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과 실천을 겸수한 불교학자

법운 이종익
(法雲 李種益, 1912~1991)

《불교평론》으로부터 현대 불교학자 시리즈 중 법운(法雲) 이종익(李種益, 1912~1991) 박사에 대한 집필을 의뢰받았을 때, 필자가 제일 먼저 떠올렸던 것은 보조사상 연구와 원효 연구의 개척자 중 한 분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막상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필자는 법운 이종익 박사에 대한 집필자로서는 너무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연구 영역도 그의 활동 영역도 필자가 정리해내기에는 너무나도 방대했기 때문이다. 해서 본 글은, 그의 삶과 학문세계 전체를 탐색하여 소개한다는 생각보다는 그의 삶과 학문에 대한 소개를 통해서 독자들이 탐구해 들어갈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의도로 쓴 것임을 밝힌다.

 

1. 삶과 실천, 그리고 학문세계의 형성

1) 불교와 민족에 눈을 뜨다

법운 이종익은 1912년 5월 24일(음력 4월 8일), 강원도 양양에서 부친 전주인 이달재(李達在)와 경주 이씨 모친의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열한 살 되던 해에 보통학교의 분교 격인 3년제 간이학교의 2학년에 편입하여 공부하였다.

2년 과정을 마친 후, 13세 때부터 17세 때까지 성리학자인 박동산(朴東山) 선생에게서 유교 전적의 7서(七書)와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 그리고 율곡과 퇴계학 등을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19세가 되던 1931년 4월에 어머니인 경주 이씨가 별세하면서 인생무상의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침식을 폐하고 낙산사와 신흥사 등에 머물며 명상에 잠기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충격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하고 늑막염, 신경쇠약, 소화불량 등 몸이 심하게 아파서 사경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연보에는 자세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법홍(法弘) 스님의 《고법운이종익박사 논문집》 간행사에 의하면, 이때쯤 설악산 오세암에 주석하고 있던 만해 한용운 선사의 지도로 발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만해 선사의 소개로 금강산 유점사 홍성암에 머물면서, 김운악(金雲岳) 화상의 지도로 관음기도에 정진하여 건강을 회복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는 1933년 21세 되던 해에 효봉(曉峰) 스님을 계사로, 그리고 운악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득도하게 되었다. 이것이 이종익이 불교인으로서 그리고 불교학자로서 몸담게 된 출발점이다.

출가 후에는 금강산 유점사의 동국경원(東國經院)에서 김설하(金雪河) 강백에게 사교(四敎)를 배우고, 변설호(卞雪湖) 강백에게 대교(大敎)를 배우는 등 전통 강원의 이력 과정을 거쳤다. 앞서 언급한 법홍 스님의 간행사에 의하면, “선생은 병고 중의 쇠약한 몸이면서 범인이 1년에 걸려 학습할 것을 불과 한 달 미만에 통달하는 절특(絶特)한 총지(聰智)를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25세 되던 1937년에는 개운사 대원암에서 다시 한영(漢永) 스님에게 《십지경》과 《염송》 등을 배웠는데, 그해 겨울에 유점사 강원의 사교와 대교 교수로 초빙될 만큼 뛰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전통적인 방식의 강원 이력 과정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에 1938년 불교 연구의 새로운 풍토를 익히고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결심을 하고, 본격적으로 불교학을 전공하기 위한 준비과정의 일환으로 먼저 와세다(早稻) 대학의 교외생 과정을 이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1938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1940년 교토(京都)에 있는 린자이슈전문학교(臨濟宗專門學校, 오늘날의 하나조노 대학)의 1년 과정을 수료하였다. 그 후 다시 도쿄(東京)의 다이쇼대학(大正大學) 불교학과에 편입하여 동 대학을 졸업하고, 1944년에 귀국하였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이때의 일본 유학 생활이 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학문적 방향에는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후일 발표한 〈한·밝 사상고〉라는 논문에 일부러 후기를 붙였는데, 그 후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처음 오사카(大阪)에 우거(寓居)하였는데 일인(日人)들은 한국인을 매우 차별했다. 쓰루하시(鶴橋) 경찰서에는 한인(韓人)만을 인감(因監)하는 구치장이 있고, 또 한인을 담당한 경관이 따로 있어서 그 수사 감시가 매우 심했다. 나도 정식 도항증명(渡航證明) 없이 건너갔던 탓으로 몇 번이나 추방을 당하면서 겨우 눈을 피하며, 모교(某校)에 학적을 둔 뒤로 무사하기는 했으나 생각하면 분통이 터졌다. ‘우리나라는 본디 일본보다 선진문명국이어서 일본의 세상 문화는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전해준 것임을 나는 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늘에 와서 도리어 후진국이 되었고, 또 그들의 압제를 받고 또 민족적 차별대우를 받게 되었나?’ 하는 것을 생각하며 크게 의혹하고 분개했다. 나는 우리 민족문화사를 더듬어 올라가며 우리 민족의 얼이 무엇인가를 캐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고고학적으로 고어학(古語學), 풍속학적으로 우리 겨레의 생활사·문화사·사상사를 더듬었다. 그러한 지 3~4년의 광음(光陰)이 흘러서 나는 비로소 우리 겨레의 수천년사를 일관한 문화의 원천을 발굴하였다고 자신하게 되었다.

