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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통한 유불(儒佛)의 교유 / 박동춘
[64호] 2015년 12월 01일 (화) 박동춘 dongasiacha@hanmail.net

1. 들어가며

차 문화가 단단한 토대를 구축하게 된 것은 불교와 차의 융합에 힘입은 바가 크다. 특히 선 수행에 차를 활용했던 것은 참선의 장애였던 수마(睡魔)를 해결하기 위한 것인데 이런 연유로 음다(飮茶)는 수행생활의 중요한 일상으로 자리 잡는다. 신라 말 도당구법승(渡唐求法僧)들은 차를 마시며 수행했던 수행의 풍습을 그대로 신라에 들여왔다. 선종 도입 초기에 들어온 차는 널리 확산되지 못했지만, 고려가 건국된 이후에 왕실과 귀족, 문벌 사대부의 차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이런 배경에는 불교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하사품이 차였을 만큼 귀한 물품이었다. 따라서 왕실이 주관한 팔관회, 수륙재에서 차는 왕이 직접 올리는 귀한 공양물이었으니 이는 차가 선진문물이라는 인식도 크게 작용하였다. 이뿐 아니라 차는 승려와 문인들의 교유에 중요한 매개물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음다 풍습을 주도했던 승려들은 대부분 다사(茶事)에 밝아 명전(茗戰)을 주관한 것은 수행승들이었다. 그러나 귀족화된 차 문화는 말기에 이르러 검박한 차의 본질에서 멀어졌으며 사치해졌다. 이로 인한 백성의 폐해도 심했다.
조선이 건국된 후, 고려 말의 사치했던 차의 폐단은 차를 민멸의 위기로 빠뜨리게 한 요인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차 문화는 고려에 비해 상대적으로 쇠락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 상황을 맞게 되었다. 무엇보다 왕실에서 차를 멀리하는 조칙이 내려진 것은 차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상실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불교의 사회적 영향력의 상실과 경제력 약화로 승려들이 차를 주도할 수 있는 여력이 사라졌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는 고려의 유습이 이어져 다수의 승려들과 사대부들 사이에서 차를 즐기며 교유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이런 풍습도 점차 사라져 소수의 수행승과 문인들에 의해 겨우 명맥이 유지되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차를 매개로 한 유학자와 승려들의 속 깊은 교유는 이어지고 있기는 했지만 미미해져 갔다.
조선시대의 차 문화를 시기별로 나누어보면 조선 전기와 양란(兩亂) 이후의 차 문화의 양상은 현저하게 달라지는 양상을 띤다. 아울러 조선 후기에는 이전의 시기보다 차를 향유하는 계층이 확연하게 바뀌는 모습을 드러냈지만 차가 유불(儒佛)의 교유에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는 것은 변화가 없었다. 결국 사대부의 시회나 사유의 공간에서 차를 즐기려는 풍습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조선 전기에 승려와 교유했던 관료들은 절을 찾아가 승려들과 차를 즐기며 시를 짓는 등, 차를 통한 유불의 교유가 이어지는 양상을 드러낸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급격한 사회 변혁으로 인한 혼란이나 경제난은 차 문화를 더욱 위축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러므로 양란 이후에 차 문화가 쇠락하게 된 것은 자연적인 사회현상이라 하겠다.
조선 후기 차의 아름다운 가치에 눈을 뜬 것은 연경을 출입했던 북학파들이다. 이들은 청나라의 문인들이 차를 즐긴다는 사실에 주목했으며 이로 인해 차가 선비의 수신에도 유용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이들의 차에 대한 관심을 충족시킨 것은 초의선사(1786~1866, 초의로 약칭)이다. 그는 대흥사에 전해진 선차(禪茶)를 발전시켜 경화사족(京華士族)의 차에 대한 호기심에 부응하였으니 이는 ‘초의차’를 완성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다산으로 약칭)은 차를 실용화하여 백성과 나라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 그는 강진으로 유배된 후 아암혜장을 만나 차의 실리를 알게 된 후, 더욱 차를 가까이하였다. 그가 만덕사와 대흥사 승려들에게 강학을 열고 사제의 인연을 맺었던 것은 차를 매개로 한 유불교유(儒佛交遊)의 새로운 유형이었다. 이뿐 아니라 그는 강진에 널려 있는 차를 주목하여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꾀했으나 이는 실용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차로써 백성을 이롭게 하려고 한 그의 애민관(愛民觀)은 괄목할 만한 것이다.
특히 조선 후기 차를 통한 유불교유를 실천한 인물은 추사 김정희(1786~1856)와 초의이다. 초의가 다산과 사제를 맺은 인연으로 유산(酉山) 정학연(丁學淵, 1783~1859)을 만났고, 유산을 통해 추사를 만났으며 이로 인해 초의는 경화사족들과 교유가 확대된다. 따라서 차는 서로를 배려하고 소통하는 데 도움을 준 매개물이었음이 이들의 교유를 통해 증명되기도 했다. 이뿐 아니라 경화사족들의 음다 풍속은 이들과 교류했던 중인(中人)들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차를 통한 유불교유의 확산을 의미한다. 이들이 나눈 유불교유의 자취는 시문과 간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본 논문에서는 조선 전·후기에 차를 매개로 교유했던 승려와 선비들의 돈독한 우정을 논의해보고자 한다. 그 밖에도 불교와 차의 융합으로 인해 차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토양이 만들어졌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이와 함께 고려시대 차를 매개로 한 유불교유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선 수행과 차의 융합

