》 창간호를 발간하였고, 이 월간지는 척박한 미주 한국불교의 상황 속에서 현재까지 중단 없이 발행되고 있다. 이 잡지는 미주 한국불교의 나아갈 방향과 이념을 정초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이런 점에서 《미주현대불교》가 미주 한국불교에 기여한 점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100여 개의 미주 한국 사찰 가운데 로스앤젤레스 관음사는 단위 사찰의 자료집으로 《20년사 총감》과 《30년사 총감》을 발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주 한국불교를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자료집은 현재로는 없다. 《미주현대불교》는 미주 한국불교의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기록하고 있는 최고의 보고이다. 늦었지만, 한국불교는 《미주현대불교》가 25년 이상 축적한 미주 한국불교의 자료들을 모아 미주 한국불교 자료집을 발간했으면 한다. 이를 통해 미국의 한국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자료집이 발간된다면 이에 근거하여 한글판과 영문판 《미주 한국불교사》를 집필할 수 있고, 미주 한국불교에 기여한 주요 인물들의 공과를 적극적으로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미주 한국불교의 전통적인 신행양식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재검토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는 미주 한국불교를 전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자료집이 없기 때문에,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다룰 수 없다. 미국불교를 주제로 현재까지 출판된 다수의 영문 단행본 저서들은 주로 숭산 스님과 삼우 스님의 전법 활동을 피상적으로 다룬 것이 전부이다.

이는 곧 현 단계의 한국불교의 교세 또는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냉정하게 말하면 미국사회에서 한국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백인 주류 불교, 상좌부불교, 티베트불교, 일본불교, 그리고 중국불교에 비해 매우 왜소하다. 그럼에도, 미국불교에 차지하는 한국불교의 비중은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한다.


5. 미주 한국불교의 과제와 전망

미국 정부가 1924년 일본인 이민을 금지한 이래로, 일본인들은 미국 이민을 거의 오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계 이민 1세들을 위한 법회의 필요성은 일본계 미국 사원들에서 점차 감소하였다. 일본 사원들은 일본계 미국인들을 위한 법회를 영어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일본불교는 중요한 텍스트를 번역하였고, 미국의 문화적 토양에 맞는 제도를 받아들였다. 또한 일본불교의 교리를 재해석하였고, 미국의 현실에 맞게 수계 의식을 비롯하여 다양한 법회 의식을 표준화하였다. 심지어는 인도의 불교 사원 건축 양식을 원용하여 미국식 불교 사원 건축 양식을 새롭게 만들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미국계 일본인 불자들을 위해 부단히 일본불교의 미국화를 시도하였다. 

이에 비하면 한국불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미국의 한국인 이민은 1903년 시작되었고 1905년까지 2년간 지속된 이래 오랫동안 단절되었다. 그러다가 1965년 이민법의 개정으로 본격적으로 이민이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한국불교는 1965년 개정 이민법 실행 이후 본격적으로 미국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계 미국인들을 위한 토착화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 예를 들면 한국불교는 한국계 미국인 불자들을 위한 영어법회를 거의 개최하지 않고 있다. 미주 한국불교에는 영어의식 매뉴얼이 없다. 영어의식 매뉴얼을 만들 인적 구성원도 부족하고, 영어로 한국불교의 의식을 진행하고 영어 법문을 할 인적 자원도 거의 없다.

한국계 미국인 2세 불자들과 스님들은 미주 한국불교의 미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미국의 교육체계 속에서 훈련받지 못했다. 한국불교는 그들을 교육할 교육기관조차 아직 설립하지 못했다. 한국불교의 미국화를 전담할 인적 구성원 없이는, 한국불교의 미국화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미주 한국불교는 한국불교의 미국화를 담당할 인재 양성에 전력투구해야 한다.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한국계 이민 1세 승려들과 재가불교 지도자들은 동일한 경험과 문화를 공유하는 한국계 이민 1세 불자들에게 불교를 쉽게 가르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들과 전혀 다른 미국 문화와 교육 배경 속에서 자란 한국인 2세들에게 불교를 효율적으로 가르칠 수 없다.

미주에 있는 일본 정토진종 서본원사파 소속의 사원들은 일본계 2세 성직자 후보들과 백인 성직자 후보들을 본국의 종립대학(용곡대학)에 보내 그들을 교육했다. 그 이후, 서본원사파는 1949년 북캘리포니아의 버클리에 불교대학원을 설립하여 일본계 2세와 미국인 성직자들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대만의 불광산사 지도자인 성운 대사는 1991년 로스앤젤레스 근교에 웨스트대학(서래대학)을 설립하여 좁게는 중국불교의 그리고 넓게는 불교의 세계화를 주창하였다. 티베트의 가규파 지도자인 트룽파 린포체(1939~1987)는 1974년 콜로라도의 볼더에 나로파 대학을 세워 티베트불교의 미국화를 시도하였고, 그리고 일본의 창가학회 지도자인 이케다 다이사쿠는 2001년 남캘리포니아의 앨리소 비에호에 미국 소카대학을 설립하여 일본 창가학회의 이념으로 미국인 대학생들을 교육하고 있다.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는다면, 한국불교는 한국계 미국인들을 포교할 스님들과 재가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불교대학을 미국 현지에 세울 필요가 있다.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한국불교는 기존의 미국 현지의 불교대학들과 연계하여 한국불교 지도자들을 양성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인적 자원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한국불교의 미국화와 미국불교의 한국화는 불가능하다. 충분히 훈련된 전문가와 승려 그룹만이 미주 한국불교의 미래를 보장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한국불교가 인재 양성에 전력투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성원 / 정우 스님을 은사로 통도사에서 출가. 동국대학교, 서울대학교, 위스콘신주립대학과 도쿄대학교에서 불교학, 철학 그리고 중국문학을 연구하였다. 티베트 망명 데붕승가대학에서 티베트불교를 연구한 이후, 로스앤젤레스의 웨스트대학에서 동아시아 불교, 하와이주립대학에서 불교와 한국철학으로 후학을 지도했다. 현재는 코스탈 캐롤라이나대학에서 세계종교와 아시아종교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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