이 후기는 1972년에 쓴 것인데, 그의 학문세계가 불교학에 거치지 않고 민족문화 분야까지 확장되었던 근원을 알 수 있게 한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그의 학문은 불교학은 물론이고 민족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영역을 망라하는 광범위한 것이다. 그런데 그 근원을 돌이켜보면, 현대적 불교학을 익히려던 일본 유학 생활이 민족의 현실을 실감하고, 민족문화 부흥의 학문적 맥락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한국불교 연구 역시 민족문화의 부흥과 정체성 해명이라는 큰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일본 유학 생활에서 느꼈던 민족의 현실은 그의 생애는 물론 학문에서도 전환점이자 굳건한 토대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보조 그리고 범부 김정설

앞에서 유학생활을 잠깐 언급했는데, 이 유학생활 중에서 그의 불교학 연구 방향을 결정지은 계기 중의 하나가 보조국사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의 재발견이다. 1943년 가나자와문고(金澤文庫)에서 보조국사의 《화엄론절요》를 발견한 선생은 그것을 필사하여 후에 송광사에 기증하였다. 가나자와문고에 소장된 《화엄론절요》는 1295년에 필사된 것으로, 그는 이것을 다시 원고지에 2부를 필사하여 1부는 본인의 연구 자료로 삼고 1부는 송광사에 기증하였다. 그는 다이쇼대학을 졸업하고도 한참이 지난 1975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그 제목이 〈한국불교의 연구-고려 보조국사를 중심으로(韓國佛敎の硏究; 高麗普照國師を中心として)〉이다. 그보다 앞서 1972년에는 《고려 보조국사 법어》(보련각)를 번역 간행하기도 하였다. 결국 보조국사 연구는 그의 일평생 동안 이어지게 되었다.

물론 보조사상 연구 역시 단순히 《화엄론절요》의 재발견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일본과 다르고 중국과 다른 불교의 모습을 보조사상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한국불교의 역사 위에 잠류(潛流)되어 온 원효대사 이래의 통불교 이념의 구현인 동시에 인도의 원천적 불교, 중국의 분파적 불교에 대한 한국적인 회통불교는 바로 국사를 거쳐서 성립된 것”이라는 평가에서 파악할 수 있는데, 중국불교 및 일본불교와 비교하여 회통과 종합이라는 맥락에서 한국불교의 전통과 정체성을 찾던 최남선 이래의 맥락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곧 한국불교에 대한 연구 역시 민족문화의 정체성 해명이라는 큰 흐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라 원효의 사상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와 대각국사 의천의 사상에 대한 연구 역시 동일한 맥락의 연장선에 있다.