수행승과 유학자의 교유는 간단없이 이어져 왔다. 유학자와 수행승은 수행(修行)이나 수신(修身), 양생(養生) 등 탁마의 방식은 다르더라도 온전한 품성을 회복하려는 목표는 같다. 예를 들어 승려는 수행을 통해 해탈하고자 하며, 유학에 뜻을 둔 이들은 수신을 통해 온전한 성인을, 도가에서는 양생을 통해 신선이 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불가와 도가, 유학자는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오랫동안 교유해 온 것이다. 유불교유의 첫 장을 연 인물은 동림사의 혜원법사(慧遠法師, 334~416)와 도연명(陶淵明, 365~427), 육수정(陸修靜, 406~477)이다. 깊은 도리를 공감했던 이들이 보인 교유의 극치는 후대에 ‘호계삼소(虎溪三咲)’나 ‘삼소(三笑)’라고 칭송되었고 그림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고사(古事)가 후인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이 문제는 그 진위 문제를 떠나 이들이 보여준 유불의 꾸밈없는 교유가 후인들에게 얼마나 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이 활동했던 위진남북조 시대는 차가 널리 보급되었던 시기는 아니다. 양생에 차의 효능을 처음으로 응용한 것은 도가였다. 차가 머리를 맑게 하고 몸을 가볍게 한다는 점에 착안한 이들은 차를 이용하여 불로장생을 꾀하였다.
달마의 좌선 수행법이 확산된 이후 수행 중에 차를 마시는 것이 허용하게 되면서 차와 불교가 융합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수마(睡魔)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이는 봉연(封演)의 《봉씨문견록(封氏聞見錄)》에 다음과 같이 수록되었다.

남쪽 사람들은 차를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만 북쪽 사람들은 처음에 차를 마시지 않았다. 개원(713~741) 중에 태산 영암사에 있던 강마사가 선교를 크게 부흥시켰다. 잠을 자지 않는 것에 힘쓰고 저녁을 먹지 않았는데 차를 마시는 것만은 허락하였다. 사람들이 차를 품에 끼고 도처에서 차를 끓여 마셨는데 이로부터 바뀌고 본받아 마침내 풍속을 이루었다.

원래 차는 파(巴)·촉(蜀) 지역, 즉 양자강 중하류 일대의 강남 지역에서 마시기 시작하였다, 수나라가 대운하를 건설, 개통한 이후에 교통이 발달하면서 남방의 차가 북방에까지 그 영역을 넓히게 된다. 북방의 선원에 차가 소개된 것은 개원(開元) 연간이다. 수행 중 차를 마시며 잠을 쫓으려 했던 선원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수행과 융합된 차는 사원 생활에 빠질 수 없는 물품이었다. 이로부터 차는 불교문화의 상징처럼 인식되었다. 더구나 수행에 필요한 차를 자급자족했던 선원에서는 승려들이 수행의 여가에 차를 만들었기에 명차를 만들 토양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수행의 전통은 다사에 밝은 수행승이 양산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중국의 차 문화를 집대성한 육우(陸羽, 733~804)가 《다경》을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노력도 컸지만 묘희사 교연의 역할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당(唐) 대에 선종의 수행 승려들이 참선 수행에서 차를 마시는 것이 보편화된 듯하다. 특히 백장회해(749~814)가 수행자가 지킬 법규 《청규》를 만든 이후, 사원 의례에 차를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승려들이 수지해야 할 지물(持物)이 차였으니 수행승들의 수행 일상에서 차가 필수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다사에 밝은 승려들이 음다 풍속을 주도하는 경향을 나타냈으니 차가 불교적인 색채를 띠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겠다.


