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 뽑은 선사들의 수행 어록

1.

한국불교의 전통에는 선(禪)의 가풍이 깊이 배어 있다. 선은 일상을 떠나 따로 불도를 구하지 않고 그 속에서 활발발하게 생동하고자 하는 점에서 교학 불교와 다른 역동성을 추구한다. 이는 대통신수와 더불어 6조의 자리를 두고 게송을 읊었던 혜능의 심게(心偈)와 그의 행적에서 잘 드러난다. 혜능 이후의 선종 5가는 각자의 가풍을 지닌 채 분화했지만, 그 속에는 늘 역동성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선종의 기치를 보여주는 표어가 바로 ‘불립문자 이심전심’이다. 문자는 이미 실질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고 개념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이므로, 선사들은 늘 문자와 깨달음을 혼동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방편 역시 현실에서 부정될 수 없으므로 그들은 또한 다양한 방편을 개시(開示)하기도 하였다.

선종의 역사를 본다면 선사들의 언행은 늘 개념적 문자와 실질적 깨달음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 행해지고 있다. 혜능, 혜충, 임제, 마조 등의 당대 선사들은 부처님의 말씀인 경(經) 역시 실제의 깨달음과는 이미 다른 차원의 것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법어 속에는 늘 부처님 말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문자로 된 방편을 사용할 경우 제일 훌륭한 것이 바로 부처님의 말씀인 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당 이후의 선종에서는 이러한 선종 조사들이 남긴 여러 법어와 대화들을 다시 ‘어록’이라는 형태로 전승하여 사람들을 선(禪)의 문(門)으로 이끄는 방편으로 사용했음은 다들 익히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전통을 한편에서는 ‘불리문자(不離文字)’라 부르기도 한다.

2.

한국 현대 불교에 있어 대선사로 선의 가풍을 드날렸던 성철 스님(1912~1993)은 대중들이 선에 입문하기 위해 읽어야 할 선서(禪書)들을 수십 종 선별하였는데, 이는 한글로 번역되어 1993년에 《선림고경총서(禪林古鏡叢書)》 총 37권으로 완간되었다. 저 육조혜능으로부터 흘러온 세월이 천 년도 훨씬 지났기 때문에 선종의 가풍이 어떻게 전해왔는지에 대해 정안조사(正眼祖師)들의 말씀을 거울로 삼아 오늘날의 선종을 다시 한 번 점검할 필요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나 《선림고경총서》 2집으로 원택 감역(監譯)의 《명추회요》가 간행되었다. 감역이란 전통적인 역경에서 역경 전반의 과정을 외호하고 보살피는 역할을 가리키는데, 이 책에서는 오랜 기간 이 책을 간행하겠다는 염원을 놓치지 않았던 감역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원택 스님의 발간사를 보면, 무척 생소한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성철 스님께서 1993년 입적하기 얼마 전에 번역해보라고 추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성철 스님이 《명추회요》의 한글 번역을 추진해보라고 한 이유는 이 책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 책이 근거하고 있는 《종경록(宗鏡錄)》에 대한 지대한 관심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성철 스님의 대표적인 저술인 《선문정로》의 제1장 견성즉불(見性卽佛)을 보면 이 장의 최초의 문구가 바로 《종경록》의 〈표종장〉에서 인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택 스님의 발간사에도 나오지만, 성철 스님은 《종경록》을 종문(宗門)의 지침으로 간주할 정도로 중시하였으며, 《종경록》에 나오는 견성성불(見性成佛)과 관련된 문구들을 일일이 뽑아서 《선문정로》의 견성에 대한 주된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런데 성철 스님이 《종경록》을 중시했던 더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선문정로》 등에서 일관되게 강조했던 돈오돈수설의 근거를 영명연수의 《종경록》에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설의 강조는 돈오점수설에 입각했던 고려의 보조지눌과 더불어 중국의 규봉종밀, 그리고 하택신회에 대한 비판에까지 이른다. 그간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설의 근거는 스님이 간행했던 《돈황본 육조단경》 등에서 주로 찾아졌지만, 《종경록》 역시 그에 대한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은 거의 간과되었다. 근래의 연구에 따르면, 영명연수는 《종경록》에서 규봉종밀이 마조 계통의 돈오선을 비판하면서 돈오점수에 입각하여 선종의 수행론을 재편했던 것을 다시 비판하면서 돈오돈수로 선종의 수행론을 건립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종경록》을 촬요한 《명추회요》의 한글 번역은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설의 근거를 동아시아 선종사라는 보다 큰 틀에서 볼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계기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3.