연구자로서의 그의 삶에 또 한 번 전환점이 된 것은 범부(凡父) 김정설(金鼎卨)과의 만남이다. 1975년에 ‘이종익박사 학위기념논문집’이라는 부제를 붙여서 간행한 《동방사상논총》은 범부 김정설로부터 받은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책 전체를 ‘Ⅰ. 범동양사상’ ‘Ⅱ. 한국불교사상’ ‘Ⅲ. 한국민족사상’으로 나누었는데, Ⅱ부의 불교사상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범부의 강의 원고 혹은 논고를 앞에 세우고 본인의 글을 뒤에 붙이는 형태로 편집하고 있다. 간행사에서 그는 “범부(凡父) 선생님의 동방사상강좌(東方思想講座)를 중심으로 하고 졸(拙)의 논고를 감히 그에 첨족(添足)하므로 기미승(驥尾蠅)의 공을 얻게 되었”다며 깊은 존경의 염을 드러내고 있다.

범부 김정설(1897~1966)은 우리의 문화와 정신을 연구하는 독창적 방법론으로서 오증론(五證論)을 제시하고, 동방학에 대한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했던 인물로, “동방학의 개척과 조고(造誥)에 있어서 실은 한(漢)·당(唐) 이래 근 2천 년 사상 제1인이라고 하여도 망언이 아니라고 할 정도의 위대한 동방학자”로 이종익에게 인식되고 있다. 그만큼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인데, 범부가 1956년 건국대에 동방사상연구소를 부설하고 개설한 동방사상강좌를 통해서였던 것 같다. 《동방사상논총》을 비롯하여 이종익의 불교계 외의 활동을 살펴보면, 범부에게서 받은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종익의 학문세계는 한국불교사상과 범부의 영향을 받은 동방사상과 한민족사상이라는 두 영역에 걸쳐 있다.

3) 사회적 실천

1944년 다이쇼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이종익은 서울 봉은사를 거처로 삼게 된다. 그는 봉은사에 머물면서 강원의 강주를 맡아 학인을 지도하는 한편 대중교화 활동을 시작했다. 이 시절에 특기할 만한 것은 1945년에 봉은사 주지였던 홍태욱(洪泰旭) 스님과 ‘불교중앙청년동맹’을 결성하고 청년운동을 전개한 점이다.
그리고 1946년 5월에는 법홍 스님 등 젊은 학승들과 함께 ‘불교혁신회(佛敎革新會)’를 결성하여, 일제 식민불교의 잔재를 소탕하고 참신한 민족불교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불교혁신회 사업이 불미스런 사태에 의해 중단되면서 이종익은 다시 한 번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환속하여 속세에 직접 뛰어드는 길을 택했던 것이 바로 이때였다. 해방 직후 한국사회 전반에는 일제의 식민잔재를 걷어내고자 하는 일제 청산 운동이 전개되었고 불교계 역시 그런 흐름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불교계의 식민 잔재 청산 작업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고, 오히려 비구·대처 간의 분열로 이어지는 계기로 작동하게 된다. 승단이 처한 현실은 그의 바람이 쉽게 이루어질 만큼 녹녹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결국 그가 택한 것은 환속이었다.

이후 그는 학자로서의 삶과 병행하여 대중교화의 사회적 실천에 힘쓰고자 했던 것 같다. 이후 그는 배영대학관(단국대학교의 전신)의 강사, 경기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이 시기에 그는 대중포교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1954년 12월, 대각사에서 ‘철학사상강좌’를 개설하고 대중들을 대상으로 불교교리를 강의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 강좌에 참여하던 대각사 청중들을 중심으로 ‘불교대각회’가 조직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대중교화 활동에 전념하고 있었지만, 그의 삶이 승단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 될 수는 없었다. 그의 활동이 불교 대중교화를 지향하는 한 승단의 상황은 여전히 중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55년 이 대통령의 이른바 ‘정화’ 유시를 빌미로 정화운동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후에 비구·대처 간의 본격적인 분열과 갈등의 원인이 되었음은 주지하고 있는 것과 같으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이대의(李大義), 문정영(文靜影), 강석주(姜昔珠) 등의 승려들 그리고 이불화(李佛化) 거사 등과 함께 선학원을 근거로 한 정화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그 과정에서 ‘전국비구승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는 훗날 정화운동 참여를 “천육백 년 역사적 문화유산을 이어받은 유일한 전통종단인 조계종으로서 그 업이 수행되지 못한다는 것은 민족 정신문화사상 일대 병태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에 따라, “안으로 조도(祖道)를 복구하여 역사적 전통에 빛나는 수도승단(修道僧團)을 재건하고, 밖으로 시대와 사회가 요청하는 대중불교를 실현하자.”는 양대 표어를 내걸고 조계종의 부흥을 꾀했던 것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어쨌든 정화운동 과정에서 그는 보조 종조론(普照宗祖論)을 제기하는 등 조계종의 종통(宗統) 수립에 적지 않게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즈음인 1956년부터 범부 김정설의 동방사상강좌를 수강하여 학문적 전환기를 맞고 있었던 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는 1950년대 후반 정화운동 참여, 경희대와 단국대 그리고 건국대에서 강의 생활을 병행하는 한편 불교 대중화 활동도 함께 전개하는 바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1960년 1월 1일, 〈불교신문〉의 전신인 월간 《대한불교》가 간행되기 시작했다. 대처 측에서 1959년부터 간행하기 시작한 월간 《현대불교》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고, 비구·대처 간 분쟁이 격화된 상황에서 비구 측의 입장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창간을 주도한 것은 통합종단 초대 총무원장이던 청담 스님과 경산 스님이었다. 청담 스님은 발행인 겸 편집인, 경산 스님은 부사장이었다. 이종익은 이 《대한불교》의 주필을 맡아 초창기의 불교신문을 이끄는 주역을 담당했다. 이 같은 사실은 그가 불교정화 운동에 상당히 깊이 관여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학자로서 삶 못지않게 현실의 개혁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게 해주는 부분이다.

