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왜 인도를 자주 여행하느냐고 내게 묻곤 한다. 꼭 이유가 있어야 하냐고 나는 되묻는다. 그러면 사람들은 머쓱해 한다. 물론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 인도를 여행하면 작은 소도시나 시골을 좋아하는데, 아직도 그런 곳을 가면 소나 염소, 양, 돼지, 개 같은 동물들이 거리를 어슬렁어슬렁 활보한다. 나는 그런 야생의 모습을 보는 게 참 좋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나라라서 그렇기도 하다. 나는 그의 시집을 대부분 읽었는데, 특히 《기탄잘리》에 나오는 시 한 편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내가 처음 이 생명의 문지방을 건넜을 때의 순간을 나는 알지 못했지요.
한밤중 숲 속의 꽃봉오리와도 같이 나를 이 광대한 신비의 품속에 피어나게 한 것은 무슨 힘이었을까요.
아침에 내가 빛을 우러렀을 때 그 순간 나는 이 세상의 낯선 사람이 아님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름도 형태도 없는 불가해한 것이 나의 어머니 모습이 되어 나를 그 두 팔로 안았던 것이지요.
꼭 그처럼, 죽음에 있어서도 그 똑같은 미지의 것이 내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 생명을 사랑하는 까닭에, 죽음 또한 사랑하게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그 오른편 젖에서 아기를 떼어낼 때 아기는 웁니다만, 바로 그다음 왼편 젖에서 그 위안을 찾아내게 마련이지요.
— 타고르 〈기탄잘리·95〉

이 시를 읽고 난 후 왜 타고르가 노벨문학상 작가인지를 실감했다. 인도 여행을 자주 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인은 “한밤중 숲 속의 꽃봉오리와도 같이 나를 이 광대한 신비의 품속에 피어나게 한 것은 무슨 힘이었을까요.”라고 묻는다. 그 물음에 대한 답변을 스스로 하고 있는데, 그 힘의 주체는 곧 “이름도 형태도 없는 불가해한 것이 나의 어머니 모습이 되어 나를 그 두 팔로 안았던 것”이라고. 여기서 “이름도 형태도 없는 불가해한 것”이란 표현은 시인이 어떤 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 모습’을 한 신이 어떤 신인지 나는 겨우 짐작할 뿐이지만, 타고르는 그 불가해한 신성을 모성(母性)으로 경험한 모양이다.

하여간 타고르는 그 어머니 신이 인간의 삶과 죽음 모두를 끌어안는 분이기에, 자기가 어머니의 태에서 떨어져 처음 경험한 세상이 낯설지 않았듯이 죽음의 세상 또한 낯설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삶뿐만 아니라 죽음 또한 사랑할 수 있다고. 시인은 그런 확신을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어머니에 비유하여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다. 내가 이 시에 매혹된 것은 바로 다음 시구 때문이다.

“어머니가 그 오른편 젖에서 아기를 떼어낼 때 아기는 웁니다만, 바로 그다음 왼편 젖에서 그 위안을 찾아내게 마련이지요.”

얼마나 아름답고 웅숭깊은 비유인가. 어머니가 그 오른편 젖을 물고 있던 아기를 떼어내는 행위를 우리가 ‘죽음’으로 읽는다면, 그 죽음은 어머니의 왼편 젖, 곧 불멸의 생명의 문지방에 닿게 하기 위한 가교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타고르처럼 이런 깨달음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이는 죽음의 신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이미 이 땅 위에서 ‘불멸의 생명’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육신이 탐닉하는 세속의 즐거움을 멀리하고, 세상의 허망한 것들에 대한 욕심에도 더 이상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죽음의 신 야마(Yama)의 말처럼 외적인 쾌락의 추구가 ‘죽음의 덫’이 되리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죽음에 대한 생각 자체를 꺼려한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인데. 죽음에 대한 성찰이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성장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타고르는 자기 삶의 순간순간들을 배움의 기회로 여기고 있는데, 다음의 짧은 시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읽을 수 있다

어느 날엔가 우리는 배우게 되리라.
영혼으로 얻은 그 무엇도
죽음이 훔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타고르가 말하는 ‘영혼으로 얻은 그 무엇’은 무엇일까. 《우파니샤드》가 말하는 불멸의 영혼인 ‘아트만(Atman)’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죽음의 본성은 “시간 속의 모든 것들을 먹어치우는 것”(《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이다. 하지만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들을 장악하고 있는 죽음의 왕이라 할지라도 불멸의 영혼인 아트만은 건드릴 수 없다는 것. 기독교적인 어투를 빌면, 죽음도 ‘하느님’과 ‘나[아트만]’를 갈라놓지 못한다는 것. 물론 죽음은 살과 피와 뼈로 된 육신을 소멸시킨다. 그러나 그것이 내 존재의 뿌리인 신과 나 사이의 균열을 가져오지는 못한다는 것.

만일 우리 속에 이런 자각이 있다면, 삶도 사랑하지만 죽음도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성인이 죽음을 ‘나의 형제’라 부른 삶의 깊이에 아직 이르지 못했지만, 그런 깊이에 이르기를 소망한다. ■


solssi@hanmail.net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