《명추회요》는 북송의 선사였던 회당조심(晦堂祖心, 1025~1100)이 말년에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의 《종경록》 100권을 읽은 뒤, 이 책을 늦게 접한 점을 한스럽게 여기면서 《종경록》의 요지를 다시 발췌해서 엮은 책이다. 회당조심은 이미 노년이었으므로, 그의 제자인 영원유청(靈源惟淸, ?~1115)이 이를 전담해서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100권 분량의 《종경록》을 10분의 1 정도로 줄인 《명추회요》 3권이 나오자, 제방에서 이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베껴 쓰는 과정에서 잘못된 글자가 나오기도 하는 등 여러 실수가 생겼다. 이에 영원유청이 정재(淨財)를 모아 이 책을 목판에다 새기게 된다. 이 책은 이후 중국에서 또 한 차례 복각되었고, 일본으로 전래되어 다시 판에 새겨지게 되었다. 현재 일본에는 《명추회요》의 목판 인쇄본이 여럿 전하는 반면, 우리나라에는 이 책이 전래되었다는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제목의 《명추회요》 가운데 명추(冥樞)는 ‘그윽한 지도리’를 말한다. 문이 움직이려면 반드시 지도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자체는 움직이지 않지만 문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바로 지도리이므로, 지도리는 사물의 핵심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그윽한 지도리’는 다름 아니라 ‘마음’을 가리킨다. 《종경록》은 ‘심경록(心境錄)’이라고도 불릴 만큼, ‘마음’에 대한 풍성한 논의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종경록》의 마음에 대한 논의 가운데서도 다시 요점을 추려서 간행한 책이 바로 《명추회요》이다.

《명추회요》는 《종경록》 100권 가운데 2권·35권·47권·53권·86권·87권·88권·97권의 총 8권을 제외한 나머지 92권에서 내용을 골고루 발췌하고 있다. 이번에 번역된 책의 목차를 보면, 《명추회요》의 여러 내용이 《종경록》 몇 권의 몇 번째 목판에서 인용되었는지가 아주 분명히 제시되어 있으며, 저본에는 없지만 인용된 내용의 주제를 뽑아서 소제목으로 보여주고 있으므로 독자들에게 독해의 편의성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의 목차에 나오는 소제목은 거의 350여 개에 달하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어디에서부터 읽어야 할지에 대해 막막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해제를 보면 《명추회요》를 좀 더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몇 가지 지침이 나오므로, 이를 참조하면 보다 편안히 이 책을 읽어갈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명추회요》의 형식적인 구조는 《종경록》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질문-대답-인증’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이 가운데는 대답 혹은 인증만 나오는 경우도 발견되지만, 대체적으로는 이 구조가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명추회요》 가운데 제기되는 질문 가운데 공감이 되는 부분을 위주로 살펴본다면, 그에 걸맞은 선사(禪師)의 대답과 경론에서의 인증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명추회요》에 나오는 ‘질문-대답-인증’의 구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성을 갖기 때문에, 독자가 마음 가는 대로 하나의 소주제를 택해서 읽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마치 바닷물의 맛을 보려면 아무 바다에나 가서 손가락 하나로 그 물을 찍어서 맛보면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명추회요》의 내용을 관통하는 원리에 대해 해제에서는 ‘관심석(觀心釋)’을 들고 있다. 이는 불경의 문구와 의미를 자기의 마음에 비춰서 되새기는 방식을 말한다. 영명연수의 《종경록》 〈자서〉를 보면 “일심을 거울로 삼아 만법을 거울처럼 비춘다(擧一心爲宗, 照萬法如鏡).”이라는 구절로 《종경록》의 편찬 의도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 세계의 온갖 법을 있는 그대로 비출 수 있는 거울로 연수는 ‘마음의 거울’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는 수행자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경론의 의미와 조사의 가르침을 생생하게 되새겨야 함을 뜻하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명추회요》의 350가지 주제들은 마치 여러 별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회전하듯이, 모두 ‘마음’을 중심에 두고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음의 거울을 제대로 잡고 있으면 어떤 형태의 가르침이 비춰오더라도 의연히 비출 수 있다고 한다.

4.

《명추회요》 그리고 그것의 기반이 되는 《종경록》은 모두 선사들의 작품이지만, 여기에는 선사들의 말씀뿐 아니라 불교의 다양한 경론이 인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사들이 왜 이렇게 많은 경론을 인용하고 또 많은 말씀을 남겼을까 하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선의 문으로 들어가게 하는 방편으로는 무엇보다도 부처님이 설한 경만큼 훌륭한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교(敎)는 선(禪)과 대립하는 것으로 기술되는 경향이 있지만, 좀 더 긍정적으로 본다면 교에는 오랜 시간 동안 불교도들이 그들의 이론과 수행을 판가름해볼 수 있는 기준들을 축적해두고 있기 때문에,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선종의 선사들이 오래전부터 행하던 방식이다. 그러나 그들이 늘 언어문자 자체는 실(實)이 아니라는 자각 속에서 이와 같은 문자의 방편을 자재하게 구사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언어문자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적극 활용하는 선사들의 방편문을 우리는 《선림고경총서》 2집인 《명추회요》에서 생생히 접할 수 있다. ■


박인석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조교수. 연세대학교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박사).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HK연구교수 역임. 주요 저서로 《영명연수 《종경록》의 ‘일심’ 사상 연구》가 있고, 〈《종경록(宗鏡錄)》의 관심석(觀心釋)〉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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