1968년에는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에 시작된 그의 또 다른 사회활동이 바로 십선운동(十善運動)이다.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십선운동은 1960년대 전반 송월주 스님이 ‘미륵정신회’를 조직한 데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종익은 회장을 맡았는데, 그 활동이 면면히 이어졌던 것 같다. 1969년, 십선도운동본부에서 간행한 《미륵신앙과 십선도(十善道)》는 ‘미륵정신회’에서 ‘미륵궁봉회’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취지의 핵심인 십선운동의 체계를 세우기 위해 집필된 것이다. 여기에는 미륵신앙과 십선운동 그리고 점찰법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특히 우리 민족과 미륵신앙의 관계를 깊이 논구하여 민족문화의 일환으로서 미륵신앙을 강조하고, 그에 바탕한 대중교화활동 그리고 불교의 대사회활동으로서 십선운동을 제창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그는 집중적으로 여러 종파의 성전 간행에 힘썼 다. 그의 후반기 삶을 정리하면서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것은 그의 각 종파별 성전 간행 작업이다. 《원효종성전》(1967), 《미륵성전》(1968), 《유가밀교》(1968), 《천태종약전》(1970) 등이 그것이다. 이 시대는 한국불교의 각종 각파의 체계가 제대로 정비되지 못한 시점이다. 그런 시기에 성전 간행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여러 종파의 체계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함으로써 한국불교의 한 단계 도약에 기여하는 또 다른 사회적 실천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77년 동국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는데, 직후인 1978년 동방사상연구원을 설립하였다. 퇴직 후에는 불교 대중화에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불교중앙상임포교사로서 활동하는 한편, 대중포교를 위한 포교서를 집중적으로 저술한 시기도 퇴임 이후이다. 《불국사의 비화》(1981), 《사명대사》(1982), 《의상대사》(1982) 등의 포교서가 간행되었는데, 특히 《사명대사》는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다. 이후 한국불교대학 학장 등을 역임하다 1991년 11월 6일에 별세하였다.

2. 한국불교 정체성 해명에 기울인 학문적인 노력

 

법운 이종익 박사의 학문세계는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방대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승려로서 전통 강원의 이력과정을 익히고 강원에서 강사 생활을 한 것은 물론, 현대적 학문으로서 불교학을 익히기 위해 일본 유학생활을 거쳤다. 다시 1950년대에는 범부 김정설을 만나면서 그의 동방사상강좌에 크게 마음이 움직여 민족 정신문화의 해명에 힘을 기울인 것도 역시 그의 학문세계에 한 축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필자는 동방사상이나 민족 정신문화에 밝지 못하고, 또 이 글이 불교학자로서 법운 이종익의 삶과 학문세계를 조망하는 데 있기 때문에 아래에서는 주로 한국불교 연구를 중심으로 그의 학문세계를 정리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의 한국불교 연구 역시 민족 정신문화의 함양 그리고 중국불교나 일본불교와는 다른 민족문화로서 한국불교 특유의 정체성을 해명하는 데 초점이 있었다는 점은 미리 인지되어야 할 것이다.