3. 차를 매개로 한 유불의 교유-고려시대 
 
차가 한국에 소개된 것은 신라 말로, 도당구법승들에 의해 유입된 외래문화이다. 선종의 유입 초기에는 차가 널리 확산되지 않았기에 일부의 수행승이나 불전의 올리는 공양물로 활용되었을 뿐이다.《삼국사기》에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다. 이로부터 성해졌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을 나타낸 것이다. 왕실과 귀족, 문벌 사대부, 수행승들에게 차가 알려진 것은 9세기 무렵이며 구산선문이 개창된 이후에야 귀족층으로 차의 애호층이 확산하였을 것이라 여겨진다.
특히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는 차 문화를 널리 알릴 수 있는 토양이 조성된 시기였다. 왕실에서 주관하는 팔관회나 수륙재에 왕이 직접 차를 갈아 부처님께 공양할 만큼 차의 위상은 높았다. 이뿐 아니라 차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귀품으로, 공신들에게 하사되었다. 따라서 고려의 차 문화는 왕실과 귀족, 문벌 사대부의 애호와 관심 속에서 든든한 조력자를 만났던 것이다. 아울러 풍부한 사원의 경제력은 극품의 차를 만들 수 있었던 힘이었다. 이로 인해 고려의 차와 다구(茶具)는 북송의 차 문화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차는 불교와 융합되어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하며 잉태된 문화였기에 태생적으로 차 문화는 불교적인 색채를 띨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려의 음다 풍습을 이끈 것은 승려였다. 따라서 고려시대는 사원을 중심으로 유불 교유가 가장 왕성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다사(茶事)에 밝았던 승려들은 빈번하게 시회(詩會)를 열어 차를 나누며 사대부들과의 교유를 이어나갔다. 차에 익숙한 문인들은 이를 통해 세상의 번거로움을 잊고, 자연과 하나가 된 일체감을 만끽하고자 하였다.이러한 사실은 임춘(林椿, 1148~1186)이 겸 스님과 나눈 사려 깊은 교유에서도 드러난다. 그와 교유했던 겸 스님의 행적은 자세하지 않으나 수행의 경지가 높고 차를 다루는 솜씨 또한 출중했던 듯하다. 이는 그가 쓴 〈희서겸상인방장(戱書謙上人方丈)〉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謙公俊逸叢林秀   겸공의 빼어남은 총림에서도 으뜸이고
玉骨巉巉淸且瘦   맑은 선골 꼿꼿하여 맑고 또 여위였네
佛祖家風傳雪竇   달마의 가풍이 설두에게 전해져
踞地便聞師子吼   (그가) 앉은 곳엔 문득 사자후가 들리네
默坐澄心牢閉口   묵묵히 선정에 들어 입을 닫은 채
不復談空還說有   다시는 공이니 유이니 말하지 않네
自知龐蘊一狂叟   미친 노인 방거사가 스스로 알고는
往往參禪來稽首   가끔 참선하러 와서 머리를 조아리네
祇笑西堂長禁酒   다만 서당에 오래도록 술을 금하는 걸 비웃고
誇我點茶三昧手   나에게 삼매의 솜씨로 차 내는 걸 뽐내네
石鼎作聲蚯蚓叫   돌솥에서 물 끓는 소리 일어나니
客遭水厄誰能救   수액 만난 객을 누가 구하리