1) 보조사상의 연구

이종익은 한국불교 사상과 관련한 다양한 논문들을 남기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것은 보조사상의 연구이다. 그의 보조사상 연구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조망할 수 있는데, 한 가지는 조계종의 정체성 해명이라는 관점이고, 나머지 한 가지는 한국불교의 정체성 해명이라는 관점이다. 이 중 전자는 불교 정화운동을 거치면서 보조 종조론을 중심으로 보조사상을 중핵으로 하는 현대 한국불교의 정체성 정립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관련 연구들로 학위논문인 〈한국불교의 연구-고려 보조국사를 중심으로(韓國佛敎の硏究;高麗普照國師を中心として)〉(1975), 〈보조국사의 선교관〉(1972), 〈지눌의 화엄사상〉(1974), 〈보조선의 특수성〉(1984), 〈보조 찬술의 사상개요와 서지학적 고찰〉(1987), 〈법보단경과 보조〉(1988), 〈선수증에 있어서 돈오점수의 과제〉(1990), 〈정혜결사문의 사상체계〉(1992) 등이 있다. 관련 저술로는 《대한불교조계종 중흥론》(1976)이 있다.

그는 《대한불교조계종 중흥론》에서 조계종통(曹溪宗統)의 문제, 억불 시기인 조선시대의 종파 통합에 따른 성립사적 검토를 시도한 후, 보조 문손 이외에는 조계종을 통용한 일이 없다는 점 등을 근거로 보조 종조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와도 맞물려 있는 부분이다. 그는 〈선교일원(禪敎一元)을 기점으로 한 보조국사의 사상체계〉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국사의 사상체계는 그 근본은 ‘선(禪)·교(敎) 일원’의 원리에 서서 선·교를 융회하므로 서로 이해하고 서로 자조(自助)하여야 함을 강조하면서 나종에는 ‘회교명종(會敎明宗)’이 그 본의임을 밝혔다. 그것은 일반지도체계이다. 그리고 그 위에 일류(一類)의 특수한 근기를 위하여 이른바 본분종사(本分宗師)의 출신활로(出身活路)로서 이로(理路)·어로(語路)와 정식(情識)·사량(思量)을 뛰어난 ‘교외별전(敎外別傳)’의 활구선지(活句禪旨)를 내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이른바 선교일원론과 그에 부가하여 특별한 근기를 위해 더해진 간화경절문에 보조의 사상체계가 가지는 주요한 특징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이것이 인도불교 및 중국불교와 한국불교가 가지는 주요한 특징의 차이라고도 인식했다.

그런 연후에 그는 보조 종조론을 주장하는 연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한국불교에서는 청허(淸虛)·부휴(浮休) 양 파 중에 다 ‘자교명종(資敎明宗)’ 또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을 그 종시(宗是)로 하였으며, 특히 교에는 화엄을 궁극으로 하여 화엄과 선이 융회되어 왔다는 것도 보조의 유풍이며, 청허대사가 지었다는 ‘성불도(成佛圖)’에는 ‘경절문(徑截門)·원돈문(圓頓門)·염불문(念佛門)·참괴문(懺愧門)’의 4문을 설정하였고, 청허의 제자 편양언기(鞭羊彦機)가 지은 심검설(尋劒說)에는 ‘경절문(徑截門)·원돈문(圓頓門)·염불문(念佛門) 3문을 세운 것도 보조유풍인 것이다. 이와 같이 보조국사의 선교 일원관에 입각한 지도이념은 자교명종(藉敎明宗) 또는 회교귀선(會敎歸禪)으로 지향되어서, 그것이 한국불교의 주조가 되어 보조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불교사를 지배해왔다는 것이 사실임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이 같은 이종익의 보조 종조론은 사상체계의 일관된 흐름에서 볼 때 조계종의 종조로서 보조국사를 취해야 한다는 관점에 입각해 있다. 한편 그는 태고 종조론을 다음과 같이 부정했다.

조계종은 인도적 교나 중국적 선(禪) 일파가 아닌 한국적 특수한 전통성과 가치성을 지닌 종단인데 어찌하여 이조(李朝) 중에 중국 임제석옥(臨濟石屋) 일파로 변조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옛적 권퇴경(權退耕)·김포광(金包光) 양사(兩師)도 고려에서 생긴 조계종을 여말 원(元)에 들어가서 임제석옥의 법을 받아온 태고화상(太古和尙)의 법계로 하여서는 아니 되겠으므로, 신라 도의국사(道義國師)를 종조로 하고 태고화상은 중흥조로 하자고 하니, 도의와 태고는 법통이 서로 닿지 않으므로 고려의 조계종은 구산조사를 종조로 하고 ‘조선 조계종은 태고화상을 종조로 한다’는 괴변을 하여 사람을 웃기었다.

곧 태고화상을 종조로 한다는 것은 현재의 조계종이 계승하고 있는 사상의 주류로 보아도, 그리고 법맥상으로도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와 같은 그의 생각은 한국불교 전체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과도 연계되어 있다. 이 점에 대해서 다시 절을 바꾸어 설명한다.

2) 원효사상의 연구

이종익이 한국 불교사상 연구에서 보조 다음으로 많은 논의의 비중을 두었던 것이 바로 원효사상과 대각국사 의천의 사상이다. 실상 보조사상을 논하거나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논하는 그의 논문에서는 거의 빠짐없이 원효와 대각국사 의천 그리고 보조로 이어지는 통불교 사상의 흐름을 주류로 삼는 관점이 부각되고 있다.

그의 원효 관련 연구 논문으로는 〈원효대사의 근본사상〉(1948), 〈원효의 생애와 사상〉(1960), 〈원효의 평화사상〉(1975), 〈신라불교와 원효사상〉(1975), 〈원효사상의 연구상황〉(1977), 〈원효의 근본사상: 《십문화쟁론》 연구〉(1977) 등이 있다. 또 원효종 종정을 역임한 법홍 스님과의 인연 때문인지 《원효종성전》을 간행한 것은 물론 《국역원효성사전서》 간행 작업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그는 원효에 대해 “나의 식견이 못 미칠 듯하여 동양학의 혜성이시던 고 범부 김정설 선생님의 논평을 빌린다면, 석존의 후손으로서 인도에서 용수보살을, 중국에서 지자대사를, 우리 동국에서 원효대사를 각기 그 나라 불교사상가를 대표한, 장엄한 정신문화건설의 주역자라고 지적하게 된다.”고 평하고 있다. 그런 연후 용수와 지자의 업적을 사상사적 과제와 업적을 논하고 원효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원효는 용수와 같이 대승불교의 개척자도 아니고, 또는 지자와 같이 대소승 교의의 총정리와 회삼귀일의 일승건립뿐만 아니라, 대·소승, 공(空)·성(性)·상(相)의 대립으로 인한 백가(百家)의 쟁론(諍論)을 화회하여 일미(一味)의 진실로 귀일(歸一)시킴을 그 사명으로 하였다. ……원효는 화쟁사상을 핵으로, 인도에서 발원된 대·소승 성(性)·상(相)의 모든 교의가 중국에 와서 여러 학파·종파로 분산된 것을 다시 하나의 감로법해(甘露法海)로 회통귀일시키려는 사명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은 원효의 《십문화쟁론》의 십문에 대한 복원을 시도하는 중에 쓰인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원효사상의 핵심을 화쟁사상으로 평하고 다시 그 화쟁사상의 정수는 《십문화쟁론》에 담겨 있다고 보았다. 이른바 중국에서 성립된 제 종파의 교학사상을 한 맛으로 회통시킨 것에 원효사상의 특징이 있고, 다시 선(禪)이 전래되어 오자 교(敎)의 입장에서 선(禪)을 회통시킨 것이 대각국사 의천이며, 그럼에도 선교일원의 사상체계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아서 보조국사 지눌에 이르러 선의 입장에서 교를 일원화하고, 다시 그 위에 특별한 근기를 위해 간화경절문을 세운 것이 한국불교의 주된 흐름이라고 하는 안목에 의한 평가이다. 이른바 한국 불교사상의 흐름 전체를 바라보는 안목 위에 원효를 선구자로서 자리매김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3) 여타의 한국불교 관련 연구와 정도전의 벽불론 비판

여타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이종익은 여타 이상의 한국불교 관련 연구들을 남기고 있다. 간단히 제명만 소개하면 〈해동불교전래고〉(1941), 〈정도전의 벽불론 비판〉(1971), 〈중국 선학사상 신라 무상대사의 지위〉(1973), 〈고려시대의 불교철학〉(1977) 등을 언급할 수 있다.