겸 스님은 총림에서도 우뚝한 수행의 경지를 이룬 승려라 소문이 난 듯하다. 임춘은 자신과 교유하는 겸 스님이야말로 설두중현(雪竇重顯, 980~1052)뿐 아니라 달마의 가풍을 이은 승려라고 여겼다. 그래서 방 거사(? ~808)가 참선하러 와서 설두에게 머리를 조아리듯, 자신도 겸 스님에게 공손히 법을 청한다고 한 것이다. 겸 스님은 다사(茶事)에 밝았던 수행자이었으니 차를 다루는 솜씨가 삼매(三昧)의 경지에 이르렀다고도 했다.
당시 사찰을 찾아가 차를 즐기거나 함께 시를 지으며 고담을 나누는 일은 유자와 승려들의 교유에서 흔한 일이었다. 승려들과 깊이 교유했던 이규보(1168~1241)는 수십 편의 시문을 남겨 이런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시뿐 아니라 차의 안목에 일가견이 있었기에 승려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듯하다. 이런 사실은 그가 “운봉에 사는 늙은 규 선사가 어린 싹으로 만든 차를 보여주면서 차 이름을 지어달라고 하기에 유차라 하였다. 선사가 시를 청하기에 시를 짓는다(雲峯住老珪禪師 得早芽茶示之 予目爲孺茶 師請詩爲賦之)”라고 한 구절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특히 규 선사는 이규보에게 자신이 만든 차를 보내는 등, 이들의 교유는 차를 통해 더욱 돈독해졌다. 유불의 교유에 매개물이었던 차는 다분히 풍류적인 색채를 띠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운봉주노규선사(雲峰住老珪禪師)〉에서 “평생을 불우하여 만년을 탄식했는데/ 일품을 감상함은 오직 이것뿐이라/ 이름난 유차를 마시고 어이 사례가 없을쏜가/ 공에게 맛있는 봄 술을 빚기를 권하노니/ 차와 술 마시며 평생을 보내면서/ 오락가락 풍류놀이, 이로부터 시작하리”라고 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이를 통해 13세기 무렵에 차는 탄식을 씻어 주는 음료였다는 인식뿐 아니라 승려와 유자들의 교유에 풍류적인 요소를 지녔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유불의 교유에서 차는 서로의 뜻을 공유하는 것이 외에도 높은 절의와 이상을 공감하기 위한 대체물이었다. 또한 정포(1309~1345)의 〈종승색차(從僧索茶)〉에 “우습구나, 서생은 아무런 재주가 없어/ 아는 것이라곤 승원에게 차를 얻는 일뿐이네”라고 하여 문인들은 승원의 승려를 통해서 차를 얻으려 했던 것에서도 사원이 차 문화를 주도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지면 관계상 차를 애호했던 고려의 문인들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 몇몇만을 언급해 보면 이인로(1152~1220), 안축(1282~1348), 이제현(1287~1367), 이색(1328~1396) 등이 차를 즐겼다. 또 원천석(1330~ ?) 이외에도 삼은(三隱)으로 칭송되는 정몽주(1337~1391), 이숭인(1347~1391), 길재(1353~1419) 등은 중·후기에 차를 즐긴 사대부들이다. 특히 이행(1352~1432)은 차에 밝았으며 품천(品泉)에 일가견을 가졌던 인물이다. 수행승들 중에 다사에 밝았던 인물로는 혜심(1178~1234)이라든지 충지(1226~1292), 혜근(1320~1376) 등이 있었다. 특히 혜근의 〈백납가(百衲歌)〉에 “배고프면 밥을 먹고 목마르면 차를 마시고 피곤하면 잠을 잔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걸림 없는 수행승의 삶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고려 말 사치와 번다한 의례를 중시했던 차 문화는 극단적인 폐단을 드러낸다. 이 시기에는 맑고 투명한 차의 정수를 드러내지 못한 채 외식에 치중하는 말기적인 현상을 나타냈는데 결국 조선이 건국된 후 차를 즐기는 풍속이 쇠락한 것은 차 문화의 말기적 폐단도 하나의 동인(動因)이었다.


4. 차를 통한 유불의 교유-조선시대

조선시대의 정치이념은 성리학이다. 성종 연간에 수정 보완된 《경국대전》을 토대로, 실질적인 행정체계를 갖춘다. 이는 통치조직이 일단락되었음을 의미한다.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은 관직에 나아간 양반 계층이 정치, 문화, 경제를 실질적으로 움직인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불교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변혁기를 거치는 동안 음다 풍습도 변화되어 갔다.
고려 말 사치해진 차 문화의 말기적 현상은 지배층의 차에 대한 인식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게 한 요인이었다. 태종 16년(1416)에 선왕, 선왕후의 기신재제(忌晨齋祭)에 차를 올리는 것이 예에 맞지 않는다는 예조의 건의는 차에 대한 지배층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이 조치는 표면적으로 백성을 피폐하게 만든 것이 차라는 인식에서 나온 조치이지만, 보다 근원적인 연유는 차가 불교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차는 불교와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형성된 문화이다. 따라서 음다(飮茶)의 흥망성쇠는 불교의 부침에 따라 영향을 받아 왔다. 따라서 불교의 교세 위축은 차를 향유하는 계층의 감소로 이어졌으니 이는 그 실질적인 토대가 무너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고려 왕실과 다른 정치 이념을 구축한 조선의 통치 세력들은 차를 멀리할 수밖에 없는 그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이는 실로 차의 주요한 수요처가 사라진 것을 의미한다. 이런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도 일부의 문인들과 승려들은 차를 즐기며 차가 주는 위안과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였다.
조선 전기에 다사(茶事)에 밝았던 승려로는 보우(1509~1565), 휴정(1520~1604), 처능(1617~1680) 등이 있고, 조선 후기에 차를 즐기며 수행했던 유일(1720~1799)과 혜장과 그의 제자들, 초의와 그의 제자 등이 있었다. 이들은 시대의 환경에 맞추어 변화된 음다풍(陰茶風)을 만들었다. 특히 배불(拜佛)의 사회적인 기류 속에서도 조선 초기의 훈구 사대부들은 유불일리론(儒佛一理論)을 바탕으로 승려들과 적극 교유하려는 의도가 있어 승려들과의 교유를 배척하지는 않았기에 조선 전기의 차 문화는 고려의 여력이 어느 정도 이어질 수 있었다.
조선시대의 차 문화는 전기와 후기가 현저히 다른 양상을 띤다. 그러므로 그 편년을 대략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1) 조선 전기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 초기는 성리학을 토대로 정치 이념을 세웠지만 아직은 성리학을 기초로 한 통치체계와 사회윤리를 규범화하지 못한 시기이다. 따라서 유불의 교유는 상대적으로 위축되기는 했지만, 갑자기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성종이 통치체계를 갖춘 이후 사대부들의 배불 성향이 강해졌지만, 차를 애호하던 이들은 여전히 승려들과 교유하며 차를 즐겼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갈수록 차를 애호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조선의 건국 초기에 차 문화는 고려의 유습을 이은 승려들이 음다 풍습을 이끌었다. 고려시대에 비해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불교계이지만 승려들은 관료 사대부들과 어울리며 시회를 열고 차를 즐겼다.
함께 어울렸던 인물 중, 권근(1352~1409)은 매계 스님의 부탁으로 시권(詩卷)에 제발(題拔)을 쓰며 그 내력을 읊은 〈제매계상인송평전시권말(題梅谿上人送平田詩卷末)〉이나 〈오대산서대수정암중창기〉를 짓는 등, 승려들과 친근하게 지냈다. 이원(李原, 368~1429)이 허 스님에게 준 〈증허상인(贈虛上人)〉에는 이들이 차를 함께 마시며 소요했던 일단(一段)을 “적막한 봄 동산을/ 거니노라면 흥취가 일어나네/ 새벽엔 숲 속 헤치며 약초를 캐고/ 밤에는 대나무를 태워 차를 다리네/ 숲 속에 새는 긴 해를 희롱하고/ 가벼운 바람, 떨어지는 꽃잎에 부네/ 그대를 따라 자주 왕래하여/ 자리를 마주하고 함께 시를 읊으리”라고 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처한 입장을 초월하며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소요(逍遙)한 것이다. 더구나 곧은 대나무로 차를 다린다는 상징성은 탈속한 이들의 교유라는 의미 이외에도 맑은 차를 마셨기에 군더더기 없는 유불의 교유를 한껏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조선 전기의 시단(詩壇)을 이끌었던 서거정(徐居正)이나 한명회(韓明澮), 김수온(金守溫), 성간(成侃) 같은 제자를 기른 유방선(1388~1443)은 승려들과 차를 함께 마시며 담박하게 희유(戱遊)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증명곡상인(贈明谷上人)〉에서 “만나자마자 의지가 투합되어/ 지칠 줄 모르고 담소하네/ 샘물 길어 향기로운 차 달이고/ 광주리 열어 햇잣을 쪼개네”라고 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그가 유배되어 어려움을 겪을 때 그와 뜻을 나눈 명곡 스님이나 호 스님은 물질적인 후원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승려들이었다.
특히 조선 전기의 유불 교유의 모범적인 사례를 보인 것은 잠 상인(岑 上人, 1435~1493)과 서거정(1420~1488)이다. 한때 오세동자라 칭송되었던 김시습은 원래 유학자였지만 불가에 귀의하여 잠이라는 법호를 썼다. 손수 차나무를 가꾸고 차를 만들었던 그는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다승(茶僧)으로 손꼽힌다. 그는 고의(高意)를 나누었던 서거정에게 차를 보내며 속내 깊이 교유하였다. 따라서 서거정이 잠 상인을 위해 지은 몇 수의 시가 전하는데 특히 잠 상인이 보낸 차를 받고 이에 감사를 표한 시가 〈사잠상인혜작설차(謝岑上人惠雀舌茶)〉이다. 이 시는 유학자가 차를 즐기는 연유를 “한 번 마시매 만고의 울적함이 씻기고/ 두 번 마시매 십 년 묵은 고질병이 달아나니/ 어찌 노동의 ‘메마른 마음에 오천 권 문자’만 헤치랴/ 이백의 금간 시구 삼백 편도 구상할 수 있다네”라고 하였다. 그에게 차는 울적한 마음을 달래 주는 벗이며 병을 치료하는 약이었다. 더구나 차를 마시면 이미 잡것이 섞이지 않은 청정한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차는 심신을 투명하게 만들어 만권 독서로 다져진 심연한 학문 세계로 이끌어주는 정신 음료라 여긴 것이다. 이뿐 아니라 차를 즐기는 연유는 자신이 지향한 예술 세계를 완성해주는 촉매제이기도 하였다. 유불의 교유에서 차가 빠지지 않았던 중요한 연유는 여기에 있다.
이처럼 유익하였던 차가 문인들의 곁에서 멀어진 것은 양란을 겪은 이후이다. 차 문화는 정치적인 안정과 경제력이 뒷받침 사회에서 번성하였다. 그러므로 사회적인 혼란은 차가 발전될 수 없는 환경이다. 따라서 조선 중기 이후에는 승려들과 문인들 사이에서 향유되었던 차가 더욱 위축되어 민멸 위기에 놓였다. 이런 질곡의 시기를 거쳐 다시 실질적인 음다의 가치를 이해하게 된 것은 19세기이다.
 