특히 〈정도전의 벽불론 비판〉은 정도전의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전체적으로 검토하고 하나하나 비판을 가한 것이다. 정도전의 《불씨잡변》에 대한 비판으로서는 거의 처음 시도된 전반적인 검토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검토뿐만이 아니라, 불교 전래 이후 중국에서 시도된 벽불론의 흐름과 《불씨잡변》의 관계, 그리고 불교와 유교에 대한 이종익의 기본적 관점이 제시되어 있다. 그는 “송유(宋儒)나 그 유풍을 이은 우리나라 유자(儒者)들이 배불·척불할 적에 유교의 교의에 입각하여 그와 맞지 않으니 ‘異端이다 邪說이다’라고 하였다. 그것은 큰 착각이요 오판이다. 왜냐하면 불교는 어디까지나 종교이다. 그런데 유교는 실은 종교는 아니다. 유교는 우리 인간의 현실생활만을 문제 삼는 윤리의 교(敎)며 정치·경제학이다. 그런데 우리 불교는 우리 인생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지어 모든 모순을 근본적으로 뿌리 뽑고 영원한 이상세계를 실현하려는 것이 그 중심명제”라고 말했다.

근본명제가 가지는 차이가 있으므로, 잣대가 틀린 비판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논지로 하고 있는 연구이다. 그러나 이 논문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성리학의 심성론과 그에 대응하는 불교적 입장에서의 반론을 하나하나 제시하고 있는 점이라고 생각된다. 단순히 정도전의 벽불론에 대한 해석이 아닌 반론으로서 제시된 논문이라는 점이 일반 연구 논문과 명백한 차이를 가지는 특별한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3. 연구자로서 이종익, 실천가로서 이종익

이상으로 지금까지 법운 이종익의 삶과 학문세계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필자가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서 자료를 수집할 때는 사실 학자로서 이종익이라는 점에 관심이 많이 기울어 있었다. 그러나 자료를 수집하여 검토하는 과정에서 학자로서의 삶보다는 실천가로서의 삶이라는 관점이 더 적절할 것이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그가 보여준 삶의 여정이 그렇고, 그의 논문들이 가지는 독특한 성격 곧 단순히 연구와 분석이 아니라 그로부터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점이 그러했다.

이종익의 연구 성과들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민족 정신문화의 해명과 제시라는 측면과 깊이 맞닿아 있었다. 이것은 그가 단순히 연구자로서 삶에 가치를 둔 것이 아니라, 연구 그 자체가 삶으로 연결되어야만 한다는 학문적 관점을 견지하였음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그의 많은 학문적 성과가 당시 불교계가 처해 있던 현실적 고민들과 맞닿아 있는 고민의 결과물이었다는 것은 이 점을 증거한다. 다시 말하면 그의 학문적 탐색은 시대의 문제에 대한 나름의 답변으로서 추구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한편 그는 학자로서의 삶에 못지않게 교화자로서의 삶에 충실했던 인물로도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십선운동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고 불교의 정신을 알리기 위해 소설을 집필한 인물이기도 하다. 학자적 입장에만 충실하려 했던 인물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환속을 통해서 오히려 세속에 가까이 다가서고, 그것을 통해 교화의 삶을 실천하고자 했던 인물로 바라보아야만 그의 학자로서의 삶이 가지는 독특한 측면이 부분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불교인으로서 민족 정신문화를 계승하고 그 향방을 탐색한 실천자로 기억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    

 

석길암 /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경제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졸업(철학박사). 주요 논문으로 〈기신론 주석서에 나타나는 여래장 이해의 변화〉 등과 《지론사상의 형성과 변용》(공저) 《불교, 동아시아를 만나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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