2) 조선 후기
조선 후기의 차 문화는 전대와는 다른 형태를 띤다. 차를 통해 심신을 정화하고 탈속한 경지에 도달하고자 한 것은 조선시대 차를 즐긴 이들의 뜻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차 문화는 전기에 비해 차를 즐길 환경이 열악했으며 차를 아는 이도 드물었던 시기였다. 산간의 사찰에서 근근이 차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었을 뿐이다.
이런 환경에서 차를 자신들의 수신에 응용하며 차를 가까이하려 했던 이들은 청나라를 출입했던 경화사족들이다. 이들은 차의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으며 이들의 차에 대한 관심을 충족시켜 준 것은 초의이다. 초의는 대흥사의 선차를 이어 쇠락해진 차 문화를 복원한 인물로, 스스로 차의 이론을 정립하고 제다법을 연구하는 등 차의 연구에 매진했다. 그가 추사를 만난 후 신위(1769~1845), 홍현주(1793~1865), 이만용(1792~1701), 권돈인(1783~1859), 김조순(1765~1832) 등과 교유를 확대하며 이들의 차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냈으니, 차를 통해 유불의 돈독한 교유를 실천한 것이다. 특히 시문에 출중했던 초의는 경화사족들과 폭넓게 교유하며 차의 애호층을 확대시켜, 차를 통한 유불의 교유를 확고히 한 셈이다.
더구나 초의가 만든 ‘초의차’는 초의의 노력으로 완성된 명차(名茶)이지만 추사나 신위 같은 유학자들의 조언에 힘입어 완성된 차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당나라 육우가 교연을 통해 오묘한 차의 진수를 얻었던 것처럼 조선 전기 차를 주도한 것은 승려들이었던 반면에 후기에는 추사나 신위 같은 유학자들의 조언으로 초의차를 완성했던 것이다. 즉 조선 전기에는 차의 품평이나 안목에서 승려들이 뛰어났지만, 조선 후기 차 문화는 차에 안목에 높았던 유학자들의 조언에 의해 완성되는 등, 유학자들이 참여가 활발했다. 이런 현상은 승려들의 차에 대한 안목이 낮았다기보다는 유학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선진문물을 경험할 수 있는 여건이 열악했던 승려들의 처지와 낙후된 사원 차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한편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만덕사 아암혜장(1772~1811)을 만난 이후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된다. 특히 아암과 그의 제자들은 사의재(四宜薺) 시절의 다산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후원 세력이다. 물론 다산이 승려들에게 미친 영향은 컸다.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다산은 강학과 저술을 본격화하고 차를 자급자족하였다. 하지만 다산의 사의재 시절 차를 제공한 것은 아암과 그의 제자들이었다. 따라서 다산은 강진에서 차를 통해 전등계(傳燈契) 제자들을 얻어 자신의 의지를 따르고 이해하는 승려들과 사제(師弟)의 폭을 넓혔으니 이는 유불교유의 독특한 형태라고 하겠다.
이뿐 아니라 초의는 다산초당에서 다산과 학연을 맺은 후에 유산 정학연(1783~1859)과 교유한다. 초의가 추사를 만난 것은 유산의 소개를 통해서인데 이로 인해 초의와 추사는 평생의 지기를 얻게 된 것이다. 차를 통해 유불교유를 실천한 대표적 인물인 추사와 초의는 차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지기(知己)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추사의 넓은 인맥은 초의가 차 문화를 중흥할 수 있게 한 토대를 이룬 것이니 이는 차에 의한 유불교유의 토대가 탄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의는 유자들에게 전다박사(煎茶博士)로 칭송되었고, 유학자들은 초의차를 통해 우리 차의 우수성을 이해했다. 초의가 차의 이론을 정립하고자 《다신전》을 편찬하였고, 다시 《동다송》을 저술한 배경에는 차를 애호한 경화사족들이 있었다. 차를 즐기며 유불 교유를 아름답게 실현했던 다산과 아암, 그리고 초의와 추사, 신위, 유산 등은 실로 차를 통해 탈속과 해탈을 실현했을 뿐 아니라 소요(逍遙)의 여유로움과 예술을 완성하는 데 더없이 좋은 동반자였던 것이다. 이들의 음다풍은 중인 계층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이들의 시사회에 차를 즐기는 풍조가 생겼으니 조선 후기는 삶을 여유롭게 하는 차의 공덕이 넓게 응용되었던 시기였다 하겠다.


4. 마치며

조선 전기와 후기의 차를 통한 유불의 교유는 그 특성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조선 초기까지도 고려의 유습이 이어져 차를 공유하는 유불교유는 이어졌다. 이들은 차를 통해 번뇌를 해소하고, 심신을 정화하여 보다 맑은 정신세계로 나가고자 하였다. 이들이 지향했던 차는 결국 자신을 향상하려는 의지를 뒷받침한 매개물이었고 늘 곁에 두고자 한 동반자였던 셈이다. 따라서 역사의 부침 속에서도 차의 공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시대마다 다른 시류 속에서도 차를 주도한 것은 승려이다. 일시적으로 초의는 추사나 신위의 차에 대한 안목에 힘입어 초의차를 완성했지만, 이들의 차에 대한 관심을 충족할 수 있었던 것은 초의의 역할이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 불교계의 위상이나 수준이 열악했고, 상대적으로 유학자에 비해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환경이었지만 차를 실질적으로 가꾸고 발전시킨 것은 승려들이었다. 따라서 차가 불교문화를 상징하며 이를 통해 유불의 교유가 윤택해진 것은 변함없이 차의 공덕이었다. ■

 

박동춘 /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소장. 동국대 대학원 졸업(철학박사). 주요 논문으로 〈고려와 송의 차 문화〉 〈초의선사의 차문화관 연구〉 등과 《초의선사의 차 문화연구》 《우리 시대 동다송》 《추사와 초의》 《박동춘의 한국차 문화사》 등의 저서가 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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